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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이야기지만 시 한수, 그림 한 점에도 의미가 있고 역사가 숨어 있습니다.
이 책을 통해서 인문학이 더 이상 딱딱하고 재미없는 것이라는 편견을 과감하게 무너뜨리게 됩니다. 그림이 많아서가 아니고, 시가 흥미로워서 만이 아닙니다. 인문학과 벗하면 생각의 폭과 깊이가 달라지는 계기가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또 한 가지, '꾸준함을 이길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이 책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하면 그리합니다. 때는 바야흐로 통섭과 융합의 시대라고 합니다. 한국학이라는 큰 나무 밑에 한국한문학, 조선시대사, 동양화, 한국군사사, 연극사, 한국음악학, 중국고전문학, 서지학, 한국회화사, 한국고전문학, 한국미술사, 한국복식사, 한국 미술사학, 중국고전희곡, 국어사, 한국연극학, 한국경학 등을 전공한 학자들이 모였습니다.
1997년 가을, 공부모임으로 만난 이들이 『문헌과 해석』창간호를 간행한 이후 13년 동안 쉼 없이 만나 연찬하고 학인으로서의 우정을 쌓아왔습니다. 지금도 이들은 매주 금요일 오후 일곱 시만 되면 한 주일 동안의 부산한 일상을 뒤로 접고 서초동 공부방으로 모여든다고 합니다. 이 책은 『문헌과 해석』통권 50호 발간을 기념해서 기획한 것이지요. 기왕에 『문헌과 해석』에 발표되었던 내용이 아닌, 한두 편을 빼곤 전부 이 책을 위해 새롭게 쓴 글이라고 합니다. 문학, 회화, 공연, 철학, 역사, 문화 등 넓은 영역을 편식하지 않고 고루 담았습니다.
모두 흥미롭고 귀한 글들이지만, 특히 두 글이 인상적입니다. 정 민(한국한문학)의 ‘다산의 부정이 담긴 매조도(梅鳥圖) 두 폭’ 과 윤진영(한국미술사)의 ‘구한말 서울의 한 상업가 이야기’ 입니다.
“1810년, 두릉에서 다산 초당으로 편지와 함께 치마가 배달되었다. 빛바랜 낡은 치마, 아내가 시집올 때 입었던 옷. 부부의 인연을 맺은 지 어언 34년, 떨어져 산 세월이 어느 덧 10년이다. 무상한 감회가 없을 수 없다.”
다산은 붉은 빛이 다 바래 노을빛이 된 치마의 솔기를 조심스레 뜯어 주름을 펴고 사각의 큰 천을 가위로 잘라 공책 세 개를 만들었습니다. 무엇을 쓸까? 생각하다가 잔뜩 풀 죽어 낙담해 있을 두 아들에게 줄 훈계의 말을 적기로 합니다. 이렇게 빈 공책 위에 땀땀이 적어나간 가르침이 『하피첩 (霞帔帖)』세 책이 되었습니다. 『하피첩』을 만들고도 자투리 천이 남아 있던 것을 3년 뒤, 딸을 시집보내면서 이 조각 천위에 매조도(梅鳥圖) 한 폭을 그려 주었습니다. 그림에는 시가 한 편 실려 있습니다
펄펄 나는 저 새 내 뜰 매화에 쉬네
꽃다운 향기 매워 기꺼이 찾아왔지.
머물러 지내면서 집안을 즐겁게 하렴.
꽃이 활짝 피었으니 열매도 많겠구나.
딸을 시집보내며 화목한 가정을 꾸려가길 원하는 아비의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2009년 6월, 다산의 매조도 한 폭이 새롭게 공개되었습니다. 이 글의 이슈이기도 합니다. 다른 점이라면 앞서 딸에게 보내는 매조도는 새가 두 마리 몸을 비비고 앉아 있는 그림인데, 이 그림엔 달랑 한 마리입니다. 역시 시(詩)가 함께 합니다.
묵은 가지 다 썩어 그루터기 되려더니 푸른 가지 뻗더니만 꽃을 활짝 피웠구나.
어디선가 날아든 채색 깃의 작은 새 한 마리만 남아서 하늘가를 떠돌리.
마르고 썩어 새 움을 못내는 등걸은 다산 자신입니다. 후일담에 의하면 다산이 본가로 복귀한 후에도 소실 모녀와 함께 그리 오래 머물지 못했다는 말이 전해집니다.
