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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의 나뭇잎에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글귀모양으로 꿀을 발라 조광조와 그를 따르는 무리를 중종의 곁에서 내친 기묘사화를 일으킨 것은 자신이 속해 있는 세력(훈구파,사림파)을 등에 업고 임금의 눈과 귀를 막고 가문이라는 이름하에 높은 자리에 앉아 사리사욕을 채우고자 함이었다. 어느 시대이건 당파 싸움이 없을 순 없지만 당파 싸움으로 인해 백성들은 때껄이를 걱정해야하고 나라는 안녕을 보장 받지 못하며 자신이 속한 당파의 뒷배경을 든든히, 개인의 입신과 욕심을 나라의 안위보다 우선시 하니 슬프고 슬플뿐이다. 작금의 시대에도 장소만 달랐지 국민의 나라의 안위보다 당리당략을 우선시하는건 매한가지인듯 싶으니 시대를 막론하고 권력이라는 놈은 사람을 미치게 만드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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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막히는 연산군 폐위까지 후다닥 읽은 나는 기묘사화란 어떤 내용일지 너무나 궁금했었다.
측천무후와 견주어서도 그 카리스마에 뒤지지 않는 제후 문정왕후가 중종의 세번째 부인으로 17이라는 나이에 궁에 들어온다. 그때 중종의 나이 30이였다고 하니 띠동갑하고도 한살이 더 많은 남자와 살았던 문정왕후는 행복했을까 하는 생각이 순간 스쳐지나갔다. 너무나 사랑했던 첫번째 부인을 관료들의 등살에 못이겨 궁밖으로 쫒아내야 했던 중중에게는 늘 그리움의 대상이고 사랑의 대상으로 남아있는듯 싶다.
기모사화에서는 크게 중종과 조광조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보고 싶은 중종과 처음에는 너무나 잘 맞는듯 했던 조광조
차츰 조광조의 광적인듯한 철인군주와 이론앞에 질려가는 중종은 급기야 조광조와 그의 무리들을 숙청하기에 이른다.
물론 그 숙청의 과정에는 훈구파가 있었고, 훈구파가 파 놓은 구덩이속에 주초위왕이라는 글자가 있을 뿐이였다.
하지만 이미 조광조에게서 마음이 떠나고 있었던 중종에게는 그 글자의 진위를 따지기 전에 그를 숙청하기에 이른다.
어진임금과 현명한 신하들..
하지만 세상에는 임금만 어질어서도 한사람의 현명한 신하만 있다고 해서 제대로 돌아가는것은 아니다.
늘 살아남는것은 간신들이고, 그리고 그들사이에서 요리조리 잘도 줄을 잡아가는 박쥐같은 인간들만이 살아남게 된다.
조광조는 자신이 배울것이 있다고 생각하면 그 신분이 미천한 천민이라도 찾아가 고개를 숙일줄 아는 대인배였다.
책속의 일례로 그는 가파치라는 백정무리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현자를 찾아가 지혜를 구하고 담소를 나누는 내용이 나온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내가 누구인데~~~~라는 권위의식이 앞서서 그렇게 하지 못할것이다.
그렇게 하고 싶어도 보는 주변의 보는 사람들의 눈을 의식해서 더더욱 못할 것들이다.
하지만 조광조는 그런것을 개념치 않았으며 그렇기에 그에게 늘 조언을 아끼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가파치 또한 권력을 놓아라고 지금의 왕조는 조광조를 받아주고 함께 할만큼 그릇이 크지 못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제대로 된 신하가 된다면 왕은 자신의 말을 들어줄것이라고 말한다.
어떻게 보면 참으로 충직한 신하이고, 어떻게 보면 참으로 답답하고 고지식 사람이다.
융통성이 없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져 들게 하는 대목이였다.
중종과 조광조의 이야기였지만 나는 읽는 내내 여인천하라는 10여년 전에 했던 드라마가 자꾸만 생각이 나고 겹쳐서 힘들었다. 중종의 후궁들 경빈박씨와 복성군 이야기가 나올때는 자꾸만 도지원이가 떠올라 힘들었다.
