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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
인류사에서 과학의 시작에 대해 막연하지만 그 기원을 따져보는 작업으로 이 책은 입을 연다. 우리가 상식선에서 인지하는 과학의 범주를 놓고 헤아리는 기원은 대체적으로 서구의 르네상스 시대 전후이지만, 이 시대의 대표적인 과학자들인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 그리고 뉴턴으로 이어지는 과학사의 계보는 사실 수천년에 달하는 훨신 오래전부터 축적된 과학적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그려진 것이다. 보통 과학이 가진 정체성을 실험과 관측이라는 매개를 통해 종교나 연금술 등의 미신과 대비되는 관점에서 접근하면 과학의 시원을 서구 르네상스시대로 보는 인식은 일견 타당하다. 그러나, 대비되는 타 영역과의 상대적 관점에서의 과학의 태동 역시 그저 희대의 천재에 의해 어느 날 불쑥- 제기되고 간간히 출연한 천재들이 그 가는 끈을 근근히 이어감에 따라 발전되어 현재에 온 것은 아니다. 이 책에서 '편집된' 이라는 용어는 기존의 과학사가 일률적으로 보여주는 이런 단편에 의한 연속성(이를테면 '----' 점선과 같은)의 문제를 지적하고, 더 나아가 '과학'이 서양문명사 내에만 존재한 독특한 우월성의 근거가 아님을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로 사용된 듯 하다.
상호작용
과학의 기원을 이야기하자면 주관적인 판단의 개입을 배제할 수 없다. 이를테면 원숭이가 인간으로 진화해가는 과정이 어느 시점에서의 단절을 통해 확연히 전(원숭이)과 후(인간)가 구분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다보니 과학의 기원을 인류가 자연의 법칙을 이해하고자 탐구하는 노력이라는 비교적 넓은 범주를 적용하면 인류문명의 기원과 비슷한 시기까지 확장이 가능하다. 이 책은 그런 확장을 과감히 허용하는데. 애초 이 책에서 담고자 하는 이야기 중 하나가 과학사라는 것이 몇몇 소수의 뛰어난 과학자들에 의해 주도된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라는 주장이고 보면 그런 관점의 차용은 당연하지 싶다.
이 파트에서는 중국, 고대 그리스, 이슬람 등이 각기 자연을 이해하고 탐구하기 위해 어떤 과학적(?) 시도들을 전개하였는지를 병렬적으로 보여준다. 결국 근대 화학의 학문체계 수립의 기초가 된 연금술의 문제로 귀결되어 다소 산만하고 생뚱맞기까지 한 구성을 보여주지만, 결국 서양과학의 모태가 아리스토텔레스로 대표되는 고대 그리스의 (수학 및 과학의 개념이 혼재된) 철학만이 아닌 동 서양의 다양한 상호작용의 산물임을 설명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실험
탐험에서 관측.. 그리고 실험으로 이어지는 서양과학의 독자적 발전단계를 다룬다. '지리상의 발견(Geographical Discoveries)'이 한창이던 이른바 「대항해시대(大航海時代)」 라 일컬어지던 16세기의 '탐험'부터, 막강권력인 종교의 교리에 반하는 이론의 주장을 통해, 과학자로서의 '소명'을 논할 때, 늘 사례처럼 따라나오는 코페르니쿠스과 갈릴레이의 지동설과 관련된 '관측'을 지나, 지금은 세계최고의 스마트폰과 MP3 제조사가 된 애플사 상징의 시원인 뉴턴의 빛과 관련된 다양한 '실험'까지를 소개하며, 근대 과학적 접근방식의 틀이 어떤 시대적 배경 하에서 윤곽을 잡아가는지를 보여준다.
제도적 장치
서양에서 과학이 타 지역과 차별적인 발전을 보일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하고자 할애한 파트이다. 과학이 정치와 결탁하는 대표적인 사례를 보여준 학회로부터, 과학적 업적이 산업의 발달과 연계되면서 돈벌이 및 신분상승의 수단으로 과학의 입지가 자리매김하게 되는 과정까지 과학사 이면의 뒷 이야기들을 주로 다룬다. 개인적으로 판단하건데 이 책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파트이지 싶다. 여기서 다루는 대부분의 내용은 정치, 경제, 그리고 사회적 변화가 과학사에 어떤 영향을 주었으며, 따라서 동 시기의 과학적 업적이 순수한 학문적 열망하고는 거리가 먼, 철저히 정치적이고 상업적이며 시대영합적인 결과물임을 피력한다.
법칙..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
이 두 파트는 사실 분량이 많고 세계대전(결국 유럽이 주축이 된 그들간의 전쟁이지만)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축으로 시간의 전후관계를 나눌 필요성에 의해 임의로 분리된 느낌으로.. 하나로 묶어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제도적 장치」 에서 언급한 원리가 시대의 흐름 속에서도 큰 원칙이 흔들리지 않고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동 시기에는 비교적 세분화되어버린 과학의 각 파트(물리.화학,천문,지질,생물,의학 등)별 주요 인물을 중심으로 한 발전과정 및 서로간의 영향을 병렬식으로 서술했다.
