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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으면서도 없고 없으면서도 있는 것들.
가을밤 하늘에 보이지 않는 소 한 마리가 달을 끌고 간다. - 시인의 말 中 -
[ 저녁이 젖은 눈망울 같다는 생각이 들 때 ]
침묵이 아직 오지 않은 말을 더 빛내듯 보지 않은 풍경을 살려낼 때가 있다
바보의 무구한 눈망울을 보았을 때 마음의 뒤란에 가꾸고 있는 것이 많을 때 뒤를 만지듯 얕은 것보다 깊은 것들을 살려내는 눈
황소의 젖은 눈처럼 저녁이 온다 꿈벅거리는 큰 눈 속으로 땅거미가 진다 땅속이 환해서 뿌리가 자란다
어둑어둑해지는 저녁 길을 걷다보면 풍경 속에 또 다른 풍경이 들어 있는 것 같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언젠가 만난 것만 같은 어스름녘 젖은 하늘의 눈망울 물끄러미 등 뒤에 서서 기억나지 않는 어젯밤의 꿈과
생각날 듯 달아나버리는 생의 비밀들이 그림자에 어른거리다 사라진다 잡히지 않으며 존재하는 것 만져지지 않으며 살고 있는 것들이 불쑥불쑥 잘못 튀어나왔다가 제자리로 되돌아가는 시간 그 밝음과 어둠이 섞이는 삼투압 때문에 뼈가 쑤시는 땅거미가 질 무렵
[ 당신이 다시 오시는 밤 ]
누가 환생을 하는가보다 봄밤 달에서 떨어지는 꽃향기가
목이 멘다 내가 알았던 생이었나보다 기우뚱 떠오르려다 사라지는 나뭇가지 위 달이 밀어내는 꽃봉오리가 뜨겁다 이 밤에 당신 무엇으로 오시는가 목이 꺾이도록 달을 바라보다가 저 달 속에 그만 풍덩 몸을 던져 당신이 오고 있는 길 그 생 쫓아 다시 오고 싶다
눈이 내린다 누군가 지상에 살며 저녁마다 켰던 등불이 내린다 어느 목련꽃 속을 지나왔을까 환하다 그 고요한 흰 미소 너머 있으면서도 없고 없으면서도 있는 설국 지붕마다 열 뼘 두께 눈이 쌓이고 며칠째 발이 묶인 주점 등불 아래 누군가 술을 마신다 맑은 술잔에 담긴 설원(雪原)속으로
멀어져가는 불빛 한 점 그리움으로 이어지는 밤의 긴 머리카락 하얗게 사랑해 하얗게 적멸이 되어 돌아오는 말과 꽃봉오리 속에 같혀 지샌 눈의 날들 너무 환해 기억이 나지 않아 밤에도 하얬다
[ 허공 속 풍경 ]
허리둘레가 넓은 어머니처럼 든든해 보이던 장독 항아리들과 병정 같은 펌프가 우뚝 서 있던 마당 툇마루에 모이던 햇빛이 담장을 넘어 지붕 위로 올라갈 때마다 할머니는 아깝다며 소쿠리에 말릴 나물들을 더 얹었다 햇빛이 아까운 것이 아니라 남은 생이 아까웠던 할머니 온몸을 부지런히 움직이며 반지르르 닦아놓은 경대 위로 세월이 비껴가는 줄만 알았다
어른거리는 골목 너머 장독대 너머
제비들이 처마밑으로 몰고 오던 씨줄의 공간 날줄의 시간들이 잡히지 않는 풍경으로 남아 있는 저 허공 속 환영(幻影)이야
[ 삶을 문득이라 불렀다 ]
지나간 그 겨울을 우두커니라고 불렀다 견뎠던 모든 것을 멍하니라고 불렀다 희끗희끗 눈 발이 어린 망아지처럼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미움에도 연민이 있는 것일까 떠나가는 길 저쪽을 물끄러미라고 불렀다
사랑도 너무 추우면 아무 기억이 나지 않을 때가 있다 표백된 빨래처럼 하얗게 눈이 부시고 펄렁거리고 기우뚱거릴 뿐 비틀거리며 내려오는 봄 햇빛 한줌
나무에 피어나는 꽃을 문득이라 불렀다 그 곁을 지나가는 바람을 정처 없이라 불렀다 떠나가고 돌아오며 존재하는 것들을 홀연 흰 목련이 피고 화들짝 개나리들이 핀다 이 세상이 너무 오래되었나보다 당신이 기억나려다가 사라진다
언덕에서 중얼거리며 아지랑이가 걸어나온다 땅속에 잠든 그 누군가 읽는 사연인가
... 소/라/향/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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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대웅이 14년 만에 내는 시집이라고 한다. 그런데 나는 그의 14년이라는 공백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항상 그의 시를 읽으며 살지는 않았는데도 말이다. 꾸준히 들어온 이름이라서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한다. 너무 익숙한 이름의 시인, 오래전부터 본 느낌의 가까움. 시라는 것도, 권대웅이라는 시인도 잘 모르는데 출간 소식이 반가웠던 건 아마도 그런 이유가 아닐까 싶다.
