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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은 크게 가시적 폭력과 비가시적 폭력으로 구분된다. 지젝의 용어로 말한다면 가시적 폭력은 주관적 폭력으로, 비가시적 폭력은 객관적 폭력으로 표현되는데 이는 상징적 폭력과 구조적 폭력을 아우른다. 자본주의 동학의 폭력성은 구조적 폭력에 해당하며, 이런 구조적 폭력의 집행자로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이 언급된다. 여기에는 빌 게이츠, 조지 소로스, 구글, 아이비엠, 인텔, 이베이 등의 최고경영자들, 토머스 프리드먼 같은 어용철학자 등 ‘스마트’한 인물들이 대거 포함된다. 지젝은 이들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을 오늘날 모든 진보적 투쟁의 적으로 규정한다. 이들의 구조적 폭력이 전지구적 차원에서 자행되기에 종교적 근본주의자나 테러리스트, 부패하고 무능한 정치인과 같은 국지적인 주관적 폭력을 일으키는 이들보다 더 위험한 존재로 치부된다.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의 윤리로는, 자선을 베풀면 무자비한 이윤추구행위도 상쇄된다. 자선은 경제적 착취라는 얼굴을 감추고 있는 인도주의적 가면이다. 선진국들은 원조와 차관 등을 통해 미개발 국가들을 ‘도움’으로써, 그들 스스로가 후진국의 빈곤에 연루돼 있으며, 공동책임이 있다는 핵심적 쟁점을 회피한다. 이는 초자아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거대한 기만이다.”(52쪽)
오늘날 탈정치적 생명정치가 지배적인 헤게모니다. 생명정치는 인간생활의 안전과 복지를 제도화하는 것을 최우선의 목표로 삼는 정치를 말하는데 이는 공포의 정치에 다름 아니다. 모든 보편적 윤리가 ‘물신주의적 부인’이라는 이데올로기적 장치에 의존한다. 여기서 물신주의적이라는 말은 “나는 안다. 하지만 내가 안다는 것을 알고 싶지 않다. 그러므로 나는 알지 못한다”라는 눈가리고 아웅하기의 의미다. 예를 들어 ‘너의 이웃을 사랑하라’는 그리스도교의 보편적 덕목이야말로 가장 차별적이고 배타적이고 편향적이라는 얘기다.
이 책은 슬라보예 지젝의 책 가운데 이해하기 쉬운 편에 속한다. 지젝의 담론은 그동안 ‘쉬운 것을 어렵게 말한다’는 일각의 비난을 모면하기 힘들었다. 이는 지젝의 문제의식이나 글의 스타일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담론무대에서 자주 등장시키는 난해한 철학자와 심리학자 때문이다. 즉 헤겔과 라캉이라는 다루기 힘든 두 헤비급 마법사들 때문이다. 여기에 한 명을 더 추가한다면 하이데거를 지목할 수 있다. 지젝은 이들의 이론을 영화와 소설과 같은 대중담론 수준에서 자유자재로 해석하고 풀이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헤겔과 라캉의 담론에는 공통적인 하부구조가 있다. 그것은 바로 극과 극은 서로 통한다는 논리이다. 그래서 때론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는 식의 해석이 난무한다. 한마디로 ‘선악일체론’이 지젝 담론의 근본적 성격인데 선은 때로 악의 가면에 지나지 않는다는 논리는 지젝식 이론담론의 창의성의 원천이자 가장 근본적인 맹점이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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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가시적이지 않은 것을 누군가에게 이해시킨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다. 눈웃음 지으며 뱉어내는 정중한 말에 내재된 폭력성을 설명하려 하거나, 빌게이츠 같은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가 베푸는 자선의 이면에 축적된 폭력성을 이야기 하는 것처럼 말이다. 직접적이고 표면화된 것에만 익숙해진 물질의 시대에 상징적이고 구조적이어서 비가시적인 것을 이해할 지적 사유능력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1. 비가시적 폭력에 대해서
그래서 무언가 부당하고, 비정상적이며, 우리의 삶을 잔혹하게 배제시키며, 자유를 구속하고 불평등을 고착화시키는 폭력성을 지적할 때 고작 동족학살, 인종주의, 성차별, 경제적 양극화와 같은 겉보기에 비합리적인 주관적 폭력을 말하는 데 그치고 만다. 이를테면 사회적 약자를 향한 억압적 공권력의 양태라든가, 부패의 썩은 내가 진동하는 관료의 도덕적 무감각이란 사악성, 착취적 노동위에 군림하는 재벌의 도착적 이기심 같은 것을 지적함으로써 사회적 폭력의 병리적 현상을 말하는 것이 고작이다. 결국, 이러한 것들을 제아무리 비판하고 변화를 요구한다고 해서 근본은 바뀌지 않는다. 굳이 이론적으로 입증하지 않아도 인간의 역사, 아니 한국사회만 바라보더라도 이것은 결코 변화된 적도 없으며, 변화할 가능성이 전혀 없음을 헤아릴 수 있다.
