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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형식을 비롯한 장르문학의 형식을 차용한 작가의 의도는 알겠는데, 그리고 몇몇 부분은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도 사실인데, 작품들이 전반적으로 낮은 단계의 퍼즐을 푸는 듯한 느낌이다. 조금은 단조롭고 식상하고 뻔해서 살짝 지루하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긴장감도 호기심도 부여하지 못한다. 독자가 작품을 끝까지 읽을 수 있는 동력은 무엇일까? 포괄적으로 말하자면 어떤 ‘재미’일 것이다. 그게 작품성이든 감동이든 순수하게 엔터테인먼트적인 재미나 즐거움이든 말이다. 긴장감과 호기심을 적절히 부여해서 독자들이 끝까지 작품에 대한 관심을 유지하도록 하는 것이 능수능란한 작가들의 능력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점에서 윤이형의 작품은 조금 아쉽다. 좋게 말하면 아주 릴랙스한 상태에서—그러나 이것이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가벼운 작품이란 의미는 아니다—읽을 수 있는 작품이긴 하다. 작가의 ‘속도’에 맞춰서 느긋하고 천천히 읽을 수 있다면, 간간히 숨어 있는 재미들을 찾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기엔 독자들의 속도가 지나치게 빨라졌다는 게 문제다. 비트들이 점점 빨라진다. 속도도 호흡도…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게 쏟아져 나오니깐 어떠한 것도 신선하거나 새로움을 주지 못한다. 해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오히려 이러한 시대의 새로움은 전혀 낯선 어떤 것을 발견하는 데서 찾기보다는 익숙하고 잘 알고 있는 것을 깊숙이 혹은 다른 측면에서 들여다보는 데서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래야 한다는 게 기본적인 내 생각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윤이형이 차용한 장르 문학의 형식은 새롭다고 하기엔 이미 낡았다. 낡은 것이 반드시 진부하고 재미 없는 건 아니지만 작가의 의도는 일정 부분 실패한 것 같다(물론 이러한 평가는 세대마다 달라질 것이다. 아무래도 새로운 것에 익숙한 젊은 세대일수록 인색해지겠고 그렇지 않은 세대들은 참신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완전한 항해>의 ‘창’이나 <큰 늑대 파랑>에서 ‘파랑’의 캐릭터는 꽤 인상적이고 작품의 몇몇 장면은 매우 강렬하다. 특히 <큰 늑대 파랑>의 마지막 장면은 일본문화가 수입되기 전인 90년대 중반에 접했던 ‘원령공주’를 보는 듯하다. 그런데 이 또한 역으로 말하면 어디선가 이미 본 이미지이기 때문에 그 강렬함이 반감될 수 있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윤이형은 아마 여기서 평가가 갈리게 될 것 같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기시감 때문에 작품의 재미가 증폭되는 사람이 있는 반면 그래서 재미가 반감되는 사람도 있을 테니 말이다. [덧붙임] 그런데 더욱 애매한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르문학적 성격이 강하게 드러난 작품일수록 작가로서 윤이형이 돋보인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책의 후반부에 실린 ‘로즈가든 라이팅 머신’이나 ‘맘’같은 경우는 장르문학적 요소가 다른 작품에 비해 적게 드러나는데, 이런 작품들은 정말 밋밋하다. 어떤 매력도 찾을 수 없다. 아마 윤이형 작가도 참 고민이 많지 않을까 싶다. 장르문학적 형식을 순수문학에 차용하는 방식은 아무래도 유효기간이 짧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독특함을 지우면 작가로서의 매력이나 특별함이 급격히 상실된다. 작가가 선택한 다음 노선이 궁금하다. 아마 거기에서 많은 부분이 결정되지 않을까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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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을 아무리 다그쳐봐도 내가 아프기만 할 뿐이다. 마음에 들지 않아도 적당히 순응해 살다 보면 어느 순간 부쩍 늙은 내 자신과 만나게 된다. 세상에는 안타깝게도 그런 삶을 택한 사람들로 가득하다. 본인이 원하는 게 무언지 묻지도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을 우리 세상은 ‘철 들었다’ 표현하며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는 마냥 긍정적이지만은 못하다. 작가에 따르면 그런 삶을 택한 이들은 일종의 ‘좀비’와도 같다. 마음에 안 드는 세상을 더 뒤틀린 곳으로 만드는 힘은 바로 이런 좀비들로부터 나온다. <큰 늑대 파랑>을 처음 접했을 땐 독특하게 전개되는 이야기가 퍽 흥미로웠다. 마치 전자게임에서나 만나볼 수 있을 것만 같은, 작가는 제 작품을 통해 시공을 비틀고 중력마저도 무기력하게 만들고 있었다. 우리가 한 번 즈음은 꿈꿔보았던, 공상 과학에서나 가능할 법한 세상이 그녀의 소설 속에서는 펼쳐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한없이 비현실적일 것만도 아니어서 그녀의 작품은 ‘소설은 현실의 반영’이라는 공식에 적절히 부합하고 있었다. 환타지적 요소로 가득 찬 세상에서 살아가는 등장 인물들은 우리 자신의 모습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었다. 우선 이 책의 제목으로 쓰인 <큰 늑대 파랑>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살펴보자. 늑대 파랑은 자신을 탄생시킨, 그래서 아버지와 어머니라 부르는 인물들을 공격한다. 좀비들의 공격을 받은 세상을 자유롭게 하라는 제 부모의 명을 받든 파랑의 움직임으로부터 자유로운 인물은 아영뿐이다. 