문정왕후가 나올때는 전인화가 겹쳐서 힘들었다.ㅎ 이래서 미디어의 힘인가 보다^^
우리는 역사를 바로 알지 못하고 있다.
잘 알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더이상 역사를 가르치지 않고 있다. 오로지 입시위주의 학업은 국영수만을 중요시 하며 논술을 입에 오르내리며 책을 읽어라 하지만 정작 중요한 우리의 뿌리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고 있다.
과거를 알아야 현재를 알 수 있고 미래를 바로 잡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과거를 알지 못한채 현재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미래를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중국과 일본은 우리와 다르다 그들은 역사를 중점적으로 가르치며 중요하게 생각을 한다.
그렇기에 그들은 아마도 동북공정이니 독도발언이니.. 그런것을 서슴없이 하는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재력이 있고, 인지도가 있으며 국제제판 경험이 있는 일본이기에 가능한 일이며 몰아가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그들의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을 힘조차 없으면서 가장 간단하고 쉬운 우리 역사조차 제대로 가르치려 하지 않는다.
나또한 조선의 4대 사화를 몰랐고, 왜 사화라고 불리게 되었는지는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나의 역사를 바로 알게 해주는 책
그리고 우리의 역사를 바로 인지하고 이해하게 해주는 책이 나왔다는것은 참으로 출판사에게 감사의 말을 전해야 하는 일이다. 우리가 알지 못하고 넘어간다면 주변국들은 그런 역사의 한부분을 잡고 자신들의 것이라고 우기고 나설것이다.
기묘사화를 통해 중종과 조광조에 대해 제대로 알게 된 책
늘 감사하고 오늘 나는 또 한권의 문화유산을 아이에게 전해줄 수 있어서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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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화士禍는 ’사림士林의 화’의 준말이다. 1498년(연산 4)의 무오사화, 1504년(연산 10)의 갑자사화, 1519년(중종 14)의 기묘사화, 1545년(명종 즉위)의 을사사화를 가르켜 조선 4대 사화라 한다. 이 책은 타오름 출판사에서 [무오사화], [갑자사화]에 이어 세번째로 출간된 책으로 [기묘사화]때 일어난 사화의 배경과 왜 그런 일들이 일어났는지를 자세히 알려준다. "바른 일을 하는데 무슨 꺼리실 게 있겠습니까. 군자는 목숨보다 의를 숭상해야 됨은 정암 선생께서 평소에 가르치신 바이며 또한 정암 선생 몸소 실천해 오신 일이십니다. 쇠뿔은 단김에 빼야 합니다. 젊은 사람들의 기를 꺽지 마시고 상감께 이를 하루 속히 아뢰어 조정의 간사한 무리들을 뿌리 뽑으소서." (p.109) 선산을 지키는 나무는 굽은 소나무다라는 말에서 느끼듯이 심지가 곧고 강직한 나무는 오래 버티지 못하는 법이다. 임금에게 사사건건 직언을 올리는 조광조가 중종에게 처음엔 사랑받았을지 몰라도 그 사랑이 끝까지 갈수없었음을 짐작할수 있게 한다. 조광조는 중종에게 몸에는 좋으나 입에는 쓴 약과 같은 존재였다. 1519년 중종 14년이 일어난 기묘사화가 일어나게 되는 계기를 제시한 것이 해묵은 원한과 더불어 장경왕후의 사후에 왐비 책봉을 둘러싸고 폐비 신씨를 복위시키려는 사림과 후궁중에서 하나를 올리려던 훈구대신들의 갈등, 그리고 젊은 선비들에 의해 공신들의 위훈삭감이 대두되며 자신들의 정치생명에 위기를 느낀 공신록에 올라있는 대신들이 조광조 일파를 처리하기 위해 모략을 꾸미며 가닥을 잡아가게 되었다. 