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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느낀 이윤기 선생님은 이런 사람이다. 혹은 ‘이윤기’라고 하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연상된다. 자유의 추구/ 도시인이 될 수 없는 시골인/ 고집과 뚝심/ 촌스러움/ 자유인/ (그러나) 예의를 중요시하는 이윤기는 국가라는 한정된 바운더리 안에서 도/농을 구분할 때의 도시인은 아니지만 그 경계를 넘어서는 코스모폴리탄이다. 하나의 정체성으로 정의내리기 힘든 사람이다. 그래서 어느 그룹에든 쉽게 속하지 못하고 어디서나 회색인 취급을 당할 수밖에 없는 슬픈 운명을 가졌다. 침묵이 금이라고 생각하는, 그래서 오해도 받는. 왜냐하면 누구나 내 마음 같지는 않으니깐. 그래서 많이 부딪힌. 마지막으로… 우직하고 무뚝뚝하나 딸 앞에서는 한없이 '딸바보'가 되는 천상 바보. '딸바보' 아빠를 둔 바로 그 딸은 아빠를 이어 번역가의 길을 가고 있다. ‘유고산문집’인 『위대한 침묵』은 ‘유고소설집’인 『유리그림자』와 상당 부분 겹친다. 에세이 지만 소설같고, 소설이지만 에세이 같다. 이것은 이윤기의 소설이 자신의 삶을 바탕으로 쓰여진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경계를 구분 짓기 어려운, 특정한 정체성으로 구분 짓기 모호하다기보다는 다양한 정체성을 넘나드는 ‘이윤기’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측면이라고 생각한다. 자유인다운 작가의 면모의 단면이기도 하고. 솔직하다는 건. 장점이기도 하지만 단점이기도 하다. 어른이 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누구나 하나 이상의 ‘페르조나’를 갖게 된다. 그런데 이윤기는 선천적인 이유는 후천적인 이유든,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이러한 '페르조나'를 갖고 있지 않다. 가면을 쓰지 않은 어른의 얼굴은 타인들을 당황스럽게 만든다. 이해받았을까, 그는? 상처받지 않았을까, 그는? 그렇게 상처받으면서도 굳이 가면을 쓰지 않고 맨얼굴로 평생을 산 까닭은 뭘까? 그의 산문집을 읽을 때마다 가슴 한 편이 짠해지면서 늘 품게 되는 의문이다. 상처받는 것보다 오해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자유라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내 책 머리말에 쓴 바 있거니와, 나는 신학대학 출신인데다 예수님의 향긋한 말씀을 너무 좋아해서 스님들로부터는 예수쟁이로 몰리고, 부처님과 선불교를 좋아해서 기독교인들로부터는 '절집 처사'로 몰려 본 특이한 경험의 소유자다. 경산도 사람인데도 전라도 문화를 너무 좋아해서 동창들로부터 '족보가 의심스러운 놈', 전라도 친구들로부터는 '무신경한 경상도 놈'으로 낙인 찍혀 본, 참 억울한 사람이다. 영어 책 번역을 생업으로 삼은 데다 미국에 오래 머물렀던 탓에 한글 순혈주의자들로부터는 '미국 놈 똥구멍 빨다 온 놈', 진보적인 어문학자들로부터는 '언어 국수주의자'로 몰린 적이 있는, 자타가 공인하는 회색분자다. 인도 말로는 이런 순간을 '드히아나'라고 한다지 아마. '선(禪)'이라는 말이 여기에서 나왔다지 아마. 눈 감은 것도, 뜬 것도 아닌 상태. 확실하게 아는 것도, 전혀 모르는 것도 아닌 상태. 나는 앎과 모름의 가장자리를 서성거릴 때 행복을 느낀다. 약삭빠르게 세상의 속도에 맞춰 삶을 사는 대신 자기만의 속도로 자기만의 세계를 만드는 쪽을 선택했던 한 남자의 이야기는 담담하면서도 견고하고 굳건하면서도 쓸쓸하고 스산하면서도 바람처럼 자유롭다. 거목이나 바위를 보는 것 같으면서도 한없이 연약했던 한 인간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랬던 그가 우리 곁을 떠났다. 그래서 더 이상 그의 작품을 접할 수는 없겠지만 여전히 그는 우리 곁에 살아 있다. 여전히 그를 생각하게 된다. 