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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이책을 처음 읽었을 때
무척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가 몰랐던 충격적인 사실이어서
더욱 흥미로왔엇습니다 책이 처음 나왔을 시기는 1970년대 미국 인기 드라마 '카스터장군' 에서 좋은 미국인, 잔인하고 나쁜 인디안으로
널리 인식되었던 때였습니다
그 뒤 책을 검색할 때면 항상 제목을 확인해보고
다시 한번씩 기억해 내곤하는데 이 번에 새롭게 출간되어 마치 오래만에
만나는 반가운 벗과 같습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 교양과 지식에 관심있는 사람들
꼭 읽어보기를 권합니다
반드시 새로운 미국을 알고 좋은 경험을 할 것입니다 특히 처음 번역하셨던 교수님이 재출간 해서 반갑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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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들의 잔혹한 역사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이야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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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 미국 인디언 멸망사
요즘 읽고 있는 책은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 부제 - 미국 인디언 멸망사" 란 책이다. 절판되었던 책이 다시 한겨레출판사를 통해 나와서 반가운 마음에 구입했다. 이 책은 인디언 기록 문학을 대표하는 책으로 인디언들의 멸망과정을 그려낸다. 청교도 정신으로 건국한 미국은 그 건국과 확장과정에서 수 많은 인디언들을 학살했는데, 그 학살이 비교적 최근까지 이어진다. 인디언들은 백인들에게 미개한 존재였고 개화의 대상이었으며 선교의 대상이었을 뿐이었기에 그들에게 법과 인권은 인정되지 않았다. 그 위대한 미국 헌법의 천부인권은 백인만을 위한 장난감에 불과했다. 따라서 인디언들의 작은 실수는 용납되지 않았고, 백인들의 위법은 관용과 공익이라는 이름으로 묵인되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인디언들을 이해하고 인디언들을 위해 노력한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런 소수는 잔학한 일부와 침묵하는 다수에 의해 인디언이 멸망되는 과정을 막아 낼 수 없었다. 자유롭게 태어난 사람이 우리에 갇혀 아무 데나 가고 싶은데 갈 수 있는 자유를 빼앗기고서 물론, 인디언의 멸망에 있어 그들 스스로가 멸망을 초래한 면도 없지 않아 보인다. 그들의 리더인 추장들은 젊은 인디언들을 설득하거나 통제하지 못했고, 각 지역의 인디언들은 연합하지 못했다. 미국의 회유책에 동화되는 부족이 있는 반면, 끝까지 전투에 임한 부족이 있었고 심지어는 용병으로 고용되어 다른 인디언들을 색출하는 인디언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인디언들의 몰락 원인을 인디언들에게 돌릴 수 없는 이유는 당시 미국 정복자들의 의도적인 기만과 잔인함에 있다. 토지 소유권에 대한 개념이 없는 인디언들에게 토지 매매는 이해할 수 없는 제도였고, 글을 모르는 그들에게 말로 설명한 조약과 실제 체결된 조약의 차이로 인한 불이익은 피할 수 가 없었다. 또한 미국 당국과 이민자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수시로 약속을 어기거나 조약을 위반하기도 했는데, 인디언들이 조약을 위반하지 않을 때에는 의도적으로 조약의 위반을 유도하기 위해 인디언들을 도발하기도 했다. 이렇듯 흑인 노예가 해방되고 여성의 투표권이 보장되는 시기에도 인디언들에 대한 학살은 전미를 걸쳐 이루어졌는데, 그 학살의 대상은 인디언 전투원 뿐만 아니라 노인과 여성, 그리고 어린이까지 그 대상을 가리지 않았다. 약속된 식량이 제공되지 않는 인디언들에게는 생존을 위한 사냥이 필수적이었고, 사냥을 위해서는 강제로 배정된 자신들의 구역을 벗어날 수 밖에 없었는데 이는 곧 자신들에 대한 군사적 개입의 빌미가 될 뿐이었다. 