“다산은 알려진 것과 달리 두 점의 매조도를 남겼다. 두 작품은 거의 같은 시기 똑같은 크기에 비슷한 구도로 그려졌다. 1813년 7월 14일 다산은 큰딸의 혼인을 맞아 아내 홍씨가 3년 전에 보내온 치마를 잘라 딸을 위해 매조도를 그려 주었다. 그리고 8월에 소실에게서 딸을 얻게 되자, 감회를 못 이겨 이 그림을 다시 그렸던 것으로 보인다. 모녀의 자취는 남은 것이 없다. 한 폭의 그림과 한 수의 시에서 빚어낸 생각이 끝이 없다.”
“때로는 한 장의 옛 사진이 어떤 기록물보다 충실한 역사 자료가 된다.”
구한말 서울의 한 상업가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구한말의 생활상을 소개한 『민족의 사진첩 Ⅲ』에 실린 한 가족의 사진입니다. 백여 년 전 대가족을 한 자리에 앉혀서 가족사진을 찍는 일 자체가 드문 일이기도 한 시절입니다. 이 글의 저자인 윤진영의 관심은 사진 속 인물이 아니라 사람들의 뒤편에 쳐진 2개의 병풍에 주목하여 이를 분석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 병풍이란 것이 사람들에 의해 대부분 가려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매우 치밀하고, 철저하게 그 목적을 달성하고 있습니다.
우선 그 사진 속 주인공인 주인섭을 확인하기 위해 신안 주씨 족보를 살피는 것은 기본. 관직에 있다가 제목 그대로 상업가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사진왼쪽 병풍의 그림은 「곽문양행락도」라고 합니다. 당나라 때 분양왕에 책봉된 곽자의의 고사가 이 그림의 주제입니다. 오른쪽 그림은 「십장생도병」으로 밝혀진다. 현재 이 병풍은 오리건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 「십장생도병」은 1880년(고종 16)에 만들어졌습니다. 한 해 전인 1879년, 훗날 순종이 되는 왕세자가 천연두에서 완쾌된 일을 기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저자는 이 두 개의 병풍을 어찌 주인섭이 소유하게 되었는가를 추정하는 과정 중 주인섭이란 사람이 관직에서 물러 난 후 종이를 판매하는 지전(紙廛)과 초창기의 서점인 책사(冊肆)또는 서사(書肆)를 경영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주인섭의 가족사진에 놓인「곽문양행락도병」과 「십장생도병」은 그의 지전 운영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즉, 매물로 확보해놓은 병풍을 부인의 회갑연 때 펼쳐 놓은 상황이라고 짐작합니다.
병풍을 추적해서 조사해보던 중 과연 오리건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십장생도병」과 사진 속 병풍이 같은 것인가를 확인해보는 과정도 흥미롭습니다. 오리건 대학교 박물관이 병풍을 구매한 경로를 탐색해봅니다. 오리건대학교에선 이 병풍을 1924년 서울의 테일러 상회를 통해 구입했다고 합니다. 당시 행촌동에 서양식 벽돌집을 짓고 살던 앨버트 테일러(1875~1948)가 바로 테일러 상회의 사장입니다. 구입당시에 발행한 테일러 상회의 매도증은 1924년 9월 10일자로 작성되어있다고 합니다.
인문학엔 이런 묘미도 숨어 있습니다. 책에서 책으로 이어지는 스토리가 아닌, 이렇게 옛길을 더듬어 올라가는 과정 속에 학문의 자세와 열정이 드러납니다.
“우리의 이 책이 한국학의 현 수준에 대한 자부로 읽히기를 바란다.” 집필자를 대표한 정 민의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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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통해 시대를 살아간 사람의 정신을 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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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이라는 부담감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선택하게 된 계기는 '그림과 만나다' 라는 책의 제목에서 였다. 급속도로 변화하는 IT시대에 살아가고 있지만, 역사와 옛 선조들의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직접적으로 나서서 찾아보지 않는다면 중.고등학교 국사와 세계사 시간이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또한 관심분야와 전공과목이 아닌 나로서는 그림에 담긴 역사을 읽어내고 속을 훔쳐 본다는 것이 문외한 이라서 알지 못하고 어렵다는 변명아닌 변명만을 늘어놓게 된다.
