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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묵상함의 깊이를 체험하면서(‘하나님을 바로알자’를 읽고)
"하나님을 묵상함의 깊이를 체험하면서(‘하나님을 바로알자’를 읽고)" 내용보기
내가 토저에 대해서 들어본 것은 군대에서였다. 사실 잘 기억이 나진 않지만 제대하기 몇 달전에 그의 전기를 사서 대충 읽어본 기억이 나며, ‘하나님을 추구함’이라는 책을 밑줄을 그어가며 읽은 표시가 있지만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와 같은 방법으로 하나님을 깊이 추구하고 그분을 묵상하기보다 하나님의 음성을 쉽게 내 삶에 적용시키기에 바빠서 그 분의 성품을 묵
"하나님을 묵상함의 깊이를 체험하면서(‘하나님을 바로알자’를 읽고)" 내용보기
내가 토저에 대해서 들어본 것은 군대에서였다. 사실 잘 기억이 나진 않지만 제대하기 몇 달전에 그의 전기를 사서 대충 읽어본 기억이 나며, ‘하나님을 추구함’이라는 책을 밑줄을 그어가며 읽은 표시가 있지만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와 같은 방법으로 하나님을 깊이 추구하고 그분을 묵상하기보다 하나님의 음성을 쉽게 내 삶에 적용시키기에 바빠서 그 분의 성품을 묵상하고 즐거워하기보다, 오히려 나의 삶의 미래를 향한 길을 제시하는 안내자로서의 하나님만을 바라봤던 이유가 크지 않았나 생각된다. 나에게 하나님은 내게 주어진 직분과 결정해야할 미래에 대한 안내자로서만으로 충분한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내 인생의 안내자로서만이 아닌 더 크고 광대하신 하나님이심을 다시 묵상하게 된다. 이번 기회를 통해서 토저를 더 깊이 알게된 것 같다. 그가 말하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묵상은 결코 어디서, 누구의 글을 보고 인용한 차원의 글이 아니라 그의 개인의 골방에서 하나님을 추구하고, 대면하여 나온 언어들이다. 그는 언어에 대한 정제된 훈련을 하였으며, 우리에게도 권고한다. 그래서 그런지 깊이 묵상한 마음속의 언어들은 글로써 외부로 감동적으로 표현되었다. 또한 그의 글은 소설 읽듯이 쉽게 넘어가지 않게 만든다. 그 언어속에 잠깐 쉬라고나 할까? 그의 묵상함을 언어속에서 함께 공감하고 함께 하나님의 성품을 공유하고픈 그의 열정이 그의 글에는 묻어있는 것 같다. 한마디로 기도의 골방에서 묵상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라고나 할까? 하나님의 주권 부분에는 지난 달에 읽었던 특종 믿음사건에 ‘악의 문제’에 대한 또다른 접근을 말하고 있었다. 지난 달에 책과는 다른 접근 방법이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 묵상하고,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묵상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에 대한 거대한 항해선의 비유는 새로운 시각과 명쾌함을 가져다 주었다. 하나님의 성품 하나하나를 표현한 글 속에 많은 하나님을 추구하고, 묵상했던 많은 믿음의 선배들의 글을 보게 된다. 그들과 함께 하나님을 묵상하고, 바로 알기를 추구했던 것이다. 그리고 주장하기를 하나님에 대한 왜곡된 관념은 그 관념을 담고 있는 종교를 곧 부패시키며, 타락의 첫발을 내딛게 된다고 말한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기독교 교회에 대한 선지자적인 메시지를 던지기를 ‘하나님에 대한 개념을 순전하게 하고 높이는 일’이 우리의 최대의 임무라고 그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바로 알고 바로 경배해야함을 그를 통해 느끼게 되었다. 이 책의 신선함들이 그의 전기를 다시 손에 들게 했다. 인상깊었던 구절을 몇가지 말하면, ‘설교자는 한가지 목적을 위해 연구하고 한 가지 목적을 가지고 독서해야 한다’. 하나님을 바로 아는 그 목적 아니었을 까? 그는 특히 고대의 저자들, 그중에서도 교부들과 기독교 신비주의자들에 심취하기도 하였지만, 무엇보다 그가 가장 부지런히 읽었던 책은 성경이라고 한다. 40여종의 번역서를 가지고 있었으며, 어휘사전과 성경사전, 성구사전을 가지고 의심스런 모든 어휘의 어근을 찾아보았다고 전한다. 성경을 암송하는 데도 시간을 쏟았다고 한다. ‘진정한 설교는 언제나 기도에서 시작됩니다’라는 말은 그의 설교론을 가르쳐 준다. 기도하는 삶, 그리고 영적 고전들을 일고 그것으로부터 배우라는 분별있는 독서에 대한 가르침들은 나의 삶에 더욱 유익을 주었다. 두서없는 글을 정리하자면 역시 그의 ‘하나님을 참으로 알자’라는 외침은 나에게도 강하게 다가온다. 즉 말씀과 기도로 돌아가는 것인데,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묵상하고, 바로 분별하며,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성품의 깊이와 그 은혜의 풍성하심을 묵상하고, 체험하는 것이다. 그런 깊은 추구 가운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더욱 놀라워지고, 하나님의 이웃과 열방을 향한 열정도 솟구치게 되리라 믿는다. 하나님을 좀 더 알아감을 통해 그분을 향한 더 큰 열망과 영광의 추구가 일어나며, 그 열망을 나누고픈 열정이 더욱 솟구친다. 힘써 하나님을 알자, 그분의 뜻을 알자, 그분의 삶을 살자!!!!
