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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들어가는 말 우리가 무심코 형성해왔던 ‘우리’의 이미지(image) 당신은 누군가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누군가와 진솔한 대화를 나누기도 전에 그 사람에 대해 정확히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나의 대답은 NO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주 그 오류를 범하기 마련이다. 누군가에 대해 제대로 알기도 전에 이미 내가 만든 사고의 프레임을 통해 그 사람을 바라보는 것이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그렇게 우리는 우리가 제대로 알지 못하는 그들에게 알게 모르게 상처를 주고, 소외감을 갖게 만들었다. 이러한 과정은 역사 속에서도 많이 일어났고, 지금까지도 지속되는 과정의 길 위에 서 있기도 하다. 오늘 내가 당신에게 이야기할 주제와 관련지어 예를 들어 보겠다. 당신은 ‘동양’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는가? 대개 한복을 입고 있는 사람들, 기왓장으로 지어진 집들, 사무라이, 기모노, 비단으로 감싸진 옷들, 혹은 유색인종의 모습들…. 역으로 질문을 바꿔서, 그렇다면 ‘서양’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무엇이 있는가? 우선 강대국인 미국, 문화 산업의 중심지인 할리우드, 양복과 드레스, 흰 피부의 사람들, 뉴욕의 광활한 마천루 등…. 이렇게 말하고 나니 재미있지 않은가? 대개 동양으로 대표되는 전자의 것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들이다. 반면에 서양으로 상징되는 후자의 것들은 우리들의 일상생활 속에 깊이 스며든 것들이 대다수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동양에 살고 있는 우리가, 서양의 것에 익숙하고, 동양의 것들에는 신비스러움과 환상적임, 그리고 낯섦을 느낀다. 아닌 게 아니라, 대개 우리가 기와집 혹은 한복 등과 같은 요소들을 접하는 것은 일상적이지 않게 느껴진다. 내가 앞서 던진 질문들이 불편하게 느껴졌다면 질문을 던진 보람이 있을 것 같다. 그렇다. 우리는 여태껏 동양과 서양의 이미지를 구분하고, 동양은 신비스럽고 익숙하지 않은 문화, 서양은 우리에게 익숙하고, 앞으로도 그러할 문화로 인식하고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는지 모른다. 자신은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극구 부인하는 누군가가 있을 수 있겠지만 우리는 어쩌면 서양이 중심이 되고, 동양은 중심 곁을 맴도는 존재라고 생각해왔는지도 모른다. 스스로를 말이다. 역사 속 타자(중심인물들이 아닌 주변자들)에 관해 많은 관심이 있는 나는, 어떻게 해서 이러한 이미지가 우리에게 각인되었던 것인지를 알고 싶었다. 이에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용어를 깊이 알아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에드워드 사이드라는 작가의 저서인 「오리엔탈리즘」을 읽어야 했다. -------------------------------------------------------------------
Ⅱ. 중간
1 사이드가 바라 본 문화적 차별, ‘오리엔탈리즘’
사실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용어는 원래는 동양학, 유럽 세계에서 나타난 예술 용어로 동방의 취미나 예술 경향을 뜻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아랍출신의 문화평론가 에드워드 사이드가 1978년 ‘오리엔탈리즘’이라는 700쪽에 달하는 책을 집필하였고, 여기서 그는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용어를 재정립하기에 이른다. 