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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보통 학생 시절에 책을 많이 읽고, 음악을 많이 듣는다. 자연스레 그 시절에 접한 작가, 뮤지션을 평생 달고 산다. 응팔, 토토가가 유행할 수 있는 이유다. 대부분은 학교에서 벗어나면 노동을 해야 하고, 노동을 하다 보면 책 읽고 음악 들을 여유가 없어진다. 설사 읽고 듣더라도 집중 못한다. 나 역시 10대 후반, 20대 초반에 좋아했던 뮤지션과 소설가를 지금도 구매 기준으로 삼는데. 10대 후반 20대 초반이 탐색하던 시기였다면, 그 이후는 이용하던 시기인 셈이다. 서유미, 김언수, 권리, 윤고은, 박상, 최민석, 임성순 등등 신작이 나오면 바로 사는 소설가를 만난 시기가 저 때였다. 몇 없는 예외가 있는데, 바로 정아은. # 1 정아은 소설가 작품을 읽은 건, 채널예스 인터뷰 업무가 한창 재미없어지던 시기였다. 한달에 10건 넘게 인터뷰하다 보니 지쳤다. 그때 정신을 번쩍 들게 했던 작품이 바로 『잠실동 사람들』이었다. 이야기를 끌고 갈 수 있는 능력이 대단했다. 장편을 잘 쓰는 소설가 세 명만 꼽으라면, 주저하지 않고 말할 수 있다. 김언수, 임성순 그리고 정아은. 그녀는 다양한 인물이 등장해서 여러 사건을 일으키며 400쪽 넘는 꽤 긴 분량을 탄탄하게 만들어가는 소설가다. 구성력도 그렇지만, 소재도 개성이 넘친다. 모 작가가 이런 말을 했더랬다. 주류를 다루는 건 문학이 아니라고. 문학은 소외된 사람을 다뤄야 한다고. 전반적으로는 동의해도, 저렇게 마이너리티만 다루다 보면 문학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이 대개 결핍되어 있다. 재미가 없다. 슬프고 무겁다. 때로는 다른 이야기도 필요하다. 정아은 작가가 지금까지 발표한 작품은 특별하다. 중산층 - 서울에 아파트 한 채 있고 2,000cc 중형차 이상 몰고 다닐 수 있는 - 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들의 욕망을 가감없이 표현한다. 재밌다. # 2 『맨 얼굴의 사랑』에 등장하는 사람 역시 중산층이다. 주인공 서경만 빼고. 서경은 연예계에서 오래 일하다 뒤늦게 글쓰기에 맛이 들려 드라마 작가를 꿈꾼다. 지금은 백수. 구상 중인 이야기가 성형외과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취재차 찾은 병원에서 원장인 조성환과 사랑에 빠진다. 키도 작고 외모도 대한민국 평균 남자인 그지만, 친근한 화술로 여성을 사로잡는다. 물론 유명 성형외과 원장이라는 타이틀도 한몫했겠지. 그런 조성환이 서경을 싫어하진 않아, 둘은 동거에 들어간다. 그런데 왜인지 성환은 절대 자신과 성관계는 허락하지 않는다. 서경이 매달리고, 성환은 거리를 좁히지 않은 채 여러 인물이 등장하며 성형외과와 연예계에서 벌어지는 일을 들려준다. 주변 인물로 한류 스타 재희, 뮤지션 지하, 미남 성형외과 의사 장혁규 등이 등장한다. # 3 예전에는 모든 연예인이 나는 절대 성형을 하지 않았소, 신체발부 수지부모요를 외쳤다지만 지금은 누구나 거리낌 없이 성형 사실을 인정한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의 배경이 된 성형외과는 자연스레 연예계 이야기로 뻗어나갈 수 있는 공간인 셈이다. 연예인만이 아니라 일반인도 성형에 매달리는 지금. 우리는 왜 성형을 할 수밖에 없나. 제목에 답이 있다. 맨 얼굴로 사랑받을 자신이 없어서다. 레비나스가 말했듯, 인간이 윤리적일 수 있는 건 얼굴 덕분이고 그런 점에서 맨 얼굴이 비윤리적이 된 세상이 과연 윤리적인지 묻는 게 바로 이 작품, 으로 읽으면 너무 진지한 독해일까. # 4 주인공 서경은 걸 크러쉬다. 그녀의 단골 멘트, "안녕, 친구야"를 당분간 계속 쓸 듯하다. 솔직하고 당당한 그녀의 직설 화법에 여러 번 웃었다. # 5 비밀 많은 성환이라는 존재는 이 책에 추리소설적인 요소를 더한다. 돈도 많이 버는 의사가 왜 혼자 살까, 술독에 빠졌을까, 여성과 섹스를 거부할까, 다리는 왜 절까 등등. 