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이들〉 그 해 겨울은 원 없이도 눈이 많이 내렸다. 시장에서는 아이들이 눈사람을 만들었다. 우선 큰 눈덩이를 굴렸다. 눈사람의 배가 될 부분이었다. 그 다음에 만든 좀 더 작은 눈덩이는 어깨부분이 되었다. 그리고 조금 더 작은 눈덩이를 굴려서 눈사람의 머리를 만들었다. 검은 석탄으로 단추도 달아 주었는데, 다 잠글 수 있도록 위에서 아래까지 촘촘하게 박아 넣었다. 코는 당근으로 만들었다. 아이들이 만든 눈사람을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저 무심히 지나치는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줄지어 아이들의 집을 찾아온다. 처음에는 신문가판대 아저씨다. 눈사람의 당근 코가 문제였다. 본인의 빨간코를 빗댄 것이라고 한다. 기분이 나쁘단다. 추워서 그런 거지 보드카를 마셔서 그런 것이 아니란다. 한사코 본인은 술꾼이 아니라고 큰소리친다. 두 번째는 마을조합장이다. 눈덩이를 그렇게 쌓아놓은 것은 마을 조합에 도둑놈위에 도둑놈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려 했다는 것이다. 기분이 몹시 나쁘단다. 세 번째 방문객은 지역회의 의장이다. 역시 눈사람이 화근이다. 아니 눈사람은 아무 잘 못 없는데 모두 난리다. “나는 집에서 단추를 풀고 다니는데 그건 내 사적인 문제요. 그러니 댁의 아이들이 그걸 우스갯소리 삼을 권리는 없단 말이오. 머리에서 발끝까지 촘촘히 붙어 있는 그 단추는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소. 내 다시 말하오만, 내 집에서 내가 바지를 벗고 다니건 말건 그건 댁의 아이들이 관여할 일이 아니오. 명심하시오!” 아이들은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다. 아이들 아빠는 사회적 분위기상 아이들에게 벌을 준다. ‘저녁을 굶기고 구석에 가서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게 한다. 그 후 아이들은 다시 눈사람을 만들 기회가 되었다. 이제는 모델이 분명히 정해졌다. 신문가판대, 조합장, 의장아저씨를 만드는데 아이들의 의기가 투합 되었다. 그리고는 즐겁게 작업에 착수했다.
다소 썰렁한 느낌이드는 풍자적 단편이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상황이다. 세상에는 감추고 싶지만 감춰지지 않는 일들이 대부분이다. 그렇기에 드러나지 않는 진실 또한 없다. 단지 시간이 개입될 뿐이다. 작금의 정당화는 차후엔 변명이 된다. 역사상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이 책에는 이러한 단편이 42편 실려 있다. 국내에 처음 번역 소개되고 있다. 저자 스와보미르 므로제크 폴란드의 대표적 극작가이자 단편소설 작가, 만평가다. 1930년 폴란드 남부 크라쿠프 근처 보젱친에서 출생. 