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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는 길에 대한 성서적, 신학적 성찰을 담은 책이다. 단순히 성경의 어떤 한 부분을 들어서 해석을 한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의 틀을 가지고 이 부분을 다루고 있다. 저자는 출애굽기의 탈출로부터 바벨론의 유배 생활까지의 모습을 통해 오늘의 우리에게 말하고자 한다. 그 네가지 키워드는 이집트, 시내산, 예루살렘, 바벨론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에서 노예로 있었다. 압제로부터의 해방 그것이 바로 출애굽기의 이야기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탈출한 그들은 마침내 시내산으로 간다. 저자는 시내산으로의 이동을 이렇게 표현한다. “이 노예 출신의 민족에게만 혁명이 아니라 성경 이야기 안에서만 혁명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위한 혁명이었다”(p. 47)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은 율법을 받는다. 그리고 그들은 마침내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다윗과 솔로몬을 통해서 왕조를 수립한다. 솔로몬은 강대한 제국을 탄생시키지만 그는 하나님의 뜻에 무관심한 제국을 만들어 버렸다. “예루살렘이 새로운 이집트가 되었다. 새로운 파라오가 등장했다. 그의 이름은 솔로몬, 다윗의 아들이다”(p. 65) 결국 솔로몬 사후에 이스라엘은 나뉘었고, 그들은 바벨론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이집트에서처럼 노예가 되었다. 하지만 이제는 과거와 같은 출애굽이 아닌 새출애굽을 경험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저자가 말하는 바이고 도전하는 바이다. “진짜 문제는, 궁극적 압제자는, 모든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거하는 무엇이다. 그들이 압제를 당하는 진짜 이유는 인간이 폭력과 죄와 죽음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이집트가 있다. 거기에서 우리는 출애굽을 해야 한다.”(p. 87) 이제 다시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며 완성시켜 예루살렘을 이끌어야 할 분이 또 생길 것이다. 이 분은 솔로몬과는 전혀 다른 분이다. 솔로몬보다 더 훨씬 더 위대하신 분 솔로몬이 지은 성전보다 더 위대하신 분 바로 예수님이다. 그렇지만 이 예수님은 솔로몬과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통치하셨다. “예수는 우리가 얼마나 쉽게 잘못된 길을 택할 수 있는지를 아신다. 잘못된 길을 택하면 우리는 다시 과거의 그 생활로 돌아가서, 폭력이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생각을 붙잡을 것이다. 이 순환을 깨는 유일한 길은 누군가 그것을 흡수하는 것이다. 새 출애굽의 참 지도자는 인간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방식으로 권력을 사용하는 것을 영원히 거절해야 한다.”(p. 129) 성경을 읽으면 우리는 구약과 신약이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맞아 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그러기에 구약과 신약은 단절될 수 없고 어느 하나만 중요하다고 할 수 없다. 구약을 모르고 신약에서의 예수님께서 하신 것을 이해할 수 없다. 또한 신약을 모르고 구약만 읽는다면 기독교는 율법주의 종교로 밖에 되지 않는다.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거룩한 백성이 되기 위한 그러면서 현실에게 살아가는 법을 가르치신 것이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되어졌다. 그런데 또 다시 사람들은 과거의 시내산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그것을 바울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바울은 모세의 관습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 사람들의 고집을 일종의 폭력으로 본다. 그가 반대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가져오신 자유와 해방을 대체하는 종교의식이었다.”(p. 151) 지금의 현실도 바울이 비판했던 것과 다르지 않다고 저자는 이야기 한다. 교회도 사회도 제국이 되어 버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을 외면한다. 종교적 의식만 넘쳐날 뿐이다. 그럼에도 저자는 예수님은 교회를 구원하고 싶어하신다고 말한다. “예수는, 복음을 창조세계 전체가 창조주와 화해하는 것으로 전하지 않고 죄를 처리하는 과정으로 축소시키는 교회를 구원하고 싶어 하신다.”(p. 255) 저자의 마지막 말이 참으로 와 닿는다. “우리가 예수를 기억하며 이렇게 행하면, 이 세상은 결코 전과 같이 않을 것이고, 우리도 결코 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곧 우리가 세상에 선포하는 우리의 믿음이다.”(p. 258) 저자의 성경 해석에 있어서 지나친 알레고리컬한 해석이 엿보이는 부분이 간간히 보인다. 솔로몬의 세입이 666달란트를 거두었는데 이것이 계시록에 나오는 666라는 부분은 신약에 나오는 의미를 구약과 동일시키는 부분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자의 메시지가 약화되지 않는다. 