결론
핵전쟁 위험, 유전자변형 이슈, 환경문제 등 최근 인류의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는 과학기술의 결과물(결국 이는 산업발전의 부산물이기도 하다)의 문제들을 다룬다. 보다 편리하고, 보다 쾌적한 삶을 누리고자 인류에 지속적으로 기여해 온 과학기술이 결국 양날의 검처럼 인류 스스로에게도 커다란 위협이 되고 있으며, 이는 과학기술 자체가 가진 '무도덕성'의 한계에서 기인한다는 것으로 이 책은 결론을 맺는다. 과학기술이란 마치 칼과 같아 요리를 하거나 도구를 만드는데 사용될 수도 있지만, 잘못 사용될 경우 타인이나 자신을 해치는 흉기가 될 수 있으니, 결국 모든 공과는 사용하는 사람의 몫이다.. 라는 식 쯤 된다.
이 책이 이야기하는 바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다. 하나는, 처음에도 언급한 것처럼 과학의 역사가 일부 뛰어난 과학자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이어져온 '그들(넓게는 서구의 백인남자에서 좁게는 몇몇 천재과학자까지..)만의 리그'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른 또 하나는 과학의 역사가 순수한 학문적 열망이 쌓은 상아탑의 역사도 아니라는 것이다. 과학은 끊임없이 정치 및 산업과 밀월관계를 유지해 왔으며 앞으로도 절대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필자는 말한다. 과학기술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과학기술이 너무도 쉽게 억압과 지배의 수단으로 유용될 수 있는 여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명확한 한계는 제기한 이슈가 그저 '문제제기' 단계에서 끝나버린다는 점이다. 지루할 정도로 길게 과학의 역사를 나름 신선한 관점에서 피력하고 있지만, 과학기술의 중립성이라는 문제가 가진 근본적 한계에 대해서는 손을 탁- 놓아버렸다는 느낌이 든다. 과학의 성취가 중립적이라면 결국 사용하는 사람의 책임이라는 문제는 당연한 이야기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이 '모두 어깨에 날개가 달려 자동차가 필요없는 천사들의 세상'이 아닐진댄, 과학기술이 눈앞에 이익이나 정치적 이해관계 속에서 공익이 무시되는 방향.. 심지어는 인류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방향으로까지 왜곡되게 사용될 수 있음은, 지폐를 행인이 많은 바닥에 흘려 놓고 다음날 그 자리에 가보았더니, 지폐가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더라.. 라는 개연성 만큼이나 그리 놀라운 것이 못된다.
그 밖에도, 결국 처음에 설정이 모호한 과학의 단계에서만 중국이나 이슬람의 과학체계가 언급된 점, 중간 이후부터 몇몇 유명한 과학자들 중심의 논의방식이 재개되면서 기존의 틀을 깨려던 애초의 시도가 다소 무력화되었다는 점 등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제목에 붙은 '우리가 미처 몰랐던..'이라는 표현이 어찌 어울리지 않는다 싶을 정도로 후반부는 여타 과학사 서적들과의 차별성을 부각시키지 못했다. 이 부분을 읽어가면서는 개인적으로는 이 책의 저술의도가 무엇인지.. 조차 감 잡기 힘들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그 문제제기 만으로도 충분히 읽을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과학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과학의 무책임한 무도덕적 중립성에 편승해 스스로에게도 심각한 위협요소를 수수방관하고 무감하게 살아왔는지를 새삼 느껴보는 계기를 마련해 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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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법 시간을 내어 마침내 책을 다 읽어냈다. 특별한 이유가 없었다면 아마 이 책을 접하지 않았을 것이고, 혹 접했더라도 끝까지 읽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말 쓰레기 같은 책도 있기야 하겠지만, 초중반까지 읽을 때는 시간낭비가 아닌가 의구심을 가지다가도 끝까지 읽었을 때에야 비로소 배울 점을 찾는 책들도 있기 마련인데, 이 책도 그런 책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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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된 과학의 역사>는 현재 과학이 지난 수세기에 걸쳐 집약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고정관념을 깨기 위해 만들어진 책이다. 그래서 이 책의 원제도 <A Four Thousand Year>즉 사천년의 역사로 명명되었다. 과학의 역사는 지난 몇백년이 아닌 4000년간 쌓이고 쌓여서 내려온 것이라는 이 책의 의도는 그 의도 자체만으로 칭찬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역시 이 책에도 지난 4000년의 '서양'과학의 역사만 수록되어 있다. 중국과 이슬람, 4000년의 역사중 3600년 이상을 과학을 주도하고 지배한 두 문명에 대한 이야기는 각각 하나의 얇은 챕터만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결국 이 책은 한발자국 나가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것으로 편집된 모든 과학의 역사를 다 살리지는 못했다. 이 책은 그저 시간을 조금 늘린 왜곡된 '서양'과학의 역사를 담고 있다. 나는 그 무식한 용감함이 놀랍고 어떤 면에서는 존경스러우며 경멸스럽다. 그리고 이것은 현재 문명을 지배하고 있는 '서양'과학에도 그대로 그 모습이 드러나고 있다.
그런데, 서양 과학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동양 과학도 있단 말인가? 그리고 과학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일단 이 부분부터 확실히 하고 넘어가자.
