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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측천무후]를 읽을때만해도 몰랐다, 그가 이리 뛰어난 작가인 줄은. 번역문임을 생각하면, 어쩔수없이 다른 언어로 바뀌면서 일부 원문의 매력이나 특징을 일부 잘라먹고 시작하겠는데, 그럼에도 게다가 참 구질구질하며 비상식적이라 답답한 부분도 있는 이야기를 참 흡입력있게 끌어당기는 것은 작가의 능력같단 생각이다. 게다가, 40여년에 걸친 (1970~90년대를 배경으로 했지만, 고모가 나중에 칠순까지 되는거보면 시작때 40대 남성의 동생이었으니까 적어도 30년 이상이라고 생각된다) 한 가정의 이야기를 그대로 전달하기 보단 인간의 감정이 남아있는 유령의 시선으로 전달하면서 참 독특한 매력을 가지게 되었다.
남핑계는 대지않고 열심히 살아왔다고는 하지만, 그닥 가정교육으로는 소질이 없던 40대의 노동자 화 진더우는 어느날 아내 펑황이 다니던 공장에서 목을 매고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뛰쳐간다. 속이 뒤집힌 화 진더우는 바로 공장으로 뛰어가 화를 내고 그김에 석유통을 던져 공장에 불을 낸다. 이에 대한 재판이 희곡의 양식으로 소개되면서 작품은 시작한다. 조리있게 설명하기엔 울분도 참을 수 없고, 배움도 짧은 화 진더우는 all or nothing식으로 형을 조금 살던가 사형을 시켜달라고 하지만, 판결에 따른 그 중간이었던 듯, 나중에 설명이 되지만 감옥에서 목을 매고 죽는다. 이를 모르는채, 그의 여동생이자 그가 남긴 아이 넷의 고모는, 마치 자기 자식인양 지극히 아이들을 보살핀다. 하지만, 하나뿐인 아들 두후는 남자를 만나고 다니고, 둘째 신란은 수술로 죽게 된다. 이를 지켜볼 수만 있을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유령 화 진더우는 우연히 얻게된 하늘 나귀를 타고 어쩌지도 못하는 미련에 가족들을 따라 울고 화를 내며 지켜 바라본다.
글쎄, 솔직히 이야기 속에 몰입되기 전까지는 오히려 일을 키우는 형국에 참 가슴답답하여 계속 읽을 수 있을까 싶었다. 게다가 비극은 셰익스피어 작품이라도 싫어하는 성격인지라. 하지만,
...내 아들 두후다...얼굴에 땟국이 좔좔 흐르도록 뛰어놀다 들어와도 내 눈에는 하나도 더럽지않다. 저 눔 볼에 뽀뽀를 한번만이라도 할 수 있다면 더 바랄게 없다...저 녀석이 행여 길을 잃을까 걱정이 돼서 만날 허공에서 아들놈의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고 있다...이 애비코는 지린내는 걸러내고 젖냄새만 골라 맡을 수 있는 신기한 능력을 지녔다.....p.58 (음, 난 울 강아지 비린내가 라벤더향보다 더 뛰어난 신경안정제인데~)
...다행히 문제가 잘 해결되었다. 사람이 많으니 힘을 합치면 해결하지 못할 일이 없었다. 이게 바로 산 사람들의 가장 큰 장점이다....p.247~248
..내 마음을 넷으로 쪼개어서 네 아이들에게 하나씩 준거 알지? 그러니까 내가 재들 엄마가 맞겠지?...p.272 (다시 태어나도 아내랑 자식은 몰라도 여동생은 꼭 저 '내동생'을 택하겠단 말, 너무너무너무 이해가 가~흑, 정말 선녀같애)
쭉 읽으면서 글쎄, 조금은 부족하고 답답하고 어리석고 구질거려보여도, 애틋해하고 걱정하고 보호하는 듯한 모습들 속에 따뜻함이 번져간다.
쑤퉁은 절대 해피엔딩식으로는 글을 쓰지않나보다. 하지만, 아직 해피엔딩에 연연하는 철이 들난 나지만, 해피엔딩이 아닌 속이라도 그런 사람들 마음속에 따뜻함이 자리잡을 수 있다면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하늘에 가서의 고모의 운명을 보면서 그녀의 선함에 박수를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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쑤퉁 작가의 <화씨 비가>를 다 읽고 난 느낌은 먹먹하다였다. 가난과 고통의 질곡에 시달리는 화씨 가족사는 제목 그대로 비극 그 자체다. 중국의 역사를 20년 정도 뒤로 돌렸다는 문화혁명기를 지나 1970년대를 시작으로 이십 년에 걸친 슬픈 가족사를 읽다 보니 “왜”라는 질문이 끝없이 터져 나온다. 왜 어머니 위펑황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가? 왜 주인공 화진더우는 이승을 떠나지 못하고 화씨 일가를 맴도는 걸까? 왜 화씨들은 대오각성하여 새로운 삶을 개척할 생각을 하지 못하는 걸까?
어머니 위펑황이 죽고, 아버지 화진더우 마저 방화죄로 감옥에서 스스로 세상을 하직한다. 아니 남은 가족들은 어떡하라고? 정말 무책임한 가장이 아닐 수 없다. 사군자 매란국죽(梅蘭菊竹)을 따서 이름 지은 네 딸 신메이, 신란, 신주, 신쥐와 철부지 막내아들 두후 그리고 이들을 돌보는 화진더우의 누이 고모가 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여전히 가부장제를 고수하면서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해서는 아들이 최고라는 봉건적 사상에서 벗어나지 않는 인간 군상의 모습을 쑤퉁 작가는 화진더우와 고모를 통해 적확하게 짚어낸다.