신구약을 넘나들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목적과 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목적 그리고 교회를 세우신 목적을 저자는 차분하면서도 논리적으로 그리고 비판적으로 써내려가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 땅에 교회를 향한 희망의 메시지도 잊지 않고 있다. 단순하게 교회 비판의 책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정말 믿는 성도라면 꼭 고민해야 할 문제를 솔직하게 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진지한 문제 의식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했으면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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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제목만 봐서는 이 책이 가지는 독특한 필체와 어휘 사용, 그리고 구약과 신약을 꿰뚫어 조목조목 파고 들어가는 성경 해석의 묘미를 느낄 수 없을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모세의 출애굽 사건부터 현대 교회가 아우르는 모습들에 이르기까지 인류 역사의 많은 단면들을 하나의 일관된 시선으로 바라보고 해석한다. 그 시선은 바로 하나님이 억압받고 압제당하는 자의 탄식과 부르짖음에 반응하신다는 것이다. 모세를 세워 애굽의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탈출시킨 하나님의 마음, 그리고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의 사십 년 세월 동안 이런 저런 일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우상을 섬기며 숱한 죄악을 저질렀을 때의 하나님의 마음, 그리고 귀한 지혜를 허락해준 솔로몬이 타락하는 것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그로 하여금 병 들고 헐벗고 굶주린 자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게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 그 모든 것들을 저자는 창조주 하나님의 긍휼이라는 키워드로 풀어내고 있다. 그리고 이 땅에 하나님의 그 사랑과 긍휼을 전해야 할 교회들이 지금 시대에 와서는 그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역사의 반복이기도 하다. 압제 당하던 자들이 압제하는 자로, 또 다시 압제 당하는 자로... 한 가지 희망적인 것은, 지금 이 시대의 타락하고 힘을 잃은 교회의 모습도 역사의 한 부분이며, 역사는 흘러서 결국 어 둡고 척박한 이 땅에 하나님은 귀를 기울이실 거라는 것이다. 아니,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 분은 지금도 이 땅에서 힘을 잃 고 쓰러져가는 교회와 죽어가는 땅을 놓고 탄식하며 부르짖는 마른 뼈들의 울부짖음에 귀를 기울이고 계시다. 단지 아직 그 부르짖음이 세상의 악한 소리보다 작은 것일까, 아니면 그 소리의 간절함이 덜한 것일까. 하나님은 항상 약하고 힘 없는 자들의 편이셨다. 약한 우리로 강하게 만드셨고, 가난한 자로 부한 자를 부끄럽게 하셨다. 지금 한국 교회는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가? 교회는 힘 없고 가난한 자들에게 등을 돌린 지 오래다. 부자 성도들의 피를 빨고 정치와 권력에 욕심을 내며, 외모와 드러내기와 생색내기에 혈안이 된 뚱뚱하고 탐욕스러운 공룡으로 변해 버렸다. 이 책은 성경 해석의 학문적인 의미나 그 내용의 깊이를 떠나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잃어버린 한국 교회에 경종을 울리는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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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전이 궤짝에 짤랑하고 떨어지면, 그 즉시 영혼은 연옥에서 천국으로 간다.” 수도사 테젤이 면죄부를 팔며 한 말이다. 이렇게 모아진 돈으로 화려한 성베드로 성당이 건축되었다. 대한민국의 교회도 나날이 커진다. 그리고 화려해진다. 여의도순복음교회 46만명, 금란교회 12만명, 광림교회 8만명, 소망교회 6만명... 주일마다 거대한 교인들이 교회에 모인다. 대한민국의 대통령도 기독교인이다. 그런데 기독교는 교회 밖에서 개독교로 불린다. 그리고 대통령은 범죄자 취급을 당하고 있다. 사람들은 동쪽에서 옮아 오다가 시날 지방 한 들판에 이르러 거기 자리를 잡고는 의논하였다. "어서 벽돌을 빚어 불에 단단히 구워내자." 이리하여 사람들은 돌 대신에 벽돌을 쓰고, 흙 대신에 역청을 쓰게 되었다. 또 사람들은 의논하였다. "어서 도시를 세우고 그 가운데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탑을 쌓아 우리 이름을 날려 사방으로 흩어지지 않도록 하자." (창세기 11:2-4) 모여만 있고 흩어지지 않는 교회. 교회 안에서만 복음이 회자되는 교회. 개인의 복과 행복만을 가르치는 교회. 그리고 이웃을 향해선 전쟁을 선포하는 교회. 교회는 커가지만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구원은 개인의 가치로 축소되었고, 언젠가 큰일이 일어나면 세상은 멸망해 버릴 것이기 때문에 그때까지 조용히 착하게 살면 된다고만 가르친다. 세상은 악이기에 전쟁의 대상이지 변화의 대상이 아니다. 교회가 세상을 버렸다. 천국을 파는 화려한 상점, 교회. 이것이 정말 예수님이 바랐던 교회의 모습일까? 이 책의 원 제목은 'Jesus wants to save christians'이다. 예수님은 기독교인들을 구원하기 원하신다. 재미있다. 그런데 사실이다.
