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는 아니겠지만 대부분의 독자들이 소설을 소설로 읽고 싶어한다. 작은 소소한 이야기을 통해서 시간의 무료함이나 각박한 감정의 매마름을 달래기 위해서 무슨 목적의식을 가지고 않고 그렇게 그냥 읽어나가는 것이 소설일 것이다. 뭐 이런 세속적인 차원을 뛰어 넘어버리는 순간 소설은 그 정체성을 상실함과 동시에 손에서 마냥 멀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소설들이 이러한 단순한 충족요건을 갖추고 있지 않고 그럴수도 없다는 것이 소설만의 독특한 매력이기도 하다. 이런 생각에 200페이지 내외의 짧막한 분량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작품속 세계에서 허우적 거려도 아깝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다니엘 켈만의 <명예>를 손에 들게 되었다. 전체적으로 9가지의 짧은 단편을 담아내고 있기에 더욱더 초이스에 대한 두렵움 없이 시간가는줄 모르게 읽어 나갈 수 있는 작품이라 여겨지면서...
이 작품은 책의 분량에 비해서 한마디로 정의하기 난해한 요소들로 가득차 있는 유니크한 프레임과 플롯(특히 규정할 수 있는 플롯 자체가 없지만 오히려 이러한 불특정확가 플롯을 이루고 있다면) 그리고 러시아 전통 인형인 마트로시카처럼 별개의 내러티브를 가진 개개의 단편소설들이 끊임없이 배치되어 있으면서도 막상 책장을 다 덮고 나면(아니 몇편만 읽어보더라도) 서로 연결되어 있는듯하면서도 아닌 것 같기도 한 그 끝과 정의을 명확히 규정하기가 힘든 작품이다. 각 단편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상호 연결되어 어느 이야기속에서는 주인공처럼 비중있는 인물이고 또 다른 이야기속에서는 그저 한순간 스쳐가는 실루엣정도로 밖에 처리되어 있지만 전체적인 맥락상으로는 9편의 이야기가 모여 모여서 한편의 장편을 이루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작품이다.
작품 프레임의 이러한 유니크한 설정과 더불어 이야기들 전반에 흐르고 있는 개별의 내러티브들은 상당히 시니컬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그저 짧은 단편이라 쉽게 생각하고 뛰어든 독자들의 얄팍한 기대감을 무너뜨린다. 아마 두세편의 이야기를 접하는 순간 책장을 맨 처음으로 되돌리고 한손에 필기구와 메모지를 들어 각 이야기속의 등장인물의 이름과 직업등 간략한 신상명세를 메모해 가면서 일종의 가계도 비슷한 다이어그램을 그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무슨 무거운 인문서적을 읽는것도 아닌데라는 생각을 가져보지만 이러한 일련의 행위가 독자들로 하여금 이 소설에 빠져들게 하는 매력이자 색다른 즐거움을 안겨준다. 비록 마지막 이야기를 덮고 나서 자신이 그린 다이어그램을 쳐다보게 되더라고 그다지 큰 도움은 되지 않겠지만 말이다.
개별적인 이야기속의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전화 즉 휴대전화라는 문명의 최첨단이 가져다 준 획기적인 발명품이 등장한다. 휴대전화로 통화를 하든 문자를 주고 받던 혹은 잘못 걸려오거나 아예 몇날 몇일 동안 한통의 연락도 오질 않아 휴대전화가 혹시라도 잘못되지 않았나라고 쳐다보게 되는 우리 손 바로 옆에 항상 붙어다니는 휴대전화가 등장하고 이와는 상당한 반대쪽에 자리잡고 있다고 여겨지는 책(미구엘 아우리스토스 블랑코스라는 인생에 길잡이 역활을 하는 삶의 철학을 논하는 책)이 꼬박 꼬박 등장하고 있다. 작가는 이 두가지의 메타포를 통해서 우리 삶을 어느정도 대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타인과 소통이라는 대전제에 해당하는 휴대전화와 책이 제대로 된 역활을 수행하지 못할때 마트로시카처럼 같으면서도 다른 존재로 밖에 인식될 수 없는 현실을 은근히 말해주는 의미심장함을 남기고 있다.
