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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과학 간의 최초의 유명한 갈등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기존의 믿음을 깨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이론이 등장하면서 시작된다. 태양이 우주의 중심인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인지를 놓고 벌였던 이 논쟁은 결국 갈릴레이와 케플러, 뉴턴 등 저명한 과학자들의 관측기록 등 과학적 증거에 힘입어 과학의 승리로 결론이 났다. 요즈음의 사람들 중에는 제 아무리 종교적 신념이 돈독하다 할 지라도 하느님을 닮은 인간을 창조해서 살게 한 지구가 전 우주의 중심이라 믿는 이들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초등학교에서 과학적 지식을 조금이라도 접해 본 경험이 있는 이들은 심지어 태양마저도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인류는 전 우주를 창조했다고 여겨지는 하느님의 편애를 잔뜩 받고 있으면서도 전 우주라는 큰 세상에서는 변두리의 다락방에 쪼그려 사는 존재일 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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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소멸을 꿈꾼 적이 있는가? 천주교,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힌두교 등이 완전히 사라진 지구별의 삶을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나는 존 레논의 <이매진>을 들으면서 종교의 소멸이 가져올 여러 가지 파장에 생각이 미친 적이 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나는 무신론자이지만 종교의 소멸을 바라지는 않는다. 종교의 소멸이 종교의 부흥보다 세상에 더 이로움을 미칠지 의문스럽기 때문이고 영적인 추구와 신비에 대한 동경은 인간의 본질에 속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종교는 결코 소멸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종교의 영향력이 미약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제도적인 주요 종교에 국한되는 이야기다. 개인의 영성에 치중하는 갖가지 뉴에이지 스타일의 종교와 소수종파의 근본주의는 여전히 한창이다. 러셀은 종교를 구성하는 본질적 요소들로 교회, 교리, 개인의 도덕률을 꼽은 적이 있는데, 나는 종교가 단지 개인의 도덕률에 국한하여 그 영향력을 지속하기를 기대한다.
덴마크의 유신론적 실존주의자 키르케고르는 일생 내내 ‘나는 왜 기독교인으로 살아가야만 하는가’를 역설했다. 반대로 영국의 무신론자 버트런드 러셀은 1923년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를 통해 종교의 해악, 종교적 극단주의가 팽배한 사회를 비판했다. 러셀의 사상은 이후 세계적인 지식인 도킨스, 히친스, 윌슨 등으로 이어지는 무신론운동의 기반이 되었다. [종교와 과학](동녁, 2011)은 1935년에 출간된 러셀의 대표작으로, 지난 4세기 동안 신학과 과학 사이에서 벌어졌던 주된 갈등의 양상을 천문학, 진화론, 악마학과 의학, 영혼과 육체, 결정론, 신비주의, 우주적 목적, 과학과 윤리학 등 여러 측면에서 조명하고 있다.
러셀의 어릴 적 가정교사의 훈계대로 다윈주의자이면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정말로 불가능한 일일까? 최대한 양보해서 말한다면 다윈주의자가 신앙생활을 영위할 수는 있지만 성경이나 경전의 의미를 문자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 물론 과학과 종교 각각 독자적인 한계점을 갖고 있다. 가령 무지개의 비밀은 과학이 낱낱이 파헤쳤지만 사랑의 신비는 과학이 침범하지 못할 은밀한 영역을 간직하고 있다. 종교가 과학에 병합될 수 없는 자신만의 독자적 영역을 가지고 있다면 이는 개인의 도덕률 영역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과학의 역사가 신학의 편견에 맞서 싸운 투쟁의 역사임을 잘 알고 있다. 러셀은 천문학에서는 천동설과 지동설의 갈등을, 지질학과 생물학에서는 창조론과 진화론의 갈등을, 의학에서는 악마학과 의학의 갈등을 묘사한다. 참고로 러셀의 과학주의는 냉철한 이성에 입각한 무기질적 세계관을 드러낸다.