아무래도 내 직업이 직업이다보니 의료와 생명에 관한 부분에 대해 집중적으로 생각해보자. 어차피 과학이라는 녀석이 가장 실용적으로 쓰이는 분야가 바로 의학일테니 말이다. <편집된 과학의 역사>에서는 역시 서양 과학을 다루면서 의학의 발전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다. 특히 이 책은 서양의학의 발전상중에서 해부학을 통한 인체의 연구에 대해 그 지면을 많이 할애하고 있다. 그와 동시에 역시나 동양의 이야기는 전무하다. 그렇다면 과연 동양의 의사들은 해부학을 하지 않았을까? 우리는 동양의학은 동양의 유교적 문화 전통대문에 해부학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물론 사실이 아니다. 동양의 의사들 또한 해부하고 수술하고 꼬메며 환자를 고쳤다. 이 책에서 과학의 발전에 대해 가장 중요한 동력으로 제시하는 것 중 하나는 바로 전쟁이다. 이 전쟁이라는 녀석은 지금까지의 세계를 파괴하지만 그보다 더 기술이 진일보하는 세계를 쌓아가는데 슬프게도 없어서는 안될 녀석이다. 의학이라는 것 역시 이런 틈바구니에서 점점 발달하기 시작했다. 전쟁이 나면 외과의 처치는 발전할 수 밖에 없다. 해부학 실습? 하기 싫어도 어쩔수 없이 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것이 바로 전쟁이다. 과연 그 전쟁은 서양에서만 일어난 사건사고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중국이든 한국이든 일본이든, 비록 몇백년간의 절대군주제가 지탱되어 왔다고 하지만 그 사이에도 중국은 변방 민족과의 전쟁을 수도 없이 치러냈으며 한국 역시 수많은 외침과 내분 등으로 전쟁은 끊이지 않았다. 그 사이 동양의학 역시 해부학과 외과 처치에 대해서 서양 이상으로 발달하면 했지 절대 뒤지지 않았을 것은 자명하다.(그 당시까지의 문명 수준으로 보았을 때 의학만 서양이 동양보다 발전했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지만 이런 동양의학의 내용은 이 책에는 전혀 수록되어 있지 않다. 또한 전쟁시에 많이 나올수 밖에 없는 전염병에 대한 분야 역시 동양의학의 과학적 우수성을 쉽게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사실상 동양의학이 실용적학문, 즉 의학으로 첫발을 내디딘 전환기가 전한시대 수많은 전염병과 감기로 고생하는 사람들을 고치기 위해 나온 [상한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책에 수록된 처방과 병기들은 비록 그 의미(과학의 발전으로 바이러스와 세균 등등이 밝혀졌으므로)가 지금과 일치하지 않더라도 그 당시의 의미체계, 문자체계로서 그 내용을 훌륭하고 '논리'적으로 충분히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내용은 역시 이 책에도 편집되어 있을 뿐이다.
서양의학과 동양의학. 서양과학과 동양과학. 사실 이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서양의 과학과 동양의 과학 이것은 서로 같은 것을 의미한다. 과학은 그냥 과학일 뿐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왜 '서양'과학이라 명명하고 '동양'과학이라고 명명하였을까. 우리가 지금까지 과학은 모두 '서양'과학만을 의미한다고, 즉 과학이란 오로지 서양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것을 분명히 하고 넘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과학은 분명 한가지다. 그것은 논리, 인간의 이성을 통해 발전하는 오로지 하나의 사실이다.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다는 사실, 물건은 아래로 떨어진다는 사실 이것은 모두 하나다. 그렇지만 그것을 우리는 오로지 서양의 목소리로만 들어왔다. 동양에도 이와 같은 생각을 하고 이야기를 한 사람들, 기계를 만들고 수학을 공부한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와 목소리야말로 진실로 편집되어 있다. 이 책이 진정 편집된 과학의 역사를 다룰려는 작정이었다면 4000년간 이어져온 서양과학의 이야기가 아니라, 3500년간 과학을 선도한 다른 문명의 이야기와 그것들을 받아들이고 제대로 집약하여 폭발시킨 500년의 서양과학의 역사를 다루었어야 마땅하다.
'서양'과학은 왜 발달하게 되었는가?
나 역시 궁금하고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점이다. 최소한으로 잡아도 3500년 이상 앞서있던 '동양'과학은 어째서 '서양'과학에게 그 왕좌를 넘겨주게 되었을까. 책에서는 동양의 절대군주 체제와 서양의 봉건사회의 영주체계에 주목한다. 즉 안정적인 지배체계와 불안정한 지배체계하에서 혁신의 동기가 그만큼 차이를 나타나게 했을 것이란 말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견을 보이지 않을 듯하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여전히 궁금하다. 정말로 이러한 지배체계 속의 원동력 차이가 서양문명에서 과학혁명을 일으키게 되었을까? 이 부분에 대한 생각은 여전히 그저 궁금증으로 남게 될 것이다. 어찌 되었든 현재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배체계의 차이, 즉 안정성과 불안정성에서 서양 과학혁명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작 우리가 이런 식으로 생각한지는 불과 얼마 되지 않았다. 우리는 과학이라는 종교를 맹신한 이래 인간의 존재를 초월적, 신적 존재로 인지하기 시작했다. 인류는 곧 만능이 될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이러한 와중에 과학 문명을 폭발시킨 서양인과 그렇지 못한 동양인과 아프리카,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을 계급화시켰다. 결국 백인은 유능한 종족이며 황인종과 흑인종은 열등하다라는 인식이 수백년의 시간동안 축적되고 세뇌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아직도 공식적으로는 표명할수 없어도 우리 생각속에 은밀히 침투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이 인류의 과학이었다. 우리는 불과 몇십년 전만 하더라도 인종에 우열을 가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우생학은 과학에 그 근저를 점유하고 있었다.