그렇게 배를 곯으면서도 아들 두후에게는 잘 먹이려는 것이 어머니이자 아버지 역할을 떠맡은 고모의 마음이었을까. 손위 누이들마저 그렇게 두후 녀석을 떠받치다 보니 그만 망나니가 되어 버렸다. 게다가 이상한 친구를 만나 게이의 길을 걷질 않나, 두후란 놈은 부모가 속 터져 죽게 만드는 비상한 재주를 가지고 있는가 보다. 그러니 구천을 떠도는 원혼 화진더우는 지상에서 돌아가는 꼴이 하나도 제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더러운 윗물 때문에 아랫물이 깨끗하겠냐고 자조한다.
화씨 일가의 비극은 아버지와 어머니 대에서 끝나지 않고, 자손에게까지 계속된다. 둘째딸 신주는 임신해서 중절 수술을 하던 중에 불의의 사고로 그만 꽃다운 나이에 죽고 만다. 큰딸 신메이는 우여곡절 끝에 결혼하지만, 가정불화에 고모의 말실수로 그만 신랑이 반신불수가 된다. 양아치 건달이 된 두후 놈은 매춘 혐의로 경찰에 연행된다. 헌신과 봉사로 화씨 집안을 받쳐온 고모는 조카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노구를 이끌고 나서지만, 결국 객사하고 만다. 어쩌면 이렇게 구질구질한 인생들일까. 문득 작년에 읽은 천명관 작가의 한국판 막장 드라마 <고령화 가족>이 떠올랐다.
쑤퉁 작가는 화진더우 일가의 비극을 통해, 사회주의 국가 중국에서 진행된 전통적 가족관에 대한 해체를 그리고 있다. 삶의 마지막 보루가 되어야 할 가족은 서로에게 짐이 될 뿐이다. 어머니의 죽음을 인정할 수 없는 딸들은 차례로 위펑황이 죽은 연료 창고의 주임 류페이량을 찾아가 행패를 부린다. 합리적인 사고 대신 감정적 대응으로 얻어질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그들은 세상을 향해 분풀이를 늘어놓는다.
유물론을 기반으로 한 사회주의 체제에서 이승을 떠도는 원혼이라는 초자연적 존재를 주인공으로 삼은 작가의 대담함이 새삼 눈에 띈다. 현실감각을 잃지 않은 쑤퉁은 화진더우를 물리적 현실세계에 개입시키지 않고 오로지 관조적 자세의 서술자로만 활용한다. 하긴 귀신 화진더우가 활약을 했다면 <화씨 비가>는 판타지가 되었겠지. 소설 속에서 화씨들은 가난과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렇게 처연한 몸부림을 치지만, 가장의 부재로 인한 빈곤의 질곡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죽음이라는 방법으로 가장이 가져야 할 경제적 책임으로부터 해방된 화진더우의 존재는 가족에게 외면당하기 시작한다. 설상가상으로 위펑황의 죽음에 대한 미스터리와 아들 두후 출생의 비밀이 밝혀지면서 화진더우의 위신은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친다. 조금이나마 품었던 해피엔딩에 대한 기대를 한 방에 날려 버린다.
사실 소설 초반에 이런 비정상적인 캐릭터들의 향연에 적응하지 못해 애를 먹었다. 하지만, 고모와 신주가 낙향해서 위펑황의 경고를 무시하고 임시중절을 시도하다 봉변을 당하면서 쑤퉁 작가의 서사는 힘을 얻는다.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문화혁명 시기에 화진더우가 지주 계급에 대한 악의적 공격을 했던 사실이 밝혀지고 그에 따른 인과응보의 순환이 밝혀지면서 비극은 절정으로 치닫는다.
짝으로 나온 <성북지대>가 불량소년들의 성장기를 그렸다면, <화씨 비가>는 가족의 구성과 해체를 그 중심에 두고 있다. 어쩌면 가족 내의 희생과 헌신이 이제는 미덕이 되지 못한 새로운 시대의 초상이라고나 할까. 자신을 속이면서까지 차마 자식들을 떠날 수 없었던 어느 아버지의 솔직한 고백은 그래서 더 진한 여운을 남기는 느낌이 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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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채의 중국문학선 쑤퉁 님의 <화씨 비가>입니다..
이번에 비채에서 같이 출간된 쑤퉁 님의 또다른 작품 <성북지대>처럼
<화씨 비가>는 1970~1990년대 중국 남부에서 살아가는 하층민 가족을 다룬 작품입니다..
<화씨 비가>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화씨성을 가진 집안에서 벌어지는 슬픈 이야기입니다..
독특한 점이라면 아내의 죽음은 홧김에 방화를 저지른 화씨 집안의 가장 화진더우가..
처벌로 죽음을 당하고 저승에 가지 못하고 이승을 떠돌게되면서 집안에 남은 여동생과 자식들을 바라보는 관점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는 점을 꼽을 수 있겠네요..
"허구는 가장 치열한 현실이다. 난 현실의 강한 힘을 믿는다"라는 작가분의 말처럼
<화씨 비가> 역시 허구의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현실적인 상당히 많이 반영하려고 노력한 작품인거 같습니다..
<성북지대>에서도 그랬고 이 작품 <화씨 비가>에서도 볼 수 있듯이..
현실에서 소외하는 하층민들의 처절하고도 애달픈 삶을 그대로 볼 수 있었습니다..
<성북지대>를 읽고 쓴 서평에서도 말했지만 쑤퉁님의 작품을 읽다보면..
