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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제목에도 나오는 은유, 즉 메타포는 A분야의 경험을 이용하여 B분야의 경험을 환히 비추는 방법으로 언어의 직접적인 전달 능력이 부족함을 자인하는 것과 다름없다(P.10)고 이 책을 쓴 망구엘은 규정한다. 그러면서 책을 읽는 사람들을 여행자, 상아탑 및 책벌레라고 칭하는 메타포의 의미를 해석한다. 무엇을 위해서? 인간은 자의식을 가진 존재다. 상상과 희망을 통해 살아남으려고 독특한 언어 능력을 진화시켰고, 그중 하나가 바로 메타포다. 따라서 인간의 재능에서 변하지 않는 부분, 글쓰기와 독서 행위를 근본적으로 규정하는 원리, 즉 메타포를 위해 사용되는 어휘를 집중적으로 분석하는 일은 매우 흥미롭고 교훈적이다.(P.14)는 주장을 입증하고자 함이다. 이를 위해 그는 서양문학을 근간으로 독서와 독자에 대한 개념이 어떻게 탄생하고, 변화해 왔는지 조명한다. 그 조명 속에 많은 문학작품들이 특정의 메타포와 연결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일부는 이미 내가 인지하고 있던 바와 일치하기도 했지만 많은 부분에서는 새로운 독서의 관점을 제시받아서 생각의 폭이 넓어지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책 읽는 사람, 즉 독자가 여행자라는 메타포는 인생을 여행이라고 볼 때 세상이 책이라면 인간은 세상이라는 책을 읽는 독자가 되고 그런 독자는 세상을 여행하는 여행자라는 의미를 지닌다. (망구엘은 종이책으로 한정하는데 나는 그렇게 한정 짓고 싶지는 않다) 즉 독서를 세상을 인식하는 행위로 간주한다. 이 메타포를 이해시키기 위해 망구엘은 출애굽기를 위시한 구약성서,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길가메시 서사시, 단테의 신곡 외의 고전을 망라해 여행의 의미를 설명한다. 신곡의 첫 부분, “어두운 숲을 걷는 내 모습을 문득 알았네”라는 문장에 대한 망구엘의 해석을 읽고는 새삼 이해의 폭이 나와는 많이 차이가 남을 인지했다. 해당되는 메타포와 관련된 설명만이 아니라 텍스트를 읽는 다양하고 폭넓은 시각을 제공받음으로써 전반적으로 생각이 확장되는 느낌이 들었다. 다만 인터넷에 대한 망구엘의 부정적인 시각은 100%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리고 서재가 상아탑이라고 보는 메타포가 등장한다. 원래의 탑은 순수함, 순결함을 의미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탑은 독자의 상아탑으로 그 뜻이 바뀌어 ‘비활동적이고 사회에 무관심하다’는 부정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세상과 거리를 둔다는 의미에서의 상아탑은, 때로는 그런 거리로 인해 세상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여기에서는 햄릿이 중요한 텍스트로 활용되는데 다시 햄릿을 읽게 된다면 망구엘의 이해와 접근법을 참조할 참이다. 잠깐이지만 안토니오 그람시의 시각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마지막으로는 독자가 책벌레라는 메타포가 나온다. 흔히 많이 사용하는 표현이다. 이는 닥치는 대로 책을 읽는 사람이라는 부정의 뜻을 가진 표현으로서 책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사람을 말한다. 세바스티안 브란트가 쓴 바보들의 배, 보에티우스의 철학의 위안, 돈키호테, 보바리 부인 등이 이 메타포를 설명하기 위한 장치로 등장한다. 돈키호테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책과 나의 관계는 무엇인지 되짚어보는 시간을 잠깐 가졌다. 위의 세 메타포에 굳이 연결시키지 않으면서 관계성을 돌아보았는데 결국 각각의 메타포에 일정 부분씩 발을 걸치고 있는 내 모습이 연상되었다. (텍스트에 얽매인 한계가 드러난 지점이라고 하겠다) 어쨌든 이미 읽은 책들이라도 새로운 관점을 인식하기도 했으므로 그런 책들을 다시 읽기를 할 때 참조할 사항은 충분히 많다고 본다. 이 책에 대한 안 좋은 평도 본 적이 있는데 나로서는 큰 불만은 없으며 오히려 흥미롭게 읽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 망구엘과의 첫 만남은 괜찮은 것으로 마무리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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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해서 책만 읽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부류들이 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책을 읽고, 읽고 읽고...그렇게 세월을 보내면 좋지 않을까 싶은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 묻는다. 왜 그토록 책을 좋아하지? 책 속에 무엇이 있길래 그렇게 몰두하지? 바깥은 이토록 밝고 활기찬데 안에서 혼자 그렇게 오랫동안 책만 파고 있다니 얼마나 부질 없는 짓인가! 가끔 책을 읽다말고 나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왜 이렇게 책에 집착하는지. 책만 아니면 산책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이웃에게 더 많은 정을 보낼 수 있을 텐데, 나중에 돌아보면 이 시간을 후회하는 것은 아닐까?
