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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제목의 선정성, 패륜성이 시사하는 부도덕성에서 이를 변호하려는 논리의 기만성을 보고자 했는지도 모르겠다. 존속살해(尊屬殺害), 아비를 죽이는 아들의 행위에는 대체 어떤 이유를 거론 할 수 있을까? 하는 이성적 거부로 인한 비난의 시선을 작가는 어떻게 설명하려는가에 대한 엿보기의 심리라 하여야 할까? 아무튼 이러한 독자로서의 심리를 꿰뚫듯이 “숨 쉬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아버지를 죽였다.”고 하는 문장에 휘말려 그만 내쳐 읽을 수밖에 없게 된다.
3장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2장은 살해자가 쓴 소설사이의 소설인「미래」라는 미완성 소설이 놓여있다. 살해자가 심리 상담자에게 진술하던 중 자신의 심리를 이해하기 위해서 요구되는 읽기라고 제안된 이야기이다. 이는 아버지를 살해하기 이전의 시기에 소위 “지적인 야망을 즐기고 그것들이 우리들 삶에서 점점 더 멀리 떨어뜨린다는 사실을 안 사람이 수확한 결실”이라는 반(反)지성주의와 원죄를 찬양하는, 즉 “악도 성스러운 구도의 통합체의 일부일 뿐 아니라 신의 본질가운데 일부를 차지”한다는 자신의 초월자로서의 깨달음, 살인의 당위적 결론을 위한 배경이라 할 수 있다.
진술은 아동기부터 시작해서 살인을 한 당일까지의 기억과 사실로 이어지는데, 엄마에 대한 절대적 애정과 이 애정의 경쟁자로서 아버지와 자신의 갈등이 얘기되고 있다. 이러한 계기가 된 사건으로 바다에 빠진 자신을 아버지가 구해준 것은 바로 자신의 최초의 굴욕이라는 것인데, 경쟁자에 대한 수치심, 이 사건으로 인한 엄마와 아버지의 공고해진 결합으로 인한 상대적 박탈감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이러한 심리적 현상을‘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고 간단하게 해석할 수 있지만, 화자는 그러한 얕은 틀의 정신분석으로 접근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사춘기가 오기 전 엄마의 암으로의 사망은 금융자본가로 사회적 성공을 거두고 있는 부자인 아버지와의 관계를 극단적으로 벌려놓는다. 자본주의적 성취는 분주함을 요구하고 그런 아버지는 아들과의 친밀감을 만들지 못하는데, 화자에게는 이 무관심이야말로 곧 적대감의 표현으로 수용되고 부자의 감성적 간극은 더욱 벌어지기만 한다.
이 소설은 이처럼 이야기 구조를 따라 감으로써 화자가 왜 존속살해라는 사회적 터부(taboo)를 실행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이유들을 작품 전체의 구석구석에서 찾아내고 마침내 사실의 행위로서 직접적 동기를 접할 수도 있지만, 화려하달 정도로 선과 악, 삶의 본질, 의식과 감각, 이성과 본능에 대해 뿜어내는 인간정신의 성찰을 위해 끌어대는 철학적 사유의 빈정거림과 패러독스에서 획득하는 보다 큰 그림으로부터의 진실의 발견도 꽤나 즐거운 작업이 된다.
일례로 소설 속 소설에 등장하는 지적 삶의 대척에 있는 표층문화만으로 지혜롭게 또 다른 정신의 삶을 사는 친구의“이성에 대한 본능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고안된 장소”로서의 레스토랑 장면에서‘바타이유’가 현현하고, ‘이반 카라마조프’의 존속살해를 고안한‘도스토엡스키’를 통해 악이 도덕성을 어떻게 초월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식이다. 또한 단지‘질투’라는 감정적 현상을 말하는데 조차‘나와 너’라는 주체와 타자성이란 말장난을 일삼는 현대철학의 허위성을 꼬집는 데에서는 헛웃음이 나오기조차 한다.
