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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월 11일 일본 도호쿠 지방에서 일어난 진도 9.0의 지진 때문에 세상이 떠들썩하다. 지진과 쓰나미 때문에 원자력 발전소가 부서지고 건물이 불타고 자동차들이 바다에 빠지거나 세상이 온통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다. 센다이와 도쿄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날벼락을 맞은 사람들은 이승을 떠나 저승으로 갔다. 태어났다가 언젠가는 떠나는 삶. 그렇지만 조금이라도 길게 살고픈 마음은 누구한테나 있는 것인데...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깊이 있는 알맹이를 보여주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영화는 생각보다 보기가 어려웠다. 잘 나오지도 않아 마냥 기다리다 눈에 들어왔기에 값은 보지도 않고 사버린 영화는 1972년 작품인 <솔라리스 Solyaris>다.
이 땅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별 '솔라리스'에서 벌어진 일들로 꾸몄다. 이룰 수 없는 일 때문에 슬프기도 하고, 빠져드는 깊이 때문에 살갗에 바로 와닿지 않고 조금 멀게 느껴지기도 하는 영화다.
2. 스무 해 앞서 솔라리스에 가서 헬기를 몰다가 놀랐던 헨리 버튼이 심리학자인 크리스 켈빈의 아버지(니콜라이 그린코) 집에 놀러 온다. 다음 날 솔라리스로 떠나는 크리스(도나타스 바니오니스)한테 해주고 싶은 말이 있기 때문이다.
"바다 같이 생긴 곳에 헬기를 몰고 갔을 때, 안개가 자욱한데 끈적끈적한 물질이 창문을 뒤덮었어요..." 솔라리스에서 생긴 일이 무엇이었는지 젊었을 때 조사위원들한테 제가 말하는 모습을 담은 비디오를 버튼이 틀어 보여 준다. "그 속에서 떠오른 것은 사람 모습이었어요. 키가 컸지만 벌거벗은 아이로 눈이 파랐고 머리가 검은..."
그런 이야기를 하는 버튼의 젊은 모습을 보면서 크리스의 엄마는 "옛날엔 참 잘 생겼네요..." 하며 우스개 소리를 하지만, 다음 날 솔라리스를 살펴보러 가야 하는 크리스는 버튼한테 차갑게 말한다. "저는 정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은데, 제게 꿈 같은 이야기를 말하시는군요...제가 할 일은 이제 솔라리스 조사를 그만 두게 하는 겁니다...당신은 당신이 본 게 환상이 아니라고 말 못하잖아요..."
3. 솔라리스 별에 있는 우주정거장에는 여든 사람이 지낼 수가 있는데도 세 사람만 머물고 있다. 천체 생물학자인 사르토리우스(아나톨리 솔로니친)와 인조 두뇌학자인 스나우트(유리 야르베트), 생리학자인 기바리안이다. 크리스는 기바리안과 잘 아는 사이다. 그런데 크리스가 갔을 때 기바리안은 이미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렸다.
기바리안이 왜 죽었는지, 기바리안이 남긴 비디오를 보고 크리스는 알게 되었지만, 뒤끝이 만만치가 않다. "내게 일어난 일은 누구한테나 일어날 수 있어... 이 일이 크리스 자네한테 생긴다고 해도 미쳤다고 생각하지 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다른 두 사람도 날카롭게 말하거나 제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고...
크리스는 지친 탓에 잠을 자는데 깨고 보니 방에 누가 있다. 눈에 천천히 들어오는 건...죽은지 열 해나 지난 아내 하리다. '아니, 하리가 여기에 어떻게...이게 꿈일까? 아닐까?' 곁에 온 하리(나탈리아 본다르추크)가 입맞춤을 하는데, 꿈은 아니다.
크리스가 알아본 바로는 마치 머리 속 같이 움직이는 별, 솔라리스에 과학자들이 엑스레이를 쏘아보았다는 것. 그랬더니 이젠 사람이 잠 자면서 꿈꾸는 일을 그대로 보여주는 별이 된 솔라리스. 죽은 아내를 그리는 크리스한테 솔라리스는 하리를 옛날 모습 그대로 데려다 준 것이다.
4. 처음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조금 가슴을 졸이게 되지만, 나아갈수록 가슴이 아파오는 영화다. 크리스의 아내와 모습은 같지만,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는 하리는 크리스가 들려주는 얘기만으로 두 사람 사이를 느낄 뿐이다. "난 내가 누군지 모르겠어요. 당신은 아시나요? 어쩐지 뭔가 잃어버린 느낌이예요. 제게 무슨 일이 생긴 거죠?"