이런 내게 세계적으로 유명한 독서가인 저자가 책을 읽는 행위에 대해 말을 건네 준 책이다. 우리는 이야기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는 유일한 종이고, 그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은유가 필요하다. 은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책을 읽고 글을 쓰는 행위는 꼭 필요한 요소라는 것.
책은 프롤로그, 1,2,3부, 에필로그로 구성되어있고. 짧다. 짧은데 잘 넘어가진 않는다. 저자가 인용하는 인물들의 면면이 현대와 거리가 먼 진지한 대가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마나 잘 읽혀지는 것은 에필로그 부분으로 엠마 보바리, 돈키호테, 안나 카레니나를 예로 들며 독서의 방식에 점수를 주고 있는 대목이다. 돈키호테, 보바리 부인, 안나 카레니나는 모두 책을 좋아하는 주인공들이다. 저자는 엠마 보바리를 책을 게걸스럽게 읽는 책벌레로(소설 속의 인물과 자신을 동일시), 돈키호테는 책벌레이긴 하지만 소설 속 인물과 자신을 분리할 줄 아는 이로 보았다. 안나 카레니나는 셋 중에서 가장 고급독자로 생각하는데 그 이유로 소설을 비판적으로 읽는 점을 들었다.
저자가 나눈 독자의 모습은 이렇다. 여행자로서 독자, 상아탑 속의 독자, 책벌레인 독자. 여행자로서의 독자는 책을 하나의 세상이라고 생각하고 천하를 주유하는 것처럼 책을 읽는다다. 여행자가 길을 걷는 것처럼 독서가는 책 속을 걷는다. 문장으로 이루어진 문단의 숲으로 천천히, 혹은 빠르게 들어가서 길을 잃기도 하고, 보물을 찾기도 한다. 책 속에서 세상을 본다. 독서의 경험과 삶의 경험이 같은 무게로 작용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행하는 방식은 다 다르다고 했다. 크루즈 여행을 선호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배낭여행족도 있는 것처럼 책을 정서적으로 읽는 사람이 있고 효용성으로 읽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여기에서 보나벤투라, 아우구스티누스, 단테를 이야기하면서 누구든 책을 덮은 뒤 그 길 너머로 갈 수 있어야 진정한 책읽기가 완성된다는 것을 알려준다.
상아탑이라고 하면 자연스럽게 지식의 산실이 떠오른다. 하지만 그리스 로마의 풍자문학에서는 꼭 그렇지만도 않아서 "세상사에서 벗어난 괴짜로, 세상 사람들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냉담하고 거만하고 오로지 책만 보는 독자들"이라며 책 속에 파묻힌 사람들을 놀렸다고 한다. 상아탑이 오늘날처럼 긍정적인 은유를 갖게 된 것은 19세기에 들어서라고 하니 은유도 시대의 격랑에 흔들리는 신세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했다는 독서의 긍정성을 들으면 독서에 대한 회의감이 조금은 가벼워질 수 있다.
독서를 거듭하면서 독자는 '책 속의 말 -->생각-->생각을 넘어선 영역-->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증거'의 순서로 생각과 이해가 점점 더 깊어진다. 105쪽
어쨌든 책을 읽는 사람들은 세상과 조금 단절 된 부류로 상아탑이 망루 역할을 하게 된다면 사람들이 보지 못한 것을 미리 보고 경계하는 파숫꾼으로서 충분히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는 독서가가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책벌레에서는 독서광 중에 긍정적인 의미로 '책바보'를 사용하고 부정적인 의미로 '책벌레'를 사용했다. 아무 목적없이 게걸스럽게 책만 읽어대는 책벌레보다는 책을 좋아하고 책을 통해 자신을 알아가고 세상을 읽어가는 책바보가 낫다는 말을 한다.