그리고 소설의 또 하나의 재미는 도처에 흩뿌려 놓은 살해자의 살해 동기나 심리적 본성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심리상담자를 마주하는 피상담자의 자세가 거의 기만적이고 우월적, 자기도취적 위치에 있다는 것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데, 그래서 독자는 읽어나가면서 계속 본질에 접근하는 증거들을 줍게 만드는 것이다. “심리분석가가 내 속을 속속들이 들여다 봐주기를 원하는 최고의 나르시시스트”라고 자신의 정신적 일면을 진단한다든가, 심리상담자에게 읽게 한 자신의 미완성 소설에 심리적 해석을 통해 자기 정신의 초월성을 확정하는 것들이랄 수 있다.
결국 이러한 소설적 도구들은 살해의 동기가 신으로서의 행위, 즉 초월자로서의 행위였음을 강변하기 위한 수단이다. 그의 소설 속 소설에 등장하는 악의 화신인‘파르파렐로 신부’의 ‘정신적 인간’이 지니지 못한 도덕성까지 내재하는 새로운 신적 본질의 깨달음, 악과 선은 무한대에서 만나며 그 무한대가 곧 신이라는 그만의 진실에 이르는 것이다.
자기 삶의 장애자로서 고통스러운 존재인 아버지를 극복하는 새로운 삶의 길은, “신의 성스러운 계획에 필수적인 그 더러운 역할을 맡는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의 산물로서 신에 의해 특별한 은총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수행”하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나아가 선악의 통합체를 완성하는 것, 곧 신으로, 초월자로 완성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제 정신적으로 존속살해에 대한 명백한 교리를 획득한 자는 이를 실행하면 되는 것이다. 화자의 말을 빌면 아버지를 살해한 동기로서, “나는 유전 인자와 심리학적 사회적 격발 요소들 이외의 것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초월적인 것, 악을 처단함으로서 신적 합일에 이르는 성스런 행위인 것이다.
자신의 인생을 지옥으로 만들어버린 한 비정상을 제거하는 것이며, 그(아버지)를 “악마성으로부터 해방시켜 주고 포용하는 것과 다름없으며”, 그럼으로써 “한 명의 아버지로 축복받을 수” 있게 해주는 사랑의 행위였다는 것이다. 더구나 아버지의 가학성을 죽음으로 돌려준 것은 바로 ‘도덕적 동종요법’이라고 주장한다. 아마 독자들이 이러한 사이비 종교식 궤변에 현혹될 리는 없겠지만, 인간 심리에 도사린 나르시시즘의 이러한 탐색에는 머리를 끄덕 일 수 있을 것이다.
어지간한 자극에는 감흥이 없는 무감각증으로 인한 현대인의 권태로움이 얼마나 많은 악을 낳고 있는지 우리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또한 성취일변만을 지향하는 인식구조는 가정마저 파편화시키는 지경에 이르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 그 자녀들에게 부지불식간에 누적되는 분노가 바로 악을 창조한다. 이와 같은 형이상학적 이유를 반전시키는 살해의 직접적 동기가 읊어지는 데에 이르면 그 처벌이 진정 도덕성을 잃지 않았다는 판단에 이르게 된다.
