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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uth should stand by itself, clear and unsupported. (245)
지금 시각 새벽 두시, 청소차 소리가 들린다. 무더위를 피해 새벽에 일하시나보다(알고 보니 31일부터 5일까지 쓰레기 수거 휴무였다). 노견이 힘들어해서 이 주간 에어컨을 켰다. 전기세 걱정에 오늘부터 틀지 않고 지냈더니 지친다. 전기가 가공하는 선선함에 그만 몸이 익숙해져버렸다.
아무래도 이런 때 줄리언 반즈의 신간을 펴든 건 좀 무리였다. 그의 문체는 독자를 확 빠져들지 못하게 의도적으로 차단하는 묘술을 부린다. 마치 철학서를 읽듯 쏟아지는 가설과 이론과 개념 정의, 방정식 등의 공식화가 머리를 지근거리게 한다. 아직 소설이 번역 전이다. 나는 정확하게 치밀한 번역보다는 헐거운 해석을 즐긴다. 외국문학만이 줄 수 있는 여백이고 함정이다.
[The Only Story]는 <시대의 소음>과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반반 섞어놓은 듯했다. 그런 이유에서 아직 줄리언 반즈의 소설을 접하기 전의 독자에게 이 책은 특별한 역할을 할 것 같다. 시대의 조류와 예술가의 관계를 철학적으로 풀어낸 전작의 장점과 그(들)만의 언어로 코드화한 미스터리를 동시에 맛볼 수 있다. 전작에는 삶을 통찰하는 문구가 넘쳐나 곱씹고 인용하기 좋았다. 후작은 적은 분량에 마지막까지 긴장을 놓지 못하게 밀어붙이는 서사의 힘을 발휘한다.
이번에는 <시대의 소음>에서 느꼈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사유와 단단한 울림이 좀 갑갑했다. 개츠비나 <그해 여름 손님>의 순정에 비교적 수긍했던 나인데 계속되는 남자들 위주의 사랑 이야기에 솔직히 물리고 질렸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에서 여자를 두 부류로 나눠 대조 구도로 이야기를 펼친다면 [The Only Story]에서는 남자 주인공(폴)과 짝을 이루는 수전의 비중이 너무 작고 미비하다. 수전보다 그녀의 친구인 잔 이야기가 더 많고 구체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왜 일까. 주인공과 같은 처지(독신)에 놓이게 되는 암시 때문에? 아니면 독자인 나와의 공통점이 그렇게 보이게 만든 것일까.
<그해 여름 손님>에서는 엘리오의 성장과 인생 반경과 폭 넓히기에 끼친 올리버의 영향력을 따라 집중해 읽었다면 [The Only Story]는 공감하거나 몰입이 어려워 흡수되지 못한 채 이야기 밖에 내내 머물렀다. 이것도 일종의 성장, 즉 ‘프랑스식 관계’(French relationship) 설정인가 싶은 찰나에 마치 독자의 의중을 헤아린 듯 주인공이 아니라고 부인한다. 책장을 넘길수록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에서 미처 하지 못한 이야기를 마저 풀어낸 게 아닌가 싶었다. 그 점에, 하필이면 노년의 작가가 지속해 한 소년을 강타한 여자 이야기로 되돌아가는지 의문이 들었다.
폴의 몸과 성과 가족에 대한 고찰은 현재에 있지 않다. 아주 오래 전 빛바랜 기억으로 회귀한다. 연어처럼 물살을 헤치며 거슬러 근원으로 올라간다. 어두워지면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귀소본능에 시달리는 것처럼 이야기는 강렬한 이미지(테니스 복장)로 박힌 첫 여자를 거듭 회술한다. 인물들의 대립이나 갈등과 행위 묘사보다는 주인공의 생각과 생각이 몸을 뒤척이며 재정립되는 과정에 치중된다. 말로 뱉고 화끈하게 소통하기보다는 자기 안으로 스며들거나 내재화되는(internalised) 사고와 틀을 전형적인 영국적 요소로 읽어도 무방할 것 같다. 여전히 현역작가인 줄리안 반즈의 위상과 입증이 놀라우면서도 그 역시 옛날 사람이구나(a played-out generation) 속으로 되뇌었다.
그가 똑똑한 작가임이 여기서 증명되는데 작품을 통해 인간은 그가 처한 상황에 따라 삶을 해석하는 일시적인 존재임을 확고히 한다. 본인의 문제가 되지 않고선 절대 알고 이해할 수 없다고 선을 긋는다. 사랑을 할 땐 사랑이 뭔지 상대방에게 묻거나 정의내릴 수 없단다. 그게 사실이고 존재하는데 굳이 이론화하거나 설명할 필요가 없고, 다만 관계가 끝나고 식었을 때 꺼내 들 수 있단다. 사랑을 추적해보면 하나의 사랑만이 ‘이야기’로 남을 뿐 개념으로 완결될 수 없단다. 지금의 사랑에는 이전의 역사(prehistory) 혹은 상흔이 드리우고 있을 뿐, 그렇다고 짐작할 뿐 그 정체를 단 하나로 지목할 순 없단다. 이 지점에서 아이를 품고 낳지 못하는 생물학적인 운명이 야기하는 기록을 남기려는 자의 욕망과 의지가 뚜렷이 드러난다.
어떤 점에선 무엇이든 다시 말하고 다룰 수 있는 창작 문화와 허용이 새삼 부럽다. 생애 최고의 작품이 아니더라도 더 할 말이 있으면 새롭게 쓰는 자세와 눈치 보지 않음이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점이라고 생각한다. 지나지(gone) 않고서는 알 수 없기에 다시 사는 삶이 타당해진다. 두 번째 삶을 허용하는 공간이 바로 소설 지면이다. 실패하고 식어버린 사랑이더라도 다시 살피는 손길이 그래서 인간적이다. 비록 그것이 한 소년의 영웅심(기사도 정신)과 독특하고자 하는 관종 심리에서 비롯된 사랑이라 할지라도 섣불리 낮게 보거나 소거하지 않는다.
그렇다 해도 틀과 경계를 지우고 넘어서고자 쓰는 가운데 다시 형성되는 선과 규획을 어떻게 봐야 할까. 매력? 의도? 한계? 그 어디쯤에 [The Only Story]가 매달려 있다. 그의 팔목을 잡아 안으로 끌어당길지, 아니면 손을 풀어 창문 밖으로 떨어뜨릴지는 순전히 독자의 몫이다.
다행히 그가 말년에 몸의 전락에 발광했던 필립 로스와는 다른 온도로 죽음이 도사리는 삶을 고찰해 우리는 인생의 끝에 임하는 여러 자세를 관람하고 타진할 기회를 얻는다. 아직 절필할 때는 아니니 그런 염려 따위는 붙들어 매라는 작가의 소리가 왕왕 들리는 듯했다.
As for the wider question of age and mortality: no, he didn’t think he felt a panic at the shutting of the doors. But maybe he hadn’t yet heard their hinges creak loudly enough. (25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