YES마니아 : 골드 y******r 2003.08.11. 신고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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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에 감추인 진주같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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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든 토저(1897-1963)는 그 이름이 알려져 있는 만큼 그의 책이 널리 읽혀지는 분은 아니다. “20세기의 예언자”란 별명을 얻은 바와 같이, 본서도 이 시대를 꿰뚫는 듯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예언자란 새로운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아니다. 단지 그 시대가 잃어버린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드러내는 역할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던 이들이 그들이었다. 이런 점에서 에이든 토저는
"밭에 감추인 진주같은 책" 내용보기
에이든 토저(1897-1963)는 그 이름이 알려져 있는 만큼 그의 책이 널리 읽혀지는 분은 아니다. “20세기의 예언자”란 별명을 얻은 바와 같이, 본서도 이 시대를 꿰뚫는 듯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예언자란 새로운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아니다. 단지 그 시대가 잃어버린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드러내는 역할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던 이들이 그들이었다. 이런 점에서 에이든 토저는 우리 시대의, 아니 이전 시대의 예언자였다. 그가 전한 메시지는 우리 시대에 여전히 그 적실성이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 필요는 더 절실해진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본서의 원제는 The Knowledge of the Holy 이다. 번역서의 제목이 저자의 의도를 충분히 전달해 주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우리가 마땅히 경외해야 하며 두려워 떨어야 할 하나님의 거룩하심, 절대성과 엄위를 드러내지 못하는 통속적인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 시대가 잃어버린 것은 무엇일까? 많은 것이 있을지라도 정말 회복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 무엇이 증상이고 무엇이 원인일까? 원인을 찾아내야 한다. 토저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결여가 바로 이 모든 것의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이것은 호세아의 지적, 그리고 바울의 지적과 일치한다. 어떤 저자의 말대로, 우리 시대는 “하나님을 지나가는 아이스크림 장사를 부른 것 처럼 부르는 시대”가 되었다. 우리 식대로라면, 남대문 시장의 한 가게 점원을 부르는 식으로 하나님을 부를 수 있을 만큼 하나님은 대수롭지 않을 뿐 아니라, 우리에게는 매우 하찮은 분이 되어버렸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대부분의 경건서적들, 이중에서도 베스트셀러의 대열에 오르는 책들은 하나님 자신에 대하여 말하지 않고, 인간에 대하여 말하며, 인간의 보다 나은 삶을 종교의 힘에 의해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다루고 있다. 하나님에 대해 말한다 하더라도 강조의 중심은 ‘친밀성’에 현저히 기울고 있다. 적어도 이런 현상은 앞으로 상당한 진전을 볼 것이다. 이 책은 고전이다. 말하자면 한 시대에 읽혀지고 잊혀질 책이 아니라 시대를 두고 계속해서 읽혀져야 하고 읽혀질 책이다. 어거스틴이나 안셀무스의 이름은 들어보았지만 그들의 책드을 직접 읽어보았거나 읽을 수 있는 그리스도인은 얼마 없다. 그래서 그는 이 책을 쓰려고 한다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짧다는 것을 제외하고는(요즘에는 짧다는 것이 사실 장점이다!) 본서는 바로 그런 고전들을 현대화하여 현대의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렇다고 천박하지도, 무논리하지도 않다. 그래서 본서를 ‘신학적 신앙서적’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신학 없는 신앙의 시대에 하나의 경종이다. 또 이 책이 고전인 까닭은 방법을 말하고 있지 않고 하나님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거의 말하지 않는 시대에 에이든 토저는 하나님의 속성들을 중심으로 19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매 장은 기도문으로 시작하는데, 우리로 하여금 한 장 한 장을 읽어가면서 하나님을 향한 경외감과 예배의 마음을 한껏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하며, 읽고 있는 것 자체가 예배임을 경험하게 해주는 듯하다. 차가운 신학과 건조한 성경공부를 해본 사람들에게 이 책이 주는 영향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 성경과 신학을 공부하는 것은 바로 이런 자세여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주기에 족하다. 우리의 신학과 예배와 삶 그리고 선교가 왜 그렇게 땅의 것들이 되고 마는가? 여기서 본서에서 우리는 답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열심은 모든 기독교적 활동을 기독교적인 냄새를 풍기는 휴머니즘이 되게 하고 만다. 그러지 않기 위해 그가 말하는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엄위를 우리의 모든 공적인 봉사의 완전한 중심에 두어야 한다.” 아쉬움은 교리를 우리 신앙의 유익을 위해 절대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보다 구체적이고 친절하게 제시해주었더라면 하는 점!

