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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노동과 행복은 어떤 관계일까? 노동과 존엄성은 무슨 관계일까? 노동을 덜할수록 더 행복해질까, 아니면 노동을 더 할수록 더 행복해질까? 실업은 인간의 존엄에 얼마나 큰 상처가 될까? 엄격하게 말해서 노동은 짐이면서 동시에 선물이다. 노동은 목표가 아니라 다만 수단일 뿐이다. 우리가 죽을 때 더 많은 일을 못하고 죽어서 후회하는 사람은 없다. 수많은 실업인구와 비정규직 노동자를 고려한다면 요즘 노동은 선물이지 결코 짐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오늘날 직업은 사람들에게 정체성, 구원, 삶의 목적과 방향성, 공동체의 소속감을 주는 세속의 종교가 되었다.
서점에 가면 과도한 노동과 줄어드는 여가시간에 관한 글은 차고 넘친다. 한때 많은 똑똑한 인물들이 '더 적은 노동시간 더 많은 자유시간'이라는 장미빛 미래를 점쳤다. 그런데 기술과학의 발달은 노동시간을 단축시켜 여가시간을 늘려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노동시간과 여가시간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전천후 노동의 시대를 가져왔다. 과학기술의 발달에 따라 20세기 말이면 노동시간이 하루 두 시간으로까지 줄어들 것이라고 내다본 조지 버나드 쇼와 줄리언 헉슬리 같은 지식인의 예상은 오류로 판명되었다. 오늘날 소비주의의 발흥, 자본주의의 구조적 속성, 노동과 일이 차지하는 지위의 변화 등이 과다노동을 오히려 합리화하고 가치절상하고 있다. 물론 문제는 노동의 시간이 아닐 수 있다. 솔직히 노동의 종류가 노동의 시간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임금노동도 중요하지만 보다 자율적인 자활노동을 더 중시하고 싶다. 인간이 인간다운 사회를 꾸려나가는 데는 자활노동이 임금노동보다 더 핵심적이기 때문이다.
6시간 노동제는 1931년 4월 1일 출생하여. 1985년 2월 8일 사망했다. 켈로그 노동자들은 50여년간 6시간만 일해도 충분했다. 대공황에 허덕이던 1930년대 미시건 주 배틀크리크의 「켈로그」 공장은 기존의 8시간 3교대제를 6시간 4교대제로 전환하는 획기적인 안을 제시한다. 배틀크리크 지역의 해고 노동자와 실업자들을 위한 일자리 창출을 위해서였다. 시간 노동제가 현실성 있는 불황 타개책이면서 지난 한 세기 동안 지속돼 온 노동 시간 단축 추세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오늘날의 선진국가들의 경우와 비교해보더라도 이는 무척 대담하고 진보적인 기획이 아닐 수 없다. 예를 들어 프랑스는 1997년 2월 근무시간을 주 39시간에서 주 35시간으로 변경한 오브리 법안을 통과시켰고 2000년 2월부터 주35시간 근무제를 시행해오고 있다. 솔직히 각 업계마다 최적의 노동시간을 산출해 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매 업계마다 필요한 최적의 업무시간이 존재하리라 본다. 마치 근력운동도 온종일 땀흘리는 무대뽀보다는 최적의 운동시간과 간격이 존재하는 것과 같다. 저자는 노동자들의 인터뷰와 경영진의 수기, 언론 보도 내용을 중심으로 생생하게 당시의 기억을 되살려내고 있다. 특히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6시간제를 끝까지 지지했던 노동자들의 ‘자유의 언어’라는 화법이다. 그들은 ‘추가적인 두 시간’에 자신이 한 일을 묘사하면서 “~을 할 수 있는 시간”이라는 식의 ‘자유의 언어’를 주로 사용했다. 반면 8시간 노동자들은 “불가피”하다거나, “해야만 한다”라는 식의 ‘필요의 언어’를 사용하며 그들의 입장을 정당화했다. 저자는 ‘표준 8시간제의 정착’을 ‘필요의 언어’가 ‘자유의 언어’를 잠식해 가는 과정으로 설명한다. 여기서 필요란 곧 자본의 필요다. 따라서 「켈로그」 공장 6시간 노동제의 역사는 노동이 여가를 몰아내고, 개인의 자유를 경제 성장이라는 논리가 압도해 가는 과정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모처럼 친정집에 놀러온 것과 같은 편안과 안락함을 만끽했다. 10여년간 내가 공부한 이념, 이론, 가치관, 방법론 등이 이 책에 그대로 녹아들어 있음을 발견한다. 이 책의 전제와 내용 그리고 주장들은 내게는 너무나 친숙하고 반가운 것이었다. 심지어 참고문헌의 저자들마저 반가운 인물이었다.
마르크스의 상부구조와 하부구조의 눈을 통해 이 책을 본다면, 저자는 하부구조보다 상부구조의 자율성과 결정적 역할에 더 주목하고 있다. 달리 말해서 경제결정론과 문화결정론이라는 두 극을 생각해볼 경우, 경제결정론의 시각에서는 노동과 여가에 관한 경제적 현실들이 경제적으로 구성된다. 그러나 문화결정론의 시각에서는 노동과 여가에 관한 경제적 현실들은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된다. 다소 거칠게 정리한다면, 경제중심주의는 남성중심주의와 노동중심주의에 연결되고, 문화중심주의는 페미니즘과 여가중심주의와 연결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간은 곧 돈이다. 저자의 말대로 시민사회 영역의 시간은 경제영역의 돈이나 정치 영역의 법과 투표와 비슷하다. 노동시간 담론의 프레임은 크게 보수진영의 시각과 진보진영의 시각이 나뉜다. 보수진영은 풀타임 노동의 필요성과 불가피성 그리고 여가의 어리석음을 강조한다. 반면에 진보진영은 자유 시간의 필요성과 불가피성 그리고 여가의 창조적 기능을 강조한다. 근무시간 단축제는 진보적 의제이다. 보수는 일중독과 풀타임 근무를 선호하여 근무시간을 줄이려는 이유를 납득하지 못한다. 성별과 계급별로 본다면 노동시간 단축의 지지자는 여성들과 무산계급이고, 풀타임 노동의 지지자는 남성들과 부르주아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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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단 호크. 내가 좋아하는 이 배우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매일 세 시간은 책을 읽고, 세 시간은 일하는 것이 목표다.” 아마 이 말을 하면서 싱긋 웃었을 이 남자, 그 멋지고 뭉클했던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를 통해 ‘카르페 디엠(Carpe diem)’을 세상에 퍼뜨린 당사자답다. 아무렴, 지금, 현재를 즐기기 위해 필요한 것은 최소한의 일, 아니겠나.