“성장을 낳은 바로 그 법칙들은 퇴보를 낳는다. 언젠가 태양은 차가워질 것이고 지구 위에 생명체는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동식물이 온전하게 존재하는 시기는 너무 뜨거웠던 시기와 너무 추워질 시기의 막간일 뿐이다. 우주적 진보의 법칙이란 없다. 다만 에너지의 확산을 통해 균형을 이루며 아래쪽으로 천천히 향하는 경향이 있는, 위아래로의 진동이 존재할 뿐이다. 이것이 현재의 과학이 그나마 가장 개연성 있게 여기는 내용이며, 미몽에서 깨어난 우리 세대가 믿을 수 있는 내용이다. 현재의 지식만으로 본다면 우리는 궁극적으로 진화로부터 그 어떤 낙관적인 철학도 타당하게 추론할 수 없다.”(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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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인이든 무종교인이든 어느 쪽도 거부감을 느끼지 않도록 잘 쓴 지성인의 솜씨가 담긴 책이다. 종교와 과학이 갈등을 일으켰던 지점과 그 갈등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잘 설명해주고 있다. 저자가 조금 더 욕심을 내서 각 장마다 더 심화해서 설명했어도 괜찮았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9p - 교리 교리는 종교와 과학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의 지적 근원이다. 의견 : 문제는 이 교리도 절대적이지 않은 부분들이 있다는 것이다. 13p - 과학과 종교의 차이 과학은 광범위한 가정이 아니라 관찰이나 실험을 통해 발견된 특정 사실에서 출발한다. 거기서 일반규칙이 얻어지며, 만약 그 규칙이 참이라면 문제의 사실들은 실례가 된다. 그러나 이 규칙은 사실로 단언되는 것이 아니라 우선은 작업가설로 받아들여진다. 많은 사실들이 가설에 부합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 가설이 확실해지는 것은 아니다. 결국 상당히 개연성 있는 것으로 간주되긴 하는데 그 정도까지 되면 이제 가설이라기보다는 이론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되다. (중략) 종교적 교리는 절대적으로 확실한 영원불변의 진리를 담고 있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과학 이론과 다르다. 과학은 언제나 잠정적이고, 현재의 이론들이 조만간 반드시 수정되어야 할 것이라 예상하며, 자신의 방법에 완벽하고 최종적인 설명에 도달할 능력이 논리적으로 결여되어 있음을 자각하고 있다. 더 발전된 과학 역시 대개는 조금 더 엄밀한 정확성을 부여하는 정도의 역할을 할 뿐이다. (중략) 과학은 그렇게 절대적 진리의 추구를 포기하고, 발명을 하거나 미래를 예측하는데 성공적으로 이용될 수 있는 모든 이론들에서 발견되는 이른바 ‘기술적인’ 진리로 대체할 것을 독려한다. ‘기술적인’진리에서 중요한 것은 정도이다. 의견 : 조금 생각하게 만드는 논리 구조이다. 저자는 과학의 한계를 인정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종교를 인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과학은 완전하지는 않지만 계속적인 문제제기를 통해 더 나아지려고 노력하고 있고, 이러한 과정이 바로 과학이지만 종교는 절대적이지 않았던 것들을 가지고 진리인 것처럼 주장해왔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적어도 종교에 비해 과학만큼은 위선적이지 않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기술적인 진리라고 자처해온 과학의 의미가 생긴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초기의 과학자들 역시도 자신들의 발견을 절대적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115p - 의식이란 우리가 ‘의식한다’고 말할 때 이것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 우선 우리가 일정한 방식으로 환경에 반응한다는 뜻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의 내부에서, 즉 우리의 사고와 감정 안에서 무생물인 대상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어떤 특성을 발견할 수 있다는 뜻이다. (중략) 이제 우리는 우리도 자극에 반응하고 돌도 반응하는데, 돌이 반응하는 자극은 매우 드물다는 정도로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외부의 ‘지각’에 관한 한, 우리와 돌의 다른 점은 단지 지각의 정도에 차이가 있다는 것뿐이다. 의견 : 없음 130p - 인과법칙이 미래를 결정할 수 없는 이유? 인과법칙의 발견은 과학의 본질이다. 따라서 과학자들에게는 그런 법칙들을 찾아낼 권리가 있다. 과학은 인과법칙이 없는 영역에 접근할 수 없다. 과학자들이 인과법칙을 추구해야 한다는 준칙은 버섯 채집자들이 버섯을 찾아야 한다는 준칙만큼이나 명백하다. 