가끔 관광지의 박물관이나 혹은 미디어 매체를 통해 접해 본 옛 그림들. 고려불화나 단원 김홍도의 그림, 어떤 특별한 감흥보다는 그저 단순하게 옛것은 무언가 다르구나, 귀하구나, 라는 느낌이 공통점이었다. 그런데 '한국학 그림과 만나다'에서 보여주는 이야기에는 다양한 분석을 통해 깊이있는 역사를 보여주려 한다. 그림을 통해 관찰하면서 접근하는 방식이 처음 접하는 독자에게 한국학이라는 부담감을 덜어주었던 것 같다.
한국학이라는 부담감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선택하게 된 계기는 '그림과 만나다' 라는 책의 제목에서 였다. 급속도로 변화하는 IT시대에 살아가고 있지만, 역사와 옛 선조들의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직접적으로 나서서 찾아보지 않는다면 중.고등학교 국사와 세계사 시간이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또한 관심분야와 전공과목이 아닌 나로서는 그림에 담긴 역사을 읽어내고 속을 훔쳐 본다는 것이 문외한 이라서 알지 못하고 어렵다는 변명아닌 변명만을 늘어놓게 된다. 가끔 관광지의 박물관이나 혹은 미디어 매체를 통해 접해 본 옛 그림들. 고려불화나 단원 김홍도의 그림, 어떤 특별한 감흥보다는 그저 단순하게 옛것은 무언가 다르구나, 귀하구나, 라는 느낌이 공통점이었다. 그런데 '한국학 그림과 만나다'에서 보여주는 이야기에는 다양한 분석을 통해 깊이있는 역사를 보여주려 한다. 그림을 통해 관찰하면서 접근하는 방식이 처음 접하는 독자에게 한국학이라는 부담감을 덜어주었던 것 같다. 한국학이라는 부담감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선택하게 된 계기는 '그림과 만나다' 라는 책의 제목에서 였다. 급속도로 변화하는 IT시대에 살아가고 있지만, 역사와 옛 선조들의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직접적으로 나서서 찾아보지 않는다면 중.고등학교 국사와 세계사 시간이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또한 관심분야와 전공과목이 아닌 나로서는 그림에 담긴 역사을 읽어내고 속을 훔쳐 본다는 것이 문외한 이라서 알지 못하고 어렵다는 변명아닌 변명만을 늘어놓게 된다. 가끔 관광지의 박물관이나 혹은 미디어 매체를 통해 접해 본 옛 그림들. 고려불화나 단원 김홍도의 그림, 어떤 특별한 감흥보다는 그저 단순하게 옛것은 무언가 다르구나, 귀하구나, 라는 느낌이 공통점이었다. 그런데 '한국학 그림과 만나다'에서 보여주는 이야기에는 다양한 분석을 통해 깊이있는 역사를 보여주려 한다. 그림을 통해 관찰하면서 접근하는 방식이 처음 접하는 독자에게 한국학이라는 부담감을 덜어주었던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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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처음 마주하게 되었을 때는 한 폭의 시선과 일회의 만남으로는 나의 마음을 삶의 다양한 인연과, 사연, 추억, 그리움의 마음을 다시 천천히 떠올려보게된다.
사진속의 금 하나가 오랜 세월을 거쳐온 이들의 사연과 인연, 이별과 만남, 사랑이 잘 간직되어
각각의 사연과 그 내면속에 담겨진 이야기들이 새롭게 펼쳐질 때마다 지금 눈에 보이는 풍경들이
다채로운 그림들의 향연으로만 그 시선과 관심이 채워지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계기로 세상 이 책을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는 또 어떤 감성과 생각들로 폭넓고 깊게 느껴볼 수 있을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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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이라는 우리나라 고유의 인문학이 생겨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것으로 안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1940년대부터 사용되었지만 널리 알려지지 못하고 본격적으로 연구가 시작된 것은 한국전쟁이 끝난 뒤라고 한다. 그나마 우리 정부가 한국학을 널리 보급하기 위해 한국국제교류재단을 세운 것이 1991년이며, 이후 정부의 대대적인 지원에 힘입어 지금은 전 세계에서 한국학을 개설한 대학이나 기관이 많이 증가했다고 하니 다행이라 하겠다.