정말이지, 나도 그러고 싶었고, 싶다. 세 시간 일하는 것. 그건 에단 호크가 배우라서, 가능한 얘기라고? 글쎄, 지금의 ‘일돼지’를 양산하는 구조, (풀타임) 일자리 창출 논리에 젖었다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IMF’라는 말이 대한민국을 지배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때, 나는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분위기, 안 봐도 비디오잖나. ‘일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라‘는 국가적 지령이 하달됐고, 다른 생각 따위 사치였다. 오로지, 일, 일, 일. 어디 감히, 떽. 일하라, 일이 너를 구원할 것이다. 오죽하면 ‘일한국’(잡코리아?)라는 사이트도 생겼겠나. 군대 행정병 시절, 죽도록 행정업무 하는 것에 시달렸다. 다짐했다. 사회 나가면 절대 야근 따위 하지 않겠다! 그 다짐, 꺾어야 했다. 엄한 분위기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한 어리바리다웠던 거지. 죽도록 일했다. 오죽하면 ‘회사인간’이라는 소리 들었겠나. 오직, 회사와 일(집이 아녔다!). 당시 겪었던 개인적인 아픔을 잊기 위함이라는 명목까지 덧붙여, 일에 몰두했다. 간간이 일 잘한다는 평가도 받았지만, 그건 미끼였다. “자발적인 노예가 돼라”는 시대적 명령에 복종했을 뿐이었다. 어쩌다 그리 했냐고? 핑계를 대자면, 베짱이(놀이)를 배격하고 개미(일)를 추앙하는 제도 교육의 병폐가 스며든 것 아니겠나.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의 본성을 억누르고, 호모 파베르(만드는 인간)로 살아갈 것을 강요했던 어른들 가르침에 충실했던 것? 호모 파베르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일해야 했다. 놀 줄 모르는 병든 현대인의 자화상. 대부분 그렇게 살지 않느냐고? 그러니, 문제다. 호모 파베르 천국, 호모 루덴스 지옥. 아, 대한민국, 일하다 죽을 지어다. (‘2008 OECD백서’에 의하면, 한국 직장인의 연간 근무 시간은 2357시간으로 OECD회원국 중 최고. OECD평균은 1777시간, 무려 600여 시간 오버다!) 미안하다. 잠깐 옆길로 샌다. 아트 축구의 대명사, 지단은 이런 말을 했다. “세상에는 축구보다 더 중요한 것이 많다.” 그에겐 축구가 ‘일’이었을 텐데, 거칠게 그 말을 바꿔 말하면, “세상에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 많다”가 아니겠나. 《8시간 vs 6시간》은 이렇게 말한다. “내 삶에는 회사에서 하는 일 말고 다른 더 좋은 일들이 있어요.” 아니, 일 하는 인간이 미덕인 지금, 대체 무슨 일하다 하루아침에 잘리는 소리냐! 호모 루덴스, 여가의 인간들 여기, “인간의 본성은 놀이”며, “일은 결코 내 삶에서 중심도, 가장 중요한 것도 아니었다”고 말하고 실천했던 사람들이 있다. 일 아닌 여가(혹은 놀이)가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달은 사람들이었다. 호모 루덴스. 1930년 12월, 대공황의 초입, 미국 배틀크리크 켈로그의 노동자들과 경영자였던 W.K.켈로그와 루이스 브라운 사장이었다. 놀이와 여가를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것으로 치부하지 않고, 그것을 위해 운명과 목숨을 걸고, 명예와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사람들. 《8시간 vs 6시간》은 그 이야기를 다뤘다. “필요와 불가피성을 넘어선 실질적 자유와 자신의 삶에 대한 통제력을 위해 싸운 투쟁의 기념비”이자, “‘점진적인 노동시간의 단축’이 직업상의 합리적인 혜택이라고 보는 노동계 전통의 후예들”을 다룬. 책은 그들을 매버릭(mavericks)이라고 지칭한다. 즉, 주류에 거스르는 사람, 이단자. 8시간제(노동)가 대세가 된 후에도 6시간제를 고수한 소수의 노동자들. 일로부터의 자유를 꿈꾸고, 일보다 삶을 우선으로 삼던 사람들이다. 책은 한편으로 먼 나라, 아주 머나먼 시대의 이야기 같다. 읽다 보면, 이런 한탄이 든다. 어쩌자고, 우린 일이 최우선인 시대에, 노예처럼 일에 굴종하며 살고 있을까. 대공황기, 고작 80년가량이 흘렀건만, 인류는 어쩌다 더 진보하지 못하고 퇴행했을까. 현대의 ‘과다 노동’이라는 전염병이 창궐하도록 내버려뒀을까. 물론, 한국은 그런 시대 겪지 않았다. 바로 조국 근대화를 위한 노동 착취의 시간을 관통했다. 어쩌면 노동 단축의 시대를 맞이해야 할 필연성이 부여된다고 할 수도 있겠다. “‘현대 세계에서는 과다 노동이 당연하다’는 통념에 반박하는 증거를 자신의 삶으로 보여 준, “추가적인 두 시간”을 가졌던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말이다.”(p.18) 켈로그 노동자들은 대공황기를 시작으로 2차 대전 등을 거쳐 1984년까지 노동시간 단축을 위해 투쟁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노동을 단순히 적게 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들은 삶에서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보는 견해에 맞서 왔던 것이다. ‘(경제적) 불가피성’의 논리가 세를 키워 가는 와중에도, 그들은 쉬이 꺾이지 않았다. 산업화된 노동의 ‘외부’에서 보내는 시간(여가)의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고 널리 알렸다. 즉, “일이 삶의 전부가 아니다.” “일이 하루 중 대부분의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부분이 아니게 되면, 일은 진정으로 있어야 할 자리에 돌아갈 수 있었다. 곧, 일이 삶에 더 중요한 것을 제공하는 척 하지 않고 부차적인 위치에 있게 되는 것이었다.”(p.269) 일이 모든 것을 삼키고, 일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끓는 사람들이 도처에서 발생하는 이 시대. 과연 우리에게 직업과 일은 무엇인지,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아니, 삶에서 진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성찰해볼 것을 권한다. 그들에겐 하루 2시간의 시간이 그것을 만들었다. 8시간이 아닌 6시간 노동제. 8시간 노동이 붙박이처럼 고정관념이 된 우리에게 2시간의 차이가 삶의 어떤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이 책은 보여준다. 다만, 좀 약하다. 6시간제를 경험한 켈로그 노동자들이 2시간의 추가 시간 덕분에 할 수 있었던 일에 대해 좀 더 이야기를 풀어놨으면 좋았을 텐데, 너무 아카데믹하게 접근했다. 연구와 설문, 설명 등 학자적 태도로 일관한 것이 가독성을 해친다. 따옴표도 지나치게 많고, 괄호도 너무 많다. 추가 2시간, 삶을 탐구하는 사람들 그들에게 일은, 직업은 다른 더 좋은 일들을 위한 수단이었다. 추가적인 두 시간 덕에 그들은 회사 일과 집안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의무와 갈등과 통제의 바깥에 있는 시간을 가졌다. 자기 자신을 위해 다른 일들을 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었다. 그러니, 그들은 삶을 좀 더 깊고 의미 있게 탐구한 사람들이다. 적어도 대공황 시절, 배틀크리크의 켈로그에는 이런 노동자들이 다수였나 보다. 그들은 6시간제 반대자를 ‘일돼지’, ‘야근 돼지’, ‘이기적’, ‘돈벌레’ 등으로 묘사하며, ‘고립된 집단’이나 ‘부적합자’로 생각했다니 말이다. 일이 삶의 최우선으로 저당 잡힌 지금, 일을 안 하면 ‘게으름뱅이’, ‘낙오자’ 등으로 묘사하는 것과 정반대의 것이다. 그들에겐 여가가 그랬다. ‘삶에서 가장 진지하고 풍성한 활동이 벌어지는 시간이자 자유와 통제력을 누리는 시간.’ ‘하찮고 무의미하고 공허하고 낭비적인 시간’이 아니었다. 어떻게 삶을 가꾸어야할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지금과 분명 다른 시대적인 여건과 환경이 있었겠지만, 그들은 선구자적인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이 책을 통해 새로이 알게 된 것이라면, 산업화의 병폐에 대해 노동계급이 제시해 왔던 치유책이 ‘노동시간의 점진적인 단축’이었다는 것이다. 켈로그의 6시간제 노동자들은 그것을 이어받은, 삶에서 진짜 자유의 의미를 찾고자 한 탐구자들이었다. 하긴, 지금의 우리는 잊고 있다. 아니, 생각하고 성찰하지 않는다. 살기 위해 일하지, 일하기 위해 살지 않는다는 것. “배틀크리크에서 이들은 힘든 노동과 산업 진보의 보상이 더 많은 일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필요한 것들”이 충분히 충족되면 노동은 더 나은 것들에 자리를 넘겨주어야 한다는 전통적인 노동계급의 비전을 재확인한 마지막 노동자들이었다. “오로지 풀타임만”이라는 경영진과 노조의 새 수사법에 맞서, “살기 위해 일하지, 일하기 위해 살지 않는다”는 상식적인 말을 하고 “불가피성/필요성”을 상대적인 개념으로 이야기함으로써 그에 도전했다.”(p.324)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죽을 때까지 개처럼 일할 자유’다. ‘영원히 더 많은 일’을 하면서 삶을 좀먹는다면 그것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직업은 세속의 종교가 됐다. 