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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녀
이 책은
현재 미스터리 전문지 《미스테리아》 편집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김용언의, 문학소녀 전혜린을 변호하는 책이다.
먼저 저자에 대하여. 난 책을 읽으면서 저자가 남성인줄 알았다,
이름이 남성형인데다가, 《미스테리아》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다는 데에서 그런 –남성일 거라는 - 추론을 어느새 하고 있었던 게다.
또 그런 추론을 가능케 했던 것이 또 있다.
“이 중에는 내 또래 대부분의 남성들이라면 ...”(10쪽)라는 문장에서, 저자가 남성인줄 알았다.
그러다가 아리송한 대목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열다섯 살 때 전혜린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를 처음 접했다. 별로 친밀한 사이가 아니었던 같은 반 친구 하나가 느닷없이 “우리 언니가 무척 좋아하는 책인데 너한테도 어울릴 것 같아”라며 그 책을 건넸다.> (12-13쪽)
‘우리 언니’라 말하니, 당연히 말하는 사람은 여자일테고, ‘너한테 더 어울릴 것’이라 했으니, 그럼 저자는 여성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저자 후기에도, 이런 말이 등장한다.
<전혜린은 1965년에 숨을 거두었는데 50년이 넘도록 그의 유고집이 읽히는 것이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10대 혹은 20대 여성이 그 책을 통해 문학에 여성의 시선과 목소리에 입문하게 된 일이 무수히 반복되고 있다.> (229쪽)
‘내가 그랬던 것처럼’ 이 결론을 짓게 만들었다. 저자는 여성이다.
(참, 요즘에는 여성을 가리키는 지시 대명사 ‘그녀’대신 남성 지시 대명사인 ‘그’를 쓴다. 이제 ‘그’는 남성에 국한하지 않고, 여성 남성 모두를 총괄하는 대명사가 되었다. 위의 인용문에서도 ‘그의 유고집’이라 했다.)
그래서 맨 처음 남성이라고 추론하는데 근거가 되었던 문장, “이 중에는 내 또래 대부분의 남성들이라면 ...”(10쪽)을 나중에 다시 읽으니, ‘내 또래 남성’이란 말이 ‘건너편’을 바라보는 말이라는 것으로 읽히게 된다.
이 책의 내용은
먼저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하며, 이 글의 주요 대상이 되는 전혜린을 지칭하기도 하는 말, ‘문학소녀’의 의미를 새겨보자.
국립국어원 표준 국어 대사전에 등재된 ‘문학소녀’의 뜻은 “문학을 좋아하고 문학 작품의 창작에 뜻이 있는 소녀. 또는 문학적 분위기를 좋아하는 낭만적인 소녀‘다.(10쪽)
그런데 문제는 이 말이 어떤 식으로 들리는가, 즉 받아들여지는가에 있다.
‘여성의 미성숙함을 뜻하는 용어로 널리 쓰이기 때문이다.’ (10쪽)
저자는 저자의 독서 경험을 밝혀 놓는데, 전혜린에게 끌려 들어간 시절이 있었다는 것이다.
(전혜린의 글, 그가 번역한 책들을 읽으며) 나만 아는 무언가를 간직한 것 같은 뿌듯함에 사로잡히면서 약 40년의 시차를 두고 전혜린을 제멋대로 가깝게 여겼다. (14쪽)
저자의 눈에 맨 처음에는 전혜린에 대한 열광 혹은 열광의 기억에 대한 추억담이 읽혀오다가, 언젠가부터 추억담이 아니라 빈정거림이 들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16쪽)
고종석의 예를 들면서, “이들의 선고에 힘입어 이제 전혜린은 특정한 독서의 출발점의 공통 대명사가 아니라, 부잣집 철부지 문학소녀의 대명사로 더 자주 호명되는 것 같다."(16쪽)고 전혜린에 대한 세상의 평가가 달라졌음을 밝히고 있다.
그래서 여러 사람의 입을 통해 전혜린에 대한 평가가 (박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현황을 소개하고 있다.
‘그녀의 수필이나 일기, 편지가 지나치게 감상적이고 소녀적이다.’(80쪽)
또한 저자 그러한 비평에 약간은 동조하는 편이었는데, ‘하지만 몇 년이 지난 지금, 전혜린의 글을 재차 읽으며 생각이 바뀌었다.’ (79쪽)
그래서 이 책의 후반부는 전혜린을 변호하는 글로 채워지게 된다.