과학은 가치중립적인가
이곳에서 다시 이 질문이 시작된다. 과학은 가치중립적인가. 책에서는 원자폭탄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과학의 가치중립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 책 역시 과학의 가치중립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결론에서 결국 과학은 가치중립적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말이다. 맞다. 나 역시 과학은 가치중립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역시나 그 과학을 쓰는 사람들이 더욱 중요한 법이라고 생각한다. 같은 칼이라도 사람을 죽일수도 있고 살릴수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한가지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과학을 쓰는 사람이 더 중요하다고 해도 역시나 과학 역시 가치중립적일 수 없다는 점이다. 물론 과학기술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지 결정하는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고자 하고 싶은 것은 그렇다고 해도 과학이 절대 중립적이지는 않다는 점이다. 과학은 중립적인가. 아니다. 중립적이라면 과학은 결코 이렇게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실험자의 가설부터 가치중립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과학의 가장 기본은 재현성이다. 실험을 통해서 항상 같은 수치를 넣으면 같은 결과가 나오는 것. 이것의 과학의 기본이다. 그렇다면 이 실험을 통한 법칙을 만들기 위해서는 결국 가설이 필요하다. 이 가설이 존재하지 않으면 실험은 성립할 수 없다. 그리고 이 가설에서부터 이미 과학의 가치중립성은 깨지고 만다. 애초에 가설자체가 중립적이라면 과학 자체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뉴턴이 왜 사과는 항상 아래쪽으로 떨어질까를 고민하는 순간, 그것이 서로를 끌어당기는 만유인력이라는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하면서 실험을 한 순간, 현상에서 법칙으로 넘어가는 순간 진실은 중립을 소멸시켜버린다. 현상은 중립적일지 몰라도 그것이 과학이 되는 순간 그것의 가치는 편향적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 기술을 통해 세계를 지배하는 사람들의 손에서 경직되고 멈출 수 없게 되어버린다.
또한 과학이 종교의 역할을 대신하면서 더욱 가치라는 것을 과학 안에서 찾을 수 밖에 없게 되었다. 현재의 인류의 영화에는 과학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다. 과학이라는 것이 없었다면 우리는 절대 이렇게 책을 쉽게 읽지도 못했을 것이며 이렇게 서로의 생각을 인터넷이라는 매체를 통해 공유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런 과학문명에 대해 고마움이 없을 수는 없다. 하지만 어느덧 이런 고마움이 숭배의 대상으로 넘어가버렸다. 과학이라는 이름은 이제 전지전능을 대신하게 되었다. 과학에는 어떤 반론과 의문도 존재하지 않는다. 과학을 만든것은 의문과 반론이었지만 이제는 그것이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더이상 의문을 제시하지 못하게 한다. 그것은 단지 '과학'한마디면 족하다. 모든 일은 이제 과학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인류는 빵만 먹고는 살아갈 수 없지만 이제 점점 과학이라는 것만 먹임을 당하며 살아가고 있다. 보이지 않는 것은 더이상 믿을 수 없는 허황된 것으로 치부된다. 정신적인 영역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점점 인간의 정신마저 과학으로 컨트롤이 가능하다고 믿는 세계를 살아가고 있다. 사랑이라는 것 역시 단순한 호르만과 뇌의 영역으로 치부된다. 점점 인간의 영역은 줄어들고 있으며 그 안에 과학이 대신 자리잡고 있는 지금. 과학의 가치중립성이라는 만능이 이미 새로운 가치를 대신하고 있다.
과학은 인류의 미래에 불을 밝혀줄 수 있는가
인류가 과학이라는 종교에 빠진지 수백년의 세월이 지났다. 그리고 점점 그 한계가 보이기도 하고 아직 안보이기도 한다. 과학은 지금도 소리없이 미친듯한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20년전,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우리가 상상하는 2000년대의 기술중 하나는 바로 무빙워크와 영상전화였다. 우리가 가만히 있어도 알아서 우리를 움직여주고, 서로 전화기를 '가지고 다니며' 심지어 그 안에서 서로의 얼굴을 마주볼 수 있는 장면이란!! 우리가 정말 상상으로만 가능하던 것이 불과 20년도 되지 않는 시간동안 상상 그 이상의 것을 가져다 주었다. 그리고 그런 과학의 끝은 아직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과학 역시 여전히 자신의 한계를 극명히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그렇게 발달한 과학 역시 아직 인간을 고치기 위해서는 많은 장애물앞에 놓여있다. 물론 과학이 불치병으로 생각되던 많은 질병을 더욱 손쉽게 고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러한 큰 바위 사이의 너무도 미세한 자갈과 모래들에서는 여전히 그 한계를 보이고 있다. 고령화시대로 넘어가면서 인류의 의학은 점점 cure가 아닌 care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서양과학의 위력앞에서 인류의 평균수명은 이제 100세마저도 넘보고 있는 시점에서, 인류는 이제 늙어갈뿐 점점 느리게 죽어간다. 그러나, 살고 있다고 해서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런 노인들의 care적인 측면에서 아직 서양의학은 그 한계를 여실히 느끼고 있다. 또한 서양문명의 극대화속에서 첨예하게 늘어만 가는 스트레스로 인한 질병들. 쉽게 말해 검사결과는 정상이지만 증상은 여전히 호소하는 정체불명의 증상들은 점점 늘어만 간다. 그리고 이러한 보이지않지만 실체는 있는 증상과 질병들 앞에서 서양과학과 의학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뿐이다. 