네 명 중 셋이 현실을 혼란스럽게 만든 좀비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우리 사회에서는 75%라는 비율보다 더욱 과대한 인구가 이것이 세상의 법칙이요, 진리인가보다 여기며 경쟁에서 승리를 거두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을 것이다. 사실 살아남은 아영이라 하여 혼란스러운 세상으로부터 완벽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돌도끼를 손에 쥔 채 파랑의 등에 올라탄 그녀가 어딜 향하게 될지에 대해 작가는 명확하게 묘사하질 않는다. 그들의 여정이 성공을 향하고 있을지, 아니면 결국에는 그들마저도 좀비가 되어 거친 세상을 누비게 될지 우리로서는 알 길이 없다. 다분히 비관적인 이러한 분위기는 다른 작품들에서도 만나볼 수 있다. 분열하는 인간을 소재 삼은 <결투>에서 분열을 막을 수 있는 절대적인 방법은 제시되지 않는다. 결투는 분열체를 없앨 수 있는 좋은 선택일지 모르나 이후 또다시 발생할 수도 있는 분열의 대안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결투는 자신과 꼭 닮은, 제 자신을 향한 폭력에 불과하다. 스스로를 죽임으로써 제 정체성을 발견하는, 등장 인물들의 서글픈 운명은 현대인들이 끌어안아야만 하는 운명이라 할 수 있다. 물론 힘이 들 것이다. 그렇지만 운명에는 순응뿐만 아니라 거역도 할 수 있다. 우린 우리의 선택에 의해 어떠한 종교도, 법칙도 뛰어넘는 스카이워커가 될 수도 있으며, 가장 멀리, 가장 빠르게 난 루족 비행사 창과도 같이 살 수 있다. 그런 삶이 너무도 두렵다면, 적당히 순응하면서도 제 목소리를 내게 된 살라미와 같은 삶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사는 동안 살고 죽는 동안 죽어요. 살 때 죽어있지 말고 죽을 때 살아있지 마요. 수년 전, 많은 사람들을 열광으로 몰아넣었던 드라마의 한 대사가 생각난다. 참으로 단순한 이 진리를 제대로 실천하는 사람이 과연 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자유의지 따위는 잊은 채 그저 고용주가 시키는 대로만 움직이는 삶으로부터 당신은 행복을 느끼는가? 혹시 내 자신이, 세상 사람들이 그토록 경멸하는 좀비는 아닐지를 묻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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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항해」에서는 두 주인공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 두 인물은 각자 다른 방법을 통해 완전한 자아 형성을 위한 항해를 하는데 이 과정에서 동일인물이지만 동일인물이 아닌 그들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창과 창연은 외향 뿐 아니라 성격이나 가치관, 주변 환경까지 모든 것이 다르다. 외적인 모습으로 보자면 창은 1cm도 안 되는 크기에 ‘루족’이라는 창백하고 어린 아이의 손가락에도 쉽게 부서지는 몸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창은 항상 인간을 비롯한 모든 자연 환경에 두려움을 느꼈고, 그렇기에 항상 빠른 속도로 날며 모든 것을 육각형으로만 본다. 이에 비해 창연은 창에게 있어서는 거대한 인간이며 수십 번의 튜닝을 통한 현대 사회에서는 거의 완전체라고 칭송받는 몸을 가진다. 창연은 항상 자신만만하고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는 모든 것에 만족감을 느낀다.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주변이 위험으로 가득차고 모든 것이 부족해 보이는 창은 거의 모든 것이 완벽하지만 항상 어떤 것을 갈망하는 창연에게 흡수되는 것을 거부한다. 잠시 ‘죽음’이 온다는 두려움으로 인해 믿음을 잃고 루를 추락시키는 사고를 겪기는 하지만 지금까지 창연에게 흡수된 다른 창연들과는 다르게 완전체로서의 삶이 아닌 불완전한 자기 자신의 삶을 선택한다. 이러한 모습들에서 창연은 전형적 인물임을, 창은 개성적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창연은 현대 사회에서 자기 자신만의 자아를 찾지 못하고 그냥 단순히 완벽한 이상적 자아만을 추구하는 현대 사회인들을 대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비해 창은 현대 사회에서 찾아보기 힘든, 오히려 배척받는 사회의 기준에 부합하는 이상적 자아가 아닌 자기 자신만의 자아를 찾아 끊임없이 헤매는 사람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신화적 유형으로 분류할 때, 창연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사회 체제에 순응하고 자신의 목적만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아폴론적 인물이다. 반대로 창은 사회 체제에 순응하기 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삶을 선택하고 방황도 하며 감성적인 디오니소스적 인물로 볼 수 있다. 창연은 완벽한 자신에게 흡수되는 것을 거부하는 창에게 혼란을 느끼며 완벽한 자신이 아닌 창연에게 더 끌림을 느끼는데 이는 작가가 원하는 자아상은 창의 자아상이며 창연을 비극적 인물로 창을 희극적 인물로 설정했음을 알 수 있다. 즉, 창연은 결국 튜닝을 하지 못하고 완벽한 자아상에 한 발자국 더 나아가지 못 한 채, 완결되지 않은 쓸쓸함만을 지니고 막을 내린다. 그에 비해 창은 자신의 이상향인 ‘달’을 향해 가는 길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눈 속에서 동사할 것이라는 99.82%라는 운명에서 벗어나 스스로 0.18%라는 소수에 속함으로써 ‘루족 역사상 달에 가장 가까이 간 사람, 그리고 가장 멀리, 가장 빠르게 날았던 사람’이 되어 자신의 고유한 자아 형성을 해낸 것이다. 결국 작가가 바라는 이상적인 자아상은 완벽한 모습을 하고 있는 사회에 순응하며 사회에서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자아상을 만들려고 하는 창연이 아니다. 불완전하고 사회 체제에 반항적인 모습을 보이지만 자기 자신의 고유한 자아상을 찾으려는 창이야 말로 결국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을 맛보는 자아상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