전혜린을 변호하기 위하여 저자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우리 역사에서 ‘소녀’라는 말이 언제 탄생했는지부터 추적한다. ‘소년’이라는 말은 보이는데, 우리 역사에 ‘소녀’는 소년‘에 대응하는 말로 보이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135쪽)
그 뒤에 소녀라는 말이 일반화 된 이후에도, 그녀들은 10대라는 특정 시기를 거치는 주체로서가 아니라 ‘여성-어머니가 되는 직전 단계’로 간주되었다. (143쪽)
소녀들에게 현모양처가 되기 위한 교양을 요구하되, 그 교양은 ‘세계 명작’ 혹은 ‘고전’ 으로 분류된 목록들과 그에 대한 가장 피상적인 지식 정도에 불과했다. (147쪽)
그래서 독서에의 몰두, 열렬한 환상은 오랜 세월동안 여성의 전유물처럼, ‘사랑과 낭만’에만 매달리며 현실이 아닌 꿈만을 좇는 물정 모르는 ‘미성숙한’ 여성의 태도인 것처럼 배제되어 왔다. 문학 고전을 읽으며 교양을 쌓는 소녀의 이상적인 모습이 점점 열광적인 도취 상태에 빠지는 철없는 ‘문학소녀’로 바뀌는 순간이다. (154쪽)
그런 역사의 변천과 더불어, 거기 문학소녀에 전혜린을 비롯한 ‘여류’ 작가들이 포함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저자의 《미스테리아》 편집장의 모습이 여실히 드러난다.
전혜린을 과연 그러한 ‘문학소녀’의 범주로 취급할 수 있는 것인가
그렇게 한다면, 무언가 잘 못 알거나, 그의 글을 잘 못 읽었던 것은 아닌가
저자는 전혜린의 글들, 전혜린에 관한 글들을 ‘수사관, 탐정’처럼 다시 읽으면서, 그의 진면목을 찾아내려고 시도한다.
내가 저자의 이력을, 성별을 확인하려고 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저자는 전혜린에 대한 그런 평가가 ‘여성’이기에 받은 편파적인 비판이라는 것이다. 만일 남성이라면 – 물론 이것도 논리의 비약일지도 모르지만 – 굳이 전혜린으로부터 ‘문학소녀’라는 잘못된 인식의 탈을 벗길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저자, 역시 문학소녀였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문학소녀. 나도, 당신도 전혜린이었다.”(227쪽)
전혜린의 정당한 평가를 위해 들이대는 평가의 메스, 칼날 또한 저자가 여성이기에 당당하게 보이는지도 모른다. 더하여 ‘문학소녀라는 말에 대한 부정적 인식도 떨쳐 내려는, 아니 떨쳐 낸 저자. 그래서 이 책은 그 두 가지 토끼를 한꺼번에 잡은 것이다.
다시, 전혜린
‘그녀의 수필이나 일기, 편지가 지나치게 감상적이고 소녀적이다.’라는 부분에 맞춰 비판할 것이 아니라(애초 그 일기의 독자는 나나 당신이 아니었다), 그녀가 쓴 수필과 그녀가 번역한 작품들이 한국문학계에, 혹은 동시대인 1960년- 70년대 청춘들의 정신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피는 게 더 맞을 것이다. (80 -81쪽)
나는 독일의 풍경을 그토록 손에 잡힐 듯이, 감각적으로 되살려내는 전혜린의 재능에 지금도 감탄한다. (221쪽)
언제나 서양의 문학을 경유해서만 자신의 내면적 풍경을 드러낼 수 있었다 하더라도, 그 현격한 거리감을 자신의 언어로 전유하며 타인을 공감시킬 수 있었다는 건, 분명 놀라운 재능이다. (222쪽)
사족 - 윤이상과 전혜린, 같은 시대 다른 아픔?
이 책을 읽기 전에, 윤이상의 생을 기록한 책 『윤이상, 상처받은 용』을 읽었다.
공교롭게도 두 인물 사이에 겹쳐지는 경력이 몇 가지 있다.
두 분 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났다는 것이고, 또한 독일 유학 경력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경력을 비교해보자.
윤이상 (1917, 9. 17 – 1995. 11. 3)
전혜린 (1934. 1. 1 – 1965. 1. 10)
독일 유학
윤이상 1957년 ~ 1959년 독일 서베르린 음악대학 졸업
전혜린 1955년 - 1959년 독일 뮨헨 대학교 졸업, 독문학
윤이상은 졸업 후 독일에 그대로 체류한 반면에 전혜린은 한국으로 귀국한다.
이 또한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윤이상은 독일에 체류하며 활동하는 중에 한국의 중앙정부부요원에 의해 납치되어 파란만장한 고난이 시작되고, 전혜린은 독일에 남지 못하고 한국으로 귀국하는 바람에 그의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다. 운명의 엇갈리는 순간이다.
전혜린은 항상 독일을 그리워했다.
그녀의 책,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저자의 성장기, 독일 유학 생활, 딸의 육아일기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중 뮌헨과 슈바빙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행간마다 스며들어 있다. 독일에 대한 사랑은 독일에서 유럽으로까지 확장되고 있다. (91쪽)
반면 윤이상은 한국에 귀국하지 못하게 되어, 오히려 고국을 그리워하는 신세가 된다.
