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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코너
<우리는 너무 많이 보았다>
이상적인 가족.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는 남편과 그의 우람한 어깨에 기대어 행복한 미소를 짓는 아내. 그들 사이에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웃고 있는 아이들. 이런 이들만이 존재할 거라는 환상을 가진 사람이 아직도 있을까? 완벽한 가족에 대한 이상은 깨졌다. 그리고 우리는 환상이 깨지는 것을 너무 많이 봤다. 유진 오닐, 에드워드 올비, 아서 밀러, 도리tm 레싱 등등. 완벽한 가족의 이데올로기를 형성하려고 투자했던 시간만큼 이 이데올로기를 파괴하려는 시간이 소모되었다. 그들의 작업이 실제로 그런 이상이 허상임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할지라고 현대에 사는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이 봐온 우리들은 또 다른 방식으로 그것을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작가에 대한 무례라고 생각되어지지 않을까 고민하지 말자. 왜냐면 예술이란 목적론에 입각해서 바라보면, 즉 작가의 의도에 맞게 그것을 읽어버리면 광고지와 비슷해져버리니까. 하나의 목적이 없다는 것, 그래서 그것으로부터 수많은 목적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 예술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힘이 아닐까?
<팔코너, 데카르트의 좌표>
마약중독자에 형제 살인을 저지른 한 남자를 보기 전에 공간을 바라보자. 팔코너라는 교도소를. 이들이 여기 갇혀있는 이유가 뭘까? 죄를 지어서이다. 그런데 그들은 기존에 있던 법이라는 체계 자체를 무시하거나 파괴하거나, 어쨌든 그것들을 지키지 않았던 자들이다. 그런 자들을 갱생, 혹은 격리의 목적으로 가둔 곳이라면 그 곳은 좀 더 체계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팔코너가 묘사되는 부분들은 너무나 엉성하다. 일단 2가지 사실에서 그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첫 번째가 조디의 탈출이다. 그는 감옥을 너무 쉽게 탈출한다. 그리고 두 번째가 더 월의 폭동 이후의 팔코너의 모습이다. 팔코너의 간수들은 두려움을 숨기지 못한다. 그들은 훈련받은 사람들이 아니다. 누군가의 선동이 있었다면 죄수들이 폭동을 일으킬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실제로 글을 읽는 내내 폭동이 일어나는 순간이 있을 거라는 짐작을 계속 했다.) ‘허술’하다고 표현 할 수 있는 이런 곳에서 왜 죄수들은 탈옥하지 않는가? 무엇이 그들을 그곳에 있게 하는가? 데카르트를 가져와보자. (데카르트는 패러것이 교도소에서 유일하게 읽는 철학자이다. 왜 데카르트인가?) 그의 코기토,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라는 명제는 어떤 증거를 끊임없이 찾아가는 명제이다. 그는 결국 자신이 직접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명제를 찾고 그래서 과학에 의존하게 된다. 그리고 중세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그는 신을 포기해야 했으며 그래서 생각한 것이 이성에 의한 육체, 즉 감정의 통제이다. 그는 신이 없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고, 인간이 스스로 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했다. 그래서 인간이 위대하다는 것을, 동물들은 그저 기계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해야 했다. 그래서 합리적 이성과 비합리적인 감정과 만나는 지점을 반드시 만들어야 했다. 그것이 ‘송과선’이다. 이는 정신(이성)과 육체(감정)이 만나 정신에 따라 육체가 통제받는 기관이다. 송과선이 바로 팔코너이다. 합리적 이성이 감정을 지배하는 곳. 팔코너에서는 모든 감정이 필요에 따라 분출되고 통제된다. 그들의 감정은 팔코너가 제한하는 이상의 선을 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그곳에 통제를 받으며 머물 수 있고 간수들은 그들을 안전하게 감시할 수 있다. 죄수를 통제하는 그 무엇은 폭력도, 억압도, 회개하려는 마음도 아니다. 합리적 이성이라는 이름이다. 그것들은 물론 죄수가 아닌 자들과 죄수를 분리시켜주는 것이기도 하고 죄수 스스로가 자신이 죄수라고 인식하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들은 팔코너에서 철저하게 죄수의 신분으로 옳다고 생각되는 어떤 것에 의해 통제된다. 그런 예들은 많지만, 정말 수도 없이 많지만 가장 큰 사건은 패러것의 마약치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치킨이 말한다. “우릴 기니피그처럼 실험할 생각인 거야. 우리는 실험쥐라고. 예전에 후두염에 걸린 녀석이 하나 있었지. 새로운 약을 그놈한테 쓰더군. 이틀인가 사흘인가 연속으로 주사를 놨어. 하지만 의무실로 데려가기도 전에 놈은 결국 죽어버렸지.”