이는 어떤 의미에선 작가에게 실컷 조롱당한 기분까지 느끼게 되는데, 그야말로 오늘의 표층문화의 얄팍한 실용주의와 종교적, 철학적 허영심과 위선에 대한 기막힌 역설의 한 마당이었다는 당혹감 때문일 것이다. 아마“문학이란 이미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인간들의 불행을 확인시켜주는 예술이며, 인간의 행복이 얼마나 유한한가를 보여주는 예술이다!”하는 화자의 진술은 이 작품 전체를 은유하는 또 다른 막강한 이미지가 아닐까? 서사의 독특하고도 새로운 재미는 물론이고 인간세상 면면의 부조리함에 대한 통찰력 또한 손색없는 작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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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 이후 오이디푸스는 콤플렉스라는 이름과 합쳐져서 우리의 일상으로 들어왔다.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오이디푸스는 계속해서 재현되고 변주되고 있지만, 이러한 시도는 연극이나 문학과 같은 대중적 공간 대신 상담실이라는 은밀하고 사적인 공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 작품은 ‘오이디푸스’의 이야기이면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대한 이야기이다. 작가는 근친상간과 친부살해라는 오이디푸스 신화의 주요 모티프를 변용하면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가진 한 남자의 이야기를 볼륨감 있게 확장한다. 재미있게도 이야기가 이루어지는 곳은 상담실이다. 인간에 대한 본원적인 질문을 제기하는 오이디푸스가 ‘상담실’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만 얘기되게 된 것을 전적으로 프로이트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겠지만, 이것은 프로이트 이후 오이디푸스가 가지게 된 성과이자 명백한 한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 역시 이러한 성과와 한계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지만 오이디푸스 신화의 현대적 변용 내지는 적용이라는 측면에서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지적(知的) 소설이라 할 수 있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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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는 책을 읽기 전에 작가와 작품에 대해서 약간의 정보를 찾아보고 읽을지 말지를 결정합니다. 그런데 이 책에 대해서는 딱 한 가지, 책 제목만 인식하고 있었을 뿐 아무것도 알아보지 않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 책 제목을 들었을 때는 ‘주인공이 일부러 범인을 대신해서 살인죄를 뒤집어 쓰려는 게 아닐까’하고 생각했습니다. 혼자서 상투적인 반전을 생각했다 허물었다 했지요. 서점의 책소개를 조금만 읽어봤으면 그게 아니란 걸 알았을 텐데, 참 아무런 정보도 없이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책소개 맨 처음에 “아버지를 죽인 살해범과 심리상담가의 충격적 만남. 날카롭고도 정교하게 짜인 이야기 속에 담아낸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은 통찰.”이라는 문구가 적혀있더군요. 그러니 주인공이 진짜로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걸 지금 밝혀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내가 아버지를 죽인 날은 그늘 한 점, 음영 하나 드리워지지 않은 어느 밝은 날이었다. 아니, 잿빛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좀처럼 우울함에 빠지지 않는 영혼마저 물들일 만한 잿빛." 으로 시작하는 글을 읽으며 저도 잿빛인지 밝은 빛인지 모를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또 재미없다고만 말하기에는 뭔가가 망설여집니다. 소설은 일단 재미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 책에는 재미와는 다른 무언가가 있습니다.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출근길에 지하철에서 내리면서 책을 덮지 못하고 ‘그래서 그 다음엔 어떻게 됐는지’계속 알고 싶게 만드는 묘한 끌림이 있더군요. 만약 주인공의 아버지가 죽지 않고 이 이야기를 들었다면 뭐라고 변명(?)할지 궁금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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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제목부터가 섬뜻한 기분을 갖게 하는 소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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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을 읽기 전에 그 책을 골라서 책장을 넘기게 되는 계기는 사람마다 각각 다르고 또 책마다 각각 다르겠지만, 브라질 출신의 작가 마리오 사비누의 첫 장편 소설인 '내가 아버지를 죽였다' 의 경우는 그 강렬한 제목이 그 계기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그만큼 소리내어 말하기에도, 타이핑을 하기에도 어쩐지 좀 껄끄러움을 느낄 정도로 강렬한, '존속살해' 에 대한 담담한 고백을 그 제목으로 가지고 있는 이 소설은 꽤나 흥미로운 글이었다. 책을 읽기 전에 했던 생각 혹은 기대와는 많이 달랐지만, 그 어긋남이 결코 불만스럽지 않았을 정도로.