저자는 세계적인 독서가답게 책을 읽는 행위는 언제까지나, 여간해서는 변하지 않는 인간 고유의 활동일 뿐만 아니라 세계를 이해하는데 필수적 요소라고 말해주니 나처럼 별 목적없이 책만 읽는 책벌레에게는 많은 위안이 되는 내용이었다. 창으로 비쳐들어오는 햇살이 기분 좋게 따뜻한 시간. 할일이 쌓였지만 잠시 미뤄두고 저자를 핑계 삼아 나는 책 속으로 여행을 떠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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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마에서 찾아보니 알베르토 망구엘의 책이 전자책으로만 세 권을 구입했더라. 이 책과 <밤의 도서관>,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이펙트>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이펙트>는 전에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읽을 때 함께 유용하게 읽었지만 리뷰쓴 기억은 없고, 밤의 도서관은 언젠가 읽기 시작해서 맛보기만 한 상태다. 이 책은 길지도 않은데, 사자마자 읽기 시작했지만 어제밤에야 끝낼 수 있었던 건, 아주 굉장히 마음에 안드는 부분에서 덮어버린 후 잊었었기 때문이다. 사실 책 내용은 그림 빼면 굉장히 짧다. 그래도 그림이 간간히 있는 게 좋긴 한데, 망구엘의 명성에 비해 이런 종류의 인문학 책이 얇으면 상대적으로 내용도 빈약해 보일 수 있다. 종이책으로 192쪽인데 전자책에는 두께 개념이 없는지라, 읽으면서 긴지 짧은지를 대략적으로 느끼는데, 이 책은 갑자기 역자 후기가 나와서, 어디가 짤렸나 벌써 끝났나 의아했다. 앞에서 마음에 안든 대목이 있어 읽다 내버려뒀었다고 말했는데, 그건 전자책에 대한 저자의 독단적인 견해였다. 내가 이 책을 전자책으로 읽고 있는 줄도 모르고 그렇게 혹독하게 전자책 문화를 호도하다니, 알고 쓴 건가 그냥 적응하지 못함에 대한 불평을 지적으로 보이게 말한 건가. 내가 웬만하면 세계 최고의 독서가(출판사 소개)이자 대단한 지성인이 쓴 내용을 폄하하고 싶지는 않은데, 이런 터무니없는 주장 앞에서는 할 말을 잃는다. 프랑스의 전자공학 전공자가 한 논문에서 종이책과 전자책을 여행에 비교하여, '종이책을 읽는 독자는 해안을 바라보며 항해하는데 전자책을 보는 독자는 우주 여행을 떠나 까마득히 먼 곳에서 지구를 한 눈에 바라본다'는 말을 인용하며, 이를 반박하는데, 핵심은 이렇다. 나는 정반대로 생각하는데, 세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종이책을 들고 읽으면 물리적 특징과 물적 존재를 의식할 수 있으므로, 현재 읽고 있는 페이지를 다른 페이지, 심지어 다른 책과도 연관시킬 수 있다. 둘째, 논점과 캐릭터를 마음속에서 재구성할 수 있다. 셋째, 광대한 정신 공간에서 아이디어와 이론들을 연결할 수 있다. 반면 전자책을 읽을 때 우리는 대체로 미로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맨다. 프랑스 '전자공학'자들이 어떤 컨텍스트 속에서 저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없기에, 저 인용을 자의적으로 해석할 의향은 조금도 없지만, 저자의 견해는 저렇게 확고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뒷받침하는 납득할만한 근거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한 예로, '전자책 같은 기술장치 사용법이 엄격하고 세부적으로 마련되어 있어, 이를 준수하지 않을 경우 수시로 제한을 받거나 불편을 겪'는다고 하는데 대체 뭘 말하는 건지, 파워를 켜고 끄고 손가락을 눌러 페이지를 누르는 일이 그토록 불편하고 제한을 받는다는 건지 알 수 없지만, 연세가 있으시니 그럴 수 있다고 쳐도, '여행자'라는 독자의 은유에서 여행자의 자유를 억압한다는 생각은 '은유가 된 독자'라는 주제를 다루는 인문적 성격의 책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세계 최고의 독서가' 답게 자유분방하게, 시대와 공간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수많은 책들의 내용을 인용하며, 책을 읽는 독자에게 쓰인 은유를 탐구한다. 