혼자는 있을 수 없고, 크리스의 꿈에 따라 만들어질 뿐이며 크리스가 없으면 사라지고 말 '판박이' 하리. 아무리 크리스를 사랑해도 솔라리스를 떠나면 이룰 수 없는 사랑이다. 지구에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블레이드 러너 Blade Runner>에서는 사람을 본따 만든 안드로이드와 사람의 사랑도 끝까지 이어질 수 있지만, 이 영화에선 그렇게 이어질 수가 없다. 제가 어디서 왔는지조차 모르지만 엮인 사랑에 목을 매는 하리. 사랑하는 아픔을 이보다 더 크게 보여줄 수가 있을까? 판박이의 슬픔이 깊게 배어 나온다. 하리가 아픈 사랑 때문에 우주정거장의 복도에서 쓰러져 거품을 물고 펄떡일 때 보기가 딱했다. 그런데 사람이 더 걱정해야 하는 것을 판박이가 하고 있다니 사람 꼴도 말이 아니다.
5. 영화는 두 갈래로 보여준다. 크리스의 안타까운 사랑과 솔라리스를 두고 벌이는 과학자들의 생각이 나뉘어 나온다.
쉰두 살이라는 스나우트가 그나마 고른 눈길을 보여준다. 생각하는 솔라리스를 어떻게 풀어나갈지... "과학이요? 아무도 이 문제를 풀 수 없을 것이오...솔라리스는 우리가 잠들었을 때의 생각을 보여주니까, 우리가 깨어났을 때의 생각을 보내봅시다...자꾸 밖으로 나갈 게 아니라 스스로를 돌아봐야 됩니다. 우주로 나가는 것보다 제 속을 들여다 보는 게 더 나은 삶이 될 거요"
크리스의 죽은 아내 하리를 맡은 나탈리아 본다르추크가 돋보인다. 인디언들이 입는 옷 같아 보이는 옷도 잘 어울린다. "넌 사람이 아냐! 모습을 기계적으로 다시 만들었을 뿐, 매트릭스의 복제일 뿐이야...하리는 죽었어" 하며 사르토리우스가 몰아붙일 때도,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나오지만 기죽지 않는다.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난 사람이 되어가고 있어요. 당신들 만큼 깊이 느낄 수 있어요..."
알 수 없는 대목도 더러 있다. 크리스가 솔라리스에 갔을 때 사르토리우스는 작은 난장이 같은 사람을 끼고 있었다. 그런데 그 녀석은 어떻게 되었는지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감독이 빼먹었나? 아니면 본디 이 영화가 165분짜리라서 그 속에 나올까?
또 처음 나타난 판박이 하리를 꼬드겨 로켓에 태워 떠나보내게 하는데, 그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솔라리스 별을 떠돌고 있을까? 다음 날 모습을 바꿔 크리스 앞에 다시 나타난 것일까?
6. 그저 놀라운 영화다. 감독의 솜씨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다 했을까? 사람이 꿈꾸면 바로 나타내주는 별...머리 속 같이 꿈틀거리며 생각을 키워가는 별. 그런 별에서 다시 만나기 어려운, 죽은 아내를 만나 사랑을 돌아본다는 이야기... 1999년에 <매트릭스>를 만든 워쇼스키 감독이나 2010년에 <인셉션>을 만든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이 감독에게 빚을 지고 있는 듯하다.
감독이 보는 사람들한테 묻는 물음은 쉽사리 답할 수가 없다. 스스로를 거울에 비춰 보듯이 바라보며 살아야 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답게 살라는 말씀인 듯한데, 참 어렵다. 아버지와 아들이 마음이 와닿도록 하면서 살면 좋겠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듯이. 그래서 영화의 끝무렵은 조금 지겹기도 하고. 마흔 해가 지난 영화라는 생각이 하나도 들지 않았다. 컬러로 나오는 영화가 헨리 버튼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차를 몰고(?) 가는 모습이 나올 때는 흑백으로 바뀌어 나오는데 꿈속을 파고드는 느낌이랄까. 기바리안이 남긴 비디오도 흑백으로 나오는데, 곳곳에서 컬러와 흑백을 섞어 보여주는 것도 쌈박하다.
버튼이 젊을 때 나오는 모습과 스무 해가 지나 대머리가 된 모습을 보면서 잘 꾸몄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것 하나 쉽게 만든 영화가 아니라 꼼꼼하게 챙긴 손길을 엿볼 수 있었다. 솔라리스 별의 움직임이나 우주정거장 안의 모습도 나무랄 데가 없는 영화다.
요즈음 만든 영화라 해도 속아 넘어갈 만큼 디브이디 화면이 깔끔하다. 소리도 괜찮다. 다만 덤이 하나도 없다. 그 흔한 예고편도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잘 만든 영화에 이미 돌아가신 감독은 어쩔 수 없다 해도 같이 만든 사람이나 누가 나와서 어떻게 만들게 되었는지를 밝혀놓았으면 좋았을 텐데... 160분이나 되는 영화만 생각해도 14,000원이 비싼 건 아니지만, 덤이 없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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