먼저 어긋난 내 기대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사실, 난 그랬다. '존속살해'라는 죄를 저지르고도 '내가 아버지를 죽였다'고 지극히 덤덤하게 말할 수 있는 주인공과 그런 그를 상대해야하는 심리 상담가와의 치열한 심리전, 혹은 처절함 따위를 상상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난 주인공이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하는데에 특정한 이유, 동기 따위가 없었던 '사이코패스'나 '쾌락 살인마' 같은 부류의 사람일 거라고 지레 짐작하고 있었던 것 같다. ㅡ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자기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하겠는가,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는 못하겠다. 그렇기에 그가 자신의 죄를 얼마나 처절하고 지독하게 '정당화' 하는지를 기대했던 건지도 모른다. 그리고《내가 아버지를 죽인 날은 그늘 한 점, 음영 하나 드리워지지 않은 어느 밝은 날이었다.》 라는 덤덤하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만큼은 결코 그렇지 않은 문장으로 이 소설이 시작되어, 아침에 일어나 세수하고 커피 마시며 신문을 읽었다 따위의 일상을 이야기하듯 차분하게 자신이 아버지를 살해하던 순간을 설명하는 주인공의 고백을 읽으며 나는 내 생각이 어느 정도는 맞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물론, 그건 아니었다. 이 글은 주인공의 독백과 심리 상담가를 상대로 이야기하는 부분이 교차되어 보여지는 1장과 3장, 주인공이 쓴 미완성 소설 '미래'를 담고 있는 2장, 이렇게 총 세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덤덤한 첫 문장과 제목처럼, 주인공은 ㅡ내 기억이 맞다면 끝까지 주인공을 비롯해 소설 속 등장 인물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ㅡ 대부분의 경우 흥분하지 않은 차분한 상태로 심리 상담가를 상대로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한다. 이야기를 듣는 쪽인 심리 상담가의 말은 문장으로 표현되지 않고, 가끔 주인공의 말을 통해 언급될 뿐이기에, 나는 자연스레 심리 상담가의 입장이 되어 주인공의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 되는데, 이 주인공이라는 남자가 확실히 만만한 인간은 아니어서, '이야기를 해준다'는 입장에 있는 자신의 우위를 이용해 심리 상담가 ㅡ혹은 독자를 끊임없이 속이고 휘두른다. 급기야 그가 썼다는 소설을 읽어야만 되는 상황에까지 놓인다. 그렇게 읽게되는 주인공의 소설「미래」는 고스란히 이 글의 2장을 차지하고 있는데, 소설 속 소설의 주인공인 '안토니무'는 아버지에 대한 감정, 하는 일, 결혼 생활 등의 대부분의 면에서 마치 주인공의 또 다른 자아와도 같은 모습으로 존재한다. 그런 개인적 설정 뿐 아니라, 그가 겪게 되는 일들이 결국 3장에서 언급되는 주인공의 삶과도 연결되기 때문에, 그 자신의 삶이 이 소설 속에 녹아있다고 생각하게 되고, 미완성으로 끝나는 소설의 마지막을 마치 주인공이 실제의 행동으로 완결지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존속살해범을 상대로 심리 상담을 하고 있는데 그 살해범이 자신이 쓴 소설이라며 읽어보라고 권한다면, 게다가 그 소설 속 주인공이 그 살해범과 놀랄 정도로 비슷하다면, 주인공이 자신을 투영한 소설 속 인물을 창조했다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거 아닌가. 하지만 주인공이 자신의 소설 속에 또 다른 자신을 창조했느냐 어땠느냐보다 '중요해 보이는 것'은 이 소설 속 소설에 등장하는 몇 가지 키워드다. 도스토예프스키의「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라든가, 안토니무가 홀로 고뇌하다 결론을 짓는 신과 선과 악과 정신과 인간에 대한 정의들, 이 그 것이다. 존속살해, '악'을 행하도록 '자유의지'를 부여받은 인간 따위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이 소설 속 소설을 읽으며 주인공이 안토니무이고 안토니무가 주인공이라는 생각이 점점 뚜렷해져간다. 하지만 어쨌든 주인공은 의사와 판사들의 판단에 의해 정신병이라는 진단을 받고 상담 중인 인물이다. 그가 차분하게 늘어놓는 말들은 가끔은 모순적이고, 가끔은 어디에서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거짓인지를 판단하기가 어렵다. 실제로 있었던 일처럼 진지하게 한참 이야기를 해놓고서는, 상상이라는 말 한마디로 듣는 이를 바보로 만드는 일도 다반사다. 