우리 고유의 것을 연구하는 한국학은 언어, 역사, 지리, 사회 등 다양한 접근 방식이 존재하지만 그림이나 사진 한 장 또는 여러 장에서 자연스럽게 끄집어내기란 힘든 일이다. 그런데 일반인도 같이 어울릴 수 있도록 그렇게 한국학을 끄집어 낸 책이 나왔다. 바로 『한국학, 그림과 만나다』라는 책이다. 이 책은 과거에는 국학이라 불렀던 한국학을 교양잡지로 재구성한 <문헌과해석>이라는 계간지가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이 책은 한국학의 다양한 영역을 고루 담은 교양서로 모두 스물일곱 편의 글로 구성되었다. 책은 모두 4부로 구성되었다. 그림과 문예가 만나 빚어내는 글들, 옛 그림을 통해 그림에 담긴 역사와 시대상을 살펴보는 글들, 그림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장면을 소개하는 글들, 그리고 사료의 가치가 있는 그림이나 사진을 통해 역사를 재구성하고 복원하는 글들로 나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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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에 나오는 그림 중 나의 관심을 끈 것은 <노량주교도>이었다. 정조의 화성행사의 대미를 장식하는 주교도, 순 우리말로 하자면 '배다리'다. 배를 연결하여 만든 다리로 지금으로 말하자면 노량진에서 한강을 건널 수 있도록 배다리를 배를 연결하여 만들었다는 것이다. 주교도는 두 곳에서 언급된다. 처음 언급되는 곳은 회화로서 여덟 폭의 병풍인 <화성능행도병>에서다. 마지막 병풍에 해당되어 제목도 대미를 장식한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리고 나중에 언급되는 곳은 <원행을묘정리의궤>에 있는 <주교도>다. 이곳에서는 주로 배다리의 역사적인 기록과 채색 되지 않은 그림만 보여준다. 두 그림을 그림만 놓고 비교한다면 병풍은 정조의 행사 모습 위주이고, '주교도'는 배다리의 구조를 설명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다고 할 수 있다. 원근법을 도입한 그림이라 혁신적이라는 설명도 곁들였다.
몇 가지 그림을 제외하고는 평소 쉽게 볼 수 있는 그림이나 사진이 아니어서 보는 동안 조상의 숨결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그리고 나열된 순서 역시 의미부여가 된 것이 아니어서 어디서부터 감상을 시작해도 된다는 것이 재미있었다. 부분적이나마 우리의 것을 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앞으로도 한국학과 관련된 다양한 서적을 접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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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이런 주제의 책은 굉장히 고리따분하고 어려울 꺼라는 생각에 아예 관심조차 갖지 않았었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알게 된 화인열전 이라는 책을 통해 우리나라의 옛 그림과 그에 관련된 우리나라의 문학과 문화 이야기가 얼마나 감칠맛 나고 재밌는지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 후로는 이런 주제의 책을 보면 다소 어렵다는 느낌이 들어도 일단은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드니..관심을 가져야만 비로소 눈에 들어오고 일단 눈에 들어오면 더 많이 알게 되고 그러는 것 같다. 이 밖에도 새롭게 만난 이야기도 있고 어디선가 접해본 이야기도 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런 책을 읽으면 읽을 수록 우리나라의 옛 그림의 매력에 더욱 빠져 들고 조상들의 여유로운 삶에 고취되어 가는 나를 발견한다는 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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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 그림과 만나다
역사에 대해 알면 알수록 흥미롭다는 생각을 하면서 더불어 한국학과 관련된 책이라는 이유와 여러 분야의 학자들의 그림과 함께 풀어가는 한국학 공부라는 사실에 꼭 읽고 싶었던 책이었다. 책을 보는 순간 범상치 않은 두께와 깊이 있는 내용, 그리고 책을 집필하신 분들까지 모든 부분이 마음에 든다. 최근에 집 근처에 도서관이 생기면서 다양한 인문학 강좌가 열리고 있어서 3개월 단위의 인문학 강의를 열심히 등록하며 도서관을 들락거리다보니, 그동안 별 관심도 흥미도 없이 그저 딱딱하고 지루하다고만 생각했던 인문학에 대해 생각이 많이 달라지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사회 전반적으로 인문학에 대한 새로운 시각으로 여러가지 인문학과 관련된 책자들도 많이 출간되고 있어 부족하지만 조금씩 인문학에 대해 눈을 떠가고 있다.