그 자신의 말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은 까닭에 그는 죽었으나 죽지 않았다. 죽음은 죽는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잊히는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이렇듯 잊히지 않고 있으니, 그 떠난 자리가 참 아름답다(38). 떠난 자리가 아름다운 한 사람이 마지막으로 남긴 이야기, 그것이 바로 『위대한 침묵』이다. 이 책을 곁에 두고 오래오래 읽고 싶은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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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8월 27일 심장마비로 운명을 달리한 이윤기의 유고 산문집이다. 애초에 번역가로만 알고 있었던 (이윤기는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의 번역자이다) 그가 쓴 하늘의 문이라는 세 권짜리 소설을 보면서 (사실 그는 소설로 신춘문예에 등단한 작가인데도) 놀랐고, 그 후 그의 몇 편의 소설 그리고 산문집들을 찾아 읽고는 했다. 그렇지만 그의 작품을 마지막으로 읽은 것이 벌써 십여년 전이다. (한 달 전쯤 이윤기의 그리스로마신화 개정판을 다시 샀지만 아직 읽지는 못했다.)
ps. 물론 그의 이번 산문집에 뭔가 큰 기대를 하는 것은 무리이다. 그가 기획하여 쓰고 있던 산문집은 아닌 것 같고, 아마도 그가 숨을 거둔 후 그간 발표되지 않은 글들을 묶은 탓일 것이다. 때로 그 내용이 겹치는 것들도 있을뿐더러 어딘가 중구난방 느슨하게 엮여 있다는 느낌이 더욱 크다. 그러나 어찌하랴, 그는 이미 떠난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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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이 작가의 새로운 글은 더 이상 읽을 수 없다. 읽고 싶다면 이미 읽은 글을 다시 읽거나 아직도 챙겨 읽지 못했던 글을 읽으면서 섭섭함을 달래야 한다. 이 책은, 잠깐 시간이 지난 후에, 내 기억력이 힘을 잃었을 때(하기야 기억하고 있다 한들 어쩌리) 다시 펼쳐 읽고 싶은 책이 되었다.
나이가 들어서 좋은 점이 무엇일까, 제대로 생각하지 못하고 지내다가 이 책을 보고 확인하게 된다. 자신의 지난 허물조차 부끄럽지 않게 인정할 수 있게 되는 여유, 그런 여유를 배운다. 내 또래의 친구들, 선배들에게 선물하고 싶은 책이다.
직접적인 교훈을 말해주는 것도 아니면서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글, 잘 살아오고 있다 혹은 잘못 살아왔다에 대한 냉혹한 판단없이 자신의 삶을 짚어보게 하는 글, 글이 곧 사람이라는 말을 확실하게 느끼게 해 주는 글, 이 작가의 글을 읽고 마음이 좋지 않았던 적이 없어 그게 참 좋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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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주어진 삶은 좋게 봐서 길게 쳐 봐야 백년 남짓이고 난 그 중 이미 36%를 써 버렸는데, 읽어야 할 책들은 너무 많아 마음이 조급하다.. 특히 이윤기 선생님의 책을 읽고 나면 늘 마음이 조급해 진다... 그러한 이유로 수필은 잘 읽지 않는다.. 기 보다 거의 읽지 않았었는데 최근 박완서 선생님 책과 이윤기 선생님 책 연거푸 읽고 나니 후회가 쓰나미 처럼.. 딱히 본인만의 성과 없이 자기게발서 쓰는 것이 직업인 전혀 신뢰 할 수 없는 작가들이 쓴, '혹' 하도록 제목만 아주 그럴듯한 요새 무척 유행 하지만 나는 너무 싫어 하는 자기계발서들 한 트럭으로 싣어 와도 이러한 분들이 주는 몇 마디의 교훈과 맞바꿀 수 있을까? 