이러한 지점에서 폭력의 본질을 이해하고, 정작 우리들이 관심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비판하여야 할 정말의 ‘폭력’을 해독하는 ‘지젝’의 폭력에 대한 사유는 사회의 변화를 야기할 수 있는 그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폭력, 가시적이고 주관적인 폭력의 원인을 제공하는 원천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그는 폭력을 세 가지로 구분하고 있는데, 통상 겉으로 드러난 폭력을 ‘주관적 폭력’이라 하고, 드러나지 않은 비가시적 폭력을 ‘상징적 폭력’과 ‘ 구조적 폭력’이라고 정의하는 것이 그것이다. 상징적 폭력이란 언어 자체에 들어있는 것으로 언어가 의미세계를 대상에 부과하는 형식이며, 구조적 폭력이란 경제, 정치체가 정상적으로 작용함으로써 나타나는 파국적 결과이다. 즉 정상적인 상태에 내재하는 폭력이어서 정상을 혼란시킴으로서 두드러지게 가시화되는 주관적 폭력과 달리 보이지 않는 폭력이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거의 대다수가 직접적이고 물리적이며 이데올로기적인 폭력, 즉 주관적 폭력만이 있는 것처럼 떠들어대고 마치 그것이 사회악을 야기하는 전부인 듯 다른 형태의 폭력을 시야에서 지우고 있다는 점이다. 진정 주의를 기울여야 할 객관적 폭력(상징적 폭력, 구조적 폭력)을 보지 못하도록 필사적으로 방해하려는 듯이. 객관적 폭력은 주관적 폭력의 실질적 동인(動因)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제아무리 주관적 폭력을 비판해 보아야 근본적 폭력성을 근절할 수 없는 것이다. 공선옥의 『그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라는 소설은 바로 이것, 시민을 무심히 학살하는 구테타 군의 만행, 이 주관적 폭력이 한국사회의 밑바닥까지 잠식해 있는 - 이미지, 언행, 삶의 습관 등 - 구조화된 폭력성을 원인으로 하고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결국 주관적 폭력이란 객관적 폭력을 토대로 한 결과물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은 사람들을 삶의 평안에서 고통으로 내모는 것은 평범해 보이는 이웃들의 언행, 구조적인 것임을 시종 그려내고 있다.
지젝은 이러한 객관적 폭력의 본질, 그 민낯을 보여주기 위해 그야말로 찬란한 설명을 구가(謳歌)하듯 열거하는데, 민주주의, 자본주의를 필두로 해서 자유주의, 근본주의를 구조적 폭력의 토대로 하여, 언어라는 상징화 과정 자체의 폭력성, 궁극의 공포정치인 생명정치, 보편성의 윤리에 터 잡은 종교의 잔혹성, 사회적 최고의 악인 집단이라 할 수 있는 빗장 공동체, 나르시시즘적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니체적 말인(末人)의 형상을 한 쾌락주의적 금욕주의에 몰입하는 대중문화 등 비가시적 폭력의 양태 등은 무궁무진하다.
2. 자신과 맞서 싸워야 하는 구조적 폭력의 역설
이것들을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공동체가 맞서 싸우는 외부적 위협이 바로 공동체 속에 내재된 본질”이라 할 것이다. 예로서 자본주의를 지지하는 개인은 자기가 자기의 이익을 위해 행동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보편적 자본의 확대 재생산에 일조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조금 시각을 달리하면 거대 자본가인 ‘조지 소로스’나 ‘빌 게이츠’가 인도주의를 위기로 부각하고 진정 사랑을 보내며 자신들의 선한 면을 드러내는데 내재된 폭력을 보는 것이다. 막대한 기부를 위해서는 막대한 이익을 거두어야 한다. 극단의 개인주의적 경제윤리라는 착취는 예외로 하더라도 “변비를 고치기 위해 변비를 유발하는 초콜릿 변비약”을 파는 태생적인 폭력성을 본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의 자선은 초자아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인도주의적 가면이며, 사회적 재생산의 순환을 유지하려는 자본주의 연명(延命)적 필요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보편성을 겉으로 명백히 내세우는 윤리의식일수록 근원적으로 더 잔혹하게 타자를 배제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전 인류를 포용한다는 기독교의 논리를 보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는 하나이니라, 모든 인간은 형제이니”, 이를 다른 말로하면 기독교의 형제애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인간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가장 보편적인 듯 하지만 가장 지독하게 타자성을 부인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악랄한 상징적 폭력의 전형이라 할 것이다. 이것은 전반적으로 생태계를 파괴하고 오염시키는데 주도적으로 관여했던 지배계급이 자신이 저지른 결과에서 쏙 빠져나와 유기농 식품을 사먹으며 자연보호구역에서 휴가를 즐기는 빗장공동체의 내재적 폭력과 너무 닮아있다. 이렇게 타자를 배제하는 것, 자기이익, 자기연민을 위해서 타자를 고통에 빠뜨리고, 타자의 삶을 파괴함으로써, 아니 설혹 아무런 나쁜 일을 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자신들이 누리는 안락한 생활을 위해 지속적인 구조적 폭력이 누적되어야 했음에 대한 놀라울 정도의 무감각을 보게 된다.