소재나 내러티브의 모던함과 더불어 작가의 사유에서 엿볼수 있는 클래식함을 동시에 맛볼 수 있는 그야말로 모던클래식이라는 테마가 적절하게 어울리는 작품이라고 해야 할 정도로 새롭고 산뜻함고 맞딱드리는 작품이다. 그리고 9가지의 테마별로 가지는 의미성에 덧대어 전체을 하나로 아우르는 또 하나의 의미는 많은 여운을 남기는 소설로 남을 것이다. |
|
단편중 [내가 어떻게 거짓말을 하며 죽어 갔는지]속의 주인공은 이런 나래이션을 한다. "한때 나는 피아노를 썩 잘 쳤고, 그림도 어지간히 잘 그렸으며, 사진마다 나온 내 모습은 영리한 눈을 가진 귀여운 아이였다. 세상이 그의 모든 사람의 꿈을 꺽어 버렸는데 왜 하필 내 꿈은 실현되어야 한단 말인가. 독서는 직업이 될 수 없다고 우리 아버지가 말했고, 한때 난 그 말에 무척 분노했지만 내 아이들이 그 나이가 되면 나도 이 말밖에 해 줄 수가 없다. " |
|
독일 뮌헨 출신의 작가 다니엘 켈만의 책을 두 번째로 읽었다. 나와 그의 첫 만남은 들녘에서 나온 일루저니스트 시리즈 <나와 카민스키>였다. 그의 재기 발랄한 글에 반해 바로 후속작인 <세계를 재다>도 샀지만, 아직 읽지 못하고 있다가 이번에 신작이 나왔다는 소식에 허겁지겁 책을 사서 모두 9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명예>를 단박에 읽었다. 1년 동안의 치밀한 준비를 거쳐 발표했다는 <명예>는 소설과 사실의 경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특이한 구성을 독자에게 선사한다. 처음에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지만, 일단 작가의 포인트를 파악하는 순간 책은 오롯하게 독자의 수중에 들어온다. 사실 단편은 짧은 시간 내에 핵심적인 메시지를 전달해야 하므로 중견작가들도 부담스러워 한단다. 다니엘 켈만은 비록 짧은 작가 경력을 가지고 있지만, 서로 복잡하게 구성된 단편 모음집을 성공적으로 완성해냈다. 휴대전화와 인터넷이 어느 사이엔가 일상이 되어 버린 작금의 세태를 다니엘 켈만은 냉정하게 꼬집는다. 현대 문명의 이기들은 모두 소통을 위한 도구들이지만, 도구가 사용자의 경계를 넘어서 버린 상황에 대한 풍자가 <목소리>에 담겨 있다. 자신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지인들의 성화에 못 이겨 산 휴대전화로 자꾸만 엉뚱한 사람인 랄프를 찾는 전화가 오면서 주인공 에블링은 점점 랄프라는 사나이의 삶에 집착하게 된다. 그 다음 단편에서 소설가 레오 리히터는 최근에 사귀게 된 국경없는 의사회 소속으로 국제 분쟁지역을 누비며 구호활동을 하는 엘리자베스와 강연여행을 떠난다. 문제는 시도 때도 없이 그에게 아이디어는 어디서 얻고, 글은 언제 쓰며 자신이 그의 작품을 어느 순간에 읽었는지 끊임없이 읊조려 대는 독자들의 성화다. 그리고 자신을 대신해서 중앙아시아의 어느 나라에 대신 보낸 마리아 루빈슈타인은 비자가 만료된 상황에서 여행가방과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여권마저 잃어버린 상태에서 어느 농가의 허드렛일을 하는 일꾼으로 전락한다. 첫 단편에서 등장했던 랄프는 유명한 영화배우로 다시 다른 단편에 재등장한다. 이번에는 에블링이 아니라 진짜 자신으로. 문제는 자신의 삶을 어느 대역 배우가 대신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단편에서는 마크 트웨인의 <왕자와 거지>가 연상됐다. 행복을 일상으로 누리는 이는 불행의 나락에서 비로소 행복을 깨닫는다고 했던가. 피곤한 진짜 배우의 삶 대신 보통 사람의 삶을 살고 싶어 하는 마음은 이해가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누리던 인기와 재산까지 모조리 사라져 버리는 건 원하지 않겠지? 소설 속의 소설에 나오는 모든 이가 좋아하는 미구엘 아우리스토스 블랑코스의 온 힘을 다한 글쓰기에 대한 묘사 역시 일품이다. 공기가 어둠을 잠식해 가는 동안에도, 석양의 불길이 사위어 가는 동안 땀에 푹 젖을 정도로 열정을 다해 수녀원장에게 답장을 쓰는 미구엘과 창작의 고통을 공유하는 다니엘 켈만의 이미지가 현현되었다. 각각의 다른 이야기의 연결이 되는 단서를 찾는 재미는 켈만식 보물찾기의 변형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재밌게 읽은 단편은 <토론에 글 올리기>와 그 다음 편인 <내가 어떻게 거짓말을 하며 죽어 갔는지>다. 두 편에 잇달아 등장하는 키보드 워리어 몰비츠는 전형적인 인터넷 중독증 환자다. 잠시라도 키보드 자판을 두드리지 않으면 불안에 시달리는 그는 무려 만 개나 되는 포스팅의 보유자다. 사루만 같은 보스에 의해 강제로 회의에 참석하게 된다. 