“나더러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마태 7:21) 출애굽을 통해 그리고 많은 구약성경을 통해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시는 하느님을 강조하는 랍 벨과 던 골든은 돈과 권력을 움켜쥐고 압제자의 자리에 올라섰지만 세상의 조롱거리로 전락한 오늘날의 교회에 경종을 울린다. 구원은 내 머릿속 문설주에 묻어 있는 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어린양의 피로 십자가에서 홀로 죽으셨고 이 세상과 모든 인류를 위해 그 피를 적시셨다. 그는 진정으로 이 세상과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돈과 권력, 교회 안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 이웃에게로 울부짓음이 있는 곳으로 나가야한다. "이 우주의 문설주에 피가 묻어 있기 때문이다." p2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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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속에 수 많은 인물들을 믿음이 아닌 또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어떨까? 경제학적인 관점. 경제력. 사회적응력. 리더쉽......... 아마도 많은 부분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결과들이 보여지지 않을까 싶다.
"네 이웃의 탄식에 귀를 기울이라" 이 책을 읽으면서 자신이 주어진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바라보는 시각은 하나의 정답으로 향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 하나에 만족함이 없는 인간들의 삶. 순간의 만족감은 있겠지만 그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끝없이 더 많은 것들을 원하고 집착하는 모습들
인간의 본성이 얼마나 쉽게 약한 자에게 해를 끼치면서까지 특권을 지키는 일에 권력을 사용하는지 그 죄가 구조화되어 사회에 뿌리를 내리면 이집트와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것을 강조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초극단의 이기주의 사회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가족도 한 집에 살고 있는 사람이 아니면 키우는 강아지보다도 못하게 생각한다는 뉴스를 접하면서 충격을 받았다. 나에게서 시작이 되고 나에게 주어지는 것들과 나에게 미치는 영향들을 먼저 생각하고 움직이는 세대속에서 우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진정으로 가난한 자 과부와 고아의 친구이며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이 되어 줄 수 있을까? 외면할 때가 더 많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 생각한다. 지하철에서 동전 바구니를 놓고 앉아 있는 그들에게 우린 도움보다는 아마도 앵벌이를 가장한 돈벌이겠지 하는 생각들 이웃을 위해 기부하기 보다는 아마도 그들에게 기부되어진 금액이 먼저 떠오른다면 우리에겐 하나님의 사랑과 말씀이 머문 흔적조차도 느낄 수 없는 그런 모래바람 부는 사막과 같은 건조함만이 남아 있는 모습일 것이다.
이럴수가 라고 하지만 우리들의 삶속에서 이와 같지는 않지만 다른 어떠한 모습으로도 행하였거나 접했을 만한 일들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났던 그때를 다시금 생각해 보자. 아마도 모든 것들이 풍족하여 삶이 행복할때보다는 아픔속에서 어려움속에서 진정한 하나님의 존재와 사랑을 경험했을 것이다. 나에게 그렇게 다가오신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도 그와 같은 이들에게 나누고 공유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우리 이웃들에 탄식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일 것이다. 마주 잡을 수 있는 두 손과 함께 걸을 수 있는 두 발과 그리고 볼 수도 들을 수도 있는 것들을 나만의 것이 아닌 더불어 함께 할 수 있는 것들로 이루어 갈때 우린 하나님의 사랑을 몸으로 실천하며 느낄 수 있는 자들이 될 것이다. 따뜻한 사람. 따뜻한 사람들이 가득할때 이 땅에 하나님의 말씀은 정착되어 질 것이다.