그가 말하는 오리엔탈리즘이란, 서구 중심의 보편주의가 서구는 우수하고 비서구는 열등하는 논리를 이데올로기화하여 동양을 열등한 ‘타자’로 바라보는 방식이 바로 서구인들이 자신들의 논리를 정당화시키기 위한 오리엔탈리즘이라는 것이다. 즉, 쉽게 말해 동양을 바라볼 때 차별적이고, 편견어린 시선과 태도를 지닌다는 것이다. 이렇듯이 사이드가 오리엔탈리즘에 대해 자신만의 의미를 정립한 데에는 그의 삶의 배경을 살피면 알 수 있었다. 책에는 나와 있지 않았지만, 책을 읽다 보니 그의 삶이 과연 어떠했을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고, 책을 읽은 뒤에 그의 생애를 조사해 보았다. 사이드는 아랍 출신으로 팔레스타인의 예루살렘에서 태어났으나, 이스라엘이 건국되고 예루살렘이 수도가 되자 난민이 되어 그곳을 떠나 이집트로 이주하여 당시 영국의 식민지 학교에 다니게 된다. 어떻게 보면 이때부터 각지를 유랑하는 국외자적인 고단한 삶이 시작된 것이다. 문자 그대로, 그는 언제나 아랍과 서구 사이의 틈새에서 이중적인 삶을 살았다. 그의 이름을 보라. ‘에드워드 사이드.’ 성 사이드는 아랍계 이름이지만, 에드워드라는 말은 당시 영국 왕 에드워드 8세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 이미 이름부터 서구(영국)와 동양(팔레스타인)이 혼재하고 있는 것이었다. 자신의 이름부터가 동양과 서양의 불안한 동거 생활을 하고 있었으니, 어떻게 보면 자아와 정체성에 있어서 혼란이 있고, 분열이 있을 수밖에 없었을 터다. 뿐만 아니라 혼돈의 중동 지역에서 살아나면서 주변부(중동) 사람이라는 타자의식이 있었다고도 말하였다. 그의 책에서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적인 사고의 예로 이분법적 논리를 둔다. 서양인들은 오리엔탈리즘을 이용하여 다음과 같은 사고를 펼친다. 서구인들은 자신들에게서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잔인성,’ ‘육감적,’ ‘퇴폐적,’ ‘게으름,’ ‘더러움,’ ‘감정적,’ ‘논리부족’ 등의 속성들을 동양인에게 뒤집어씌우고 나아가 동양인들이 ‘이국적’이고 ‘신비스럽고,’ ‘유혹적’이라고 간주한다. 동양인들의 행동은 이성, 의식에 의한 선택이나 결정에 의한 것이라고 보다는 본능적이고 감정(욕정, 폭력, 분노 등)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는 것이다. 사이드는 서양인들이 아랍인, 아프리카인, 중국인, 한국인 등을 마치 어떤 동물들의 집단적 특성에 따라 분류하듯이 어떤 일원화된, 동질적인 집단으로 본다는 것이다. 즉, 그들에게 오리엔탈리즘이란 서양이 아닌 다른 모든 것을 하나로 간주하는 수단과 도구, 방법인 셈이라고 사이드는 지적한다. 상상해보자. 서구 열강이 처음 동양으로 식민지를 확대하기 위해 뻗어나갔을 때 그들은 처음 본 동양 지역에 대해 호기심과 환상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처음 본 동양의 문화에 대한 호기심과 환상은 곧 뒤이어 ‘갖고 싶다’라는 생각을 가지게끔 만들었고, 그러면서 스스로의 정복을 정당화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동양에 대한 편견과 차별적인 사고들을 마구 생성해냈고, 이들을 사람들에게 주입시킴으로써 동양을 정복하는 것이 전혀 이상할 게 없는 것으로 만들어냈을 것이다. 그러면서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이란 하나의 ‘담론’이라고 표현한다. 담론은 쉽게 말해 우리들의 대화, 이야기라고 보면 좋을 듯하다. 인류는 오래전부터 이야기에 의해 사고를 내재해왔으며, 공감 능력을 발달시켜 왔다. 동시에 비판적 의식 없이도 사회가 생산해낸 이야기들을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쉽게 받아들이곤 하는 것이 인간이다. 따라서 곧 담론으로서 오리엔탈리즘을 검토하지 않는 한, 계몽주의 시대 이후의 유럽문화가 정치적, 사회적, 군사적, 이데올로기적, 과학적으로 또 상상력으로써 동양을 관리하거나 심지어 동양을 생산하기도 한 경우의 그 거대한 조직적 규율-훈련이라고 하는 점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즉 서구가 만들어낸 담론, 즉, 이야기라고 하는 것은 동양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도구이자 힘인 것이다.
