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간의 고도로 발달한 문명은 더 이상의 비합리적 요소를 허용치 않는 듯하다. 하지만 여전히 종교는 우리 사회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세력 중 하나이며, 현대 사회와는 어울리지 않을 법한 사이비 종교 역시 활개를 치고 있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불확실성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일까? 나는 무엇으로부터 비롯되었으며 어디로 가는 것인가에 대한 불안감으로 인해 인간은 믿음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인류의 기원에 대해 정확히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아니, 있다고 하여도 우리의 짧은 삶을 통해서는 무엇이 옳고 또 무엇이 그른지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 힘든 게 사실이다. 이는 같은 듯 다른 신화들이 동시에 유통될 수 있는 까닭이다. 서로 다른 내용, 하지만 오랜 세월을 거쳐 혼재까지 전승되고 있는 신화를 과거를 설명하기 위해 꾸며낸 옛날 이야기 차원에서만 볼 순 없다. 신화를 읽음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의 태초와 만난다. 모든 것이 완벽하지 않았던 시대 그리고 초현실적인 인물들은 얼핏 보면 우리네 현실과는 동떨어진 듯해 보인다. 하지만 고정된 신화 역시 사회의 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는 현실의 눈을 통해 신화를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신화가 단순한 이야기가 아님을 깨닫는다. 복잡할 정도로 많은 등장 인물로 인해 우리의 머리를 아프게 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널리 읽히고 있는 그리스 신화 역시 흥미 이상의 것들을 담고 있기에 기나긴 중세 시대를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그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시기, 질투 등 부정적인 감정들마저도 포용하는 신들의 모습은 인간성에 대해 긍정코자 하는 르네상스 시기의 사람들에 의해 찬미되었다. 화가들은 신화로부터 모티브를 발견해 위대한 작품들을 남김으로써 신화의 생명력을 연장하는데 기여하였다. 하나의 신화가 얼마나 다양한 문화를 가능케 하는지 우리는 그리스 신화를 통해 깨달을 수 있다. 법의학자인 저자는 이러한 그리스 신화로부터 의학적인 측면을 읽어낸다. 그는 그리스 신화를 읽으며 인간의 병리적 증상들을 설명하는 용어들의 기원을 발견한다. ‘므네모시네’라는 여신의 이름이 건망증을 뜻하는 amnesia의 ‘mnesia’을 포함하고 있고, 반인반수인 ‘사티로스’가 남자성욕항진증을 뜻하는 satyriasis와 유사함을 그는 말한다. 그의 이러한 통찰력을 뒷받침해주는 것은 다름 아닌 신화 그 자체이다. 디오니소스를 따라다니며 여자와 술을 좋아하는 사티로스의 특성은, 그 이름 못지 않게 병의 증상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지구를 떠받치는 아틀라스와 인간의 머리를 지탱해주는 아틀라스(환추골) 이야기의 경우 아틀라스라는 이름뿐만 아니라 역할, 모양까지 흡사해 신화를 해석하는 저자의 해박한 시각에 다시 한 번 감탄하게 된다. 등장인물이 많으면 읽는 것을 꺼리는 내 모남으로 인해 그리스 신화는 여전히 내게 다가가기 힘든 영역으로 남아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는 것은 그리 어려운 과정이 아니었다. 신화를 신화 이상의 것으로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닌 인간의 해석임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그리고 그리스 신화가 오늘날까지 잊혀지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 역시 발견했다. 저자는 그리스 신화를 통해 의학적인 부분을 이끌어냈지만, 그리스 신화는 분명 그 이상의 것을 담고 있을 것이다. 태초에 인간이 만들어낸 이야기가 인간에 대해 얼마나 많은 것들을 담고 있는지에 대해 그리스 신화는 말하고 있었다. 다른 관점에서 해석된 그리스 신화를 접하면서 감탄사를 내뱉는 경험을 하고 싶다. 마치 퍼즐에서 잃어버린 조각을 찾아 헤매듯, 아직 완성되지 않은 인류에 대한 비밀을 그리스 신화를 통해 획득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기대감을 가져본다. |
|
언제부터인가 책을 고를 때는 저자를 유심히 살펴보는 버릇이 생겼다. 이 책을 읽게 된 것도 법의학자 ''문국진''이라는 이름 때문이다. 책의 제목만 보고도 이 분이 쓰신 책인 줄 알았다. 법의학도 재미있는 분야인데, 이번에는 신화라니. 얼마 전에 그리스 로마 신화를 몇달간 탐독했던 적이 있어서 더욱 흥미가 갔다.