그 첫번째 비유가 앞에서 말했듯이 여행자로서의 독자다. 책을 읽는 일은 정말로 인생길의 여행과 딱 들어맞는 비유다. 망구엘은 이 '여행자' 은유의 기원을 <길가메시 서사시>와 <단테의 신곡>, <일리아스> 등에서 찾는다. 오, 작은 배를 탄 그대여, 내 이야기를 간절히 듣고 싶어 풍악을 울리며 항해하는 내 배를 뒤따라왔구려. 넓은 바다로 들어서지 말고 고향의 해안으로 뱃머리를 돌리시오. 자칫하면 나를 잃고 길도 잃을 수 있으니. (주 Dante Alighieri, Commedia, Paradiso II : 1-6) 독서가를 지칭하는 또다른 은유인 '상아탑'은 부정적인 이미지와 긍정적인 이미지가 혼재해 있는데, 이 은유의 유래를 초기 기독교 인들의 은둔적 명상과 고립에서 찾고 있으며, 이러한 상아탑 속의 지식이 현실과 조화 혹은 불화를 이루는 여러 종류의 문학을 탐험한다. 특히, 세익스피어의 여러 작품들 그 중에서도 햄릿을 비중있게 재해석한다. 상아탑적 이미지의 은유는 책벌레와 책바보라는 은유로 심화 분화되고 <돈키호테><마담 보봐리><안나 카레리나>로 이어지며, 책과 현실을 경계를 넘나든 주인공들의 심리를 재해석한다. 특히 플로베르의 엠마를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보다도 더욱 비현실적인 사람으로 해석하고 있는데, 돈키호테는 또렷한 직관을 이용하여 현실과 환상의 차이를 절충하며, 때로 판타지가 의식을 압도하는 바람에 개고생을 하지만 때로는 판타지 속에서도 정신 줄을 놓지 않는 반면, 엠마는 책에 나오는 낭만적 플롯을 자신이 욕망을 불태우는 세계와 동일시했다는 것이다. 즉, 돈키호테가 현실과 픽션을 구분할 줄 알았던 것에 비해, 엠마는 그렇지 못했다는 것. 이에 비해 안나 카레리나는 '타인의 삶을 상상하는 것을 언짢게 여기고, 자신의 삶을 살기를 간절히 원한다. 그러나 그중에는 자신의 삶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게 아무것도 없으므로, 그녀는 작은 손으로 책갈피를 연신 옮기며 독서에 열중한다.' 너무 많은 지식이 깊이 없이 나열되는 듯한 느낌도 들었고, 여러 작품들의 재해석 부분은 흥미를 느끼려고 할 때 끝나버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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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을 가리켜 책벌레라고 일컫는다. 또는 과거 조선 시대의 어느 학자를 가리켜 '책만 보는 바보' 라고도 했다. 책에 파고드는 사람에 대한 통칭이 여러가지가 있는데 알베르토 망구엘은 독자를 가리켜 여행자, 은둔자, 책벌레 라고 표현했다. 책 속의 인물들을 예로 들어 설명했는데 책이 책 속의 인물들에게 어떠한 의미를 주는가에 대한 성찰이다.
그동안 알베르토 망구엘이라는 인물의 저서를 이웃분의 리뷰에서만 만났는데 막상 읽어보니 책에 대한 다양한 시선과 독자로서의 마음가짐, 책이 주는 효과들을 함께 고민해 볼수 있는 시간이었다.
알베르토 망구엘이 독자를 가리켜 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첫 번째 메타포는 '독자=여행자'라는 메타포다. 인생은 여행이므로, 세상이 책이라면 인간은 세상이라는 책(세상책)을 읽는 독자이며, 종이책을 읽는 독자는 여행자라고 할 수 있다. 종이책을 읽는 독자는 마치 세상을 여행하듯, 책장 구석구석을 유심히 살피며 다음 페이지로 넘어간다.