<한국학 그림과 만나다>는 그동안 읽은 몇 권의 인문학 책과는 또 다른 책이자, 너무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은 책이 되었다. 그림 한 장에 담긴 다양한 역사와 작가의 생각, 그리고 시대적인 환경 등을 담고 있다는 것도 새롭게 알게 되어 그림은 물론, 인물, 역사 등 다양한 공부가 되었다. 스물 일곱 편의 내용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내용이 없으며, 모두 우리 역사를 알아가고 한국학을 공부하는데 도움이 되는 내용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몇 가지 내용은 더 흥미롭게 읽었는데, '정조 임금이 하사한 귤 술잔' 이라는 내용도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종묘에 가을이면 햇과일 제수용으로 귤을 진상하는 과정에서 제주도 감사는 진땀을 흘려야 했다는 내용이나, 정조 임금님이 신하들에게 귤의 겉껍질로 만든 술잔을 하사한 내용등은 이 책이 아니고는 알기 힘든 내용이었다. 더군다나 귤을 그린 그림과 귤에 대한 시를 읽으면서 지금은 흔하기만 한 귤이 과거에 얼마나 귀한 과일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100여년 전의 구 한말로 접어들면서 한 집안의 사진 한 장으로 엮어가는 '구 한말 서울의 상업가 이야기'라는 제목의 '주인섭'이라는 집안을 파헤치는 이야기나 사진 속 병풍인 <십장생도병> 그림이 '오리건 대학의 박물관'에 소장된 내용등을 따라가는 여정도 너무 흥미롭다. 달랑 한 장의 옛날 사진은 수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고, 그 이야기는 한 집안의 역사 뿐 아니라 우리의 근대사를 함께 담고 있다.
마지막 이야기인 1882년 일본에서 찍었다는 '박영효'의 양복입은 모습의 파격적인 사진과 함께 하는 내용까지 어렵겠다는 선입견과 달리 그림, 사진, 시와 함께 소중한 우리의 유산들을 만나는 시간이자, 그 가치를 새롭게 알아가는 공부하는 시간이었다. 자라나는 청소년기 아이들에게도 자신있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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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계간지『문헌과 해석』50호 발간을 기념해 기획한 것으로 그림과 고문헌 등 을 통해 우리나라의 다양한 인문학적 주제를 담은 한국학 이야기 27편을 엮은것이다. 필자로는 인문학자인 안대회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이종묵 서울대 국문과 교수 등 중견학자들을 비롯해 김동준 이화여대 국문과 교수 등 대표적인 한국학 교수를 포함해 모두 27명이다.
새들이 우리 집 마당 매화 가지에 날아들었네. /그 진한 향기를 따라 찾아왔겠지. /여기 깃들고 머물러 즐거운 가정을 꾸려다오. /꽃이 이렇게 좋으니, 그 열매도 가득하겠지
전남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다산 정약용은 그의 나이 51세 때 소실한테서 딸을 얻었다. 다산은 늘그막에 얻은 딸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매화 그림(梅鳥圖)을 한 폭으로 그리고 그 밑으로 7언 절구 시 한 수를 지어 써넣었다. 다산의 감춰진 애틋한 부정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딸을 시집보내고 그림과 시를 그려 준 다산은 얼마 안 있어 초당 생활 중 얻은 소실에게서 홍임이란 딸을 보았다.
묵은 가지 다 썩어서 그루터기 되려더니/ 푸른 가지 뻗더니만 꽃을 활짝 피웠구나/ 어데선가 날아든 채색 깃의 작은 새/ 한 마리만 남아서 하늘가를 떠돌리
비단 속치마를 잘라 만든 화폭 위에 가로로 뻗은 채 꽃송이들이 매달린 매화 가지와, 아래 가지 끝에 앉아 있는 멧새 한 마리의 모습을 담았다. 그 아래는 7언 절구의 한시가 특유의 날렵한 행서체로 쓰여 있다. 정민 한양대 교수(한문학)는 “시구의 맥락으로 미뤄 다산이 유배 생활 중 얻은 소실에게서 낳은 딸 홍임을 떠올리며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고 분석했다 외로운 유배지에서 자기가 떠나면 혼자 남겨질 갓 태어난 딸을 염두에 두고 그린 것이라 생각하니 더 애초롭고 유배의 쓸쓸함과 딸을 시집보내는 심경의 아련함까지도 느껴지는 글과 그림이다.