또한 미국의 대통령을 큰 아버지라 믿고, 위대한 정령이 인디언뿐만 아니라 백인들도 만든 이유는 함께 살기 위한 것이라 믿었던 인디언들에게 "명백한 운명" (유럽인과 그 후손들이 신대륙을 다스리도록 운명 지어져 있으며, 지배민족으로서 당연히 인디언의 땅과 삼림과 광산을 모두 책임져야 한다는 개념)을 이유로 자신들의 땅과 자산을 빼앗는 미국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존재였다. 당신들은 집을 지어주고 보건소를 만들어줄 테니 주거지역으로 들어가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들을 원치 않는다. 나는 바람이 거칠 것 없이 불어오고 햇빛을 가리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평원에서 태어났다. 그곳은 울타리도 없고 모든 것이 자유롭게 숨 쉬는 곳이다. 벽 안에 갇혀서 죽기보다는 거기서 죽고 싶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인디언들의 잔혹한 멸망 뒤에 도사린 인간의 이기심에 치를 떨지 않을 수 없었다. 상대방의 순수함을 이용한 계략과 사소한 이익을 위한 학살의 이면에는 자신들이 인디언보다 우월하다는 인종관이 바탕하고 있었는데, 선교사들 또한 인디언들을 개종의 대상인 미개인으로 보고 그들을 탄압한 것은 너무나 슬픈일이었다. 인디언의 종말은 이미 끝난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소수자에 대한 차별은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고, 그들을 향한 학살과 착취는 외국인 노동자, 탈북자, 성적 소수자, 노동자라는 또 다른 현대의 인디언들을 대상으로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다. 우리가 역사를 기록하고 되돌아 보는 이유는 또다시 그러한 실수가 벌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지금 우리는 우리 주위에 살고 있는 현대의 또 다른 인디언들이 소리없이 죽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작다고 하더라도 용기있게 목소리를 내야한다. 그렇게 작은 목소리들이 모이고 모일때 우리의 후손들은 살아있는 현대의 인디언들과 함께 더 다양하고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나도 하나의 사람일 뿐이다. 나는 부족의 목소리이다. 그들의 마음을 나는 말한다. 나는 더 이상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 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당신들은 나에게 백인의 권리를 거부한다. 내 피부는 붉지만 심장은 백인과 똑같다. - 모도크족의 킨트푸애시
관련 포스트 : http://youlaw.tistory.com/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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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TV 에서 유타주를 소개하는그 프로그램이 눈에 들어 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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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또래의 사람들이 인디언에 대해서 처음으로 간접적으로 접하게 된 것은 서부 영화 속일 것입니다. 말을 타는 솜씨가 아주 뛰어나게 그리긴 했어도 영화 속에서 그들은 늘 야만스럽고 잔인하게 그려지고, 그걸 물리치는 보안관이나 기병대들은 아주 용감하게 묘사가 되어 있지요. 우리가 북한에 대해서도 정치적 이유에서 강요된 이미지를 갖도록 요구받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인디언에 대해서도 지금 아메리카를 지배하는 자들이 원하는 이미지만을 전달받았던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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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호화 고층빌딩이 줄지어 서 있는 번화가, 패션에 일가견 있는 사람들이 제 갈길을 바삐 걷는 풍경. 미국 사회를 떠올릴 때마다 나는 왠지 멋스러운 풍경을 내 안에 그려보고는 한다. 