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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국가와 사회민주주의를 지향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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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토니 주트는 대서양 양안, 즉 미국의 젊은이들을 위해 쓴 책이라고 서문에서 밝히나 미국의 젊은이뿐만 아니라 현재 이 땅에 사는 젊은이들도 귀담아들어야 할 이야기들이 담겨 있었다. 그는 미국과 영국, 유럽의 근현대사에서 일어났던 일들과 경제정책, 국가 정책, 사회운동 등을 연관지으면서 현재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방향을 제시한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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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토니 주트는 대서양 양안, 즉 미국의 젊은이들을 위해 쓴 책이라고 서문에서 밝히나 미국의 젊은이뿐만 아니라 현재 이 땅에 사는 젊은이들도 귀담아들어야 할 이야기들이 담겨 있었다. 그는 미국과 영국, 유럽의 근현대사에서 일어났던 일들과 경제정책, 국가 정책, 사회운동 등을 연관지으면서 현재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방향을 제시한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시장경제에 대한 국가의 규제와 탈규제는 과거에도 계속 번갈아 나타났다고 한다. 시장경제의 자율성을 믿고 풀어주고서 황금시대가 왔다고 외친 바로 다음에 경제 대공황이 일어났고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 복지국가 정책을 시도해서 어느 정도 사회가 안정되자 80년대 들어 또다시 복지 국가는 비효율적이라면서 탈규제를 외쳤고 2000년대 초 신자유주의가 기승을 부린 끝에 2008년 세계적 경제 위기가 일어났다고 한다. 우선 그는 미국의 언론인, 논객들이 사회민주주의 정책을 옹호하면서 자신들을 '자유주의자'라고 지칭하는 것에 대해 제대로 된 호칭이 아니라고 반박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자유주의자'는 타인의 일에 간섭하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으로 국가의 개인에 대한 규제를 반대한다. 그러므로 경제 정책에서도 규제를 반대하는 사람이라 봐야 하고 경제에 대한 국가의 개입, 공공부문에 대한 투자를 찬성하는 사람들은 '사회민주주의자'라고 부르는 게 정확하다고 본다. 나도 그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면서 얼마전 읽었던 <풍요한 사회>에서 아무리 봐도 '사민주의자', '사민주의 정책'으로 보이는데 '자유주의자'라 불러서 당혹스러워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리고 전 정부와 전전 정부는 아무리 봐도 자유주의 우파 정권인데 좌파라면서 한쪽에서 비난했던 게 떠올랐다. (솔직히 말해서 신자유주의 정책을 열심히 펼치고 비정규직을 만든 그들을 좌파라고 부르는 건 우리나라에서만 일어나는 블랙코미디가 아닐까 싶다.) 사회민주주의자는 자유주의자처럼 문화와 종교 면에선 관용과 자유를 말하나 공동선을 위해 국가가 공공부문에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사회가 더 좋아지리라 믿는다. 반면 자유주의자는 공공규제를 필요악으로 여긴다. 복지국가에서 중시하는 공공의료 서비스, 무상교육 정책, 공공부문 투자 등의 보편적 복지정책은 사회민주주의적인 정책이다. 오늘날 복지국가 모델은 돈이 많이 들고 경제적으로 비효율적이란 비판을 빙자한 비난을 뒤집어쓴다. 21세기 초 영미와 유럽국가는 규제 완화, 최소국가, 감세를 부르짖는 경제학자와 전문가들이 설쳐대면서 민간 기업이 공기업보다 더 잘할 것처럼 떠들었다. 그러나 무분별한 민영화와 규제 완화는 결국 국가부도 사태와 금융시장 파탄으로 이어졌다. 만날 국가는 시장에 개입해선 안 된다고 떠들던 사람들도 실패한 기업, 부도난 기업에 공적 자금을 쏟아붓는 데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고 한다. 여기까지 읽으면서 이게 미국 이야기인지 우리나라 이야기인지 아주 헷갈렸다. 그리고 영국의 대처 정권에 대한 비판 부분을 보면서 과거 대처 정권을 과도하게 칭송하던 다큐멘터리 방송을 떠올리며 쓴웃음 지었다. 아무튼 2008년 경제 위기가 온 뒤 밀턴 프리드먼과 시카고학파를 숭배했던 자유시장 경제학자들은 다시 케인스에게 돌아왔다고 한다. 그러나 오바마 정부에서 보이듯이 케인스주의 경제학으로 돌아간 것처럼 보였을 뿐 실제로는 국가를 재고하고 공공부문을 옹호하는 걸 망설이는 분위기는 여전하단다. 오바마는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 정책을 말할 때 미국의 의료정책을 바꾸겠다고 했으나 막상 집권하고선 제대로 정책을 펼치지 못했다. 현재 미국 정치의 흐름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지금도 여전하겠지 싶다. 이런 상황에서도 사회민주주의 정당은 인정을 제대로 못 받고 있는데 진지한 대우를 받으려면 좌파는 제 목소리를 내야한다고 했다. 체제의 결함을 지적하는 것만으론 충분하지 않고 대안을 확실히 보여줘야 한다는 말에 수긍이 갔다. 그리고 그는 선택지는 국가냐 시장이냐에 있지 않고 두 종류의 국가 사이에 있다고 보았다. 그가 미국 사회에 대해 하나하나 꼬집을 때마다 미국 따라 하기가 체질이 된 한국 사회를 꼬집는 것 같았다. 미국은 군사작전엔 돈을 쏟아부으면서도 사회복지나 공공기반 시설과 관련한 예산 증가는 비난하는 경향이 있다는데 다 현재 우리나라 상황과 겹쳐졌다. 우리나라 역시 토건사업엔 마구 돈을 퍼부으면서 보편적 복지 정책인 무상교육, 무상급식에 쓸 돈은 아깝다고 벌벌 떠는 모습을 보인다. 겨우 우리나라가 민주화되고 민주 정권이 들어섰을 때 공교롭게도 신자유주의 물결에 휩쓸려버려 제대로 된 정책을 펼치지 못하고 끝났던 게 무척 안타까웠다.
또한 그는 60년대 유럽에서 일어났던 사회운동에 대해서도 비판한다. 전통 좌파 운동에서 여성과 동성애자, 기타 소수자들의 인권 운동, 환경 운동 등 다양하게 운동이 전개되면서 오히려 응집력이 약화, 파편화되어 현재 좌파의 무기력함에 이르게 되었다고 보았다. 그렇다고 급진파를 옹호하지는 않는다. 그는 갑작스러운 변화를 이루기 위한 과격한 저항보다는 점진적인 변화가 더 현실에 맞다고 말한다.