결과는 기대 이상인데, 우선 저자인 문국진 선생님때문에 놀랐다. 저자소개을 보니 연세가 매우 많으시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나는 한번도 고리타분하거나 구식이라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오히려 감동적인 것은 책의 전체적인 구성이다. 신화나 의학에 전혀 익숙하지 않더라도 조금씩, 정말 조금씩 그 세계로 몰입할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다. 각종 신의 이름과 병명이 가득찬 목차를 얼핏 봤을 때는 그런 배려를 느끼기 어려웠다. 하지만 책을 읽다보면 이것이 연륜인가...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 책을 쉽게 쓴다는 것은 어렵게 쓰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강조하는 것은, 신화와 의학의 관계는 단지 신화에서 유래한 ''이름''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아킬레스의 발뒤꿈치에서 나온 [아킬레스 건]도 있고, 아라크네에서 유래한 [거미막]도 있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신화가 정신건강을 위해 필요하다는 점이다. 본문의 표현에 따르자면 "감성이 뇌를 자극하면 각종 화학물질이 분비되는데, 그것이 몸의 장기에 작용하여 면역 기능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이것은 면역 활성화와도 관계가 있는데, 최근에는 정신면역이라 부르고 있다."
어린이용 그리스 로마 신화가 아닌, 원전에 가까운 신화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신화가 얼마나 잔인하고, 난폭하고, 황당무계하며, 욕망ㅡ넘지 말아야 할 선은 과연 무엇인가에까지 의문을 품게 하는ㅡ으로 가득 찬 세계라는 것을 말이다. 도대체 그리스 사람들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이었다는 게 사실일까?
여기서 잠깐 뇌 얘기를 짚고 넘어가자. 요즘 뇌과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데, 내가 아는 한도에서 간단하게 구분하자면 우리 뇌는 대뇌피질과 변연계로 구분할 수 있다. 대뇌피질은 ''이성''이고 변연계는 흔히 말하는 ''파충류의 뇌''로 본능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싫어하는 상사가 승진에서 떨어졌더라는 얘기를 할 때, 나도 모르게 입가가 살짝 올라가며 웃음이 나오는 것은 변연계의 작용이고, 흠칫 놀라서 표정관리에 들어가는 것은 대뇌피질의 역할이다. 이런 미묘한 순간은 살면서 누구나 겪게 된다.
나는 과연 나의 작용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 것일까.
"책은 내가 무엇을 원하는 지 알기 위해 읽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또 반대로 나의 모습과 마주치는 것이 싫어서 피하게 되는 책도 있다. 그러나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이미 신화의 세계에 깊이 젖어들어서 정신면역을 얻은 예술가들의 작품을 보다 보면, 좀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이 흥미롭고 재미있을 것이다.
신화에는 정말 다양한 인물들이 나오기 때문에, 나를 닮은 조각들을 여기저기서 만날 수 있다. 술에 취해 들판을 헤매는 박쿠스일지라도. [인상깊은구절] "...신화가 지니는 가장 큰 매력은 자신의 모습을 꼭 빼닮은 군상을 신화 속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잘 몰랐던 것을 새로이 알면 깨달음의 기쁨으로 감탄하게 된다. 감탄은 정신면역의 가장 으뜸인 자극제이다... 자율신경은 희로애락과 같은 감성의 영향을 받는다. 신화를 천천히 음미하는 것만큼 좋은 정신면역 촉진제도 없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