3. 사회적 습관의 뒤흔듦에 대해서
내가 주목한 이 책의 하이라이트는 이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회적 폭력의 이유 중 하나인 ‘습관’에 대한 통찰이다. 습관이란 “우리의 일상생활을 암묵적으로 떠받치는 지하영역”이라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의 습관이란 무엇일까? 일을 신속하고 원만히 처리하기 위해 급행료와 뇌물을 주고, 법률 등 규칙의 절차를 밟지 않거나 위반하면 학연, 지연 등 인맥을 찾는, 부정한 것을 잘하는 융통성이며, 인간관계의 칭송이며, 이것을 생존의 필수 조건이라 치켜세우는 것이다. 한국인을 사로잡고 있는 이 습관의 본바탕은 그야말로 위협적인 폭력성을 내재하고 있다.
수년전 한국사회를 들끓게 했던 해병대 병사의 총기사건은 습관, 즉 “동료군인을 아무도 모르게 구타해도 된다는” 집단 결속의 확인을 위한 행위는 암묵적 관습이 지닌 폭력성의 전형적 사례라 할 수 있다. 위반행위이지만 모두가 묵인하는 무의식적으로 체화된 폭력이다. 사실 이러한 것들은 한국인의 삶 속에서 지극히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기에 폭력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한번 떠올려보자. 가시적 주관적 폭력은 이러한 구조적, 상징적 폭력을 원인으로, 기반으로 하고 있음을 말이다. 자신의 권력야욕을 위해 동족을 학살하는 군인 독재자의 탄생이라는 폭력은 한국인, 한국사회에 뿌리를 깊게 내린 객관적 폭력위에서 가능했었다는 것을.
이것은 또 다른 측면에서 조명이 가능하다. 일례로 모두가 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 엄격한 규제를 만드는 것이다. 한국의 지배 권력은 이 전략을 아주 즐겨 사용한다. 그리곤 집행은 엄격하게 하지 않는다. 아주 자의적으로 행사되는데, 마치 자비를 베풀듯 집행 또는 유예하는 것이다. 단지, “ 뭐 우리에게 거슬리는 자들이 있을 때 우리 뜻대로 버릇을 잡아 줄 수단 정도는 있어야 된다”는 식으로 행사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비의 체제’는 전체주의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이 전체주의적 행태가 다소 흐릿해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한국의 지배 권력은 이것을 놓지 못하고 있다. 결국 암묵적인 관습적 규칙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네트워크인 전체주의적 습관을 붕괴시켜야 하는 것인데, 소비에트의 붕괴는 이것을 실제로 증명한다.
어떤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에게 뇌물을 주고 누군가에게 연락하면 되던 것이, 어느 순간 그 누구라는 대상이 사라진 것이다. 기존의 구조적 폭력의 사슬이 끊어진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흥미로운 시사를 던져준다. 습관을 파괴하면 체제는 붕괴한다는 것이다. 공동체 속에 내재된 본질, 공동체를 위협하는 폭력의 본질로서의 습관을 파괴하는 것이다. 주관적 폭력과 싸운다고 하면서 구조적 폭력에 가담하는 자들의 위선이 아니라, 구조적 폭력 그것과 싸워야 비로서 삶의 자유와 평온, 정당함이라는 진리가 성취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눈에 보이는 것만을 기만적으로 흔드는 것이 아니라, ‘제도적 무의식’, 일상생활을 암묵적으로 받치고 있는 것을 뒤흔들어야만 한다는 이야기이다.
이외에도 자신이 처한 상황의 경험을 의미있는 전체 속에 위치시킬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사람들,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공간에서 배제된 사람들의 “행위로의 이행”이라는 폭력의 정당성, 때론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가장 폭력적인 무엇을 할 수 있음의 얘기들은 이 배타적이고 범주화하는 불온한 세상을 극복하기 위한 삶의 의식과 태도, 사유의 방식을 안내한다. 폭력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라는 ‘뮐레르’의 말처럼 지젝의 이 책은 폭력 그 자체를 이해하는 더없이 탁월한 저술이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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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의 따끈따끈한 신작이 나왔다. 제목은 폭력이란 무엇인가! 원제는 Violence인거 같다. 역시나 지젝의 도발적이고도 화끈한 사유가 불을 붙는 작품인거 같다. 그래서 간략하게나마 미천한 능력이지만 서문을 요약해서 써보고자 한다.
눈에 보이는 폭력만이 폭력은 아니야 지젝은 서문을 열면서 우리는 한걸음 물러서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천명하고 나선다. 폭력이라는 것을 단지 눈에보이는 가시적인 폭력, 즉 명확히 식별가능한 행위자가 저지르는 것이라고 한정짓지 말라고 하면서 말이다.
주관적 폭력과 객관적 폭력 지젝은 폭력을 크게 주관적(subjective)폭력과 객관적(objective) 폭력으로 나눈다. 주관적 폭력은 가장 가시적인 것에 불과한것이며 객관적 폭력은 상징적(symbolic)폭력과 구조적(systemic)폭력으로 나눌수 있다고 한다. 그중에서 구조적 폭력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폭력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고 말한다. 쉽게 말해서 주관적 폭력은 가시적인 것이고(범죄,테러행위,사회폭동등..) 구조적 폭력은 비가시적이라 눈에 쉽게 띄지 않는다는 것이다.