어제 이 책 마지막 장을 덮으며 정말 오랫만에 겨울엔 웃풍이 들어 무척 추운 단독주택 어느 작은 방에서 두꺼운 이불 뒤집어 쓰고 엎드려 책을 읽던 삐딱이 소녀 하나가 스멀 스멀 기어 나왔다.. 내게 썩 유쾌한 유년기가 아니기도 하지만 그 때의 감성을 떠올리기에는 내가 너무 무디어진 기성세대가 되어 버려 정말 너무 많이 오랫만의 소환이다... 앞서 읽은 박완서 선생님의 '세상에 예쁜것' 읽으며 어쩌면 글월에서 세월의 흔적을 (부정적인 방면으로) 읽어 낼 수 없을까? 했는데, 훌륭한 작가의 선결 과제가 바로 '철이 들지 않는 것' 인가보다.. 철이 들어 버리면 감수성이라는 것도 거기서 뚝.. 이므로.. 이윤기 선생님도 유년기의 기억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그 기억들을 근간으로 많은 글을 쓰셨다... 이런 분을 아버지로 둔 따님 무척 부럽다.. 출생 연도를 보니 나와 비슷한 연배일거라 짐작 되는데.. 가만 생각 해 보면 고등학교때 이 분을 꼭 닮은 국어 선생님 할아버지가 계셨었지.. 그 때 좀 더 열심히 수업 들을걸.. 철딱서니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내가.. 내가 그 동안 속해 온 집단이 표준 이하였던 것인지 그 간 어디 가져다 놓아도 중간 이상은 해 오고 있기에 어리버리 하지만 내가 멍청이라고 생각 해 본적은 없는데 이 분을 보면 대체 사람의 뇌세포는 어디 까지 확장 될 수 있는것인지, 아니면 내가 멍충이 인것인지 혼란에 빠져 버린다.. 그 많은 책들을 읽고 그 많은 지식들이 머리에 차곡 차곡 들어 가 있는데 돌아기시기 직전까지도 '우겨 넣고' 계신다 했다... 영어 책 번역을 하셨지만 중학교 겨우 졸업, 고등학교 중퇴 하신 분께서 언제 배웠는지, 일본어는 그렇다 쳐도 독일어도 원서로 읽으셨다는 대단한 분... 그러나 벼는 익을 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입선, 중퇴, 초빙, 객원, 명예... 보라, 한 번도 '꽃으로 피어 보지 못한 채 나는 '잎' 으로만 살았다.. 그래도 잘 살고 있다...
신학대학 출신인데다 예수님의 향긋한 말씀을 너무 좋아해서 스님들로붜터는 예수쟁이로 몰리고, 부처님과 선불교를 좋아해서 기독교인들로 부터는 '절집처사' 로 몰려 본 특이한 경험의 소지자다................영어 책 번역을 생업으로 삼은데다 미국에 오래 머물렀던 탓에 한글 순혈주의자들로부터는 '미국 놈 똥구멍 빨다 온 놈', 진보적인 어문학자들로부터는 '언어 국수주의자' 로 몰린적이 있는 자타가 공인하는 회색분자다. 나는,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석양 무렵 혹은 동틀 무렵을 좋아 한다..............눈 감은 것도 뜬 것도 아닌 상태. 확실하게 아는 것도, 전혀 모르는 것도 아닌 상태. 나는 앎과 모름의 가장자리를 서성거릴 때 행복을 느낀다. 이러한 부분이 바로 내가 이 분을 존경하는 근본이 아닐까 싶다. 글들에 적은 날짜가 있었다면 무척 좋았겠는데, 일부러 편집을 그렇게 한 것인지 무언가 예감을 한 것인지 "이제 마음의 일요일도 없는 곳으로 떠나니 악우들 (담배, 술)이여 안녕" 이라고 마무리 되는 이 책을.. 난 왜 그 분 께서 이미 강을 건너고 나신 다음에야 그 분의 존재감을 깊이 느끼게 되었을까? 지금에 와서 생각 해 보니 그 동안 그 분이 작업 하신 책들을 무척 많이 읽었는데... 읽어야 할 책들이 너무 많기에 한 번 읽은 책들은 아무리 오래 전에 읽은 책이라도 여간 해서는 다시 읽는 일이 없는데, 이 분의 작업으로 맨 처음 만났던 책 "천국의 열쇠", 이거 초등학교 졸업반 때 담임 선생님께 선물 받은 책인데 아직 친정집 책장에 있다.. 그리고 이 분께서 필시 동일시 하고 있거나 닮고 싶은 인물로 여기셨던 걸로 보이는 그리스인 '조르바' 를 조만간 다시 읽어 봐야 할듯하다.. 그리고 내 자식들에게 이 분의 어머니를 닮은 엄마가 되어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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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단편소설은 싫다. 