간호사가 친절하게 말한다. “우리도 자네가 언제 알아챌지 궁금했어. 자넨 거의 한 달 동안 가짜 약을 받았어. 이제 깨끗해진 거야, 친구.”
이 두 인물의 대사에서 차이점은? 앞의 것은 죽음을 뒤에 것은 치료를 의미한다는 것. 이 두 인물의 대사에서 공통점은? 그들이 모르는 사이에 무엇인가가 주입된다는 것. 즉 통제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약이 치료된다는 것은 좋은 것인가? 적어도 패러것에게는 그렇지 않는 듯하다. 사실 그들에게는 그렇게 할 권한이 없다. 그들이 마약이 나쁘고 치료되어야할 대상이라고 여기는 것은 어떤 법적인 기준인데, 모순적이게도 패러것에게 ‘진짜’ 마약을 투여해야한다고 정한 것도 법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자신의 합리적인 어떤 것을 믿고 패러것에게 그것을 시행했고 패러것은 그것을 몰랐다. 그는 통제받는지도 모른 채로 통제받고 있었다. 이것이 팔코너가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통제하는 기준도, 통제받는 것도 아무것도 모르는 곳. 그러나 통제되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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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속도감 끝내주고 시작부터 흥미진진해 그렇다고 문장이 빠지는 것도 아니야 뭐 괜찮다는 뜻이지 인간이란 무엇인가 생각해보게 하는데 또 감옥이란 무엇인가 그려보게도 해 근데 감옥을 너무 엉터리로 지어놓은 거 아니야? * 패러것의 아버지, 말 그대로 패러것의 친부는 패러것이 어머니의 자궁에서 살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의 생명이 꺼져버리길 원했다. 그러니 흙에서 흙에서 지혜를 끌어모으는 이 꽃의 도움 없이 패러것이 어떻게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었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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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쩌면 패러것은 자신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줄곧 알고 있었으며 누군가로부터 그 말을 듣기 위해 평생을 기다려왔는지도 몰랐다. 만약 조디에 대한 사랑이 실은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었다고 한다면, 동시에 그것은 그가 잃어버린 청춘에 대한 집착일 수도 있었다. 패러것에 비해 조디는 달콤한 숨소리와 피부를 가진 청춘이었고, 그런 그를 안고 있을 때면 패러것도 잠시나마 푸른 젊음을 느낄 수 있었다. 친구나 연인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젊은 시절 찾아갔던 아름다운 해변의 오두막집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패러것은 그렇게 자신의 청춘을 그리워했다. 자기 자신과 사랑에 빠지거나 지나간 청춘을 사랑하는 것은 그로서는 결코 이해하지 못할 과거의 일에 집착하는 성향의 미인을 사랑하는 것보다 쉬운 일인지도 모른다. 밀드레드와 사귈 때만 해도 아침식사에 필요한 안초비, 온도가 딱 맞는 목욕물, 늦게야 찾아오는 오르가슴, 레몬처럼 노란 벽지, 화장실 휴지, 리넨 침대보, 전등갓, 만찬용 식기, 리넨 식탁보, 가구, 자동차 등 그녀의 취향들을 배워야만 했다. 뿐만 아니라 밀드레드는 패러것에서 레몬옐로색 국부 보호대까지 사주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게으르고 불가능한 일인지 모르지만 달콤한 경험이 될 수도 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다니, 이 얼마나 간단한 일인가!
* 표지도 무섭고 교도소 이야기라고 해서 어떤 무시무시한 일들이 펼쳐질까 두근두근 했는데 어라 이렇게 사랑이 넘칠 줄이야
* "좀 더 오 내 사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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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연구하는 종족이 있다면 아마 인간밖에는 없을 것이다. 왜그럴까, 신비해서일까, 아니면 궁금해서일까. 각양각색의 인간들을 연구하면 어떤 종류의 공통점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 인간 본연의 어떤 그라운드. 가장 밑바탕이 되는 무언가 말이다.
세상이 혼탁하고 정의가 사라진 미국. 가정이 파괴되고 사회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한 인간이 꿈틀거린다. 형을 죽여 형무소에 갇힌 주인공. 그곳에서 인간 막장의 끝을 본다. 살인자, 동성연애자, 사기꾼 등 하지만 하루하루 시간이 흐를수록 작지만 인간애를 느낀다. 자포자기한 상황에서 다시금 시작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있다면, 그건 한번쯤은 살아가게금 만드는 끈끈한 인간애가 아닐까?
