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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출신의 한 젊은 작가가 종적을 감춘 아내를 찾아 미국에 오게 된 이야기를 다룬 페터 한트케의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을 읽게 되었다. 그가 버스를 타고 아내를 찾아 다니게 되는 과정을 보며 문득 배우 현빈과 탕웨이가 주연했던 영화 '만추'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시애틀로 가는 버스안에서 만난 여자, 스쳐가는 사람이지만 어느덧 조금씩 눈에 들어오게되는 감정을 볼수 있었던 영화의 한장면처럼 보이기도 했다.
작가 페터 한트케는 1966년 전통극 형식에 대항하는 희곡 『관객모독』을 발표하여 연극계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한다. 『관객모독』이라는 연극을 제목만 들어봤을뿐 연극을 보지는 않았지만 커다란 이슈가 되었다는 건 접한것 같다. "문학의 존재 근거는 언어 그 자체이지 인물이나 대상에 대한 인식에 있지 않다" 라고 하며 전통적 문학 양식과 접근 방법론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제기했다고 한다.
나는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를 통해 한 인간의 발전 가능성과 그 희망을 서술하여 했다. - 페터 한트케
책의 주인공인 젊은 작가는 아내가 묵었을 만한 호텔을 다니며 찾아다닌다. 홀로 호텔에 누워있으며 그는 곧잘 혼잣말을 한다. 과거속을 떠돌아다니며 아내인 유디트를 기억하며 점점 불안해 한다. 그는 오래전의 친구인 클레어와 클레어의 딸과 함께 여행을 하며 아내를 찾아다닌다. 아내의 흔적을 발견하면서 자신에게 해를 가하는 유디트의 모습들을 발견해 낼수 있었다. 그리곤 이제 다시 홀로 유디트의 흔적을 찾아다닌다.
짧은 편지를 써놓고 사라져버린 아내 유디트. 그녀를 찾아 다니며 긴 이별을 하게 된다는 이 책은 심상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가벼운 로맨스 소설처럼 생각했지만, 아내를 찾아 다니며 혼잣말을 하는 그의 모습은 전혀 심상하지 않았다. 그는 미국에서 아내를 찾아 여행할때 읽었던 고트프리트 켈러의 『녹색의 하인리히』라는 책을 읽었다. 그는 책을 읽어가며 다른 시대의 인물을 통해 현재를 반복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녹색의 하인리히』에서 하인리히처럼 경험이 쌓일때마다 현명한 판단을 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완성할 수 있을거라는 생각을 했다. 하인리히를 자기화시켰다고 해야할까.
왜 유디트에게는 지금처럼 아무런 거리낌 없이 친절하게 대해주지 못했을까? (171페이지)
평소 이야기할때 '나'인 것도 '우리'라고 표현할 때가 많다. '우리'라는 말에서 여러 갈래에서 하나로 어우러짐을 뜻하는 말이기도 한 '우리'라는 말. 이 책에서는 '나'인 개인에서 '우리'라는 표현을 나타내고 있다. 끊임없이 자신과 혼잣말을 하며 과거와 현재의 불안함을 느꼈던 그가 이제는 누군가와 편하게 대화를 하고 있었다. 자기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고 진정한 자유로움을 느끼게 되었다.
쓸쓸하면서도 아련한 느낌이 들게 했던 영화 '만추'의 이미지가 이 책의 주인공의 여정과 함께 하는 내용과 함께 오버랩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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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출신의 화자인 ‘나’의 여정을 따라가는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는 왠지 모르게 대구가 맞아 떨어져 그 제목부터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사실 페터 한트케란 작가도 처음 접하는 작가인데, 귄터 그라스, 하인리히 벨 등이 주도하던 ‘47 그룹’이 주최한 심포지엄에서 전통적인 문학양식과 접근 방법론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을 했다고 하니 자신만의 문학관을 확립한 작가임에는 틀림없어 보입니다. 노벨문학상의 권위에 눌려 말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까란 생각이 드는 저와는 천지차이네요^^
그런 한트케인 만큼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도 참 독특했습니다. 목차도 짧은 편지, 긴 이별 이렇게 두 가지로만 구성되어 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작가가 주인공이지만 미국의 동부에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목차와 같이 “나는 지금 뉴욕에 있어요. 더 이상 나를 찾지 마요. 만나봐야 그다지 좋은 일이 일을 성싶지 않으니까.”라는 짧은 편지를 호텔의 문지기로부터 건네받고는 ‘나’는 아내 유디트의 흔적을 찾아 나섭니다.