[인상깊은구절]
20세기 기독교는 하나님께 자선을 입혀드렸다. 우리 자신에 대해 너무 과대평가하여 우리들이 하나님께 필요한 존재라고 믿는 것이, 즐길 정도는 아니더라도 우리가 손쉽게 빠지는 함정이다...모든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은 정말로 어떤 도움도, 어떤 조력자도 필요치 않으시다. 너무도 많은 전도자의 호소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 근거없는 좌절에 기초를 두고 있다. 구변이 좋은 설교가라면 청중들로 하여금 이방인 뿐 아니라 오랫동안 매우 열심히 그들을 구원하려고 노력해오셨지만 지원 부족으로 실해해오신 하나님에 대해서 손쉽게 동정심을 갖게 할 것이다. 내가 우려하는 것은 수많은 젊은이들이, 사랑때문에 들어섰으나 제한된 능력 때문에 빠져나올 수 없어 보이는 곤란한 상황으로부터 하나님을 구조하려는 것보다 더 높은 동기 없이 사역에 들어서는 것이다.
h****i 2003.04.10.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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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바로 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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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모든 사람에게 부여되었다는 것은 바울 사도의 말씀을 통해서 알수 있는 것만은 아니다. 모든 민족들이 분유하고 있는 신개념이나 모든 문명과 문화가 소유한 신에 대한 개념들이 전혀 낯설지 않은 것은 모든 사람들 가운데 신에 대한 개념들이 서로 비슷한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토저가 제안하는 하나님 바로알기는 아주 중요한 단
"하나님 바로 알기???" 내용보기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모든 사람에게 부여되었다는 것은 바울 사도의 말씀을 통해서 알수 있는 것만은 아니다. 모든 민족들이 분유하고 있는 신개념이나 모든 문명과 문화가 소유한 신에 대한 개념들이 전혀 낯설지 않은 것은 모든 사람들 가운데 신에 대한 개념들이 서로 비슷한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토저가 제안하는 하나님 바로알기는 아주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기독교는 누가 뭐래도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를 중요시하니까.... 토저의 글이 가진 강점은 하나님의 본성에 대해서 논하는 가운데서도 전혀 기존의 조직신학적인 체계와 구성을 탈피하고 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토저는 조직신학자들이 거창하게 열거하는 하나님의 본성이라는 부분들을 하나의 독립적인 특성으로 이해하지 않으려는 대서 독특하게 드러난다. 토저는 하나님의 성질이나 본성이라고 불리울 부분들을 하나의 특성으로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의 양식이다. 그래서 분리할 수 없다. 구분하여 생각할 수 없다. 모든 것은 종합적으로 이해되어야 하고 또 사고되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종합되어 있는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가 이루어져야 한다. 토저의 글은 하나님에 대한 이교적이고 자의적인 이해가 가득한 세상 가운데 좋은 글이라고 생각된다. 조금 재미없는 부분들이 있기는 하지만 한번쯤 읽어볼 만한 글이라고 생각된다.

[인상깊은구절]
역사를 통하여 교회를 괴롭혀온 거의 모든 이단은 하나님에 관해 옳지 않은 것을 믿거나, 혹은 똑같이 옳은 다른 것을 무시할 만큼 어떤 것을 지나치게 강조한 데서 일어났음을 입증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떤 속성을 다른 속성을 배제할 만큼 확대하는 것은 신학의 무서운 늪 중의 하나로 빠지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모두 바로 이렇게 하도록 하는 유혹을 쉼없이 받는다.
m*****h 2002.05.15.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