일자리, 생존을 위해 중요한 것은 맞지만, 과연 풀타임 이상으로 매일 그것에 목을 매는 것은 인간으로서, 자유를 아는 인간으로서 맞는 것일까. “직업은 사람들에게 정체성, 구원, 삶의 목적과 방향성, 공동체의 소속감을 주겠다고 약속하며, “고된 노동”을 진심으로 믿는 자에게 삶의 혼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주마고 약속한다.”(p.32) 매버릭들은 문화적 굴종이 줄고, 문화적 부흥, 즉 속박되지 않은 자유로운 부흥을 꾀할 수 있었다. 여가가 게으름을 피우는 시간이라는, 조국 근대화의 논리는 틀렸다. 6시간 노동자들은 말했다. “일터를 떠나면 그게 하루 중 가장 중요한 시간이죠. 내 자신의 일을 하고 내 삶을 사는 시간이에요.”(p.284) 내 삶을 사는 시간. 이 말은 뭔가, 짜릿하다. 인간이니까. 조지 버나드쇼와 줄리언 헉슬리는 20세기 말이면 노동시간이 최대 2시간으로까지 줄어들 것이라고 예측했었다. 물론, 그 예측은 맞아 떨어지지 못했다. 허나 그것을 마냥 ‘틀렸다’고만 할 수 없다. 그들도 이렇게 급격하게 자본주의가 암세포처럼 창궐할 줄은 몰랐을 테니까. 당시, 이처럼 소비주의의 발흥, 자본주의의 구조적 속성, 노동이 차지하는 지위의 변화 등이 일어날 줄은 몰랐을 테니까. 자유, 호모 루덴스의 언어! 자유. 내가 책에서 가장 짜릿하게 받아들인 것은 이 단어였다. 8시간제와 6시간제를 비교해 보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노동자들이 가장 많이 이야기한 것도 ‘자유’ 혹은 자유와 관련된 어휘였다고 한다. ‘자유’, ‘자유 시간’, ‘자유로운 저녁’, ‘무엇 무엇을 할 자유로운 시간’, ‘무엇 무엇을 할 수 있음’, ‘무엇 무엇을 할 기회를 가짐’과 같은 말들. ‘자유의 언어’가 지배적인 화법이었다. 즉, “매버릭들은 추가적인 두 시간이 문화적 자원이며, 기존의 문화를 확장하고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 데 쓰일 수 있는 시간임을 인식하고 있었다.”(p.296) 아마도 그들은 자유의 가치에 대해 알고 있거나, 본능적으로 따랐던 듯싶다. ‘단지 돈만이 아닌 가치들’, ‘재미’, ‘세상을 탐험하는 것’, ‘필요한 사람들에게 일자리 주는 것’ 등 호모 루덴스로서의 성정이 온전하게 발휘될 수 있었나 보다. 돈만이 최고의 가치가 아닌, 다른 가치를 찾을 수 있었던 시대와 정신. 잘 짜인 놀이 세계가 아닌 스스로 여가와 놀이를 통해 자유를 구현할 수 있었던 사람들. 시장지배와 교환관계로부터 자유로웠기에 가능했던 것 아닐까.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 일상적으로 하던 활동들이, 자유의 언어를 통해 아름답고, 즐겁고, 더불어 즐길 수 있고, 아낌없이 나눌 수 있고, 다른 사람과 함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성을 갖는 활동으로 변모했다. 자유의 언어는 이러한 활동에 의미를 부여했듯이 그런 활동으로 만들어진 물건과 서비스에도 의미를 부여했다.”(p.128) 지금 대부분의 우리는 더 많이 일하지만 더 적게 받는다. 기술적으로는 발달했는데, 왜 사람들은 시간에 쫓기고 있을까, 고민해본 적 없는가. 컴퓨터를 쓰면서 과연 일이 더 줄었는가, 생각해보라. 컴퓨터 앞에 앉아서 일하는 시간이 더 늘지 않았는가. 그때와 지금, 자유시간과 돈의 비중도 바뀌었다. 지금은 이른바 ‘시간 궁핍’이다. 돈은 있더라도 시간이 나지 않는 상황. 예전에는 돈은 없어도 풍요로울 수 있었다. 시간이 많으니 여가나 전통적인 활동은 DIY로 이뤄졌다. 돈 처들인 ‘잘 짜인 놀이 세계’에 돈 들여 서비스를 받는 것이 아니었다. 미래를 향한 진보, 삶에서 어떻게 노동을 줄일 것인가 켈로그의 6시간 노동제는, 여가가 강력한 동기 부여 기제가 된다는 점을 보여준 사례 같다. 국내에도 유한킴벌리, 포스코 등의 사례가 속속 생기고 있는데, 좀 더 담론이 많이 이뤄졌으면 좋겠고. 뭣보다 켈로그의 경우, 경영자들도 현명하고 개념이 박힌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브라운 사장은 노동 강도 강화, 장인 정신의 상실, 지루함, 단조로운 반복 등 노동자들이 느끼는 불만에 6시간제가 답이 되어 줄 것이라고 확신했다고 했다. 즉, “노동시간 단축은 노동자들의 불만을 흡수해서 흩어 없애고 노동자들에게 활력도 주는 피뢰침이었다.”(p.62) 그러니, 이런 말이 나오는 건 대수였겠지. “(6시간제 덕분에) 사람들이 덜 피로해졌고 일도 더 잘할 수 있었어요. (일에) 흥미도 더 가질 수 있었고요.”(p.141) 당대에도 켈로그의 6시간제는 국가적으로도 큰 호응을 얻었다. “대공황기에 벌어진 노동시간 단축 법제화 운동 내내(이 운동은 결국 실패했다), 노동계는 <켈로그>의 6시간제 실험을 일자리 나누기의 실제 사례로, 기업에게는 이윤을, 노동자에게는 자유 시간을, 실업자에게는 일자리를 주는 모범사례로 들었다.”(p.107) 모두에게 좋은 제도였고, 좋은 예로 자리를 잡는 듯했다. ‘일’이 아니라 ‘자유시간’이 삶의 중심이 될, 미래로의, 진보로의 길을 닦는 것처럼 보였다. 회사는 임금 총액 지출을 확대해 일자리를 늘렸고, 노동자들은 자유 시간을 더 많이 갖게 된 점을 반겼다. 당시 <인콰이어러> 기사의 결론은 이랬단다. “처음으로 노동자들은 진짜 여가를 가졌다.” 노동자들은 6시간제로 날마다의 일상이 바뀌었다. 일과 의무에서 자유가 중심인 삶으로 바뀌었다. 물론, 자유는 새로운 두려움들도 수반했다. 그것은 제도 교육의 탓도 있다. 여가에 대한 것을 가르쳐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의 제도 교육도 그렇지 않은가. 오로지, 좋은 직업, 좋은 일, 그 ‘좋은’에 들어간 뜻은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혹은 번듯한, 보수가 많은, 혹은 삶에서 최대한의 시간을 쏟아야 하는, 그런 뜻이지만 말이다. 6시간제의 쇠퇴와 몰락에는 결국 현실 정치의 힘이 개입했다. 그건, 결국 돈으로 시장 지배를 꾀한 자본주의자들의 모략이었던 것 같다. 루스벨트가 일자리 ‘창출’을 적극 내밀었고, 일자리 나누기, 노동시간 단축과 같은 개념이 밀리면서 해방적 자본주의는 쇠락의 길을 걸었다. 노동시간 단축을 앞장 서 추진했던 기업들은 비판을 받았고, 돈 앞에 무력했다. 결국, “일돼지들이 이겼다.” 2차 대전 뒤 노사 합의로 일자리를 줄이고, 입지가 확고한 소수의 노동자에게 풀타임 노동시간을 유지해주기로 한 결정에 대한 한 노동자의 회상이었다. 노동계에서도 분열이 일어났다. 일을 적게 하는 것이 더 많이 받는 것이라며 시간과 임금을 연결하던 노동계의 언어는, 시간과 임금 가운데 하나를 택일하도록 만든 ‘단절의 화법’으로 바뀌었다. “어빙 번스타인은 복지 자본주의가 노동자들에게 주는 여러 혜택에도 결국에 허물어진 이유는 작업장에서의 통제력과 [경영에의] 민주적 참여라는 노동자들의 근본 열망을 해소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p.151) 이 책, 6시간 노동제에 대한 피상적인 나의 인식을 다시 돌아보게 만들었다. 누구에게나 일이 목적은 아닐 것이다. 수단일 텐데, 그 수단에 거의 모든 것을 뺏기다시피 많은 우리는 그렇게 살아간다. 그 일에서 벗어나고자 택한 지금의 일에서, 나는 어떻게 자유와 시간을 내 것으로 만들 것인가. 또 “나는 일해야 돼”라는 말이 가족이나 공동체에 대한 다른 책임보다 도덕적으로 우선하는 화법이 아닌지, 되씹어본다. 그렇다. 이런 말이 창궐한 것은, 채 100년이 되지 않았다. 책은 2차 대전 즈음 이런 말이 생겼고, 1950년대에 광범위하게 유통된 것으로 본다. 이 말은 가족이나 지역사회에서 마땅히 해야 할 역할을 거부하는 데에도 충분한 이유로 작용했다. ““나는 일해야 돼”는 도적적인 언명 이상의 것이었다. 그것은 한 세대의 <켈로그> 남성들에게 후퇴의 외침이었다.”(p.247) 내가 하는 일이, 우리가 함께 하는 일이, 나는 W.K.의 좋은 예처럼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의 회사를 일궈 나가면서 W.K.는 돈을 가치 있게 쓰는 방법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됐고, 공장 사람들과 지역사회와 미시건 주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p.80) 노동시간 단축은 그런 것의 일환이었다. 그는 공공 레크리에이션 시설들을 지었고, 레저 서비스도 제공했다. W.K.는 공공 영역이 확장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회복지와 공공의 건강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자유에 미래가 있으려면 공공 영역이 확장돼야 했다. ‘자유롭고 공공적인 생활’에 대한 지원, W.K.의 전설과 희망. 나는 나와 몇 명이 함께 할 일이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공공성을 지닌, 즐거운 먹을거리가 있는 곳. 조직을 위해 개인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조직이 개인을 위해 존재하는, 그런 회사. 회사가 개인의 삶보다 결코 중요하지 않은. 자유를 찾을 수 있는 수단으로 존재하는 회사. 자유에 대한 비전이 다시 살아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우리들. 과연 나는 나아갈 수 있을까. 스스로도 치를 떨었던 ‘회사인간’에서 나는 물론, 함께 하는 노동자들도 제대로 벗어나야 한다. 브라운과 W.K.처럼. 일을 다른 더 중요한 목적을 위한 수단이자, 더 짧은 노동시간, 확장된 임금 지급액을 진보로 여긴 그들처럼. 곧, ‘유쾌한 6시간제’ 씨의 26주기가 다가온다. 1985년 2월8일 사망했거든. 실은, 난 6시간도 많다고 생각하는 인간이다. 에단 호크처럼 3시간만 일하고 싶다. 그리고 그것도 4일제로. 난 참, 구제불능인가 보다. 그러니, 노조나 만들고, 상사나 경영진 들이 싫어하지.