이 중 많은 질문은 결론을 읽으면 해소되고, 일부는 결말을 보고도 미궁이다. # 6 재희는 이야기에 개입하고, 지하는 서경의 기억으로만 호출된다. 둘 존재 덕분에 서경의 전반적으로는 멍청하나 때때로 지적인 성격이 형성된다. 그리고 성환이 읽는 철학자가 푸코다. 그렇다면 성환의 비밀은 무엇? 결말을 알려주는 이러한 저자의 꼼꼼한 구성력에 감탄. 서정의 출산과 1년간 육아를 길지 않은 분량으로 압축적으로 묘사한 대목도 백미. 출산과 육아를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못 썼으리라. # 7 결말은 급작스러웠고 충격이었다. 작가님, 꼭 이렇게 끝내셔야 했나요... ㅠ ㅠ # 8 『잠실동 사람들』에 비해서 『맨 얼굴의 사랑』이 그리 널리 알려지진 않았다. 둘 다 재밌는 작품인데, 혹시 제목을 『신사동 사람들』로 했다면 어땠을까, 이런 생각도 들더라. # 9 성환이 읽는 책으로 등장하는 게 『개성의 탄생』. 주디스 리치 해리스는 지금 내가 읽는 『양육 가설』의 저자다. 크리스테바의 상호텍스트성이란 이럴 때 쓰는 건가! # 10 『모던 하트』로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했을 때, '통속과 품위의 경계에서 줄타기하는 작품'이라는 평을 받았다. 그 평은 이 작품에도 유효하다. --- 푸코는 조성환이 좋아하는 프랑스 철학자다. 뭔가 집중해 읽고 있어 들여다 보면 푸코일 때가 많았다. 관심이 가서 나도 몇 번 들춰 보았는데,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쓸데없이 말을 길게 늘어놓는 스타일인 데다가 몇 가지 부수적인 사실을 들어 일반화시키는 꼰대 기질까지 있었다. 대머리에 눈빛도 음흉해 보여 사진을 볼 때마다 정이 떨어졌다. (296쪽) 연예계가 온갖 미용 산업과 광고업, 기획사들과 방송사들의 이해관계가 만들어 낸 결과물이라면 성형외과는 그 이핸관계의 기원이 되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일할 땐 특정 현상의 표면만 보고 넘어갔다면, 병원에서는 그 표면 아래 들끓고 있는 거대한 병리를 하나하나 마주하고 그에 얽힌 거미줄 같은 인과관계와 욕망을 넓은 조망으로 관람할 수 있었다. 연예계와 성형외과는 서로 마주 보고 외침을 주고받는, 뒤틀린 형태의 쌍생아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양쪽 세계 모두에 공통으로 존재하는 것은 심연을 보지 못한 채 엉겁결에 휩쓸려 갔다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끌어안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다수의 대중, 앞뒤 인과관계를 헤아리지 못한 채 모든 걸 자신의 어리석음이나 특정 인물의 탓으로 돌리는 대중이었다. (299쪽) 과거라는 말은 실상이 없다는 것을, 지나간 일을 칭하는 그 단어는 그저 말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을, 나는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인생에 있었던 그 어떤 일도 과거가 아니며, 모든 일은 그저 잠깐 잊혔다 한순간 맹렬하게 현재로 되살아나기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347쪽) "세상이 전부 드라마처럼,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사랑해서 섹스하고 결혼해서 아름답게 잘 살았습니다. 그렇게 돌아가진 않아." (중략) "그렇지 않잖아. 우리 마음속엔 많은 감정이 들어 있고, 그 감정은 자로 잰 듯 딱딱 갈라 정할 수 있는 게 아니야.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백 퍼센트 상대만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이야기는 드라마와 영화와 우리 시대의 각종 오락거리들이 만들어 낸 환상이지. 자본이 가리키는 방향이기도 하고."(364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