휘어진 길 저쪽
세월도 이사를 하는가보다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할 시간과 공간을 챙겨 기쁨과 슬픔, 떠나기 싫은 사랑마저도 챙겨 거대한 바퀴를 끌고 어디론가 세월도 이사를 하는가보다
(중략)
어디로 갔을까 그 세월의 바퀴는 장독대와 툇마루와 굴뚝을 싣고 아버지의 문패와 배호가 살던 흑백텔리비전을 싣고 초저녁별 지나 달의 뒤편 저 너머 어디쯤 살림을 풀어놓은 것일까
(중략)
내 마음속 깊은 골목 맨 끝 집 등불 속에 살고 있는 것들 오, 어느새 그 속으로 이사와 아프고 아름답게 반짝이며 자라고 있는 세월들
누구나 다 사는 여름이라는 계절에, 그 계절이 가고 있던 끝자락에 세상에 나온 시집이다. 그래서일까. 가을의 한복판에서도 아니고 다 지나가지 않은 여름의 끝자락이었다는 시간에 만났음에도 서늘했다. 별거 아닌 것처럼 들리던 시 구절에도, 시간을 건너뛰어 쓸쓸해지는 가을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기분이 들 때가 많았다. 우리가 살다 간 그 시간, 그 공간. 하나였다가 흩어지기도 하면서 사는 게 우리 인생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또 '따로'가 되는 각자의 인생이라고 받아들이기도 했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돌이켜보니, '따로' 또 '같이' 살아가는 순간들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들고...
은근, 시간에 대해 생각하게도 한다. 시의 구절로 그가 전하는 사랑의 감정도 있지만, 이상하게도 내가 만난 이 시집의 느낌은 시간과 세월, 붙잡고 싶은 어느 한순간을 자꾸 떠올리게만 했다. 평범한 일상에서 겪는 많은 일이 스르륵 스며들듯이 파고드는. 서로 다른 사람인데도 마치 같은 시간을 살아온 것처럼 같이 흐르다가, 갑자기 멈추곤 한다. 다음 이야기가 무엇일지 몰라서 궁금한 것보다는, 무슨 이야기로 또 심장을 '쿵'하고 떨어지게 할까 하는 걱정 때문에.
착불(着拂)
이 세상에 나는 착불로 왔다 누가 지불해주어야 하는데 아무도 없어서 내가 나를 지불해야 한다 삶은 매양 가벼운 순간이 없어서 당나귀 등짐을 지고 번지 없는 주소를 찾아야 했다 저녁이면 느닷없이 배달 오는 적막들 골목에 잠복한 불안 우체국 도장 날인처럼 쿵쿵 찍혀오는 살도록 선고유예 받은 날들 물건을 기다리는 간이역의 쪽잠 같은 꿈이 담벼락에 구겨 앉아 있다 꽃은 아름답게 피어나는 것으로 이 세상에 온 대가를 지불하고 빗방울은 가문 그대 마음을 적시는 것으로 저의 몫을 다한다 생이여! 나는 얼마나 더 무거운 짐을 지고 걸어야 나를 지불할 수 있는가 얼마나 더 울어야 내가 이 세상에 온 이유를 알 수 있을까 모든 날들은 착불로 온다 사랑도 죽음마저도
내게 주어진 시간, 삶을 착불로 살고 있다고 생각하니 덜컥 겁이 나더라. 얼마나 어떻게 지불해야 하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잘 모르겠다는 변명을 하면서 몇 번을 곱씹어 계속 같은 구절을 맴돌았다. '모든 날들은 착불로 온다'는 말이 이렇게 무섭고 무거울 수 있을까. 그러니까, 나는 지나온 모든 시간과 지금 숨 쉬는 순간들의 대가를 잘 지불하고 있는 것인지 묻고 싶어진다. 분명한 대답을 할 수 없어 부끄럽다고 생각하면서도 소리 내지 못하고 자꾸 묻고 있다. 갚아야 할 빚을 떠안고 있는 느낌으로 말이다. 지금 사는 이 모든 순간에 부채감이 쌓이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 생이 더 묵직한 느낌이다. 잘 살아야 하는데, 잘 살아서 그 채무를 갚아야 하는데...