올해, 노동자 사장무리의 한 명이 될 내게 그 2시간의 여가가 주어진다면 우쿨렐레가 최우선이다. 그리곤 매장에서 콘서트를 열 테다. 소식 듣거든, 오시라. 공정무역 커피와 유기농 디저트가 무료다. 물론, 6시간제를 찬성하는 매버릭들만 입장 가능하다! 일돼지는 오지 마시라. 구제역, 옮길지 모르니까. 지금 이 나라는, 소, 돼지를 ‘살처분’(이 말, 나는 반댈세!)하고 있는데, 진짜 살처분 해야 할 것은 따로 있다. ‘일 하라’고 무조건 다그치기만 하는 시장만능 사회지도층 자본가들의 대가리에 든 똥.
잘 가세요, 내 좋은 친구여 - “옛 친구 6시간제에게” 너에게 정이 무척 많이 들었구나. 슬프지만 정말이야. 너는 우리 가족들이 더 가까워지게 해 줬지. 하지만 8시간제 씨가 말하기를, “나가서 일해!” 그가 이겼지. 하지만 우리는 웃지 않았어. 이제 너는 떠나고 우리는 너무 슬프구나. 너와 함께 우리 친구들도 떠나가니까! “너” 없이는 “그만 두겠다”는 의리 있는 친구들 말이야. 이렇게 너는 우리를 떠나 우리의 설립자인 “K씨” 곁으로 가는구나. 우리의 몸은 “너”를 결코 잊지 않을 거야. 너는 우리 몸에도 너무 잘 해 줬으니까. 그리고 이제 침묵의 시간. 눈물을 흘리자. 우리는 두려움을 없애려고 노력할거야. 그리고 이제 비타민을 꺼내고, 의사에게 전화를 하자. 8시간이 우리 “모두”를 잡았으니까. - 슬픔에 잠겨서, 이나 사이즈 Ina Sides가 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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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적인 돈'과 '추가적인 (두) 시간'. 켈로그의 6시간제 노동자들이 사용했던 표현이다. 추가적인 시간은 그렇다쳐도 추가적인 돈이라는 표현은 왠지 어색하다. 돈이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게 아닌가? 하지만 이러한 표현은 6시간제 노동자들이 돈과 노동, 여가에 어떤 의미를 부여했었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노동시간과 여가시간에 대해 연구해온 저자 허니컷은 전작 『끝이 없는 일』에 이어 다시 한번 '노동시간 단축의 종말'을 다루고 있다. <켈로그>사가 50여년간 시행했던 6시간제의 시작과 끝을 통해 노동과 여가의 가치가 어떻게 변화해갔는가를 추적한다.
1930년 <켈로그>사는 기존의 8시간 3교대제를 6시간 4교대제로 전환한다. 6시간제의 적용은 -자리 나누기를 통한- 실업난 해소 뿐만 아니라 노동의 능률과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는 측면에서 언론의 집중을 받았다. 과도한 업무에 시달려온 노동자들에게도 이는 희소식이었다. 사측에서 시간당 임금의 인상 등 보완책을 제시함으로써 -노동시간 감축에 따른- 소득의 감소를 어느정도 완충할 수 있었고, 그들에게 주어진 '추가적인 두시간'은 삶의 질을 향상시켰다. 노동자에게 노동만을 강요하던 시대는 가고 새로운 복지 자본주의의 시대가 도래하는 듯 했다.
하지만 6시간제의 영광은 길지 않다. '영속적인 경제성장'이라는 새로운 이슈는 일자리 나누기를 거부하였다. 일자리 창출만이 -실업난 해소와- 끊임없는 경제성장을 위한 해법이었고 이는 더이상 노동시간 단축이 불필요함을 의미했다. 인간관계론 학파는 일을 통한 자아실현을 외치며 '수단으로서의 일'을 '그 자체가 목적인 일'로 승격시켰다. (일의 가치가 올라갈수록 상대적으로 여가시간의 가치는 하락하였다) 새로운 <켈로그>의 경영진은 이전 경영진과는 다른 경영철학을 가지고 있었고 특별히 6시간제를 고수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이러한 이유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6시간제의 입지를 위태롭게 하였으나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일과 노동에 대한 노동자들의 인식 변화에 있을 것이다. 산업사회 이후 노동시간 단축을 위해 투쟁해온 것은 노동자였다. 노동의 주체는 결국 노동자 아니던가. 외부적 요인이 장애물로 작용한다 할지라도 행위의 주체자가 어떤 의지를 가지고 있느냐가 가장 중요할 터이다. 하지만 노동자들 스스로도 노동을 평가절상하고 여가를 평가절하함으로써 '노동시간 단축'에 대한 의지를 포기한 것이다. (노동자들의 인식의 변화는 저자가 시도한 노동자 언어의 '텍스트 패턴' 분석을 통해 생생하게 전해진다.)
시대는 변했다. 일은 과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다양해졌고, 개인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면에서 인간관계론 학파가 주장한 자아실현도 아주 허구는 아닌 듯 하다. 여가 선용의 길도 다양하게 열려있다. 점점더 좋아지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사회적 현상일 뿐이다. 현대인이 실제 피부로 느끼는 것은 그렇게 낙관적이지만은 않을 것이다. 확실히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과도한 업무에 시달리고 있고, 주말 시간은 TV 리모콘을 조작하는데 사용한다.
<케롤그>사가 시행했던 6시간 노동제의 역사는 특정한 환경에서 벌어졌던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내 삶에는 <켈로그>에서 일하는 것보다 더 의미 있는 일들이 있었어요."라는 한 노동자의 외침은 여전히 우리에게 일과 여가의 가치에 대해 상기시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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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가를 낸 스티브 잡스 대신 COO의 팀 쿡의 일에 대한 열정에 대한 기사나 글들이 화제가 되고 있다. 저녁 7시에 작업을 하자는 대기 지시를 받은 날, 이런 글을 접하면서 "아. 이런 사람이 있구나. 성공하려면 이래야 하는구나." 마음을 다잡았다. 모든 이들이 이런 열정으로 일을 하면 애플처럼 성공할 수 있으며, 일의 성공이 개인과 가정의 성공까지도 불러다 줄 수 있다는 핑크빛 미래를 제시하는 글에 현혹된 것이다.