이 챕터를 마무리하기 전에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 책 표지에 관해 언급을 하고 넘어가겠다. 오리엔탈리즘의 책 표지([그림1] 참고.)를 보면 한 예술 작품을 활용한 것을 알 수 있는데, 그 그림은 장 레옹 제놈(Jean-Leon Gerome)이라 하는 프랑스 화가가 1883년에 그린 작품인 <뱀 부리는 사람(The Snake Charmer)>([그림2] 참고.)이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이 그림은 자신의 책 표지로 쓴 이유는 바로 서양인들이 바라보는 중동인(동양인)들의 특성을 극대화하기 위함이었다. 그림에서 한 소년이 뱀을 몸에 감은 채 나체 상태로 서 있는데, 이를 벽에 붙어 있는 남성들이 음흉한 표정을 지은 채 바라보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프랑스 화가 장 레옹 제놈을 이러한 그림을 그림으로써 자신이 평소 이슬람인들에 대해 가지는 사고 ―이슬람인들을 포함한 동양인들은 굉장히 사치스럽고, 향락적이고, 타락해 있고, 성적으로 문란하며 야만적이다. ―를 담아낸 것이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예술에서 나타난 대표적인 오리엔탈리즘 사례를 자신의 책 표지에 기꺼이 할애함으로써 사람들이 이 주제(담론)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을 해보았음 하는 의도를 담은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오리엔탈리즘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2 차별은 오늘날에도 계속된다.
서구 열강이 식민지를 정복하던 시절에 동양을 짓누르던 오리엔탈리즘이 등장하였다고 해서 이것이 오늘날 없어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구조적, 문화적으로 우리들의 일상 속에 깊숙하게 스며들어 와 있고, 그래서 더욱 무서운 것이다. 오늘날 서구 현대인들은 동양에 대한 사고 프레임이 단단하게 씌어져 있고, 이는 그들이 바라보는 동양에 대한 시각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얼마 전 OSCAR(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한국 영화 최초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기생충’에 대하여 트럼프가 공식 석상에서 발언한 말에서도 알 수 있다. 트럼프는 지난 2월 콜로라도 주에서 유세를 펼치던 와중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한다.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이 얼마나 나빴냐. 승자는 한국에서 온 영화(기생충)였다. 황금종려상은 한국 영화가 아니라 미국 영화에서 나왔어야 한다,” 라고 말이다. 물론 워낙 트럼프가 백인 우월적인 사고를 평상시에도 많이 내비쳤기에 그가 이런 말을 하는 것에 관심조차 없는 사람들이 많아지긴 시작했다. 하지만 오늘 내가 던지고자 하는 메시지에 비추어 봤을 때 트럼프의 이런 말은 오리엔탈리즘과 매우 닮아 있음을 알았으면 하는 것이다. 트럼프는 서양이 동양에 비해 문화적으로 더 뛰어나다는 사고를 전제 하에 있기 때문에, 한국 비하적인 발언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하는 것으로 보인다. 방금 살핀 것처럼 대놓고 비하발언을 한 것이 아니더라도, 은연 중 동양에 대한 고정관념을 지닌 채 동양을 바라보는 서양인들의 시각도 오리엔탈리즘에 해당한다. 예를 들어, 지난 4월 외신 기사 중 다음과 같은 헤드라인을 가진 기사가 있었다. ‘Confucianism isn't Helping Beat the Coronavirus.’ 해석을 하자면, 유교는 코로나 바이러스를 이겨내는 데 도움을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기사가 나온 이유는 이전에 대다수의 서양 매체들에서 한국이 (4월 기준.)코로나 방역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동양 국가들의 특성으로 대표되는 유교 문화덕분이었다고 일제히 떠들어댔기 때문인데, 이에 대한 반박 기사로 나온 것이었다. 외신에서는 일제히 한국이 유교 문화가 뿌리 박혀 있기 때문에 국가 정책에 굉장히 순종적이고, 공동체 지향적이기에 개인정보 침해의 우려가 있는 확진자 동선 정보 공개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고 말하였다. 하지만 정말 그래서일까? 동양이라는 곳이 정말로 순종적이고 단순히 공동체 지향적이기 때문에 자신의 사생활쯤은 얼마든지 국가에 공개할 수 있다고 보는 지역일까? 이렇듯 동양을 단순히 과거부터 형성한 고정관념이라는 프레임을 통해 바라보는 것은 심각한 차별과 편견을 낳는다. 어떻게 수많은 국가와 민족, 문화가 있는 동양 지역을 말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수많은 동양 국가와 사람들을 모두 ‘동양’이라는 하나의 범주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그들(서양)은 자기중심적으로 외부(동양)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이 또한 에드워드 사이드가 지적한 오리엔탈리즘에 속하는 것이다. 즉, 오리엔탈리즘은 사이드가 주장했을 때보다 전혀 약화되지 않았다. 오히려 다양한 방법과 경로 ―이를테면, 영화와 드라마, CF 등을 통해―로 우리에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사례를 들자면 밑도 끝도 없기에 이 챕터에서는 그만 적도록 하겠다. 진짜 정말 많다.