인과법칙 그 자체가 과거가 미래를 ‘완전히’ 결정한다는 논리가 반드시 포함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136p - 불확정성의 원리 그런데 결정론자들에게는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원자의 변덕에 관하나 현대의 이론은 한 발짝 더 나아갔다. 지금까지 우리는 물체들이 언제나 자기들의 움직임을 완전히 결정하는 법칙들에 따라 움직인다는 사실을 입증해 보이는 일반 물리학의 증거들이 상당히 많거나 많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이런 모든 법칙들은 단지 통계적인 것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원자들은 일정한 비율로 여러 가능성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한다. 그리고 그 가능성의 수가 굉장히 많기 때문에 예전 방식으로도 관찰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큰 물체라면, 결과의 외양은 완벽한 규칙성을 보이게 된다. 의견 : 현대 물리학이 다루는 양자역학에 관한 얘기다. 일정한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고 생각했던 법칙들이 통계적인 확률로 표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신이 창조한 이 세계는 주사위 놀음처럼 작용할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물론 이것은 원자보다 더 작은 입자들의 세계에서 얘기고 우리가 외양적으로 충분히 관찰할 수 있을 만큼 큰 물체라면 그 확률은 점점 하나의 패턴을 만들게 될 것이다. 155p 우리는 종교를 지지하여, 과학의 영역 밖에 있고 ‘계시’라는 말로 적절히 묘사될 수 있는 지식의 원천이 있음을 인정해야만 하는 것일까? 이것은 논의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자기들에게 진리가 계시되었다고 믿는 사람들은, 우리가 감각의 대상들을 확신하는 것처럼 그것을 확신하다고 고백하기 때문이다. 몸소 신비한 깨달음을 경험한 사람을 상대로 논쟁을 벌이는 것은 소용없는 시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그 증언을 받아들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에 대해서는 할 말이 있을 수 있다. 우선, 이들의 증언은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검증될 수 없다. (중략) 문제는 신비주의자의 말로는 비전이 발생했다는 상황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똑같은 계시를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의견 : 앞에서 저자가 계속 주장해왔듯이 과학은 검증할 수 있는 시스템 그 자체가 과학인 것이다. 그런데 종교에서 말하는 계시나 환상 등의 신비적인 체험은 검증할 수가 없다. 또한 그렇다고 무조건적으로 믿지 않을 수도 없다. 그렇다면 정말 과학과 신비한 체험은 철저히 구분되어야 하는 분야인가?
159p 우선, 시간이 실제가 아니라는 말은 어떤 의미인가? 문자 그대로의 의미라면, “이 일은 저 일 전에 발생했다”와 같은 진술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텅 빈 소음에 지나지 않는다. 의견 : 신비주의자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모습 중 하나는 시간이 실제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시간이 실제가 아니라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인과법칙대로 사건이 벌어지지 않는다는 것이고, 어떤 사건에 대해서 인과법칙을 지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에게 신비한 체험들이 생기는 이유는 이 사람들은 스스로가 어떤 사건에 대해 온전히 지각하지 못한다고, 즉 불완전하다고 인정하기 때문에, 시간이 실제가 아닌 것과 같은 신비한 체험을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163p 신비주의는 하나의 사실이 아니라 하나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신비주의는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으며, 따라서 과학에 의해 긍정되거나 부정될 수 없다. 신비주의자들이 어떤 주장을 펴는 것은 그들이 감정적인 중요성과 과학적인 타당성을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이 이런 견해를 받아들일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이것이야말로 그들의 주장 가운데 일부를 인정하면서도 과학적 지성과 충돌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다. 의견 : 글쎄, 내 생각에는 신비주의에 대해 일부를 인정한 것 같지도 않다. ‘감정적인 중요성’이라는 표현을 신비주의자들이 흡족할만한 표현으로 바꿔준다면 조금은 나을 지도 모르겠다. 199p 외면적 행동 규칙에 기대지 않는 한 각지 방법은 ‘양심’에 대한 믿음인데, 이것은 특히 프로테스탄트 윤리학에서 중시됐다. 