새하얀 피부, 일부러 염색을 하지 않는 다음에야 우리로선 가지기 힘든 색깔의 머리칼. 하지만 그 땅의 주인은 따로 있다. 이 다민족 사회에서 백인 남성이 아닌 다음에야 차별을 감수해야 한다고 하지만, 으레 생각할 때 험난했을 흑인의 삶 못지 않게 고초를 겪어야 했던 이들이 있으니 바로 인디언들이다. 그들이 겪은 시련은 흑인들의 고통과는 또 다른 차원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느 누군가가 그 땅에 발을 디디기 전부터 그 땅에 속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사방이 그들의 몫이었다. 굳이 경계를 나누려 들지 않았고 어느 한 곳에 머물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서로를 향해 총부리를 겨눌 이유는 더더욱 없었다. 동물을 죽이기는 했지만 그것은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범주 내에서만 행해졌다. 욕심이 없는 소탈한 사람들, 그들의 삶을 뿌리째 뒤흔든 것은 바로 어느날 갑자기 이 땅에 나타난 백인들이었다. 포리스터 카터가 쓴 자서적인 소설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을 읽다 보면 오클라호마의 보호지로 강제 이주 당하던 체로키 족의 비참한 모습과 만나게 된다.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의지와는 달리 상실한 채 백인들이 살라고 지정해준 황량한 땅으로 이동하는 이들의 모습을 저자는 ‘눈물의 여로’라고 표현했다. 체로키인으로서의 정신을 지키기 위해 백인들이 꺼내놓은 마차는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오로지 앞만 쳐다보며 걸었다는 그들, 고향 산에서 멀어져감에 따라 하나둘씩 죽어가는 사람이 늘어, 누군가는 제 죽은 여동생을 품에 안았고, 남편은 죽은 아내를, 아들은 죽은 부모를, 어미는 죽은 자식을 품에 안은 채 하염없이 걸었다는 이들의 모습을 그려놓은 부분은 고작 석 장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짧은 분량이 뿜어대는 장엄한 기운에 짓눌려 나는 책을 읽은 지 수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씩은 해당 부분을 넘겨보곤 한다. 슬픈 인디언의 역사를 잘 담은 또 한권의 책이 바로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이다. 부제가 ‘미국 인디언 멸망사’다. 왠지 모를 불안의 기운이 감돈다. 누군가가 건국의 깃발을 뒤흔들고 있을 때 다른 누군가는 서서히 식어가는 제 체온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도 같은 땅에서. 이 얼마나 모순된 일인가? 하지만 이는 사실이고, 지금은 미국의 주인이 되어버린 백인들이 바로 때묻지 아니한 인디언들을 죽음으로 내몬 장본인들이었다. 보호령은 인디언을 보호하기 위해 설치한 곳이 아니었다. 드넓은 땅을 자유로이 오가며 부족을 먹이곤 했던 이들에게 제한된 턱없이 좋은 땅은 애초부터 삶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요인이었다. 그마저도 백인들은 각종 지하자원이 매장되어 있다는 이유로 자주 침범했으며, 자신들의 질서라 할 수 있는 회담과 조약을 부당하게 맺어가며 인디언들을 압박했다. 언제나 약속을 어기는 측은 백인들이었다. 인디언들의 순수한 믿음은 언제나 배신의 도끼가 되어 제 자신의 발을 찍어댔다. 백인들은 모조리 나쁘고 약속을 지킬 줄 모른다는 믿음이 팽배하더라도 누굴 탓할 수 없는 사회적 분위기. 때때로 위대한 추장들이 부족을 하나로 뭉치게 만들었고 제 가족을 지키고자 용맹히 나선 전사들이 최선을 다해 자위에 나섰지만, 멸망이 운명이었던지 그 이후의 일은 우리 모두가 아는 바이다. 1800년대 후반. 200년도 더 전의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고작 200년 밖에 되지 아니한 일이라고 볼 수도 있다. 오늘날처럼 선명치는 아니하나 흑백 사진이 살아남은 그러나 결국에는 사라진 마지막 인디언들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왜인지 모두가 하나같이 서글픈 표정을 하고 있는 게 머지않은 훗날 자신이 죽을 거란 사실을 알고 있는 듯해 보여 기분이 묘했다. 이런 마음으로 그들의 사진을 바라보는 나의 눈이 어쩌면 제국주의 초창기 우리 안에 흑인이나 황인, 장애를 가진 이들을 마치 동물마냥 가두고 관람했던 비열하고도 야비한 시선을 하고 있진 않을지를 묻게 된다. 