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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긋남’은 개인의 실착이기 이전에 세속의 구조입니다. 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어긋남은 의도와 언어의 힘으로 일껏 이룩한 성취의 그늘과 같아서 구성적으로 끈질기다고 합니다. 인문학은 곧 어긋남에 대한 이론적 관심이며, 더불어 그 상처와 어리석음을 다루는 실천의 노동이라는 것이죠. 저자는 이 노동을 일러 ‘어긋냄’이라고 합니다. 이 책을 통해 인문학을 찾는 이들이 어리석게 어긋나는 세속을 부디 슬기롭게 어긋 낼 수 있도록 도움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어긋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운명이지만, 어긋내지 못하는 것은 당신 혼자만의 타락이라는 말이 나에겐 숙제로 남겨집니다.
한편 어긋남은 수동적인 의미로, 어긋냄은 능동적인 면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밀란 쿤데라의 『농담』(1967)은 이 어긋남의 문학적 공간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착색함으로써 그 세속성을 더 명료하게 드러낸다. 혹은 명료하기에 덜 세속적인 뉘앙스를 풍기긴 하지만, 거꾸로 그것은 세속의 체질과 구조를 매우 전형적으로 밝힌다. 이데올로기는 삶과 체계 사이의 불가피한 어긋남에 기생하면서도, 늘 그 일치를 선전하다.” 쿤데라에 따르면, 소설은 그 무엇보다도 작가 개인의 심리를 드러내는 것이나 고백이 아니라고 합니다. 오히려 그것은 덫이 된 세계라는 ‘밖’속에서 인간의 삶을 탐구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저자는 이 ‘덫이 된 세계’를 ‘세속’이라고 부르고 싶답니다. 이 세속은 우선 ‘어긋남의 체계’를 가리킨다고 하는데, 문학은 농담이 아니지만 농담은 문학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농담이 문학이 될 가능성은, 로티(R. Rorty)의 용어를 빌리면 재서술(再敍述, rerdescription)과 관련된다고 합니다. 소설은 무토대(농담)의 진지함(재서술이라는 ‘노역’)으로 구성된 가설무대와 같다는군요. 가령 사랑이 있거나 혹은 없는 것(either ~or)이 아니라 있으면서 없는 것(both~and)이라는 사실은 사랑이라는 그 진부한 통속을 다시 소설적 소재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 '있으면서 없고, 없으면서 있는’ 그 자기 가치적 구조는 재서술의 쉼 없는 노동으로만 유지되는 환상인 것이다. 혹은 그 누구의 말처럼, 연인이라는 주체는 쾌락의 외상적 대상(das Ding)을 빈 중심에 놓은 채 ‘있으면서 없고, 없으면서 있는' 그 거리두기의 곡예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환상과 증상의 구조야말로 재서술의 소설적 공간을 예시하기에 안성맞춤이다.”
“문학의 시공간이 세속의 대표적인 표상이라면, 물론 그 구조는 어긋남이다. 샤일록(베니스의 상인)의 의도는 자가당착의 결말로 어긋나며. 고리오 영감(고리오 영감)의 사랑도 비극적으로 어긋나고, 헨리 히긴즈(피그말리온)의 사랑은 아라이자의 선택과 어긋난다. 개츠비(위대한 개츠비)의 ‘생각’속에서 검질기게 부활한 사랑은 디지의 차가운 허영에 밀려 어긋나고, 뫼르소(이방인)의 ‘무의도의 의도’는 체계의 의도에 의해 회화적으로 어긋나며, K(성)라는 존재는 차라리 어긋남 그 자체다.” 철학전공인 저자 김영민 교수는 이 책이 25권 째 단행본이라고 합니다. 문학을 통해 인문학적, 철학적 사유를 이끌어냄이 좋습니다. 철학적 사유의 길을 터준다는 생각이 듭니다. 간결한 문체 속에 그 사유의 물이 고여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