생의 정면(正面)
어느 순간 와락 진저리쳐질 때가 있다
허리를 굽히고 마당을 쓰는데 머리 위로 쓰윽 이상한 바람이 지나간 것 같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아무 일 없듯이 가을 하늘 너무 푸르고 맑을 때 힘이 없는데 정면으로 맞장떠야 할 어느 한순간이 올 때 아무도 지나가지 않는 뙤약볕 시골길 흰 적막이 가득 들어 있을 때 맑은 정신으로 눈이 떠진 새벽 오로지 홀로 나와 맞닥뜨릴 마지막 시간이 떠오를 때
홀연 엄습하는 생의 낯섦을 견디며 불안한 영혼들이 숙연해지고 고요해져간다
묻고 또 물어도 답을 할 수 없다는 걸 알고 고개를 숙이게 될 때, 그래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계속 물어야 한다고 생각이 들 때, 마치 이미 답을 알고 있지 않으냐고 말하는 것처럼 다가온 시가 「생의 정면」이었다. 시의 구절들을 읽다 보면 정말 울고 싶은데, 결국은 그런 생의 받아들임이 아니라면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는 푸념처럼 들려오더라. 어느 순간 와락 진저리쳐지더라도, 그런 낯섦까지 견디는 게 우리가 살아온 시간이 아니었느냐는 물음처럼, 이미 알고 있지 않았냐는 대답처럼. 잠깐 잊었더라도 다시 기억나기 마련이라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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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오기 전, 시린 어느 날 만났던 시집은 여름의 끝자락에 다다라서야 빛을 봤다. 제목만 보면 여름만 담은 듯 하지만, 여름 뿐 아니라 사계절이 담겨있는 시집이다. 어느 계절이나 아리게 느껴지는 건 내 기분 탓이겠지만, 유독 여름이 아련하게 느껴지는 것 또한 그러겠지. 사실, 그 어느 한 날도 특별하지 않은 날은 없다. 행복하기도, 슬프기도, 아프기도, 그저 평온하기도 한 그 모든날이 내게는 더없이 소중하고 특별하니까. 그 중 몇 문장은 꽤나 곱씹어보게 했다. 여전히 시집은 어렵지만, 무슨 생각으로 체크를 했는지 시간이 지나면서 또 불분명해지기도 했지만! 역시나, 필사한 문장을 보면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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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린다. 가을은 절명 직전이다. 여름은 기억조차 흐릿하다. 여름에도 내렸던 비가 가을에도 내리고 있다. 가을에 내리기 시작한 비가 겨울에 떨어져 내릴는지도 모른다. 오늘 집을 나가면 오늘 집으로 돌아오는 생활에 익숙해진지 오래다. 오늘도 오늘 집을 나갔고 오늘 집으로 돌아왔다. 집을 나갈 때 눈여겨보았던 집이 집으로 돌아온 다음에도 그대로이다. 나는 스스로 생각해도 의아한 삶을 살았던 적이 있다.