주인공은 확실히 어딘가 불안정해보이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면 그는 '어린 시절부터 어떤 특별한 이유를 댈 수는 없어도, 그리고 무슨 특별한 능력이 있는지 알 순 없었더라도 자신이 남들과 다르고 특별하다고 느꼈'던 안토니무와 마찬가지의 자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p. 165) 그러니 독자의 입장에서 2장을 읽고 나서 머릿 속에 정리해 둔 갖가지 생각들을 몇 마디 말로 가볍게 부술 수 있는 것이다, 이 남자는. 그리고 이어지는 3장은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했던 1장보다는 좀 더 가까운 과거의 이야기다. 기나긴 터널을 거쳐서, 어째서 이 남자가 자신의 아버지를 죽였는 지 알 수 있는 이야기다. 이미 나로서는 드물게도 내용 자체에 대한 언급이 굉장히 많은 글이 되어버린 터라, 결말이라고도 할 수 있는 마지막 부분에 대해 자세한 언급은 안하겠지만, 결론을 말하자면 소설을 읽으면서 이렇게 주인공과 싸우는 듯한 기분이 되어본 것은 굉장히 드문 경험이었던 것 같다. 글을 읽으며 내가 생각한 것을 이미 쓰여진 활자에게 반박당하고, 다시 반박하는 기분이 되어보기도 하면서 어떤 의미로는 꽤나 즐겁게 읽을 수 있던 책이었다. 결국 누가 승자였는지는 비밀이지만. * * * 마지막으로 조금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번역과 미처 교정 과정에서 발견되지 못한 듯 보이는 문법적 오류들이 종종 눈에 띄어서 신경이 쓰였던 부분이 있었다는 것도 언급해두어야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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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부터 파격적으로 다가왔던 <내가 아버지를 죽였다>라는 이책은 제목 못지않게 책의 첫 줄부터 내가 아버지를 죽였다라는 문장으로 부터 시작한다. 여러 당혹감과 두려움이 밀려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커져버린 궁금증으로 인해 책을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인공이 직접 자신의 이야기를 고백하듯 서술해가면서~ 독백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어느 정도 책을 읽어내려가게 되면, 본인의 이야기를 심리상담가에게 회상하듯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그가 자신이 아버지를 죽인 이유는 그의 어렸을 적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되는데, 역시~ 혹시나 했던 것처럼 결고 평범한 어린시절을 찾아볼 수 없었다. 주인공과 그의 아버지를 어느 순간부터 엄마를 사이에 두고, 서로 경쟁을 하게 되고, 몇년 후 주인공이 아직도 어렸을 당시, 병으로 그녀가 죽게 된다. 그 이후로 더욱 사이가 벌어져버린 그들은~ 자신의 자식이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의 아버지가 그를 괴롭히고 학대한다. 그리고 아버지와 돈으로부터 얽혀있는 관계가 지속되면서~ 성인이 된 후에도 여전히 변함없는 사이를 보여주지만, 주인공에게 멋진 여자친구가 생기고 둘이 결혼할 계획까지 세우면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풀리는 듯 보이지만, 후반 부분에 아버지의 크나큰 배신으로 인해 그가 결국 아버지를 죽일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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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버지를 죽인 날은 그늘 한 점, 음영 하나 드리워지지 않은 어느 밝은 날이었다. 아니, 잿빛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브라질의 작가 마리오 사비누의 <내가 아버지를 죽였다(원제 O Dia em que Matei Meu Pai)>의 가장 첫 문장이다. 순간 이것을 보면서 나는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Aujourd'hui, maman est morte. Ou peut-être hier, je ne sais pas.)' 라는 지극히 건조한 프랑스어 문장으로 시작하는,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L'Etranger)>을 떠올렸다. 꽤 담담한 주인공의 서술에서, 보통의 살인 사건과는 뭔가 다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예상은 맞았다. 아버지를 죽인 살인범인 주인공이 심리상담가와 만나 자신의 삶을 털어놓는 설정으로, 이 책은 과감하고 치밀하게 인간의 내면을 탐구해나간다.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와 3부는 주인공이 말하는 부분이고 2부는 주인공이 쓴 소설이다.