역설적이게도 오늘날 우리는 우리가 일구어온 문명을 배반해야만 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 발전을, 경제성장을 부르짖고는 있으나 지금과 같은 방식이어서는 아니된다는 데엔 모두가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자연이 허락한 만큼만의 것을 취했던 인디언의 태도가 그립다. 오로지 가죽의 획득을 위해 물소를 죽여댔던 백인의 잔인함을 이제는 운디드니에 묻어주어야 할 때가 왔다는 게, 이 얼마나 역사의 아이러니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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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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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적 세계사 수업시간에 성조기 얘기를 들은 기억이 있다. 하나 하나 합병과 연합을 이루어가며 성조기의 별이 하나씩 늘어나 쉰 하나가 되었다..는 얘기였던가. 상식을 키운다는 생각에서였는지 참 재미있게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미처 몰랐었다. 그 별이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침략과 억압과 강탈이 있었을거라는 사실은... 이 책을 읽으며 자꾸만 섬에서의 4.3 사건이 떠올랐다. 미제국주의자들의 침략... 지금의 미국은 인디언들이 살던 북아메리카를 침략하여 빼앗은 것으로부터 역사를 시작하고 있구나..라는 생각, 평화롭던 아메리카 땅에 들어가 그처럼 무자비하게 약탈을 하여 쉰이 넘는 별을 핏빛으로 장식했구나... 라는 생각과 함께 오십여년 전 이 땅에서도, 제주의 4.3 때도 미군정은 섬의 초토화를 배후조종했다고 하는데... 그 침략성은 2003년, 21세기가 되어서도 여전히 이라크침략전쟁을 일으켰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입시교육에 밀려 주관적인 세계관을 갖고 세계사를 배워보지는 못했지만, 며칠동안 충격적인 사상처럼 느껴졌던 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왜 우리가 동방인가, 지구는 둥글고 지축을 꽂으면 어느곳이나 세계의 중심이 될 수있다. 지금 우리가 배우는 세계사는 유럽인들 자신이 문화의 중심이라 자부하며 자신들을 중심으로 세계를 나눠놨을뿐이다. 우리는 우리가 세계의 중심이다라는 생각으로 역사를 이끌어가야한다...'는 말씀은 알게모르게 내 세계관에 큰 영향을 미친것 같다.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라는 이 책, 인디언 멸망사라는 책을 읽으며 다시한번 우리가 얼마나 침략자의 역사관에 물들어있나 생각해보게 되었다. 침략과 강탈이 없다면 세계는 공존할 수 있다. 아메리카 땅에 살던 원주민, 흔히 인디언이라 불리던 그들은 자신들에게 필요한 만큼만 가졌고 나눌 수 있는 모든 것을 공유하고자 하였다. 지금 우리가 원하는 평화는 그렇게 해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책을 읽을까 말까, 이 책이 어떤 책일까... 한번 살펴보려고 행여나 이 글을 읽을지도 모르는 분들에게 들려주고 픈 말이 있다. 사람의 머릿가죽을 벗기는 야만적인 인디언을 기억하기보다는 자유롭게 태어나 평화로이 살다 땅에 묻히기를 바라던 한 인디언 추장의 이야기다. [나는 바람이 거칠 것 없이 불어오고 햇빛을 가리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평원에서 태어났다. 그곳은 울타리도 없고 모든것이 자유로운 숨을 쉬는 곳이다. 벽 안에 갇혀서 죽기보다는 거기서 죽고 싶다. 나는 리오그란데 강과 아칸소 강 사이의 모든 시내와 숲을 안다. 나는 그 지역에서 사냥하며 살아왔다. 나는 우리 아버지들처럼 살아왔고 그들처럼 행복하게 살아왔다. 내가 워싱턴에 갔을 때 백인 큰아버지는 내게 코만치족의 땅은 모두 우리 것이어서 아무도 우리가 그곳에 사는것을 훼방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그런데 당신들이 우리보고 강과 태양, 바람을 버려두고 집안에 들어 와 살라고 하는 것은 무슨 연유인가? 우리에게 들소를 포기하고 양을 기르라고 하지 말아라...... 그러나 이제는 너무 늦었다. 