회의가 열리는 호텔에서 우연히 만난 레오 리히터의 소설에 들어가기 위해 무리수를 두는 모습은 처량하기 짝이 없다. 여기에서 다시 한 번 현실과 가상 세계의 구분이 사라져 버린다. 보스 사루만의 이중생활을 그린 <내가 어떻게 거짓말을 하며 죽어 가는지>는 최근 외도를 시작한 한 남자의 삶의 궤적을 추적한다. 부인과 애인 사이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하는 주인공의 스릴넘치는 심리상태를 예리하게 꼬집는다. 거짓말을 한 번 하기가 어렵지 일단 한번 시작하면, 브레이크가 고장 난 차처럼 달리게 된다는 속설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가 있었다. 멀쩡한 몰비츠를 죽이기도 하고, 동명이인으로 조작하는 장면에선 우리나라 직장인의 변명과 겹치기도 한다. 다니엘 켈만의 <명예>는 읽을수록 감칠맛이 난다고 할까? 차곡차곡 쌓인 단서들은 뒤로 갈수록 위력을 발휘한다. 마치 레고 블록을 쌓듯이 단편 간의 전후좌우가 빈틈없이 맞아떨어지면서 초반의 시큰둥했던 반응은 사라지고 어느새 열기를 띠기 시작한다. 작가가 치밀하게 짠 플롯에 반응하면서 <명예>의 공통적인 주제라고 할 수 있는 소통과 교감에 접근하기 시작한다. 마침내 종착역에 도달했다는 즐거움은 가상세계와 현실의 복잡한 변주곡일 뿐이다. 단편 모음으로 이렇게 멋진 작업을 완수한 다니엘 켈만에게 박수를 보낸다. |
|
"이야기 속의 이야기 속의 이야기. 이야기가 어디서 끝나고 어디서 시작하는지는 아무도 몰라! 현실에서는 모든 게 뒤섞이지. 책에서만 말끔하게 분리되는 거야." p.195 이웃님 블로그에서 본 책이었다. 굉장한 찬사에 읽어보고 싶어졌다. 원래는 작가의 다른 책을 먼저 읽고자 했는데 도서관에 없어서 이 책을 먼저 읽었다. 9개의 이야기가 담긴 책은 단편인 듯 싶었지만 실상은 연작소설 같기도 했고 액자식 구성에, 옮긴이의 말에서는 "메타픽션"이라고 했다. 딱히 주인공이라고 할만한 인물은 없었지만 중요한 등장인물이었던 소설가 레오와 만나는 여자인 엘리자베스, 어떤(?) 인물인 로잘리에, 라라 가스파드가 있었다. 그리고 다른 인물로는 레오의 팬이자, 라라 가스파드의 팬인 어떤 남자, 그 남자가 잠깐 등장하는 두 여자의 남자 등 소설은 톱니바퀴처럼 조금씩 맞물려 있었다.
뭐라고 일일이 설명하기 어려운 줄거리지만 책은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상당한 재미를 제공했다. 초반에는 그런 재미를 딱히 느끼지 못했다. 줄거리를 제대로 알지 못했고 책의 뒷표지에 쓰여있는 내용은 책을 펼치면서 이미 잊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유명 배우의 이름을 찾으며 걸려오는 전화에 대한 첫 번째 이야기가 끝나고 이야기들은 조금씩 연결되어 있었다. 등장인물이 연결된 부분이 있었고, 어떤 사건이 연결된 부분도 있었다. 뒤로 갈수록 이번에 펼쳐질 이야기가 어떤 이야기와의 연결고리일까 발견하는 재미가 있었다. 그 연결고리 뿐만 아니라 이야기 자체가 주는 재미도 있었다. 각각의 이야기 속에 빨려들 수 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많은 게 되고 싶어 하죠. 다양하게. 여러 개의 삶을 원합니다. 하지만 표면적으로만 그렇고, 내심으로는 그렇지 않아요. 마지막 갈망은 하나가 되고 싶어 합니다. 자신과 모든 것과 말이죠." p.180 그러면서 이야기들은 모두 또 다른 누군가가 되고 싶어하고 이중자아 같은 존재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자꾸만 잘못 걸려오는 배우 행세를 했고, 인터넷 속에서 현실과는 전혀 다른 존재의 자아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휴대폰, 전화, 메일, 메시지 속의 인물들은 그들과 전혀 다른, 스스로가 창조한 또 다른 자아였다. 어쩐지 모두에게 그런 자아가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블로그 같은 개인 홈페이지 공간 내에서의 자아, 가입이 되어있는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이상한 사이트에서 막말이나 욕을 거리낌 없이 하는 자아, 가정과 사회에서 전혀 다른 얼굴을 하는 자아 등등 모두가 그런 가면을 쓰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문명의 발달이 만들어낸 사회현상 같기도 하고. 이웃님의 엄청난 칭찬이 있었지만 취향이라는 게 있어서 별 기대없이 읽게 됐는데 마지막에는 재미있다! 라고 감탄했다. 재미있게 글을 쓰는 작가의 책을 읽어서 기쁘다. 새로운 작가를 발견한 기쁨도. 아무래도 내가 도서관에서 찾지 못한 작가의 다른 책은 구입을 해서라도 읽어야 할 것 같다.