3 우리에게도 내재되어 있는 오리엔탈리즘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오리엔탈리즘이 서양인들에게서만 나타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서양인들이 아니면, 누구한테서 나타나는가? 그렇다.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인들 스스로에게도 나타나고 있다. 서양인들보다는 덜 하겠지만, 여전히 동양에 살고 있는 우리조차 무의식적으로 서양과 동양 사이의 위계를 설정해뒀는지도 모른다. 혹은 우리조차 동양이란 ‘이러이러한 곳’이라며 서양인들의 시각으로 정의를 내렸는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보자. N포털 사이트에 ‘오리엔탈’이라는 단어만 쳐도 수많은 단어들이 나온다. ‘오리엔탈리즘’은 뒤로 물러나고, 오리엔탈 드레싱, 오리엔탈 인테리어, 오리엔탈 호텔, 오리엔탈 가디건, 오리엔탈 소스…. 수많은 오리엔탈 관련한 용어가 있지만, 우리 그 누구도 이 단어들에 왜 굳이 오리엔탈이 붙었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그저 조금만 동양 느낌이 난다 싶으면 단어 앞에 ‘오리엔탈’을 붙이는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누군가는 이러한 현상이 무엇이 문제가 되냐며 되물을 수 있다. 물론 딱히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리엔탈이라는 뜻이 원래는 단순 예술 용어였고, 동방을 뜻하는 단어를 지칭한다면, 차별적인 의도로만 쓰지 않았다면 문제가 될 것은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과연 실제로 이 용어들의 사용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사람들이 ‘오리엔탈-’ 단어를 사용하는 순간, 그들은 동양에 대한 이미지를 스스로 만들어 자신에게 내재해 버린다. ‘아, 이게 동양스러운 것이구나,’ 하고 말이다. 제일 문제인 것은, 우리들은 서양의 이미지가 어떠한 것인지를 깊게 생각해보지 않는다. 왜냐고 묻는다면? 서양의 이미지는 바로 우리의 일상적인 삶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으니까 아무도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자연스러운 것이다. [A 2문단 참고.] 역설적이게도 동양에 살고 있는 우리조차 제국주의 국가들이 동양을 바라보며 느꼈던 것처럼 동양에 대한 신비함과 환상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굳이 오리엔탈 호텔이라고 이름붙이지 않아도 될 것에 오리엔탈 한 단어를 추가함으로써 동양에 대한 환상이 더해지는 것이다. 우리조차 우리의 문화에 이질감을 느끼는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게 과연 옳은 일인가? 우리가 스스로 가지고 있는 동양에 대한 환상은 K-POP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이어지는 내용은 K-POP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무슨 소린지 이해하기 힘들 수 있다. 무대를 실제로 본 이들이 잘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는 것을 권해드린다.― BTS의 ‘IDOL’, 빅스(VIXX)의 ‘도원경’, 오마이걸의 ‘Destiny’, NCT 127의 ‘영웅(英雄; Kick It)’ 의 경우 오리엔탈리즘의 전형적인 사례로써 비판받고 있다. 그 이유는 이들 노래의 무대 세트와 장치, 음향 효과, 의상 등에서 나타나는 동양풍이 동양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이들 노래의 컨셉은 전형적인 서양인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동양풍의 모습을 첨가하여 동양의 이미지를 생성한다. 그리고 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질감을 느끼게 만들어 신비감을 갖게 만든다. 나 역시 한동안 이러한 환상에 빠져 있었다. 이들 무대가 공개된 뒤에, 아 역시 동양적인 느낌이 좋구나, 하고 스스로 혼잣말을 했었기 때문이다. 나뿐만이 아니라, 오마이걸이 방송에서 무대를 선보였을 때 출연진인 마마무의 화사는 “이런 사극풍이 너무 좋아,” 라는 발언을 하였고 방송에 그대로 전해졌다. 아마도 K-POP에 종사하는 사람들 대부분 이러한 환상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문화는 그 자체로 자연스러운 것인데 왜 이질감과 환상을 가져야 하는가