<김남길, 귤림풍악> 탐라순력도는 1702년(숙종 28년) 제주 목사 겸 제주병마수군절제사로 부임한 이형상이 제주의 모습을 화공 김남길로 하여금 채색도로 그리게 한 41폭의 화첩으로 18세기 초 제주도의 관아와 성읍, 군사 등의 시설과 지형, 풍물 등을 제주목사 순력행사를 통해 자세하게 묘사한, 현존하는 제주 유일의 옛 기록화이다. 과거 중국에서 귤은 귀한 과일이었다.중국에서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귤은 독특한 문화적 네트워크를 이룰만큼 특벼ㄹ한 과일이었다. 정조는 귤을 잘 알고 지혜롭게 여러방면으로 활용했다.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아플 때는 귤차를 달여 올리게 했고, 정조 자신도 몸이 좋지 않을 때는 향귤차를 마셨다. 정조는 귤 껍질로 만든 귤잔인 귤배(橘盃)를 신하들에게 가장 많이 하사한 임금이기도 했다. 또 귤배명(橘杯銘)이라는 독특한 문학작품을 지어 신하들에게 내리기도 했다. 정조는 명실공히 귤 애호가였다는 것이다. 이 책은 선인들의 생각을 그림과 시에서 발견할 수 있다. 글이나 그림자료에 얽힌 다양한 볼거리와 사연을 담고 있어 옛 사람들의 삶의 멋과 향기가 느낄 수 있는 책으로 시대와 분야를 넘나들며 한국학이라는 학문의 스펙트럼이 점점 넓어질 수 있음을 예측해볼 수 있는 책이라 셍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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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한 장의 그림이나 사진이 어떤 기록물보다 충실한 역사 자료가 된다. 당시의 인물과 풍물은 물론 역사의 현장까지도 우리 눈앞에 가감 없이 전해주기 때문이다. '옛글을 읽는 묘미! 옛 문인들의 삶을 한눈에 보는 재미!'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한문학,국어학, 철학,음악사,미술사와 같은 각종 한국학 양념들을 적절히 버무려 스물 일곱가지의 맛깔난 만찬이 차려진 괜찮은 식탁이 차려졌다.
학교나 전공에 상관없이 그 분야에서는 내노라하는 전문가들이 가장 자신있게 얘기할 수 있는 주제를 가지고 솜씨있게 뽑아낸 작품이니 아마 한국 최고의 교양서가 되지 않을까 싶다.
과거 선비들이 즐길 수 있었던 문화는 시를 짓고 술을 나누는 정도의 소박한 것들 이었을것이다. 굳이 사치스러운 취미가 있다면 겨우내 추위를 이기고 가장 먼저 핀다는 매화 한그루를 작은 분을 옮겨 달빛을 벗하고 은은한 촛불아래에서 그윽한 매화향을 즐기는 '매화음'정도가 아닐까. 화원 신분의 김홍도역시 2000전을 들여 매화를 사고 800전으로 술 몇되를 사서 동인들을 모아 매화음을 마련하였다니 당시 매화 완상의 풍조가 대단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1810년, 두릉에서 다산 초당으로 편지와 함께 치마가 배달되었다. 빛 바랜 낡은 치마, 아내가 시집올 때 입었던 옷. 부부의 인연을 맺은 지 어언 34년, 떨어져 산 세월이 어느 덧 10년이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은 보기와 달리 곰살궂은 데가 있었다. 친한 벗과 제자를 위해 낡아 헤진 천을 잘라 멋진 글과 글씨를 써서 작고 예쁜 첩으로 만들어 선물한곤 했다. 그의 아내가 굳이 낡아 못 입게 된 치마를 보내온 것은 남편의 이런 소용을 헤아렸기 때문일 터.' -본문중에서-
다산은 치마 솔기를 뜯어 잘라낸 다음 풀 칠하고 배접해서 공책을 만들어 잔뜩 풀 죽어 낙담해 있을 두 아들에게 줄 훈계의 말을 적어나간 가르침이 '하피첩' 세 책이 되었다. 실물은 몇 년 전 온전한 상태로 세상에 처음 공개되어 사람들의 마음을 덥혔다.
'하피첩'을 만들고도 자투리 천이 남아 3년 뒤인 1813년 마침 강진사는 친구 윤서유의 아들 윤창모에게 시집간 딸을 위해 매조도(梅鳥圖) 한폭을 그려준다.
펄펄 나는 저 새가 내뜰 매화에 쉬네 꽃다운 향기 매워 기꺼이 찾아왔지 머물러 지내면서 집안을 즐겁게 하렴. 꽃이 활짝 피었으니 열매도 많겠구나.
안마당에 찾아든 새 두마리는 사위와 딸이다. 멀리 떨어져 가까이 데려와 짝지어준 기쁨을 '머물러 지내면서 / 집안을 즐겁게 하렴'으로 표현했다. 꽃이 많이 피어 열매도 주렁주렁 달리겠다고 하여 딸에게 자식을 많이 낳으라고 축원했다.