이것보다 더욱 큰 문제는 전세계 인류의 절반에 육박하는 인구의 빈곤상태이다. 이 책에서도 역시 이부분을 북과 남의 문제로 다루고 있다. 그리고 이 책에서 유일하게 건질만한 부분이다. 인류는 이렇게 초고도로 집약된 문명상태에서도 여전히 인류 절반에 해당하는 인구의 빈곤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그리고 해결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 과학의 가치중립성이란 말도 안되는 거짓이라는 것이 증명된다. 과학은 북쪽에서만 가치 중립적일 뿐이다. 아직도 남쪽의 인류에게는 과학은 가치중립적이지 못하다. 그 과학이 가치중립적이라는 종교 아래 여전히 희생당하고 있다. 이 부분 역시 결국 사람들이 문제라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 과학, 사람이 만들었다. 과학은 이미 돈이 되는 것에만 가치를 투자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말라리아 치료제 따위에 과학은 신경쓰지 않는다. 환경에 대한 부분 역시 마찬가지다. 과학의 발달과 인류의 무자비함 속에서 인류가 쓸 자연과 환경이란 녀석은 서서히 황폐화되어갔다. 그리고 이것을 이제 다시 과학으로 환원해야 할 시대에 우리는 놓여있다. 하지만 역시 이부분에도 문제가 산적해있다. 그리고 이 문제가 매우 어렵다. 그것은 바로 현재 절대적 빈곤을 겪고 있는 국가들, 더욱 잘살아야 하는 개발도상국의 발전과 직접적으로 맞닿아있기 때문이다. 그간 수백년의 세월동안 선진국에 의해 환경은 파괴되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들에 의해서 파괴되고 있으며 이제 서서히 환경문제에 발목이 잡히고 있는 그들은 환경을 생각하자며 전지구적 움직임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그런 움직은 위에 말한대로 개발도상국의 발전을 방해할 수 밖에 없다. 정작 파괴당한 개발도상국들이 그 고혈을 빼먹은 선진국에 의해 발이 묶이고 있다. 물론 환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전지국적 움직임은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움직임에는 선진국들의 파격적인 양보가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아무도 그런 양보에는 동참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부분에 과학이 적극적으로 나서야함에도 불구하고, 과학은 그 부분을 외면한다. 정확히는 선진국의 과학자들이 그 부분을 신경쓰지 않는다.
물론 이러한 문제들 외에도 생명윤리와 같은 문제도 있으며 핵전쟁과 같은 인류의 파멸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부분도 있다. 이것들은 모두 과학의 발전에 따라 생길수밖에 없는 문제였고 결국 생겨버린 문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과학에게 그 죄를 씌우고 폐기처분해서도, 경원시해서도 안된다. 이것을 해결해야 할 '도구'는 과학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문제를 과학이 해결할 수는 없다. 과학은 단지 도구에 머물러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해결하는 것은 사람이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과학의 가치중립성과는 다른 문제다. 과학은 전혀 가치중립적이지 않다. 우리시대의 과학은 더이상 도구로서의 과학이 아니다. 우리시대의 과학은 종교 그 자체다. 과학이라는 이름 아래에 모든 인류가 머리를 조아리고 있다. 그러나 과학의 맹신으로는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 이제는 정말로 과학을 가치중립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과학을 그저 도구로써 바라보고 그것을 사용할 사람들에게 더욱 주목해야 한다. 그래야 진정 이 문제를 해결하고, 그토록 과학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과학의 가치중립화가 이루어지는, 진정 과학으로 인류의 미래를 환히 밝힐 수 있는 그런 세상이 올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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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트리샤 파라의 <편집된 과학의 역사>의 원제목은 “Science: A Four Thousand Year History”이다. 즉, 과학의 역사 4천 년 (바빌론 시대부터 과학이 시작되었다고 하고 있기 때문에)을 조망하는 책이다. 그런데 그 과학의 역사가 우리가 무심코 받아들였던, 혹은 그렇다고 일반적인 교과서에 적혀 있는 것과는 조금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편집’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번역 후에 우리나라에서 한 해석일 것이고, 제목일 것이다.) 그렇다면 저자가 가장 공들여서 깨버리고 싶었던 ‘편집된 과학의 역사’는 과연 무엇일까? 물론 4천 년의 과학의 역사 대부분이 그렇게 편집되었다고 하지만(물론 역사라는 것이 편집의 역사이긴 하다), 내가 생각하기엔 과학의 영웅들에 대한 다른 해석이 가장 눈길이 가는 내용이다. 우리는 놀라운 과학 업적을 이룩한 과학의 영웅들, 이를 테면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뉴턴, 멘델, 다윈,아인슈타인 등 (그리고 DNA 구조를 밝혀진 왓슨 크릭까지) 거의 과학에만 헌신한, 그리고 놀라운 통찰력으로 자신의 업적을 이룩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놀라운 영웅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것이 퍼트라샤 파라의 주장이다. 연금술에 더 매진한 뉴턴의 경우나 지동설에 대한 갈릴레오의 신화화(“그래도 지구는 돈다”)에 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만, 몇 가지만 더 살펴보면 이렇다.