해외에서 명성을 떨치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그의 희곡 덕분이다. 므로제크의 희곡작품들은 도덕적 희곡 또는 철학적 이야기를 담고 있다. 희곡작품과 매우 흡사한 자신의 산문 작품 속에서, 므로제크는 사회 현상에 대한 통찰 쪽으로 움직여간다. 부조리한 유머를 사용해 지역 정서와 진보 사이의 간극을 표현하고 있다. 저자의 작품들은 폴란드 계엄(Martial Law)시절 폴란드에서 대단한 인기를 모았고, 지하 출판을 통해 널리 퍼져나갔다. 1950년대 폴란드의 민초들이 당했던 상황은 1960년대 이후 70, 80년대의 암울했던 국내 상황과 흡사하다. 깨끗하고 정당한 방법의 권력 승계가 아닌 정권의 탈취는 언론, 출판, 집회 및 개인적 표현의 자유부터 접수한다. 그 어둠의 시기에 ‘타는 목마름’으로 봄날의 바람이 우리의 가슴속으로 들어와주길 얼마나 기다렸던가. 저자는 이 짧은 단편 속에 폴란드가 처했던 어둠의 시간 속에서 폴란드인들의 입가에 짧은 미소와 울창한 숲 속 나뭇잎 사이로 언뜻언뜻 비치는 희망의 햇살을 보여 주고 싶었던 것이라 믿고 싶다. 이 책을 번역한 정정원 교수는 대학원 시절 폴란드어를 공부하면서 한 편 한 편 번역을 하다가 결국 전편을 다 번역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번역본이 ‘좋은 추억’으로 컴퓨터 한 구석 ‘므로제크’ 라는 폴더에 수줍게 자리잡게 되었는데, 어느 날 다시 꺼내 읽으면서 묘한 재미와 독특한 감동이 몰려 왔다고 한다. “1950년대 폴란드라는 나라, 폴란드 정부, 폴란드 관료주의, 폴란드 공산주의 등에 대한 풍자가 21세기 한국이라는 나라, 한국 정부, 한국 관료주의에 대한 풍자로 자연스럽게 투영되고 있었다.” 이 단편의 타이틀이 된 〈코끼리〉 코끼리가 없는 동물원이 배경이다. 이 동물원은 코끼리가 없는 대신에 토끼 3000마리로 대신해 보려고 하다가, 결국 의욕만 앞서는 과잉충성 동물원장의 아이디어로 공기를 가득 채운 그럴싸한 고무 코끼리를 만들어 세워두게 되었다. 특별히 굼뜨다는 안내문과 함께. 그러던 어느 날 학생들이 동물원으로 현장 학습을 오게 되는데, 그들은 4000킬로그램에서 6000킬로그램까지 나가는 가장 무거운 육상동물인 코끼리가 미풍에 실려 하늘 높이 올라가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그 이후 학생들은 술을 마시고 유리창을 깨는 건달이 되었고, 더 이상 코끼리를 믿지 않게 된다. 어디 코끼리만 못 믿었겠는가. 소설에는 언급이 안 되었지만, 학생들이 이러지 않았을까? “이 세상에 믿을 넘 하나 없어.” |
|
부 조리. 이치에 맞지 않거나 어긋나는 형태나 행위를 이루는 말이다. 대체적으로 상식적이지 못하고 비현실적인 일이라 생각하지만, 의외로 우리는 자주 그 단어와 접하고 실감한다. ‘부조리한 현실’ 모순적이면서도 그 말 자체가 적절한 표현이라 생각되는 것은 지켜지지 않는 원칙과 거대한 힘들의 이기적 욕망이 사회 저변에 깊숙히 뿌리내려져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부조리는 다양한 문학 매체의 주제로 등장하며 해결되지 않는 이 현상은 영원한 예술적 소재로 거론된다.
