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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놀랍다. 이 소설이 대단했다. 정말 그 생각만 든다... ‘아버지와 아들’은 보수와 진보의 첨예한 대립갈등을 녹여낸 고전이다. 책의 줄거리를 말하는 건 큰 의미가 없을 것 같다. 우주가 어떻게 생겼다고 설명하는 건 의미가 없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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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문학을 좋아한다고 말하면서도 최근에 읽은 러시아 문학이 없어서 부끄럽다. 또한 아직도 접하지 못한 러시아 작가들이 너무나 많아 러시아 문학을 좋아한다고 말하기가 자신 없어진다. 톨스토이는 나와 성향이 안 맞아서 대표작만 겨우 읽을 정도였다 치더라도 늘 이반 투르게네프가 마음에 걸렸었다. 제대로 읽은 작품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이반 투르게네프의 작품 세계에는 무지했는데, 이번에는 꼭 만나리라 다짐하고 『아버지와 아들』을 펼쳐들었다. 이미 다른 출판사에서 출간된 책을 소장하고 있음에도 눈에 쉽게 들어오지 않아, 좀 더 글씨가 크고 최근에 번역한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으로 읽게 되었다. 좋아하는 작품들은 출판사별로 비교하며 읽는지라 소장하고 있는 책은 다음에 읽어도 될 듯 싶었다.
초반엔 이반 투르게네프의 작품을 한 편도 읽지 않았다는 죄책감에 약간 주눅 들어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왜 이제야 이런 책을 만났을까 하는 탄식이 자연스레 터져 나올 정도로 그야말로 순식간에 읽어버렸다. 내 성향에 꼭 들어맞는 소설이었고, 오랜만에 러시아 문학을 제대로 만난 것 같아 독서를 하는 내내 뿌듯함이 밀려왔다. 이반 투르게네프의 작품을 읽어냈다는 후련함보다 너무나 마음에 드는 소설을 읽었다는 만족감이 내면을 지배했다. 다시 러시아 문학에 열정을 불태우고 싶을 정도로 무척 반갑고 고마운 소설이 바로 『아버지와 아들』이었다.
두 세대의 갈등을 보여주고자 제목을 『아버지와 아들』로 지은 것처럼 작품 속에는 아버지 세대와 아들 세대가 등장한다. 그러나 옮긴이도 말했듯이 소설속의 논쟁과 갈등은 현재의 실질적인 관심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시공을 초월한 세대 간의 보편적 갈등, 동시대의 삶에 대한 객관적이고 상세한 묘사, 중부 러시아의 자연에 대한 서정적 묘사, 인물들에 대한 생생한 성격묘사' 등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내가 도스또예프스끼의 작품을 좋아한 것도 이런 세세한 묘사와 장황스러운 대화체, 끝 간 데 없는 수다스러움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그 안에 담고 있는 러시아인의 기질을 그대로 드러내곤 했는데, 이반 투르게네프도 그러한 매력을 작품을 통해 충분히 보여주고 있었다. 다양한 인물들에 생명력을 불어 넣는 것 하며, 당시의 사회문제들을 필두로 흐름을 이끌어 가는 것, 거기에 사랑과 가족의 이야기까지 보태 19세기 러시아로 편입한 듯한 착각이 일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작품 속의 아들 세대는 아르카디와 그의 대학 친구 바자로프였고, 아버지 세대는 아르카디의 아버지 니콜라이와 큰아버지 파벨이었다. 바자로프는 아르카디를 따라 그의 고향에 잠시 머물면서 갈등을 일으키는데 특히나 파벨과는 사이가 좋지 못했다. 니힐리스트라고 소개할 정도로 모든 것에 비판적이고 어떤 것이든 인정하지 않는 바자로프는 사사건건 파벨과 충돌했다. 바자로프가 보기에 파벨은 낡아빠진 귀족주의자 행세를 하는 자였고, 파벨이 보기에 바자로프는 버릇없고 뻔뻔하고 예의도 모르는 자였다. 둘의 문제가 살아온 환경이 달라서라고, 시대가 바뀌었다고, 어느 사회건 겪는 문제라고 치부해 버리는 섣부름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었다. 그러나 구세대와 신세대가 나란히 동시대를 살아가지 않으면 내부의 붕괴는 뻔 한 법이고, 충돌을 방치하게 되면 화합과는 멀어지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 중심선상에 팽팽하게 맞선 바자로프와 파벨이 있었으니 누구의 편도 들지 못한 채 지켜보는 도리밖에 없었다.
