|
'카노사의 굴욕'이라고 불리는 사건이 있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하인리히 4세가 교황,그레고리우스 7세에게 카노사에서 맨발로 삼일을 꿇어앉고 용서를 빈 사건이다. 우리 말로 하면 '석고대죄'쯤 될 듯 하다. 눈내리는 벌판에서 가족들과 함께 맨발로 삼일을 용서를 빌었다. 무슨일이 있었던 걸까? 물론 상식선으로는 알고 있다. 교회 개혁을 외쳤던 그레고리우스 7세와 황제의 권위를 이야기했던 하인리히 4세의 이야기 만이 아니라, 이들로 부터 시작된 중세 유럽의 가장 큰 사건 '십자군 전쟁'이 시작되었으니 말이다. '카노사의 굴욕'이라는 굴찍한 사건은 한발 뒤에서 들여다 보면 굉장히 재미있는 사건이다. 자신의 말을 안들었다는 이유로 '넌 아냐. 이제부터 기독교인이 아냐'를 외쳐버리는 교황이 있으니 말이다.
중세는, 그것도 유럽은 그렇게도 그리스도를 탄압했을때는 언제고 이젠 언제 그랬냐는듯이 교황의 말 한마디로 파면을 시켜버리니 아이러니한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이뿐은 아니겠지만, 우스운것은 사실이다. 젊은 황제의 석고대죄는 교황의 승리인것 처럼 보였다. 분명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누가 알았을까? 이일로 인해서, 그레고리우스 7세가 자신의 거처로 돌아갈수 없었다는 것을 말이다. 우르바누스 2세는 그레고리우스7세보다는 지략이 뛰어났었던 것 같다. 황제를 눈 속에 세워둠으로써 로마교황의 권위를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전 유럽의 그리스도교도들을 이슬람과의 전쟁에 내보냄으로써 로마교황의 권위를 과시하는데 성공했으니 말이다. 이렇게 '카노사의 굴욕'은 '십자군 전쟁'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지금은 '카노사의 굴욕'만 보려고 한다. 이책이 다루는 부분이 딱 거기 까지니까.
역사공화국에서 가장 유명한 변호사는 역시 김딴지 변호사와 이대로 변호사다. 이번엔 황제 하인리히 4세가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를 역사공화국 세계사법정에 세웠다. 직권남용과 명예훼손이란다. 하인리히 4세는 그레고리우스 7세로부터 생전에 받았던 굴욕을 깨끗이 씻고 황제로서의 명예를 회복 할수 있을까? 회복한다고 별반 달라질것은 없겠지만 말이다. 워낙에 '카노사의 굴욕'이 유명해서 그렇지, 자신의 아들에게 수모를 당한것에 대한 소송부터 거는것이 맞을텐데, 그 사건은 약하니 세계사 법정에서 다룰것 같지는 않다. 어쨌든, 억울했을 법 하기는 하다. 초기의 황제는 교황보다 종교적인 힘이 컸었으니 말이다. 세속 군주인 황제와 영적 군주라 할 수 있는 교황의 대립.
그들의 처음은 어땠을까? 하인리히 4세는 여섯살이라는 어린나이로 황제에 자리에 올랐다. 여섯살의 황제는 대부였던 힐데브란트를 아버지처럼 따랐다. 힐데브란트가 누구일까? 힐데브란트는 그레고리우스 7세의 세속명이다. 어린 황제는 어머니의 섭정과 교회의 성직자들을 보면서 힘의 논리를 익히게 된다. 이때부터 이들의 싸움이 시작된다. 주교를 황제가 뽑아야 한다는 하인리히를 보면서 그레고리우스 7세는 1075년에 '교회 법령'27개조항을 보내게 된다. 교황이 그리스도교 사회에서는 가장 강력한 권위자라는 내용으로 교황이 황제를 폐위할수도 있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교회 법령'27개 조항으로 굴욕을 느낀 황제는 1076년 1월 24일 보름스에서 교황을 폐위시키려 하지만 2월 22일 교황이 황제를 폐위시키고 파문령까지 내리면서 그 유명한 '카노사의 굴욕'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파문은 막아야 하니말이다.