때때로 청년 실업률 23%의 대한민국에서, 88만원족에 합류해서라도 일을 하고자 꿈꾸는 이들이 많은 현실 속에서 9 to 9이든, 철야작업이든, 휴일 근무이든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에 감사해할 줄 알아야 한다는 죄책감과, 안도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나라는 자신에 일을 맞추는 방법을 찾기보다는 일에 나를 꾀어 맞추면서, 사회의 일원이 되기 위해 잉여인간이 되지 않고자 말이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 삶의 가치를 자꾸 내 개인적인 시간과 회사 밖의 내 모습에 두다 보니, 지난 해에는 정말 많은 고민을 했던 것 같다. 명시적으로는 주 5일 근무, 40시간 근무제도에서 일을 하지만(주 6일근무를 경험한 적이 있기에 더욱), 읽고 싶은 책 한권 마음 편히 읽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는 시기에는 가슴 답답함을 해소하기 힘들고, 일에 대한 의욕도 사라지곤 한다. 집에 돌아오면 해야만 하는 집안 일조차 버거울 때가 있었다. 그러나, 앞서 말한 것처럼 그럴 때마다 나 스스로에게 일의 가치와 소중함, 경제적 소득에 대한 중요성을 다시금 되새기려 노력하는 것이 사실이다.
켈로그라는 기업이야 워낙 유명하지만, "6시간 노동제"에 대한 내용은 이책을 보고 처음 알았다. 내게는 충격이었다.
퇴근 후 짬짬이 읽을 수 밖에 없어 생각이 단절되는 부분이 있었지만, 나 자신에게는 의미 있는 책읽기의 시간이었기에 감사하다. 철야작업을 위해, 낮부터 늘어져 있는 사람들을 볼 때 느끼는 안타까움 때문일까. 이틀 동안 집에 못갔다고 자랑스레 말하는 이들이 이루어낸 업무성과를 받아들이기 힘든데, 다들 애썼다고 말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함 때문일까. "열심히 일하는 것"과 일에 대한 "올바른 태도"가 과연 무엇일까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해주는 책이었다. 저자의 전작을 읽어볼 수 있는 기회가 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90년의 미국보다 우리나라는 아마 더욱 심한 일중독에 시달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두렵지만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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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노동 시간에 관심이 많다. 내 실존을 결정하는 중심 요소이기 때문이다. 켈로그의 노동시간 단축 실험(이라기보다는 인력 수급을 위한 결정)의 과정을 다룬 보고서다. 흥미진진하다. 1930년에 켈로그 사장 루이스 브라운은 노동 시간 단축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매우 개방적인 인물이었다.
그 두 시간 단축이 삶의 질을 얼마나 바꿔놓는지를 보면, 경이로울 정도이다. 다른 무엇보다도 자기 실현에 시간을 쓰기 시작한다는 점이 눈에 들어온다. 심지어 비행기 조종을 배운 이도 있다. 이게 무려 90년 전의 이야기다. 지금 우리의 노동 환경은 1930년 당시의 켈로그보다 한참 뒤처져 있다.
요 근래 몇 년 동안 노동 시간 단축과 관련하여 숱한 논의가 있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별 실효도 거두지 못하는 데도 불구하고 야근 중독에 걸려서 회사가 허덕이는 모습을 보라. 실은 미국 켈로그에서도 퇴보하였다. 그렇다. 실패가 아니라 퇴보다. 노동자들은 더 많은 소득을 위해서 8시간 노동을 택했다.
8시간 노동과 6시간 노동은 패러다임이 다르다. 8시간 노동을 떠받치는 것은 소비주의 패러다임이다. 많은 노동은 많은 소득을 원해서다. 소득은 소비의 근간이다. 소비가 행복이다. 그래서 오래 일하고, 많이 번다. 6시간 노동을 떠받치는 것은 인간주의 패러다임이라고 해야 할까? 소득보다 관계를 우선하고, 소비보다 자유를 중시한다.
<8시간 VS 6시간>은 각각의 노동 시간이 대변하는 패러다임을 계속 돌아보게 만든다. 자연스레 8시간(실은 그보다 더 심하지만) 노동시간 위에서 작동하는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만든다. 그만큼 유익하고, 실은 그 이전에 재미있는 책이다. 꼭 읽어보시라. 구할 수 없다면, 도서관에서 빌려서라도 보시길 바란다. 그럴 만 한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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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에 원자력발전소(바르게 얘기하면 핵력에 의해 전기를 생산하므로 핵발전소다) 운전원으로 일했다. 원자력발전소는 24시간 운전해야 하므로 우리는 세 개 조로 나눠 일했다. 오전 8시 조(Day), 오후 3시 조(After), 오후 11시 조(Night)로 나누었는데 오후 11시 조가 특히 힘들었다. 근무 시간도 9시간이었을 뿐만 아니라 밤에 잠자지 않고 내내 일한다는 것은 생체리듬과 맞지 않는 일이다. 그러다 보니 내가 근무할 때 네 개조 3교대에서 다섯 개조 3교대로 바꾸었다. 근무에 투입되지 않는 한 개조는 일근을 하며 교육을 받았으니 교대근무를 하는 다른 회사 노동자들보다 근무 환경이 좋았다. 그렇지만 8시간 교대근무, 특히 오후 11시 조는 나중에 너무 힘들어 밤에 일한 뒤 낮에 잠잘 때면 식은땀을 흘리기도 했다. 20대인 내가 그랬으니 나이 든 노동자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리고 그때 8시간 교대근무 대신 6시간 교대근무를 했다면 내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아이오아 대학 여가학과 교수 벤저민 클라인 허니컷의『8시간 VS 6시간 : 켈로그의 6시간 노동제 1930-1985』는 8시간 대신 6시간 노동을 선택했던 노동자들 이야기이다. 1930년 켈로그는 세계 최대의 즉석 시리얼 제조업체로 거의 1천 5백 명의 노동자가 일하고 있었다. 켈로그 소유주인 윌리엄 케이스(W.K.) 켈로그와 사장인 루이스 J. 브라운은 노동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 6시간 노동제를 도입한다. 이들이 처음 6시간 노동제를 도입하면서 내세운 명분은 실업 문제 해결이었다. 8시간 3교대 대신 6시간 4교대로 바꾸면 더 많은 일자리를 추가해서 실업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6시간 노동은 실업문제를 해결할 뿐만 아니라 좀 더 포괄적인 장점이 있었다. 노동자들은 노동 대신 자신이 쓰게 된 두 시간을 활용하여 자기 자신의 삶을 살 수 있었다. 그들은 [추가적인 두 시간이] 전통적인 활동과, 공예와, 기술을 지키는 시간이며, 가족과 공동체를 지키는 시간이고, 새로운 문화적 형태를 탐험하는 시간이며, 시장과 효용의 영역을 넘어서 그 자체가 목적인 민주적 문화를 창출하는 자유로운 공간을 필요와 통제와 갈등의 외부에서 만들어 내는 시간이라고 주장하면서, 6시간제와 ‘추가적인 두 시간’을 지켰다. (305쪽) 6시간 노동자들은 이득 항목(시간당 임금 인상, 노동시간 단축, 고용의 확대)과 양보 항목(시간외수당과 야근 수당 폐지, 초과 생산 수당 도입 등)을 분명히 인식하면서 6시간 노동을 선택하고 지키려 했다. 6시간 노동으로 두 시간으로 스스로의 삶을 살았다. 노동시간 단축은 노조 결성, 정치, 파업 등에 지속적으로 힘을 실어 노동운동에도 활력을 주었다. 아울러 두 시간 여가를 통해 ‘더 건강하고, 열정적이고, 신중하고, 적극적인 노동력’이 생겼다. 그리하여 6시간 노동은 노동자와 자본가 모두를 이롭게 했다. 6시간 노동을 시행할 때는 앞으로 점점 노동시간이 줄어들 것이라고 내다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렇지만 일자리 창출이라는 개념과 루스벨트가 만나면서 새로운 분기점을 이룬다. ‘긴 흐름으로 볼 때, 일자리 창출 개념이 떠오르고 일자리 나누기, 혹은 노동시간 단축과 같은 개념이 쇠락하면서, 그리고 전국적으로 해방적 자본주의가 사라지면서, 노동시간 단축을 앞장서서 추진했던 기업들은 비판을 받게 됐다.’ 일이 삶의 중심으로 자리 잡으면서 ‘일 그 자체’이론은 기업인들을 일의 고위 성직자로 만들었고, 경영인들은 현대의 절망을 없애 주고 일에 대한 믿음을 통해 인간 영혼의 상처에 향유를 발라 주는 존재가 되게 했다. 노동자들 또한 일을 모든 것에 도덕을 부여하는 만능 언어로 삼으면서 공동체의 도덕 기준에 맞지 않는 행동들을 정당화했다. 자본가와 노동자 모두 6시간 노동 대신 일을 삶의 중심으로 내세우는 8시간 노동을 선택한 것이다. 8시간 노동을 하는 우리는 지금 시간에 쫓겨 산다. 하루 8시간 노동이라고는 하지만 출근과 퇴근, 그리고 야근까지 포함하면 자신의 시간을 갖기 어렵다. 그런데 자신의 시간을 갖지 못하는 것을 문제라고 여기지 않는다. 외려 근무시간이 길다고 할 때 노동 착취를 떠올리기보다 근사한 직업을 가진 것으로 생각한다. 