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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철학자 다니엘 밀로는 상당히 보편적인 발견에 이어 꽤 도발적인 주장을 펼친다. 인간 말고는 미래를 생각하는 동물은 없고, 미래는 인간의 발명품이라는
것은 발견이다. 이런 발견은 그의 독창적인 발견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부족하다. 밀로도 많은 과학자들의 문헌을 참조하고 있으니까. 보통은 미래를
발견한 인간이야말로 이러저러한 장점을 지니고 있으며, 그 장점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등으로 이어져야
할 건데, 밀로는 정반대의 태도를 취한다. 바로 그 미래의
발명이 거품이라는 것이다. 즉, 그런 것 없이도 잘 살 수
있었을 텐데, 그 추가품 때문에 인간은 불행해지기 시작했다는 주장을 펼친다.
밀로는 “내일 보자!”라는
단순한 문장이야말로 인간이 떠올린 가장 위대한 문장이라고 한다(“어느 날 문득 사피엔스는 내일을
떠올렸다.”, 139쪽). 그 말에 이르게 한 인간
사유의 질적 전환이야말로 인간 진화에서 가장 중요했다고 볼 수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사실 위대하다기
보다는 가장 결정적이었다는 게 전체적인 맥락을 보았을 때는 더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그저 미래를 예측할
뿐만 아니라 그 의미를 파악하고 ‘의식적으로’ 대비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인간에게는 지식과 물적 축적을 가능케 한 원동력이었다.
다양한 형식으로 책 속의 내용을 구성하고 있고(그래서 좀 산만하기도
하지만 읽는 데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다), 또 많은 책을 인용하고 있다(고문헌들을 모두 불살라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던 자신의 고백과는 그다지 호응하지 않는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의 인용과 해석이 굉장히 자의적이라는 것이다. 어떤
때는 자신의 경험을 보편화하겠다고 선언하기도 한다. 그래서 도발하기 위해서 쓴 책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든다. 뇌의 진화가 미래의 발명을 가져오게 한 게 아니라 반대로 미래의 발명이 뇌 크기의 발달을 가져왔다는
주장도 그다지 근거가 없는 얘기이기도 하다. 과연 내일, 미래를
떠올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이룩한 문명이 필요 없는 것이었다는 저자의 관점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것이
폭주한 상황에서 그것을 저지할 수단이 없다는 것은 충분히 반성해야 할 것이지만, 신석기 혁명 이래의
모든 문명 자체를 쓸 데 없는 것이었다고 하는 것은 지나쳐도 한참 지나쳤다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다.
철학자가 진화이론을 공부한 결과라고 했는데, 그는 (다윈 – 그를 생물학의 아버지라고 부는 것도 처음 봤다) 진화이론을 정체이론이라고 고쳐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성공한 종은
그대로 머물러 있으려고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진화이론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하고 있지만, 정작 그 자신이 진화이론을 잘못 읽었다. 정체와
변화는 상대적인 것이다. 진화에서 성공이라는 것도 상대적인 개념이다.
그가 예로 들고 있는 실러캔트가 수천 만년 같은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가 (실종된 줄 알았지만) 발견된 것을 보고 그것을 성공의 표상으로 볼 수는 없다. 만약 성공했다면
그것은 그렇게 어렵사리 발견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진화이론을 충분히 공부했겠지만, 그것을 철학적으로 해석하려 했지, 과학적으로 분석하지 않은 것 같다. 틀렸다고 할 수 없다면, 편파적이다. 그 바람에 논리가 도약에 도약을 거듭한다.
‘‘내일’이라는 개념을 발견한 인간’이라는 참신한 아이디어가 아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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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에 따르면, 인류가 오늘날의 문명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인류가 여느 동물과 달리 허구를 지어내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역사학자, 진화생물학자인 다니엘 S. 밀로는 유발 하라리와 상당히 유사한 주장을 한다. 밀로에 따르면, 인류가 지금으로부터 약 6만 년 전 아프리카를 떠나 전 지구로 퍼져 각자의 문명을 발전시킨 동력은 '미래'다. 지금이 아닌 나중을, 여기가 아닌 다른 세상을 상상하고 실천으로 옮긴 자들이 오늘날의 세상을 만들었다. 많은 인간들이 인간과 동물을 달라도 너무 다른 존재로 규정하지만, 사실 인간의 고유한 특질로 알려진 것들 중에는 동물과 공유하는 특질이 제법 많다. 인간만이 유일하게 웃을 수 있는 존재라는 믿음은 사실이 아니다. 2005년 에스토니아의 심리학자 야크 판크셉은 쥐를 비롯한 어린 영장류마저 웃을 줄 안다는 사실을 밝혔다. 인간만이 생식과 관계없이 성관계를 맺는다는 믿음도 사실이 아니다. 돌고래나 보노보도 암컷이 임신 가능한 연령인지 아닌지와 상관없이 오로지 쾌락을 위해 성관계를 한다. 동성애 역시 자연에서 널리 볼 수 있는 현상이다. 펭귄, 아마존강 돌고래, 돼지꼬리 마카카, 돌고래, 바다소, 비비류 원숭이, 펭귄, 보노보 등에서 동성애가 관찰된 바 있다. 성욕이 넘치는 돌고래는 거북이, 상어, 심지어 뱀장어들과도 섹스를 한다. 수음, 근친상간, 시간, 강간, 금욕 모두 인간과 동물이 공유하는 특성이다. 폐경은 오랫동안 인간에게만 해당하는 것으로 여겨졌지만, 최근 고릴라 암컷의 23퍼센트가 폐경을 겪고, 32퍼센트는 폐경 전 증후군을 겪는 것으로 알려졌다. 