젊은 선비 박상과 김정은 폐비 신씨의 복위와 공신들의 위훈 삭감을 골자로 하는 상소를 중종에게 올렸다가 사림과 공신들의 갈등 가운데 위치한 왕의 책략에 의해 위처로 유배를 떠나게 된다. "별좌 윤지임의 딸로써 대혼을 정하기로 했노라. 곧 윤지임의 집에 알려 기별하고 가례도감을 설치하도록 하라." (p.88) 사림과 훈구세력의 가운데 낀 중종의 선택은 바로 제 3의 인물인 새로운 왕비를 맞이하는 것, 그로 인해 새로운 세력이 형성되었으니 장경왕후의 오라비 윤임과 김안로 일파였다. 조정에는 사림인 조광조 일파와 남곤과 심정을 주축으로 하는 훈구세력파, 새로운 세력으로 형성된 윤임과 김안로 일파가 그것이다. 처음 윤임과 김안로는 처음에 폐비 신씨의 복위에 동조했다 결국엔 파평 윤씨 일문에서 새로운 왕비를 천거하게 된다. 그래서 선택된 사람이 윤임의 친척이자 별좌 윤지임의 여식으로 그녀가 문정왕후 윤씨이다. 조선 4대 사화를 읽으며 곁들이로 다시금 되새기게 되는 것이 많다. 예를 들자면 삼강오륜(유교(儒敎)의 도덕사상에서 기본이 되는 3가지의 강령(綱領)과 5가지의 인륜(人倫))이라든지, 적자나 서자의 신분제도에 대해서 다시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일반에서 쓰이는 말과 궁중에서 쓰이는 말이 달라서 궁중어법으로는 잡수신다를 젓수신다, 진지를 수라로 의복을 의대로 바뀌어 불린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외 다른 용어들이 많겠지만 일단 적혀있는 언어는 그랬다. 조선 제 11대 임금인 중종은 단경왕후 신씨, 장경왕후 윤씨, 문정왕후 윤씨등 세명의 왕후를 비롯 경빈 박씨, 희빈 홍씨, 창빈 안씨 등 총 12명의 부인과 자녀로는 장경왕후의 1남1녀, 문정왕후 1남 4녀를 비롯 총 9남 11녀의 자녀를 두었다. 중종이 세번째 부인인 문정왕후와 혼인할때 나이가 30살이니 부인과의 나이차는 13살이었다. 이리 저리 살펴보다 왕과 계비의 나이차가 제일 많이 나는 임금은 누구인지 궁금했다. 궁금해서 찾아보니 영조의 나이 66세, 정순왕후 15세에 혼인을 해서 그들의 나이차는 51이다. 영조 임금은 조선의 왕들중 가장 많은 나이 차를 보이며 노익장을 과시했다. 책속에 있는 책들, 『이륜행실도』,『여씨향악』,『용재총화』,『사서집』,『탁영연보』,『경재유고』,『경연강독록』,『금헌집』,『조선왕조실록』,『소학』,『근사록』『음애일기』,『음애집』,『성리대전』,『십청헌집』,『정속언해』,『동몽선습』,『잠서언해』,『이륜행실도언해』,『여씨향악언해』,『성리대전절요』,『역대수수승통립도』,『촌가구급방』,『기묘당적』,『척언』,『귤정유고』,『훈제전서』등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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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아주 오래전 학생 때 부터 좋아했지만, 그 때는 시험을 목전에 두고 외우느라 이해하기 보다는 결과에 치중을 했기 때문에 많은 것을 접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성인이 되어 조선시대 역사에 관한 책들을 접해보니 시대의 변화라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조선시대 4대 사화는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이다. 1498[연산4] 무오사화는 첫번째 사화로 조선중기 신진 사류들과 유자광 중심의 훈구파 척신들의 탄압이며, 1504[연산10] 갑자사화는 연산군의 생모인 성종비 폐비 윤씨의 폐출 사건에 관한 것이다.
1545[명종1]을사사화로 4대 사화이다.
몇해전 모 방송에서 방영된 "0인천하" 라는 사극 드라마가 뇌리를 스쳤고 여름 날 비온 후 인왕산에 안개가 올라 갈 때 치마바위를 보노라면 꼭 중종의 첫 원비인
연산군 왕비의 오빠이며, 단경왕후의 아버지인 신수근의 딸이기에 가례를 치른 후 3일만에 궁궐에서 나와야 했던 단경왕후 두번째 비인 장경왕후는 산후병으로 잃었으니, 아내 복도 없고 중용이 부족했던 왕으로 비춰졌다.