일인칭 시점으로 화자인 ‘나’를 중심으로 전개가 되기 때문에 나의 심리는 파악하기가 쉬웠습니다. “공기마저 내게 고통을 주는 듯 했다. (p. 16)” 나 “식사를 끝냈음에도 나는 아직 채워지지 않은 식욕 탓에 재차 메뉴판을 들여다보면서 음식의 이름을 훑었다. (p. 50)”라는 문장 등으로 나의 상태를 잘 알려주니 말입니다. 새로운 환경 때문인지 아니면 사라져 버린 아내 때문인지 불안과 공포를 느끼는 것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던 차에 전에 알고 지내던 클레어가 딸 베네딕틴을 데리고 세인트루이스로 가는 여정에 동참을 하면서 ‘나’는 불안과 공포에서 점차 벗어나고 자신을 찾아가기 시작합니다. 나이가 드는 것을 기다릴 수 없기 때문에 ‘예전’과 ‘지금’이라는 말을 자주 하면서 말입니다.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등으로 인해 혼란스러운 아이가 되었으며 불안감과 공포감으로 집착하는 성향이 있는 베네딕틴을 중심으로 이들 세 명은 자동차 여행을 하면서 나는 콤플렉스들을 배려하는 방법이나 생활방식을 찾아내는 것이 더 중요함을 깨닫게 됩니다.
클레어와 베네딕틴과의 여행을 끝내고 ‘나’는 다시 혼자서 애리조나 주 투손행의 비행기에 오릅니다. 산사비에르 교회에서 국군의 날 퍼레이드를 보면서 ‘나’라는 존재는 잉여 인간과 같은 처지가 되어있음을 느끼고 아내의 해코지들이 노골적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또한 교회에서는 아내 유디트에게 아무런 거리낌 없이 친절하게 대해 주지 못한 것을 후회하면서 혼자가 되는 것을 참을 수 없어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싶은 갈증을 느끼기도 합니다.
보스턴에서 시작된 ‘나’의 여정은 동생이 벌목공으로 일을 하는 에스터케이더에서 아내 유디트를 만나면서 다시금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됩니다. 평범한 부부의 싸움과는 다르게 권총까지 등장하지만 결국은 같이 영화감독 존 포드가 사는 로스앤젤레스에 멀지 않은 벨에어란 곳으로 가 그들의 여정을 끝냅니다.
‘나’라는 말 대신에 ‘우리’라는 말을 사용하는 존 포드와의 대화에서 그들은 ‘나’에서 ‘우리’라는 개념으로 자신들을 확장시켜 나갑니다.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는 존 포드의 말들입니다.