하루 8시간만 근무한다고 하면 그 만큼 적은 역할을 하는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고 여긴다. 일하는 시간이 꼭 많아야 할까. 6시간 노동을 한 켈로그 노동자들의 사례를 보면 6시간 노동이면 삶을 영위하는 데 충분하다. 6시간 노동이면 스스로 자신의 삶을 살아갈뿐더러 일을 찾는 이웃들에게도 도움이 된다. 뿐이랴, 우리의 하나뿐인 땅별에도 바람직한 삶의 형태다. 핵심은 나만 잘 살겠다는 것이 아니라 나눌 준비가 되어 있는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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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책을 읽다보면 책의 핵심적인 메시지는 보이지 않은 채 계속해서 사례만 나열하는 경우를 접할 수 있다. 분명 책에서 소개하는 사례는 중요한 내용이지만, 도대체 그 사례의 이면에 담겨있는 다양한 담론들과 의미는 제대로 알 수 없는 책들이다. 이런 책들을 읽다보면 저자가 좀 더 체계적이고 심층적으로 분석한 내용을 알려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을 갖게 된다. 처음에 「8시간 vs 6시간」을 접하고서 이 책 역시도 혹시 그런 유형의 책이 아닐까 우려했었다. 6시간 노동제가 흥미로운 주제이고 중요한 것 같기는 한데 그저 켈로그의 역사만 쭉 나열하고 만다면 350쪽이나 되는 책을 읽고서 그만큼 남는 것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조금씩 책을 읽어나가다 보니 6시간 노동제가 담고 있는 여러 가지 의미를 분석하고 그것이 미치는 파장과 다양한 의미를 말해주고 있어서 기대 이상의 수확을 거둘 수 있었다. 6시간 노동제는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더 많은 함의를 가지고 있었다. 6시간 노동제는 단순히 노동시간의 변화 이상으로 경제학, 정치학, 사회학, 심리학, 행정학 등 많은 영역에 걸쳐서 복잡하고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이 책에서는 관련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서 전방위적으로 서술하지는 못하였지만, 저자는 특히 문화적인 측면에서 고찰하면서 6시간 노동제의 의미를 깊이 있게 파고들고자 노력하고 있다. 책의 핵심적인 내용에 대한 요약은 첫 장인 여는 글과 옮긴이의 글에 훌륭하게 나와 있다. 그래서 이 글에는 가장 중심적인 문제인 돈과 시간의 가치 평가에 대해서만 이야기 하고자 한다. 저자는 6시간노동제가 시작되었던 1930년대와 소멸하는 1980년대를 비교하여 사람들이 돈과 시간을 어떻게 평가하고 인식하는지 살펴보고 그 인식의 차이(즉, 문화적 차이)가 노동제의 변화를 이끌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즉, 「8시간 vs 6시간」이라는 제목을 「돈 vs 시간」으로 바꿔도 될 만큼 돈과 시간의 가치평가가 어떤 노동제를 선택하는지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노동이 수단적 위치에서 목적적 위치로 옮겨가는 시대적 분위기의 변화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데 노동을 “불가피한” 것이라고 인식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면서 6시간 노동제는 서서히 사라지게 된 것이다. 이 “불가피성”은 상대적 빈곤이 절대적 빈곤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6시간 노동제 하에서는 다소 소득의 감소가 있지만 이미 삶의 풍요가 어느 정도 진행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감수 할 수 있다는 인식이 더 많다. 그러나 소비적 자본주의와 경제성장 이데올로기의 확산은 우리의 절대적 빈곤의 수준을 끌어 올리고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소비해야 하는 방향으로 우리 삶을 바꾼다. 결국 과거에는 상대적 빈곤이었던 삶의 수준이 지금은 절대적 빈곤의 수준으로 바뀌면서 사람들은 더 많은 일을 해야만 한다고 느끼며 8시간 노동제로 돌아가는 것이다.(과거에 사치품이었던 휴대폰이 지금은 필수품이 된 상황을 보라) 8시간 노동제하에서 사람들은 여가가 가져다주는 자유와 삶의 통제력, 공동체적 문화 등 보다 더 많은 소득과 소비를 중요시한다. 이 의미는 돈이 우리사회의 모든 것을 평가하고 결정하는 사회구조가 만들어 진다는 의미이고 그러면서 우리는 계속해서 일에 종속되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저자의 이러한 분석은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을 돌아볼 수 있게 만든다. 우리는 흔히 돈 대신에 다른 가치를 선택하는 사람들을 특이한 사람 혹은 대단한 사람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으로 여긴다. 그러나 이렇게 치부하기 이전에 우리가 돈이라는 것의 가치에 대해서 얼마나 진지하게 고민했는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 더 많은 일과 소득이 우리 삶을 위한 수단이 아닌 목적이 되어버린 시대에 우리는 ‘왜’ 돈을 벌고 있는가에 대해서 더 진지하게 답변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경제의 중요성은 분명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일을 통한 자아실현의 측면도 분명 간과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이전에 우리가 왜 일을 하고 있는지, 우리가 일을 하면서 포기하는 것의 가치는 얼마나 되는지 고민할 수 있는 삶이 되어야 한다. 너무 많은 일에 묻혀서 그저 먹고살기 바빠서 이런 고민에 답할 수 없는 우리 사회의 모순이 너무나 안타깝다. 혹시 지금 너무 많은 일 때문에 고민하고 있다면, 자신의 삶에 대한 통제력을 갖는 삶에 대해 생각한다면 한번쯤 이 책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추신 : 힘들게 달리기만 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모습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다면 더글러스 러미스의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를 추천한다. 다소 급진적이기는 하지만, 새로운 인식의 전환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제러미 리프킨의 「노동의 종말」도 추천한다. 이미 15년 전에 나온 책이지만 많은 통찰을 제시해 주고 있으며, 내용의 일부는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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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대한 소개를 어디서 어떻게 보고 선택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때 잘못 봤던지 혹은 리스트에 보관하면서 구매를 결정하는 순간 착각을 했던가보다. 켈로그라는 회사가 노동시간을 줄이는 결정을 했었고, 그것이 어떠한 영향들을 끼쳤는가... 뭐 그런 내용이 있는 책으로 이해했는데, 이게 완전히 틀린 것이 아닌건 맞지만, 난 내략 1985년부터의 실험에 대한 이야기, 뭐 그런걸 상상했었는데, 1930년에 시작해서 85년에 중단된 실험에 대한 이야기더라. 책을 손에 잡고 표지에서부터 '이게 뭐지?'하는 생각을 했었으니. 하여간, 이건 독자의 선입견(?)에 대한 이야기인 거고... "브라운(주인공?인 배틀크리크란 지역 켈로그 공장의 사장-전문경영인)은 기계가 점점 노동을 지배하면서 노동과정 자체도 점점 기계처럼 될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이에 대한 가장 좋은 해결책은 노동자 개개인의 삶에서 노동을 줄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노조 활동의 성공의 근간이자 노동자 불만의 핵심 사안인 '작업장에서의 일에 대한 통제력'이라는 문제는, 지속적인 노동시간 단축과 시간당 임금의 인상으로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보았다. .... 노동은 그 개념상 (일터 밖에서의 시간에 비해) 자유와 통제력의 상실을 수반하는 것이니만큼, 일터에서의 통제력에는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작업장의 규율은 산업 자본주의으 기초이므로 계속해서 강화될 것이다. 브라운이 보기에, 이를 인식한 노동자들은 여가가 주는 더 큰 자유를 택하고 있었으며, 노조가 주장하는 단편적인 작업장 규율 개선운동에 동조하는 대신 계몽된 경영자들이 부여하는 통제를 받아들이는 합리적인 선택을 내리고 있었다." ... 즉 이와 같은 아름다운(??) 이야기가, 훌륭한(??) 