2009년 6월 다산의 매조도 한 폭이 새롭게 공개되었다. 글씨도 그림도 영락없이 그의 솜씨다.
묵은 가지 다 썩어 그루터기 되려더니 푸른 가지 뻗더니만 꽃을 활짝 피었구나. 어데선가 날아든 채색 깃의 작은 새 한 마리만 남아서 하늘가를 떠돌리.
시가 왠지 슬프다. 1813년 8월19일에 지었다. 앞서 시집간 딸에게 준 매조도를 7월 14일에 그렸으니, 이 그림은 그로부터 35일 후에 그린 것이다. 누구를 위해 그린 그림인가?
다산은 초당 생활 중에 얻은 소실에게서 홍임이란 딸을 두었다. 혹시 이딸을 염두에 두고 그린 그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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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이 강진 유배시절 소실을 두었다는 것도 의외이지만 이렇게 매조도를 그리고 시를 지었다는 것도 처음 안 사실이다. 정실에게서 난 딸이 시집을 간 며칠 후 소실 정씨에게서 딸을 얻었다니 우리나이로 52세의 나이에 얻은 딸이니 얼마나 귀여웠겠는가. 유배생활이 끝나고 1818년 두릉으로 돌아오면서 다산은 홍임 모녀를 함께 데리고 왔으나 다시 초당으로 쫓겨 내려갔다. 본가에서 받아들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긴...어진 아내라도 어찌 시앗을 좋게 보겠는가. 다산이 아들에게 준 편지에서 '네 어머니의 속이 좁다'고 탄식하였다니 무릇 남정네의 이기적인 속성은 다산도 어쩔수 없었던 모양이다. 소실 정씨는 떠도는 얘기처럼 주막집 노파의 딸이 아니었다고 한다. 정씨가 두릉 본가에서 쫓겨나서 강진으로 내려와 지었다는 '남당사'를 보면 눈물겹기만 하다.
어린 딸 총명함이 제 아비와 똑같아서 아비 찾아 울면서 왜 안 오냐 묻는구나 한나라는 소통국도 속량하여 왔다는데 무슨 죄로 아이 지금 또 유배를 산단 말가.
'아빠 언제와"'하며 이제 대 여섯살 난 딸이 우는 모습을 상상하니 또 다른 유배의 모습이 아니던가. 결국 그녀는 평생 다시 다산을 만나지 못한 듯 하다. 그렇게 모녀는 무심히 잊혀졌다. 만년의 다산에게는 지울 수 없는 큰 상처였을 것이다. 인륜의 정도 여인의 투기앞에서는 어쩌지 못하는 것인가. 두 모녀의 삶이 슬프기만 하다. 홍임모녀를 생각하며 그렸다고 추정되는 다산의 두 번째 매조도는 절친인 이인행에게 건네어져 이인행의 집안과 누대 연비로 맺어진 문한가의 종손에게 물려진 모양이다.
정실 아내가 보낸 치마를 잘라 시집간 딸과 소실의 딸인 홍임을 위해 두 점의 매조도를 남겼다니...치마를 보낸 정실의 입장에서 보면 원통할 일이었을 것이나 다행히 정실부인이 살아생전에는 이 사실을 몰랐을테니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긴 하다. 정민교수님은 유배지인 초당에 열 여덟의 제자들이 와글와글하여 살림을 해줄 누군가가 필요하여 어쩔 수 없이 소실을 들였으리라고 변명(?)을 해주셨지만 남정네의 마음을 어찌 알겠는가. 다산도 남자인 것을. 다산과 소실 정씨와 딸 홍임의 사연이 어린 매조도를 보니 사랑하는 이에게 잊혀지고 홀로 쓸쓸이 늙고 죽어갔을 한 여인네와 아비를 그리며 평생 서녀로 살아갔을 홍임의 삶이 아프기만 하다.
'나는 초정 박제가(1750~1805)가 중국 지식인과 교류하는 과정을 주목하고서 그 증거물을 물색해왔다. 조선과 청의 지식인들은 시문과 서책, 그리고 서화를 주고 받았으나 그 밖에도 적지 않은 물건을 주고 받았다. 박제가는 그들에게 주로 청심환과 조선종이와 접부채를 선물했다. 또 조선 소주를 가지고 가서 맛을 보이기도 했고, 조선의 갓과 복건, 일본도 따위도 주었다. 그에 대한 답례로 중국 지식인도 적지 않은 물건을 박제가에게 선물했다. 박제가가 나빙(1733~1799)에게 준 시에 "나는 은화를 주고 산 물건이 하나도 없나니/ 시 주머니 그림 축이 엉성함을 비웃노라"고 읆은 구절이 있는데 그가 조선에 가지고 온 물건 중에는 은자로 산 것보다 선물로 받은 것이 많음을 실토했다.'
