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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한승태의 『고기로 태어나서』였습니다. 그러니까, 언제나 어렴풋이는 알았지만 외면하고 싶었던 공장식 축산을 제대로 알아보기로 한 것이요. 훌륭한 제목을 가졌고 국내 저자의 책이었기에 집어 든 그 책은 제게 정말 큰 충격을 안겼습니다. 그런데 그 책을 읽고서도 저는 아마 고기를 줄이긴 해도 완전히 끊지는 못할 것이었고, 덕분에 제가 살아가는 동안 무수히 많은 이름 모를 생명들은 희생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조금 더 알아보고 싶었습니다. 사람들은 왜 고기를 먹을까? 왜 나는 동물들이 고통받는다는 사실을 알고도 고기를 완전히 끊을 수 없을까? 어떻게 이런 잔인한 시스템이 이렇게 조용히 잘 작동하고 있을까? 다른 사람들은 정말 모르는 걸까? 이후엔 비슷한 주제를 다룬 다양한 책들을 서점 장바구니에 담기 시작했습니다. 진 바우어의 『생추어리 농장』, 피터 싱어의 『동물 해방』과 『동물과 인간이 공존해야 하는 합당한 이유들』,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 마르타 자라스카의 『고기를 끊지 못하는 사람들』, 마이클 폴란의 『잡식동물의 딜레마』, 황윤의 『사랑할까, 먹을까』 등. 그리고 가장 먼저 읽은 책이 바로 이 책, 『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입니다. 이 책 역시 『고기로 태어나서』에서 다룬 것과 비슷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마트에서 볼 수 있는 깨끗하게 포장된 고기가 어디에서 오는지, 동물들이 어떤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그리고 그 동물들과 함께하는 사람들은 동물의 고통에 점점 어떻게 대처하게 되는지. 이전에 읽은 책에서 이미 받을 충격은 다 받았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이러한 내용을 읽는 것은 여전히 괴로웠습니다. '한 조각 한 조각 죽어가는' 동물의 이야기를 읽고 나면, 저를 포함한 모든 인간에 대해서 혐오가 생길 지경이었습니다. 우리는 대체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폭력적 이데올로기는 자발적인 참여자를 요구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자진해서 동물을 해치려 들지는 않는다. 따라서 시스템은 사람들에게 지지를 강요해야 한다. 한데 강요는 노골적이 아니어야 효력이 있다. 동물의 신체를 사서 먹을 때 우리는 전적으로 자신의 의지에 따라 행동한다고 믿어야 한다. 자유의지의 신화를 믿어야 한다는 얘기다. 물론 아무도 우리 머리에 총을 겨누고 고기를 먹게 하지는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다. 젖을 떼는 순간부터 우리는 동물을 먹었다. 예컨대 거버 사 제품인 칠면조와 쌀이 든 이유식을 당신 의지로 선택했는가? 어릴 적 맥도날드에서 해피 밀을 사먹을 때는 어땠는가? 의사와 부모와 교사가 고기를 먹으면 힘이 세진다고 했을 때 의문을 제기한 적이 있는가? 파스타에 얹힌 미트볼을 보고 이건 뭐로 어떻게 만들었을까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혹 그런 의문을 가졌었다면, 주위의 사람들은 당신에게 진실을 찾아 의식의 빈 부분을 채우라고 격려했는가? 아니면 얼른 원래의 마비 상태로 되돌려 놓으며 육식의 미덕을 다시 확인시켰는가? (p.155) 이 책은 또 다른 내용도 다루고 있습니다. 바로 제가 궁금해했던 그것, '우리는 대체 왜 이렇게 되었는가'의 실마리를요. 우리는 동물을 사랑하지만 그럼에도 동물을 먹는 것은 정상이며, 자연스럽고, 필요하다고 정당화합니다. 먹는 대상이 되는 동물을 우리와 같은 생명이 아니라 물건인 것처럼 대상화하고, 이름 붙여 사랑하고 키우는 개와 고양이 등과는 달리 추상적으로 여기죠. 우리 중 누구도 식탁 위에 올라온 돼지, 소, 닭의 이름이나 그들의 생을 궁금해하지 않습니다(사실 그들의 생이란 게 다 비슷할 것이긴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이렇게 만든 시스템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습니다. 물론 시스템이란 게 다 그렇듯 잘 보이지도 않죠.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 하나가 고기를 덜 먹는다고 세상이 달라지기라도 할까요? 