4 우리(동양) 스스로를 이해하려면 평생을 다 바쳐도 힘들다 내가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특정 집단을 프레임을 씌우고 바라보고 평가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다들 모두 알 것이다. 알 거라고 믿고 싶다. 우리가 우리조차 완전히 이해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데, 서양인들이 제멋대로 해석한 동양의 이미지가 과연 전부 다 옳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지속해서 서양의 시각에서 동양을 몽땅 하나로 범주화시켜 바라보는 것은 계속된 차별과 편견을 낳을 것이다. 동양 스스로의 정체성을 잃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드는 의문은 이러하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 사람들의 머릿속에 각인된 이미지를 이제 와서 어떻게 바꿀 건데? 그들 머릿속에 들어가서 뇌구조를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이렇게 보면 더 이상 손 쓸 방도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대답할 수 있는 첫 번째 답변은 이러하다. 우선 우리는 있는 그대로를 볼 줄 알아야 한다. 동양이라는 여지껏 세상이 설정한 프레임으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닌, 동양의 문화 하나하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줄 아는 자세가 필요하다. 나의 역사관이도 한 이것은 문화를 바라볼 때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한다.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세상을 절대로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없을 것이다. 사람들 혹은 문화가 각각 다 역사를 가지고 있고 각자의 선호와 취미가 있고, 각자의 삶이 있다는 것을 완전히 아는 상태를 계속 유지하려고 하면 우리의 뇌는 정지 상태에 이를 것이다. ‘있는 그대로 보기’는 점점 더 다원화되는 시대에 요구되는 태도이지만,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이기도 하다. 워낙 세상에 흐르는 정보의 양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이걸 언제 어떻게 전부 다 파악하고 있는가? 동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동양에 있는 무수한 이들의 삶을 파악하고, 개개인의 가치관과 문화를 존중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인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일단 중국만 해도 인구가 14억을 넘어가는데, 14억 인구 한 명 한 명의 삶을 파악하고 그들을 있는 그대로 보라니? 우리의 머리는 폭파직전에 도달할 것이다. 그렇다면 또 다른 문제에 직면한 셈이다. 있는 그대로 보는 게 불가능하다면 우린 어떻게 해야 우리를 이해할 수 있고, 또 다른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인데? 하고 말이다. 나의 두 번째 답변은 이러하다. 오리엔탈리즘도 어찌 됐건 서양인들에 의해, 혹은 우리들 스스로에 의해 심어진 사고와 태도, 시각이다. 즉, 인간이 만들어내고 인간에 의해 주입된 산물이라는 얘긴데,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희망을 얻을 수 있다.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이야기를 통해 보고 자랐다면, 우린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냄으로써 우리 스스로를 가르칠 수 있다. 그동안의 우리 주위를 맴돌았던 담론과 매체 ―매체의 힘은 정말 대단하다. 특히 우리는 미디어를 통해 은연중 내재된 오리엔탈리즘 사고가 정말 많이 있다.― 가 동양인들로 하여금 스스로 열등하고 수동적인 존재로 느끼게 만들었고, 서양의 물질에 비교되어 동양의 빛을 꽁꽁 감추어두었던 것을 기억하라. 담론과 같은 이야기가 우리로 하여금 열등한 타자(타자에 관한 내용은 다음 챕터 F에서 논하도록 한다)로 느끼게끔 만들었다면, 그 반대의 이야기도 우리에게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이야기가 우리(동서양 구분 없이)를 다른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도 있지 않을까? 즉, 인간이 만든 이야기에 의해 동서양의 우월성을 구분하도록 되었다면, 인간이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듦으로써 모두가 주체가 되는 이야기 또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더 이상의 동양에 대한 편견, 서양인들이 가지는 우월성 등은 우리들의 담론으로부터 희미해져 갈 것이고, 빛을 바랠 것이다. 그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고,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역사 속 타자에 관한 인식을 재고시킴으로써 달성될 수 있다. 