조광조는 중종의 신임을 두텁게 받을 것이 화근이 된것 같다.
기묘사화는 그 시대 인물소개와 초상화, 묘와 묘비가 사진으로 소개되어 있어 평소 접하지 못했던 인물들을 접할 수 있는 특징이 있어 많은 도움이 되었고, 따듯해 지면 아이들과 함께 답사를 다녀 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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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중에 조선왕조실록을 바탕으로 한 왕들의 이야기가 담긴 역사서는 많이 나와 있다. 하지만 조선4대 사화를 집중 조명한 책은 ‘한국인물사연구원’에서 펴낸 책들이 유일하지 않나 싶다. 조선시대 4대 사화는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를 일컫는데 신진 사림들이 훈신과 척신들에 의해 화를 당한 사건들이다. 학창시절에 국사 공부를 하면서 사화를 시대 순으로 외우는 것이 많이 헛갈렸던 기억이 난다. 이렇게 각 사화에 대한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누어 공부했더라면 좀 쉽게 이해하며 기억할 수 있었을텐데 말이다.
무오사화, 갑자사화에 이어 나온 제법 두툼한 이 책은 기묘사화에 관한 사건의 전말과 관련 인물사에 대한 기록을 담았다. 기묘사화 이야기와 더불어 현량과 급제자인 인물들, 기묘명현, 그 외 기묘사화의 인물, 기묘사화를 기록한 책들 이란 큼직한 구성으로 짜여진 이 책은 단순히 사건을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관련 인물들의 현재까지 밝혀진 자료를 바탕으로 한 인물사와 서술된 책에 대해서도 소개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갑자사화가 일어난 지 2년 뒤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을 폐하고 왕위에 오른 중종. 그는 신진사류를 등용하여 유교적 정치 질서회복과 성리학 장려에 힘을 쏟으려 한다. 그 일은 신진사류의 대표적 존재인 조광조가 왕의 신임을 받아 진행하게 되는데, 성리학을 지나치게 숭상한 조광조가 실현하고자 하는 이상적 정치개혁이 급속히 이루어지면서 정적들의 미움을 사게 되고, 왕에게 군주의 이상과 이론을 역설한 것에 염증을 느끼던 왕은 훈구세력의 계략인 궁중 나뭇잎에 새겨진 ‘주초위왕’의 징표를 왕권 위기로 느껴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 사류를 사사하거나 귀양을 보내게 된다. 이것이 기묘사화다.
기묘사화는 경빈 박씨의 ‘뭬이야’란 유행어가 등장했던 사극드라마를 통해 많이 알려진 사화가 아닌가 싶다. 왕비들과 그녀의 척신들, 공신들인 훈구세력, 급진적 신진 사림파와의 대립과 알력으로 인한 이야기 거리가 많았던 드라마다. 역사적 사실을 픽션화시킨 드라마로 본 것이 이 책을 보면서 도움이 되었다. 캐릭터 이미지가 오버랩 되면서 다시 기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시대를 앞서간 조광조, 그의 유교적 이상정치를 현실에 구현하려는 급진적 개혁정책은 기묘사화로 비록 물거품 되었으나, 그가 꿈꾸었던 이상사회는 이후 후학들에 의해 조선 사회에 구현된다. 그가 정책추진에 있어 점진적으로 개혁을 이끌었다면 어땠을까? 그의 학문이 좀 더 성숙되었다면, 좀 더 기본에 충실했다면 하는 조광조의 개혁실패의 이유를 곱씹어보면서 오늘날과 비교해 생각해 보게 한다.
조광조 그가 갖바치처럼 반상의 제도를 넘어 자신보다 학문이나 식견이 높으면 찾아다니며 배우고 사귀었다는 일화, 과거보러 한양에 올라와 여각에 머물 때 여인의 유혹을 물리친 일화, 그의 혈맥의 인물들 이야기를 통해 좀 더 그에 대한 성품, 기개와 가문에 대해 알 수 있어 유익한 책이었다.