우선 아인슈타인에 대해서는 그의 업적이 혼자서 책상에 앉아 연필만 가지고(게다가 특허청 업무가 너무나 따분해 쉬는 시간에) 이룩해 낸 것도 아니고, 그의 이론이 옳다는 것을 입증한 에딩턴의 일식 조사도 조작되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그(아인슈타인)가 과연 그런 영예를 차지할 자격이 있는지 확실하지 않아 보인다. 첫째,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이론을 개발할 때 다른 수학자들의 연구에 크게 의존했다. 실험을 통해 일반 이론을 입증한 사건도 자세히 보면 의심할 구석이 있다. 아인슈타인은 1919년 갑자기 언론을 타고 스타가 되었다. 케임브리지 천문학자인 아서 에딩턴이 이끄는 영국의 일식 조사단이 아인슈타인이 옳고 뉴턴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했다고 말한 바고 그 시기였다. 조사 계획이 구체화될 무렵 에딩턴은 양심적 반전운동에 가담한 전력 때문에 감금될 위기에 처했고, 에딩턴은 이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대책을 강구해야만 했다. 비군사적 프로젝트에 대한 지출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에딩턴은 솔선하여 아인슈타인의 정당성을 입증하는데 전념했으며, 실험이 아주 간단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중략)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한 에딩턴은 자료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중략) 일상의 현실을 초월한 것처럼 보이는 허망한 속물들처럼, 과학적 영웅들도 숭배의 대상이 된다. 아인슈타인은 가장 추상적인 사상가조차도 이상적인 관점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을 몸소 보여주고 있다.” (406~407쪽) 파스퇴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사실 요즘 몇 번 파스퇴르에 대한 기사를 블로그에 올린 바가 있다. 거기에서는 권력에 집착하는 모습과, 생전에 그리고 사후에 그가 영웅화되는 과정에 대한 비판이었다면, 이 책에 서 그에 대한 비판으로 가장 핵심적인 것은 그가 중립적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파스퇴르는 연구에 임하면서 중립성을 유지하지 않았다. 그는 원하는 결과를 미리 염두에 두었다. 파스퇴르가 자랑스럽게 외친 ‘우연은 준비된 자에게만 호의를 베푼다’는 표현이 과학계의 유명한 금언이 된 까닭도 순수한 백지 상태로 과학에 접근해서는 큰 성과를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공은 종종 그 전까지는 무시했던 작은 효과들의 중요성을 깨달을 때 가능하다. 비판적으로 말하면, 파스퇴르가 무엇이 옳은지를 추구하지 않고 자신이 옳다는 것을 입증할 증거를 추구했다는 뜻이다. 야심차고 편협했던 파스퇴르는 보조연구원들의 실험 결과를 도용했던 것으로 악명이 높았으며, 푸셰와 논쟁에 돌입하기도 전에 이미 자신이 얻어야 할 결과를 정해놓았다.“ (414쪽) 그런데 사실은 요즘의 과학 활동(적어도 생물학 분야)은 결과에 대한 예측과 그것을 입증하기 위한 실험이 대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중립성’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이냐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겠지만, 적어도 결과를 조작하지 않는 한에서는 결과에 대한 자신의 예측을 세우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 않을까 하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이런 면에서 파스퇴르에 대해서 비판할 점은 많겠지만, 이 부분에서는 과도하지 않은가 싶다. 과학에서 영웅을 만들어내는 것과 영웅으로 칭송되는 이들의 불완전한 면을 드러내는 것, 어떤 쪽이 옳은 것인지, 아니 바른 태도인지는 분명하지는 않다.단순히 에피소드만을 모아놓은, 과학 이면을 들춰보겠다는 의도만을 가진 책이 아닌 이상, 저자의 과학의 영웅들에 비판은 분명히 자신의 의도를 드러낸 것이다. 과학의 역사에 대해서 깊은 조망과 함께, 과학의 역사에서 지워버릴 수 없는 개인의 역할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했다. (2011.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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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가 공공행진을 계속하고 있다. 나라 안밖에서 에너지위기를 외치고,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우리의 생활은 힘들어질 것이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안해하고 견디지도 못할 것이다. 과학문명의 혜택은 어느덧 우리는 당연시 여겨져 왔고, 그 생활에 안주해 있다.
핸드폰 시장도 급변한다. 불과 몇년전까지만 해도 큼직한 무전기폰부터, 폴더, 슬라이딩, 이제는 스마트폰 시대다. 그러나 문제는 편리한 측면도 있지만, 불편한 것도 잃은 것도 많다. 사실 전화용도외에 인터넷, mp3까지 갖추어져 모든 기능을 한손에 다 할 수 있지만, 전화감도도 떨어지고, 터치로 하려니 급할 때 전화걸기가 쉽지 않다.
세상의 흐름과 유행에 뒤쳐지지 않기 위해, 과학문명속에 살아가지만, 인간들은 모든 것을 과학에 맡겨버린다. 생각도 행동도 기계문명에 맡겨 무뇌아상태가 된다. 핸드폰중독에 빠져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것이다.
[우리가 미처 몰랐던 편집된 과학의 역사]는 그동안 과학에 관한 모든 내용을 집대성했다. 과학의 기원부터 유럽과 중국, 이슬람지역의 과학사도 살펴본다. 과학이 과학다워지는 위대한 실험이야기, 과학이 외형화를 갖추기 위한 정치와 결탁하고, 발전이라는 이름뒤에 숨겨진 과학의 탐욕스러운 면까지 건드려본다. 역사적 상황을 보더라고 전쟁속에서 과학은 끊임없이 진보하고, 지금도 서로의 국력을 과시하듯 우주개발도 뛰어들고 있다.
과학의 뒷이야기는 많다. 하비가 인간을 비롯한 동물 심장에 대한 연구를 하고, 파블로프가 수많은 개를 대상으로 실험을 하면서도 개들의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을 했다. 뉴턴은 빛과 색에 관한 연구과정에서 자신의 눈까지 찔러가며 실험을 했다는 점은 놀랍기만 하다.