이렇게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낼 때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 객관성을 잃지 말고 정직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가끔은 자기중심적이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황을 직시하고 있는 그대로 보려는 노력은 멈춰서는 안 된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미국이 자국 내 매체에서 ‘오리엔탈’이라는 용어를 전면 금지한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이처럼 사소한 언어의 사용에서부터 하나씩 고쳐나간다면 우리가 그동안 당연시 해왔던 우리의 이야기를 다른 방향으로 이끌 수 있을 것이고, 이러한 이야기는 후대에 바람직한 방향으로도 이어질 것이다. 이 챕터의 결론은, 동양은 평생을 다 바쳐도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해, 바람직한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더 이상의 차별과 편견을 없애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 Ⅲ. 나가는 말 1 타자화, 더 이상 일어나지 말아야 할 것 이처럼 그동안, 아니 오늘날에도 동양은 주체인 서양에 의해 객체화되어 왔다. 서양은 물론 동양 역시 알게 모르게 서양을 중심으로 하여 동양이 돌고 있다는 사고가 내재해 있었던 것이다. 이를 용어적으로 설명하면 ‘타자화’라고 표현한다. 타자화는 말 그대로 특정 대상을 다른 존재로 보이게 만듦으로써 분리된 존재로 부각시키는 말과 행동, 태도 등을 말한다. 그동안 서양은 동양을 타자화 해왔고, 오리엔탈리즘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었다. 그렇게 내가 처음 가진 왜 동양이라는 큰 범주라는 이미지에 묶여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는 지에 대한 의문은 오리엔탈리즘을 파헤치기에 이르렀고, 내가 앞으로 탐구해야 할 연장선 상 위에는 ‘타자화’라는 요소가 있음을 알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알고 보면 오리엔탈리즘 말고도 우리 주변에는 대상화, 객체화되며 타자화되어 왔던 존재들이 많이 있다. 흑인, 제3세계인들, 성소수자, 여성 등이 이에 해당하는데, 이들은 그동안 지배층의 권력 구조 그리고 사회적·문화적 구조에 의해 차별받고 억압받아오며 살아왔던 것이다. 아무 이유 없는 차별적 시선, 억압적 말과 행동, 그리고 편견과 고정관념 프레임을 통해 그들은 바라보아졌던 것이다. 그러나 다원화된 현재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그 누구도 차별받아서는 안 되며, 편견의 시선으로 바라보아서도 안 된다. 나의 시선, 생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닌,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존중하고 인정해줘야 한다.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담론에 의해 동양인들이 주체성을 잃을 수 있었던 것처럼, 바람직한 담론을 통해 사람들의 사고를 일깨워줘야 한다. 사람들이 스스로 인식할 수 있게끔 해줘야 한다 .―내가 1, 2학년 동안 과제연구 프로젝트를 하면서(로비 판넬/설문조사 등)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전 희생자들에 대한 관심을 그래도 우리 학교, 교직원분들에게 심어줬던 것처럼 말이다(조금의 기여는 했다고 본다.) 이런 식으로 역사 속 타자, 소수자들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얼핏 안다고 해서 그 사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앞선 챕터에서 이야기 했듯이 누군가를 이해하는 것은 평생을 다 받쳐도 힘든 일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도는 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 내가 하고 싶은 일 역시 이와 비슷한 맥락에 있다. 그동안 우리의 역사는 국가 혹은 사회 내의 특정한 이데올로기, 사상에 의해 누군가는 주체로, 누군가는 타자로 규정하는 일이 빈번했었다. 이 과정 속에 타자로 규정된 이들은 사회로부터 소외되고, 억압받고, 차별을 받아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들의 삶을 포기하지 않고 영위해오면서 오늘날 다원화된 시대에 이르게끔 사회의 다양한 가치를 만들어내 왔다. 그런 그들을 아주 고요하고 조용하게, 때론 파괴적으로 짓밟는 것이 얼마나 참혹한 일인가? 따라서 그들의 삶을 파괴한 우리 선(先)인들의 잘못을 이제 우리가 직시하고 책임져야 하는 것이다. 특히 오늘날은 이러한 타자화의 과정이 매스미디어 ―TV, 영화, 광고, 인터넷 등―의 발달로 가속화되고 우리의 삶 속 깊숙이 침투하기 때문에 더욱 더 경계할 필요가 있다.