백인이 우리가 사랑했던 지역을 차지했고 우리는 다만 우리가 죽을때까지 초원을 떠돌아다니기를 원할 뿐이다] -암파리카 코만치족의 파라와사멘(열마리곰), 본문에서 인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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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들은 과연 인디언들을 인간으로 생각하고 있었을까? 읽어나가면서 느껴지는 백인들의 교묘함과 폭력적 우월함, 그리고 그 앞에서 쫓겨나고 스러져가는 인디언들의 모습. 그 모습에서 문득 떠오른 것은 어릴적 내가 보았던 만화속에서의 인디언 캐릭터들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상의를 벗고 독수리깃털을 길게 꽂고다니며 악역의 모습이거나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등장했지, 절대 친구의 모습으로 등장한 적은 없었다. 인디언들은, 철저하게 적이나 사라져야 할 야만인의 모습으로 인식되어야만 했다. '우월한 문명'을 지닌 백인이 신대륙으로 진입하면서 보여진 역사적 현상의 하나일 것이다. 잉카제국에 스페인 사람들이 들어서면서 보여준 잔인한 살육이나 호주에 백인이 들어서면서 태즈매니아인들이 당했던 학살 등등에 이은 북아메리카 대륙에 백인이 들어서면서 보여준 학살, 달라진 건 백인이 세운 체제가 잔인함과 더불어 교묘함을 더한 것이랄까? 문득 궁금해진다. '우월한 문명'이란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폭력과 탐욕의 다른 말일까? 역사속에서 백인의 영역확장활동은 언제나 그 자리에 존재해왔던 토착민의 멸망을 초래했다. 인디언과 백인간의 갈등만 보아도 갈등구조는 순진함과 포용 대 교묘함과 폭력의 구도였다. 그 구도에서 백인의 승리를 정당화한다면 우리는 인간정신을 자연에 의존하여 어우러지는 삶과 타인에 대한 포용을 말살해버리는 폭력과 탐욕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렇다면, 지금의 역사적 결과는 '우월한 문명'을 폭력과 탐욕에 기초한 인간정신으로 보아야 할까?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평화와 포용을 이야기한다. 인간역사의 이 딜레마는 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백인과 인디언과의 생각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인디언에게 땅은 태어나 의지하며 살고 묻혀야하는 가장 소중한 존재였고 들소는 필요한 만큼만 잡아 식량과 살림으로서 활용하는 공존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백인에게 땅은 돈을 주고 살 수 있으며 아무렇게나 파헤쳐서 돈이 될만한 것들을 찾아낼 대상이었고, 들소는 단순히 가죽을 벗겨 팔아먹을 수 있는 대상일 뿐이었다. 인식과 삶의 방식의 차이에서도 역사는 자본에 기초한 탐욕의 승리를 선언하였다. 이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한 딜레마를 안겨준다. 그런 방식으로 발전해 온 인간의 삶은 여전히 그런 방식에 의존한 삶을 살면서 자연과의 공존을 이야기한다. 우리는 어디까지 잘못 들어온 것일까? 다시 되잡으려면 어느만큼 되돌아가야 하는 것일까? 그런 의미에서 문명사회가 멸망시킨 과거의 수많은 사람들과 사라져버린 삶의 모습들은 인간의 공존과 지속 가능성에 대한 스승이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부끄럽고 민망해도, 역사라는 우리의 과거를 되짚어보아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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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체 게바라의 홀쭉한 배낭을 읽으며, 유럽인들의 쿠바정복의 잔학성을 알게 되었고 그 때부터 인디언에 대한 우리가 모르는 진실에 대해 알고 싶었었다. 하지만 막연한 호기심만 생겼을 뿐, 최근에 영화「론 레인저」를 보면서도 그냥 별 생각없이 낄낄거리면서 보았을 뿐이다. 그러다가 문득. 예전부터 조금씩 축척되어온 인터넷 상에서의 인디언의 기도문, 인디언이 미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 같은 컨텐츠가 새삼 다시 생각이 났고, 인디언에 관한 책을 읽어야겠다고 검색해보니, 바로 이 책이 나왔다.
