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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권 시집 『고요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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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에 가 닿은 말- 조정권의 『고요로의 초대』       고요의 밑바닥을 흐르는 말은 어떤 감각을 지니고 있을까? 조정권의 『고요로의 초대(민음사, 2011)를 읽으면서 문득 떠오른 생각이다. ‘초대’라는 말이 암시하는바, 시인은 시집을 읽는 독자들을 고요의 공간으로 불러들인다. 표제작인 「고요로의 초대」를 참조한다면, 고요의 공간 속으로 들어가는 존재들은 무거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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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에 가 닿은 말

- 조정권의 『고요로의 초대』

 

 

 

고요의 밑바닥을 흐르는 말은 어떤 감각을 지니고 있을까? 조정권의 『고요로의 초대(민음사, 2011)를 읽으면서 문득 떠오른 생각이다. ‘초대라는 말이 암시하는바, 시인은 시집을 읽는 독자들을 고요의 공간으로 불러들인다. 표제작인 고요로의 초대를 참조한다면, 고요의 공간 속으로 들어가는 존재들은 무거운 머리와 헐벗은 손을 초대한 사람에게 내어주어야 한다. 돌려 말하면 무거운 머리와 헐벗은 손을 지닌 채 고요의 공간으로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쉬세요 쉬세요 쉬세요라는 시구에 나타나는 대로, 고요의 공간은 삶에 지친 존재들의 쉼터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무거운 머리와 헐벗은 손을 받는 존재, 요컨대 고요의 공간으로 초대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는 점에 있다. “나는 / 문간에 서 있는 나를 / 하인(下人)처럼 정중하게 마중 나가는 것이다”. 타인이 나를 초대한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초대하는 것이라는 역설을 통해 시인은 신 없는 성당 / 외로움의 성전.”(은둔지)으로 시적 여행을 떠나는 셈이다.

조정권 시의 도저한 정신주의는 시는 무신론자가 만든 종교”(은둔지)라는 시구 속에 뚜렷하게 드러난다.

 

무신론자를 전제하고 있기는 하지만, 시인은 시에 내포된 절대성을 종교라는 시어로 표현한다. 절대성이란 인간의 언어로는 도달할 수 없는 사물의 본질을 가리킨다. 시 양식 자체가 보이는 세계 너머의 보이지 않는 의미를 탐색하는 작업이라는 것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조정권의 이러한 시작 태도는 충분히 시적이라고 할만하다. 문제는 절대성의 시학이 언어라는 인간의 한계지점, 곧 상대성의 영역과 만나면서 일으키는 파열 지점을 어떻게 의미화할 것인가 하는 지점에서 발생한다. 은둔지에서 시인은 언어는 / 시름시름 자란 / 외로움과 사귀다가 무성히 큰 허무를 만든다.”고 이야기한다. 외로움과 큰 허무라는 말이 감싸고 있는 언어의 비의는 시인은 자기가 심은 나무 / 그늘 밑에서 휴식을 취하지 않는다.”는 시구와 더불어 독생(獨生)하고 시은(市隱, 세속 속에서의 은둔)하는언어로서의 조정권식 시어(詩語)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언어의 외로움은 사물의 세계를 언어로 탐색해야 하는 시인의 외로움과 다르지 않다. 언어가 사물의 죽음을 밑바탕에 깔고 이루어진 것이라면, 사물 자체의 감각에 집중하는 시적 언어의 특성 상, 시어는 언어의 죽음과 생성 사이에 외따로 걸린 경계의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시어는 사물의 죽음 위에서 시름시름자라 무성히 큰 허무를 시라는 공간 속에 오롯이 새긴다. 언어에서 시작해 언어를 넘어서는 어떤 경지를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시는 본질적으로 허무적인 양식이 아닐 수 없다. “시는 신이 없는 종교.”라는 역설적 표현은 언어의 안팎에서 죽음과 생성을 되풀이하는 시()의 특성에 연유하고 있거니와, 조정권 시에 자주 등장하는 신성의 의미는 실상 시에 내포된 이러한 경계성으로부터 기인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우리는 태어난 게 아니라

도착한 거예요.

추운 생명으로 왔지요.

추운 몸으로 왔어요.

그때가 아마 늦은 밤이었지.

북극의 생모(生母)가 찾아왔어요.

눈 포대기에서 보채는 동생들을 안고 얼음을 짜 먹이며

얼음의 말로 말을 가르치듯.

이 밤 어느 웅덩이에 고여 있을 그대들.

수없는 밤 고여 있었을 그대들.

머리맡에 밤바람이 주저리주저리 한 말.

그 밑바닥 말.

바닥에 가 닿은 말.

그대를 잉태했던 북극의 어머니가 평생 물걸레질한 그 얼음 바닥의 무늬가 소금에 박힌 것처럼.

굴복할 수 없는 무의 물결처럼.

궁핍처럼 스스로를 더 강하게 얼려야 하는 얼음처럼.