물론 단번에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당연하죠. 하지만 모든 것이 바로 '나 하나'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 확실하게 우리는 이 여정에서 혼자가 아닙니다. 전 세계에서도 그렇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이 물결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공부하고, 알리고, 실천하고, 증언하다 보면 정말로 지금의 이 시기를 '동물들의 홀로코스트'로 부를 날이 올지도 모릅니다. 저는 제가 그날이 왔을 때 '그들의 고통을 알지 못했다'며 변명하지는 않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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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을 것도 많고 쓸 것도 많은 요즘 세상이다. 전 세계의 이색 요리를 주문 버튼 한 번으로 맛볼 수 있고, 가죽으로 만든 고급 명품들로 본인을 꾸밀 수도 있다. 이러한 세상에서 우리는 행복을 느낀다. 소소하고 확실한 행복. 하지만 그 소소하고 확실한 행복에 동물들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 찰나의 행복을 위해 동물들은 평생을 비위생적인 곳에 갇혀 살고, 죽음을 맞이한다. 인간의 행복은 과연 동물들의 절규를 묵살하고도 추구할 가치가 있을까? 인간이라는 동물은, 다른 동물의 행복을 짓밟고 사는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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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구매하게 된 책이다. 우선 제목이 인상깊었다. 육식에 관해 의문을 갖기 전엔 한번도 해보지 못했던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개고기를 먹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닭고기와 돼지고기는 맛있었다. 강아지가 학대당하면 모두가 손을 모아 비난했지만 돼지와 소를 학대하며 만들어내는 고기는 아무렇지 않게 소비했다. 어느순간 이런 모순에 의문이 들었고, 이 책을 읽으면 나의 의문이 해결될 수 있을거란 생각에 구매했다. 아직 초반이지만 책은 육식에 관한 모순을 보다 심도있게 풀어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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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 해방 (Singer, 1975)의 입문 격이라고나 할까. 번역된 지 십 년이 되었으나 여전히 추천 목록에 올라 있다. 역서는 쭉쭉 읽히고, 어마어마하게 강한 메스꺼움을 선사한다. 원어로 읽을 때와는 불쾌감의 차원이 다르다. 생각 없이 집었다가는 점심을 굶게 될지도 모른다. 《동물 해방 (Singer, 1975)의 입문 격이라고나 할까. 번역된 지 십 년이 되었으나 여전히 추천 목록에 올라 있다. 역서는 쭉쭉 읽히고, 어마어마하게 강한 메스꺼움을 선사한다. 원어로 읽을 때와는 불쾌감의 차원이 다르다. 생각 없이 집었다가는 점심을 굶게 될지도 모른다. 브런치 @eunkwangchoi 고학력룸펜 인스타 @eunkwang.critic.choi http://www.instagram.com/p/CGjcHAyn4TF/?igshid=14os6ykg1uzr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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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 / 멜라니 조이 . 나는 반려견과 15년 째 같이 살고 있다. 그렇기에 개고기는 먹지 않는다. 물론 개고기를 제외한 거의 모든 육류를 먹는다. 다른 육류는 먹으면서 개고기만 먹지 않는 것을 모순된 행동이라 말할 수 있겠지만 난 내가 개고기를 먹지 않을 뿐 사실 개고기를 먹는 것 자체를 반대하지 않고(옹호도 아니다) 먹는 사람을 혐오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스스로 내가 모순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거나 행동을 하고 있지 않다고 여긴다. . 