작품속의 이야기들은 분명히 내용만 보자면 슬픈 일들만 가득하고 그래도 결국엔 해피엔딩이 기다릴 거라는 기대감을 어김없이 꺠버리는
어찌보면 그리 유쾌하지 않은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그 작품에 빠져들게 만드는 매력을 가진 작가 분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됩니다..
<화씨 비가>에서도 역시나 한켠에는 주인공과 그 가족들의 이야기가 가슴아프게 되지만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게 되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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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슬픔과 나쁜 일은 홀로 오지 않는다고 말한다. 화씨 집안 20여년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딱 그대로다. 좋은 일은 보이지 않고 나쁜 일만 계속 생긴다. 나쁜 일이 가난한 사람에게만 생기는 것이 아니겠지만 가난한 사람에게 더 가혹한 것은 사실이다. 이 소설 속 화자인 화진더우는 그런 점에서 이 가혹한 현실을 죽은 후에도 그대로 지켜보는 아픔을 겪는다. 귀신이 되어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영화나 다른 소설에서처럼 그 어떤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하고 그냥 지켜보는 것밖에 없는 상태에서 말이다. 화씨 집안 비극의 시작은 화진더우의 아내 펑황이 자살하면서부터다. 평소처럼 출근한 그녀가 목을 매어 자살했다. 그 어떤 유서도 이유도 남기지 않고 말이다. 이 자살 소식에 화진더우는 이성을 잃고 공장에 불을 지른다. 하나의 슬픔이 다른 비극을 불러온 것이다. 첫 장면이 재판 장면인 것은 이런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서이자 이 집안의 비극에 너무 감정 이입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다. 그 덕분에 조금은 더 냉정하게 이 집안의 비극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귀신이 된 화진더우가 안타까움과 후회하는 마음에서 자기 집에 머물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는 한순간의 화를 참지 못해 자신과 가족 모두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살아 재판 받을 때도 후회가 되었지만 죽은 후에도 그 후회는 멈춰지지 않는다. 어쩌면 20여년을 참죽나무길에 머물게 되는 것이 이런 잘못된 행동에 대한 처벌인지도 모른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이 그냥 무력하게 쳐다만 본다는 것이 얼마나 큰 아픔이자 슬픔인지 절실하게 드러나는 상황에서 말이다. 귀신이기에 더 쉽게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더 큰 슬픔이다. 유일한 아들 두호의 엇나간 삶이나 사랑스러웠던 둘째 딸 신란의 임신중절 수술이나 다른 딸들의 슬픈 일까지 바로 곁에서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알면 더 병이 되는 그런 상황에 그가 놓인 것이다. 분명히 이 소설은 화씨 집안의 슬픈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런데 작가는 이 비극에 동조하기보다 관찰자의 위치를 그대로 유지한다. 화진더우를 통해 감정의 기복이나 절망에 찬 목소리를 내지만 그것은 현실의 벽에서는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의 시선을 통해 우리는 급격하게 변화하는 중국의 삶을 보게 된다. 점점 자본주의화가 되면서 벌어지는 갖가지 낭비와 과소비를 말이다. 이런 시대의 변화 흐름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바로 화진더우의 누이동생이자 아이들의 엄마 역할을 하는 고모다. 이 소설에서 화진더우보다 더 불행한 사람이 있다면 바로 고모다. 오빠와 올케가 모두 죽은 상태에서 네 딸과 아들 하나를 키워야하기 때문이다. 큰 딸들이 돈을 벌어올 때도 그녀는 돈을 제대로 쓰지 못한다. 그녀들이 어릴 때는 자신이 먹고 싶은 것을 먹지 않고 입고 싶은 것을 입지 않고 힘들게 키웠다. 집안에 하나 밖에 없는 아들 두후는 그녀가 온갖 정성을 다해 키웠다. 식은 밥을 먹고 있으면 따뜻한 밥을 해주고, 늦게 들어오면 찾으러 나갈 정도로 애지중지했다. 하지만 그는 엇나가고 버릇없고 자기중심적인 게이가 되었다. 그의 변화와 우유부단함과 용기 없음은 또 다른 슬픈 일로 이어지게 된다. 거기에 고모가 계획한 몇 가지 일들은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낳고, 그 비극은 집안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녀가 한 일이라고 그 가족을 위해 모든 희생을 했는데도 말이다. 늙어죽을 때 그 사람의 삶이 제대로 평가를 받는다거나 전화위복이란 말이 이 집안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행복한 결말조차도 말이다. 가진 것이라고는 자살한 부모와 사고로 죽은 딸과 온갖 나쁜 일만 가득한 집안에는 특히 그렇다. 대부분의 현실이 바로 이런 삶의 연속이다. 언론이나 영화에서 성공한 삶이나 행복한 노후를 즐기는 사람이 나오지만 조금만 눈을 우리 곁으로 돌이면 비극과 슬픔과 아픔으로 가득한 집안들이 가득하다. 화진더우가 마지막에 누이의 죽음을 보면서 옛날로 돌아가면 삶이 완전히 바뀔 것처럼 생각하지만 과연 그럴까 하는 의심이 먼저 드는 것도 바로 이런 현실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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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화를 저질르고 감옥살이를 하다가 자살한 화씨. 이름은 진더우. 아내가 연료공장에서 생을 마감하자 억울한 마음에 불을 지르고. 끔직히 사람하는 6살아들 토후,외로운 호랑이와 귀여운 딸 넷, 신메이,신란,신쥐,신주 은 졸지에 고아가 된다. 다행이 고모가 엄마노릇을 하며 잘 키운다. 큰딸은 절름발이 페이량에게 시집하고 둘째는 애를 매서 낙태시술을 받다 죽고 토후는 친구를 잘 못 만나 게이생활을 하고 우여곡절이지만 고모는 시집도 안가고 애들을 잘 키운다. 진더우는 이승에서 애다섯을 잊지못해 애들주면을 계속 지켜 보면서 혼자 탄식하고 욕도 하고 기뻤다 슬펐다, 부모없이 설움받은 애들을 보면서 인생을 후회한다. 마침내 고모도 나이가 들어 저승에 와서 오빠를 만난다.