읽고 나니, 아. 책 한 권이 사람을 이렇게 먹먹하게 만들기 있나. 세계의 대통령이 있는 미국, 미국을 만든 유럽인들, 세계를 쥐어잡고 있는 강대국, 선진국이라 불리우는 나라들. 그들의 추악한 건국과 확장의 역사를 이렇게 생생하게 알게되다니. 학교에서 무미건조하게 주입식으로 배워오긴 했지만, 새삼 느껴지는게 세계사는 아무리 생각해도 피와 죽음의 역사인 것 같다. 항상 전쟁을 일으키고, 땅을 빼앗고, 사람을 죽이고, 노예를 만들고. 거기에 항상 따라다니는 기독교 정신. 콜럼버스가 아메리칸 대륙을 발견한 후 당시 그 커다란 대륙에 원래부터 살던 원주민들은 모두 무참히 학살을 당하였다. 오스트레일리아도 마찬가지. 하지만 우리는 미국을 비롯한 유럽 강대국들을 그저 선진국이니 하며 높게만 멋있게만 보고 있다. 강대국이 되려면 어쩔수 없는 것인가? 역사는 이걸 보여준다. 인류 문명은 탄생부터 꾸준히 이러했다. 식민과 통치와 피와 무자비하고 야만적이지만 합리화하며. 이건 정말 모순이다. 특히 그 중에서도 난 이 기독교 정신이, 무척 매우 아주 정말 마음에 안 든다. 기독교의 이름 아래에서 인간들은 야만인이 되었다. 하지만 정작 본인들만 그것을 모르는 것 같다. 비단 유럽 뿐만 아니다. 일본같은 현재 선진국이 저지른 식민지배를 보면 안다. 본질은 똑같다. 이제 세계사와 문명에 대해 구역질이 난다.
'스페인 사람들은 인디언을 처음으로 천당에 들어가게 했다고 즐거워했으며, 서둘러 그 기쁜(?) 소식을 서인도제도에 퍼뜨렸다.'
'명백한 운명이란 유럽인과 그 후손들이 신대륙을 다스리도록 운명 지어져 있으며, 지배 민족으로서 당연히 인디언의 땅과 삼림과 광산을 모두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인디언들이 기독교인이 아니기 때문에 전투를 일삼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그에게 인디언 문제를 해결하는 일은 곧 인디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일이었다.'
'인디언을 죽이는 일이라면 하느님 나라에 있는 어떤 수단을 써도 옳아.'
'이 인디언들은 필요한 것이 거의 없어서 문명인의 관습을 받아들이려 하질 않아요. 문명의 이기가 노력해서 얻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기지 않으니까요. 대다수가 백인의 생활방식을 무관심하게 보거나 아예 무시하지요.'
누가 누구보고 미개인이라 하는가? 누가 누구보고 야만인으로 낙인찍는가? 무엇이 진보이고 근대화이며 선한 도덕인가?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어떻게 진보인이라 지식인이라 할 수 있는지 난 진심으로 신기하다. 그들도 칸트는 알지 않나? 무엇이 선인지 도덕적인게 무엇인지 사랑이 무엇인지 생각을 해 보았을텐데. 들소가죽을 얻기 위해 인디언들의 삶의 일부인 들소를 먹지도 않을거면서 무참히 학살하고 금을 캐기 위해 무참히 땅을 빼앗는다. 그 과정의 잔악함은 이루말할 수 없다. 어떻게 하면 합법적으로 보이게 강도짓을 할까, 배신을 때릴까, 속여먹을까, 이러한 비열함과 이기심으로 똘똘 뭉쳐 인디언들을 몰아내었다.
'인디언들에게는 백인들이 자연 안에 있는 모든 것, 숲과 새, 짐승, 풀이 우거진 늪과 물, 그리고 대기까지 미워하는 듯 보였다.'
그들의 개척사는 정정당당하지도 않고 아주 치사하고 약삭빠르다. 항상 속는건 인디언들이었다. 백인들은 평화조약을 하면 깨고, 하고 깨고 아주 북치고 장구치고 자기들 마음대로 다 했다. 이건 절대 지식인들이 할 짓이 아니다. 어떠한 부족을 예를 들어 보면, 먼저 옥수수를 심고 가꾸는 법을 백인들에게 가르쳐준 것이 한 인디언 부족이다. 하지만 백인들이 농토를 빼앗고 몰아내는 바람에 어쩔수 없이 들소사냥을 했다. 그런데 이제 백인들이 인디언들에게 농사를 가르치려 한다. 정말 무식한 것 같다.