'카노사의 굴욕'을 보다보면 '제 6차 십자군 원정'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된다. 독일 황제 프리드리히와 당시의 교황 그레고리우스. 이름이 같아서 일까? 열심히 그레고리우스는 프리드리히에게 파문 명령을 내리지만, 프리드리히는 너는 내려라, 나는 내 갈길을 갈련다 하면서 유유자작 한것을 보면 시대마다 이 파문의 힘도 다른 것 같다. 역시나 그레고리우스라는 세례명을 가진 교황은 독일황제에게도 두번씩이나 파문을 내렸으니 말이다. '카노사의 굴욕'사건은 이렇게 마무리 되는 것 처럼 보이지만, 뒷에서 또한번 뒤통수를 치고 싶어하는 하인리히 4세와 그레고리우스7세 덕분에 또 한번 폐위와 파문이 일어난다. 교황이 황제에 대한 2차 파문 후 싸움에서 교황쪽 군인인 노르만 군인들이 로마를 강탈하고 파괴하여 시민의 분노가 매우 커짐으로 인해, 전쟁에 승리했음에도 로마를 떠나 죽을때까지 로마로 돌아가지 못하더라도 표면상으로는 교황의 승리처럼 보였다.
'카노사의 굴욕'사건은 교황과 황제 모두에게 얻은 것과 잃은 것이 있는 사건이었다. 황제는 수치스럽지만 황제로 다시 복귀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교황은 속죄하는 양을 감싸 안은 관용을 베푼 것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정치적인 면으로는 모르겠다. 그레고리스우는 7세는 전쟁후 살레르노로 망명하여 죽음에 이르니, 어찌보면 그레고리우스 7세의 교회 개혁은 실패한 듯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개혁 운동은 다음 교황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실천되어 이후 서구 사회를 이끄는 주요한 교회 이념이 되었다는 것은 인정해야할 것 같다. '신이 전쟁을 바란다'는 교황의 한마디로 200년동안의 '십자군 전쟁'을 이어간것만 보더라도 말이다. 역사 속 사건들을 바라보다 보면 어느것 하나 그냥 넘어가는 것은 없다. 어떻게 엮이는 지는 시대가 바뀐후에야 알 수 있을지 모르지만, 역사의 씨실과 날실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하나씩 엮이면서 커다란 역사의 장을 만들고 있으니 말이다. 이래서 역사는 재밌다. 어디로 튈지 모르니 말이다. |
|
[자음과모음] 왜 하인리히 4세는 카노사에서 굴욕을 당했을까? : 하인리히4세 VS 그레고리우스7세 * 저 : 이영재, 이명재 중세 유럽을 이야기 하면서 황제/교황을 따로 생각하기란 참 어렵습니다.
하인리히 3세의 아들인 하인리히 4세는 매우 어린 나이에 황제에 오릅니다.
|
|
세계사법정 / 역사공화국 / 왜 하인리히4세는 카노사에서 굴욕을 당했을까 / 자음과 모음
‘카노사의 굴욕’으로 유명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가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습니다. 한 번도 아닌 두 번이나 자신을 폐위하고 파문시킨 것에 대한 명예를 회복하고 싶다는 군요.
서양 중세 역사는 기독교를 빼고 이야기할 수가 없지요. 그리스도교 초기 성직자인 주교들은 황제의 명을 받아 나랏일을 돌보고 그 대가로 영토를 받고, 황제는 주교들을 보호했습니다. 이러다보니 세속군주인 황제의 영향력은 교회의 변질을 가져오고 성직매매와 세속인의 성직자 서임을 금지한 클뤼니 수도원의 개혁을 모범삼아 그레고리우스 7세 교황은 교회의 세속화를 막기 위해 개혁을 시도합니다.
황제에 의해 서임된 주교들은 군사적인 봉사, 조언, 부조와 같은 일을 함과 동시에 교회업무를 집행, 관리, 봉사 일을 담당함으로써 진정 교회의 일을 할 수 없었지요. 때문에 교황은 황제의 성직자 서임을 완강하게 반대합니다.
허나 황제는 교회의 법령은 황제의 권한을 크게 위협하고 성직자의 권한이 황제의 것보다 우월함을 드러내는 처사라고 생각하며, 교황과는 상의 없이 비어있는 주교자리에 부적절한 인물을 배치하고, 교황에 반대하는 주교들과 제후들을 모아 회의 후 교황을 폐위하기로 결정합니다. 이에 황제의 권력이 커지는 것을 반대했던 제후들이 교황의 편을 들어 황제를 폐위하려하자 황제는 교황에게 카노사 성 앞에서 무릎을 꿇고 빌게 된답니다.