『윤이상, 상처받은 용』과 이 책 『문학소녀』를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대비하게 된 두 인물, 인생이란 참으로 묘하고 묘하다, 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게 된다.
다시, 이 책은
전혜린을 다시 알게 된다. 책 몇 권을 읽었기에, 모르던 사람이 아니었지만, 나도 어쩌면 그를 단순히 문학소녀로 치부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편견(?)을 고치게 된 것이 이 책을 읽은 가장 큰 보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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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사 소년소녀 세계명작동화 50권 전집, 에이브 문고, 에이스 문고, 파름문고, 할리퀸 로맨스, 그리고 전혜린... 한때 읽었던 책의 목록을 보면서, 저자와 같은 세대라는 걸 알았습니다. 책을 즐겨 읽는 십대 여자아이에게 흔히 하던 말, '문학 소녀'... 사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문학 소녀'라는 말 속에 여성을 폄하하는 의미가 있을 거라는 걸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제 기준으로는 '문학 소녀'는 어디까지 십대 사춘기 시절에 국한된 말이기 때문에. 더군다나 전혜린, 그녀의 책을 몇 권 읽은 적이 있지만, 저자와는 달리 크게 끌리진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냥 그 시절 또래 친구들과 같이 읽었던 책이라는 정도의 기억만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보면서 알게 됐습니다. 전혜린에 대한 비뚤어진 평가들... 이를테면 '작가'라고 부르기 저어된다면서, '수필가'로만 부르는 것도, 혹은 '번역 말고는 창작을 하지 못했다'면서 '문인'의 카테고리에 넣기 힘들다는 등등. 비단 전혜린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문학계의 고질적인 여성 폄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 책은 한국 여성 작가들에 대한 남성 문단의 편협한 시각에 주목합니다. 그들이 '감상적이다', '사변적이다', 더 나아가 '소녀 문단'이라며 비아냥거릴 때, '문학소녀'는 미성숙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표적인 인물로 전혜린이 등장합니다. 그녀는 천재 작가인가, 아니면 미숙한 번역가인가. <문학소녀>는 전혜린으로부터 시작하여 우리나라 여성작가의 수난사를 이야기합니다. 설마 이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소위 글로써 예술을 한다는 문단이 이토록 고리타분하게 여성을 프레임에 가두었다니 말입니다. 박화성이 1969년에 쓴 글 「한국 작가의 사회적 지위의 변천」에 등장하는 에피소드를 보면, "여자의 이름과 흡사한 박용숙이란느 작가가 쓴 군인을 소재로 한 전쟁소설이 발표되었는데, .... 여성의 지나친 섬세 감각은 섬세하기 때문에 오히려 리얼리티를 혼탁하게 하고 있으며 여기서 여류작가들이 지니는 한계성이 있는 것이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경우는 여성적인 이름을 가진 남성 작가임이 밝혀지면서 일종의 해프닝으로 넘어갔다고 하나, 철저하게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비판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문학 소녀'로 대변되는 섬세한 감수성이 문제가 아니라 '여성'이기 때문에 문제였던 것입니다. 전혜린을 동경하는 문학 소녀는 아니었지만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한국의 여성 작가들이 당당하게 인정받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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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흔히 감수성 예민한 사춘기 시절을 문학소년 또는 문학소녀에 비유하는 걸 좋아한다. 사실 문학소년이란 말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그저 문학소녀의 대응어로 훗날 이 소년이 자라 청년이 되어서도 여전히 문학에 뜻을 두었다면 문학청년 줄여서 ‘문청’이란 말로 불러준다. 그리고 이는 작가지망생의 또 다른 말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문학소녀란 무엇인가? 말 그대로 문학을 좋아하는 소녀다. 일반인들이 그 말을 사용할 땐 시나 소설을 좋아하고 작가가 되기를 꿈꿨다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이들이 그 꿈을 가지고 성인이 되어 작가가 된다면 여류작가가 될 것이지만 이루지 못한다면 여전히 문학소녀가 될 것이다.
그런데 이 ‘여류작가’란 말도 일제 강점기 몇 되지도 않았을 여성 작가를 비하해서 썼던 말이다. 게다가 페미니즘에 입각해 작가를 굳이 남자와 여자로 나눠 남자는 그냥 작가라고 부르면서 여자는 굳이 여류란 말을 붙여 차별을 두고, 여자는 결코 일류가 될 수 없음을 조장한다는 반발론을 제기해 폐기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을 보니 새삼 언어의 음모가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여류작가란 말은 폐기했지만 문학소녀란 말은 여전히 살아남아서 우리의 의식을 떠돌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을 보면 문학소녀란 말은 부정적인 말로 사용되고 있으며, 그렇다면 아직도 여성작가에게 덧씌워진 부정적인 의미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그것을 저자는 문학소녀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전혜린에서 찾고자 했다.