|
|
소설을 읽다보면 소설 속 주인공들이 지향하는 일련의 이야기들이 작품의 주제와 긴밀히 연결되는 경우를 많이 목격하게 된다. 그러나 내용이 주제로 곧 연결되는 이와 같은 소설들이 있는 반면, 작품만의 독자적인 형식이 곧 주제가 되는 소설들도 있다. 다니엘 켈만의 이 소설 『명예』가 그러하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 속의 이야기"와 같은 메타소설의 형식을 추구하고 있는 이 작품은, 총 9개의 독자적인 단편들이 자리하고 있으면서도, 또한 하나의 큰 소설로 읽힐 수 있는 소설이다. 작가 다니엘 켈만이 지향하는 세계는, 읽는 독자와 쓰는 작가가 존재하는 일차원적인 공간만은 아니다. 그는 소설 그 자체로 새로운 물음들을 끊임없이 생산해낼 수 있는 해방된 텍스트로서의 공간을 꿈꾼다. 나아가 그것에 대한 해답으로서 제시한 것이 바로 아홉 편의 분절된 작품이 『명예』라는 하나의 큰 작품으로 이어지면서, 그 가운데 새로운 의미들을 재생산해내는 '역동적 구조'다. 그는 소설의 열린 형식을 통해서, 잠재된 이야기의 텍스트들을 끊임없이 현실화시키려 한다. 또한 열린 텍스트의 가능성 속에서 작가는 이야기 속의 혼재된 진실의 문제에 대한 새로운 리얼리티를 구축하려 시도한다.
이 소설은 다니엘 켈만이 창작한 허구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명예』의 첫 번째 단편 「목소리」에는 에블링이란 평범한 샐러리맨이 배우 랄프의 전화번호를 중복해서 사용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에블링은 자신을 랄프라고 여기는 랄프의 지인들의 전화를 받게 되면서, 곧 자신이 랄프 인 것 마냥 착각하게 되는 상황까지 벌어진다. 이 내용은 곧 「탈출구」라는 단편과 이어지게 되는데, 여기서는 배우 랄프의 일상이 다루어지면서「목소리」에서 에블링을 혼란스럽게 했던 랄프의 실제 이야기가 다시 서술된다. 그러나 이 소설에는 다니엘 켈만이 창작한 또 다른 작가 레오 리히터가 등장하는데, 단편 「동양」, 「토론에 글 올리기」, 「로잘리에가 죽으러 가다」, 「위험 속에서」는 레오의 일상 이야기는 물론, 레오가 직접 쓴 소설 속의 인물들이 그대로 등장해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갈라놓기도 한다. 단편「동양」은 레오 대신 동양의 어느 작은 나라의 행사에 참석하게 된 작가 마리아가 곤경에 처한 이야기를 담고 있고, 「토론에 글 올리기」는 레오를 좋아하는 한 광적인 독자 몰비츠의 이야기를 담고 있고, 「로잘리에가 죽으러 가다」는 레오가 창작한 소설 속 주인공 로잘리에가 작가 레오에게 말을 거는 방식으로 등장한다. 여기에 『명예』의 등장인물들이 직,간접적으로 읽거나 보았던 책의 저자 미구엘의 일상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는 「수녀원에게 답장하다」를 비롯하여, 몰비츠가 작가 레오를 만날 수 있게 만들어준 상관의 이야기인 「내가 어떻게 죽어갔는지」가 펼쳐진다. 이처럼 이야기는 그 자체로 완성된 하나의 구조이지만, 서로 크거나 작게 연결되어 있다. 한 단편에서 주인공이었던 인물이 다른 단편에서는 실루엣으로 처리되고, 작가 다니엘 켈만이 쓴 허구 속에 또 다른 작가 레오 리히터가 등장해 다른 소설을 창작하면서, 다니엘 켈만의 소설 등장인물들은 레오 리히터의 소설 속 인물이 되기도 한다. 이쯤되면 등장인물의 상황이 어디까지가 소설이고, 또 어디까지가 소설 속 또 다른 소설의 이야기인지 경계가 흐릿해질만도 하다. 그러나 이 작품 『명예』는 그 혼란스러운 상황 자체가 오히려 다음 단편의 소재가 될만큼 정교하게 구조화되어 있다. 모든 단편들은 그 나름대로 단서를 지닌 하나의 퍼즐조각으로 등장한다. 따라서 이 소설을 완독하고 난 다음에야, 각각의 퍼즐 조각이 명예라는 전체의 그림판 중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가 드러난다.
소설 속 작은 단편「내가 어떻게 거짓말을 하며 죽어갔는지」의 주인공은 아내가 있지만 또 다른 불륜관계에 있는 여자 루치아 사이에서 혼란을 느끼는 인물이다. 그는 소설 속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가 미친 게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나는 한밤중에 잠을 깨서 내 옆에 누운 여자의 호흡에 귀를 기울이며 잠시 불안해져서는 두 여자 중 어느 쪽인지 묻는게 아니라 도대체 내가 누군지, 미로 공원에서 길을 잃은 건 아닌지 스스로 묻는다. 한 걸음씩 적당히, 힘들지 않게 내디뎌 보지만 의외로 너무 깊이 들어가서 출구를 찾을 수 없는 것처럼. 그러면 나는 눈을 감고 가만히 누워 오싹하게 몰려오는 공포감에 몸을 맡겼다. 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나서 내게 딱 맞는 역할을 찾게 되는 낮에는 모든 게 다시 쉬워지고 거의 정상적으로 보였다"라고. 이 소설 속에서 주인공들이 느끼는 혼란과 불안을 어쩌면 우리 역시 일상 속에서 느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명예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들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혼란을 느낀다. 특히 「토론에 글 올리기」의 주인공 몰비츠가 그러하다. 그는 정보 통신 사의 말단 사원으로 일하고 있지만, 여러 개의 포럼 게시판에 악의적인 글을 올리며 그것으로 즐거움을 찾는 인물이다. 몰비츠는 자신의 정교한 일상이 흔들릴만큼 인터넷 게시판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다. 아이디를 수없이 바꿔가며 글을 올리다가도, 인터넷을 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자 곧 극도의 불안증세를 보이는 그의 모습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친숙하다. 그런가하면 소설 속에 또 다른 작가로 등장하는 미구엘 역시 자신의 욕망을 그대로 드러낸 편지를 수녀원장에게 부칠까 생각하면서도 그것이 미칠 영향을 감당하지 못한 채 방황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그는 서랍 속에 고이 넣어둔 권총을 꺼내 방아쇠를 당기는 상상을 한다. 오직 그 상상만이 삶의 굴레에 사로잡힌 그를 자유롭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것 마냥.