쓰바키과장의 휴가인가 소설이 생각난다. 과로사한 백화점 과장 쓰바키가 가족을 잊지 못해 영혼이 이승에 내려와서 가족들을 지켜 보고 인생을 후회한다. 비슷하다. 문화대혁명/하방을 거치면서 어려운 시골생활, 공산주의 사상. 지금의 중국과는 많이 다르다. 쑤퉁. 450페이지 시종일관 이야기가 춤을 춘다. 글자하나하나 리듬이 있다. 물 흐르는 듯 유연하게 풀어 간다. 아이들의 성장과정, 부모라면 누구나 수긍이 갈만한 삶에 가까운 이야기. 걸죽한 입담. 돈없고 뺵없고 가진 거라곤 입담, 욕지기. 살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수단... 오랫만에 번역자평도 제데로 된 거 같다. 화씨 영혼의 수다. 죽어서도 잊지 못할 아이들에 대한 걱정, 고모의 헌신, 눈물겹다. 재미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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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자라면서 보아왔던 서민들의 생활을 오롯이 담아내고 싶었다. 삶의 무게에 탄식하면서도 고난과 불행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사람들, 세상에 대한 그들의 질긴 애증과 고독이 잘 표현되었기를 바란다. -쑤퉁
최근 중국문학계의 떠오르는 샛별로 자리잡은 작가, 쑤퉁. 그의 작품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나, 제왕의 생애'를 통해서였다. 비오는 날 오후부터 밤 늦게까지 읽으면 딱 좋을 듯한 몽환적인 소설이었던 '나, 제왕의 생애'는 나를 쑤퉁이라는 작가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문학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러던 차에 최근 그의 신작이 발표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어 기쁜 마음으로 나의 북리스트에 그의 신작, '화씨 비가'를 추가했다.
주인공 화진더우는 화씨 집안의 가장으로 어느날 청천벽력과도 같은 아내의 자살에 큰 충격을 받고 그녀의 억울함을 밝히고자 아내가 일하던 연료창고에 불을 지르면서 방화범으로 수감된다. 수감된 그는 아내인 위펑황이 왜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는지 알아내기 위하여(?) 스스로 저승으로 가는 길을 택한다. 귀신이 된 그는 정작 저승에 가서는 아내 위펑황을 만나지 못하고 그저 살아있는 가족들(딸 넷에 아들 하나, 그들을 돌보는 화진더우의 누이)곁을 끝없이 맴돌며 그들이 겪어내는 삶의 애환에 웃고 운다.
작가는 아버지라는 존재의 비장함과 사명감, 혼이 된 인간의 무기력함을 적절히 버무려내어 독특하고 창조적인 시각으로 한 평범한 서민가정의 박복하고도 처연한, 그러면서도 웃음을 버릴 수 없을만큼 뭉클한 가족사를 현실적으로 그려낸다. 살아있는 동안에도 온갖 고난과 슬픔을 다 겪어 '재수 옴붙음'의 절정에 치달았던 화진더우가 죽어서도 그것을 떨쳐내지 못하고 가족들의 곁에 남아서 단 한번도 자신의 존재를 알리지 못한채 홀로 끙끙대고, 홀로 좌절하고 분노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재수 옴붙은' 서민들의 종말이란 결국 그것에서 더이상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하는 슬픔마저 몰려온다.
하지만 나는 마지막 장에서 아이들의 고모인 화진메이가 선녀가 되어 옥황상제가 사는 극락 제1구역에 배치되는 것을 보면서 소마처럼 일만하고 조카들 궁둥이만 쫓아다녔던 그녀의 일생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아마- 작가도 그러한 믿음으로 마지막 장면을 그려내지 않았을까? 비록 배운 것 없이 가난하고 아는 것이 적어 당하기만 하는 비루한 소시민들의 삶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견뎌내는 삶의 무게를, 하늘이 배반할리 없다는 믿음- 그것이 화씨 집안의 슬픈 노래(비가)가 그리 슬프게만은 들리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지극히도 평범한 이야기, 언젠가 국어책 한 구석에서 읽어보았던 우리네의 소박한 마당극과도 같은 이야기가 필요하다면 읽어보시라. 화씨 비가 속에 등장하는 화씨 집안의 각종 인물들이 하나씩 자기에게 걸맞는 예쁜 탈을 쓰고 나와 한바탕 울고 웃겨줄 마당극을 벌이는 모습을 구경할 수 있을테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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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두 가지 욕망이 꿈틀거린다. 그 하나는 지금까지의 자신의 존재를 지워버리려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자신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보려는 욕구랄까? 전혀 새로운 나를 꿈꾸게 되는 것이 바로 인간이다. 다른 하나는 경험과 도전에 대한 욕망일 것이다. 물론 앞선 이야기와 맥락을 같이 할지 모르지만 일상을 벗어나 전혀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도전해보고 싶은 욕구가 누구나 가슴 깊숙히 자리하고 있다. 그런 사람들의 욕구 행동이 가장 잘 표현되는 몇가지가 있는데.... 전혀 낯선곳으로의 여행이나 색다른 영화를 즐기려는 심리, 혹은 책속에 빠져 다른이의 삶을 살아보고 내가 그 안의 주인공이 되어보는 등의 경험들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인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여행과 문화 여가 생활에 대해 애착을 가진다. 여행의 과정 혹은 결과나, 영화와 소설속 주인공들은 대부분 기분 좋게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현실과는 다른 경험과 도전, 나 자신이 아닌 다른 삶을 걸어보는 즐거운 여행! 하지만 현실로 되돌아 온다면 그것은 단지 허구에 지나지 않음을 절실히 느낄 때가 종종 있다. 영화에서처럼 따뜻하고 행복한 결과가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않음에 좌절한 경험이 한두번쯤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전지적인 관점에서 이야기하는 허구 문학이, 현실과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이런 관점의 차이인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관객의 눈에 비춰주기에 이야기는 더욱 감동적이고 따스하다. 하지만 현실과는 점점 더 괴리된다.