경영철학과 노조와의 협업이 1930년대에 실현되었다는 이야기를 내가 어찌 상상할 수 있었겠냐~ 하물며 "해방적 자본주의"라는 식으로까지 불리는 자본주의적 경영철학이라는게, 정말 낯설 수 밖에. 그리고 적어도 내 개인적인 상식과 취향에 따르면 "..... 노동과 노동자의 역사는 더 이상 단순히 '더 많은 것을 원한다'는 정치경제적 용어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노동의 역사는 한 세기 동안 지속된 '시간에 대한 추구'로 볼 때 더 잘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문화, 시민사회, 공동체, 가족, 혼자만의 시간 등과 같은, 현대 산업질서와 정치적 외부에서의 삶을 위해 '산업사회 노동 규율로부터의 자유'를 얻으려 한 것으로 보아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과 같은 생각역시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일 16시간 노동이라는 지옥같았던 역사에서 8시간 노동을 쟁취하기 위한 수많은 이들의 투쟁은 같은 미국사회를 배경으로 기술된 유진 하워드의 글에도 적나라하게 잘 나타나있으니까. 더 이상의 노동시간 축소는 왜 없는가?라는 질문을 한참 전에 해본 적도 있으나, 국내의 주 5일 근무제, 프랑스의 주 35시간 근무제, 또한 국내 유한양행 등의 사례 등등을 보면서 역시나 지속적으로 투쟁하는 노동계급의 동력은 기대를 걸만하다는 생각을 했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젊은 세대들은 점점 더 잔업을 안하려 한다는 성향의 변화도 역시 이러한 움직임을 당연하게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게 벌써 이미 100년전에, 그것도 노동자로부터의 요구가 아니라 자본가에게서 제안되고 실천되었다니. 물론 공황이라는 배경도 있었지만 말이다. 뭐, 정말 '황금시대'라는 신화가 언뜻 떠오를 정도였다. 하지만, 이 책의 내용이 슬프고 한편으로 무서운 것은, 이 아름다운 실험이 어떻게 망가졌느냐를 설명하고 그 이야기를 따라가야하기 때문이다. 자본가의 당연한 배신과 노조의 영문모를 결탁으로 인해서 말이다. ".... 더 짧은 노동시간이 임금에 필적하는 노동 혜택이 아니라는 생각과, 전체 주급과 현금 혜택을 '희생해서' 노동시간을 줄이는 것은 곧 노동자 착취라는 생각이 1940년대 초에 생겨나고 있었다. .... (결국) '더 많은 돈'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래 역시 이유는 단순했다. 한두 해방적 자본주의자(경영자)의 복음이 있었다 하더라도(그는 분명 그럼으로써 더 많은 이윤을 얻었다고 했으니, 그냥 막연히 선한 자선가는 아니긴 하지만), 보편적 자본의 화폐를 매개로한 포섭에 일차적으로 노동자들이 넘어간 것이다. 이데올로기 공세는 '소비사회'라는 엄청난 진지환경 구축을 수반해서 도래했던 거고. 그런데 그런 역사의 과정에서 더 무섭고 슬프게 다가오는 것은 더 고급진 경영철학의 도입과 그에 대한 2차적 포섭이 행해졌다는 것이었다. Y이론이란 것, 별로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직장에서의 자아실현이라는 식의 레토릭으로 포장된 개인주의화된 도덕이론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듯한 그 이론... 나름 관리자가 되어 있는 내 자신이, 상당부분 당연하게 생각해왔던 것 같은 이러한 사고방식이 역시나 지배자의 철학이었다는 사실에 놀랐고, 그에 무력하게 포섭되었던 노동자들의 역사가 슬펐다. ".... 맥그레거와 이 세대의 인간관계론 학파, 그리고 산업심리학자들은 두 영역(작업장 안과 밖, 경제와 생활)을 통합함으로써 경제적 합리성이 최종적으로 승리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인간적 욕망의 만족'을 주는 영역으로서 작업이 여가를 대신하게 되면서, 자유 시장이 가진 '논리의 망'이 점차적으로 불합리와 신화와 감정의 황야를 몰아낼 것이라 생각했고, 엔지니어와 과학자들이 욕망과 의무 수단과 목적, 갈등과 일치, 소비와 생산, 그리고 일과 여가의 통합된 질서있는 세계로 사회를 이끌 것이라고 기대했다...." 불현든 실현되어 있는 디스토피아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책자에서 리더십을 가리키기 위해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된 비유는 "가르치기'와 '팔기/납득시키기'였다. 이를테면, 좋은 리더는 '자신의 일을 정확하고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해 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노동자들에게 납득시킬(sell) 수 있어야 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또, 풀은 '우리는 노동자 개개인에게 자신의 직업이 갖는 중요성을 납득시키는(sell) 일에 실패해서는 안 된다'고 언급했다. 주목할 만한 은유적 표현을 담은 글도 있었다. '우리가 개발하고 있는 생산물들은 손에 잡히는 것이 아니며 소비자들이 돈으로 구매를 하는 것(buying)이 아니다. 우리의 생산물은 리더십이며, 소비자들, 곧, <켈로그> 직원들은 더 나은 태도와 업무 성과를 내기 위해 우리의 아이디어에 '설득되는(buying)' 것이다. ..." 영어에서 sell과 buy가 저런 의미로 사용되는 용례가 있다는 것을 몰랐다. 자본주의란 정말 얼마나 치밀한 것인지, 더 많이 팔고 사게 하기 위해 경영차원서도 노동자들에게 팔고 사게하는 이론을 이처럼 만들어가다니 말이다. 맥그레거라는 인간관계론 경영학파는 어쩌면 테일러리즘보다 더 무서운 사회진보와 인간해방의 적이 아닌가 싶었다. 나 또한 직장에서의 자아실현이라는 생각을 했고, 그리고 동료들의 정돈되지 못한 개인적인 취향에 대해 의구심을 보내는 적이 많기 때문에. 어딘가에서부터 내 심신으로 자리잡은 그 기준에 못미칠 경우, 스스로 자책하고 외부의 지적을 수용했기 때문에. 그것이 옳다고 습관지워져있는 내 모습, 이게 단지 동양사회의 유교적 순응주의인가 싶기도 했었으나, 나름 정교한 경영이론이 있었다는 것. 진짜로 슬픈건, 이러한 조직에서의 개인의 역할과 발전비젼이라는 식의 논리는 일부 불가피함이 있다 하더라도, 노조와 같은 운동조직에서도 많이 통용되는 이야기란 것이다. 그러기에 노동운동을 비롯한 많은 사회운동가들이 자기희생적인 노력을 하고, 그 작업장에서의 과로가 생활세계 그리고 인간사회의 해방을 위한 것이라는 자부심과 자기만족속에 살아가면서 개인을 파괴하는 경우가 역사에 부지기수로 되풀이 되는 게 아닌가? 이같은 슈퍼맨/슈퍼우먼 컴플렉스가 자생적일 수도 있으나 경영이론 차원에서 정립된 바 있다는 게 놀라왔고 무서웠다. 그게 20세기 중반에 처음등장한 것이 아닐지라도, 기존의 보수적 도덕론들을 재정립한것 이란 생각도 들지만... 어쨌거나 두려웠다. 그리고 결론적인 슬픔은 ".... 애크런의 <굿이어> 공장은 1930년대 이래로 6시간제를 시행해왔다. 노동자들은 전쟁 중 8시간제로 일한 뒤에, 투표를 통해 6시간제로 복귀했고 그 뒤로도 경영진의 압력에 잘 맞서 왔다. 하지만 1956년 4월 <고무 노조 Rubber Worker's Union>가 <굿이어> 노동자들 대부분이 원하는 바와는 맞지 않는 움직임을 취하면서, 8시간제라는 산업 표준에 따르라고 <굿이어> 지부에 압력을 넣었다. 그러면서 업계 전체에 '동일한' 임금이 달성되면 6시간제로 돌아오겠다는 공허한 약속을 했다." 라는 유사한 사례에서 확정되더라. 20세기 미국의 노동조합에 대해 잘 아는 바는 없으나, 뭐 딱히 개량적이란 정도로만 알고 있었으나... 단편적이라고 언뜻 생각이 드는 집단주의적 논리로 해방적 시도를 무화시키는 행위가 노동계에서 있었다는게 참 믿어지지가 않는다. 켈로그의 내부사례들은 차마 더 언급하고 싶지가 않다. 도대체 더 높은 임금이라는 목적과 인간해방이라는 목적 사이의 균형을 이렇게 무시한다는 것이, 그것이 역사였다는게 책을 읽는 내내 가슴에 묵직함으로 다가왔다. 사실 우리 사회에도 자발적인 연장근무 행태가 조금은 있는 듯 하다. 하지만, 그 보다도 비정규직에 대한 정규직의 차별과 같은 것도 노동자 스스로가 해방적인 비전을 갖지 못한다는 상황을 반증하는게 아닌가 싶다. 물론 상대방의 이데올로기 공세에 포섭된 결과라고 본다. 일자리 나누기... 이런게 공허하게 들리는게, 자본가에 대한 불신도 있으나 이를 위한 노력의 부재도 그만큼의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한다. 주 39시간제라도 시도해보는 건 어떨까 싶기도 한데... 소득의 40분의 1을 일단(~) 감수하고, 고용을 40분의 1 늘리다는 제안을 하는 거다. 노동자는 임금감소를 수용할테니, 임금 외의 고용비용을 경영자가 부담하라고 말이다. 그러면, 무려 2.5% 포인트 실업율이 덜어지는 것 아닌가? 세상이 이런 단순산술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고, 동의하지만... 이런 제안은 왜 없을까? 5년에 1시간씩.... 그러면 50년이면 우리도 일 6시간 근문제로 도달할 수 있을텐데... 