『명예』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어쩌면 우리들 역시 '나'라는 자아에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나약한 존재들에 불과하다. 그러나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과정 자체가 우리에게 꼭 무의미한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어쩌면 생래적으로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을 계속 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고, 따라서 그 가운데 다양한 사람들과 세계, 나아가 일련의 일들을 통해 자아를 탐색하는 새로운 경로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작가 다니엘 켈만이 『명예』라는 이 다층적인 작품에서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도, 바로 이와 같은 탐색의 경로가 아니었을까. |
|
기술력 덕분에 우리가 사는 세상에 한정된 장소가 사라졌으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사람들은 행방을 감춘 채 말하고,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모르며, 또 아무것도 입증할 수 없기 때문에 상상하는 것이 모두 기본적으로 사실일 수도 있다. -p.165, 「내가 어떻게 거짓말을 하며 죽어 갔는지」
다니엘 켈만의 <명예>를 펼친 것은 정말 그야말로 우연에 나의 사심이 조금 들어간 결과의 산물이다. 도서관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눈에 띈 두 권의 모던 클래식 시리즈. 뭘 읽어볼까, 하다 앞 페이지에 박혀 있는 작가님의 얼굴을 살펴보고는, 좀 훈훈해 보였던(?) 다니엘 켈만의 <명예>를 집어든 것이다. 아무 상관도 없건만 왜 그랬을까, 큭큭. 표지도 조금 독특하다. 표지 속 사진은, 한 여인이 자신의 눈을 사진으로 가려버렸다. 정말로, 사진 속의 이 여인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어느 방향일까.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시선을 가리기 위해 선글라스를 착용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었던 걸까.
그렇다면 그녀가 진짜로 바라보고 있던 것, 혹은 그녀가 감추고 싶은 '진실'은 무엇일까. 그녀의 명예였을까? 아니면, 책을 펼치려고 하는 나의 명예? 실은 9편의 단편소설이다. 소설은, 크게 두 가지 갈래로 나뉜다. 첫 번째는, 다니엘 켈만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다. 그리고 또 다른 갈래는, 다니엘 켈만이 창조한 한 명의 캐릭터, 소설가 레오 리히터가 들려주는 이야기다. 휴대전화기를 구입한 에블링. 그에게 전화를 걸어오는 이들은 모두 낯선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 자신이 아닌 '랄프'가 되어 에블링은 그의 생활을 은밀하게 비틀기 시작한다. 한편, 어느샌가 자신에게 걸려오는 전화가 뚝 끊긴 유명 배우 랄프 탄너. 그는 평소 자신의 삶과 다른 생활을 만끽할 수 있는 「탈출구」를 발견했지만, 어느샌가 '진짜 자신'을 잃어버린다. 「위험 속에서」 이를 무릅쓰고 비행기에 올라탄 레오 리히터는, 초청받은 강연회에 갈 때마다 '아이디어는 어디서 얻으세요?'라는 판에 박힌 질문을 계속 들으면서 진절머리를 낸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주변 인물들을 모델로 캐릭터를 창조하곤 한다. 「토론에 글 올리기」가 유일한 삶의 낙인 뚱뚱한 중년 남자 몰비츠는 레오를 만나 소설의 등장인물이 되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히지만, 레오의 여자친구는 그것이 가장 끔찍한 악몽이라 생각한다. 몰비츠가 우연히 레오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상사는 한나와 루치아를 오가는 이중적인 생활을 아슬아슬하게 유지하다, 「내가 어떻게 거짓말을 하며 죽어 갔는지」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런가 하면, 「로잘리에가 죽으러 가다」 그녀는 죽음을 맞이하러가는 길 위에서 자신을 창작해 낸 레오와 언쟁을 벌이기도 한다. 그 밖에도 순식간에 일행을 놓치고 핸드폰 배터리가 방전되어 낯선 「동양」의 땅 위에서 고립된 마리아, 고통에 대한 에세이로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던 미구엘은 스스로 그의 글에 의문을 느끼고 질문을 한 한 명의 독자, 「수녀원장에게 답장하다」까지,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넘나들고 자그마한 연결고리로 이어지는 이들의 이야기가 펼쳐졌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 속의 이야기. 이야기가 어디서 끝나고 어디서 시작하는지는 아무도 몰라! 현실에서는 모든 게 뒤섞이지. 책에서만 말끔하게 분리되는 거야. -p.195, 「위험 속에서」