사실 사춘기 시절 자신이 문학소녀였다면 전혜린의 책 한 권 정도는 읽어줬다는 말로, 그만큼 전혜린은 당대뿐 아니라 모든 여성 문학인의 롤모델이자 아이콘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그녀는 어느 날 홀연히 세상을 떠나 버렸으니 거의 전설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그녀의 책은 주로 일기나 단상을 자유롭게 쓰며 늘 자유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
그렇다면 전혜린은 누구인가 전혜린은 한마디로 고관대작의 영애 소리를 들을만한 집에서 태어났다. 저자는 그녀를 이해하기 위해 그녀의 아버지 전봉덕이 어떤 사람인지를 비교적 자세히 설명해 놓고 있다. 그는 경성제국대학을 나온 엘리트로서 해방 당시 경시(총경) 직위까지 올랐고, 나중에 반민특위로 헌병사령부의 친일파의 도피처란 비난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다른 것은 다 폐일언하고(책 ‘전혜린이란 예외적 존재’란 곳을 읽어 보라) 딸에 대한 아버지 사랑이 대단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3, 4세 때부터 한글과 일본어 책을 읽을 수 있도록 가르쳐 주었고, 딸에겐 심부름이나 주방 일 같은 건 절대로 시키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것을 보면 그녀가 어떻게 자랐을지 짐작이 간다. 당시 일본은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나라였고, 아버지가 친일파로 책 읽는 것을 직접 가르쳐 줄 정도라니 그녀는 자연스럽게 서양을 동경했을 것이다. 게다가 지식욕이 대단한 노력파이기도 하지만 겉으론 모던 걸처럼 자유분방 했다. 문학소녀가 어떤 캐릭터인지를 안다면 ‘문학소녀=전혜린’이란 등식도 설득이 가능할 것 같다.
그런데 전혜린은 그토록 문학을 사랑하고 갈망했음에도 소설이나 시를 쓰지 않았다. 전혜린이 자신의 이름으로 낸 책은 오로지 에세이였다. 그나마 그것도 그녀의 사후 그녀가 알던 지인을 통해 엮어낸 것이다. 그런 것을 보면 그녀는 살아생전 책을 낼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전혜린은 오로지 번역가로만 존재했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이것은 당시의 평자들로부터 그녀를 저평가하기 좋은 것으로 작용한다.
오늘 날의 에세이는 어느 정도 인문학적 교양과 격식을 갖춘 것도 많지만, 당시의 에세이 즉 수필이라는 것은 ‘마음가는대로’ 가볍게 쓴 ‘이지 고잉(easy-going)’ 즉 만필이었다. 그러니까 수필은 시나 소설 보다 못한 하위 문학으로 취급 받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전혜린은 문학소녀이면서 만필이나 쓰는 어느 팔자 좋은 모던걸 또는 유한마담처럼 평가되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저자가 주장하는 ‘읽고 쓰는 여자들의 흑역사’라는 것이다.
이것을 또 어디까지 낮췄냐면, 문학소녀의 일탈 행위를 지적하며 “정신적 환상증”으로 치부하고, 나아가 ’문학소녀의 자살‘로까지 확대해석하며 ”문화발전에 따른 향락욕과 태타욕(怠惰欲)과 사치욕에 기인한 “좋지 못한 사상의 결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154p). 이렇게 보는 관점은 여성은 “남자보다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상적이고 감정적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전혜린을 비롯한 당대 엘리트 여성을 가리켜 ‘불란서 시집을 읽는 고운 손’이라는 형용구를 쓰기도 했다. 언뜻 들으면 여성을 존경하는 말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이것은 여자를 경멸하여 이른 말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그 손은 전체 국민의 1% 내외의 특권 지배층의 손이라며 우리의 적으로 간주한다. 또한 불란서 시집을 읽으며 허황된 꿈에 잠긴 소녀야 말로 ‘일하지 않는 자’라며 비난하고, 문학소녀는 “공공의 적”이자 “국가의 발전을 가로막는 적폐”란 말도 서슴지 않는다. 게다가 우리가 잘 아는 고종석이나 김화영 같은 지식인이 한마디씩 거들었다. 요즘 같이 말 한마디 잘못하면 자신의 위신을 보장 받을 수 없는 파급력이 강한 세상에서 아직도 여성 비하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남자들이 글을 쓰고 문학을 하는 건 고양된 정신적 행위이거나 생존이 달린 문제로 진지하게 봐주면서, 왜 똑같은 행위를 여성이 하면 그건 일탈이거나 아니면 잉여 행위로 보는지 모르겠다. 물론 전혜린이 문학 위해 죽은 건 아니지만(그녀의 정확한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문학을 하다 죽었다.