감옥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상황들을 통해 인간의 희망을 얘기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보여준다. 미국의 대작가, 존 치버의 능력아닌 능력일 것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희망이란 무엇인가를 가장 잘표현한 소설이 여기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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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만 줄곧 들어왔던 존 치버의 소설을 이제야 접한다.
표지는 이것이 그닥 가볍지 않은 내용임을 암시하지만 요사이 묵직한 힘의 소설들이 그리웠던 차에, 타임지 선정 최고의 영미소설 100선에도 꼽힌 이 작품을 선택한 것이다.
주인공인 패러것은 마약 중독과 형을 살해한 죄로 팔코너라는 이름의 감옥에 들어온 사람이다. 그래도 한때 대학의 교수였던 사람이 감옥에 들어간 것이다. 훨씬 적응이 힘들 것이라고 생각한 건 비단 나만이 아니리라. 범죄자들이 모여있는 곳이 감옥이라는 인상은 그들을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뿌리깊은 편견에 기인한다. 그러나 책을 읽으며 그들이 키우는 고양이들을 대량 학살하는 교도관들과 사람을 살해하거나 해친 그들이 다르지 않게 보이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감옥의 그들은 고양이를 아끼고, 누군가 자신의 사연을 끊임없이 들어주기를 원하는 사람들이다. '내 얘기를 좀 들어봐.' '내 얘기를 해주지.' 등 끊임없이 소통하고 싶어하는 그들이 안쓰럽다. 그들의 소통은 단순한 외로움에서 시작하여 정체성을 지키고자 하는 노력으로까지 보인다. 가족들의 냉대와 사회의 무관심속에 자신이 잊혀져 가는 것은 아닌지, 자신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두려워하게 되는 것이다.
감옥의 죄수들은 크리스마스 트리와 함께 사진을 찍어 가족에게 보내주기로 한다.
치킨은 자기 차례가 되자 손에 들고 있던 신청서를 내보였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북극, 고드름 가, 산타클로스 부부 앞.' 사진사는 활짝 미소 지으며 나머지 죄스들과 치킨의 농담을 공유하고 싶다는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곧 장엄한 분위기까지 풍기는 치킨의 외로움을 알아차렸다.
그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길 원한다. 감옥 밖의 자신의 존재를 잊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맺고 있던 관계가 기억 속에서 끊임없이 재생되기를 바란다. 그것은 곧 정체성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 아닐까 생각한다. 때문에 이야기를 들어주는 그 어렵지 않은 행위에 그들은 보상까지 한다.
그러한 감옥에서 그들이 켜 놓은 텔레비전은 그 아이러니를 잘 드러내준다. 어떤 형태의 삶과 죽음에도 아랑곳없이 무차별적으로 방송되는 TV의 아이러니는 피상성과 우연성에 있었다.
어쩌다 마약 중독자가 되었나. 하는 반복적인 물음. 그에 대해 패러것이 내놓는 답은 그의 가족들이었다. 그가 세상에 태어나지 않기를 바랐던 아버지. 강박적인 형과 어머니. 그 모든 것을 지켜보며 남편에 대한 사랑을 잃어갔던 아내. 습관적인 마약복용과 가족에 대한 불안감은 그를 극단의 상황에까지 몰고 간 것이다. 결론적으로 그는 감옥 밖에서도 외로운 남자였다. 그가 감옥 안의 사람들을 만났을 때, 나는 그가 진정한 인간들과의 관계를 맺은 것이라 생각했다. 비록 고립된 장소지만 그는 새로이 시작할 '인간적인 어떤 것'을 그곳으로부터 얻은 것은 아닐까. 조디와의 관계, 치킨이라 불리는 이와의 관계, 그리고 토마토를 가져다주던 간수와의 관계. 그리하여 그가 새로운 삶을 찾아 감옥을 나왔을 때, 아이러니하게도 어떤 강박적일정도의 기쁨을 느꼈던 것은 아닐까.
"자네한테 말해주고 싶은 건 모든 게 실수라는 거야, 그것도 끔찍한 실수. ... 어떤 여행이든, 심지어 바보가 하는 여행이라도 그 끝엔 황금 단지나 젊음의 원천, 전엔 결코 본 적이 없는 바다나 강, 아니면 최소한 구운 감자를 곁들인 비프스테이크처럼 좋은 뭔가가 반드시 있기 때문이지. 모든 여행의 끝에는 반드시 좋은 뭔가가 있어야 하고,"
이러한 치킨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그들을 범죄자로 만들고 소외시킨 세상에 대한 분노와 그 끝에서 존재할 것이라고 믿는 희망. 너무나 인간적인 욕망과, 인간적인 좌절과, 인간적인 공감이 있던 <팔코너>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