'허구는 가장 치열한 현실이다. 난 현실의 강한 힘을 믿는다.'
최근 두 권의 책을 집어들었다. 가깝지만 문학적으로는 낯선 나라 중국 문학, 그나마 쑤퉁이란 이름이 조금은 익숙하달까? 그리고 '성북지대'를 만난 후 곧바로 <화씨비가>를 만났다. 현실!! 중국 현대 문학의 상징적인 존재라는 이 작가의 작품의 포인트는 바로 '현실'이다. 가장 치열한 허구의 세계를 현실로 그려넣는 작가 쑤퉁과의 세번째 만남을 시작한다. '화씨 집안의 슬픈 노래' 정도로 번역 할 수 있을 것 같은 책의 제목에서 보여지듯 이 작품은 한 집안의 침울하고 비정한 현실을 쑤퉁의 필치로 섬세하게 그려낸다.
아내의 자살로 복수심에 불타 아내가 다니던 공장에 불을 지르고 아내를 뒤따라간 '화진더우'라는 가난한 한 노동자 가족의 모습이 이 작품 주요 소재가 된다. 죽어서도 남아 있는 네 딸과 아들 때문에 망령이 되어 그들 곁을 맴도는 화진더우의 시선속에 작가는 독자들을 끌어들인다. 보통 이런 안타까운 사연으로 떠도는 망령이 등장할 정도라면 남아있는 아이들이 고생을 하더라도 결말은 해피엔딩으로 끝나는게 당연한듯 보인다. 하지만 쑤퉁은 현실 작가! 답게 단호히 그런 희망을 부정한다. 비정하고 냉정한 현실을 고스란히 그려낸다. 더욱 비정하고 잔혹한 현실속에 성장하는 아이들, 아이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아이들의 고모 또한 비참한 삶을 살아간다.
망령으로 떠도는 아버지 화진더우는 그 모습들을 고스란히 바라볼 수 밖에, 더이상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말 그대로 '비극' 그 자체인 <화씨비가>는 서글픈 현실의 무게를 독자들의 가슴속에 고스란히 내려놓는다. 고독과 상처라는 이름으로 앞선 작품 '성북지대'의 배경이던 1970년대를 현실적을 그려낸다. 쑤퉁의 작품을 읽고 있자면 너무 가슴이 아파온다. 현실이란 무게를 견디지 못해 아래로 무너져 내릴듯 아프다. 간혹 이렇게 무너져 내릴듯 현실의 무게에 힘겹다가도 쑤퉁이 던져주는 작은 웃음 하나가 마음을 조금은 쓸어내리게 만들기도 한다.
책을 선택할때 가장 먼저 만나는 첫인상! 그것은 아마도 표지와 제목일 것이다. 처음 제목을 보고는 무슨 내용인지 궁금하기만 했다. 그리로 표지, 바짝 말라버린 지져분한 두 손에 끼어진 붉은 실! 현실을 어루만질 수 없는 한 아버지의 거친 손인지, 그 비참하고 냉혹한 현실을 살아야만 하는 아이들의 슬픈 손인지 알 수 없을 모습이 책을 내려놓을 즈음에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가슴이 먹먹하다. 안타깝기만 하다. 무엇하나 만질수도 변화 시킬 수도 없는 아버지의 안타까움과 상처, 고독하게 아이들을 키워야했더 화진더우 누이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현실은 이런 모습이다. 가난에게는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의 고통을, 가진자에게는 끝없는 즐거움 제공하는 슬프도록 아름다운 것이 바로 우리의 현실이다. 작가는 관찰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모습으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인공을 가하지 않은 하나의 시선 그대로 말이다. 그렇다면 작가가 말하려는 바는 무엇일까? 옮긴이의 말에서 그 작은 답을 찾는다. 힘들고 비정하기만한 현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작가는 물론 이런 이야기를 꺼내어 놓고 있지는 않지만, 그런 현실을 바라보는 독자들의 가슴속엔 아마도 그런 느낌이 다가왔을 것이라 믿는다.