과학실험부분에서는 갈릴레이 이동거리 계산, 뉴턴의 빛과 굴절률 이어서 마이컬슨의 빛의 속도와 빛의 파동과 에테르의 흐름에 관한 실험은 흥미를 자아낸다. 또한 라부아지 실험속에 나오는 플로지스톤 개념, 패러데이가 전동기와 발전기 발명과정, 나아가 줄의 에너지, 열의 개념은 우리 생활을 다시 돌아보게 한다.
과학사에서 빠질 수 없는 부분은 천체, 하늘에 대한 이야기다. 고대 바빌로니아인들은 하늘의 별자리, 달을 통해 수치를 계산했고, 생활에 이용했다. 하늘에 대한 외경심은 후대의 과학자에게 인간의 사고영역을 무한히 확대시켜준다. 빛의 속도를 이용한 우주의 크기와 거리를 측정하는 올레 뤼머, 브래들리,레옹 푸코, 마이컬슨의 실험들이다.
아직도 신비로운 우주에 관한 이야기는 계속적으로 우주에 관한 책을 구입하게 하는 동기를 만들어준다. 아마도 내가 가지고 있는 과학의 90%가 천체, 우주에 관한 책인 것을 보면, 무한대의 세계에 대한 동경인 듯 싶다. 왜 그토록 과학에 대한 믿음을 가지는 것일까. 과학이 떠받치고 있는 객관성 때문이다. 우리에게 모르는 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을 해소시켜 줄 수 있는 희망의 열쇠다.
그러나 과학기술만이 최선의 선택일까..점차 기억속에서 사라져가는 광우병사태.구제역으로 수요가 부족하자 이제는 아무런 의심없이 쇠고기가 수입되어오고, 대운하사업이 다른 이름으로 바꿔가며 우리의 환경을 훼손해가고, 지구온난화로 인한 고병원성 조류독감이 난무하고 있다.
과학의 책무는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여의식이 필요함을 느껴본다. 노벨과학수상자를 9명이나마 배출한 과학대국, 한해 21억권의 만화책을 출간하고 만화백화점이라는 '만다라케'를 가지고 세계의 모든 출판물이 6개월내 번역되어 나오는 출판강국, 휴먼로봇 아시모 큐리오, 그리고 강아지로봇 아이보의 로봇왕국, 시민천문대가 200개 이상이고, 우주항공과 광학분야에서 최고수준을 달리는 일본은 시민들의 참여의식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책을 덮으면서, 오랜 세월을 걸어 온 과학의 역사를 살펴보며 우리의 과학 미래를 그려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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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는 과학의 정의에 대해 언제, 어디서 누가 보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정보, 기술, 대상은 끊임없이 이동하고, 세대를 이어 전달되며, 특정한 요구와 취향에 맞게 변한다. 전통적인 전문 지식이 영감에서 비롯된 통찰력을 앞서면서 많은 혁신을 일으킨 점에 주목하고 있다. 서양 중심의 과학관, 더 나아가 세계관을 비판하면서도 사람들이 늘상 갖는 의문은 ‘그래도 현재까지 이어지는 인류 문명에 기여한 건 유럽’이라는 관념이다. 저자는 중국과 이슬람의 과학을 조명해 과학사에 기여한 중심문명이 유럽이라는 통설도 반박한다. 고대 그리스의 유산을 물려받아 전파한 이슬람 세계의 기여와 나침반, 화약 등 250여 가지의 발명품이 제작된 중국의 진면목을 밝혀냈다. 르네상스 시대의 유럽은 국제적인 탐사로 더욱 달아올랐고, 상업적 교역이 성행하면서 기술과 지식, 생물학적 표본들의 국제적 교류가 이뤄졌다. 상업적 교역이 성행하면서 기술과 지식, 생물학적 표본들의 국제적 교류가 이뤄졌다. 또 현대 과학의 특징인 실험적 접근법은 서서히 발달했지만, 여전히 성서는 지식의 주요한 보고로 여겨졌다. 이에 따라 고대의 개념들과 현대 과학의 개념들이 공존하게 됐다.
케플러나 갈릴레오, 뉴톤과 같은 과학자들이 분명 뛰어났지만 오늘날 그들의 명성이 뛰어난 이유에 대해서 과학의 발전을 이유로 들었다. 과거 고전과 성서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시절에는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그들의 가치를 인식했지만 21세기가 시작되자 과학은 세계를 지배했고 뉴톤은 어느 시대의 누구보다도 유명한 인물이 된것이다.
과학은 법칙, 화학법칙이나 기계같은 완성품이 아니라 산업,상업, 전쟁, 정부,의학과 같은 사회의 여러분야와 얼키고 설킨 통합체라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위대한 천재들에게만 초점을 맞춰 과학을 바라보면 18세기에는 주목할 일이 전혀 없는것처럼 보인다. 18세기는 빅토리아 시대의 산업화로 변모하기 시작한 시기이다. 기업가들은 사회와 직업구조를 개선하고 세계과학을 바꾸게 될 기회에 자금을 지원했다.
20세기 과학활동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냉전을 거치면서 국가나 기업의 재정 지원을 통해 관련 종사자의 수, 비용의 규모 등 모든 면에서 양적으로 팽창했다. 그로 인해 대형기기를 중심으로 수백, 수천 명의 전문 연구자와 엔지니어가 참여하여 하나의 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거대과학(Big Science)이 탄생했다. 과학기술의 어두운 면이 부각되기 전까지 과학은 대중에게 혜택과 희망, 무한한 낙관을 심어주었으나, 점차 과학과 연관된 사회적 논쟁들이 치열해지면서 과학에 대한 시선이 달라졌다.정부와 상업적 기구들이 과학 연구에 대한 자금 지원을 확대해감에 따라 원자력, 무기, 우주, 유전학 등으로 관심사가 이동되었고, 더 많은 발견과 개발이 이뤄졌다.