겨우 스토리 전개 파악하고 등장인물 친해지려고 하면 끝나버려서 참 허무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 짧은 에세이는 좋다. 작가의 디테일한 감정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몰래 일기를 훔쳐보는 기분이 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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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8월 27일. 2010년은 우리에게 상실의 해였다. 좋은 이들이 무섭게도 많이 세상을 떠나갔다. 시대를 대표하는 지성이자 소설가였던 작가 이윤기 역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갔다. 하지만 작가는 죽어서도 작품을 남기고......[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로 유명한 그는 그 외에도 [장미의 이름]이나 [푸코의 진자]처럼 여러 번역서도 세상에 남겨두고 떠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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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윤기라는 작가를 알게 된 것은 와이프가 추천해준 [나비넥타이]라는 작품을 통해서였다. 그리고 그의 저작들, 번역작품이며 로마그리스신화며 이런 류의 책들을 읽어나가면서, 아 우리나라에도 이런 작가가 있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된차, 몇년전 그의 타계소식은 참 안타까운 일이였다. 그의 말처럼 '죽음은 죽는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잊히는 순간에 이루어진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라고 한 바, 그는 아마 결코 죽지 않는 불사신으로 독자들의 가슴에 영원히 불멸의 존재로 남을 것이다. 단지 그의 새로운 작품들을 다시 볼 수 없다는 것은 그의 작품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에게는 불행으로 다가올 것이다. [위대한 침묵]은 그의 마지막 산문집이자 유고집인 것으로 보인다. 책 제목처럼 그는 이제 침묵한다. 하지만 이 침묵은 위대한 침묵이다. 그는 말이 없지만 그의 작품들이 다시 새롭게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으니 말이다. 37개의 짧은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고 마지막 그녀의 딸인 이다희씨의 아버지를 추억하는 글로 구성되어 있다. 37편의 글들은 동서양,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그의 뛰어난 인문정신을 보여준다. 읽고나서도 많은 생각을 남기게 한다는 점은 역시 그의 글맛 때문이다. 화려한 문체가 아닌 따뜻한 그의 문체는 위대한 작가의 조언과 충고, 그리고 차한잔 마시면서 나누는 대화 같은 것이다. 나무에 대한 희망으로 시작하고, 두명의 악우 술과 담배와 헤어지는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이윤기... 그는 불멸의 존재이다.
이으면 인연이요, 끊으면 절연인 법, 내 가슴에 손을 얹고 물어 보았다. 너는 인연을 잇느냐? 끊느냐? (50p)
나는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석양 무렵 혹은 통틀 무렵을 좋아한다. 인도말로는 이런 순간을 '드히아나'라고 한다지 아마, '禪'이라는 말이 여기에서 나왔다지 아마. 눈 감은 것도, 뜬 것도 아닌 상태. 확실하게 아는 것도, 전혀 모르는 것도 아닌 상태. 나는 앎과 모름의 가장자리를 서성거릴때 행복을 느낀다.
