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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에 출판된 마이클 센델의 책 <정의란 무엇인가>는 철학을 다루고 있는 조금은 어려운 인문학 서적임에도 불구하고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책의 판매부수가 100만권이 넘었고, 200만권 가까이 팔렸다는 이야기도 들리는 것으로 봐서는 근 10년내 장르를 따지지 않고 꼽아도 열손가락 안에 드는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특히나 사랑을 받은 책인 듯하다.
<무엇이 정의인가>의 저자중 한 명인 이권우는 기사를 인용해 책의 인기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정의란 무엇인가>의 선전은 ‘정의’라는 키워드가 민감하게 다가오는 사회 분위기, 미국 최고의 명문이라는 하버드대가 부여한 권위, 어려운 주제를 예화를 들어가며 풀어나간 저자의 글솜씨, 출판사의 마케팅 능력 등이 어우러졌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나도 베스트셀러 목록을 참고삼아 책을 고른 덕에 10년전 출간된지 얼마 되지 않아 정의의 열풍을 불러일으킨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었는데, 개인적으로는 인식의 지평을 한차원 넓혀준 인상깊었던 책으로 기억한다. 책에 등장하는 내로라 하는 철학자들의 단행본을 이해하기에는 깜냥이 되지 않았던 터라 정의에 대한 여러 다양한 관점뿐만 아니라 칸트, 롤스, 밀, 벤담 등의 철학적 사유를 조금이나마 맛볼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다.
예전에 책을 읽고 리뷰를 쓴 것을 들춰보니, 그 때 나는 정의의 여러 철학적 견해 중에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주의 관점에 마음이 기울었던 듯 보인다.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개인의 자유를 마음껏 인정해주는 밀의 도덕관념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공리를 고려함으로써 노직의 자유지상주의를 극복하고, 아리스토텔레스나 저자 샌델의 공동체주의도 일부 포함하는 논리로 봤던 것 같다.
이 책 <무엇이 정의인가>에서는 여러 국내 철학자와 작가, 서평가들이 샌델의 책을 읽고 일종의 독후감을 남겼는데, 무엇보다 마음을 잡아 끌었던 논의는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에서 법철학을 가르치고 있는 김도균 교수의 <센델 풍으로 한국사회 읽기>부분이다.
저자가 예시로 들고 있는 사례를 보면, C일보에서는 공정사회론에 대해서 이렇게 주장한다. ‘약자나 강자를 구분하지 않고 법을 공평하게 적용하는게 공정사회다. 약자에게 더 많은 이익을 몰아주는 것은 공정사회가 아니다.’ 이는 사회적 약자든 강자든 반칙을 저지르면 엄정하게 바로잡아야 공정한 사회가 이루어진다는 뜻일게다.
위 논의가 일면 맞는듯 보이지만, 진보적인 태도를 취하는 입장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자에 대해서는 사회적 배려와 따뜻한 관심이 필요하고 가능하다면 그들이 처한 환경이나 처지가 고려되어야 하는게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될거다. 어쩌면 온정주의적이라고 할 수도 있는 이런 막연한 생각에 논리적 타당성을 뒷받침해주는 김도균 교수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법 내용 자체가 사회적 강자의 반칙을 반영하는 것이어서, 법을 아무리 위아래 구분하지 않고 두루두루 엄격하게 적용해 보아도 오히려 사회적 강자의 반칙을 계속해서 합법적으로 만들 뿐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럴 경우 반칙을 범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은 대체로 사회적 약자층에 속하는 개인들일 것입니다. 결국 법의 내용에 영향을 미치는 법제정의 과정과 법적용의 과정 자체가 공정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따져보면, 법치보다 공정이 더 앞서는 것은 아닐까요. 법치의 정당성은 법제정과 법적용의 공정성이 확보된 이후에나 말해질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시민들의 정치적 자유가 실질적으로 평등하게 보장될 때, 최소한의 사회 안전망과 복지가 보장될 때 법 제정의 공정성이 확보될 것입니다.
공동체주의에서 행위와 제도의 존재 의의나 최고 목적을 일컫는 ‘텔로스’에 관한 논의도 주목할만하다. 어떤 사안의 본질, 다른 무엇이 아닌 그것의 본령에 맞아야 정의에 핵심에 이를 수 있는 것이고, 어떤것의 텔로스는 그 공동체의 구성원이 동의하는 덕목이나 바람직한 삶을 위해 합의된 공동선을 바탕에 둔 것 이라고 할 수 있겠다.