다 읽고 나서 저자는 케인스주의자에 사회민주주의자란 생각이 들었는데 장하준 교수의 의견과 일치하는 면이 많다는 느낌도 들었다. 현실 사회주의 국가가 사라진 지금 상황에 맞는 대안은 사회민주주의란 저자의 말에 다는 아니지만 공감한다.

a****o 2011.04.05. 신고 공감 5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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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 - 토니 주트
"[서평]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 - 토니 주트" 내용보기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 제목만 들어도 웬지 한 발자국 더 나은 삶으로 가는 길이 책 속에 들어 있을법하게 느껴진다. 이 책의 저자인 토니 주트는 전후 유럽에 관한 최고의 역사서로 잘 알려진 포스트워 1945-2005’를 쓴 사람으로 유명한 역사학자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무언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말하며 지난 세월동안 영국과 미국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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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 제목만 들어도 웬지 한 발자국 더 나은 삶으로 가는 길이 책 속에 들어 있을법하게 느껴진다. 이 책의 저자인 토니 주트는 전후 유럽에 관한 최고의 역사서로 잘 알려진 포스트워 1945-2005’를 쓴 사람으로 유명한 역사학자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무언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말하며 지난 세월동안 영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물질적 사리사욕의 추구를 미덕으로 삼아왔고, 이는 70년대까지 불평등이 줄어들던 선진국들의 노력을 무위로 되돌려 놓았다고 한다. 이와 같이 사적 영역을 특권화하고 공적 영역을 무시한 가장 극단적인 사례들은 미국과 영국에서 나타났는데 이 두 나라는 규제 완화와 최소 국가, 감세를 바탕으로 사적 개인의 이익 추구를 미덕으로 추켜세우며 지난 30년 동안 복지 법안과 경제 관리를 파괴하는 데 앞장서 왔다. 그러나 지난 30년간 불평등은 심화되고 계층이동의 가능성은 낮아지고 소득격차는 점점 심해졌다. 부유한 소수와 가난한 다수 사이의 격차가 심해질수록 사회문제 역시 악화되었고 영국과 미국에서는 기대수명이나 범죄율 같은 나쁜 요인들이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훨씬 더 심하게 나타났다.

 

또한 저자는 개개의 관심사들을 공동의 목표로 전환시키려는 어떤 노력도 그 관심사들의 파편화된 개인주의에 의해서 좌절되기 때문에 우리가 현재 정치운동이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정부만이 세계화된 경쟁이 야기하는 딜레마에 대처할 수 있다고 한다. 오늘날 야기되고 있는 문제들은 하나의 민간 기업이나 산업이 완전히 이해하거나 해결할 수 없다. 지난 30년 내내 공공 소유와 국가 개입의 규모를 계속해서 줄여왔던 우리는 대공황 이후로 한번도 본적이 없었던 규모로 국가가 전방위적으로 행동에 나서고 있는 현실을 보고 있다.

 

아마도 그는 우리가 추구하는 모든 목표들 가운데 가장 시급하게 추구해야 할 목표가 바로 불평등을 완화하는 일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은 것 같다. 그리고 그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국가의 역할에 대해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음을 저자는 역설한다. 그리고 그가 우리에게 잊지 말라고 당부하는 것은 전후의 잿더미 위에서 건설되었던 복지 국가와 사회민주주의의 위대한 유산인 것이다.

 

이 책을 마지막으로 저자는 2010년에 루게릭병으로 운명을 달리했다. 역사학자로서 진정으로 사회를 걱정하고 학자로서 비판을 두려워 하지 않고 늘 고민하며 연구하는 아름다운 자세를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점 때문에 사실 조금은 아쉽긴 하지만 언젠가 또 누군가 그 자리를 메워 줄 것으로 의심치 않는다. 지금 이 시간에도 누군가는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가고 있기 떄문이다.

이달의 사락 b***8 2011.03.01. 신고 공감 4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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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되지 않은 것의 부자연스러운 자연스러움
"오래 되지 않은 것의 부자연스러운 자연스러움" 내용보기
영국에서 나고 유럽에서 배우고 영국과 미국에서 가르친 토니 주트는 단호한 사회민주주의자이다. 그러나 아마도 미국의 독자들을 염두에 둔 듯, 미국의 반사회주의 정서 때문에 저자는 아주 조심스럽게 의견을 개진하기 시작한다. 주트는 이 책에서 영국과 미국을 주요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다. 전반부에 소개된 시각화된 지표들은 독자들이 미국, 영국 및 유럽 각국을 비교하는 데 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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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 나고 유럽에서 배우고 영국과 미국에서 가르친 토니 주트는 단호한 사회민주주의자이다. 그러나 아마도 미국의 독자들을 염두에 둔 듯, 미국의 반사회주의 정서 때문에 저자는 아주 조심스럽게 의견을 개진하기 시작한다.

주트는 이 책에서 영국과 미국을 주요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다. 전반부에 소개된 시각화된 지표들은 독자들이 미국, 영국 및 유럽 각국을 비교하는 데 매우 유용하다. 소득 불평등이 높은 미국과 영국에서 유아 사망률, 기대 수명, 범죄율, 재소자 비율, 정신 질환, 실업, 비만, 영양실조, 10대 임신, 불법 약물 복용, 경제적 불안정, 개인 부채, 불안 등이 더 높게 나타난다. 그러나 유럽 국가들과는 다른 자본주의 발전 경로를 밟아온 한국의 경우에는 이 국가들과 직접 비교가 불가능하다. 후발 자본주의 국가로 1980년대 중반에 기본적인 경제성장을 완수한 한국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이와는 다른 분석방법이 필요할 것이다(예컨대 국가간 비교보다는 1960년대 이후 10년 단위로 한국의 변화상을 볼 수 있는 지표들을 분석하는 식으로).

주트는 60년대 유럽과 미국을 휩쓴 혁명적 분위기가 아이러니하게도 전후 안정을 누리던 복지국가에 일격을 가했다고 주장한다. 사회민주주의적 복지국가가 유럽에 퍼지게 된 것은 두 세계대전을 겪고 난 뒤 경제 재건과 사회 통합,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공산주의와의 경쟁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었다. 지금과 달리 부자들은 세금을 많이 내는 데 거리낌이 적었고 국가의 적극적인 역할 속에 유럽 사회는 전례 없는 풍부한 삶의 기회를 누렸다. 그런데 68혁명이 상황을 전도시켰다. 68혁명 세대는 전후에 태어났거나 어린 시절을 보낸 전후 세대였다. 그들은 전전 세대와 많은 면에서 가치관을 달리 했다. 신좌파에게 복지국가는 자비로운 감시자에 불과했다. 이들은 집단주의, 하향식 통제와 조정을 거부하고 지나칠 정도로 개인의 권리를 옹호했다. “네 멋대로 해라.” 이러한 사고는 우파와 너무도 닮았다. 이때부터 10년 남짓한 시간이 지나는 동안 공적 담론 속에서 국가 개입과 공동선 추구는 힘을 잃고 말았다 (이것은 1970년대 이후 미국에서 사회적 자본의 감소를 분석한 퍼트남의 <나 홀로 볼링Bowling Alone> 리뷰 보기: Salad Bowling: Not Bowling Alone But Bowling Each이 나온 시대적 배경이기도 하다).

1970년대 후반과 80년대 초반 영국과 미국에서 본격적으로 신자유주의가 정책적으로 실시되었고, 그로부터 10년 뒤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함으로써 그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20세기의 마지막 30년을 장식했던 지적 흐름은 한마디로 민영화에 대한 숭배라고 할 수 있다. 원래 민간부문이 떠맡기 힘든 사업을 국가가 떠맡았던 것인데, 이제는 거꾸로 효율성을 내세우면서 민영화가 진행되고 있다. 심지어 이윤은 민간기업에 보장해주고 손실은 국가가 떠안는 최악의 형태를 취하면서까지 말이다. 이러한 혼합경제는 당연하게도 도덕적 해이를 초래했고, 결국 2008년 경제 위기를 불러왔다.