화자는 심리상담가와의 이야기에서, 자신이 아버지를 죽인 것은 순간적인 살의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인생을 철저하게 망가뜨린 한 인간에 대한 정당한 응징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학대와 폭력을 경험했으며, 어머니가 병으로 일찍 돌아가시고 아버지와 둘이 살게 되면서 그 학대는 더욱 심해졌고 심지어는 성인이 된 이후에도 자신을 계속 지배해왔다고 말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프랑스에서 대학원을 다닐 때도 아버지가 돈을 많이 부쳐줄수록 자신이 증오스러운 아버지에게 생계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이 분노의 근원이 되어 왔다고, 자신은 아버지가 돈을 지불하던 수많은 창녀들 중 하나였을 뿐이라고 그는 회상한다. 심지어는 아버지가 자신의 아내와 밀통하고 임신까지 시켰다고 말한다. 또한 주인공에게 마치 젤리와 같은 색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 어떤 선생님의 말 역시 꽤 의미심장하다. '젤리 색'은 마치 주인공처럼, 꽤 초현실적인 색상이 아닌가.
그런가 하면 주인공의 미완성 소설 <미래>는 꽤나 기괴하다. 이 '소설 속의 소설'에는, 주인공의 분신으로 보이는 안토니무, 바베큐 레스토랑을 경영하는 그의 친구 에미스티키오, 그리고 파르파렐로 신부가 등장한다. 에미스티키오의 레스토랑은 '이성에 대한 본능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만들어진 장소'로서, 만찬의 참석자들은 환각 상태에서 광란의 밤을 보내게 된다. 에미스티키오의 철학적 장광설은 지루하다기보다 꽤 흥미롭게 느껴졌다. 또한 도스토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이야기를 하며, 전 부인인 베르나데치가 당신도 이반 카라마조프처럼 얼른 끝을 내라고 말하는 부분은 참 의미심장하다. 이방인에 이어, 이제는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다. 전자가 주인공의 심리 상태를 드러냈다면, 후자는 결국 주인공이 저지를 행위를 나타낸다.