인간만이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줄 안다는 믿음도 거짓이다. 해마들도 포식자에게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어린 해마들을 입양하며, 푸른원숭이는 동료 원숭이가 위험에 처했을 때 고함을 질러 경고한다. 그렇게 하면 자신이 위험에 처하는데도 말이다. 이러한 특질들을 보면 인간은 동물과 크게 다르지 않고, 이러한 특질이 인간을 오늘날의 '만물의 영장'으로 만들었다는 믿음 또한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저자가 보기에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유일한 특질은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다. 지금으로부터 5만여 년 전, 아프리카에서 잘 살고 있었던 인류의 선조는 어느 날 문득 정든 고향을 벗어나 다른 대륙으로 넘어갈 생각을 했다. 이들은 오늘보다 미래에 더 큰 기회가 있다고 믿었다. 이들은 인류 최초로 자신들에게 주어진 운명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려고 한 선구자들이었다. 이들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사람들이 인류의 영역을 넓히고 각자의 분야에서 활약해 마침내 문명을 발전시켰다. 있는 그대로의 삶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더 나은 삶을 꿈꾸는 것은 고통인 동시에 기회다. 하나의 선택지에 만족하지 못하고 많은 선택지를 보려고 하면 불안과 결정 장애라는 부작용이 따르기는 해도 결국 인간에게 더 큰 가능성을 제공한다. 그러니 주어진 현실에 만족하지 못한다고 자신을 책망할 필요도 없고, 더 나은 미래에 대한 상상을 헛된 꿈으로 일축하지 않아도 된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이 올 것이라고 믿는 능력이야말로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이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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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꿈꾸지 않고는 참을 수 없는 뇌의 발전이 인간종을 모든 종과 대비해 압도적인 우위를 가질 수 있는 이유라는 것을 설파하고 입증 할 수 있는 여러 내용이 있다. 아프리카에서 처음 출발한 내용 이라든가, 아이가 일찍 태어나는 이유 라든가, 진화가 아닌 정체 라고 표현 하는 것 등 내용이 참신하다. 문맥이 난해하거나 기초지식이 필요한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어 오역이 있지나 않을까 하는 궁금증을 자아내기도 한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책이지만, 읽어 볼 만한 책이니 추천한다. *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는 미래를 걱정, 기대, 절망, 희망을 품으면서 존재하는 현재는 놓치고 있다. 인간이 아프리카를 떠날 수 있는 이유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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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있었던 일들의 정리와 일어날 일들의 정리와 계획으로 하루를 마감하고 시작한다. 짧게는 몇 시간, 길게는 몇 년의 앞을 내다보려고 노력하면서 산다.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이런 동작이지만, 완전한 직립보행을 하지 못하는 동물들은 계획이라는 단어가 없다. DNA에 입력된 정보들을 제외하면 ‘미래’라는 용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동물들이 ‘지금 여기’에 닻을 내리고 있다는 것이 그들에게 유추능력이 없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의 이 같은 앎엔 계획이라고는 손톱만큼도 들어 있지 않다....물론 겨울을 준비하는 동물들도 존재한다. 그렇지만 월동준비를 위해 다람쥐나 곰이 가을 내내 분주하게 일을 하는 까닭은 계획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DNA에 그렇게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구상에서 앞날을 예측하는 동물은 오직 인간들뿐이다.” p.190-191 기이하게 크고 발달된 인간의 뇌는 아프리카를 떠나 전 세계로 뻗어나가는 원동력이다. 이런 이동은 앞으로 있을 법한 일에 대한 대비를, 그리고 다음 행동에 대한 계획을 하도록 만들었다. 정착을 하고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기 시작하고 배를 만들며 뭔가를 발견하고 발달시켜 나간다. 그 이면에는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고민하는 뇌가 있다. 그런 뇌에게 과학의 발달과 분업은 뇌에게 시간적 여유를 준다. 하지만 태생이 미래에 대한 짊을 떠안고 있는 뇌에게 그런 휴식은 오히려 무기력을 가지고 온다. “우리 조상들에게 불을 제어하는 능력을 부여하고 아프리카를 떠나도록 종용했으며 위임하는 역량을 발휘하도록 부추긴 것도 바로 전두엽 뉴런인데, 오늘날에 와서 이들은 일을 한다기보다는 무기력한 상태에 빠져버렸다......일을 하는 것이 왜 그토록 중요할까? 그야 불을 제어하기 시작한 이래 인간은 단 하루만 충실하게 일해도 일 년 동안 필요한 모든 것을 생산해낼 수 있게 되어 나머지 364일 동안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되는 처지였기 때문이다......‘인간에게는 완전히 휴식을 취하는 것보다 더 견딜 수 없는 일은 없다.....그렇게 되면 인간은 자신의 허무, 방치, 불충분함, 의존성, 무기력, 공백을 느낀다. 더 이상 절제하지 못하고 그는 마음 깊숙한 곳에서 권태와 암울함, 슬픔, 서글픔, 원한, 절망 등을 끄집어낼 것이다. p.269-271” 오늘을 살지 못하는 호모사피엔스인 우리는 오늘도 내일을 꿈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