2 명확해진 나의 책무
중학교 때부터 역사에 관심을 가지게 된 나는 고등학교에 들어 와서도 역사와 관련지어 다양한 활동을 해왔다. 고등학교에서 정말로 많은 활동들을 하면서 느낀 것은, 내가 단순히 역사를 연구하는 것에 그치는 것에 만족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다. 그동안 내가 학교에서 해 왔던 수행평가와 활동들은 전부 역사 속 사회 구조에 의해 차별받고, 소외받고, 억압받아왔던 이들 ―나라와 지역에 관계없이―을 우리 학교 학생들 및 선생님들께 조금이라도 알리려는 데에 중점을 두었었다. 그것은 어느 과목이든, 어떠한 종류의 대회든, 활동이든 마찬가지였다. 사실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내가 역사라는 학문을 통해서 내가 얻고자 하는 목표와 방향성 등이 명확하지 않아서, 즉, 특별한 동기의식이 없다보니 힘들었던 적이 많았었다. 왜냐하면 나는 단순히 역사가 좋아서 역사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니까. 그 모든 타자들에 대한 관심과 공감을 바탕으로 그들의 주체성에 대해서 고민하고 관심을 가지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올해 오리엔탈리즘과 관련한 책을 접한 뒤에 나는 그동안 내가 역사를 통해 이 세상에 기여하고 싶은 바가 좀 더 명확해졌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냥, 어느 순간부터 우리 세상이 남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고, 떠들어대고, 평가하고 낙인찍혀 버리는 곳이 되었다는 생각이 밀려오기 시작했던 것 같다. 나 역시 어려서부터 지금 학교생활을 하는 이 순간까지 오랜 편견과 차별을 받아온 경험이 있는지라, 이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책이 더 마음에 끌렸는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나는 그동안 역사 속 소외자로 낙인찍힌 이들을 연구하고 다시 이들은 현대인들의 기억 속의 수면 위로 끌어올림으로써, 더 이상 앞으로의 우리 사회가 누군가를 타자로 규정하고 객체화시키는 일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데에 기여를 할 것이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다. 더 이상의 타자화, 대상화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니까. 이 작업의 수행은 교육을 통해서, 플랫폼, 캠페인, 책을 통해서 등 다양한 방법과 경로로 실현될 수 있다. 그렇게 나는 역사 속 소수자들, 소외된 이들이 더 이상 외롭지 않도록, 아무 이유 없이 대상화되는 일이 없도록, 계속해서 연구하고, 활동하고,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삶을 살아갈 것이다. 단순한 사회 운동가가 되겠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역사 속부터 옳지 못한 우리들의 문화를 파헤치며, 그냥 옳은 일을 해나가겠다. 책도 써보고, 캠페인도 하면서 사람들의 인식을 한걸음씩 변화시켜나가고 싶다. 이것은 선택이 아닌, 우리가 책임져야 할 의무이기도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