그렇게 남자들은 전혜린을 저평가하기를 주저하지 않지만, 앞서 말했던 것처럼 우리 여성들이 볼 때 전혜린은 확실히 앞서간 존재임에 틀림없다. 그녀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독일 유학생이자 독일 문학자요 번역가다. 그녀가 살아생전 독일 문학을 열심히 번역하지 않았다면 헤르만 헷세나 루이제 린저 같은 작가의 작품은 우리가 알았던 때보다 훨씬 늦게 접했을 지도 모른다. 한국의 평자들이 그런 싸구려 저평가를 늘어놓고 있을 때, 그녀가 독일에서 얼마나 생활에 쪼들리며 치열하게 살았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녀에게 그런 평가를 하는 건 확실히 그녀를 모독하는 거나 다름없다.
전혜린이 세상을 떠난 지 50년이 넘었다. 그동안 여성의 문학 환경이 얼마나 좋아졌는지 모르겠다. 아직도 이 나라의 정치가와 문학권력자들의 생각이 바뀌지 않는 이상 우리나라 문학 발전의 길은 멀어 보인다.
일례로 193, 40년대 우리나라 여성의 문맹률은 굉장히 높은 수준이었다. 그런데 비해 일본 여성들은 그때 문맹을 깨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런데 비해 우리나라는 5, 60년대가 돼서야 비로소 그것이 낮아지기 시작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문학이 여성에게 전파되는 속도가 일본 보다 늦는다는 말이기도 하니, 우리나라 문학은 전반적으로 일본 보다 훨씬 뒤져 있다는 말도 될 것이다. 일본도 문학소녀에 대한 인식이 어떤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가 여성 문학인에 대한 저평가를 쏟아낼 때 일본의 여성 문학은 저만큼 앞서갔다는 얘기다.
사실 이 책은 건조하고 딱딱한 느낌이어서 마치 한편의 논문을 읽는 것 같다. 또한 여성 문학의 앞으로의 전망은 뚜렷이 제시하지 않고 있어 그 점은 좀 아쉽긴 하다. 그러나 적지 않은 우리나라 문학소녀들도 이런 읽고 쓰는 여자의 흑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몰랐을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한번쯤 읽어 볼만하다고 생각한다. 이젠 이 문학소녀란 말도 여류작가란 말과 함께 사라져야할 말은 아닐까 싶다. 여성문학도 그것도 내키지 않으면 그냥 문학도라고 해야 옳지 않을까? 여성과 남성을 구분하는 건 필요하지만 비교하는 건 옳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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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해지자 전혜린의 '드라마 퀸'으로서의 기질, 문학과 예술에 현혹되어 자신이 그 일부인 것처럼 착각하는 '문학소녀'로서의 기질 앞에서 얼굴이 달아오르지 않을 사람은 없다. 스스로를 '공부 안 해도 성적 잘 나오는 천재 소녀'로 포장하는 기술이라든가, 공부도 뛰어나게 잘했지만 그 이외의 것, 즉 다른 모범생들은 꿈도 꾸지 못할 것들을 서슴없이 해치울 수 있는 '비범한 천재 소녀'로 포장하는 기술. '비범해야 한다'라는 열망은 타인의 시선을 전제한 포즈로 가능해진다는 진리를 그녀는 일찌감치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나도 전혜린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를 좋아했던 문학소녀였다. 학창시절 교실 한구석에 펼쳐 세운 교과서 안에 책을 숨겨놓고 읽었던 기억이 있는 당신이라면, 이 책을 만날 수밖에 없으리라. 전혜린을 경유해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읽기와 쓰기가 폄훼되어 온 기나긴 역사를 파헤치는 책이라니, 읽기도 전부터 가슴 한 켠이 먹먹해졌다. '책 읽는 여자의 흑역사' 의 대명사쯤으로 여겨지는 전혜린에 대해, 그리고 그 전혜린에 열광했던 세대의 기억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작품은 얼핏 전혜린 평전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처음부터 끝까지, 전혜린으로 시작해 전혜린으로 마무리가 되고 있긴 하지만, 그것을 넘어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를 재구성하며 '전혜린'으로 상징되는 그것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열다섯 살의 나는 그녀를 동경했고, 전혜린보다 훨씬 더 나이를 먹은 지금의 나는 그녀를 이해한다. 적어도 동감할 수 있다. 누구에게나 그런 시절은 있었다. 이기에 밝은 세속적 약삭빠름을 경멸하고,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남들과 다른 인간임을 보여주겠노라 결심하고, "그렇게 오랫동안 만나지 않고 있었음에도 그녀가 보낸 설명 없는 그림이나 단 한 줄의 시구만으로도 나는 그녀의 심경, 그녀가 처한 상황을 완전히 이해했고 그녀가 내게 보낸 의미를 알았을 뿐 아니라, 또한 그녀가 내게 하고 싶은 말을" 느낄 수 있는 영혼의 벗을 갈망한 시절.