두 번째 메타포는 '서재=상아탑'이라는 메타포다. 오래된 문헌에서 탑이라는 메타포는 순수함과 순결함을 의미하며, <아가>에 나오는 신부와 중세 도상학에 나오는 동정녀 마리아에 적용되었다. 세 번째 메타포는 '독자=책벌레'라는 메타포다. 책벌레라는 개념을 종목에 속하는 곤충에서 유래하는데, 이 곤충은 실제로 먹어치우는 벌레로 일찍이 알렉산드리아 시대부터 "도서관의 청소부"로 악명을 날렸다. 책벌레란 독서를 통해 지혜를 얻지 못하고, 닥치는 대로 책을 읽는 사람을 말한다. (13~14페이지) 저자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길가메시 서사시』, 단테의 『신곡』, 셰익스피어의 『햄릿』, 플로베르의 『보봐리 부인』,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등의 인물들을 말하며 책 속의 인물들과 책이 독자에게 미치는 영향 등을 설명했다. 또한 종이책과 전자책의 차이점에 대해서도 말하는데, 그가 얼마나 종이책을 좋아하는지 알수 있는 부분이었다. 전자책은 자유로운 여행 공간이 아니다. 개념상으로만 봐도 현실감이 부족한 가상공간이다. 한마디로 유령 같은 존재여서 전통적인 연상 기능이 부족하다. (78페이지)
라고도 했다. 나는 종이책을 좋아한다. 언제 어디서나, 어떠한 자세로 읽어도 편한게 종이책 읽기다. 책을 읽다가 막히면 다시 앞장으로 가기도 편해서 종이책을 선호한다. 최근 종이책이 집에 많이 쌓여 보관할데가 마땅치 않아 종이책을 덜 구입하겠다 마음 먹고 전자책을 구입하고는 있는데, 종이책 만큼의 감동은 덜한 것 같다. 전자책을 읽다가도 좋은 내용이면 종이책으로 다시 읽고 싶다 여기고 있으니 말 다 하지 않았나. 아마도 망구엘은 그 말을 하고 싶지 않았나 싶다. 종이책에서 느껴지는 감정들을 전자책에서 똑같이 느낀다고 단언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 또한 그런 말을 강조하고 싶었던 듯하다. 무엇보다 저자가 독자가 책을 읽는 행위를 여행자 라고 표현하는 부분이 마음에 들었다. 활자를 읽지만, 활자 속에서 우리가 가보지 못한 곳을 알아가고, 그 사람들의 면면을 지켜보는 게 책을 읽는 행위다. 그러한 감정들을 여행자로 표현한 부분에 깊은 공감을 표했다. 앞서 말했지만 밥 먹는 것보다 더 열심히 책을 읽는 사람을 가리켜 책벌레라고 말하곤 한다. 닥치는 대로 책을 읽는 사람을 책벌레라고 하는데, 벌레로 표현한 거지만 책을 읽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충분히 이해할 만한 호칭이 아니잖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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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은유에 대해. 사람의 사고는 거의 전적으로 은유에 기대고 있다. 알베르토 망구엘은
‘언어의 직접적인 전달 능력이 부족함’ 때문에 은유(메타포 metaphor)에 의존한다고 하고 있지만, 더 면밀히 보면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사유의 기본적 속성이 무엇과 무엇을 연결시키는 것이고, 그렇다면 은유는 본질적인 것일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독자, 즉 책을 읽는 사람(이는
알베르토 망구엘의 책 제목이기도 하다), 혹은 책 읽는 행위를 이해하는 방법은 당연히 은유에 기댈 수
밖에 없다. 망구엘은 역사적으로(물론 서양의 역사) 독자, 독서 행위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했던 은유로 ‘여행자’, ‘은둔자’, ‘책벌레’라 보고 있다. 사실 이 은유는 매우 낯이 익다. 책을 세상, 세계로 비유하고, 책을
읽는 것을 세상에 대한 여행이라 보는 은유에서 독자는 당연히 세상 여행자가 된다. 책을 읽는 행위가
겉보기로 보았을 때 실천적 행동과는 구분이 되고, 책을 읽는 이들이 현실에 유리된 듯한 모습 때문에
독자는 또한 ‘상아탑’의 은둔자가 된다. 그리고 독자란 책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이들이므로, 책에서 진짜
양분을 얻는 책벌레에 비유하는 것 역시 당연하다. 독자는 여행자이기도 하고, 은둔자이기도 하며, 책벌레이기도 하다.