폴 란드가 가장 사랑하는 극작가이자 소설가인 스와보미르 므로제크의 단편집 ‘코끼리’는 그러한 부조리의 총망라이자, 집대성이다. 적어도 작가 개인이 느끼는 모든 종류의 부조리한 현실상황은 최대한 빠짐없이 모아둔 단편들이다. 그렇기에 ‘코끼리’의 단편들은 모두 부조리라는 단 하나의 테마를 지닌채 문학적 귀결들을 이루고 있다. 대체적으로 그의 작품들은 인물의 추상화, 부조리한 상황, 기괴한 장치를 통해 현대의 도덕적, 철학적 문제들에 대해 깊은 통찰의 노력을 표한다. 그러점에서 그의 첫 단편이라 할 수 있는 ‘코끼리’는 매우 기념비적인 작품이면서, 동시에 그가 어떤 사상적, 철학적 준거를 통해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기원적 의도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상 당히 연극적이 면모가 많이 드러나는 작품인데 오히려 그러한 요소들이 작가가 드러내려 했던 주제와 상황에 더욱 효과적이었다고 본다. 특히 핵심적 현상을 직선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살짝 비켜가는 구성이 오히려 그 핵심적 현상을 더욱 부각 시키는 효과를 거둔다. 이를 테면, 인물이 독백을 하는 형식의 대화체라던가 두 사람의 대화 속에서 작가가 드러내고자 하는 현실적 상황은 테두리에 존재하듯 겉도는 기분이 드는 작품들이 몇 있다. 그러한 구성은 현실에 대한 정확한 직시를 하지 못하는 인물에 대한 비판의식을 드러내면서 그들을 둘러싼 현실이 겉도는 것이 아닌 포괄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 러나 이러한 시도가 가능할 수 있는것은 작가의 탁월한 인물의 추상화와 캐리커쳐로 부터 시작된다. 말 그대로 해당 현실에 전형이라 불리우는 인물들의 특징만을 부각 시킨 채 각 인물의 개인적 개성은 소거 시켜버린다. 드러내려 하는 것은 그러한 인물들의 개인적 탄생이 아닌, 부조리한 인물들의 근원적 원인과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작가 므로제크만의 특별한 인간 통찰을 엿볼 수가 있는 것이다. 대다수는 부조리의 결과가 다름 아닌 모든 구성원들의 이기적인 요구에 의한 시대적 발현이라 생각한다. 물론 그것이 틀린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단순히 단초일뿐, 그에 대한 파장은 상황과 상황이 전개되면서 현재에 이르는것으로 드러난다. 므로제크는 현재의 인간은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적응해나가는 과정가운데에 부조리화 되었다는 특별한 관점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부조리한 현실에서 살아가고 있는 소시민들에 대한 색다른 연민이며 표현인 것이다. 결국 므로제크가 풍자하고 비판하고자 하는 대상은 어쩌면 사회구성원들이 아닌 구성원을 움직이는 특별 소수이며, 제도화된 체계 자체인것이다.
결 국에 이것은 독자와의 동일시를 이루는데 있어서 거부감이 없다. 작품 속 인물들은 모두다 기형적이며 우스꽝스러운 행위를 일삼지만 그것이 독자와 동일시 될 때 막연히 웃을 수만은 없는 특별한 감동과 서글픔을 선사한다.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온상과 세계관은 다분히 연극적 비유와 상징으로 드러난다. 그렇게 되면서 작품자체는 시대와 배경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세계관을 구축할 수 있는 것이다. 역자의 머리말에서도 드러나듯 작품 속 세계는 당시의 폴란드 사회, 그리고 동유럽 국가에 대한 사회적 풍자를 드러내지만 현재의 대한민국 사회와도 연결되는 부분이 아주 많다. 예술의 나약한 낭만주의, 사회의 권위주위와 관료제, 더불어 공상화에 대한 비판과 계급제도는 어느 사회에서나 고민해 볼 수 있는 중요한 문제들이다. 그런 점에서 작가가 구축한 상징적 시공간은 보다 더 큰 보편성을 획득했다고 볼 수 있다.
지 금으로부터 50년 전 아직은 생소한 폴란드 사회에 대한 풍자와 비판은 21세기 대한민국과 매우 근접하게 맞닿아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작가만이 지니는 인간에 대한 매우 특별한 관점과 이를 통해 드러내고 싶어했던 부조리에 대한 비판의식이 그의 연극적 상상력과 맞물려 매우 보편적이면서 독특한 작품 세계를 창조했기 때문일 것이다. 통찰과 비판에 있어서도 새로운 발상과 시도가 필요하다. 통찰과 비판 자체가 지니는 단어의 의미가 끝없는 사고에 대한 깨달음이지만 단편적 교육과 고정관념으로 인해 자칫 고착화가 될 위험이 있다.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이 세계에 대한 올바른 인식에 앞서서 이러한 고착화는 매우 치명적이다. 그렇지만 50년전, 단편집 ‘코끼리’는 인간과 사회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독특한 보편성 구축의 방향으로 이미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