시장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강조하는 주트는 2008년 세계 경제위기 이후 국가가 케인스주의 경제학으로 복귀한 것에 완전히 만족하지 못한다. 그는 이것이 일시적인 전략적 후퇴에 불과하다며 더 이상 국가와 시장 사이에서 선택하려 하지 말고 두 종류의 국가 사이에서 어떤 것을 선택할지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주트가 제시하는 해법은 매우 근본적이다. 5장은 레닌의 정치 팸플릿을 연상시키는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제목을 달고 있지만, 주트는 과격한 방법으로 제도나 체제를 바꾸자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가치나 도덕 같은 보다 근본적인 부분에서의 변화를 요청한다. 예전과 같이 공동의 목표를 추구하기 위해 공적 대화의 장을 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장 시급한 공동의 목표는 단연 불평등의 해소이다. 불평등이 심한 곳에서는 다른 어떤 공동의 목표를 위한 담론이 형성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저자는 아주 쉬운 언어로 공동체적 삶의 중요성에 대해서, 복지의 필요성에 대해서, 국가의 필요성에 대해서 담담하지만 절절하게 이야기한다. 두꺼운 책이 아니지만, 그 가운데 할말은 다 하고 있다.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많은 책들이 있지만 이 책은 현학, 냉소, 독설 같은 것 없이도 강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예컨대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리뷰 보기: Proletarians at Risk for Losing Everything As Well As Chains)나 <무너지는 환상>(리뷰 보기: Bonfire of Illusions: The Twin Crises of the Liberal World) 같은 책들과 비교가 된다). 책을 읽다 보면 그렇지, 사람 사는 세상이 이래서는 안 되는 건데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물질 만능주의, 불평등, 차별로 가득찬 현실은 사실은 어색하고 부자연스럽다. 그러나 그 부자연스러움이 언제부터인가 당연한 것으로,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져왔다. 부자연스러움을 자연스럽다고 자기 최면을 걸며 살아갈 것인가? 언제까지 자유 시장의 역기능과 사회주의에 대한 과장된 공포 사이에서우물쭈물 할 것인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대개 1980년대 초반 이후에 영미에서 특징지워졌다는 것을 애써 상기하려는 이는 드물다. 1980년대에 당신이 너무 어렸거나 심지어 당신의 부모님이 만나기도 전이었다면, 비교의 대상이 없으므로 현 자본주의(신자유주의) 질서가 사상 유례 없이 불평등하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다. 만약 당신이 지금 40대 이상이라면 아마도 살아가기에 바빠 현실에 대한 비판과 저항은 젊은이들의 몫으로 넘기려 할지도 모르겠다. 지금 현실은 매우 부자연스럽고 불편하다. 그러나 거기에 맞서 싸우려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와 같은 책이 널리 읽혀야 되는 한가지 이유다.



YES마니아 : 로얄 c*****g 2012.01.09. 신고 공감 4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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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간 물은 물레방아를 돌릴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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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게릭병은 흔치 않은 질병이지만 질병의 경과가 너무 절망적이기 때문에 주목을 받게 되는 것 같습니다. 루게릭병이 끔찍한 것은 서서히 죽어가는 운동세포를 되살리거나 죽어가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아직 없다는 것입니다. 죽음을 숙명처럼 타고난 인간들과 비교해보면 광속도에 가까운 빠르기로 죽음을 향해 살아가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서도 루게릭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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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게릭병은 흔치 않은 질병이지만 질병의 경과가 너무 절망적이기 때문에 주목을 받게 되는 것 같습니다. 루게릭병이 끔찍한 것은 서서히 죽어가는 운동세포를 되살리거나 죽어가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아직 없다는 것입니다. 죽음을 숙명처럼 타고난 인간들과 비교해보면 광속도에 가까운 빠르기로 죽음을 향해 살아가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서도 루게릭병을 앓고 있는 농구선수 박승일씨의 투병생활이 알려져 있고, 영화 <내사랑내곁에; http://blog.joinsmsn.com/yang412/11091960>에서는 김명민씨가 루게릭환자를 연기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루게릭병환자에 관한 책으로는 <모리와 함께한 토요일>이 관심을 끌었습니다. 하지만 역사학자 토니 주드가 루게릭병을 진단받은 다음 써낸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는 마치 자신에게 닥친 운명을 거부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주트는 책의 말미에
“나는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에 이의를 제기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특히 그러한 젊은이들을 위해 이 책을 썼다. 나는 이 책이 그들에게 일종의 안내인 역할을 하기를 희망한다. 하지만 비판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자유로운 사회를 구성하는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우리는 세상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의무가 있다. 하지만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우리는 그 깨달음을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다들 아시다시피, 철학자들은 이 세상을 오직 이리저리 해석하기에만 바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237쪽)”라고 자신의 집필의도를 정리했습니다.

“이 책은 대서양 양안에 사는 젊은이들을 위해 쓴 것이다.”라고 저자가 밝힌 것처럼 자본주의 뿐 아니라 사회주의에 대한 사상이 싹을 틔워 성장하고 소멸한 중심이 유럽대륙과 북미지역이라고 한다면 역사적, 사회적 배경이 다른 동아시아권에서 자라서 성장한 사람이 주트의 사상을 논한다는 것이 적절할까 하는 생각도 가지게 됩니다.


주트는 본서를 통해서 자유시장주의를 전제로 하는 자본주의나 마르크스주의를 토대로 한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의 날을 세우고 있습니다. 좌와 우의 극단의 것이 가지고 있는 부정적 요인 때문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상호보완할 수 있는 요인들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는데, 서구공산주의는 이런 점을 외면하였기 때문에 소멸의 길을 피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자본주의 역시 자유방임주의가 아닌 적절한 수준의 규제도입이 필요하고 국가가 그런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것이 요지인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국가가 주도하는 계획경제의 한계는 이미 여러 나라에서 실증적으로 볼 수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저자는 공산주의의 몰락과 함께 좌파정치학의 동반해서 몰락한 배경으로 보수체계와 방동적인 체제의 경우는 어려웠던 시절에도, 대중들이 보기에도 보수가 부패와 무능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무언가를 ‘지킨다’는 마지노선이 대중들에게 각인되어 있었던 반면, 좌파의 경우는 급진주의적 담론이 사라진 자리를 채워줄 마지노선을 대중에게 각인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날 몰락한 사회주의의 미래를 점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145쪽). 저자의 이러한 관점은 우리나라의 정치사에서 보수와 진보가 겨우 한 차례 정권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그대로 노정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힘들여 쟁취한 정권을 쥐고 우왕좌왕하다가 다시 보수 측에 내주고는 원인조차 가려낼 능력을 상실한 우리나라의 진보세력이 느껴야 할 무엇을 담고 있다고 말입니다. ‘좌파는 늘 급진적이고 파괴적이며 혁신적인 것’이라는 상상에 몰입하고 있었던 우리 나라의 진보세력은 “진보적 제도와 신중함은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224쪽)”는 저자의 따끔한 지적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하지만 저자가 곳곳에서 지적하고 있는 공공사업의 민영화에 대한 문제제기는 본질을 외면하고 피상적인 면만을 들추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자의 주장대로 민영화는 개인이 할 수 없는 일들을 정부가 맡아서 재정을 투입하여 한다는 기조를 바꾸는 일입니다. 저자는 민영화의 대표적 문제영역으로 우편업무와 철도서비스를 들고 있습니다. 재정이 투입되는 정부조직은 이익이 나지 않는 일을 한다는 핑계로 투입 예산에 대비한 성과가 민간부문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하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구성원들이 향유하는 권리는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입니다. 정부기관의 민영화에 제일 반대하는 그룹은 바로 해당기관에 속하고 있는 구성원들이라는 점이 시사하는 바가 어디에 있는지 되새겨봐야 할 것입니다.