기묘사화의 사건뿐 아니라 그 당시 정치적 상황과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왕이 그런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 훈구와 왕비를 포함한 척신세력들이 정치적 위기에서의 쓴 계략 등 사화에 대해 인과관계나 정치적 상황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이 책을 권하고 싶다. 관련인물들을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수 있으니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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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사화는 1515년(중종10) 왕비 책립때 조신간의 대립과 알력을 시초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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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사화 조광조를 필두로 한 사림파의 급진적 왕도 정치 추구하여 왕권 위기를 느끼던 중종과 소외받던 훈구파의 폭발..
사화는 사림의 화의 준말로서 조선 중기에 신진 사류들이 훈신과 척신들로부터 받은 정치적인 탄압을 일컫는다. 1498년의 무오사화, 1504년 갑자사화, 1519년 기묘사화, 1545년 을사사화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사화는 일으킨 쪽인 훈척계열에서는 난으로 규정하였으나 당한 쪽인 사림은 정인과 현사들이 죄없이 당한 화라고 주장하여 사림의 화라는 표현을 썼다. 그러던 끝에 사림파가 정치적으로 우세해진 선조 초반 무렵부터 사화라는 표현이 직접 쓰이기 시작했다.
기묘사화는 첫째 15115년 왕비를 책립할 당시 조신간의 대립과 알력, 둘째 조좡조가 추구한 지치주의정치를 위해 대량 등용된 신진 사류에 대한 불만, 셋째 도의론을 앞세워 사장파를 도외시한 사림파의 배타적인 태도에 대한 훈구파의 증오가 밑바탕에 깔린 원인으로 잠재하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반정공신 위훈 삭제사건을 도화선으로 하여 폭발하게 된것이다.
이 사화는 모오사화와 같이 훈구파와 신진 사류간의 반목과 배격에서 일어난 것이지만 정치적 음모가 도사린 정쟁이었다는 점과 갑자사화와 같이 정치적 투쟁 목적이나 이념이 없었다는 점에 있어서 특이하다고 하겠다. 또 조광조의 왕도 정치 실패의 원인으로 정치 이념의 진보성과 과격한 실현 방식에서 찾는 경우가 많으나 당시의 정치체게가 왕도 정치의 실현을 뒷받침해 줄 만큼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더 타당한 이유라 하겠다. 조광조가 열성적으로 추진한 왕도청지의 이상이 무산된 뒤 성리학이 학문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그 점을 입증해주고 있다.
조광조의 개혁은 다방면에 걸쳐 성과를 거두었으나 이상주의적인 왕도정치를 추구하구 구현하는 과정에서 현실과 괴리감이 들 정도의 저돌적이고 급진적인 면으로 인하여 정적들의 증오와 질시를 사게 되었다. 또 철인군주의 이상과 이론을 왕에게 역설한 것이 도리어 역효과를 내어 중종도 조광조의 극단적인 도학적 언행에 대해 점차 혐오감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역사 속에서 조선시대 4대 사화를 잘 알지 못하였는데 그중 하나인 기묘사화에 대하여 다시금 돌아보는 계기를 준 책이라고 평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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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반만년 역사 속에는 많은 사건들이 있었고, 많은 인물들이 살다갔다. 수많은 인물들 중에는 우리가 기억해볼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 가치가 꼭 무언가 대단한 업적을 남겨서 일 수도 있고, 우리 역사에 오점으로 남았기에 타산지석으로 삼기위한 것 일 수도 있다. 사람에 따라서 어떤 인물을 기억해야하는지에 대한 생각은 다를 것이다. 같은 인물을 두고서도 판단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하기에 기억해봄직한 인물의 수를 헤아려보자면 아마 수백 아니 수천이 될런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누군가는 열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몇 되지 않는다고 말할런지도 모른다. 그러한 인물들 중 한명으로 나는 조광조를 꼽고 싶다. 조광조란 사람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좀더 자세히 당시의 이야기를 접하고 싶었고, 이 책을 만나게 되었다.