또한 에미스티키오와 파르파렐로를 통해 나타난 선과 악의 이야기는, 이 책의 주제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악의 화신인 그들을 두고, 아마도 그들은 '정신의 인간'들이며, 또 다른 길의 창시자들일지도 모른다고 안토니무는 생각한다. 악은 선과 평행선으로 달리는 또 하나의 길이며, 이 둘은 무한대에서 서로 만나게 되고 이 무한대는 바로 신을 뜻한다는 결론을 도출해 낸다. 그리고 그들이 의식을 벌이는 장소인 레스토랑으로 안토니무를 유인한 것은, 안토니무 그 자신이 스스로 인정하는 바와 같이 그를 '정신의 인간'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소설적 도구들은, 곧 이 소설을 쓴 주인공의 살해 동기가 신적인 행위, 곧 초월자로서의 행위임을 주장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
참 흥미로운 것은, 1인칭 주인공 시점에서 종종 볼 수 있는 것이지만 주인공의 말은 종종 번복되거나 왜곡되기도 한다. 심리상담가를 대하는 태도 역시 지극히 기만적이고 자기도취적이며, 심리상담가가 자신의 속을 속속들이 들여봐주기를 원하는 나르시시즘적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아버지를 살해한 것이 그를 악마성으로부터 해방시키고 포용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며 그럼으로써 한 명의 아버지로 축복받을 수 있게 해주는, 일종의 사랑에서 비롯된 행위였다는 주인공의 궤변 역시 인간의 심리 속에 자리잡은 나르시시즘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 거의 반전과도 같은 부분이 등장하는데, 그가 아버지를 죽인 직후 미리 짜 놓은 시나리오대로 그가 고용한 사람들이 그를 붙잡고 눈에 염산을 뿌린다. 그리고 나서 그는 경찰에 전화를 해서 자신이 아버지를 죽였다고 말한다. 이것이야말로 소포클레스의 희곡 <오이디푸스>에 대한 오마쥬가 아닌가! 스스로의 눈을 멀게 하는 행위는 보고 싶지 않은 진실로부터 도망치는 것, 또는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한 속죄를 의미한다. '누군가를 죽이고 자살하는 것은 모순이죠. 그런 류의 모든 자살은 벌 받기를 두려워하면서 자신의 죄를 속죄하려는 약한 자들의 것이죠. 반면 나는 참회하고 있습니다. 매일같이 그 죄를 대면하면서 지내고 있는 겁니다.(p.187~188)'
처음에는 이 책이 자극적인 소재의 추리소설인 줄 알았지만, 읽어나갈수록 종교와 철학, 문학 등의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인간의 내면에 대해 탐구하는 결코 가볍지 않은 내용들이 굉장히 흥미롭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까뮈의 <이방인>으로 시작해서 도스토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거쳐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로 끝나는 느낌이랄까. 특히 2부의 안토니무와 에미스티키오의 대화, 그리고 베르나데치와의 대화 부분은 몇 번이고 다시 읽고 싶다. 아무래도 나는 철학적인 장광설을 꽤나 좋아하는 듯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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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속살해자에게 어울리는 색깔은 하얀색이죠. 완전히 하얀 백색 말이에요. 한때 그 자체가 모든 것이었던 무의 순백.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나요? 설명을 해보도록 하죠....... 갓 탄생한 별의 흰색은 점점 더 밝아지다가 우주의 한 일원이 되고나서 자신의 주변에 있는 것을 모두 삼켜 버리는 대폭발 속에서 그 생을 마감하게 되죠. 바로 그 뒤에 무한대의 밀도로 수축하여 별의 또 다른 형태인 블랙홀이 형성되는 거랍니다. 단지 공간에 흰 점만 남는 것이죠. 색깔들이란.... 내가 꾼 악몽들은 죄다 색깔들이 있었죠. 시간이 지나면서 그 악몽들은 흑백으로 바뀌게 됐고, 이전의 색깔들은 추억으로 남겨졌죠. 그리고 개념들로 변형되어 버렸죠. 붉은 색의 개념, 녹색의 개념, 노란색의 개념, 그리고 흰색의 개념으로 말이죠. 언젠가 이 개념들조차 잃어버리는 날이 올까요?” p.47-48
하지만 그 방법이 굉장히 독특했다. 총 3장으로 구분되어 있는 이 책의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2장은 주인공이 쓴 미완성 소설이다. 주인공은 자신이 왜 아버지를 죽였는지 궁금하다면 이 소설을 반드시 읽을 것을 독자에게 요구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독자들은 주인공이 시키는 대로 이 소설 속에 삽입된 또 다른 소설을 읽어야만 했을 것이다. 나 또한 그랬다. 그리고 주인공의 유아기부터 시작해 그의 시각으로 아버지를 살인한 그 때까지의 주인공의 인생 이야기를 듣게 된다. 주인공은 자신의 심리를 독자가 정확히 받아들이길 강하게 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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