빌게이츠도 폭력자? 지젝은 구조적 폭력을 일삼는 무리들이 주로 사용하는 가짜 급박함을 말하는데 그것은 전세계가 지금처한 위기들을 가만히 앉아 볼수만 없다는 일종의 외침이다. 이러한 거짓 급박함 같은 수단을 통해 부자들은 세계 외부의 혹독한 현실을 부정하거나 무시할 수 없게 되어 일종의 면죄부를 성립하게 된다는 것이다. 엄청난 독점을 일삼고 시장을 지배해왔던 빌게이츠의 말이 그것을 잘 말해준다. '' 아직도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이질로 헛되이 죽어가는데 컴퓨터가 뭐가 중요한가?'' 이처럼 혐의에서 벗어나는 면죄부를 성립하는 일은 간단한 것이다. 사다리를 걷어 찬다음에 실컷 배를 먼저 채우고 다시 사다리를 세우면 되는 것이다.
레닌처럼 공부하고, 공부하고, 또 공부하라 이런 위험한 비판적 분석과 더불어 때로는 거짓 급박감에 추동되어 끌려다니기 보다는, 즉각 참여하고자 하는 충동에 저항하는것, 끈기있고 비판적인 분석을 사용하여 일단 기다리는 것이 '실제적인' 일일때도 있다고 말한다. 바로 레닌이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때 스위스의 외진곳에 운둔하며 헤겔의 논리학을 읽으며 공부하고, 또 공부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 이후 레닌은 혁명을 완수하지 않았던가? 그러면서 지젝은 우리가 미디어의 폭력에 파묻혀 있을때 우리가 해야할 일도 무엇이 이러한 폭력을 초래했는지 레닌처럼 ''공부하고, 공부하고, 또 공부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서문을 끝맺는다.
이보전진을 위한 일보후퇴! 우리는 한걸음 물러서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것은 다른 시각으로 혹은 비딱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면 그 이면에 감추어졌던 검고 추잡한 진실이 드러나게 될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한걸음 후퇴를 통해서만 앞으로 두걸음, 세걸음 더 나아갈수 있을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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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폭력을 '사회관계를 발본적으로 뒤집어버리는 것'이라고 정의를 하고 있습니다. 굳이 어려운 용어를 쓰지 않더라도, 주관적 혹은 객관적(상징적, 구조적)폭력이 행사된다는 건 정상적인 사회관계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반증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리적 힘의 사용을 전제하는 주관적 폭력은, 부모와 자식간 혹은 사제시간, 상급자와 하급자간 등등 어느 곳에서든 쉽게 목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상징적이고 구조적으로 나타나는 폭력은 직접 경험하지 않고서는 그게 폭력인지, 그 강도가 어떠한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어쩌면 우리 인간이 이 지구에 가하고 있는 행위들도, 자본이 빈자들에게 가하는 압력도 모두 폭력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일상이 폭력적이며 폭력을 내재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어떤 가치와도 어울릴 수 있는, 보편적 실효성을 가진 자유주의를 이데올로기로 하는,경제적-상징적 기계인 자본주의가 구체적인 문와나 세계에 뿌리박고 있지 않다는 그의 주장, 따라서 자본주의의 정치적 형식인 자유주의와 의회 민주주의의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면 그 어떤 급진적인 주장도 반자본주의적이지 않다는 그의 주장에도 동의합니다. 자본주의나 혹은 다른 시스템도 마찬가지로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합니다. 자본주의가 인간의 끊임없는 욕망으로 작동하듯이 말입니다. 따라서, 시스템에서 변화를 일으키기 위한 첫 번째 제스처는 활동을 철회하는 것, 즉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라는 것에 동의합니다. 유권자들이 할 수 있는 가장 폭력적인 저항은, 투표에 참여하지 않음으로 그 시스템에 균열을 내는 것이라는 말, 따라서 때로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폭력'적으로 무언가를 하는 것이라는 말에도 동의합니다. 어느 순간,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사회에서 '폭력은 위험한 것'이라는 것에 동의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매주마다 수 백만이 모여서 촛불을 들고, 대통령의 탄핵과 하야를 요구하는 그 곳에서도 사람들은 본능처럼 '비폭력'을 외치고 있음을 봅니다. 사람들의 요구는, 이 사회 시스템의 전복이나 변화보다 시스템이 유지되는 가운데 부조리하고 부정의한 부분을 도려내라는 말처럼 들립니다. 그러니, 그 속에서 '폭력'이 발생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대통령은 물러나고, 권력을 농단하고 비리를 저지른 이들은 처벌을 받을 지언정, 우리가 딛고 선 이 시스템에 문제가 있으니 이걸 바꾸자는 논의는 사실상 어려울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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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라라, ‘인도주의적’인 그 손길을
폭력을 바라보는 우회로
슬라보예 지젝은 폭력을 ‘주관적subjective’인 것과 ‘객관적objective’인 것으로 구분한다. 주관적 폭력은 직접적이고 가시적인, 즉 명확히 식별이 가능한 행위자가 저지른 폭력을 말한다. 객관적 폭력은 두 가지로 다시 나뉜다. 첫 번째는 부르디외가 묘파했듯이 언어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상징적’symbolic 폭력이고 두 번째는 경제 체계와 정치 체계의 작동으로 발생하는 구조적’systematic 폭력이다. 문제는 주관적 폭력은 눈에 잘 보이는 반면 객관적 폭력은 쉽게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게다가 주관적 폭력은 이미 구조적 폭력이 내재된 상황에서 발생한다. 주관적 폭력은 징후일 그 안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구조적 폭력이라는 배경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주관적 폭력과 객관적 폭력을
동일선상에서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이다. 주관적 폭력은 비폭력을 배경으로 하여 경험된다. 주관적 폭력은 ‘정상적’이고
평온한 상태를 혼란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객관적 폭력은 바로 이 ‘정상적인’ 상태에 내재하는 폭력이다.