과학 연구 프로젝트의 규모가 커지고 기업들은 물리학자들을 고용해 원자력과 무기, 우주여행에 초점을 맞췄다.하지만 과학의 야누스적인 두 얼굴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시기가 도래되었다고 본다. 지난 세기 과학은 인류에게 빛과 그림자를 함께 드리웠다. 현대 과학기술은 생활의 편의를 제공하고 질병을 퇴치하는 등 우리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우주개발과 생명공학에서 볼 수 있듯 인간의 가능성을 무한히 확장시킨다.그러나 한편으로 과학기술이 전쟁에 이용됨으로써 인간을 살상하는가 하면 생태계를 파괴해 인간을 더 큰 위기로 몰아넣기도 한다는점에 대해 한번쯤은 경계의 시선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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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사가 도전과 응전의 역사라면 과학사는 실험과 실패의 역사다. 어릴 때부터 갈릴레오, 뉴턴, 에디슨, 퀴리 부인 등의 위인전을 읽으며 우리는 무수한 실험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좌절하지 않고 끝내 과학사의 한 페이지를 영광스레 장식한 위대한 성공을 기억한다. 역사서의 페이지가 왕후장상과 영웅들의 이야기로 점철되듯 과학사의 페이지도 과학계의 천재들과 수재들의 이야기로 장식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케임브리지 대학의 과학사가 퍼트리샤 파라는 [우리가 미처 몰랐던 편집된 과학의 역사](21세기북스, 2011)에서 위대한 발견자나 발명의 영웅들보다는 그런 발견과 발명을 이룩할 수 있었던 사회적 맥락을 강조하고, 과학사는 ‘편집된 역사’라고 못을 박는다. 머릿속에 ‘가위와 풀’을 떠올리게 하는 ‘편집된’이란 말은 선택과 배제의 메커니즘을 전제로 한다. 이는 과학사를 올바로 보기 위해서는 선택된 것과 일부러 빠트린 것을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는 점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공기가 없으면 생물이 살 수 없듯이 과학 역시 진공상태에서 싹틀 수 없다. 과학은 결코 무에서 나오지 않으며 과학적 진리가 ‘절대진리’의 동의어도 아니다. 지금 순수과학이나 정밀과학이라고 불리는 엄숙한 학문들도 그 연원을 추적해 올라가면 그렇게 순수하지도 정밀하지도 않았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의 아버지는 연금술이고, 천문학의 어머니는 점성술인 것이다. 우리는 흔히 ‘과학’ 뒤에 자연스럽게 ‘진보’나 ‘발전’이라는 말을 붙이길 좋아하지만 과학의 발전은 그렇게 자연스럽지도 않고 순진하지도 않다. 과학이 발견한 진리는 과학공동체의 묵시적 합의와 더불어 사회문화적 분위기와 정치경제적 구조와 동기에 좌우되기 마련이다. 가령 과학자들은 연구기금을 타기 위해서 자기홍보와 자료왜곡과 같은 낯뜨거운 일도 주저하지 않는다. 우리는 황우석 스캔들에서 이런 기만적 행위을 목격한 바 있다. 우리가 천재로 부르는 뉴턴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연금술과 같은 신비주의를 맹신하였고 자신이 세운 가설에 근거해 실험자료를 왜곡하곤 하였다. 저자는 과학의 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운 영웅(로저 베이컨)이나 위대한 천재들(뉴턴, 아인슈타인)에게만 초점을 맞추는 게 아니라 시대적 맥락을 함께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과학은 법칙, 화학제품, 기계와 같은 완성품이 아니라 산업, 상업, 전쟁, 정부, 의학과 같은 다양한 시대적 정황과 사회적 맥락과 결부된 하나의 통합체로 간주되고, 과학의 발전에는 천재 개인보다도 돈, 인적자원, 기계, 군대, 미디어가 더 중추적인 역할을 해왔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4000년의 과학사를 ‘기원’, ‘상호작용’, ‘실험’, ‘제도적 장치’, ‘법칙’,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란 6가지 테마로 풀어낸다. 시간적으로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르네상스 시대의 역학, 과학, 천문학 연구를 말하고, 산업화가 시작하던 18세기 빅토리아 시대와 19세기 계몽주의 시기의 과학자들과 공동체, 그리고 현대의 과학을 살피고 있다. 저자가 설정한 6가지 테마가 장구한 과학사를 이해함에 있어서 그렇게 효과적이지도 않고 명료하지도 않다. 더군다나 과학철학의 이론이나 과학지식사회학의 내용을 미리 염두에 둔 독자라면 다분히 이야기성에 치우친 잡다한 내용에 실망할 수도 있다. 유럽 중심의 시각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저자는 중국과 이슬람제국에서 이룩한 중요한 과학적 발견들과 연구의 의미를 재조명하지만, 서양의 과학사와 동양의 과학사에 대한 특색과 대조 그리고 양자의 상호작용을 명쾌하게 설명하지는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왜 읽어야 하는가? 다시 말해서 일반인이 과학사를 읽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한마디로 과학과 과학의 발전 그리고 과학자에 대한 올바른 시각을 확립하기 위해서다. 당대의 과학지식이 절대지식이고 당대의 연구방법이 진리에 이르는 유일한 첩경이라는 근본주의적 도그마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다. 달리 말하면 과학이 또 하나의 종교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가 아닐까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