교회는 커져만 간다. 그 커져가는 교회를 유지하고 관리하는 것만으로도 벅참이 있다. 그래서 주위를 둘러보는데 움직임이 둔할 수밖에 없다. 더 크게 더 많이 늘려야 하고 키워야 하기에 나눔에게 정말로 인색하다. 또 그 인색함이지만 그것으로 크게 알려지기를 위해 머뭇거리지 않는 다는 것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깨달아 가는 지혜의 영이 함께 하기를 소망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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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영서 원제는 '예수님은 기독교인들을 구원하고 싶어하신다'입니다. 그런데 번역된 책 제목은 '네 이웃의 탄식에 귀를 기울이라'입니다. 얼핏보면 서로 연관되지 않는 것 같은 제목입니다. 그러나 이 두 제목은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중심적인 내용을 서로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을 뿐, 결과적으로는 같은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이 책의 영서 원제는 하나님(예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독교인들을 구원하고 싶어 하십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 앞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자로서 제사장 나라로서의 사명, 곧 다른 이들을 구원하는 사명을 감당하며 살아가야 하는데, 그 사명을 저버리고 하나님의 뜻과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벨론 유배(유수)라는 하나님의 심판이 그들의 앞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저자가 말하고 있는 구원은 영혼 구원을 넘어 압제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합니다.)
다음으로 이 책의 한글 제목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웃의 탄식에 귀를 기울이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먼저 경험한 자로서, 구원을 필요로 하는 이웃의 탄식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을 구원함으로써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을 세상에 소개해야 합니다. 그것이 제사장 나라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저자는 우리가 그러한 사명을 잊고 살아가고 있기에 하나님의 심판 앞에 놓여 있으며, 따라서 다시금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해야 하는 처지에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독교인의 사명을 설명하기 위해 저자는 이집트에서부터 시작하여 시내산과 예루살렘, 그리고 바벨론으로 이어지는 이스라엘의 역사적 흐름을 간략하게 축약하여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부를 때 '창조의 하나님'보다는 '우리를 이집트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으로 더 많이 부르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고통에 찬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시는 분이시며, 그 부르짖는 자들을 압제에서 구원하시는 분이시라고 설명하면서, 출애굽이야말로 하나님의 성품을 우리에게 가장 잘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신 뒤에 그들을 제사장 나라로 삼아 자신이 행한 구원의 사역을 계승하도록 하셨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의도가 시내산에서 계시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한 뒤에 그러한 하나님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방식의 삶을 살아가기 시작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셨던 것처럼 가난한 자들을 구원하는 삶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압제하고 착취하는 삶을 살아가기 시작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정점에 솔로몬이라는 인물이 있었음을 지적합니다. 이것은 대단히 충격적인 지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말년에 하나님을 떠나기는 했지만 그래도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인물이었다는 이 인물에 대해 우리는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자가 솔로몬에 대해 내리고 있는 평가는 지나치게 가혹하다고 생각될 정도입니다.
저자는 솔로몬이 새로운 파라오의 자리에 오른 인물로서 이스라엘을 새로운 이집트로 만들어 버렸다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에 의해 과거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겪었던 비참한 노예 생활이 이스라엘 땅에서 다시금 재현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스라엘 땅의 그 노예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니라 우여곡절 끝에 살아남은 가나안 원주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 대한 가혹한 대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겪었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에 대한 그러한 대우가 율법에서 금하고 있는 바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의 잘못은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솔로몬은 그들을 동원해 성전과 궁궐을 건축한 것 뿐만 아니라 여러 요새 도시들을 건축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병거와 말들을 이집트에서 수입해 왔습니다. 