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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화(摘花) 잘못된 속설로 야박하게 내쳐진 쌍둥이 누이동생 토순이, 한적한 시골마을에서 배꽃을 적화(摘花)하여 만들어진 이화주, 배추흰나비에 이끌려 온 영규와의 운명적인 만남, 한 폭의 수채화 같은 소설, 절제된 감정으로 차분히 이야기하듯 작가는 조곤조곤 다양한 색깔로 그림을 그린다. 청록빛 물위로 젖은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가는 배추흰나비 한 마리는 자식 버린 어머니의 환생일까? 작가는 독자의 몫으로 많은 것을 남겨놓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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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경숙의 소설 <<청어남자>>는 한 편, 한 편이 모두 치밀한 구성으로 읽어갈수록 눈을 떼지 못하게 한다. 특히 <청어남자>는 그 가시 속에 박혀있다는 청어의 힘이 구미를 당기게 함으로 잠시도 젓가락을 놀리지 못하게 하는, 독자를 소설속으로 잡아끄는 원심력을 갖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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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들면 읽기 불편한 책도 있고 참 쉬운 책도 있는데, 이 책은 전자였다. 한 편을 읽고 나서 두고두고 침묵을 지켜야 했다. 너무 쉽게 살고 있는 내 모습이 들킨 것 같아서... 늘 바름을 추구하고 약자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내는 책이었다. 하나를 보더라도 똑바르게 보려는 작가의 의식은 그만큼 절제된 삶의 모습과 내공에서 나온 것 같다. 오랜만에 나태한 내 머리에 시원한 물 한 바가지 끼얹는 기분이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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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책을 사서 가장 잘 보이는 나의 작업대에 얹어 놓고 한달을 보냈다 언제나 처럼 유작가의 작품을 대할 때 마다 쓰마미 같은 두려움이 엄습하기 때문이다 어떻한 대상이든 자연, 인간, 사물, 현상---유작가의 오감에만 걸리면 여지 없이 재 탄생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작가의 표현에 대해 사실감을 예리하게 그린다고 인정하지만 독자는 그 섬뜩하리 만큼 예리한 작가의 눈총이 두려운 것이다. 게으른 내 삶에 대한 질책이니까
이러한 유작가의 감각은 지식의 정보, 삶의 연륜, 스스로 얻은 노력의 댓가에 대해서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체화되지 않으면 감히 토해지지 않은 조용한 포효 이기때문이다. 문학에 문외한인 독자가 이러할 진데 식자들과 전문가들은 얼만나 자신에게 날아오는 자각의 화살을 숨기고 살아야 할까 하고 생각해 보면 오히려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감히 작품을 논할 수 없다. 유 경숙작가라는 이름을 보고 성별을 가릴 수도 없다 마치 달을 삼켜 버리기라도 할듯한 남성의 기질이 힘찬 도리깨질을 하지 않고 온갖 힘을 조절하여 털어 낸 참깨 알과 같기 때문이다. 어느 한 작품 통독을 할 수 없게 만드는 시간의 마술사이기도 하다. 문장 하나 하나가 일사일언이기에-----
다만 독자로서는 한가지 아쉬움을 오래 전부터 작가에게 묻고 싶었다 작품마다 들어있는 인간이기에 가질 수 밖에 없는 한이 때론 어둡기 까지 한데 당신 유작가님이 가지고 있는 한은 무엇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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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집 제목인 <청어남자>는 청어뼈에서 본떴다는 헤링본코트를 입은 한 남자와 간병인 여자의 쓸쓸한 얘기다. 이들 사이에는 청어가시처럼 촘촘한 얘기들이 숨어있다. 어딘가 시리고 아픈 곳, 그렇지만 시린 몸을 지닌 채 반드시 살아야 하는 삶의 숙명 같은 것을 씨줄과 날줄로 엮어내고 있다. 언제나 가깝게 만나지만 완전하게 하나로 뭉쳐지지 않는 서로의 강을 이쪽과 저쪽에서 마주보고 있을 수밖에 없는 존재들. 그래서 사람들은 아프고 서러운 채로 외롭게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랴.