'박제가에게 많은 물건을 준 인사 가운데 손형이란 사람이 있다. 총독을 지낸 손사의의 아들이다. 그는 유독 박제가를 만나고자 늘 목을 빼고 기다렸고, 늘 선물을 주려고 안달이었다. 그 손형이 1790년에 초정 박제가에게 의미 있는 선물을 했다. 다름 아닌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숭정황제 의종(1628~1644)이 황궁에서 사용하던 현금(玄琴)을 선물한 것이다. 검은 옻칠을 했고 휘는 자개로 만들었다. 줄은 일곱이고 길이는 가로로 무릎보다 길며 복판은 푹 파여 비어 있는 물건이었다.'
'손형이 박제가에게 이 물건을 준 이유를 명나라 황제의 물건이라 꺼림칙하여 자기 집에 두고 싶지 않아서라고 했는데, 설득력이 충분한 추정이다. 숭정제의 유품을 꺼림칙하게 느낄 수 밖에 없는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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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건룽제 치하에서 총독까지 지낸 손사의의 아들 손형의 입장에서는 명나라 숭정제의 유물을 소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청조에 대한 반감의 표시로 해석 될 수도 있었겠다. 박제가는 1790년 선물받은 숭정제의 유물를 가지고 귀국하여 1792년 돌연 석재 윤행임에게 찾아가 건넸다고 한다. 윤행임은 병자호란때 청나라에 굴복하기를 거부하고 심양에 끌려가 죽임을 당한 삼학사 윤집의 후손이다. 당연히 청나라에 의리를 지키는 집안이 유품을 지니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하였던 모양이다. 후에 윤행임은 사사되는 사건을 발생하여 숭정금은 다시 떠돌아 추사 김정희에게 흘러 들어갔다가 1853년 후손인 윤정현이 돌려 받았다고 한다.
안대회교수님은 윤행임의 사후 이 숭정금이 추사에게 흘러들어갔다는 증거를 추사가 쓴 <숭정금실>이란 네글자로 추정하고 있다. '글씨의 내용이 숭정금이 보관된 집이란 의미이므로 달리 생각하기 어렵다'고 하면서 최완수 선생의 '숭정고금가 서문'을 들었다. 윤정현이 함경 감사로 재직 할 때 마침 이 지역에 유배온 추사를 만나 선친이 애지중지하던 숭정금의 존재를 물었고 추사는 지금도 잘 보관하고 있다고 했고 모두 서울로 돌아온 위 추사는 숭정금을 윤정현에게 보냈다고 한다. 교수님은 아무래도 추사가 숭정금을 윤정현에게 돌려주며 숭정금을 보관하고 즐기는 집이라는 의미로 써서 보내준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정작 김정희는 숭정금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남기지 않은 것이 그 이유의 하나로 들수 있다는데.. 추사가 숭정금을 실제로 보관했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한 나라의 왕이 애지중지하던 거문고가 어찌어찌하여 조선의 박제가에게 전해지고 다시 윤씨집안으로 흘러들어왔던 사연이 기구하게만 느껴진다. 그후 숭정금이 어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하는데 이렇듯 한 학자에 의해 다시 세상에 이름을 드러내었으니 한 때는 찬란했던 명나라의 시간들이 퉁땅뚱땅하면서 들려오는 것 같지 않은가.
이렇듯 지나간 시간이 그대로 느껴지는 그림 한장 한장을 들여다 보니 그 곳에는 종이와 물감이 아닌 살아있는 인물과 사연들이 그대로 보이기 시작한다. 박물관에 걸려있는 그림들을 각 분야에 전문가들이 훅 펼쳐서 3D의 생생한 입체감으로 전달해주니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의 시간속을 다녀온듯 뿌듯하기만 하다. 13년의 세월을 순수한 학문의 열정으로 나누고 조언하고 비판하며 이 책을 만들어 주신 젊은 인문학자 27분에게 진정한 감사의 마음을 보낸다. 내 서고에 아주 소중한 유산으로 남길 책을 만들어 주셨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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