그들은 하느님이 각각의 인간의 마음에 옳고 그른 것을 계시하시므로, 죄를 피하고 싶다면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만 하면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이론에는 두 가지 난점이 있다. 우선 그 양심이라는 것이 사람을 가려 다르게 말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무의식 연구를 통해 드러난 바, 양심적인 감정의 원인은 사실은 세속적인 데 있었다. (중략) 내관을 통해 보면 이런 감정들은 신비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애초에 그런 감정들을 불러일으킨 상황을 더 이상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그런 감정들이 생겨난 원인을 마음 속 하나님의 목소리에서 찾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양심은 교육의 산물이다. 의견 : 내가 속한 종교에서도 ‘신앙적 양심’이라는 표현을 자주 쓰는데, 사실 나름 신앙을 갖고 있는 나도 이 표현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는 잘 모르겠다. 일단 저자의 주장은 대부분 동의한다. 확실히 양심은 사람 개개인 별로 다르게 들리는 것 같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말하는 그 양심이 순수한 것인지는 알 방법이 없다. 하지만 양심은 교육의 산물이라는 주장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고 생각한다. 양심의 목소리는 과거에 훈련받은 교육에 의해 영향 받을 수 있는 것은 맞지만 그 교육에 의해 내면화된 목소리를 통해 전지전능한 존재가 자신의 뜻을 전달할 수 있음도 생각해야 한다. 222p 혹자는 우리 시대의 박해가 과거와 달리, 신학적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이고 경제적이라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변명은 역사를 모르고 하는 소리다. 면죄부에 대한 루터의 공격은 교황에게 막대한 재정적 손실을 가져왔고, 헨리 8세의 반역은 교황에게서 헨리 3세 때부터 누려온 막대한 세입을 앗아갔다. 의견 : 정말 역사를 모르는 것은 저자인 것 같다. 예시로 든 역사 사건들이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동기들로 얼룩진 것은 맞지만 그러한 동기들 속에서 순수한 것들이 감춰지고, 보호되고, 지켜져 보존되어 왔을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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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지식인 가운데 가장 영향력 있고, 다양한 활동을 한 인물을 손꼽으라면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영국 캠브리지대학교에서 철학과 수리학을 공부한 후 철학, 과학, 사회학, 역사 등을 넘나들며 40여권의 저서를 남길정도로 자신의 진실을 시대의 진실과 융합시키고자 책을 쓰고 몸소 행동하는 인간이었다. 이렇게 다양한 저작활동으로 1950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또한 여성의 성해방 운동과 평화주의자로서 전쟁에 반대하다가 옥중 생활까지 했다.
이 책 <종교와 과학>은 1935년에 출간된 러셀의 대표작으로 , 특히 자신이 무신론자이자 과학주창자임을 주장했던 러셀의 종교론을 담고 있는 책이다. 이 책은 지난 4세기 동안 신학과 과학 사이에 벌어졌던 가장 주목할 만한 갈등의 양상들을 천문학, 진화론, 과학과 의학, 윤리학 등 여러 분야의 학문적 범주를 넘나들며 살펴보고 있다. 과학과 종교는 시대와 인물에 따라 다양한 관계를 맺어 왔다.역사적으로 이 둘의 관계를 살펴보면 고대 사회에서는 과학과 종교 간에 아무런 갈등이 없었다. 세계에 대한 모든 해석은 종교에 종속되기도 하였고, 과학이 종교의 이름으로 등장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과학이 종교로부터 독립하면서 종교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과학이 발달하면 자연히 종교는 사라질 것이라고 호언장담하였다. 이에 뒤질세라 종교는 과학을 배척하고 파문하였다. 종종 과학은 이단보다 더 무서운 종교의 적으로 지목되었다. 특히 지동설(地動說)과 진화론(進化論) 등은 경건한 종교인들에 큰 충격을 주었다.
저자는 중세 이후, 신학과 과학 사이에서 발생한 최초의 본격적인 갈등을 둘러싼 천문학적인 논쟁이었던 지동설과 천동설의 대립으로 보고 있다. 또한 코페르니쿠스부터 현대 의학까지 과학이 종교와의 관계속에서 어떻게 진보되어 왔는지를 서술하고 있다. 진화론에 관해서 살펴보면 ‘종의 기원’ 덕분에 1859년이 의미를 얻은 것이 아니라 1859년의 크고 많은 변화가 ‘종의 기원’을 낳았다고도 볼 수 있다. 다윈은 서른살 무렵 창조설을 깡그리 뒤엎는 진화의 비밀을 깨우쳤지만 비밀 공책에 적어뒀을 뿐 20년 동안 묻어뒀다고 전해진다. 이 일화는 당시 종교가 권위를 앞세워 과힉을 탄압했던 분위기를 잘 대변하고 있다.