바자로프가 좀 더 공손하고, 자신의 생각을 우회적으로 말하거나 논리정연하게 말했더라면. 파벨은 귀족의 본보기를 내면까지 보여주었더라면 좋았을 거란 아쉬움이 일기도 했다. 그들이 결국 결투까지 하게 되는 것을 목도하고, 끝끝내 화해하지 못하는 것은 마음이 아프면서도 현재의 수많은 대립을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소설속의 논쟁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소설의 중심이라고 말할 순 없다. 아르카디와 바자로프, 니콜라이, 파벨이 겪는 사랑도 있었고, 가족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다.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던 바자로프는 매력적인 과부 오딘초바에게 사랑을 느끼고, 지금껏 자신이 추구했던 사상과 어긋나는 마음에 혼란스러워한다. 오딘초바도 바자로프에게 호감을 갖긴 하지만 모든 것을 그에게 걸기엔 불안정하다고 느낀다.
아르카디 또한 오딘초바에게 첫 눈에 반하고, 오딘초바와 바자로프의 서로를 향한 마음을 알고 나자 바자로프에게 거리감을 느낀다. 아르카디가 바자로프와 오랜 우정을 깊이 나누었다고 할 순 없지만, 최근에 친해진 그들은 오딘초바가 아니었다면 나름대로 잘 지냈을 친구였다. 바자로프는 아르카디의 집에서 평화롭게 지내지 못했지만, 아르카디는 바자로프의 극성인 부모를 만나 좋은 인상을 남긴다. 바자로프를 하느님처럼 떠받드는 부모님을 보면서 부러움도 느끼고, 바자로프가 부모에게 너무 무심하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러나 젊은 혈기인 그들, 구세대와는 판이하게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그들에게 시골생활과 따분한 집은 갑갑할 뿐이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더라면 당장 도시를 향했을 그들은 서로의 마음을 키워가며, 방황하고, 혼란스러워하고, 논쟁하고, 안락함을 즐기며 시간을 보낸다.
아르카디는 결국 오딘초바의 여동생과 사랑에 빠지고, 오해와 충돌로 인한 거리감으로 멀어진 바자로프와 결별하게 된다. 어느 곳에도 머물 수 없게 된 바자로프는 아르카디에게, 그리고 오딘초바에게 이별을 고하고 집으로 돌아간다. 집에는 그를 열렬히 반기는 부모가 있었지만 부모에게 자신의 존재로 인한 즐거움을 오래 선사하지 못한 채, 장티푸스로 죽은 시신 해부에 참여했다가 감염되어 허무하게 죽고 만다. 그가 그렇게 추구했던 니힐리즘을 이 모든 사건들도 인해 빠져나왔건만 예고되지 않은 죽음 앞에서 그의 사상은 철저하게 들어맞고 말았다. 죽음 직전에 오딘초바에게 자신의 마음이 진심이었노라 고백은 했지만 그만 빼고 모두 나름대로 행복한 것 같아 쓸쓸함을 금할 수가 없었다. 얄미울 정도로 자신의 주장을 펼치며 논쟁하고, 열정적인 사랑에 빠지고, 자신만의 미래를 개척해 가던 청년이 스러져 버린 것은 '러시아의 1860년대는 아직 바자로프의 때가 아니라는 투르게네프의 객관적인 현실인식'과 철저히 마주하게 된 셈이다. 하지만 '아무리 정열적이고 죄 많은 반역의 심장이 그 무덤 속에 숨어 있을지라도 무덤 위에 자란 꽃들은 순진무구한 눈으로 평온하게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며 책의 말미를 장식하는 저자의 말처럼 사랑의 무기력이 헛됨이 아님을, 영원한 화해와 무궁한 생명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는 것이리라.
이렇듯 정치적, 가족, 사랑, 심리적인 면까지 두루 가춘 『아버지와 아들』은 독자에게 다양한 즐거움과 메시지를 선사한다. 때로는 철학적인 사색 앞에 감탄하기도 하고, 능글맞은 비유에 미소를 짓기도 했다. 오랜만에 달게 읽은 소설이어서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이반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을 통해 단박에 반하고 말았다. 100년이 훨씬 지난 소설을 읽고 이렇게 즐거워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작품이 지닌 의의는 크다고 생각한다. 다양한 인간군상 속에 그야말로 다양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저자의 역량에 고개 숙여 경의를 표할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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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느낌과 감정을 있는 그대로 편안하게 말할 수 있는 여타의 책과 달리 제목만으로도 아 ~ 떠올리게 되는 세계 문학이라 불리우는 고전이나 유명 작가의 책을 만날때면 읽는것도 쓰는것도 부담스러울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난 세계문학을 접할때면 많은 긴장감이 엄습한다. 과연 잘 이해할 수있을까 이 나이쯤 되면 완벽하게 이해해야 하는데 그것이 가능할까, 읽고싶은 마음에 앞서 시험대에 오르는 것만 같아 자꾸만 주저하게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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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아들”은 청년성장소설이다. 스물세 살의 주인공이 그 당시 사회의 젊고 확고한 신세대적인 사고와 아버지의 구세대 사고와 논쟁을 벌인다. 우리 가족들 간에도 흔히 있는 갈등이지만 소설 속에서 읽으니 더 새로웠다. 주인공의 성장을 통해 독자에게도 사고의 성장을 주는 소설이 문학작품의 주류를 이루는데, 이것 역시 그러한 부류의 문학소설이다. 문학소설을 읽는 다는 것은 내 머릿속에, 내 심장 속에 비타민을 먹이는 일과 같다.