저자는 철도와 우편이 오지를 사회와 연결하는 역할을 버리려 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또한 철도를 차량으로 대체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철도는 기본적으로 대규모 투자가 이루어져야 하고 그 기반을 유지하는데도 많은 돈이 투입되어야 합니다. 또한 이용객이 많지 않다면 운행에도 엄청난 재정이 필요합니다. 이용객이 많지 않은 오지는 작은 운송수단으로 쪼개서 비용을 축소하는 것이 옳습니다. 서울시의 버스 운행체계를 보면 핵심노선은 지하철과 전철로, 기간노선은 광역버스와 버스로, 골목 구석구석은 마을버스로 연결하여 거미줄같은 운송망을 구축해서 시민들의 불편을 덜어주고 있지 않습니까? 저도 가보았습니다만, 영국 런던의 패딩턴역이나 부다페스트의 동역과 같이 고색창연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철도역에 대한 향수가 철도망에 대한 비용-효용성을 산출하는데 있어 얼마만한 비중을 차지해야 하는가의 문제는 역사학자로서의 저자의 철학 혹은 가치개념에 따른 문제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자가 본서에 담은 사회민주주의가 재도약하는 기회를 잡아 자본주의를 대신하여 새로운 세계를 열어줄 철학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자유민주주의가 단점을 보완해서 더 진보해나갈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출판사에서 던지는 “죽어가는 역사학자의 격렬한 분노와 슬픔, 그리고 희망의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요? 역사학적으로 기대가 컸던 사회민주주의가 힘을 잃고 비틀거리는 것이 안타까웠던 것은 아닐까요?



y*****2 2011.03.21. 신고 공감 3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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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곶’으로 나아갈 실천도모
"다른 ‘곶’으로 나아갈 실천도모" 내용보기
토니 주트가 죽음의 문턱에서조차 소리내어 강조한 것은 타협의 산물인 동시에 매우 합리적 대안이라 할 수 있는 사회민주주의 전후의 역사를 돌아보고 복지국가와 시장자본주의체제를 비교대조한 보완책을 강구하고 변화를 꾀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이것이 대안이라며 내놓았다고도, 그리고 어떤 특정체제를 강요하고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그렇게 편협하게 요약해서 확정짓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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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주트가 죽음의 문턱에서조차 소리내어 강조한 것은 타협의 산물인 동시에 매우 합리적 대안이라 할 수 있는 사회민주주의 전후의 역사를 돌아보고 복지국가와 시장자본주의체제를 비교대조한 보완책을 강구하고 변화를 꾀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이것이 대안이라며 내놓았다고도, 그리고 어떤 특정체제를 강요하고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그렇게 편협하게 요약해서 확정짓기에는 그가 변화를 위한 실천(행동)을 강조하고 촉구하고 있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공산주의의 몰락으로 좌파의 입지까지 협소해진 마당에 사회민주주의를 들먹이며 그가 기존의 좌파들에게 행동을 촉구하는 것은 구좌파들을 호명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식으로든지, 그리고 누구든지 체제를 비판하고 바꾸려는 시도를 해보라는 의도였던 것이다. 최근 이 책의 서평식 온라인기사에 대한 네티즌들의 반론을 읽을 수 있었다. 그 이후 게시된 플래닛 대표의 반론기사가 토니주트를 정확히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의 불평등을 가속화한 체제의 국가는 공동체로서의 기능을 상실한다는 토니 주트의 의도와는 다르게 해석될 가능성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온 것일까. 토니 주트의 저서가 30년간의 불평등이 줄었던 그때로 무작정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거울로 획기적인 전환점을 만들라는 의도임이 명확한데 어떤 부분적 이해가 그런 결과를 낳은 것인지 생각이 많았다. 내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하고 고민했다. 그 결과 토니 주트가 촉구하고자 하는 행동,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혹은 해야만 하는가에 대한 포인트에서 벗어나지 않는 독서를 하려고 노력한 것이 도움이 되었다. 나는 사회주의, 사회민주주의에 대해 공부하고, 즉 역사를 들여다보고 대안을 고민하고 실천하는 철학자가 되라는 저자의 메시지를 얻을 수 있었다. 우리가 무엇을 하던, 그것 또한 시행착오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의 부작용이 심화되는 결과를 가져올 지도 모르고 어느 쪽으로 치우쳐 더 많은 파쇼를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똑같이 과거를 답습하고자 하는 이도 없을 것이고 분명 다른 시도가 되리라는 것을 저자는 예견이라도 하는 듯 하다. 그렇기에 용감하게도 무조건 실천을 도모하는 것이 결국에는 체제의 변화를 조금이라도 빨리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결국 저자는 아래로부터의 연대를 토대로 한, 위로부터의 혁명을 촉구하고 있는 듯 하다. 신자유주의에 비롯된 불평등에 따라 개인적 욕망의 불만족이 팽배했고 이는 정치적관심사가 좀 더 미시화된 개인관심사의 운동으로 가시화되었다. 역사를 돌아보면 이는 위로부터의 변화, 국가와 체제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사회민주주의 내에서도 역사가 보여주고 저자가 말하듯 실천하는 파시스트가 있다면 그 실제로 행동하는 쪽으로 치우치게 마련이다. 자크 데리다의 저작 중 다른 곶이 떠오른다. 실천하는 쪽의 힘은 그것이 옳고 그름을 떠나 다른 곶으로 잡아당기는 힘이 되는 것이다. 지금 세계는 과거 사회민주주의가 등장했던 것처럼 새로운 하이브리드형 체제 모델이 필요한 시점이다. 진정 우리가 살고 있는 불평등 시대를 바꾸려면 특히, 신자유주의 극심한 부작용 속의 자본주의 체제 내라면 자본가들의 새로운 도덕적 담론과 계층에 상관없이 이에 공감하고 연대할 시민이 필요하며 그 공동체의 힘은 좀더 나은 세상의 다른 곶의 비전을 보여줄 것이다.

여기에 더 이상 성장을 중요시하는 계몽주의적, 근대주의적 개념은 필요치 않을 것이다. 버려야 할 것은 버리는 창조적 파괴의 실천이 바로 우리의 삶을 변화로 이끌 것이다. 물론 회의적인 면이 없지 않다. 최근 초과이익공유제정책에 대한 경제계의 발언을 보아도 도무지 이익을 지키려는 자본주의의 욕망은 사그러들 것 같지 않다. 자유 자본주의 시대에 공산주의적 정책으로 인식하고 있는 기업가의 언급은 지극히 기업의 신념이란 어떤 모습인지 짐작이 가능했으며 특히, 공산주의에 대한 왜곡된 인식 또한 심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산주의면 어떤가. 어떤 체제가 주장했던 정책이건 좀 더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는 정책의 일환이라면 도입하는 것이 국가가 시민을 위한 정책이 아닌가. 그것이 비록 파쇼로 마감한 공산주의 국가들의 몰락으로 얼룩진 사상의 기본개념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아마도 문제의 기업가는 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 혹은 자본주의를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의심이 든다.