'쑤퉁은 믿기지 않는 현실을 그려 보이는 일에 탁월한, 이 시대 최고의 작가이다.' - 대련일보 -
중국 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이 시대 최고의 작가 쑤퉁! 이렇게 그와의 세번째 만남을 마무리한다. 최근 재미 위주로 만나왔던 장르 소설들과는 차별화된 독특한 느낌을 가진 작품들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수많은 작가들이 중국 문학을 이끌어 가고 있다니 부럽기도 하고 또한 즐겁기도 하다. 문학은 뿌리가 있어야 더욱 굳건하고 깊이 있고 풍성해진다. 잘은 모르지만 아마도 쑤퉁과 그의 동료 작가들이 중국 문학의 뿌리가 되어주지 않을까 싶다. 앞으로도 더욱 다양하고 풍성한 중국 문학들과 만날 수 있기를 희망해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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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그의 소설 『성북지대(城北地帶)』와 시대적, 공간적 배경이 거의 동일한데, ‘펑황’이란 이름의 여인이나, 마을의 중심축이 되는‘참죽나무길’까지 두 작품의 강한 유대감을 지니고 기댈 곳 없는 서민들의 삶의 소묘에서 우러나는 닮은 감성을 느끼게 한다. 그럼에도『화씨 비가』는 반전이 없어서 더욱 쓸쓸하고 울적하다. 맹랑하고 허황되게 삶의 긍정을 그려내야 한다는 도식에 충실한 쓰레기처럼 쏟아지는 대다수의 소설들에 이봐라! 하며 소시민의 대물림되는 가난과 절망을 처절하게 각인시켜준다. 순박함이 곧 무지함으로 인식되는 오늘에야 말할 것이 뭐 있겠는가마는 쑤퉁이 일관되게 귀를 기울이고 시선을 맞추는 배우지 못한 서민들의 목소리와 지친 몸뚱이들이 뿜어내는 삶의 해학은 그 어떤 숭고한 철학적 사유를 능가하는 가공되지 않은 진실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소설의 도입부는 그야말로 우문현답의 향연이다. 아내 펑황이 그녀의 근무 장소인 유류창고에서 목매 자살한 채 발견되자 감정의 혼란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 창고에 불을 지른 뒤 심문을 받는 남편,‘화진더우(화씨)’와 재판장과의 대화인데, 이름을 묻는 답변에 출신성분까지 곁들여 “지주 집안이 아니고 아주 떳떳한 하층 빈농이랍니다.”라고 부연 설명하는가하면, 방화의 이유를 대라는 질문에 “그걸 진짜 모르겠다는 거 아닙니까요. (...)정신이 홱 나가버린 겁니다.(...)누가 내 머릿속에 매듭을 꽁꽁 묶어놓은 것 같기도 하고, 숨이 목구멍에 턱 걸려서는 들이쉴 수도 내쉴 수도 없는 겁니다.”라는 정말의 대답이 형식적이고 거만한 제도의 사회에서는 이해할 수 없으며 요구되는 대답이 되지 못하는 것에서 그 소통의 단절이 얼마나 깊은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게다가 이성을 잠시 잃고 길길이 날뛰다보니 자신을 피하지 않고 눈에 들어오는 것이 하필 석유통이었고, 더구나 석유통에 불조심이라고 훈계하는 문자가 방화의 결정적이고 직접적 동기였다는 진술 또한 거짓 없는 사실이었을 것이다. 우린 여기서 피식하고 웃게 되지만 그 이상의 진실을 요구하는 사법제도가 오히려 진실을 벗어난 황당함이라 하여야 할 것이다. 결국은 예정된 판결결과에 대한 좌절과 절망으로 자살하고 마는 화진더우는 여동생과 네 딸, 그리고 아들 두후(獨虎)에 대한 걱정으로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이승과 저승사이인 구천에서 떠도는 궁상맞은 원혼이 된다. 어린 나이부터 생업을 위해 열심이었던 남자, 갓 스물에는 처자식이 있는 가장이 되어 혼자 세 사람 몫의 일을 해 댈 정도로 마소처럼 일한 사나이였지만 졸지에 고아가 된 다섯 남매의 아비로서 도움을 주지 못하는 혼령으로서의 그 애틋한 마음은 아이들을 떠나지 못하고 참죽나무길을 맴돈다. “남들은 머리굴려 잘 먹고 사는데”, 그렇지 못한, 아니 배움이 없어 그럴 수 없는 사람의 푸념이 육두문자를 피할 길이 있을까?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라는 문장은 계급과 권위를 내포하는 말이다. 재판관이 하는 ‘여기가’하는 말은 웃기는 얘기가 아닌가. 여기가 뭐긴, 인민이 세금내서 지은 법정이고, 인민이 낸 세금으로 월급 받고 사는 인간들이 하찮은 권력을 왈가왈부하는 것이 더 웃기는 것 아닌가! 말이다. 그러나 세상이 어디 그런가. 배운 놈, 가진 놈이 행세하도록 짜여있는 세상에서 화진더우나 그의 자식들, 벽촌에 사는 일가들에게는 아득히 먼 세계인 것을. 시집도 안 간 둘째 딸‘신란’이 덜컥 애를 배서 돌아오자, 알량하게 남은 체면을 지키려고 뱃속의 시한폭탄을 지우다가 사망하는 장면이 있는데 무산계급혁명을 부르짖으며 처단 되었던 부르주아 지주의 여식이 오히려 의사가 되어 화씨 집안에 대한 복수로서 낙태수술 중 절명시키는 것이다. 이데올로기, 체제라는 것도 인간사회의 오래되고 끈질긴 탐욕의 본성과는 무관한 하물며 변할 수 있겠는가 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웃들은 고아가 되어버린 화씨 남매에 대한 보살핌은커녕 회피하고 학대당하는 대상들이 되어 천덕꾸러기로 자란다. 특히 아들 두후에 대한 자긍심을 가지고 내려다보는 망자인 화진더우의 기대와는 달리 탈선과 무위도식으로 누이들과 고모를 고통스럽게 하고 급기야는 동성애자로 화씨의 손을 잇는 사내와는 멀어지는가 하면, 신메이, 신주, 신쥐, 세 딸에 대한 걱정을 떨치지 못하고 안타까움에 겨워 따라다니지만 혼령이란 아무런 것도 그들에게 줄 수 없음을 자책하는 망령의 옹잘거림은 그 애절함을 증폭시키기만 한다. 성인이 되고 짝들을 찾아 혼인하고 또 아이들을 낳는 자식들의 세월과 함께, 화진더우와 펑황을 대신해 아이들을 어미처럼 돌본 진더우의 누이인 고모의 애처로운 죽음에 이르면 이들 화씨에 떠나지 않는 불행이 더해 그 쓸쓸함이 더욱 애달프고, 소시민의 삶이란 이런 것인가? 하고 괜스레 가슴이 아려온다. 세습되는 가난과 소외, 도움을 주지 못하는 어버이의 쓰라린 심정이 구천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화진더우와 그의 전용 하늘 당나귀의 눈물이 되어 뿌려지는 듯하다. 외롭고 희망 없는 삶, 그러한 인생을 바라 볼 수밖에 없다는 것, 어찌 해 볼 도리가 없다는 것, 어쩜 그것이 사람의 숙명인지도...작가의 말처럼 운명의 질긴 애증과 고독이 이 보다 절절하게 표현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처량하고 구슬픈 노래다. 그럼에도 아름답다. 부모의 사랑이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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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씨 비가(华氏 悲歌)라는 제목에서부터 느껴지듯, 화씨 집안의 슬픈 이야기를 담고 있는 쑤퉁의 소설 <화씨 비가>. 사실 책을 제일 처음 받아들었을 땐,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가 떠올랐다. 허삼관이라는 인물이 피를 판 일대기를 담은 소설처럼, 분명 여기에도 슬픈 노래를 부를 수 밖에 없었던 쓰디 쓴 현실을 담고 있겠지.