객관적인 폭력이 눈에 보이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무엇인가를 주관적으로 폭력이라고 지각할 때 바로 그 기준이 돼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조적 폭력은 너무도 뚜렷하게 눈에 보이는 주관적 폭력의 정반대이며,
물리학에서 말하는 악명 높은 ‘암흑 물질’과도
같은 것이다. 구조적 폭력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폭력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반드시 고려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폭력은 단지 주관적 폭력의 ‘비이성적’ 폭발로만 보일 것이다.
슬라보예 지젝, 『폭력이란 무엇인가』, P25
지젝은 우리에게 폭력에 대해 성찰하는 우회로를 안내한다. 그것의 시작은 감정을 배제하는 것이다. 폭력행위가 유발하는 공포감과 희생자에 대한 감정이입은 객관적 사실을 판단하는 사고를 마비시킨다. 물론 가해자에 대한 분노와 피해자에 대한 공감은 필요하지만 이는 자칫 도덕적 잣대로만 사건을 바라보게 만든다. 그리고 이러한 접근방식은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뿐더러 겉모습만 살짝 바뀔 뿐 같은 뿌리에서 다시 발생하는 폭력에 대해서도 속수무책일 뿐이다. “우리는 (사실에 입각한)진실truth과 진정성truthfulness을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지젝의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구조적 폭력, 그 보이지 않는 배경
지젝은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를 언급한다. 빌 게이츠, 조지 소로스, 구글, 아이비엠 등이 대표적인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다. 그들은 ‘스마트’하다. 창의적인 기업가로 많은 돈을 벌고 누구보다 많은 기부를 한다. 하지만 인도주의적인 그들의 이미지를 한 꺼풀만 벗기면 “그들의 가장 선한 면을 드러내 보일 기회니까!”(p47)라는 실체가 드러난다.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은 실용주의적이다. 그들은
공리공론적 접근을 싫어한다. 그들이 보기에, 착취당하는 단일한
노동계급 같은 건 지금 없다. 아프리카의 기아, 무슬림 여성들이
겪는 고난, 종교 근본주의자들의 폭력과 같은, 해결이 시급한
구체적인 문제들이 있을 뿐이다. 아프리카에 인도주의적 위기가 발생했는데 케케묵은 반反제국주의
따위를 앞세우며 개입하는 건 아무 소용없다. 실제로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은 인도주의의 위기를 진정으로
사랑한다. 그들의 가장 선한 면을 드러내 보일 기회니까! 대신
우리 모두가 실제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에 집중해야 한다. 사람들과 정부와 기업이 공동 사업에
참여하도록 하고, 중앙 정부의 도움에 기대는 대신 상황을 개선해나가기 시작하고, 이름표에 신경 쓸 것이 아니라 창조적이고도 관습에서 벗어난 방식으로 위기에 접근해야 하는 것이다.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이 특히 좋아하는 것은 남아공의 인종차별정책 반대
투쟁 같은 상황이다. 몇몇 거대 다국적 기업이 자사의 남아공 지점에서 모든 인종분리정책을 철폐하고 흑인과
백인에게 동일 직업에 대해 동일한 임금을 지급하는 등 인종차별 법규를 무시하는 결정을 내렸는데,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은 이런 결정이 직접적인 정치 투쟁만큼이나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정치적 자유를 위한 투쟁과
기업의 이익이 맞아 떨어지는 완벽한 사례 아닌가? 회사들은 이제 인종차별정책이 사라진 남아공에서 번창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슬라보예 지젝, 『폭력이란 무엇인가』, P47
그들은 자본주의의 작동 방식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자본주의 자체에 내재된 역설은, 자본주의는 자기 꼬리를 잘라 먹고 살아가는 뱀과 같다는 것”이라는 지그문트 바우만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은 온갖 독점으로 경쟁사를 파산시키거나 합병하고 제 3세계의 노동력을 싼 가격에 이용해 돈을 번다. 그 돈으로 다시 그들에게 기부를 한다. ‘지독한 사업가’ 모습은 자선 행위와 세계 평화에 앞장서는 ‘인도주의의 좌장’의 모습으로 감춰진다. 그들이 막대한 기부를 하는 것은 개인적인 특성에서 기인한 일이 아니다. 진심이든 아니든 자선행위는 자본주의의 순환이 낳을 수밖에 없는 것이며, 경제적 관점에서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그래야만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를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기부행위는 일종의 재분배를 통하여 균형을 다시 잡아가며 치명적인 덫을 피해간다. 즉, 국가의 주도에 의한 강제적 재분배를 교묘히 비껴가는 것이다.