저자의 현 시대를 읽는 부분에서는 성장지향적인 세계화에 제동을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자동차도 노선을 변경하려면 일단 멈추었다가 다시 출발하는 것이 오히려 올바른 방향으로 빨리 가는 지름길이 되지 않나. 일단 멈추고 다른 길을 선택하고 핸들을 돌리고 가속기를 밟는 실천이 도모되어야 한다면 지금 우리는 일단 멈추어야 할때인 것이다. 과학의 발전과 재화획득에 대한 욕망이라는 개인적 목표보다는 공적인 삶의 목표, 환경보호 등에 힘이 실리고 있는 시기인 것은 분명하다. 다른 곶의 힘은 어느 정도일까. 나는 이 연대와 공동체로서의 가속이 더딘 것 같아 불안하기도 하다. 완전한 반대편의 힘이 아니라서 다른 곶을 만들어내는 속도가 더디다. 이는 최근 신자유주의에 몰입하고 있는 중국의 경우를 보면 그 가속의 차이를 실감할 수 있다. 중국의 겨우 뒤늦게 자본주의에 편승하여 가장 극심하게 그리고 가장 빠르게 신자유주의의 부작용 양상만을 보여주었다. 부패와 불평등이 절정인 자본주의를 답습하다보니 심지어 복지의 중간단계조차 부재되었다. 우리는 토니 주트가 생명줄을 붙잡고 말하려고 했던 바를 몸에 익혀야 할듯하다. 그것은 패배주의적이거나 정치적 비판을 외면하던 습관을 버리고 데리다의 다른 곶을 만들어 가기 위한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를 일단 가지는 것이다.

f*****5 2011.03.31. 신고 공감 3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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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0] 우리가 꿈꾸어야 할 세상을 얘기하자!!
"[8/50] 우리가 꿈꾸어야 할 세상을 얘기하자!!" 내용보기
책표지 윗쪽.. 한 남자가 병에 갇힌 채로 밖을 쳐다보며 서 있습니다. 병 밖의 세상은 온통 잿빛으로 가득해서 속을 가늠할 수 없는 상황처럼 보입니다. 신자유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 그 중심에 선 미국이라는 나라의 현실.. 충실한 개처럼 그 뒤를 따르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이 그대로 그려집니다.저자가 말머리에서 밝히고 있듯이 책의 내용은 대서양의 양안에 있는 '미국과 영국'에
"[8/50] 우리가 꿈꾸어야 할 세상을 얘기하자!!" 내용보기

책표지 윗쪽.. 한 남자가 병에 갇힌 채로 밖을 쳐다보며 서 있습니다. 병 밖의 세상은 온통 잿빛으로 가득해서 속을 가늠할 수 없는 상황처럼 보입니다. 신자유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 그 중심에 선 미국이라는 나라의 현실.. 충실한 개처럼 그 뒤를 따르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이 그대로 그려집니다.

저자가 말머리에서 밝히고 있듯이 책의 내용은 대서양의 양안에 있는 '미국과 영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저자의 생각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과 영국에서 1980년부터 시작된 신자유주의의 바람이 우리나라에 10여 년의 시차를 두고 그대로 반영이 되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현재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얘기입니다.

'국가' 혹은 '사회주의' 라는 말만 해도 거부감부터 느끼는 미국인들에게 북유럽 사회민주주의 국가들의 정책이 주는 이로움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효율과 능률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공기업들의 민영화의 결과가 결과적으로 공공에 얼마만큼의 피해를 입히는지, 민영화의 결과가 얼마나 처참한지를 보여줍니다. IMF를 통해 대부분의 공기업을 민영화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공공의 이익은 효율과 이윤이라는 잣대로 재단해서는 안 된다!! 고 말입니다.

공공의 가치를 위해서 지켜야 할 가치가 어떤 것들이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지켜야 할 공적인 분야.. 말이지요. 철도와 도로, 항만, 우편, 통신, 방송 등등 공공기관이 소유하고 운영함으로 인해서 비효율적이고 적자라는 이유로 끊임없이 민영화의 요구를 받고 있거나 이미 민영화가 진행된 분야들입니다. 현재, 우리의 경우.. 인천공항공사와 의료민영화에 대한 논의가 뜨겁습니다.
주주의 가치, 자본의 자유를 주된 목적으로 하는 신자유주의 하에서 민영화되어 지금 현재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는 선례를 그대로 따를 가능성이 큼에도 제대로 된 논의과정이 진행되고 있는가도 의문이지만, 과연 그런 가치들이 '돈'으로 환산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또한, 아무런 목표가 없이 그저 '부'만 쌓아가는 사회에 무슨 미래가 있겠는가? 하는 의문도 커져 갑니다. 빈부의 격차가 나날이 커져 가는 사회에 살아가면서 제가 지향해야 할 곳이 어디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할 문제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지닌 본성이라면 저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것보다 남들과 함께 부를 나누고, 행복을 추구하는 게 당연하다고도 생각을 하지요. 진보는 나 혼자 앞서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한 걸음을 같이 할 때 이루어진다는 말을 다시금 되새겨 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시점에서 걸음을 멈추고 합의를 해야 합니다. 소수의 부자들이 대부분의 부를 소유한 채로 저만치 앞서가는 사회.. 그로 인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빈곤에 시달리고 사회적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회가 우리가 꿈꾸어야 할 미래의 모습인가? 분의 분배를 통해서 가장 어려운 환경에 처한 사람들조차도 살아가는 문제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미래를 꿈꿀 것인가?를 말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하나입니다. 신자유주의로 인해 우리 마음 속에서 사라져 버린 인간에 대한 존중을 되살리는 것.. 우리 삶의 목표에 두어야 할 가치가 '돈'이어야 하는가.. '인간'이어야 하는가.. 하는.. 그 물음에 대답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전 꿈꿉니다. 사람이 가진 것에 의해서가 아닌 사람자체로 대접받는 사회.. 인간이 '돈'을 위한 수단이 아닌 삶의 목적 그 자체가 되는 사회..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부를 재분해해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s*****2 2011.09.29.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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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회에서 살기를 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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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주트는 이 시대의 젊은이들을 위해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를 썼다고 했다. 그는 "젊은 세대들은 자신들이 상속받게 될 세상에 대한 걱정, 두려움과 일종의 좌절감에 휩싸여 있다"며 신자유주의 만연과 공공성의 파산이 불러온 파괴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에 과감하게 이의를 제기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일까?   문제는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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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주트는 이 시대의 젊은이들을 위해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를 썼다고 했다. 그는 "젊은 세대들은 자신들이 상속받게 될 세상에 대한 걱정, 두려움과 일종의 좌절감에 휩싸여 있다"며 신자유주의 만연과 공공성의 파산이 불러온 파괴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에 과감하게 이의를 제기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일까?

 

문제는 '경제의 과잉'에 있다기 보다는 '정치의 소심증'에 있다. 경제논리에 압도당한 좌파의 소심한 정치가 위기를 키우는데 공범 역할을 했다. 개개인의 관심사는 파편화되고 이를 하나로 아우르려는 시도는 무슨 무슨 이념으로 덧칠되기 일쑤거나 '꼰대' 취급 당하며 개인주의의 공세 앞에 쉽게 좌절당하기도 한다. 자유와 다양성의 추구는 독재와 획일화를 저지하는 저항적 무기였지만, 일상에서 사회와 공동체의 가치를 후퇴시키는 역기능을 초래하기도 한다. 물론 이 바탕에는 자본주의 호황으로 표현되는 경제적 풍요가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상황은 달라지고 있다. 눈앞에 닥친 자본주의의 위기 앞에 너나 할 것 없이 '국가'에 SOS를 보내고 있는 상황이니 말이다. 작은 정부의 몰락과 국가의 귀환. 이것은 국제적 트랜드다. 새판짜기의 화두, 즉 선택지는 더 이상 '국가냐, 시장이냐'에 있지 않다. 오직 '어떤 국가인가?, 어떤 사회에서 살기를 바라는가?'라는 물음만 있을 뿐이다.