동성애에 관한 논쟁에서 자유주의 관점은 남에게 해악을 끼치지 않는 사적 관계이기 때문에 동성애를 찬성한다고 하면, 사회 구성원의 동성애에대한 의식은 계속해서 부정적일 수 있다. 도덕적 가치는 뒤로하고 남에게 피해주지 않으니 관용하겠다는 정도로는 뭔가 불충분하다. 여기에 텔로스를 대입해서 관계에 대한 본질 측면을 고려한 김도균 교수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동성 간의 사랑이나 혼인도 이성 사이의 것과 마찬가지로 가치 있는 결합의 하나로서, 단순히 사적 선택의 자유를 보호한다는 근거 때문이 아니라 이성애를 보호하는 도덕적, 법적 근거에 바탕을 두고 보호받고 존중되어야 합니다. 즉 사랑하는 당사자들 사이의 감정, 결합, 유대감 등을 헌법이 보장한다는 근거에 비추어서 동성애도 똑같이 보호되어야 한다는 적극적인 도덕적 논거를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 샌델의 주장의 요지입니다.
김도균 교수의 철학적 논의는 이외에도 좀더 이어지는데, 어떤 행위가 정의로우려면 그 행위의 본질과 목적을 생각해 보고 그에 부합하는지를 따져봐야 한다는 거다. 그 본질과 목적은 공동체가 오래도록 가져온 도덕관념이나 바람직한 삶의 방식에 근거를 두고 동의를 얻은 내용이어야 한다. 물론, 이렇게 되면 저마다의 텔로스가 달라져 다툼이 발생할 수도 있을 것이고, 공동체에 받아들여지는 그 텔로스로 인해서 타 사회에 대해 배타적인 감정이 생길 수도 있겠다. 민족주의와 제국주의가 거기서 먼 거리가 아니라는 반론도 있다.
정의 관련 논의중 가장 유명한 예화가 ‘철길 딜레마’이다. 고장난 열차가 철길을 달려가는데 그대로 진행하면 철길위의 다섯명의 인부가 죽게 되고, 선로를 바꾸어 다른 길로 유도하면 한명의 인부만이 죽게 된다. 나는 건너편에서 그 상황를 목격하고 있으며, 선로를 바꿀 수 있는 레버를 쥐고 있다. 그렇다면 선로를 바꾸는 것이 맞을까? 아니면, 그대로 두어 다섯명의 인부를 죽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정의에 더 부합할까?
언뜻 생각하면 다섯명의 인부를 살리고, 한 명의 인부를 희생하는 것이 더 올바른 결정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게 정의라고 한다면, 공리론에 부합하는 관점이다. 다섯명의 목숨보다는 한명의 목숨이 덜 중요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슬픔을 겪어야 하는 가족과 친구들의 숫자도 적을 것이고, 생존자가 많은 쪽이 이후 공동체에 더 기여할 수도 있을 거다.
그런데, 왠지 다섯명을 살리기 위해 한 사람을 죽게한다는 것이 도덕적으로 올바르지 않다는 생각도 든다. 칸트의 도덕법칙에 의하면,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는 것이 현대사회에 천부인권개념의 근간이 되었고, 그렇다면 레버를 당겨 한 사람을 죽게 하는 것은 그 사람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여기는 것이 아닐까.
칸트의 도덕적 관점은 머릿속에서나 가능한 논리라고 할수도 있겠다. 실제, 한사람과 다섯사람이니 이게 그나마 비교라도 되는 것이지, 실제 수십명 또는 수천명의 목숨이 걸린 일이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이 정의에 위배된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철학적 관념과 실제 의사결정에서는 또 큰 차이가 있을 수 있겠다.
반대로 만약 한 사람의 죽음과 다섯사람의 생존을 바꾸기 위해서 내가 직접 한 사람을 철길로 떠밀어야 하는 상황이라면, 내 결정은 어떻게 바뀔까. 실행의 성공이 보장된다고 하면, 그 사람의 등을 떠밀어 다섯 사람을 살리는 결정을 내가 할 수 있을까?
아마도, 정말 어쩔수 없는 경우에 레버를 당겨서 한명과 다섯명의 목숨을 교환하는 선택을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절대 한 사람의 등을 직접 떠밀어 다섯명의 생명과 바꾸는 일을 실행하지는 못할 것 같다. 책에서는 아마도 레버를 당긴다거나 하는 형태의 의사결정은 인간의 진화적 행동속에서 낯선 것이기에 실행하는데 크게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것이 아닐까라고 설명한다.
연장선에서 보자면, 기술의 발달로 사람과 사람간의 의사소통이 직접 보고 느끼고 만지던 것으로부터 화면과 음성, 숫자와 문자, 신호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오히려 상대방에 대한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측면을 감소시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핵폭탄의 버튼을 누르는 사람은 그로 인해 죽게될 수만명이 넘는 사람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한다. 주먹보다는 칼이, 칼보다 총이, 총보다는 드론이 사람을 해치는데 더 손쉬운 방법일 뿐만아니라 사람의 죄책감을 줄이는 방법일 거다.
사람에게는 기본적으로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정의에 대한 감각이 있다고 한다.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를 구출해 주는 것이나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나누는 행위은 누가 가르쳐주거나 나의 이익을 위해서 나오는 행동이 아니다. 진화적으로도 결국 유전자를 널리 퍼뜨리는데 유용했기 때문에 정의감이 인간에에 선택된 형질로 전해져 내려온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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