아무나 쉽게 해외여행을 다닐 수 없던 시절, 독일로 유학 간 '천재' 전혜린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알고 있지만, 아버지의 보호막에서 벗어나 아내이자 어머니로서의 삶을 너무 빨리 맞닥뜨린 전혜린의 초조와 불안에 대해서는 왜 아무도 언급하지 않았던 걸까. 저자는 전혜린에 대해 그녀를 비판적으로 조롱하는 시각, '부잣집 딸내미의 교양 있는-공주-코스프레'라는 시각이 교정되어야만 하는 시대적, 공간적 배경에 대해 낱낱이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녀의 '사춘기 소녀스러움'에 대한 편견에 대해서도, 전혜린의 수많은 자전적 글쓰기가 수필이라는 형식때문에 폄하되고 천대받는 것에 대해서도 말한다. 그리고 전혜린의 수필에 담긴 과도한 여성성과 소녀적 감성, 그 글들이 문학소녀의 유치함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평가에 대해서도 성인 여성 작가에게 '소녀적' 혹은 '문학소녀'라는 말이 붙을 때의 함의에 대해서도 말한다. 글을 읽는 내내 뭔가 속 시원한 느낌, 내가 그 동안 하고 싶었던 마음들을 고스란히 글로 표현해준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하여 전혜린의 삶과 평가에 대한 이야기가 여류 작가 수난사에까지 이르게 되면, 그야말로 전혜린이라는 대상을 넘어 '읽고 쓰는 여자들을 위한 변호'라는 책의 부제로 완벽하게 도달한다. 당시 소녀들의 독서와 글쓰기가 많은 경우 남성들의 시선을 만족시킬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기에 겪어야 했던 그것들과 문학소녀를 얕잡아 보는 시선이 결국 여성-독자-작가를 업신여기는 시선으로 이어져야 했던 그 당시의 모순을 짚어내는 동안, 21세기를 살고 있는 나 조차도 분노가 마구 일었다. 대체 왜, 여성들은, 단지 책을 읽고 쓰는 걸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그 긴 세월 동안 그런 수난을 겪어야 했단 말인가. 나도 저자처럼 전혜린을 어린 시절에 만났었기 때문에, 당시에 그녀를 완전히 이해했다고는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녀처럼 나도 전혜린의 삶을, 글을 동경했었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야 비로소 전혜린을 '이해'하게 된 것 같다. 그러했기에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은 내 심금을 울린다. 문학소녀. 나도, 당신도 전혜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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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감상에 젖어 문학소녀를 꿈꾸던 때가 있었지 문학소년, 문학소녀 이렇게 성을 지칭하는 단어를 쓸 때면 우리 딸이 성을내며 한마디 붙일것이다. ‘그런 단어 자체가 있다는 것이 남녀차별이라고' 이런 단어가 더 이상 필요없는 세상, 페미니즘이라는 단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 바로 진정한 양성평등이라는 딸 아이의 주장이 생각나는 이 책의 제목은 “문학소녀”이며, 부제가 “전혜린, 그리고 읽고 쓰는 여자들을 위한 변호”이다 1934년생인 전혜린 그녀가 1965년에 생을 마감하기까지 집필의 배경의 된 삶을 이야기하며 그 시대 여성 집필가들의 평가, 사회의 시선을 날카롭게 분석한책이다. 일제 강점기를 거쳐 광복이후 6.25까지 시대를 앞서가는 신지식은 계속 있었다. 대부분 가난하고 궁핍한 시절을 보내면서 민족주의적사고와 시대를 반영한 소설, 시 등을 써온 문학소년들이 많이 있었는데 전혜린은 그와는 좀 동떨어진 삶을 살았다. 국가의 운명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아버지의 딸로 자란 전혜린은 부유하고 똑똑한 교양과 처세와 입신을 할 수 있는 수신에 능했다 그래서 국가의 운명과는 두 발자국 떨어진 채 성장하면서 불란서 시집을 읽는 고사리 손의 아가씨로 예의 그 시대에서 볼 수 없는 “새로운 유형의 인간-여성”으로 탄생되었던 것이다. 한국사람은 누구나 갖고 있다는 고향에 대한 향수에 대해서도 그녀는 “나에게는 고향이 없다. 아스팔트 킨트(아스팔트만 보고 자란 도회의 고향없는 아이들)라는 단어는 나에게도 쓰일 수 있는 명칭이다”라고 했다. 현실감 있으면서도 이 특별한 고향에 대한 정의가 지금 시대의 정의와 맞다는 생각이 든다. 천재소녀의 타이틀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그녀에 대해 이 책의 작가는 전혜린의 일생은 사후, 그녀의 가족과 지인으로부터 ’신화화‘를 염두해 두고 연출한 텍스트라고 말한다. 이제는 연출이 아닌 올바른 평가 속에서 전혜린을 다시 봐야 한다고 이 책의 작가는 이야기한다 시대상을 반영하는 철학적 근거가 없다느니, 소설을 쓰지 않아 진정한 작가 아니라니 하면서 전혜린을 폄하했던 시선에도 불구하고 우리는(우리 여자들은) 꾸준히 전혜린을 통해 여성의 시선과 목소리로 문학에 입문해왔다 절대로 평범해져서는 안된다는 의식적인 항거, 일상의 피로와 고독. 