어떻게 내가 보고 싶지 않은 광경들만 골라서 고스란히 내 눈에 들어온단 말인가? -p. 23
화씨 집안의 가장이자 네 남매의 아버지였던 화진더우가 재판장에 서서 판사에게 심문을 받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아내가 일하던 창고에서 목을 매 자살을 했다. 그에 분노한 화진더우는 창고를 불태워버리고, 방화범으로 법정에 서게 된 것이다. 그러나 결국 형을 선고받은 그는 끝내 아내 펑황의 뒤를 따라 감옥에서 목숨을 끊고 만다. 그렇게 망령이 된 화진더우는 천국에도 지옥에도 가지 못하고 하늘 나라의 제8구역에서 하늘 나귀를 배정받아 자신이 살고 있던 참죽나무길을 향한다. 자신의 누이와 그녀가 돌봐주는 네 딸 신메이, 신란, 신주, 신쥐와 외동아들 두후의 주변을 맴돈다. 하지만 화진더우가 지켜본 그들의 삶이 나아지기는 커녕, 오히려 딸의 죽음과 불구가 되어버리는 사위, 그리고 아들 두후를 뒷바라지 하느라 그대로 늙어버리는 누이를 만난다. 그 끝에, 화진더우는 쓸쓸히 지옥으로 향한다ㅡ.
아마 내 이야기를 믿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어떻게 세상천지 불행이란 불행은 모조리 우리 집으로 모여들 수가 있느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난들 그 이유를 알겠는가? 나보다 더 그 이유를 알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p.317
1970년대에서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사회 하층민 화진더우 일가의 비극을 망령이 되어 떠도는 아버지의 시각으로 생생하게 그려낸 <화씨 비가>. 화진더우는 살아서도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죽어라 고생했고, 죽어서도 마음놓고 죽지 못한 채 망령이 되어 가족 주변을 떠돌아다니며 통곡해야 했다. 그의 피붙이들은 어머니가 죽기 전까지의 한 달 치 봉급을 받기 위해 계속해서 악을 써야 했고ㅡ사실 이 부분은 좀 납득이 가지 않았지만ㅡ, 농촌으로 가 돈을 벌어오겠다는 둘쨋딸은 덜컥 임신을 해 중절수술을 하러 갔다 비극적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남아있는 딸들이라고 화목한 것은 아니다. 첫쨋딸 신메이는 결혼한 지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아 남편과 대판 싸우고, 남편의 자살 소동으로 인해 그는 반신불구가 되고 만다. 한편, 믿었던 아들 두후는 어린 시절 자기를 따돌리던 녀석의 뒷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질 않나, 요상한 녀석을 만나 뺀질뺀질한 차림으로 주변에서 '너 게이 아니냐'라는 소리를 듣고 다닌다. 이 모든 것을 아버지 화진더우의 시선으로 지켜보던 나도 속이 답답한데, 정작 자신은 어찌했겠는가!
대개 소설이나 영화 속에서 죽음을 맞이해 유령이 된 가족은 남아있는 가족들을 돕는 '수호천사'와 같은 존재로 그려지는 것이 많다. 그들이 알아차릴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나름대로 기발한 방법을 이용해 이리저리 미묘하게 도움을 준다거나, 하는 식으로. 하지만 쑤퉁의 유령은 그렇지가 않다. 그야말로 '망령'이 되어 가족들이 무너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아야만 한다. 절망의 끝까지 오롯이 모든 것을 몇십년동안 지켜보아야했던 아버지의 모습은, 그래서 슬프고 씁쓸할 뿐이다.
하지만 분위기가 우울하고 축 처져 있지만은 않다. 그렇다면 아마 나는 이 책을 굉장히 오래 붙잡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오히려 그들의 모습과 대화 하나하나가 너무 생생하게 살려 현실감있게 그려져있기에 몰입을 하며 읽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중국문학과 중국의 분위기에 익숙치 않아서일까? 마오쩌둥의 혁명 이후 공산주의를 바탕으로 살아가는 민중들의 모습과 그들의 대화와 분위기는 상당히 낯설다. <허삼관 매혈기>를 읽으면서도 느꼈지만 내가 생각하는 1970년대의 우리나라의 모습과는 달라서 그런지 그보다도 한참 먼 옛날같아 후에 '아, 이게 1970년대가 배경이었구나'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나의 중국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이니 뭐, 지금으로선 어쩔 수 없다고 치자(좀 무책임한가?;;).