그러나 망구엘이 독자를 이해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그런 은유를 소환하는 이유는, 단순히
책 읽는 이들이 그렇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것은 아니다. 망구엘은 독자를 이해해온 방식을 역사적으로
살펴보고 있다. 즉, 독자에 대한 인식은 독자나, 독자가 아닌 이들이나 역사적으로 드라마틱하게 변해오고 있는데, 그것을
인식한다는 것 자체가 독서의 역사적 의미를 드러나게 한다고 볼 수 있다. 여행자, 상아탑의 은둔자, 책벌레라는 독자에 대한 은유는 때로는 긍정적 의미로, 때로는 부정적 의미로 쓰여 왔는데 은유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은유의 긍정성, 부정성에 담긴 세상의 시선이 더 의미가 있다. 망구엘의 작업은 바로
그런 은유에 담긴 독서에 대한 세상의 인식을 생각해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망구엘이 그런 독자, 독서의 은유에 대한 역사적 변화, 성격을 보여주기 위해 사용하는 텍스트들은 망구엘의 직업이 왜 ‘독서가’인지를 보여준다. 『길가메시 서사시』, 단테의 『신곡』, 몽테뉴의 『수상록』,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셰익스피어의 『햄릿』,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 등등. 이 기본 텍스트들을 기본으로 고대와
중세, 그리고 근대, 현대를 넘나들며 독서의 의미를 진지하게
탐구하는 망구엘을 보면 경외심마저 든다.
다시 생각해본다. 독서란 무엇인가? 아니
더 구체적으로 나의 독서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망구엘은 책 읽는 행위의 가치에 대해 쓰며, 책 읽는 사람을 위로하고 있지만, 여전히 책을 읽는 것은 상당 부분
무가치한 일일 가능성이 꽤 높다. 무가치하므로 그 가치에 대해 소리 높여 옹호할 필요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드는 것이다(그러나 악착같이 책 읽기를 금하는 권력이 존재해왔다는 걸 보면 책이 꽤 힘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게도 된다). 그러나 다행이다. 이처럼
책 읽는 나를 옹호해주는 망구엘 같은 이가 있으니.
“하나는 상아탑이라는 서재에 머물면서 독서의 한계가 소장한 책과 일치하는 독자로 남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열린 공간으로 독서의 범위를 확대해 아우구스티누스가 제안한 세상책과 맞닥뜨리는 것이다.” (1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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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베르토 망구엘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그래서 이번 책도 출간되자마자 구입해서 허겁지겁 읽었네요. 역시 좋았어요. 그가 풀어내는 독자는 정말 매력적입니다. 여행자, 은둔자, 책벌레로서 독자를 설명하는 이야기들은 하나같이 신선하고, 날카롭고, 따뜻해요.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새로이 보게 되고, 더 깊이 읽게 됩니다. 참 좋았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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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읽을까? 왜?
책을 읽는데 왜 읽는지 모르겠다. 남들이 나보고 왜 그렇게 책을 읽는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전에 山에 많이 다닐 때 왜 그렇게 죽자사자 다니고 있니?라고 물을 때 막상 대답을 못했다. 스스로 반문을 해 봐도 왜인지 잘 몰랐었다. 세상사 모든 물음이 어쩌면 그럴 것이다. 물론 대답하기 가장 어려운 물음은 '왜 사니?'이겠지? 삶은 주어진 것이어서 그 의미가 훨씬 복잡하다. 하지만 책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 것이어서 대답을 할 수 있어야 하겠지만 대답할 말을 떠올리지 못한다. 삶은 모든 사람이 살지만 책은 모두가 다 읽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누가 묻는다면 모른다는 말보다 뭔가를 대답하는 게 좋지 않을까? 요즘 어렴풋이 떠오른 것이 독서는 그 과정과 내용이 일종의 '여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이 상상하는 그 모든 곳으로의 여행. 그것이 책을 읽는 행위이며 어쩌면 목적이다. 그런데 이건 나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독서가들은 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니, 알베르토 망구엘이 그것을 증언하고 있다. 내가 생각을 못하고 있었던 것 뿐이었다.
"인생은 여행이므로, 세상이 책이라면 인간은 세상이라는 책(세상책)을 읽는 독자이며, 종이책을 읽는 독자는 여행자라고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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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토 망구엘이 말하는 독자의 유형. 여행자, 은둔자, 책벌레.
당신은 어디에 속하는 독자인가? 라고 묻고 싶어질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에만 속하는 것이라고 단정지어 말하기도 어려울지 모른다. 독자로 살아가는 우리는, 책으로 세상을 여행하는 것처럼 느끼기도 하고, 배우면서 숨고 싶은 은둔의 장소로 책을 대하기도 하고, 책에 푹 파묻혀 나오지 못하는 상황을 경험하기도 했을 테니까 말이다.