잘라라, ‘인도주의적’인 그 손길을
큰 차원의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이 존재한다면 작은 차원의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 역시 존재한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인도주의적인 도움의 손길에 우려를 표했는데,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든 자원봉사자든 인도주의적 손길을 전하는 사람이 ‘배제의 사슬’을 단단히 하는 중요한 고리라는 것이다. 즉, 난민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전하는 사람들이 “적은 비용으로 난민을 배제하는 일을 담당하는 요원”이 아닐까라는 것이다. 진심이든 위선이든 겉으로는 ‘인도주의적 행동’이 평화를 사랑하는 착한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그 내면에는 배제의 목적이 숨어있는 것은 아닐까. 폭발을 유발하는 파괴적인 원한을 줄이기 위해 ‘인도주의적’ 손길로 그들이 사는 곳을 비교적 살 만한 곳으로 만들어놓고, 자기의 가족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빗장을 걸어 잠그고 담장을 높이 쌓아 잠재적 범죄자들과 분리하는 것처럼 무장을 한 경비원들로 하여금 철저히 그들을 격리 시키는 것이다.
사회적 부패[인간쓰레기들]의
불쾌한 악취가 원주민들의 거주지에 도달하지 못할 만큼 먼 거리, 이것이 그들의 영원한 거처인 임시 수용소의
위치를 선정하는 주요 기준이다. 그런 장소가 아닌 곳에 있는 난민은 장애물과 골칫거리로 간주되지만, 그 안에 들어간 이들은 잊힌다. 난민을 그런 곳에 가둬 놓고 밖으로
새어 나오지 못하도록 막는다는 점에서, 그런 격리를 궁극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만든다는 측면에서
“일부의 연민과 또 다른 일부의 증오”는 서로 협력해 난민을
멀리 격리시키는 동일한 효과를 만들어 낸다.
지그문트 바우만, 『모두스 비벤디』, P72
이는 서로 함께 있을 수 없는 것을 함께 있게 하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으로 보인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표현을 다시 빌리자면, “즉, 해로운 인간쓰레기를 처리하고자 하는 압도적인 바람뿐만 아니라 도덕적 올바름righteousness을 원하는 절실한 바람도 충족시킬 수 있는 이상적인 방법인 것이다.”(P. 72)
복지의 기반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앞서 말했던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의 모습은 과거에서도 찾을 수 있는데, 지젝이 언급한 벨기에의 왕 레오폴드 2세가 대표적인 예다. 콩고 대학살의 주범인 그는 대단한 인도주의자였고 교황에 의해 성인 칭호까지 받았던 사람이었다.
주관적으로 본다면, 그는 그 자신이 다스렸던 콩고의 자연자원 착취라는 대규모 경제계획이 낳은 파국적 결과들을 적당히 중화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진실한 인도주의자였을 수도 있다. 콩고는 그의 개인 영지였으니까! 가장 커다란 아이러니는 이런 노력에서 얻은 이윤 대부분이 벨기에 국민들의 복지, 공공사업, 박물관 등에 들어갔다는 점이다. 레오폴드 왕은 오늘날의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의 선구자였던 것이 분명하다
슬라보예 지젝, 『폭력이란 무엇인가』, P41
이러한 사실은 지금의 복지국가의 형성과 비슷한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기업의 복지에서 노조들이 주창하는 것들 중 핵심은 조합원의 몫을 늘리는 것이다. 그 사이에 비정규직의 권리와 복지는 들어설 틈이 없다. 좀 더 넓게 국가적 차원을 보자면, 잘 갖춰진 사회안전망을 자랑하는 선진국의 기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박노자 교수는 한 칼럼에서 이러한 상황에 대해 언급했다.
