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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느린 걸음, 남해 바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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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처음 남해를 찾았을 때 생각이 난다. 전라도 여수가 빤히 보이는 가까운 곳이었음에도 마땅한 먹거리가 없었다. 어딜 가도 바다가 보였고, 바다 옆으로는 어김없이 밭이 등장했다. 모든 주민들이 어업에 종사하지는 않는다는 걸 그날 깨달았다. 먹고 살기 위한 주민들의 노력은 눈물겨웠을 테지만, 뜨내기 관광객의 눈에는 산과 바다를 동시에 즐길 수 있는 묘한 공간으로 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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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처음 남해를 찾았을 때 생각이 난다. 전라도 여수가 빤히 보이는 가까운 곳이었음에도 마땅한 먹거리가 없었다. 어딜 가도 바다가 보였고, 바다 옆으로는 어김없이 밭이 등장했다. 모든 주민들이 어업에 종사하지는 않는다는 걸 그날 깨달았다. 먹고 살기 위한 주민들의 노력은 눈물겨웠을 테지만, 뜨내기 관광객의 눈에는 산과 바다를 동시에 즐길 수 있는 묘한 공간으로 남해가 각인됐다. 시간이 흘러 다시 한 번 남해를 찾았다. 예전과 크게 달라진 건 없었으나 스스로를 관광지로 인식하고 있는 듯 전반적으로 깔끔해진 모습이었다. 달랑 하나뿐이었던 멸치쌈밥 집이 여러 개로 늘어 있었고,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바래길을 알리는 표지판과 리본도 보였다. 걷기 열풍이 전국을 강타한 게 몇 해 전 일이다. 곳곳에 둘레길, 올레길 등의 이름이 붙은 길이 생겨났는데, 바래길은 그 이름부터가 독특했다. 여행사를 따라올 경우 그 중 딱 하나의 코스만을 걸어볼 수 있는데, 무슨 이유에선가 여행 코스에는 매번 고사리밭길이 포함돼 있었다. 다른 곳보다 걷기 수월해서일 수도 있고, 헤맬 가능성이 덜해서일 수도 있다. 미처 걸어보지 못한 다른 구간에 대한 궁금증이 일어 남해 바래길이라는 책을 골라 읽기 시작했다.

바래는 남해 사람들의 고단한 삶이 깃든 단어다. 아낙들이 바닷가에 나가 조개 캐고, 미역 따고 하는 행위를 일컫는 말로, 남해에선 부모들이 그렇게 해서 자녀를 키워 대학에 보내고 결혼도 시키고 했단다. 있는 자연을 훼손 않고 이용하면서 살아온 남해 사람들의 지혜와 억척스러움이 깃든 게 바래였고, 머지않은 미래에 찾아올 더 나은 삶을 바라는 마음 또한 바래였다. 길 이름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를 두고 설왕설래가 오갔을 것이다. 처음 유력한 후보는 신선길이었다나 뭐라나.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겠지만 남해의 정서를 담아내기에는 역부족인 신선길이 아닌 바래길로 길을 부를 수 있어 천만 다행이라는 생각이다.

길이 조성된 건 2009년 문찬일 씨가 남해군에 길 조성을 제안하면서부터다. 10년을 바라보고 있지만 여전히 몇몇 구간은 조성이 채 이루어지지 않은 모양새다. 책은 2017년에 쓰여졌는데, 아직 완성되지 않은 곳들에 대한 언급이 종종 눈에 띤다. 북한산 둘레길에도 사유지라는 이유로 갑자기 구간이 다른 곳으로 바뀌는 등의 일이 있곤 해 바래길 조성에 어떤 어려움이 있었을지 대강 짐작이 갔다. 사유지가 아니어도 갑자기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오는 것을 모두가 반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누군가의 힐링 도모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스트레스가 될 수도 있음을 잘 알기에, 이를 두고 어떻게 평을 하는 게 옳은지는 조금 조심스러웠다.

사진이 조금 더 많았으면 하는 마음이 없진 않았다. 그래도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저자의 글을 좇아가며 마음껏 길에 대해 상상해 보았다. 지금은 육지와 다리로 연결돼 섬이라는 느낌이 그다지 들지 않지만 남해는 섬이다, 그것도 꽤 큰 섬. 그래서인지 어떠한 구간을 택해 걷건 바다와 인접해 있거나, 그게 아니라면 바다를 내려다보며 걸을 수 있는 호사를 누리는 게 가능했다. 몇몇 구간에서는 군 초소로 사용됐던 건물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남북관계가 경직됐던 시기에는 무장군인들이 주둔했을 것이다. 대개가 목 좋은 곳인지라 현재는 전망대나 쉼터 등으로 변신을 꾀한 경우가 많았다. 떠오르는 태양과 붉게 물든 하늘 따위를 바라보며 감탄사를 내뱉어도 좋을 우리와 달리 앳된 군인들은 자연이 아름답다는 말도 하지 못한 채 먼 바다만을 바라보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그저 먹먹했다.

김만중, 이순신 등과 관련이 있는 곳들도 있었지만, 바래길에서 정말 중요한 건 오늘날을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저자는 구간구간에서 만난 사람들에 대해서도 놓치지 않고 기록했다. 시골 마을이 으레 그러하듯 젊은이들은 떠나 없고 나이 든 어르신들이 주를 이뤘다. 그들이 살아온 70-80년에 달하는 시간은 값비싼 돈을 들여 구입하려 들어도 구하지 못할 책 한 권 이상의 가치를 지녔다. 그렇게 이야기를 듣고, 때론 구간에서 조금 벗어나기도 하는 느리디 느린 걸음을 좇다 보니 남해군 한 바퀴를 거의 다 돌 수 있었다. 그래도 직접 걷는 것만은 못하리라. 꼭 한 번 시간 내어 지리산 둘레길을 걸어야지 마음을 먹은 지도 벌써 여러 해다. 걷고픈 길 목록에 남해 바래길 또한 추가해본다

이달의 사락 q*****2 2018.09.25.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