개고기를 먹는 것은 오래전부터 행해져오던 문화이고, 이슬람에선 돼지를 인도(힌두교)에선 소를 안 먹는 것과 같이 서구권에서 개고기를 먹지 않는 문화와 인식 때문에 동아시아에서 계속 이어져 오던 식문화를 과연 미개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인육을 먹는 게 아니라면 개와 돼지와 소와 닭이 근본적으로 뭐가 다르기에 어떤 건 먹어도 되고 어떤 건 먹으면 안되는 것일까? . 이 책에선 이런 구분은 사람의 인식에서 비롯된다 한다. . '개는 우리의 친구, 귀엽고 똑똑하며 감정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먹으면 안된다' 그럼 돼지는? '개와는 다르다. 돼지는 더럽고 뚱뚱하고 게으르다' . 실제로 돼지는 더럽지 않고 개보다 똑똑하며 활동량이 엄청나게 많다(자연상태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러한 편견이 사실이라 해도 그 것이 돼지가 '먹어도 되는' 개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논거가 되는가? . 돼지도 고통을 느낄 수 있고 인간과 교감할 수 있다. 그럼 왜 개고기를 먹는 것은 혐오하면서 돼지를 먹는 것엔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가? 결국 답은 '예전부터 계속 그래왔지 않은가?' 이다. . 우리는 채식주의자가 아닌 사람을 '고기를 먹는 사람(meat eater)' 이라 한다. 한데 이 용어는 과연 정확한가? 반대로 채식주의자(vegetarian)는 단순히 '식물을 먹는 사람(plant eater)'이 아니다. 식물만을 먹는 것은 신념체계에 바탕을 둔 '행동양식'이다. '주의자'라는 접미사는 일정한 주의, 즉 일련의 원칙을 주장하고 지지하며 실천하는 사람을 가르킨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고기 먹는 사람'이라는 말은 육류 소비 행위와 그 행위자를 분리한다. 고기 먹는 일이 당사자의 신념이나 가치관과는 무관한 듯이 말이다. 산업화한 세계의 대부분에서 육식은 불가피한 일이 아니라 선택이며 건강에도 필수적이지 않음을 수백만의 건강하고 장수하는 채식주의자들이 이미 증명했다. 하지만 육식에 대해서는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행위이자 언제나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본다. 그래서 아무런 자의식 없이, 왜 그러는지 이유도 생각하지 않는다. . 이렇게 자의식 없이 그 어떤 비판 과정을 거치지 않고 당연하게 받아들이도록 '강요되는 신념이나 사상'을 작가는 '폭력적 이데올로기' 라 말한다. 여기엔 육식주의 뿐 아니라 노예제, 나치즘, 가부장제에 의한 여성차별 등 당시에 도그마라 여겨졌던 사상들도 포함된다. . 이러한 폭력적 이데올로기가 유지될 수 있는 건 윤리적, 현실적 비가시성 때문인데, 그것이 정말 옳은가에 대한 윤리도덕적 토론이 존재하지 않고, 불편한 진실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행해진다.(도살장, 사육장 등은 인적이 드문 곳에 떨어져 있다, 운반과정도 최대한 가린다) . 그렇다면 이러한 비가시성은 어떻게 유지되는가? 바로 이해관계가 얽힌 축산업체들이 기득권을 놓지지 않기 위해 통제하기 때문이다.(책에선 미국의 육류산업의 실태를 이야기 하는데 논리적으로 타당해 보임) . 이 책에선 위에서 말한 합리적인 논거들과 함께 우리가 마주치고 싶지 않은 '불편한 진실들' - 사육과정, 도살과정 등-을 적나라하게 설명한다.한 줄 한 줄 읽어나가기가 여간 쉽지 않았다. . 이 책을 읽었다고 해서 당장 채식주의자가 되진 않겠지만, 육류를 먹고 싶다는 욕망에 따른 나의 선택이 책을 보면서 마주하게 된 불편한 진실을 유지하도록 도울 것이라는 사실과 인간의 잔인성, 폭력성에 대해 인정하게 됐다. . 육식에 관한 것들 뿐 아니라 당연하다 생각하고 있지만 어렴풋이 느끼고 있는 사회적 부조리들에 대해 외면하고 도피하지 말고 직시하고 고민해봐야 하겠다란 생각도 든다. . 보이지 않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은 매우 비슷해 보인다. -들로스 도축장의 벽이 유리로 되어 있다면 모든 사람이 채식주의자가 될 것이다. -폴 매카트니 무시한다고 해서 사실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올더스 헉슬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