다니엘 켈만은 이 책에 대해 '잊히고, 사라지고, 자신을 잃어 가고, 해체되는 것에 관한 책'이라고 이야기한다. 다니엘 켈만이 창작해낸 레오 리히터와 그와 함께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인물들, 그리고 레오 리히터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그들의 모델이 되었던 현실의 사람들. 뫼비우스의 띠처럼, 이 단편들은 한 편 한 편이 하나같이 현실과 허구가 끝없이 뒤섞이고 이어진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 속의 이야기는, 어느샌가 현실이 되어있다. 허구일 것 같았던 이야기는, 어느샌가 현실과의 경계를 허물고 허구의 존재와 현실의 존재가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그리고 그 모든 미묘한 경계는, 다니엘 켈만의 <명예>라는 책에서, '나'라는 현실이 바라보는 책 속에서만 말끔하게 분리가 되었다. 꽤나 매력적인 구성이다. 어디까지가 현실을 반영한 픽션인지, 어디까지가 픽션을 가장한 현실인지 모르겠다. 그것을 다니엘 켈만은 '소설가' 레오 리히터를 등장시킴으로써 그들을 안과 밖, 현실과 허구를 구분하지 못하는 뫼비우스의 띠 같은 소설로 만들어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특기할만한 점은 그 미묘한 경계를 오가며 휴대전화, 인터넷, 컴퓨터 등을 이용한 '소통'에 관한 문제를 그려냈다는 것이다.
실수로 중복된 번호를 가지게 된 이들에게, 전화를 걸어오는 사람이 많지 않은 에블링은 낯선 신분을 부여받아 게임을 시작하고, 그 지위를 빼앗긴 랄프 탄너는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찾아나서지만, 끝내 원래대로 돌아오지 못한다. 인터넷 중독자인 몰비츠는, 늘 인터넷 커뮤니티를 체크하며 자신의 의견에 반박하는 이가 있으면 곧바로 소위 '키보드 배틀'을 벌이기 시작한다. 욕설과 비방에서부터, 몇몇 유력한 악플러들과 함께 대치하는 그는 언제나 인터넷이 연결된 곳에 있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불안감에 빠진다. 언제나 어디서나, 아무리 먼 곳에 있어도 누군가와 연결될 수 있으리라 믿었던 휴대전화였지만, 배터리가 방전되고 나면 안심할 수 없다. 낯선 동양의 땅에 내려선 마리아는, 그렇게 언제나 연결될 수 있으리라 믿었던 '독일'과도, 낯선 동양의 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과도 소통이 단절된 채 그저 갈 곳을 잃은 채 서 있을 뿐이었다. 휴대전화를 이용해 미묘하게, 언제든지 거짓말을 할 수 있었던 한 남자는, 그렇게 이중생활을 이어간다. 휴대전화만 있으면, 자신이 거짓말을 해도 입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코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 어디선가 들어봤을 법한, 현대 사회의 '소통'의 중심이 되는 수단들이 소재가 되어, 인간의 정체성, 명예, 진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다니엘 켈만은, 현실과 허구가 뒤섞일 수 있는 것은 소설 속에서나 가능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너무 무겁거나 심오하지 않다. 오히려 각 단편들 사이의 연결고리를 찾아내며 그 재미와 함께 소설을 읽다보면, 어느샌가 그들의 이야기에 공감하고 흠칫하는 나를 발견하곤 했다. 눈을 가리고 딴 곳을 바라보는 척, 각자 자신의 <명예>를 지켜나가고 있는 어느 누군가, 혹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상당히 매력있는 소설이다. 레오 리히터는 진절머리를 내곤 했지만, 나 역시 묻고싶다, 다니엘 켈만에게.
"아이디어는 어디서 얻으세요?"
|
|
독일 문학계의 흐름을 보다.
독일의 문학계에서 작가 '다니엘 켈만'을 주목하는 이유는 그가 단순히 젋기 때문만은 아닌듯 싶습니다. 30대 중반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의 작품은 완숙미가 넘쳐나며 재기있는 표현법과 아이디어가 곳곳에 녹아들어가 있습니다. 휴대폰과 인터넷을 비롯한 통신의 기능에 주목한 '다니엘 켈만'은 통신 기술이 중심이 되는 세계 속에서 점차로 흐릿해지는 인간의 정체성을 놀라울 정도로 뛰어나게 짚어내고 있습니다.
오늘날 문학이 가지고 있는 오래된 숙제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끝업슨 질문을 '다니엘 켈만'은 현대사회의 통신기술에서 접근하고 문제를 제기합니다. 오랜 세월동안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깊이있는 통찰력을 제시하여왔던 독일 문학계는 '다니엘 켈만'이라는 젊지만 뛰어난 인물의 등장으로 여전히 푸르름을 자랑하는듯 싶습니다.
<명예>는 현재 영화와 예정 중인데 영화로 나온다면 각각의 에피소드의 복선을 어떻게 풀어낼지가 기대됩니다.