“적을 갖는다는 것은 우리로서는 굉장히 불편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적을 가질 수밖에 없긴 하지요. (p. 195)”
“사람들은 누구나 다 갑자기 자기 자신을 느낄 수 있는 행동들이 있게 마련이지요. …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런 기분이 들 때면 혼자일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남들이 보는 앞에서 다시 그와 같은 일을 시도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한편으로는 다시 자신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사람들은 남을 의식할 때 놀랄 만한 일을 경험하고 싶어하지 자기 소신에 따라 그러고 싶어하지 않아요. (p. 199)”
소설을 읽어가면서 하나 눈에 띄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화자인 ‘나’가 여행을 하면서 계속 읽는 고트프리트 켈러의 <녹색의 하인리히>입니다. 우연인지 작가의 의도인지 유디트라는 등장인물이 등장하는 자전적 교양소설이라는 <녹색의 하인리히>는 클레어와의 토론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주로 침대에서 누워 읽는 대상이 되기도 하는 책입니다. 해설을 참고하면 <녹색의 하인리히>는 <안톤 라이저>와 함께 모델 텍스트가 되었다고 합니다. 언젠가 읽은 책에서 키북(Key Book)을 많이 제시하는 책을 읽는 것을 권하는 구절이 있었는데,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을 읽고 나니 여기서 많이 언급된 <녹색의 하인리히>도 읽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국내에선 <초록의 하인리히>로 소개되어 있네요^^)
그리 많지 않은 분량이지만 생각보다 싶게 읽히지는 않았습니다. <관객모독>으로 구변극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고 평가받는 페터 한트케의 글답게 난해한 부분도 분명 있었습니다. 처음에도 썼듯이 제목이 마음에 들어 집어든 책입니다. 해설에서 밝히고 있는 페터 한트케의 고정관념에 대한 도전이라든지 자아가 경험하는 ‘사실’과 ‘픽션’의 심미적인 화해 등은 전혀 모르고 읽었습니다. 고작 한 권을 읽었기 때문에 한트케의 직품에 대해 이야기를 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여행을 통해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에서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소설임에는 틀림없어 보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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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는 꼭 한 번 혼자서 여행을 떠나보고 싶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현재에 안정되어 갈수록 어딘가를 떠난다는 것이 불안해진다. 용기도 사라지고 무언가 새로운 환경을 맞이한다는 것이 겁이 난다. 국내 여행도 제대로 못 해봤는데 해외로 간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이렇게 내가 겁이 많고 소심한 사람이었나 싶다가도, 그나마 무언가를 잊어버리기 위해 여행을 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안심이 되었다. 실연을 당했을 때, 모든 것이 낙담스러울 때 어딘가로 간절히 떠나고 싶어진다. 하물며 누군가를 찾으러 갈 때는 오죽하랴. 그것이 나의 가족이라면, 갑작스레 떠나버린 연인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사람의 뒤를 좇아갔을 것이다.
이 책의 주인공은 "나는 지금 뉴욕에 있어요. 더이상 나를 찾지 마요. 만나봐야 그다지 좋은 일이 있을 성싶지 않으니까."란 아내의 편지를 받는다. 그런 아내를 찾아 오스트리아에서 미국까지 건너왔지만 주인공에게는 절박함이 없었다. 아내가 묵고 있는 호텔에 연락을 취하면서도 비싼 호텔이라는 것을 알고 아내의 이런 저런 단점들을 되뇐다. 그리고 그들이 제대로 헤어지지 못해 서로를 미워하고 있음을 서서히 드러낸다. 주인공은 아내를 찾아 여행을 하는 것 같으면서도 아내의 이동에 대해서 그다지 큰 관심을 갖고 있지 않은 듯하다. 오히려 예전에 잠깐 만났던 클레어에게 전화해 필라델피아에 와 있다는 소식을 전한다. 혼자서 아이를 키우고 있던 그녀는 아이와 세인트루이스에 갈 생각이라며 여행에 동행하기를 권한다. 주인공은 그 여행에 동행하면서 클레어와 그녀의 딸 베네딕틴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 모녀와 함께 하면서 그는 여행의 묘미를 느끼고, 조금씩 현재를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키워나가기도 한다.
"당신은 장소를 바꾼다기보다는 미래 속으로 달려가려고 마치 타임머신을 탄 듯이 이곳으로 왔어. 하지만 이곳에서 앞으로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지는 알 수 없어."
클레어는 주인공에게 미국의 모습을, 그리고 그가 향해가는 모습을 단적으로 알려준다. 처음엔 아내를 찾으러 왔지만 미국이란 낯선 도시에서 배회하는 그는 어디에도 정착할 수 없는 이질적인 존재로 보였다. 클레어와 베네딕틴을 만나 조금씩 오스트리아에서의 삶과 아내와의 결혼생활 등을 떼어내지만 어디로 가야하는지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마음이 가는 데로 이동하고, 돈을 아무 생각 없이 쓰며 앞으로의 계획 같은 것은 장착하지 않은 채 앞으로 쏜살같이 달려가려고만 했다. 그는 미국에 도착해서 '혼잣말증후군'에 빠지기도 한다. 누군가에게 하는 말이겠지 하고 그를 지켜보고 있어도 그의 말을 들어줄 대상이 없다는 것에 내가 더 계면쩍어졌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이상하게 보인다거나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때로는 자신에게 때로는 곁에 없는 아내에게 하는 말들을 듣고 있노라면 오히려 '혼잣말증후군'에 약간 길들여진 내가 그의 말을 귀 기울이고 싶을 정도였다.