 

자본주의는 정치체제가 아니라 경제적 삶의 한 형태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우파독재(피노체트의 칠레), 좌파독재(오늘날의 중국), 사회민주주의적 왕정(스웨덴), 금권정치적 공화국(미국) 등 모든 정치체제와 친화성을 가질 수 있다. 자본주의 경제 체제가 자유주의적 국가에서 가장 번성할 것이라는 통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반면, 공산주의는 순수한 자유 시장경제를 제외하고는 모든 경제 체제와 공존할 수 있다. 물론 그 어떤 경제체제도 공산주의를 만나면 비효율적으로 변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공산주의가 몰락함으로써 중앙집중적 통제와 계획에 과도한 요구 또한 종말을 고했다는 우리의 판단은 정확했다. 하지만 이것을 토대로 제멋대로 다른 결론을 도출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공산주의의 실패가 바로 국가와 경제 계획에 대한 불신으로 연결될수는 없기 때문이다...즉 사회를 총체적으로 조직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은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공공의 이익을 위해 우리가 어떻게 뭉칠수 있는가의 물음은 과거에 지녔던 만큼의 중요성을 조금도 상실하지 않았다. 우리의 과제는 무너진 환상의 잔해속에서 이러한 물음을 다시 되찾는 것이다. (p148~149)

 

 

주트의 지적처럼 '정치는 특정 공간에서만 작동'한다.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과 인터넷 효과로 국경의 장벽이 무색해지고 있다는 말은 사실 허구다. 사람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곳에서 투표를 하고 정치 지도자를 선출한다. 우리나라 국민이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투표권을 행사하지는 않는다. 제 아무리 인터넷 시대라지만 이것이 특정 공간에서 작동하는 정치의 매커니즘을 대체할 수는 없다.

 

주트는 이 책에서 '더 나은 미래'의 상에 대해 구체적으로 제시하지는 않는다. 다만 경제중심주의에 대한 거부, 정치의 우선성에 대한 인정에 기초해 '다른 미래'를 위한 '다른 정치'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이쯤되면 떠오르는 단어가 있는데 바로 '사회민주주의'다.

 

셰리 버먼은 <정치가 우선한다>에서 사회민주주의를 '20세기 최후의 승자'라고 극찬했지만 주트는 좀 더 냉정한 태도를 보인다. 그는 유럽 대륙에 국한된 사회민주주의는 독특한 역사적 상황이 만들어낸 산물임을 인정하면서, 국가의 역할을 모색하는데 사회민주주의가 남긴 유산은 여전히 '유의미하다'고 말한다. 사회주의의 몰락속에서도 북유럽 사회민주주의가 보여준 놀라운 성과는 마땅히 인정받아야 하지만, 이른바 '복지국가의 위기'에서도 드러나듯이 사회민주주의만으로 가치있는 제도들을 보존하고 더 나쁜 대안들을 막는 방어자 역할을 다 수행할수는 없다는 것이 주트의 견해다.

 

시각의 편차가 존재하긴 하지만 국가의 의무에 대한 사회민주주의의 핵심 가정에 반대하는 정치인은 극소수에 불과하다...결과적으로 오늘날 유럽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다른 경쟁자들과 자신을 구분 지을 것이 전무한 상태다...오늘날 문제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정책이 아니라 고갈되어 버린 그들의 언에 있다. 좌파에 부담을 안기던 공산 독재 체제들이 사라진 마당에 '민주주의'에 대한 강조는 하나마나한 소리가 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모두 민주주의자다. 우리 모두가 민주주의자라면, 무엇이 우리를 구분 지을 수 있을까? 우리는 무엇을 지지하는가? (p147)
 

주트의 이 질문은 한국사회에도 유용하다. 신자유주의 이후 사회경제적 변화는 정치의 변화를 필연적으로 요구한다. 한국 정치는 어떤 해답을 가지고 있을까. '사회주의'가 실패한 상황에서 완벽한 이상은 아니지만 현실에서 최선이라 여기지는 '사회민주주의'를 선택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유럽의 대안이었던 사회민주주의가 한국에서도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주트는 루게릭병으로 죽어가는 마지막 순간에 이 책을 쓰면서 현실에 격렬한 분노와 슬픔을 토해냈다. 그리고 더 나은 삶을 원한다면 다시한번 정치적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호소했다. 우리는 어떠한 사회에서 살기를 원하는가. 그리고 그러한 사회를 만들어 내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YES마니아 : 플래티넘 x******0 2012.06.18. 신고 공감 1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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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나은 삶을 상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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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고 있는 구조는 자유시장과 복지를 기본적인 바탕으로 하는 삶을 만들어나가고 있다. 이러한 구조를 만드를 과정은 인간의 삶을 더욱 풍요롭고 살기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내기 위한 것은 누구나 공감을 한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속에서는 100%를 만족하는 결과를 얻을 수 없다. 하나를 이끌어 내면 하나를 보완하는 둘을 이끌어내고 둘을 보완한 샛을 이끌어내는 연속성을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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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살고 있는 구조는 자유시장과 복지를 기본적인 바탕으로 하는 삶을 만들어나가고 있다. 이러한 구조를 만드를 과정은 인간의 삶을 더욱 풍요롭고 살기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내기 위한 것은 누구나 공감을 한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속에서는 100%를 만족하는 결과를 얻을 수 없다. 하나를 이끌어 내면 하나를 보완하는 둘을 이끌어내고 둘을 보완한 샛을 이끌어내는 연속성을 가지고 있고 그래야 발전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이책의 저자인 역사학자 토니 주트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구조는 이러한 구조로 살려고 계획했던 시점부터 잘못을 찾고 있다. 계획이 잘못되 었기 때문에 더욱 성장하고 더 좋은 삶을 살고 더욱 풍요롭도록 인간에게 혜택이 갈 수 있는 결과를 얻지 못한다고 설명해주고 있다.

 

 저자 토니 주트는 현재의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자유시장과 복지국가를 이룩하려는 초기단계의 역사를 이야기 해준다. 이는 저자 자신이 겪거왔던 경험을 통하여 자신이 느낀점을 역사적 기록과 조화를 이루면서 설명하고 있다. 그는 우리의 사회적 구조가 자유를 기본 바탕으로 누구나 풍요로운 삶을 살수 있도록 하려 하지만 이러한 상황들은 가진자와 가지지 못한자를 정해져 있지 않은 선을 긋고 격차는 점점 벌어지는 현상을 지적하고 있다.

 

 이런 과정들을 다시 처음부터 시작할 수 없는게 당연하다. 이러 현상들을 지적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빨리 받아 들이고 개선하는 방향을 모색하는 것이 최우선이 되야한다. 과거는 생각할 필요는 있지만 미래는 실행해야 하는것이 더 나은 삶을 열어가는 것이 저자가 말하려는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해본다.

y*******k 2011.03.19.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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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주트-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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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카페에서 소개되었을때는 그닥 재미었어 보여서 신청을 안했다. 그런데 추가 이벤트가 있어서 제목만 나왔을때 제목만 보고 이 책을 신청해버렸다. 뒤늦게 다른 책을 신청하려고 했지만, 이미 신청이 되어버려서 어차피 읽어야 할 거 감사히 읽었다. 솔직히 이런 진지한 책들은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니지만 세상을 살아가려면 이런 책도 읽어야 된다고 생각하기에 나도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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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카페에서 소개되었을때는 그닥 재미었어 보여서 신청을 안했다.