그리하여 강력한 패권 국가, 곧 제국을 이루었습니다. 힘으로 다른 나라들을 압제하는 초강대국을 이룬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제국은 하나님께서 바라시던 이스라엘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제사장 나라로서 기능할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멀어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바벨론에 끌려간 그들이 이집트에서 노예생활하던 그들의 조상들처럼 하나님께 부르짖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다시 구원하셨습니다.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하셨고 다시금 제사장 나라로 살아갈 기회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저자는 그 기회를 여는 일을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셨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과 또 다른 다윗의 아들(자손)인 예수 그리스도를 대조하면서, 솔로몬이 세우고자 했던 나라는 제국이었지만, 예수님께서 세우고자 하신 나라는 하나님이 뜻하신 제사장 나라였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교회는 이러한 예수님의 뜻을 좇아 제사장 나라로서의 기능을 감당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가진 지위나 권력으로 다른 이들을 압제하는 그런 삶이 아니라, 그 힘으로 가난한 자들, 압제받는 자들을 구원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세상에 소개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저자의 설명을 통해 교회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며, 기독교인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 볼 수 있습니다. 영혼 구원에만 초점을 맞추고 가난한 자들, 압제받는 자들을 구원하는 일에 무관심했던 것에 대해 깊이 반성하였습니다. 특별히 저에게 도전이 되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을 우상으로 만들지 말라'하신 이유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인 우리들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저자의 주장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을 드러낼 도구로 자신의 형상대로 지어진 인간을 선택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이랍시고 우상 따위를 만드는 것이 필요치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저자의 주장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책임이 주어져 있는가 하는 것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삶에 따라 하나님의 형상(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세상에 온전히 드러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을 소중히 여기시는 분이시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에 드러내지 못할 때 그에 대한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실패하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최종적인 판단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실패한 이스라엘의 뒤를 좇아가고 있으며,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떠난 솔로몬의 뒤를 따라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끝에는 바벨론 유수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그 길을 걸으며 돌이키지 않고 있으니 정작 예수님께서 구원하셔야 할 사람들은 불신자들보다도 기독교인들이 우선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교회를 향해, 그리고 기독교인들을 향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네 이웃의 탄식에 귀를 기울이라. 그리고 그들을 구원하라. 그리하여 내가 구원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그들이 알게 하라." 바로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음성을 이 책은 너무도 분명하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고자 하는 기독교인이라면, 그리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를 고민하고 있는 기독교인이라면 절대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책입니다. (2011년 들어 제가 읽은 책 중 단연 최고라고 할 수 있는 책입니다. 별 여섯개가 아깝지 않습니다. 강력하게 추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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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교회를 향해 쏟아지는 비난의 목소리속에서 교회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들이 많다. 세상을 변화시켜야 할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고 세상을 닮아가는 안타까운 모습들을 보며 왜 이렇게 되었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되는데 이 책을 쓴 랍벨목사는 이것이 현재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왕국을 세우고 솔로몬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던 때부터 잘못되어 왔고 그 잘못을 우리가 지금도 똑같이 답습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들은 아주 오래전에 믿음의 선배들이 빠져나왔던 길로 다시 되돌아가 도리어 압제자가 되고 하나님과 대적하는 무리가 되어가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의 영어제목이 “예수께서 기독교인들을 구원하고자 하신다, Jesus wants to save christians"이다. 