조선의 4대 사화중 두번째인 갑자사화로 인해 연산군은 망가져 있었고 결국 훈구 대신들에 의해 중종반정이라 불리는 것이 발생하면서 진성대군은 이복형 연산군을 몰아내고 조선 11대 왕으로 등극한다. 그렇게 왕위에 오르지만 중종에게는 큰 힘이 주어지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정통성을 가지고 선왕에게 왕위를 물려받은 것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를 왕으로 추대한 훈구 대신들에 의해 제대로 된 정치를 펴기는 힘들었다. 그런 중종에게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 사류들은 신선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더군다나 조광조는 중종이 추구하고자하는 정치와 맥을 같이하는 듯 보였으니 말이다. 그렇게 조광조는 중종의 중용을 받게 되고 조광조를 위시한 신진 세력들은 훈구파의 힘에 차츰 접근해간다. 하지만 젊은 선비들이 날개를 펼치기에 당시 조선사회는 너무도 폐쇄적이었다. 그리고 호감을 보였던 중종 역시 점점 그들의 원칙주의에 회의를 느끼게 되고, 훈구파가 꾸민 '주초위왕' 즉 조씨가 왕이 된다는 문구를 이용하여 조광조와 신진 세력들을 몰아낸 '기묘사화'가 벌어지게 된 것이다. 그렇게 조선 사회는 다시 보수적으로 흘러가다 73년뒤 임진왜란을 통해 국가적 위기를 겪게 된다.
그 정도는 다르겠지만 어느 사회든 개혁은 필요로 한다. 고인 물은 반드시 썩기 마련이니 말이다. 하지만 모두 개혁을 원하지는 않는다. 특히 권력을 가진 입장에서는 더욱 그렇다. 개혁이란 결국 그 권력을 내놓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니 말이다. 권력이란게 얼마나 좋은건지 한번 손에 쥐면 쉽게 놓으려 하지 않는다. 한 세력이 오래도록 권력을 잡다보면 세상은 보수적으로 흘러가게 된다. 그리고 누군가가 나타나 세상을 바꿔보려고 시도한다. 하지만 그러한 시도는 결국 실패로 돌아갈 확률이 높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이상주의를 펼치기에는 가진자의 벽이 너무도 높으니 말이다. 조광조의 이상은 결국 현실의 벽을 넘지 못했고, 조선 후기 홍경래 역시 그러했다. 만약 조광조가 급격한 개혁이 아닌 점진적인 변화를 통해 조금씩 조금씩 세상을 바꿔보려했다면 어땠을까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이 책을 보면서 기묘사화가 벌어질 당시의 상황과 많은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접할 수가 있어서 좋았다. 나름 역사를 좋아하고 관심이 많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실제 우리 역사를 접할 기회가 많지는 않은거 같다.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세세한 부분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정도는 우리 역사를 알아야한다고 생각하는데 점점 우리 역사가 등한시되는거 같아 안타깝다. 특히나 공교육에서 역사가 뒤로 밀리고 있다니 더욱더 그러하다. 안그래도 역사를 점점 소홀히 하고 있는데 전직 총리란 분은 국사시험을 영어로 보자는 말을 하고 있으니 참 답답하기만 하다. 이러한 책들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우리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역사만큼 흥미로운 이야기도 없으니 말이다. 시대를 떠나서 인간사란게 비슷비슷하기에 역사를 통해 과거를 볼 수 있고, 현재를 볼 수 있으며, 미래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조선 4대 사화중 네번째인 을사사화는 또 어떻게 그려지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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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사화 / 한국인물사연구원 저 타오름 刊
조선 4대 사화를 한국인물사연구원과 출판사 타오름사의 세 번째로 출간한 기묘사화다. 반정으로 왕이 된 중종과 개혁을 내세우는 사림파의 조광조는 죽이 잘 맞아 돌아가다가 그 피로 얼룩진 숙청의 프로세싱에 기득권을 지키려는 반정 세력과 호시탐탐 노리고 도 저자는 명쾌하면서도 심플한 언어 구사로 그 뜻을 이해하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다. 소 일련의 조선 4대사화 시리즈물이라 기존의 사화의 기술과 다소 중복되는 부분도 없지 않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