'모도크(인디언 족) 법은 죽었소. 지금은 백인의 법이 이 나라를 지배합니다. 법은 하나만 살아남는 거요.'
'이 깜깜한 새벽에 마을로 쳐들어 오다니, 나나 마을 사람들이 놀라는 걸 몰라서 이러는거요. 나는 도망갈 사람이 아니오. 나를 만나거나 대화하고 싶으면 사내답게 오시오' - 모도크족의 캡틴 잭
'백인들은 걸핏하면 우리 고유의 생활을 버리고 자기네처럼 살게 만들려고 한다. 농사를 지으라느니, 열심히 일하라느니. 인디언들은 그런 걸 어떻게 하는지도 몰랐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우리가 백인들에게 인디언처럼 살라고 했더라면 그들도 반발했을 것이다. 왜 바꿔 생각하지 못하는가.' - 수우족의 큰독수리
'백인들은 자기들 기분 내키는 대로 동전의 한쪽만을 이야기했다. 그 많은 말은 진실이 아니다. 자기들이 잘한 행동만을 떠벌리고 인디언들의 잘못된 행동만을 끄집어내는 게 백인들이다.' - 네즈페르세족의 노란늑대
샌드크리크 학살, 운디드니 학살 등 굵직한 인디언 학살을 비롯해 수많은 인디언 부족을 강제로 다른 척박한 땅으로 이주시킨 결과 미국은 깃발을 꼽고 51개의 주를 완성시켰다. 어떤이는 인디언 멸망이 미국의 학살과는 관계 없이 질병이 주 원인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그 질병의 원인도 바로 백인들이다. 몇 백 년동안 잘 살던 이들을 몸에 맞지 않는 기후의 땅으로 쫓아보내니 병이 안 날 수가 있나. 하지만 그러한 와중에서도 인디언들은 화평의 길을 찾았고 또 속임을 당했다.
'백인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약속을 했다. 그러나 지킨 것은 단 하나다. 우리땅을 먹는다고 약속했고, 우리의 땅을 먹었다.' - 수우족의 붉은구름
세계화니, 지구공동체니 하려면 우리도 진실을 알아야 한다. 인디언 멸망의 진실만을 보더라도, 우리가 그것에 무관심하거나 별 감정을 못 느낀다면, 극단적으로 우리나라가 당한 일본의 식민통치에 다른 외국들이 무관심한 것을 못마땅히 여겨서도 안 된다. 우리의 역사나 그들의 역사나 한(限)의 역사는 똑같다. 그들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다. 적어도 우리는 이렇게 여전히 한글을 쓰며 우리 영토에서 잘 살고 있으니. 굴복하지 않고 자연과 전통을 지키려는 인디언 정신을 우리는 가슴에 새겨야 한다. 붉은구름, 미친말, 앉은소, 코치스 등 수많은 전설적인 추장들이 있었다. 그들은 순수하고 정열적이며 자연을 사랑하고 낭만을 알았으며 백인들과 회담을 할 때나 편지를 쓴 것을 보면 매우 똑똑하고 이성적인 사람들이다.
문득 든 생각은, 이러한 전설적인 추장들을 주인공으로 한 인디언 입장의 잘 빠진 영화가 한 편 나오면 좋겠다. 캐리비안 해적처럼, 해적을 주인공으로도 쓰는데, 인디언 추장이 영화의 주인공이 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소재도 충분하고 스토리도 탄탄할 것이다. 정보가 많으니까. 앉은소나, 미친말의 일대기를 기록한 책은 이미 있다. 음.. 영화음악은 한스 짐머가 맡으면 아주 죽여줄 것 같다.
만약에, 인류의 역사가 학살과 전쟁이 없고, 아메리카 대륙에는 원주민이 아직도 있고 우리나라도 식민지배 없이 평화롭게 진보되어 왔다면 어떨까 생각해본다. 그래서 현재 기술의 진보가 뒤쳐진더라도, 세계화에 뒤떨어진다 하더라도 그 나름의 상태로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아 그러려면 그 전에 기독교 부터 없어야 되겠구나. 그럼면 '만약'이 너무 과거로 돌아가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