권태와 공허, 그리고 알 수 없는 열등감 그녀의 수필속에 담겨진 이 분위기에 매료되서 ’저 사람이 바로 나야‘ 라는 공감으로 우리 어머니, 언니들로부터 전혜린은 읽혀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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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사전적 의미의 문학소녀란 '문학을 좋아하고 문학 작품의 창작에 뜻이 있는 소녀 또는 문학적 분위기를 좋아하는 낭만적인 소녀'를 말한다. 학창시절에 문예반 활동을 하면서 문학소녀를 꿈꾸던 학생들도 많았다. 하지만 이 책에서 말하는 문학소녀란 좋은 의미보단 나쁜 뜻으로 표현된다. 문학소녀란 말이 역사의식이 없고 현실성이 결여되어있고 감상에 치우쳐 있는 등 폄하된 단어로 사용된다. 관연 그럴까? 이 책은 문학소녀란 말이 폄하된 시대의 중심에 살았던 전혜린에 대한 이야기와 여류 작가 수난사를 볼 수 있는 책이었다. 전혜린의 성장과정을 살펴보면 그녀는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녀의 아버지인 전봉덕은 일제 강점기의 경찰 간부이자 군인, 변호사이다. 이런 아버지를 둔 덕분에 그녀는 독일로 유학을 가게 된다. 독일 유학 시절에 결혼을 하고 딸을 낳게 되지만 고국에서 보내주는 생활비는 빠듯하여 생활고를 겪게 된다. 같은 유학생이었던 남편을 뒷바라지하며 번역과 집필 등으로 생계를 이어가며 살았던 당시 여성 지식인이 겪어야만 했던 고충을 알 수 있다. 전혜린은 제1기 여류 문인과 제2기 여류 문인이 겪은 호기심과 조롱과 모욕적인 숭배를 모두 경험한 인물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란 저자의 생각에 공감이 되었다. 그 시절의 소녀들의 독서와 글쓰기는 훈육과 계몽의 주체, 특히 남성들의 시선을 만족시킬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기에 더 폄하되었다고 생각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불란서 시집을 읽는 고운 손”이라고 그녀를 표현했다. 그녀가 1960년대 한국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현실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녀의 자전적인 에세이집인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젊은이들과 문학소녀들에게 문학적 감수성을 심어주었다. 또한 <데미안>과 <생의 한가운데>는 그녀가 번역한 대표적인 번역작이다. 남아선호사상과 가부장적인 생각이 강했던 시대와 식민지 시절에 부유한 엘리트 집안에서 자라고 외국에서 교육받은 그녀를 그동안 너무 쉽게 철부지 문학소녀라고 폄하하지는 않았는가? 이 책을 통해서 책 읽는 여자들의 흑역사를 돌아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고, 저자의 말처럼 전혜린은 그 시절 젊은 사람들에게 더 큰 세상을 보여주고 감수성을 불러일으켰던 수필가이자 번역가로 재조명되어야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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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두가지로 요약된다. 문학소녀와 전혜린 . 두 가지의 의미는 해방 전후 여류문학의 현주소를 알게 해 주며,'문학 소녀'의
의미 속에 감춰진 주홍글씨를 깨닫게 된다. 전혜린이 살았던 1950년대~ 1960년대 전후 그 당시 문학 소녀는 '미성숙한',
'아마추어적인 ' 뉘앙스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으며 '문학청년'과는 상반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전혜린은 그런 사회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지만, 모순된 사회를 스스로 이겨내지 못하고 스러져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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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또한 문학 소녀이고 싶었다. 어린이 동화에서 벗어나 "문학"이라는 것을 접하게 된 이후로 사춘기의 감성과 함께 그 문학의 숲 안에서 살았다. 시를 필사하고 문학 노트를 만들고 작가에서 작가로 이어지며 나름 깊이있는 독서를 위해 애쓰던 때도 있었다. 그 독서가 계속 이어지진 못했다. 고등학생이 되며 손을 놓았다가 대학생이 되어서는 내세우기 위한 독서나 재미를 위한 독서를 했던 것 같다. 내게는 문학 소녀라는 말이 어리거나 유치한, 겉멋 든...이라는 속뜻을 가지고 있지 않다. 정말 순수하게 문학을 사랑하고 흠뻑 취해 깊이 있는 독서를 하고 글을 쓰는...이라는 의미다. 그래서 <문학소녀>라는 책을 읽으며 적잖이 당황했다. 한때는 '문학소녀'라는 말에 어떤 속뜻이 있었다는 사실이 말이다.