그는 미국에 머무는 동안 두 권의 책을 읽는다. 그 중에서도 『녹색의 하인리히』를 오랫동안 읽는데, 예전에 어느 책에선가 그 책에 대한 언급을 보아서 무척 궁금했다. 검색을 해도 그 책이 나오지 않아 여러 방법을 취하다 국내에는 『초록의 하인리히』로 출간된 것을 보고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이 책을 다 읽으면 그 책을 구입하기로 하고 우선은 주인공과의 동행에 충실했다. 분명 그의 여행과 그의 삶에 이 책이 어떠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알 수 있으나, 이 책을 읽지도 않고 그 책을 읽는다면 무언가 들떠버릴 것 같았다. "그의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그가 '적막한 숲 가장자리에 누워, 지난 100년의 목가적인 행복과 낭만을 가슴속 깊이' 느꼈을 때의 감정이 내게도 그대로 전해져."처럼 그가 종종 들려주는 책 속의 이야기에 만족해야 했다.
그러면서도 아내에 대한 기억, 아내에게 남겨 있는 자신의 기억이 극을 향해 있음을 자주 상기시켜준다. 클레어와 베네딕틴과의 여행이 끝난 후 혼자서 여행을 하게 되는 주인공을 아내는 바짝 따라온다. 그러나 아내의 따라옴은 반가움이 아니라 테러하기 위한 따라옴이었다는 것을 알고 경악하게 된다. 그런 아내의 흔적을 느끼면서도 태연자약한 주인공이 안타까웠다. 좋은 헤어짐이란 것도 분명히 있는데, 그들은 좋은 헤어짐을 하지 못해 이렇게 서로를 한껏 몰아세우고만 있었다. 그러나 주인공은 "왜 유디트에게는 지금처럼 아무런 거리낌 없이 친절하게 대해주지 못했을까?"라는 말을 되뇌며 서서히 좋은 이별을 향해, 그리고 자신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어둠 속에 누워 '더이상 아무런 변명의 여지도 없으며 이성적으로도 설명이 안 되는 고통만 느껴졌다. 말하자면 무언가가 내게서 뜯겨나간 뒤에 생긴 빈자리, 그래서 다시 채워야 하는 빈자리 같은 것이 느껴졌다.'라며 무언가 자신을 뚫고 나왔음을 깨닫기도 한다.
소설의 절정은 주인공이 존 포드 감독과의 만남을 통해 아내 유디트와 실제로 일어난 이야기라는 사실을 상기하는 부분이었다. 그들은 서로를 향한 적대감을 없애고 좋게 헤어지기로 한 뒤, 한 때는 '우리'였던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이다. 그 이야기가 이미 펼쳐진 것일 수도 있고, 앞으로 펼쳐질 수도 있지만 주인공의 여행도, 유디트의 떠나옴도 헛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긴 이별을 하기 위해 먼 곳을 돌아왔다는 마음도 들었고, 그런 여행을 통해 내면의 세계를 더 잘 알게 되었다는 마음도 들었다. 주인공의 여행을 지켜보며 어딘가를 떠나고자 하는 마음이 동하지는 않았지만, 목적을 가진 채 왔다 목적을 상실한 여행을 하는 방법도 매력적으로 보였다. 끝내 무언가를 건져내지 못한 여행이 아니었음을 알았기에 방법은 다를지라도 주인공의 뒤를 좇아보려고 한다. 그 첫 번째 여행으로 『초록의 하인리히』를 구입해 내 일상에서 주인공과 책 속의 하인리히의 여행에 동행하고자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