당연히 노르웨이의 최대 기업인 스타트오일 (국영 석유회사)의 노조는 (외국인
노동자를 포함한) “조합원의 임금 인상과 복지” 등을 위해서 커다란 노력을 하고 있지만, 그들과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기업이 이윤추구해야 하는 상황에서 예컨대 자연환경 파괴적인 로포텐 섬 (관련링크)
근방의 유전 개발 문제라든가 알제리아와 같은 최악의 독재국가에서의 자원 “개발” (사실상
약탈) 참여 문제에 있어서는 과연 환경 본위의, 국제연대
본위의 입장을 취하겠습니까? 노르웨이와 같은 복지국가에서는 조직노동과
자본은 비록 각각의 “몫”을 놓고 늘상 긴장을 하고 있지만, 또 동시에는 (주)노르웨이 운영에 있어서는 “동업자”이기도 합니다. 노르웨이 자본을 위해서 땀을 흘리는 앙골라나 방글라데시 노동자 입장에서 본다면 차라리 “공범”은 아닐까요? 노르웨이의 굴지의 재벌인 통신사 텔레눌의
방글라데시 공장에서 언제 죽을지도 모르고 별다른 안전장치없이 일해야 하는 13세 아이들에게는 텔레눌의
“해외 경영”을 반대한 적도 없는 그 노조는 과연 무엇일까요? 박노자, <복지국가의 명암>(‘레디앙’ 칼럼)
물론 콩고의 사람들을 대학살 했던 레오폴드 2세와 단순 비교하는 것은 다소 과격한 생각일지 모르지만, 방법의
차이가 있을 뿐 원리는 같다고 볼 수 있다. “역설로 들리지만, 실은
가장 내구력이 있고 가장 튼튼한 자본주의는 바로 다수를 공범이랄까, 배부른 감옥의 “수인 겸 간수”랄까
하여튼 체제의 순량한 “일분자”로 만드는 복지자본주의입니다”라는 박노자 교수의 말을 되뇔 필요가 있다. 환상은 금물
여기까지 전개된 생각에 대해 누군가는 냉소주의라고 비판하고 누군가는 “그럼 아무 것도 하지
말자는 것이냐?”라고 물을 수 있다. 그렇다면 나는 냉소가
아니라 의심이라고, 그리고 지젝의 조언대로 주저 않고 바로 대답하겠다.
“에!, 바로 그겁니다”. 어설픈 열정과 온정주의은
‘주관적 폭력’에만 초점을 맞추게 만들고 ‘좋은’ 의도가 오히려 ‘객관적
폭력’을 증대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폭력뿐만 아니라 다른
문제들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을 빌려야겠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즉, 행동이 따르지 않는 생각은 분명히 무기력하지만
생각이 없는 행동은 효력이 없다. 그리고 그런 행동은 도덕적 부패와 인간적 고통을 엄청나게 증가시킬
수밖에 없다. 지그문트 바우만, 『모두스 비벤디』, P38
참고
지그문트 바우만, 『모두스 비벤디』, 후마니타스 슬라보예 지젝, 『폭력이란 무엇인가』, 난장이 박노자, <복지국가의 명암>,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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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며 줄을 잔뜩 그어 놓는 버릇이 있다. 지젝의 책을 읽고 나면 나타나는 특징이 있다. 주제와 크게 관련이 없는 것 같은 내용에 줄이 그어져 있다는 것이다. 지젝의 글을 읽다 보면 책의 주제를 파악하는 데 어려움이 따른다. 그 이유는, 어렵기도 하겠지만 행간으로 흘러 나오는 그의 번뜩이는 통찰에 마음을 빼앗겨 버린 것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이 책은 일반적인 육체적 폭력이 아닌 눈에 잘 보이지 않는 폭력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언어적 폭력이나 구조적 폭력 같은 것들이다. 예를 들어 '관용' 을 생각해 보자. 다른 사람의 행동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자. 다만 그가 나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 이 때 관용이란 무엇일까. 그에게는 또 다른 감옥이 아닐까. 침범을 규정 내리는 것은 그가 아니라 나이기 때문이다. '인권'이라는 개념도 마찬가지다. 인권이라는 개념이 보편화 되었을 때 그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의 인권은 당연히 무시되어도 된다. 그럼, 이때 인권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인권인가. 대의가 사라진 시대. 이데올로기가 사라진 시대.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자본이다. 저자는 이 점을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다. 대의가 사라지가 다원화된 개인적 가치를 모두 인정하는 진짜 천국이 도래할 줄 알았는데, 대의가 사라진 자리를 차지한 것은 돈이다. 이 책은 보이지 않는 폭력의 위선에 대한 폭록로 시작하여, 폭력에 대한 긍정, 혁명에 대한 긍정으로 결론 맺는다. 현 시대의 저항이라는 것이 자본주의를 존속시키는 기제로 작용하는 마당에, 저자는 저항의 의미를 새로이 사유하고 있다. 여기서 개인적으로는 헷갈렸다. 저항하지 않고 뒤로 물러 나는 것이 진정한 저항일 때가 있다고 저자는 레닌의 말을 인용하며 말하는 데, 그 때는 언제란 말인가. 그럼, 우리가 혁명을 위해 폭력까지도 불사할 때라는 결정을 하기 위한 참조점은 무엇인가. 고통과 용기, 외로움의 경험이다. 이것들은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참여적 실천'를 통해 얻을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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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보예 지젝은 워낙 유명한 지식인이지만 그의 책을 제대로 읽은 건 이번이 처음. 그것도 엄청나게 오래 걸려서 ;; 다양한 대중문화 텍스트를 예로 들어가며 자신의 논리를 주장하고 오늘날 자본주의 시대 어느 곳에 갖다 붙여도 통용될 것 같은, 대중적으로 먹힐 만한 이론을 제때에 펼쳐주신, 즉 시대가 원하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계신 느낌? 어쨌거나 재밌게 읽는데 도움이 되었다.