현대 도시에 사는 눈먼 사람들은 깊은 어둠 속에 놓여있다. 그러나 작가 유경숙은 어둠 속에서 잃고 있지만 잃지 않는 마음의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어한다. 작가는 그것을 콕 꼬집어 드러내지 않는다. 우리들 앞길이 힘겨운 삶일지라도, 메마르고 삭막한 세상의 층층다리가 어떤 형태인지 깨우치거나 몰아내는 일은 읽는 사람들 몫이라는 것을 조용히 일러준다.
그런데도 작가는 세상읽기의 조용한 암시만 던질 뿐, 세상에 대한 분노나 적개심, 비웃음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다. 누구에게나 자기에게 갇힌 내력을 뛰어넘었거나 감추고 있다는 것을 작가 스스로 잘 알고 있기 때문일까? 그래서 이 작가가 앞으로 내놓을 다른 작품에 거는 기대 또한 행복한 기대로 걸고 있어도 좋을 듯하다.
인간을 둘러싼 빛과 어둠, 어둠 속에서 더 깊은 어둠을 찾아내고 빛 속에서 더 밝은 빛을 찾아내는 게 작가의 의무라는 것을 잘 아는 작가의 이름, 그가 바로 유경숙이라는 발견의 기쁨을 <청어남자>를 통해 하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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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경숙 작가의 청어남자는 참으로 다양한 인간 군상의 모습을 과장되지 않은 필치로 그려냈다. 그 중에서도 불무골 기섭의 모습은 한 마리의 착하디 착한 학을 보는 그런 느낌이었다.
천사가 따로 있을까? 바로 그런 인물이 세상의 무게와 처지를 초월한 참으로 행복한 삶을 살다간 사람 일게다? 비록 그의 죽음이 강가 자갈밭에서 발견 되었다 하더라도... 그의 누이 또한 인생의 커다란 이벤트가 있었지만 오빠처럼 그런 천사같은 삶을 살다 갈 것이다. 아주 잘 읽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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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를 심하게 앓고 책을 봐서일까.. 기운이 없던 게 몸이 아니라 마음이 었던 것 처럼 한편 한편 읽어가며 힘이 부치는 걸 느꼈다. 아마도 글쓴이의 세세한 눈길 탓인 것 같다.
모든 문장과 서술어에 느낌과 생각들이 가득 차 있어 같이 생각하고 호흡하기가 버거웠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버거움과 가득참에 매료되어 한줄 한줄 읽어가며 나는 글 안의 풍경 안에 빠졌다. 청어남자의 주하가 되어 우혁의 등뼈에도 닿아 보고 감국의 그녀가 되어 노모의 목욕을 시키기도 하면서 아직은 모호하고 아득한 삶의 한쪽 무게를 느낀다. 그리고 한편으론 아직은 가벼운 내 삶에 감사해하면서...
시간이 지나가는 흐름에 휩쓸려 내 삶의 풍경과 생활들도 내가 채 인지하지도 못한 채 지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
잠시 다른 사람의 시선을 빌려 세상을 보는 건 어떨까...
그럴 때 다시 펼쳐보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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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시 사람이나 미물이나 경험치를 벗어나지 못한다. 아무리 작가적 상상력이 풍성하다 하더라도 그 상상력의 기반은 역시 경험에 있다. 그것이 직접이든 아니면 간접이든...
작가는 참 경험이 많은가 보다. 작가는 자연에 대한 느낌 자체가 자신의 경험치라고 주장하지만 결국은 사람에 대한 경험이다. 뼛속까지 아린 과거를 가진 많은 삶들을 작가는 언제 다 만나고 다녔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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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들 자기 인생을 훓어보면 한권의 소설이 되지않는 사람이 있을까? 굳이 소설처럼 살아오지 않았다 하더라도. 작가는 밤새 욱씬 거리는 치통처럼 시리디 시린 추억을 가슴에 묻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소설이라는 그릇속에 아주 진하게 잘 버무려 놓았다. 금취학령의 신부님은 얼핏 이런 구절이 생각나게 하는 작품이었다. "그 신부님은 소꿉장난을 하던 남녀의 몰을빌어 세상의 빛을 보았으되, 설사 그들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다른 부모를 통해 이 세상에 반드시 존재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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