권대웅 / 나는 누가 살다 간 여름일까 / 문학동네 / 103쪽 / 2017 (20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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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소 가는 길 아득한 한 뼘 이 좋았다
* 다정한 사람 같다
* 굉장히 미묘하게 아쉬운 지점들이 있었다
* 또 한편 좋은 구절도 많았다
* 고요의 희미한 빛에 세 들어 당신과 내가 살다 간 방
* 정처 없이 가난했던 사랑은 따뜻한 날이 와도 늘 시리고 춥다
* 이 세상에 나는 착불로 왔다 누가 지불해주어야 하는데 아무도 없어서 내가 나를 지불해야 한다 삶은 매양 가벼운 순간이 없어서 당나귀 등짐을 지고 번지 없는 주소를 찾아야 했다
* 당신이 사는 집으로 달려가다가 그만 돌이 되었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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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나는 감성과 독해력이 부족하다는 생각에 시를 읽는 다는 것에 엄두를 내지 못했는데 '나는 누가 살다 간 여름일까'라는 제목에 이끌려 들어가고 말았다. 다행히 권대웅 시인의 이 시집은 누구나 느낄 수 있는 보편적 서정을, 누구나 이해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언어로 표현하고 있어서 편안한 마음으로 감상 할 수 있었다. 이 시집에 수록 된 62편이 다 좋았지만 더욱더 오래도록 내 마음을 뭉클하게 하고 있는 한편을 소개할까 한다. 제목 : 착불 이 세상에 나는 착불로 왔다 누가 지불해 주어야 하는데 아무도 없어서 내가 나를 지불해야 한다 삶은 매양 가벼운 순간이 없어서 당나귀 등짐을 지고 번지 없는 주소를 찾아야 했다 저녁이면 느닷없이 배달 오는 적막들 골목에 잠복한 불안 우체국 도장 날인처럼 쿵쿵 찍혀오는 살도록 선고유예 받은 날들 물건을 기다리는 간이역의 쪽잠 같은 꿈이 담벼락에 구겨 앉아 있다 꽃은 아름답게 피어나는 것으로 이 세상에 온 대가를 지불하고 빗방울은 가문 그대 마음을 적시는 것으로 저의 몫을 다한다 생이여! 나는 얼마나 더 무거운 짐을 지고 걸어야 얼마나 더 울어야 내가 이세상에 온 이유를 알 수 있을까 모든 날들은 착불로 온다 사랑도 죽음마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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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때문에 골랐다는 사람을 보았다. 젖다슴 등의 단어 때문에 불편하다는 글도 보았다. 나는 나대로 보았다. 잘 모르겠다, 가끔 가슴이 먹먹해지곤 했다. 이번의 생과 이 전의 생에 대해 골몰하는 시.침묵에도 소리가 있다고 말하는 시. 그 시간이 되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들이 있다이 세상을 떠나고 싶지 않았던 울음혼자서만 너무 그리워했던 눈빛억장이 무너져 쌓인 적막꽃들의 그림자와 떠나지 못한 햇빛들이쪽으로 올 수도 없고저쪽으로 가지도 않으며현재와 과거와 미래 사이를 서성이는 응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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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에 와닿는 시들이 다수 수록되어 있네요^^
작품 일부)
- 북항 : …눈이 내리고 눈이 쌓여/ 오도 가도 못하는 북해에/ 백발의 노모가 혼자 저녁을 짓는다/ 들창너머 목련나무로 배가 들어온다/ 겨우내 단 한마디도 하지 못했던/ 말이 터진다…
- 모과꽃 지는 봄 : … 꽃 속으로 구름이 흐르고/ 수많은 봄이 지나가고/ 봄이 내리는 저녁이면/ 어느 알 수 없는 먼 공간에 불이 켜진다…
- 수목장 : … 또다시 나뭇잎은 떨어지고/ 햇빛과 빗물과 추억은 날아가/ 살아남은 것들의 들숨이 되고 치유가 되어/ 이 세상 천지간 무소유로 된/ 나무에게로 가리…
- 여름 : … 그림자 한 점 없는 뙤약볕 시골길을 걷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미루나미 꼭대기/ 파란 연못에 내 전생이 환하게 보이다/ 까무룩 구름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아무도 없는 시골길/ 너무 환한 생의 정면과 적막이 무서워 울었다.
- 설국 : 눈이 내린다/ 누군가 지상에 살며 저녁에 켰던/ 등불이 내린다/ 어느 목련꽃 속을 지나왔을까/ 환하다/ 그 고요한 흰 미소 너머/ 있으면서도 없고/ 없으면서도 있는/ 설국/ 지붕마다 열 뼘 두께 눈이 쌓이고/ 며칠째 발이 묶인 주점 등불 아래/ 누군가 술을 마신다/ 맑은 술잔에 담긴 설원속으로/ 기차가 달린다…
- 아득한 한 뼘 : ... 그리움은 오래 되면 부푸는 것이어서/ 먼 기억일수록 더 환해지고/ 바라보는 만큼 가까워지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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