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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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 전에는 6시간 노동이 최근 유럽에서 나온 주장인 것으로만 알았다. 그런데 이미 1930년대에 켈로그에서 6시간 노동이 벌어졌다. 이 6시간 노동은 결국 1985년에 끝이 나고 만다. 이 책이 다루는 내용이 바로 그 시작부터 끝까지의 과정과 그 의미 등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나오는 6시간 노동의 역사는 단순한 일자리 나누기, 노동시간 단축 등과 같은 것을 넘어 인간과 노동의 의미, 삶과 노동의 미래, 문화적 변화를 같이 보여준다. 그래서인지 읽으면서 수많은 문장들이 가슴과 머리에 와 닿았다. 책 제목에서 나오듯이 8시간에서 6시간으로 두 시간이 줄어들게 되면 어떻게 될까? 아마 가장 먼저 사람들이 말하는 것은 재충전이라는 단어일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음주가무나 생각 없는 시간 소비를 할 것이다. 물론 이것은 초기 단계다. 갑자기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을 주체하지 못해 생긴 일시적인 부작용이다. 이 추가적인 2시간이 계속해서 주어진다면 “여가는 개인으로서, 가족으로서, 지역사회 성원으로서, 시민으로서의 생활에서 가장 좋은 일들을 발견하고 만들어 내는, 하루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27쪽)는 문장의 의미를 되새기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사실 이 문장을 읽는 순간 이 여유 2시간은 새롭게 다가오기 시작했고, 어떻게 이런 좋은 제도가 사라지게 되었는지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 유명한 시리얼 회사 켈로그가 1930년대 6시간 4교대제를 시행하게 된 것에는 크게 두 가지 요인이 있다. 하나는 대공황으로 그 도시가 높은 실업률을 유지한 것이고, 하나는 이 제도를 적극 도입하고 장려한 루이스 J. 브라운의 역할이다. 먼저 4교대제를 바뀌면서 기존 노동자들의 급여 감소가 떠오른다. 이 부분은 사실이다. 그런데 재미난 통계는 그렇다고 하여도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이 제도를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특히 여성들의 경우 더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여유 2시간의 의미를 이들보다 더 정확하고 분명하게 드러낸 사람이 없을 것이다. 거기에 단순노동에서 오는 피로를 덜어내고 생산성을 높이는 긍정적인 효과까지 나오니 금상첨화다. 하지만 나중에 CEO가 바뀌면서 노동의 미래로 보였던 6시간 노동은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한다. “노동시간 단축 운동은 성공적인 노조 결성과 활동의 핵심 원천이었다.”(91쪽)는 문장은 현재의 노동운동을 돌아보게 만든다. 노동시간의 단축보다 야근을 더 보장해달라고 요구하고, 일자리 나누기보다 자신의 소득 증대에 더 많은 정성을 들인다. 그러니 자신이 가진 우월적 지위를 놓으려고 하지 않고, 하층업체 노동자들이나 계약직의 아픔은 남의 일로만 본다. 그렇지 않은 노조도 상당히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언론을 통해 나오는 대기업 노조의 어떤가? 일자리 나누기와 노동시간 단축은 전혀 관심이 없고, 자신들의 이익에만 눈에 불을 켠다. 물론 언론이 확대 재생산한 부분도 상당히 있다. 그렇지만 친구나 주변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드러나는 사실들은 결코 공공을 위한 모습이 아니다. 6시간 노동이 주는 정확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노조 지도자들의 관심은 직업, 임금, 그리고 손에 잡히는 혜택(유급 휴가, 공휴일, 보험, 퇴직금 등)이었고, 노동시간 단축이라는 사안은 뒤로 밀리게 되었다.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경영진과 협상을 했으니 미래의 모습이라고까지 불렸던 6시간 노동이점점 힘을 잃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처음엔 8시간 노동을 주장했던 사람들이 소수였는데 점점 더 이들이 다수로 변하는 과정은 보면서 가슴 한 곳이 아려왔다. 이 과정에서 큰 역할을 한 인물들이 오랜 경력을 지닌 남성들이었다는 사실은 철학부재의 삶과 집요한 경영자들의 노력을 엿보게 한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 저자는 단순히 역사의 나열이 아닌 노동시간의 단축으로 인한 여유 2시간이 주는 삶의 변화와 경영이론의 변화 속에서 이 2시간이 어떻게 바뀌게 되었는지 보여준다. 거기에 그 무엇보다 가슴에 와 닿은 것은 역시 일이 삶의 중심으로 옮겨간 과정과 의미다. 이 과정은 현대 노동운동과 경영자들의 이론 변화를 알려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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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졸업을 앞둔 20대들은 취업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회사에 취업한 3,40대들은 일이 많아 힘들다고 아우성이구요. 간단하게 생각하면, 일의 총량은 같을 테니 사람을 더 많이 뽑아서 한 사람당 투입되는 일의 양을 줄이면 될 것 같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만약,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회사나 정부차원에서 강제로 이런 조치를 내린다면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회사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1930년부터 1985년까지 미국 켈러그사에서 시행했던 ‘6시간노동제도’를 통해 예상되는 반응들을 살펴볼 수 있지 않을까요 ‘8시간 VS 6시간’은, 사람은 많이 뽑고 업무량은 줄였던 ‘6시간 노동제’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6시간 노동제가 도입된 배경부터, 도입이 된 다음 사람들의 반응, 그 후 회사의 요구로 8시간 노동제로 환원하는 과정에서 두 그룹으로 나뉜 노동자들의 의견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책을 읽기 전, 임금은 비록 줄어들겠지만 가족들과 더 많은 시간을 가질 수 있는 6시간 노동제에 대해 호의적인 반응이었겠거니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정책 초기 6시간제에 환영했던 사람들 중 다수는 회사측에서 더 나은 조건을 제시하자 6시간제에 대한 반대논리를 펴기 시작합니다. 가치관과 결부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들며, 6시간제를 선호하는 노동자들 역시 그에 맞선 논리를 펴고 있습니다. 결국 1985년을 끝으로 켈러그사의 6시간제는 막을 내리게 되지만, 이 과정에서 보여준 가치관의 차이는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여러 시사점을 던져줍니다. 만약 한국 회사에서 동일한 정책을 사용했다면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일이 생활의 대부분을 차지한 환경에서 생활해왔던 사람들, 그리고 가족의 구성원의 주요 역할이 ‘돌볼 수 있는 자금력 갖추기’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는 지금 가치관에서 6시간제는 우리 사회에서 환영받을 수 있을까요? 6시간제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내세울 ‘가족 가치’, ‘행복 가치’에 대해서 과연 우리 사회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8시간 VS 6시간’의 주 무대가 경제성장기 미국사회라는 점을 비춰볼 때, 그리고 성장 과정에서 사람들의 주요가치로 자리잡은 ‘성장’과 ‘자본’이라는 두 키워드가 8시간제의 승리로 이끈 과정을 보았을 때, 우리 사회에서는 어떤 반응을 보일 지 책을 읽으며 궁금해집니다. 결국 두 그룹은 ‘6시간제의 종결’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가치의 갈등이라는 점에서 ‘8시간제’의 주요가치가 결국 경제적 이해와 맞물려 승리한 예로 해석할 수 있을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삶의 질을 꿈꾸고, 행복을 노리지만, 과연 그런 상황이 되었을 때에도 우리는 그 가치들을 보존할 수 있을지, ‘8시간VS6시간’을 읽으며 다시 한 번 생각해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