그런데 추가 이벤트가 있어서 제목만 나왔을때 제목만 보고 이 책을 신청해버렸다. 뒤늦게 다른 책을 신청하려고 했지만,

이미 신청이 되어버려서 어차피 읽어야 할 거 감사히 읽었다. 솔직히 이런 진지한 책들은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니지만

세상을 살아가려면 이런 책도 읽어야 된다고 생각하기에 나도 진지한 마음으로 읽었다.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는 유럽에 관한 최고의 역사서라고 불리는 <포스트워 1945-2005>의 저자 토니 주트의 마지막 책이라고 한다.

토니 주트는 루게릭병에 걸려 죽음을 기다리며 마지막 힘을 다해 쓴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이 책은 규제 받지 않는 자유시장과 효율성을 내걸며

30년동안의 심한 빈부격차와 불평등을 가져온 자유주의을 비난하고 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가진 핵싱점인 과제는 불평드의

완하임을 말하고, 어떤 종류의 국가가 그러한 과제를 실현할 수 있는지 다시 생각하기를 말하며 교훈을 다시 새기기를 말하고 있다. 

 

 

이 책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은 무언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다. 지난 30년간

우리는 물질적 사리사욕의 추구를 미덕으로 삼아 왔다. 정말 이러한 욕망의 추구를 배제하고 나면 우리는 공동의 목적의식에 대해

아무것도 말할 것이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 책을 읽으면서 조금은 우리세계가 어떻게 펼쳐지고 있는지를 알았다랄까?

어쨋든 이 책은 잘 알지 못하는 세계에 대해 조금은 잘 알 수 있었던 계기가 되는 나의 첫 책이였다.

h*********7 2011.03.01.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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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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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는 독재와 함께 하지 않을까? 확실히 그렇게 보였다. 1945년 연합국이 승리를 거둔 이후에도 이러한 우려는 가시지 않았다. 불황과 파시즘에 대한 두려움은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 에서 떠나지 않앗다. 전후의 시급한 과제는 이 엄청난 승리를 자축하고 나서 전쟁 이전의 일상응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1914년에서 1945년 사이에 겪었던 경험을 다시 되풀이하지 않게 해줄 방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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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는 독재와 함께 하지 않을까? 확실히 그렇게 보였다. 1945년 연합국이 승리를 거둔 이후에도 이러한 우려는 가시지 않았다. 불황과 파시즘에 대한 두려움은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 에서 떠나지 않앗다. 전후의 시급한 과제는 이 엄청난 승리를 자축하고 나서 전쟁 이전의 일상응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1914년에서 1945년 사이에 겪었던 경험을 다시 되풀이하지 않게 해줄 방법을 찾는 것이엇다.”

 

‘1984’는 전후 유럽의 분위기를 가장 잘 나타낸 작품이다. 48년에 발표된 이 작품은 아내를 잃고 자신의 살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아는 오웰의 절망에서 태어났지만 개인적인 불행보다는 전체주의는 언제든 가능하다는 아마도 전체주의가 미래일 것이라는 절망이 더 컸다. “수백개 사단을 거느리고 동쪽에 버티고 있는 붉은 군대와 이탈리아와 프랑스, 그리고 벨기에에서 득세하고 있던 공산당과 노동조합.” 국무장관 마셜이 유럽을 방문했을 때 본 광경이다. “마셜 플랜은 2차대전 이후의 상황이 1차 대전 히우에 벌어졌던 사태들보다 더 나쁜 결말로 치달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의 산물이엇다.”

 

히틀러가 몰락하고 나서 한참이 지난 후에 그에 대해 평가해 달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일부 국외자들은 더러 최소한 그는 독일인들에게 일자리를 되돌려주었다는 반응을 보였다. 또한 트탈린이 어떤 결함을 지니고 있었든 간에 최소한 그는 소련을 대공황으로부터 지켜 냈다는 평가를 내리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리고 이탈리아의 기차가 제 시간에 맞춰 움직이게 만들었다는 무솔리니에 관한 농담조차 그 행간에는 다음과 같은 항변이 담겨 있었다. 도대체 뭐가 잘못되었다는 거야?”

 

두번의 전쟁이 일어나기 전으로 문명을 되돌리는 일은 가능해보이지 않았다. “그 누구보다 진지하게 이 문제를 고민했던 사람은 바로 메이너드 케인스였다. 영국의 클레먼트 애틀리, 프랑스의 드골, 그리고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에 이르기까지 당대 혁신적인 법안의 통과를 이끌었던 일련의 정치가들과 마찬가지로 케인스 역시 천성적으로 보수주의자였다. 당대 대부분의 주요 정치 지도자들은 모두 케인스에게 매우 익숙했던 평화로운 시절에 태어난 노신사들이었다. 그리고 이들 모두는 충격적인 대격변의 시절을 겪은 자들이엇다.”

 

그러나 더 이상 그들이 젊은 시절을 보냈던 아름다운 시절(Belle Epoque)로 돌아갈 수는 없었고 그 시절의 가치를 그대로 되살리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전간기에 자본가들은 이미 스스로 자기 이익을 최선으로 지켜낼 능력이 전혀 없음을 분명히 드러냈기 때문이다.” 뭔가 달라져야 했다. 그리고 그일은 국가가 해야할 일이었다.

 

그 결과 아주 역설정인 상황이 벌어졌다. 당시에 사회주의적인 것으로 불릴만한 변화들 덕분에 자본주의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전후 초창기에 정책 논쟁은 도덕적인 성격을 띠었다. 실업, 인플레이션, 그리고 농민들이 절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토지를 내팽개치고 극우정당으로 달려가게 만든 농산물 가격폭락 등은 단지 경제적 쟁점이 아니었다. 성직자에서부터 세속의 지식인에 이르기까지 당시 모든 사회구성원들은 이러한 문제들을 공동체의 윤리적 일관성을 가늠하는 시금석으로 간주했다. 모두가 국가를 믿었다. 이는 전후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불과 얼마 전에 경험했던 끔찍한 공포를 두 번 다시 겪고 싶어하지 않았고 공익이라는 이름으로 시장의 자유를 제한하는데 기꺼이 찬성했기 때문이었다.”

 

이후의 한세대를 프랑스에선 영광의 30년이라고 불렀고 이 시절의 정점에서 맥밀런 수상은 이렇게 장담했다. “’이렇게 좋은 시절은 앞으로 다신 오지 않을거요.’ 그가 옳았다. 극단주의 세력이 다시 부상할지 모른다는 우려는 자취를 감추었다. 서양은 번영과 안녕의 황금시대에 들어섰다. 거품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편안한 거품에 파묻혀 과거에는 감히 꿈도 꾸지 못했던 삶을 누렸고 희망찬 시선으로 미래를 기대했다.”