마트료시카 인형
<명예>에 수록된 에피소드는 9편입니다.(목소리, 위험 속에서, 로잘리에가 죽으러가다, 탈출구, 동양, 수녀원장에게 답장하다, 토론에 글 올리기, 내가 어떻게 거짓말을 하며 죽어 갔는지, 위험속에서) 9편의 에피소드는 전체의 구성안에서 독립된 이야기로 마무리 됩니다. 작품들의 공통점을 찾기는 어렵지 않지만 작품 속 인물들의 연관성을 생각하기는 약간 어렵기도 합니다.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때로는 다른 작품에서 주연 혹은 조연 그리고 실루엣등으로 다양하게 등장합니다. 예를 들자면 첫번째 작품인 목소리의 주인공인 에블링이 역할 바꾸기를 시도하게된 계기가 되는 휴대폰 넘버의 주인공은 '탈출구'편에서의 주연인 랄프 탄너입니다. 그리고 랄프 탄너는 두번째 수록된 위험 속에서 포스터 속 인물로 등장합니다. 탈출구 편의 랄프 탄너와 목소리의 에블링의 휴대폰 넘버가 바뀌게된 계기가 된 인물은 내가 어떻게 거짓말을 하며 죽어 갔는지 편에등장하는 화자입니다. 한편의 이야기를 읽고 다음편을 보면 또 다른 이야기가 나오고 그리고 그 안에서도 또 다른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각각의 이야기는 유사하면서도 상이한 배경과 전개방식을 보입니다.
마치 마트료시카 인형(러시아의 민속 인형으로 인형안에 또 다른 인형이 들어가있는 구조로 되어있습니다.)처럼 겉과 밖의 경계가 애매모호한 이야기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각각의 에피소드가 짧게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 이 작품의 몰입감을 더욱 높여주는듯 싶습니다.
허구와 현실 그리고 뒤바뀌는 평행세계
<명예>속 평행세계를 읽다보면 최근 출간된 민음사 모던 클래식의 또 다른 작품들인 <형사 실프와 평행 우주 인생들>과 <대기불안정과 그 밖의 슬픈 기상현실들>이 생각납니다. 서로 만날 수 없는 두 세계가 연결되면서 나타나는 혼란은 허구와 현실을 뒤바꾸면서 작품 속 등장인물들과 그 밖에 있는 독자들에게 혼선을 더합니다. 즉 어디까지가 이야기 속 이야기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인지가 애매모호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로잘리에가 죽으러 가다의 경우가 더욱 애매하죠)
통신매체들은 각각의 등장인물들을 고민스럽게 만들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들의 정체성을 지우는 역할을 감당하기도 합니다. (특별히 이러한 주제는 목소리편과 동양편 그리고 탈출구 편을 보시면 좋을듯 싶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평행세계와 등장인물들 그리고 명예가 가지는 관계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부분과 일치한다고 생각할 수 있을듯 싶습니다. 세계에 존재하는 인간의 존엄을 드러내는 명예는 사람들에게 드러나는 대상의 모습과 인정된 모습들입니다. 작품 속 인물들이 겪는 정체성의 혼란은 통신의 두절과 혼선가운데 빚어지면서 더욱 가속화되어 존재가 잊혀지고 사라지기도 하며 심지어는 해체까지 연결된다는 점에서 작가는 무거운 주제를 던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정체성이 지워질지도 모른다.
<명예>에 등장하는 정체성에 대한 혼란과 존재의 부존재화와 관계된 주제는 무겁지만 그 무게가 가볍게 덜여져서 독자들에게 전달됩니다. 마치 한편의 블랙코미디와도 비슷한 느낌을 주는가 하면 희극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을 가져봅니다. 우리는 모두 한권의 책에서 하나의 공통된 주제를 찾을 수 있겠지만 반대의 주제를 서로 다르게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독일의 작가인 다니엘 켈만이 의도한 것도 이러한 맥락이 아니었을가합니다. 평행세계가 서로 교차하지만 그 안에서 지워지는 것들에 대한 공통된 현상을 저는 모두가 경계하고 두려워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다니엘 켈만'이 표현해낸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가 창조해낸 세상은 사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고 우리 모두는 '다니엘 켈만'이 만들어낸 인물들의 삶을 반복해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
'이야기 속의 이야기 속의 이야기' "잊히고, 사라지고, 자신을 잃어 가고, 해체되는 것에 관한 책" 나는 '슈퍼무비스'에 포스팅을 많이 하고, '저녁뉴스', '리터러쳐4유'와 '토론 사이트'에도 글을 게재하지만 허튼소리를 써 대는 블로거들을 보면 그냥 넘어가지 못한다. 닉네임은 늘 '몰위트'로 쓴다. 실제 인생(진짜 인생!)에서 난 삼십 대 중반으로 키가 상당히 크고 약간 뚱뚱하다. 주중에는 넥타이를 매고 돈벌이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회사를 다니는데, 그건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인생의 의미를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그래야만 한다. 내 경우에는 분석, 관찰, 토론의 글쓰기가 인생의 의미다. 