전혜린이라는 이름을 언제부터 알았을까 ...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라는 책과 전혜린이라는 작가에 대한 무조건적인 그림움 같은 것을 갖고 살았다. 어디선가 이름을 듣고, 책에 대한 소개를 듣고 문학소녀라면 한 번쯤 읽어봐야 할 책이라고 생각했는지, 여성들을 대표하는 작가이자 불운한 삶과 남성들에 반항하는 듯한 이미지에 끌렸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그렇게만 생각했던 작가와 책, 이미지에 대해 많은 것들이 뒤집어졌다. 여류 작가가 전무하던 시절, 1세대 여성 작가로서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그녀가 바라던 것과 얼마나 다른 이미지로 덧씌워졌는지 등. <문학소녀>는 전혜린을 비롯한 그 시대 읽고 쓰는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저자 김용언은 전혜린의 삶을 가급적 객관적으로 서술하려고 한다. 굉장히 많은 자료를 찾고 전혜린의 흔적을 쫓아 그녀가 어떤 가정에서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글을 쓰려고 했는지 말이다. 가정 환경과 나라의 상황, 결혼 후 가난한 삶과 어린 시절 맛보았던 물질적 풍요, 지적 욕구와 현실 속 삶 속에서 전혜린은 너무나 극과 극인 현실과 이상 속에 힘들어했다. 그녀가 쓴 책 두 권을 통해 드러난 그녀의 사유 또한 온전히 그녀의 생각을 솔직히 드러낸다고 볼 수 없기에 저자의 이 작업은 무턱대고 선망하던 작가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하는 계기이자 덧씌워진 굴레를 벗기고 바라볼 수 있도록 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결국 소녀들의 독서와 글쓰기는 훈육과 계몽의 주체, 많은 경우 '남성'들의 시선을 만족시킬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어떤 소녀는 실존주의 문학을 '잘못' 이해해서 자살을 기도했고, 어떤 소녀는 '소녀답지 않은 현실 인식을 글로 썼기 때문에 옳지 않고, 또 어떤 소녀는 과도한 감상을 글로 쓰는 바람에 '열등하게'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어디까지나 공인된 권장 도서를 읽되 지나치게 빠져들지 않고 교양으로서의 지식으로만 습득해야 했고, 그럼으로써 '서녀다운' 순수성은 간직하며 남성-어른들의 귀여움을 받을 수 있어야 하는, 대단히 복잡한 과제가 제시된 것이다."...157p
남성들의 수많은 질책과 비난이 있어도 꿋꿋이 그들만의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그녀들이 존재했기에 지금의 우리들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온전히 평등하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그러므로 더 나은 세상을 우리 딸들에게 전해주기 위해 더 많은 문학소녀들을 지지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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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만으로도 문학에 대한 열정이 피어나는것 같은 느낌이 물씬 풍겨난다. 전혜린, 일제강점기 치하의 친일파 아버지를 둔 상황에 그나마 조선의 다른 1905년경 일본의 문맹율은 10.5% 였다고, 1955년 대한민국의 교육수혜자는 90% 전혜린의 삶이 보여주는 의미가 제대로 꽃피워 지기도 전에 퇴색시키려는 의도들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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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혜린이란 이름은 간혹 들어봤지만 그녀의 작품은 아직 읽어보질 못했다 이책을 통해서 전혜린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자세히 알게 되었다. 전혜린은 1934년 평안남도 순천에서 조선총독부 고급관리의 총애 받는 딸로 태어난다, 어릴때부터 아버지의 각별한 사랑으로 집한의 허드렛일 따위는 전혀 시키지 않고 글을 읽고 쓰는 일에만 전념할수 있었던 그녀는 독일 문헨으로 유학길에 오르는 조선에서도 여성으로서 선구자라고 할수 있는 유학생이 된다. 그녀의 화려한 이력은 그녀를 곱게 보지 않게 하는 이력들이다, 이책을 읽으면서 당시 글을 쓰고 작품활동을 하는 여성에 대한 비꼬는 시선과 배척하려는 풍조를 보면서 얼마나 어려운 길이였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문학소녀라는 제목을 처음 접했을때는 예쁜말 정도로 생각했는데 문학소녀 속에 포함된 여성이라는 성을 가지고 있는 작가들을 폄훼하는 말뜻을 이해 하자 화가 나기 시작했다. 여자라서 작품의 질이 낮다는 평가를 누가 내릴수 있을까마는 그 당시 풍조는 여자이기에 천대 받고 인정해 주지 않는 분위기였다는것을 알수 있었다 이 책속에는 여러가지 고증적인 작품들이 많이 포함되어있어서 사실적으로 그 당시를 이해하고 그당시의 여성문인들의 어려운을 알수 있었다. 고어체의 문장이 많아서 조금 이해하는 데 힘든부분도 있었지만 깊이 이해 되고 감정적으로 동조가 되는 문장들이 많아서 재미있게 읽을수 있는 책이였다 전혜린의 영향을 받은 후세의 작가들이 많고 그녀의 작품을 그녀가 세상을 떠난지 5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회자 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녀의 대단한 행적을 다시 돌아보고픈 마음이 든다 그녀의 작품을 꼭 읽어보고 싶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