교황으로부터 사면을 받은 황제는 다시 권력을 찾지만 황제를 반대하는 몇몇 제후들은 또 다른 황제를 뽑아 대립하면서 결국 교황을 지지하는 세력과 황제를 지지하는 세력 간의 내전이 벌어져 교황편이 승리를 거두게 되지요. 하지만 교황 쪽 군인인 노르만군인들이 신성로마를 강탈하고 파괴하면서 이에 대해 책임을 지고 그레고리우스 7세는 로마를 떠나게 망명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사망하게 됩니다.
그레고리우스 7세의 교회개혁은 사실은 실패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의 개혁정신은 뒤를 이은 교황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서구사회를 이끈 교회이념이 되었습니다. 그레고리우스 7세의 교회개혁이 황제 권을 침해했다고 이의를 제기한 이번 재판은 증거가 불충분하여 기각하며.. 이번 사건은 황제와 교황 모두에게 득과 실이 있는 사건으로 당시 하인리히 4세에게는 시대적 상황을 냉철하게 보고 판단하는 눈이 필요했고 그레고리우스 7세에게는 보다 폭 넓은 지지를 확보하여 피해를 최소화하지 못해 피해를 끼친 사람들을 위해 기도와 봉사하는 시간을 갖기를 권고합니다~~ |
황제가 교황에게 무릎을 꿇고 빌었다는 사실만 놓고 보자면 상당히 흥미롭게 다가오는 것이 사실이다. 막강한 권력을 가진 황제를 무릎 꿇게 한 교황도 대단하다 싶지만 과연 황제는 무엇 때문에 요즘말로 굴욕이라 할 수 있는 그런 행동을 했을지, 그것이 의미하는 바와 그 이후엔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까지 세계사의 한 부분인 하인리히 4세와 그레고리우스 7세의 사건을 통해서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레고리우스 7세의 등장 이전까지 군주나 황제들은 교회의 성직자를 보호함은 물론이거니와 통제하며, 제국 교회 체제를 강화하고 있었다. 또한 직접 고위 성직자들을 임명하면서 교회를 자신의 권력 하에 둘 수 있던 시기였다. 하지만 그레고리우스 7세의 증장이후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한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군주와 황제에게 속해있던 종교권에 정치 영역에서까지 절대적인 힘을 갖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군주나 황제와 같은 정치적 간섭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고자 했던 프랑스의 클뤼니 수도원에서 일어나고 있는 개혁 운동에 깊은 영향을 받게 되고, 나아가 교황 중심의 그리스도교 공화국 건설을 구상하게 된다.
이에 반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는 아버지인 하인리히 3세의 급작스런 죽음으로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당연히 어린 황제인 하인리히 3세의 권력이 너무 약해서 고위 성직자들과 귀족 관리자 계층은 자신들의 이익을 채우는데 주력한다. 더욱이 주교와 수도원장을 선정하는 것 역시도 원래는 황제의 역할이였지만 힘이 약한 하인리히 4세이다 보니 이 마저도 고위 성직자들과 대 제후들에게 밀려나기 시작한다.
바로 이런 때를 노려서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교회 개혁을 주장하게 되고, 황제의 권한이던 성직자 임명권 마저 교회에 속하게 하려고 한다. 바로 이 일로 인해서 황제 하인리히 4세와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갈등하게 된다.
점차 입지가 좁아지는 하인리히 4세와 교회 개혁은 물론 교황권 강화를 외치던 황제와 교황 사이의 폐위와 파문은 어쩌면 예정된 수순이였을지도 모른다. 결국 하인리히 4세는 '카노사의 굴욕'이라고 알려진 대로 추운 겨울날 맨발로 무릎까지 꿇게 되는 것이다. 이에 하인리히 4세는 그레고리우스 7세를 직권 남용과 명예훼손으로 손해배상 소송을 걸어 역사공화국 세계사법정에 세우는 것이다.
양측의 엇갈리는 증언에서 우리는 그 당시 황제권과 교황권, 신성로마 제국의 제후들에 관련된 많은 이야기를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비록 후대인에게 굴욕적인 모습으로 남아 있는 하인리히 4세의 손해배상 청구는 기각되지만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청구 기각 사유는 보다 많은 것을 깨닫게 해 줄 것이다. |
|
《왜 하인리히4세는 카노사에서 굴욕을 당했을까?》 하인리히4세 vs 그레고리우스7세, 로마 황제 하인리히4세는 '직권 남용죄'와 '명예 훼손죄'를 이유로 교황 그레고리우스7세를 역사공화국 세계사법정에 세운다. 자, 오늘도 영혼법정에서 판사이자 배심원 또는 방청객이 되어 그들의 자잘못을 판단하고 누구의 손을 들어줄지 판결을 내려볼까? 참! 그전에 <카노사의 굴욕>이 무엇인지부터 알아봐야겠다. 카노사의 굴욕이란, 주교를 임명하는 서임권을 둘러싸고 신성로마제국(독일) 황제와 교황과의 싸움에서 교황이 승리한 사건을 말한다. 하인리히4세는 아버지인 황제 하인리히3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해 6살이란 어린 나이에 황제 위에 오르게 된다. 당연한 결과로 어린 황제의 힘은 약해지고 귀족들의 힘이 강해질수밖에 없었다.