가을 오고 가는 것, 아름답기는 하다. 단풍들고 잎 떨어지는 것은 저희들 살림일뿐이다. 언제 자연이 우리에게 눈길이나 주던가? 天地不仁 아니던가? (p64)
아무래도 무수한 고유명사들이 내 기억 어딘가에 스며들어 있을 것 같다. 나는 이들을 자력으로 마중하려고 퍽 애를 쓴다. 애를 쓰다 보면 마음 아니면 생각의 자리에서 흐릿한 구정물 같은 것이 풍풍 솟아오르는 것 같다. 그 물의 앙금 가만히 가라앉힐라치면, 오래 잊고 있던 이름들이 얼굴을 드러낼 때가 자주 있다. 나는 이미 많은 정보를 내 기억의 창고에다 우겨 넣었다. 더 우겨 넣는 수고가 망설여진다. 그래서 가만히 기다리면서 구정물이 맑아질 때를 기다리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 자주 나 자신에게 묻는다. 더 알아야 하는가? 우겨 넣는 짓 이제 그만하고 가만히 되새김질해 볼 때가 된 것 같은데.. (p68)
알렉산드로스와 필리포스의 침묵, 야율초재의 침묵을 묵상한다. 무수한 말과 주장들이 똥 덩어리처럼 둥둥 떠다니는 이 시대에... (p77)
그리스 사람들은 바다를 두가지 이름으로 불렀다. '오케아노스'와 '에욱세이노스' 우호적으로 느껴질때는 오케아노스, 바다가 심술궃게 느껴질때는 에욱세이노스, 즉 적대하는 바다라는 뜻이다. 신화시대의 그리스인들에게 흑해는 오케아노스가 아니었다. 그들에게 흑해는 거의 죽음의 바다였다.. ..흑해는 뉴규에게나 존재한다. 그 흑해를 건너야한다. (p78~81)
No attachment, no detachment! 집착이 없는데 해탈 없지요! 무분별한 의미 부여와 집착은 우리의 감옥이 될 수도 있다는 소식 아닌가?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기는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불심검문은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p108)
나는 내 가족과의 행복 같은 것도 따로 설계하지 않는다. 내가 그들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지 그들이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오로지 이 믿음에만 의지에서 살 뿐이다. 행복은 내가 덤으로 누리는 마음의 한 상태다. (p127)
사람은 남으로부터 무시당하거나 능멸당한 경험이 없으면 남을 무시하거나 능멸하지 않는다는 게 내 생각이다. (p154)
오늘 같은 날 그분이 문득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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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선, 중퇴, 초병, 객원, 명예.......... 보라 한번도 꽃으로 피어 보지 못한 채 나는 잎으로만 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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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갑작스럽게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故이윤기 선생의 마지막 산문집이다. 이윤기 하면 그리스 로마 신화의 이야기꾼으로 기억하는 이가 많다. 동인문학상과 대상문학상을 받은 소설가이기도 하고, 또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비롯해 움베르토 에코의 '푸코의 진자', '장미의 이름'을 우리말로 풀어낸 번역가이기도 하다. 내가 이분 산문집에 얼마나 열렬한 독자가 되었는고 하면, 첫 책이었던 <무지개와 프리즘>을 읽은 이후 판매되고 있는 모든 산문집을 구매한 것도 모자라서 헌책방을 다니면서 절판된 것들까지 사들이고, 심지어 도서관에 가서 선생께서 월간 에세이를 비롯해 타 잡지에 기고한 글까지 찾아 읽을 정도였다. (일부 메니아 중에는 이분이 쓴 소설들과, 번역한 책들까지 모두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읽는 속도가 빠르지 않은편인 나도 새로 출간되는 산문집은 하루만에 후딱 헤치우곤 했다. 이분의 트레이드 마크라고 할수 있는 특유의 '힘을 빼고' 써내는 글귀에서 더센 힘을 맛보곤 했다. 그런데 너무 일찍, 너무 갑자기 떠나 버리셔서 아직도 실감이 잘 나지 않는다. 그냥 다음달 월간 에세이에 또 한편 올라올것 같은 기분이다. 이 책이 출간되고 나서 오래지 않아 구매는 했지만 바로 읽지는 않았다. 이것이 고인께서 남긴 마지막 끄적임이라는 사실을 오래도록 애써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책이 고파올때 찬찬히 읽어내리라 다짐하고 있다가 논산훈련소에 갓 입소한 훈련병이 서울에서 날라올 편지를 기대하며 얼른 밤만 되어 읽을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펴들었다. 기억에 남는 문구 하나. "죽음은 죽는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잊히는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이렇듯 잊히지 않고 있으니, 그 떠난 자리가 참 아름답다." 부재라는 것이 실재를 증명하는 가장 좋은 방법인 모양이다. 선생님 고맙습니데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