- 살얼음에 대하여전문

 

 

살얼음에 대하여라는 제목처럼, 이 시는 살얼음 자체의 이미지를 다루고 있는 시가 아니다. 시인은 살얼음을 통해 북극 생모의 언어()를 시의 세계로 불러내고 있다. 북극의 생모는 말 그대로 어느 웅덩이에 고여 있는 물을 얼음으로 만드는 신성한존재이다. “우리는 태어난 게 아니라 / 도착한 거라는 시구의 의미는 정확히 북극 생모의 이러한 맥락에 걸쳐 있는바, 살얼음이 어는 현상에서도 신화적인 의미를 읽어내는 시인의 면모를 우리는 이 부분에서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무엇이 도착했다는 것일까? 시를 참조한다면, 북극 생모의 말, 요컨대 그 밑바닥 말. / 바닥에 가 닿은 말.”이 지금 이곳에 도착했다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웅덩이에 고인 물을 얼게 할 수 있는 말은 우리가 쓰는 일상적인 말이 아니라, 웅덩이 바닥으로 내려갈 수 있는 비일상적인 말이다. 북극의 어머니의 말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가장 원초적인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사물의 밑바닥으로 스며들어 사물을 만들어내는 말의 힘을 시인은 북극 생모의 원초적인 언어로 표현하고 있는 셈이다.

 

밑바닥으로 스며드는 언어의 힘은 문안이라는 시에서도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 말 한 송이 들고 / 찾아간다.”는 시구로 시작하는 이 시는, 아무것도 아닌 말을 통해 성당이 없어도 되는 종교 같고 / 신앙이 없어도 꽃 피는 마음 같은 시의 세계를 구현한다. 아무것도 아닌 말은 아무런 생각도 없고 아무런 뜻도 없는말이라는 점에서 편안한 말이다. 언어의 강박에 휩싸여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는 문명사회의 현실을 생각한다면, 아무것도 아닌 말은 그 자체로 문명사회 바깥의 말일 수밖에 없다. “아무 뜻도 없는 / 말 한 송이는 / 1만 년 동안 햇빛이 돋보기로 들여다본 씨앗 같고 / 무성하게 자란 관목의 먼 조상 같다.”는 이 시의 결구는 이러한 바깥의 사유를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거니와, 이로써 아무것도 아닌 말이 문안의 말로 변주되는 이유가 설명될 수 있다고 하겠다.

 

새에게 준 시 1에서 이러한 문안의 말은 내가 남겨 둔 한 줄 끄트머리에서 노란 새가 한 마리 지저귀고 있었다. / 인간의 말이 아니라 / 새의 말로 지저귀고 있었다.”라는 상황으로 나타난다. 시인은 뒤 숲에서 산성비에 껍질이 얇은 알 하나를 줍는다. 몇 날을 품고 또 품어 주었지만 끝내 알은 부화하지 않는데, 시인은 이 상황을 시를 쓰는 작업과 유비적으로 표현함으로써 한 편의 시가 탄생하는 순간을 에둘러 상징화하고 있다. 예컨대, 시는 단순히 언어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그 언어의 끄트머리에서 노란 새가 한 마리 지저귀는 것으로 표현된다. 지저귀는 것은 새의 말이다. “나는 저 말을 잘 기르고 싶다.”고 시인은 고백하고 있는바, 인간(시인)에게 새의 말은 이미 이루어진 말이 아니라 앞으로 이루어져야 할(길러야 할) 말인 것이다. 기르고 싶은 말은 이미 익숙해진 말과는 다른 차원에 존재한다. 이를테면 그 말은,

 

 

내가 사랑했던

너와

나의

모든 언어에서 나를 해방시켜 자유가 된 동시에

이 세상에 홀로 존재하는 언어

내가 라는 것

- 나는 나를 잠재우려 애쓴다에서

 

 

와 같이, 너와 나의 말이 아니라 그의 말이다. 그런데, “내가 ’”이니까 그의 말은 곧 나의 말이 된다. ‘나는 타자이다라는 명제와 유사한 나는 그이다라는 명제는 그의 언어는 곧 나의 언어라는 명제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시인이 라는 존재에 대해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런 뜻도 없는 ’”라고 말하고 있는 점에 주목해 보자.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이라는 말처럼 아무것도 아닌 것(무극)은 모든 것(태극)을 포함하고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간밤에 필름이 끊어져야만 나타나는 의 형상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결국은 라는 중심을 포기한 대가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점을 예시한다.

시인은 이처럼 중심에 서려는 를 잠재움으로써 언젠가 만날 때 한번쯤 존경을 표하고 싶었던 ’”

시의 공간으로 불러낸다. 나를 버리는 것은, 시인의 말을 빌린다면 그의 초대를 받고 고요한 공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시인이 이야기하는 가 종교의 절대적 존재를 가리키는 것인가, 하는 점을 물을 수 있다. 시를 신이 없는 종교”(은둔지)라고 명명한 시인의 입장을 생각한다면, ‘라는 존재에는 분명 절대성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문제는 이러한 절대성이 조정권의 시편에서 어떤 맥락으로 작용하고 있는가를 밝혀야 한다는 점에 있다. 그의 시는 시의 종교적 경지, 요컨대 절대성을 노래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시를 종교적 교설로 치부할 수는 없다. 종교적 절대성을 지향하되, 그것을 시적으로 표현하는 것에 조정권 시편을 이해하는 핵심이 놓여 있는 것이다.