어쨌든 '가진 것 없는 자에겐 해피엔딩이란 없다'라는 현실을 그야말로 현실적으로 그려내 마음이 아픈 <화씨 비가>는 끝내 지옥도 천국에도 가지 못했던 화진더우가 지옥행을 택하면서 끝이 난다. '하지만 희망은 있다'는 메시지가 아닌 '절망'만을 그려낸, 차라리 지옥을 가고 말겠다는 화진더우의 선택이 마음이 아프다. 이 쓰라린 모습은, '현실'이라 더 슬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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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진 것 없는 사람의 삶 속에 해피엔딩이란 없다. 저 세성에서 편히 쉬지 못하고 가족 곁은 맴돌며 외롭게 통곡하는,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망령이 되어버린 아버지!
거칠고 투박한 손으로 실뜨기를 하고 있는 표지. 화씨비가-화씨의 슬픈 노래라는 제목의 책. 왠지 허삼관매혈기를 생각나게 하는 책이다. 가족을 위해 지속적으로 피를 팔아야 했던 허삼관의 이야기. 화씨는 어떤 슬픈 노래를 들려줄지 궁금해하며 책장을 넘겼다. 슬픈 노래를 부르는 주인공은 화진더우. 그는 아내가 목을 맨 공장에 불을 지르고 감옥에서 자살한 하층 노동자이다. 그는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는 원혼들이 모인 8구역으로 배치받고 하늘 나귀 한마리를 얻어타고 그의 자식들이 사는 곳으로 내려와 다섯자식들의 삶을 지켜본다. 딸 넷과 하나뿐인 호랑이란 뜻의 이름을 가진 화진더우 자신의 대를 이어 줄 하나뿐인 아들 두후.
졸지에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다섯 남매와 다섯 남매를 돌봐주는 화진더우의 여동생의 삶을 망령이 된 화진더후의 입을 빌어 알려준다. 먹고 살기도 빠듯한 시절. 부모를 모두 잃은 다섯 남매의 삶이 고단하지 않을 수 없다. 갖은 고난과 시련을 겪은 뒤 자식들이 모두 승승장구, 아니 승승장구까지는 아니더라도 평범하지만 다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는 화진더우의 눈에 눈물이 맺히고 그렇게 속세에의 미련을 떨치고 하늘로 돌아갔다~정도로 마무리 되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드라마틱한 이야기, 밝고 환한 이야기, 해피엔딩을 원하는 독자라면 참으로 씁쓸할 수도 있는 이야기이다.
온갖 고난과 시련을 겪는 건 맞다. 어떤 자식 하나도 구천을 떠도는 화진더우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자식이 없다. 하나같이 가난하고 처참하고 굴욕적인 생활을 해 나간다. 그런 삶을 오롯이 지켜보는 화진더우, 그러면서도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가 참으로 비참하다. 골백번을 끌어안아봐도 코끝에 매달린 콧물에도 닿지 않는 귀신일 뿐이다. 그렇게 몰라도 좋을 자식들의 삶을, 그리고 과거의 비밀을 알아버린 화진더우에게 하나 위안이 있었다면 1구역, 바로 천당으로 배치된 누이 동생을 만난 일 뿐이랄까?
이런 비참한 이야기, 화씨의 비가라는 제목이 어쩜 이렇게도 잘 맞아 떨어지는지 모른다. 그러나 쑤퉁이라는 작가는 유머가 있다. 헛웃음이 날만큼 어이없고도 애절한 화씨 일가의 일생을 그려내는 와중에도 간간히 웃음을 준다. 그래그래, 이럴만도 하지 라며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일본소설과는 달리 중국소설은 한국의 예전모습과도 흡사한 분위기를 풍긴다. 아들 하나만을 위하도록 만들어 놓은 남아선호사상이며, 딸들은 무시하고 몸단속이나 잘 시켜서 좋은 집안에 시집만 잘보내면 된다고 하는 등의 모습이 말이다. 내몸 부서져도 자식들을 위해서라면 아깝지 않다고 생각하는 모정, 혹은 부정도 매한가지다. 죽어서도 고아가 되어버린 자식들을 잊지 못해 들리지도 않는 말을 쏟아내 가며 하늘 나귀를 타고 삶을 지켜보는 화진더우의 모습에서 우리네 부모의 모습을 보았는지도 모르겠다.
다시 표지를 본다. 거친 손, 투박한 손. 자식들을 위해 힘든 노동도 마다하지 않던 내 아버지의 손이다. 그 손으로 실뜨기를 하고 있다. 한 번 까딱 잘못하면 엉켜버리는 실. 되돌릴 수 없다. 어쩌면 우리 인생과도 같다. 생각 한 번, 발 한 번 잘못 디딤으로써 엉켜버린 인생은 다시 되돌릴 수 없다. 너무 운명론이 아니냐고 할지 모르지만 인생은 그렇다. 리허설도 없다. 편도다. 일방통행이다. 앞으로만 가는 인생. 다시 되돌릴 수도 고쳐 쓸 수도 없는 것이 인생이다. 물론 엉켜버렸다면 잘라내고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하면 된다. 너무 많이 엉키기 전에 말이다. 너무 현실적이어서 뒷맛이 참 쓴 화씨비가. 쑤퉁의 <성북지대>처럼 <화씨비가>도 반전없는 현실을 그려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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