우리가 구원받은 존재로 하나님이 주시는 큰 복을 받아 배 떵떵거리며 나만의 만족을 위해 사는 것이 진정한 교회의 모습인지를 다시한번 돌아보게 한다. 압제에 시달리고 가난에 지쳐 있으며 절망의 늪에 빠져 울부짖는 이들의 아우성속에서 “이들에게 희망을 주지 못하는 교회는 나와 아무 상관이 없다”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가슴 떨리는 두려움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 교회는 그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는 집단이 된다. 예수님께서 왜 이 땅에 오셨는가? 출애굽의 사건속에서 울부짖는 이들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회복시키셨지만 왕국을 세우고 부자된 그들은 어려운 이들을 돕지 않고 노예로 삼아 노역을 시키며 강한 자가 된 것을 누린다. 그러나 이땅에 오신 하나님의 어린 양은 강한 자들을 위해 오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약한 자들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다고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 기독교인들의 삶이 강한 자가 되기 위해 기도하고 노력하기 보다는 아버지께서 독생자를 내어주신 뜻을 받아들여 어려운 이들이 고통받을 때 같이 고통받고, 그들이 기뻐할 때 기뻐하는 모습이 되어야 할 것이다. 노예로 살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출을 받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를 받았다. 그 다음에 그들은 밭의 모퉁이는 수확하지 말고 첫수확에서 놓친 올리브도 따지 말고 미처 따지 못한 포도도 그대로 두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들 가운데 사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다. 출애굽이라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삶에 늘 살아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알려주는 말씀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기억해야 한다. 무조건 주면, 무조건 주시는 하나님을 기억하게 된다. 압제 당하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면 내가 압제당할 때 받은 은혜를 기억하게 된다. 예수를 믿고 침례를 받아 성만찬에 참여하는 사람은 예수의 살과 피을 통해 모든 것이 하나님과 화해되었기에 바울은 이렇게 된 모습을 ‘새 인류’라고 했다. 교회는 새 인류가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는 곳이다. 교회가 특정 부류의 사람들만 끌어들이는 곳으로 알려지는 것은 위험하다. 자신과 맞는 사람들과만 살면서 다른 관점은 듣지 않고 뻗어나가고 확장하고 개방하지 않으면 새 인류는 위기에 처한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최신 유행을 접할 수 있는 세련된 곳으로 알려지면 매우 위험하다. 교회는 자신의 육신이 찢기고 피가 쏟아지는 가운데 이 세상을 치유하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권위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 기독인의 권위는 우리가 얼마나 권력을 잘 추구하고 로비를 잘하고 사람들을 잘 조직해서 승리를 거두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우리의 몸이 찢기고 피가 쏟아지느냐에 달렸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인이 정치적으로 사람들을 조직하고 정치력으로 자신의 뜻을 관철 할 것이라고 협박하기 시작하면 많은 사람이 예수로부터 등을 돌린다. 그렇게 하면서 예수를 따르는 이들은 그것이 하나님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로마의 방법을 사용해서 카이사르의 언어로 말하는 것이고, 많은 사람이 거기에서 솔로몬의 악취를 느낀다. 악취를 풍기는 교회를 주여 용서하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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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포스트콜로니얼 해석이나, 마이너리티 성서해석으로 바라본 성서에 대한 책이다. 이 책은 예상외의 책이었다. 책의 제목으로 볼때 아마도 현실세계의 약자들, 아프리카의 난민들, 착취를 당하고 고통당하는 현실세계의 연약한 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할 것 같았기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은 성경에 대한 해석과 같은 책이었다. 물론 현실세계의 고통당하는 자들의 이야기도 담겨있다. 그러나, 이 책의 대부분이 할애한 내용은 성경에 대한 해석이다. 그리고 그 관점은 포스트콜로니얼 해석이다. 제국의 입장이 아닌 약자들의 입장에서 읽어낸 이야기이고, 이 관점으로 성경 전체를 꽤 심도있고, 꽤 괜찮은 통찰력으로 읽어내어 쓴 글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참고한 주석부분도 개인적으론 재미있게 읽었다. 그가 인용한 책들은 꽤 유명한 학자들의 책이기 때문이다. 톰 홀랜드, WBC 주석의 존 더햄, JPS Torah 주석의 사르나, 대가 월터 부르그만, 에른스트 예니, 요수아 헤셀,노만 갓월드, 호슬리, 도미닉 크로산 등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거장들의 책을 인용하고 거론한다는 것만으로도 이 저자가 단순한 짧은 지식으로 쓴 글이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해준다. 물론 곳곳에 성경을 인용한 부분들에 대해서 의구심이 생기는 부분도 있고, 새로운 해석에 대해서 과도한 해석이라고 느껴지는 부분도 있지만, 꽤 괜찮은 관점에서 쉽고 누구나 이해하기 쉽게 잘 쓴 책이다. 성경해석에 대한 차이가 약간씩 있다 할지라도 이 책은 훌륭한 책이다. 그외의 참고자료들도 재미있게 읽을수 있는 부분이었다. 내용은 말할 것도 없다. 