다양한 독자의 모습을 들려주면서, 독자 각각의 독서 스타일을 비교하는 게 흥미롭다. 서로 다른 스타일을 만나는 재미도 있을 것이고, 나의 스타일을 찾아보는 호기심도 있을 것이다. 조금 불편했던 책읽기 습관을 바꿀 기회도 될 것이고, 다른 이의 책읽기 습관이 어떤 모습인지 다양하게 볼 기회도 될 것이다.
세계 최고의 독서가로 불리는 알베르토 망구엘이 들려주는 문학으로의 배움을 즐기는 시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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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장르의 책이다. 이런 류(類)의 책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건 내가 아직 한참 멀었다는 것이다. 책의 초반 부분은 사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차츰 저자의 관점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길가메시 서사시》가 처음 읽히던 시절부터 줄곧 독자는 여행자일지 몰라도 개척자는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독자가 걷는 길은 필자가 이미 걸었던 길이어서, 여행 지도는 이미 완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독자들은 ‘물리적 지리와 역사적 시간이라는 제한을 극복해야 한다’는 점을 의식하고 텍스트를 독파하는 동안 제2의 지리와 역사를 감안한다. 제2의 지리와 역사란 텍스트의 내러티브에 속하는 공간과 시간으로, 독자의 눈앞에서 가상적으로 재현된다.”
책의 표지만 보고 에세이류(類)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이 책은 기원전 점토판에서부터 성경, 길가메시 서사시, 단테의 신곡 등을 예로 들면서 책을 읽는 독자가 시대와 지역별로 어떻게 이해하는지에 대해 다양한 관점을 설명하고 있다. 보통 다른 책들은 책 내용을 분석하고 설명하는데, 이 책은 책을 읽는 독자를 분석한다.
또한, 메타포에 대한 여러 가지 설명이 나오는데, 원전을 제대로 읽어보지 못해서 나에게는 버거운 내용이었다. 이 기회에 서양 고전들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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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입소문으로 듣던 『은유가 된 독자』를 전자책으로 구입할 수 있게 됐네요. '책 중독자들을 위하여'라는 수식어에 감히 숟가락을 얹어 봅니다. 알베르토 망구엘만큼 요란하고 소문난 책 중독자는 아니지만 소박하니 공공도서관(참 감사하게도 집 주변에 크고 다섯 곳의 공립 도서관이 있답니다)을 전전하며 귀여운 수준의 독서 애호가로 살아가고 있거든요. '여행자', '은둔자', '책벌레'를 키워드로 책과 독자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망구엘. 책에 대한 온갖 좋은 것들이 총망라되어 있는 책입니다. 교양으로서의 지식, 사랑을 위한 도구, 강력한 무기, 해방의 통로가 될 수 있는 책. 책만 있다면, 책의 온갖 장점이 제대로 작동한다면 우리들의 세상은 완벽해졌어야 할 것입니다만, 지금의 세상은 어떤 모습인가요? 장점을 역설하며 숭배하는 대상만으로 책이 존재한다면, 책은 기껏 해야 우리가 익히 아는 예배당의 신(神)에 그치고 말 것입니다. 신은 우리들의 세상이 자신의 작품임을 자랑만 할 뿐, 엉망이 되고 억울한 죽음이 난무해도 몰라라 합니다. 큰 뜻이나 있는 것처럼. 큰 뜻이 숨겨져 있다는 말이 우습게 들리지 않게 만들려거든 현실의 악행에 이렇게 쉽게 눈 감아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악이 악을 행할 때 늘 가져다 쓰는 핑계와 너무 닮아 있으니까요. 책도 마찬가지입니다. 책이 꽃병에 꽃처럼 장식에 지나지 않으려거든, 독자는 읽는 노력 이상의 몸가짐이 필요하리라 생각해 봅니다. 책 중독자라고 다른 중독자와 다를 것도 없습니다. 알코올 중독, 마약 중독, 쇼핑 중독이 그리 아름답지 않은 것처럼 책 중독도 책의 진심과는 별개의 것이라서 그리 자랑도 아닙니다. 유희적인 책이지만 망구엘의 마음은 반만 받기로 합니다. 책을 끝내 아름답게 완성하는 것, 그것은 독자의 삶이 아닐까 조심스레 짐작해 봅니다. 삶에 비벼 내지 못하는 수만 권의 독서가 허세와 자기 만족, 눈의 헛고생이 아니라고는 말 못 할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