“거짓과 더불어 제정신으로 사느니, 진실과 더불어 미치는 쪽을 택하고 싶다” 라는 말을 남긴 그는 20세기 영국을 대표하는 지성이라 일컬어진다. 러셀은 영국의 백작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무정부주의자, 좌파, 회의적 무신론자로 자처하면서 학문의 바다에서 빠져나와 정치적인 활동과 대중 계몽, 교육에 힘을 쏟았다. 반전운동, 핵무장 반대운동에서부터 쿠바 위기와 중국-인도 국경분쟁에도 적극 개입하였다. 그리고 산업사회에서 인간의 노동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통해 인간의 자유와 주체성 확립을 주장하기도 했다. 종교와 과학은 피상적으로 보기에 참으로 다른 점이 많다. 먼저 종교는 믿음, 신앙을 기초로 하나 과학은 사실을 기초로 한다. 또한 종교는 그 관심이 초월세계에 있으나 과학은 현실세계에 있는 등 여러 가지 다른 점이 존재한다. 이러한 연유로 사람들은 흔히 과학의 영역은 종교의 영역과 대립되며 종교와 과학은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나약함과 한계 때문에 종교가 탄생했다고 보는 것이 무신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생각일 것이다. 조금은 논외이지만 인간의 나약함과 한계 때문에, 끊임없이 행복을 찾고 또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한 어느 철학자가 생각난다. 러셀의 말처럼, 인간은 혼자서 삶을 살아가고 더 크게는 인류가 그 스스로 인류의 삶을 결정하고 발전해나가기에는 너무 나약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어디에 존재할 지 모르는, 알수 없는 미지의 후원자에 의지해 미래를 결정하는 종교보다는 과학과 이성, 지식에 대한 탐구에 의해 판단하는 것이 어쩌면 더 인간의 미래에 이로운것이 아닌가 하는 쪽으로 스스로 결론을 추측해 보기도 했다. 그저 종교와 신 또한 하나의 도덕적인 가치로써 시작되고 변질된 것은 아닐까 싶다. 인간이 지켜야 하는 도덕들에 대해서 강제하기 보다는 종교라는 이름으로 자연스럽게 스스로 지킬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도덕의 하나가 종교인데, 그것이 변질되어 궁극적으로 추구해야할 도덕적 가치가 오히려 훼손되고 종교가 더 중시되는 것으로 역사를 통해 변질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든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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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과학>은 기독교로 대표되어지는 종교와 과학의 첨예한 대립의 역사, 첨예한 대립이라는 말보단 과학의 입장에서는 힘겨운 투쟁의 역사였던 지난 400년의 역사를 담고있다. 러셀은 이 책을 통해서 종교가 그간 어떻게 세상을 지배해왔는지, 그리고 그 안에서 성경, 혹은 자신들이 정한 교리와 상반되는 학설을 담고 있는 과학을 어떻게 매몰시키려 노력했는지를 각각의 챕터를 통해서 설명하고 있다. 책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부터 시작하여 진화론과 의학, 천문학과 같은 과학 전반의 내용들, 그리고 그것이 성경의 말씀과 엇갈린 부분들을 집중 조명하면서 그러한 와중에 어떻게 과학이 종교를 서서히 억누르기 시작했는지, 과학의 수난이 어떻게 과학의 영광과 부활로 넘어가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은 종교와 과학의 갈등, 종교의 과학에 대한 박해를 다루고 있음에도 또한 과학의 승리의 역사, 장밋빛 미래의 역사를 담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 안에서 또다른 종교, 과학이라는 종교의 헤게모니를 발견한다.
러셀 역시 그 부분을 지적한다. 러셀은 결론에서 과학적 성향과 과학을 오용하는 사람들을 분리한다. 진리를 탐구하고, 진리를 알아가기 위해서 항상 연구하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일 줄 아는 진지한 자세를 과학적 성향이라고 한다면, 과학을 오용하는 사람들-정부와 대기업-은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또다른 지적자유를 배격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새로운 지적자유를 위해서는 과학을 오용하는 사람들 역시 그래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며 책을 마치고 있다. 그러나 역시 그러한 러셀 역시도 여전히 과학적 성향과 과학에 대한 환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아니 자유롭지 못하다기보다는 사람들에게 과학의 의미를 혼용하고 헷갈리게 하고 있다.