 

전후 사회민주주의의 기적은 보편주의란 마술에 의해 성취된 것이었다. 중간계급의 공포와 불만이야말로 파시즙ㅁ을 권좌로 불러들인 원동력이었다. 중간계급을 민주주의 지지자로 돌려세우는 일은 전후의 정치의 중요한 과제였다. 그리고 이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 쉽지 않은 일을 해낸 것이 보편주의의 마술이었다. “중산층은 더 이상 소득에 견주어 혜택을 받지 않았다.” 이전에 복지란 중산층에겐 단지 돈만 내고 자신은 혜택을 받지 못하는 것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젠 무상교육에서부터 무료 혹은 저가로 제공되는 의료 혜택, 공공연금, 실업보험에 이르기까지 노동자, 빈민층이 누리는 것과 똑같은 혜태ㅑㄱ을 누렸다.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많은 부분들이 자신들이 낸 세금으로 충당된 결과 유럽의 중산층은 1960년대에 이르면 자신들의 가처분 소득 수준이 1914년 이후 그 어트 때보다 높아졋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었다.”

 

저자는 영광의 30년이 가능했고 무려 한 세대동안 잘 돌아갈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했다고 말한다. 지적 혁명 때문이었다.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한 맹신과 사직인 이익 추구가 항상 공익으로 귀결될 것이라는 믿음은 완전히 끝장났다. 두번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사람들 대부분은 일상생활에 대한 정부의 개입은 불가피하다고 믿었다. 전시경제는 전쟁이란 목적을 위해 온 나라를 전쟁기계로 바꾸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이렇게 묻기 시작했다. 그러면 평화를 위해서도 같은 일이 가능하지 않을까? 시장은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는데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국가가 개입해 그 빈틈을 메워야 한다는 인식이 널리 퍼졌다.”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 특히 스칸디나비아의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 사회주의란 분배의 개념이엏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규제받지 않는 경쟁이 낳은 결과에 분개햇다. 그들은 급전적 미래를 꿈꾸기보다는 더 나은 삶의 방식을 가능하게 해줄 가치들을 되찾으려 했다. 베아트리체 웹 같은 영국의 초기 사회민주주의자는 자신이 추구하는 사회주의를 공교육, 공중보건서비스, 의료보험, 공원과 운동장, 노약자와 실업자에 대한 공적지원 등으로 규정했다. 정부가 이러한 일들을 맏아야 한다는 생각은 전대미문의 것이엇다. 2차대전 이후 사회적 목적의 실현을 위해 재정을 운용하는 것이 국가의 가장 중요한 책임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영광의 30년은 그 자신의 영광 때문에 무너졌다고 저자는 말한다. 영광의 30년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공동의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을 위해 국가가 나서야 된다는 합의였으며 국가에 대한 신뢰였다. 그러나 국가의 성공은 자신의 무덤을 팠다고 저자는 본다.

 

“1945년 이후에 태어난 자들에게 복지국가와 그 제도들은 과거의 딜레마에 대한 해결책이 아니라 그저 일상적인 삶의 조건에 불과했다. 그들에게 복지는 지루한 일상 그 이상이 아니었다. 60년대 중반에 대학에 입학한 베이비붐 세대는 다른 시절을 겪어보지 못했다.” 복지국가의 합의는 중간계급의 동의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전쟁 직후 그 동의의 이유를 기억하지 못하는 세대들은 복지국가를 가능하게 했던 지적 혁명을 뒤집어놓았다. “위대한 이상을 품고 1960년대를 살아온 우리 세대는 결국 자유주의를 파괴해버렸다. 그것은 우리가 너무 지나치게 자유주의적이었기 때문이다그 세대의 일원인 케밀 파야의 말이다.

 

더군다나 영광의 30년의 성과 자체가 그 시절을 가능하게 했던 지형을 부수어놓았다. “중간계급에게 실제로 얼마나 매력적으로 다가왔든지 간에 뉴딜의 개혁정책들과 스칸디나비아의 사회민주주의, 영국의 복지국가는 모두 육체노동자들과 농민들의 지지에 우선적으로 의존했다. 그러나 1950년대 내내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프롤레타리아는 지속적으로 파편화되면서 감소했다. 전통적인 공장 노동자와 광부, 그리고 운수업 종사자에 대한 좌파의 집착은 자동화와 서비스업의 부상, 그리고 여성 노동자의 증가로 더 이상 설자리를 찾지 못했다.”

 

정치기반이 흔들리는 가운데 중간계급도 변했다. “워싱턴에서부터 스톡홀름에 이르기까지 지난 시절의 개혁가들은 모두 정의, 기회균등 혹은 경제안정 같은 목적을 공유했고 이러한 목적은 공동의 노력으로만 달성할 수있다고 확신했었다. 지나치게 억압적인 하향식 통제와 조정이 가질 수 밖에 없는 수많은 문제점들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을 살았던 사람들은 이런 문제접들을 사회정의를 위한 비용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비용을 기꺼이 지불할 용의가 있었다.”

 

그러나 사회정의란 목적이 이미 이루어진 시절만 경험한 젊은 세대에게 그런 목적은 더 이상 호소력이 없었다. 대신 “60년대 세대를 하나로 뭉치게 만든 것은 모두의 이해관계가 아니라 각자의 필요와 권리였다. ‘개인주의’. 즉 모든 사람은 사적 자유를 최대한 누리고 자신의 욕망을 어떠한 제한 없이 표현할 자유가 있으며 이 모든 권리는 사회에 의해 존중되고 제도화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점차 그 시대 좌파의 슬로건으로 자리잡았다. ‘네 멋대로 하라’ ‘감정을 해방하라’ ‘전쟁 대신 사랑을 하자이러한 목표들은 본질적으로 사적인 목표일 뿐 공익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말이 크게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당연하다. 60년대의 정치는 사회나 국가에 대한 개인적인 권리들의 총합으로 전개되었다. 개인적 정체성, 성 정체성, 문화적 정체성 들 정체성의 문제가 공적 담론을 잠식했다. 이러한 정체성의 정치란 급진주의적 정치의 파편화와 맥이 닿아 있었고 다문화주의란 그럴듯한 모습으로 변신하기도 했다. 그 시절에 좌파가 된다는 것은 자기본위적인 자기개발적인 그리고 놀라울 정도로 자신만의 관심사에 매몰된다는 것을 뜻했다.” 그리고 그 대가는 목표를 공유한다는 의식의 퇴조였다. 전후 수십년간 이어져온 합의는 붕괴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그러나 확실히 부자유스러운 합의가 사적 이해관계의 절대성을 둘러싸고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사실상 그들의 감정은 사적 자유에 대한 열광과 공적 구속에 대한 짜증으로 확실히 나위너 있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새로 등장한 우파 역시 이와 똑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신자유주의란 통칭되는 우파의 탄생은 그들의 적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70년대 중반 이후 30년간 이어진 보수주의의 승리와 그로 인한 근본적인 변화들은 필연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것은 일종의 지적혁명이 낳은 결과였다. 대략 10년 남짓한 짧은 기간동안 공적 담론의 지배적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기존 패러다임이 국가의 적극적 개입과 공동선의 추구였다면 새로운 세계관은 마거릿 대처의 악명 높은 명언으로 요약될 수 있었다. ‘사회 따위는 없다. 오직 개인과 가족이 있을 뿐이다.”

 

정부가 해결책이 아니라 문제이고 사회따위는 없다면 국가의 역할 역시 다시 한번 조정자에 불과한 것으로 축소되어야 햇다. 이제 정치가가 할 일은 개인들의 삶에 최대한 간섭하지 않으면서 개개인이 자신에게 이로운 일을 잘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는 것이엇다. 케인스식 합의와 비교해보면 사태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알 숭 있다. 케인스는 자본주의의 기능이 부자들이 더 부자가 되게 하는 수단을 제공하는 데 그친다면 그런 자본주의는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는 입장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