정말 누구에게나 권하고 싶은 좋은 책이다. 특별히 한국교회에서 다분히 제국주의적이고 가부장적으로 성경을 이해하는 많은 사람에게 이 책은 우리가 돌아보고 우리가 엿들어야할 이웃의 소리에 대해서 새로운 깨우침과 새로운 관점을 가지게 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리가 들었어야만 하고 우리가 귀 기울였어야 할 이웃들에 대해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 자체가 학대고, 기만이고 폭력인 것을 이 책은 절실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 책의 중요한 포인트 중 하나인 부르짖음에 대한 히브리어를 사크로 쓴 점이다. sa'aq라고 해서 사크로 한글로 표기했는데 히브리어 발음이나 표기 방법이 약간 다르긴 해도 za'aq로 짜아크나 쩨아카로 표기하는게 옳지 않을까한다. 너무 중요한 포인트를 사크로 표기한 부분이 읽어가는 내내 거슬렸다. 부르짖음은 이책을 이해하는데 큰 중요한 포인트다. 하나님은 약자들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시고 그들을 위해선 꼭 일하시는 분이시기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잘한 번역이라고도 생각되어지고, 꽤 깊은 통찰력이 담겨있는 부분이라고 느껴진 부분은 나그네를 난민으로 이해하고 쓴 부분이다. 고아, 과부, 나그네는 성경에서 말하는 가장 약한 자들이다. 그런데 고아, 과부는 쉽게 이해가 되도 나그네가 왜 약자인지 일반인은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그런데 이 책은 이 나그네를 난민으로 이해했다. 정말 좋은 번역이자 바른 해석이다. 당시의 나그네는 난민이나 다를바 없고 그러한 표기가 바른 이해를 도와줄것 같기때문이다. 개인적으론 난민이라는 이해가 오늘과 당시 성경시대의 모습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왠지 hard cover가 어울리지 않게 느껴졌다. 오히려 얇은 cover가 이 책에 더 어울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의 제목이나 내용이 연약한 사람들에 대한 책인데 양장본은 뭔가 강압적인 느낌, 권위주의적인 느낌을 들게하는 cover이기 때문이다. 이 책 전체는 귀한 통찰력과 삶을 바라보는 시대를 바라보는 훌륭한 관점을 제시한다. 너무나도 소중한 글귀, 소중한 내용이 많이 담겨있다. 이 땅엔 많은 사람이 배고프고, 살곳이 없고, 조금이라도 여윳돈이 있으면 절박한 문제에 돈을 쓰는데 제국의 아이들이 제국의 손에 죽은 구세주를 이해할수 있을까? 이런 내용들은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예수였다면 그 많은 소유를 그냥 축척하고 간직하고만 있을까?’ 이런 생각을 불러일으키며 오늘의 나에게도 계속해서 도전을 줄것같은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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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짖음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보면서 이 책을 넘기기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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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나오기전에 사회에 대한 기독교인의 책임에 대한 생각이 많았다.
과연 어디까지가 우리가 해야할 마지노선인가라는 물음.
그러나 사랑을 동인으로 하는 우리이기에 과연 그 선이 정해져있을까라는 고민.
한마디로 이 책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이웃사랑을 통해서 증명된다라는 성경의 명제대로
이 책은 우리에게 도전과 고민을 안겨준다.
특이한(?) 편집을 통해서 속도감 있게 책을 읽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머리속에 든 생각과 고민은 책읽는 속도와는 반대로 더 생각하고 더 고민하게끔 만든다.
출애굽 모티브부터 시작해서 가나안땅에 들어가고
그후에 왕국을 세우면서 어느순간 권력이 되고 압제자가 된 이스라엘을
이 책은 원거리에서 목도하게 만든다.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이 기득권자가 되고 권력이 된 모습을 많이 보았기에.
(아니 사실 이스라엘과 미국이 그렇지 않은가?)
우리끼리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는 경우를 보아왔고
심지어 종교가 권력이 되어 압제한 사건도 많이 보았기에
이 책에서 말하는 사회적인 평등과 배분, 관심과 배려에 많은 귀를 기울이게 된다.
복음의 촛대가 계속적으로 움직이는 이유는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의 긍휼만이 아니라
복음이 권력화되고 그것이 우리들만을 위해서 사용되었기때문에 나오는 하나님의 공의적인 측면에서 복음의 이동을 보지 않았던가?
세상과 타협한 채로
더 많은 가지려 들고 더 높은 곳에 가고 싶어하고 더 누리고 싶어하는 마음들.
기독교인들이 낸 헌금은 기독교인들을 위해서만 사용해야한다는
날카롭고 선동적인 주장들이 판을 치는 시대에
이 책은 읽는 내내 우리를 불편하게 하고
우리가 사는 삶과 우리가 가진 가치관을 정면으로 응시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 책은 읽은 그후에 필자는 더 큰 고민을 하게 되었다. 최근에 저자가 한 그 말.
지옥에 대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뒤집는 말을 쏟아냈기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과연 기독교서적은 어디까지 수용할 것이며
어디까지 받아들여야하는지에 대한 분별력이 절실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렇다고 이 책이 말하는 이 내용에 대해서 극냥 버려야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생겼기때문이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의 필요를 채우는 것보다 우선적인 것은
"은과 금은 없지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했던 주님의 선언이 아닐까?
그러나 또한 마찬가지로
지금도 우리의 이웃들은 신음하고
그들의 신음 탄식 소리를 경청하는 귀가 신앙인들에게 필요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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