러셀에게 과학과 과학을 오용하는 사람들은 불완전할지 몰라도 과학적 성향은 완벽하다. 그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을 꼭 과학적 성향이라고 부를 수만은 없다. '과학'이란 무엇일까. 포괄적 의미의 과학이란 러셀이 말한 바로 그 과학적 성향일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들, 그 원리들로부터 추론되어지는 것들. 그리고 그 추론으로 파생되는 기계와 여러가지 공식들. 그리고 그것들을 파악하기 위해 우리들이 온전하고도 진중한 지적자유를 맘껏 향유하는 토론의 장을 포괄적 의미의 과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넓은 의미의 과학은 과학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새로운 것을 알아가는데 있어서 당연히 갖추어야 할 관용과 이해의 논리화다. 그리고 좁은 의미의 과학, 현재 우리가, 20세기 초반 러셀이 이 책을 쓸 때 우리가 말하는 과학이란 이러한 과학적 성향이 아니라, 자동차를 만들고 영화를 찍을 수 있게 하고 비행기를 만들고 잠수함을 만드는 기술, 테크놀로지가 과학의 전부다. 러셀에게 이 두가지는 달랐을 테지만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과학은 후자의 한가지다. 러셀이 말하고자 하는 종교와 과학은 종교로 대표되어지는 지적자유의 억압화된 형상과 과학으로 대표되어지는 온전한 지적자유의 향유로 가득한 형상의 대결과 400년을 두고 승리하고 있는 지적자유의 포만감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어쩌면 그것은 러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는 분명 정부와 대기업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지적자유의 업악세력을 걱정한다. 그러나 그 걱정은 그가 종교에 퍼부었던 냉소와 비난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 그는 그저 그것이 우려스럽다고 말한다. 어쩌면 1935년의 세상에서는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아직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이었으며 아무도 나치가 우생학이라는 '과학'의 이름으로 수백만의 유대인을 죽일줄 몰랐던 세상이다. 일본에 원자폭탄이 떨어질지 10년 후의 세상을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이란 없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이 책을 다르게 받아들여야 한다. 러셀의 세상에서는 과학적 성향이 아닌 과학이 아직은 그 도를 넘지 않았던 세상이다. 그저 이런 것들이 우려 정도로 그칠 수 있었던 세상이다. 하지만 70여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점점 과학은 그의 우려대로 새로운 종교의 자리를 차지했다. 그의 우려는 우려에서 그치지 않고 현실이 되었고 새로운 종교의 탄생을 낳았다. 우리가 상대방의 주장을 배격하는데 이제는 신이 필요하지 않다. 과학의 이름을 외치면 된다. 과학적 증거가 있는가. 이 말 한마디로 우리는 새로운 신의 권위를 만날 수 있다. 더이상 러셀이 그렇게 찬양했던 과학적 성향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아직도 대다수의 진실한 과학자들은 아직도 새로운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 과학적 성향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 과학은 애석하게도 과학자들의 것이 아니다. 중세 시대 신이 목자들의 것 뿐 아니라 정치권력의 것이기도 한 것을 넘어서, 과학은 민주화와 함께 정치권력 뿐 아니라 일반 대중들의 헤게모니에도 깊숙이 자리잡혔다.
이제는 정부와 대기업을 넘어 모든 사람들이 보이는 것만을 '믿는다'. 그리고 그 보이는 것만을 갈구한다. 더이상 인간에게 보이지 않는 것은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영혼과 윤리, 실재를 넘어선 존재는 알바가 아니다. 정부와 대기업은 더욱 쉬워졌다. 이제 그들은 시민들에게 보이는 것만 손에 주어주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인간은 종교의 속박속에서 수천년간 보이지 않는 것을 따라 족쇄를 채워왔다. 인간의 지적자유와 욕망은 '신'의 이름으로 권력에 의해 박해받아왔다. 그리고 지금도 인간은 똑같이 박해받고 있다. 다만 보이지 않는 것의 족쇄를 풀고 보이는 것의 족쇄를 채우고 있다. 그 신의 이름은 '과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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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영국의 지성인 러셀의 [종교와 과학]은 1935년작이다. 1차세계대전이 있고, 세계경제는 대공황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여전히 또다른 세계대전의 기운은 남아있었다. 러셀은 그 당시 현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과학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생활의 편리함도 있었지만 전쟁무기로 활용할 위험성도 있었다. 그만큼 과학은 양날의 칼인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