 

 

가시야

나는 내가 무겁다.

너는 너조차도 무겁구나.

나도 내가 무겁다.

너는 네 안에서 무겁다.

너는 네 안에서 을 친다.

너는 네 안에서 죽을 쑨다.

나는 네 안에서 구겨진다.

이제까지 공쳐 온 말과

죽 쑤어 온 말을

로 번역해

의 꽃을 피워 낸다.

자면서 울고 있는

네 잠의 눈물을 보며

나는 눈물방울을 닦아 줄 말을 생각해 낸다.

- 살청(殺靑)2

 

 

살청의 의미를 짚는 데서 시작해 보자. 죽일 살()에 푸를 청()이니, 살청은 푸른 것을 죽인다는 뜻이다. 원래는 대나무를 불에 쬐어 대나무의 푸른빛을 빼는 일을 살청이라고 하지만, ()를 만드는 사람들은 그들대로 찻잎의 푸른 기운을 뽑아내는 작업을 살청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이뿐이 아니다. 사서(史書)나 기록, 서적을 살청이라고도 하는바, 이는 살청의 의미가 글쓰기의 맥락과 닿아 있음을 암시한다. 인용하지 않은 1연을 참고한다면, 시인은 푸른색이 간간 찐하게 뻗어 간 그 푸른 길로 / 뻗어 가다가 막힌, / 저 푸른빛을 살청의 시적 맥락과 결부시키고 있다. 뻗어 나가던 푸른빛이 막힌 이유는 분명히 나와 있지 않지만, 그 막힌 자리에 자해하듯 내밀기 시작한 가시들.”을 시인은 주목하고 있다. 이 시는 그러니까 살청의 결과로 나타난 가시에 시적 초점을 맞추고 있는 셈이다.

 

2연의 앞부분은 무겁다라는 시어로 온통 뒤덮여 있다. “나는 내가 무겁다.”라는 시어에 드러나거니와, 무겁다는 것은 를 중심으로 여전히 이 세계를 사고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푸른빛이 막힌 자리에서 자해하듯 가시를 내민 역시 자신을 중심으로 세상을 생각하는 건 마찬가지다. 어떻게 해야 할까? 당연히 무거운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진짜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무거운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건 알지만, 어떻게 해야 그것을 내려놓을 수 있는가? 조정권 시의 절대성이 종교적 절대성을 넘어 시의 절대성으로 나아가는 지점은 바로 이 질문에 대답하는 과정 속에서 찾아질 수 있을 터인데, 공교롭게도 시인은 시적 절대성의 근거로 공()과 무()를 제시하고 있다.

 

공과 무라는 단어가 꼭이 시의 외부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두 단어만으로 한 편의 시가 완성될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요컨대 공과 무를 시의 세계로 불러내기 위해서는 그 단어들을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시어가 필요한 것이다. 종교적 절대성과는 다른 시의 절대성은 이러한 시어를 통해 표출되는데, 살청이란 시에서 그것은 이제까지 공쳐 온 말과 / 죽 쑤어 온 말이라는 시구로 구현되고 있다. 네가 네 안에서 공()을 치는 것은 곧 죽을 쑤는 것이며, 그것은 무()로 번역되어 의 꽃을 피워 낸다.” 네 안에서 쑤어지는 죽은 단순한 무가 아니라 수많은 재료들이 뒤섞인 유()를 내포한 무()이다. 무의 꽃은 그러므로 무극과 태극처럼 유와 무로 뒤섞인 역설의 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것도 아니니 괜찮다라는 말에서 이러한 역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의 유용성이라는 의미로 뻗어 나간다. 들길에 나가면 새벽이슬이 피어 있고, 새벽이슬은 별의 비를 맞으며, 빗방울들은 생각하는 잎사귀에 기거한다. ‘새벽이슬-별의 비-생각하는 잎사귀로 이어지는 시어의 흐름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이루어내는 괜찮은세상의 풍경을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다. ‘의 중심성을 강요할 수 없는 곳에서 피어나는 새로운 세상의 풍경은 고요히 잠겨 있던 내 귀에 / 이슬이 쇳덩어리를 매다는 게 아닌가라는 시구에 드러나는 것처럼, 한없이 고요한 허무의 공간을 이룩한다. 이슬의 쇳덩어리를 귀에 달고, 인간의 언어로는 해석되지 않는 사물들의 세계로 내려가다 보면, 사물들이 스스로 내뿜는 고유한 소리()가 들려온다. 조정권의 시는 사물들이 내뿜는 이러한 소리의 밑바닥으로 끝도 없이 침잠한다. 계속해서 침잠하면 바닥에 가 닿은 사물의 소리가 느껴질 수 있다는 것일까? 이 시집을 읽는 독자들이 한번쯤은 되짚어볼 질문이라고 하겠다.

o*****s 2017.08.22.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