문화, 사회, 정치적인 일에 기여하는 것이. - <토론에 글 올리기> 소설은 휴대폰, 컴퓨터, 인터넷 등 우리 일상에 너무나 녹아든 기계에서 소외된 인간의 본질에 대해 질문하고 있다. 잘못 걸려온 전화로 시작되는 '목소리', 언젠가부터 전화가 오지 않는 유명 배우 랄프의 이야기 '탈출구', 낯선 곳에서 휴대전화 배터리가 나가 세상과의 소통이 단절된 마리아의 이야기 '동양'. ('내가 어떻게 거짓말을 하며 죽어 갔는지'에서 그 비밀이 풀리지만, 앞선 이야기가 기억나지 않는 나에게는 무의미한 복선이었다.) 아홉 개의 에피소드들은 퍼즐 조각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공통점은 그저 통신 기기가 중요한 소재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캐릭터가 캐릭터를 만들고, 다시 그 캐릭터가 또 다른 캐릭터를 만들며 이어지는 단편은 그 자체로 실험적이고 색다른 접근 방법이었다. 과연 휴대폰 없이 하루를 살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당당하게 '네'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영양가 없는 스팸이 뒤섞여 쉴 새 없이 울려대는 전화벨, 무의식적으로 새로 고침을 누르게 되는 자극적인 SNS, '읽음' 표시가 서로에게 더욱 부담스러운 카카오톡. 가장 편리하고 효과적인 소통 수단이 휴대폰인 시대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결코 타인과의 관계에서 완벽히 자유로울 수 없다. 하지만 수단과 본질이 뒤바뀐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타인과의 소통이 목적인 휴대폰이 오히려 타인과의 소통을 방해하는 걸림돌이 되어버렸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진정 필요한 정보를 토대로 유의미한 소통을 하는 건 엄청난 장점이다. 명예를 잃어버리는 일, 명예를 얻는 일. 통신 기술을 통해 포장되고 결정되는 소설 속 사회는 실제 현실과 무척 맞닿아 있다. 스페인 여행을 떠났을 때 가장 골치 아팠던 것은 '휴대폰'이었다. 내 손안의 작은 아이폰은 여행에서 필수불가결한 존재였다. 아름다운 풍경을 담을 카메라면서 동시에 구글맵 기능을 통해 목적지를 안내해줄 지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야심 차게 가져간 충전기는 보기 좋게 고장이 났다. 보조배터리는 당연히 유명무실한 짐이 되어버렸다. 버티고 버티다 눈물을 머금고 산 중국산 충전기는 일회용이었다. 산 지 이틀 만에 보기 좋게 고장이 나버렸고, 결국 호스텔 데스크에서 빌리며 겨우겨우 연명했다. 식당에 가서도 항상 콘센트를 제일 먼저 찾기 바빴고, 여행 중간에 호스텔로 돌아와 충전을 위해 반강제로(!) 휴식을 취하기까지 했다. 사실 돌이켜보면 휴대폰이 없이도 여행을 이어갈 수 있었다. 아름다운 광경은 눈으로 담을 수 있었고, 지도는 종이로도 충분히 대체할 수 있었다. 그저 내가 더 익숙한 기계에 지나치게 의존했다.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떠난 여행지에서도 결국 넓은 자연이 아닌 작은 디지털에 사로잡혔다. 결국 본질은 '소통'이다. 디지털인지, 아날로그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단순히 수단의 문제가 아니다. 면대면으로 대화한다고 해서 진심을 다해 소통한다고 보장할 수 없다. 오히려 상대를 속이고, 피상적인 관계를 맺는 건 마주 보고 하는 편이 더 쉬울 수도 있으니. 그렇다고 모두에게 진심을 담아 소통할 필요는 없다. 100명의 사람에게 공감대를 형성하고 소통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진정 나를 이해해주고 소중히 여기는 단 한 명의 사람만이라도 남는다면 그게 바로 성공이다. 최신 기기가 사람들 사이의 벽을 만든다는 건 핑계일 뿐이다. 오히려 기계가 우리를 가깝게 해주는 긍정적인 사례도 매우 많기 때문이다. (멀리 있는 할머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일, 행복한 가족 사진을 휴대폰에 담아두고 힘들 때마다 보는 일, 차마 눈앞에서 하기 곤란한 이야기를 전하는 일. 등) 모두를 충족시킬 수 없다면, 애써 그런 관계에서 오는 오해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게 좋다. 결국 진심은 통하기 마련이고, 마음이 맞는 이가 중요한 법이니 말이다. "충고 한 마디 덧붙이죠. 지금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전화하세요. 인생은 아주 빨리 지나갑니다. 그러라고 조그마한 휴대전화기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모두들 이 전자용품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거잖아요. 안 그래요. 신사 양반?" "왜 이렇게 안 되는 일이 많은지 묻고 계십니까, 신사 양반? 사람들이 많은 걸 되고 싶어 하기 때문이죠. 말 그대로입니다. 사람들은 많은 게 되고 싶어 하죠. 다양하게. 여러 개의 삶을 원합니다. 하지만 표면적으로만 그렇고, 내심으로는 그렇지 않아요. 마지막 갈망은 하나가 되고 싶어 합니다. 자신과 모든 것과 말이죠." - <내가 어떻게 거짓말을 하며 죽어 갔는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