![]()
1편.《왜 이집트 인들은 피라미드를 지었을까》를 시작으로 20편.《왜 십자군은 예루살렘으로 떠났을까》까지 읽어왔으며 이책 19편.《왜 하인리히4세는 카노사에서 굴욕을 당했을까?》를 읽어가고 있다. 역사공화국 세계사법정을 통해 수많은 세계적인 인물들을 만나볼수 있었으며 그들의 억울한 사연을 알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다른 역사소설등을 통해 한국사법정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쉽게 접근할수있었던 것에 반해 세계사법정에 등장하는 사람(아니 영혼)들이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다. 순자와 맹자, 부차와 구천, 진시황과 사마천, 항우와 유방, 조조와 유비, 악비와 송 태조 등 중국 역사에 이름을 날리고 있는 대표적인 인물들도 등장한다. 나관중의 소설인《삼국지연의》를 통해 널리 알려진 조조와 유비도 유명인물이지만 내게 있어 가장 관심의 대상이 되는 이는 부차와 구천이다.
그레고리우스7세 중세교회개혁운동을 지도하고 로마 교황권의 전성기를 이룩한 교황(1073~1085). 개혁이념은 세속 권력에 대한 교황권의 우월, 교회의 통일, 이를 위한 성직자들에 대한 규율의 확립에 있었다. 1075년 27개조 교황령을 발표하였다.
하인리히4세 중세 독일 잘리에르왕조 제3대 국왕, 신성로마제국 황제(재위 1057∼1106). 모후 아그네스의 섭정 때 상실한 왕령(王領)의 회복을 위해 지방제후들과 대립, 반란을 초래했다. 그 와중에 교황 그레고리오 7세와의 사이에서 서임권(敍任權) 문제로 충돌하여 파문을 당하고, 궁지에 몰리자 교황에게 사면을 간청하여 겨우 파문의 해제를 받은 이른바 ‘카노사의 굴욕’을 겪었다.
![]()
세계사법정 19호 하인리히4세 vs 그레고리우스7세의 재판을 맡은 판사는 정역사다. 오늘도 역사속 영혼들의 나라인 역사공화국에서 억울한 영혼이 한 명도 없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는 김딴지 변호사는 자신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하인리히4세'라며 억울한 일을 당했는데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며 찾아온 하인리히4세의 변호를 맡게 된다. 딴지걸기의 명수인 그는 이대로 변호사를 상대로 하는 이번 재판에서 과연 승리를 거둘수 있을까? 교황 그레고리우스7세는 왜 교회를 개혁하려 했을까? / 황제 하인리히4세는 왜 교황에게 파문당했을까? / 교황과 황제는 왜 싸움을 멈추지 못했을까? 라는 주제를 가지고 삼 일에 걸쳐 재판은 벌어진다. 교황 그레고리우스7세는 두번에 걸쳐 하인리히4세를 파문시킴과 동시에 황제의 자리에서 폐위시키려 했던 반면, 하인리히4세도 교황을 폐위시키리려 했다.
![]()
황제나 군주의 몫이었던 성직자 임명권이 교회개혁이라는 명분하에 교황에게로 넘어가며 벌어진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카노사의 굴욕'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하인리히4세의 아버지인 하인리히3세는 교회의 개혁 운동을 지원해왔음에도 성직자 임명권을 이용 실베스터 3세 교황과 그 뒤를 이은 그레고리우스6세 교황을 폐위시키는 일을 했다는 것이다. 물론 그들의 폐위 이유로는 성직 매매를 했다는 것이고 그런 그가 아들이 아닌 그레고리우스7세의 증인으로 나서는 것으로 교황권과 황제권 중 교황권을 선택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 김딴지 변호사의 변론이고 나 또한 그의 말에 공감한다.
[판결문] 역사공화국 세계사법정은 황제 하인리히 4세가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를 상대로 제기한 직권 남용과 명예훼손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를 기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