지젝의 <폭력이란 무엇인가>는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하는 비가시적 폭력의 다양한 형태를 설명하고 있다.그 수많은 폭력을 파고 들어가 보면 그 속에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도사리고 있다. 합리적이고 모던한 것으로 유통되고 있지만 사실은 그것만큼 두꺼운 껍데기에 가려진 채 근본적인 것으로부터 대중들의 눈과 귀를 멀게 만들고 있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와 자본이 휘두르는 폭력인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에서 우리에게 부여하는 '자유'라는 것이 과연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 허용되는 것인가. 실제로 우리가 스스로 - 아무 조건에 간섭받지 않은 채-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이 사회 안에 얼마나 되는가. 그리고 그러한 자유가 허락되었다고 믿음으로써 남들로부터 자연스럽게 강요받는 의무나 자기도 모르게 포기하게 되는 권리는 없는가.
사회 시스템, 미디어, 종교, 이웃관계, 내게 주어진 의무 등 모든 것이 우리에게 하나의 폭력일 수 있다. 피를 흘리고 억압을 당하는 현실적 차원의 폭력보다도 가장된 미소와 동정이 더 심한 폭력일 수 있다. 훨씬 교활하고 장기적이며 치유와 처벌이 힘든 폭력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폭력에 대항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해보지 않을 수 없다. 그 방법은 상황에 따라 다르게 적용될 수 있을 것인데 지젝은 그 방법 중 하나가 '다시 시도하고 또 실패하고 더 낫게 실패하'는 것이고 또다른 하나는 아예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좀 추상적이긴 하다. 실패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사회주의의 뒤를 이을 체제는 바로 '공산주의'라는 책 속 문구도 아직 와닿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의도만큼은 분명히 알겠다. 우리에게 중요한 건 내게, 그리고 내가 속한 사회에 폭력을 가하는 주체를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쉽게 생각해서 우리가 당연히 해왔던 모든 일들에 의문을 갖고 그것이 궁극적으로 누구에게 어떤 가치를 가져다 주는가를 생각해 보면 그 답이 나올 것이다. 내가 매일 출근을 해야 하는 이유, 법을 준수하고 세금을 내야 모범시민이라는 상식에 따르는 이유, 선거를 하고 쇼핑을 하고 미디어를 소비하고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이유. 내가 행하는 일상 속 모든 행위 중 불편하게 느껴지는 요소가 있다면 그 배경 뒤에 바로 폭력의 주체가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리뷰를 쓰려다 보니 얼마 전에 본 영화 <로보캅>의 많은 부분이 떠오른다. 가시적 폭력을 처단하는 사명을 가졌던 경찰 '알렉스 머피'는 자신의 정체성 자체가 무너져 내리는 경험을 한 이후에야 모든 것들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기 시작했다. 물론 그 과정은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 로보캅이 된 알렉스는 많은 이해관계-옴니코프, 아내, 시민의 기대 등-가 얽힌 중심에 서서 다양한 입장을 고려해야 했고, -로봇 수트를 입음으로써- 순식간에 많은 지식과 힘을 얻어 물리적으로도 힘든 상황을 겪었다. 그러나 그가 결국 로봇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증명해 낼 수 있었던 것은 자신에게 주입된 가치와 의무를 거부하고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찾아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이 사회에서 부품처럼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뼈아프게 되새겨야 할 교훈이 아닐까. 내가 인간임을 잊지 않는 것. 사방에 널린 폭력과 억압으로부터 지배당하는 위치에 놓인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내게 부당한 것을 은밀히 강요하는 주변의 모든 것들을 응징하고 스스로 사고하고 결정하는 존재가 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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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아직 모자라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준 책입니다. 내용이 쉽지만은 않네요. 누군가에겐 도움이 되겠지요? 슬라보예 지젝이란 분의 책 중 처음 읽어보는 것입니다. 책을 사기 전 생각했던 내용은 사람과 사람간의 어떤 폭력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가에 대한 이야기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책을 읽다보니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내용이더군요. 철학적인 책이다보니 내용이 저의 생각과 다른 부분이 꽤나 있더군요. 소설을 주로 읽는 저에겐 색다른 도전을 시도한 책입니다. 그리 만족스러운 결과는 아닙니다만 책은 역시 여러번 읽어봐야 제대로 된 맛을 알겠죠? 그 때가 되면 글을 수정해야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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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만 보면 도대체 폭력을 몰라서 묻는 거야 하는 생각이 든다. 가식적으로 보이는 물리적인 힘으로 타인을 괴롭히거나 언어로 타인을 불쾌하게 또는 비참하게 하는 것들이 폭력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그 보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폭력 속에서 살고 있을 수있다. 알게 모르게 강요된 현 체제나 문화, 암묵적으로 용인된 사회 시스템에서는 우리 자신 조차도 그것이 폭력인지도 모르게 평화롭고 행복하게 지낼 수있다. 다양한 문화적인 이해라는 이름으로 약자에 대한 비인간적인 행위가 그 나름의 문화이기에 폭넓은 이해와 수용이라는 이름으로 근본적인 문제를 간과 할 수있다. 다양한 문화의 이해보다는 그 문화가 인간적인 존중에서 출발했는지를 따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문화의 다양성이라는 이름으로 무마될수있다.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수많은 암묵적인 합의들 조차도 한편으로는 또 다른 폭력이 될수 있을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