이제 막 학교를 졸업하고 아르카디는 친구 바자로프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온다. 바자로프는 ‘아무것도 존경하지 않는 사람’인 니힐리스트이고, 아르카디는 그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니힐리스트인 그를 존중한다.
이 책 속에서 바자로프는 계속해서 실험하고 연구하는 인물이다. 구세대를 향해 반항적인 모습을 보이지만, 마치 세상으로 나아가는 융합점을 찾기 위해 탐구하는 모습으로 비춰진다. 바자로프가 개구리를 잡는 걸 보고 아이들이 무엇에 쓸 것인지 묻는다. 그는 개구리의 배를 째고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볼 거라고 대답한다. 학교를 졸업하고 세상을 아직 경험하지 않아서 아들들은 작은 두려움이나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바자로프와 아르카디의 큰아버지가 논쟁을 벌인 부분은 그 당시 러시아의 문제점들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우리가 하찮은 일에 몰두하면서 예술이니 무의식적 창조니 의회제도니 변호사 협회니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떠들어대는 동안, 한편에서는 일용할 양식 문제가 제기되고 조잡한 미신이 우리를 질식시키고 있으며, 주식회사들은 정직한 인간이 부족하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파산하는 걸 보았습니다. 정부가 신경 쓰고 있는 그 자유라는 것도 우리에게 이롭지만은 않을 겁니다.” 불신과 부패가 가득한 사회를 비판하지만 그것을 바꿀 힘이 없음을 인정하는 젊은 바자로프. 당시 러시아의 그런 문제점들을 비판은 하지만, 어찌해 볼 수 없다는 무기력함을 느끼게 한다. 이 소설로 당시 러시아에서는 많은 논란이 있었다고 한다.
물론 이렇게 두 젊은이가 어두운 그늘 속에서 헤매지만은 않는다. 아르카디와 바자로프는 오딘초바라는 한 여성을 사랑하게 된다. 그것으로 인해 둘의 사이는 점점 어긋나게 된다. 결국 아르카디는 오딘초바가 아닌 오딘초바의 동생인 카챠와 사랑하게 되어 결혼한다. 그리고 바자로프는 니힐리스트답게 그녀(오딘초바)를 사랑하면서도 적극적으로 인정하지 않게 된다. 고향으로 돌아온 바자로프는 장티푸스에 걸려 죽은 시체를 해부하다 상처에 균이 옮아서 앓다가 죽는다. 삶에 순응하고 아르카디는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는데, 그의 젊은 반항적 기질과 갈등은 바자로프의 죽음으로서 사라지게 된다.
작년 말이었다. 툭하면 언성이 높아지며 아이와의 대화가 매끄럽지 않다고 느꼈었다. 뭔가 큰 잘못이나, 혹은 말실수를 한 것도 아니었는데 논쟁이 벌어졌다. 나는 될 수 있으면 부딪히는 걸 피하려고 대화가 민감하게 흐르면 적당하게 얼버무렸다. 아이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또 옳고 그름을 떠나서 아이의 생각을 읽을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였다. 아니 무엇보다도 아이에게 끝까지 내 주장을 고집하지 않는 것은 부모로서 나의 의무 같았기 때문이다. 이런 나의 심정과 비슷한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책 한권을 읽고 나니 헛 헛웃음이 나왔다. 이 책 속에서 벌어지는 세대 간의 작은 갈등을 엿보고 나니 이것도 성장의 한 과정이구나 싶었다. 시대적 환경에 따라 조금씩 생각은 다르겠지만, 인간 삶의 구조는 비슷한 행태의 세대 간의 갈등을 겪는 다는 생각도 들었다. 문학작품을 통해서 3월의 둘째 주말은 나와 아이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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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문학은 문학 수업시간에만 주구장창 들었을 뿐 사실 읽기가 쉽지 않았다. 톨스토이, 도스토 예프스키, 목로주점, 나나, 이 낯설고도 친숙한 이름들이란 기실 읽어봐야지 하고 책을 집었다가도 외우기 결코 쉽지 않은 길고 어려운 이름들에 금방 놓아버리게 했던 것이다. 자, 이번엔 큰 마음을 먹었다. 지인이 '이 책 정말 재밌어.' 후회 안할걸? 하고 건네준 책 <아버지와 아들>. '어려워보여!' 하고 밀어놓다가 슬금, 집어들었다. '이번에야말로'하는 오기. 거기다 이 책이 19세기의 가장 훌륭한 소설이라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추천사까지! 어려우면 그만 둘테다. 하는 처음의 생각과는 다르게 책장을 술술 넘어갔다. 어라, 하는 사이에 100페이지가 지나버리고, 재밌는데.. 하는 사이에 책장이 덮였다. 이게 바로 러시아문학의 매력? '너희 젊은 것들은...' '요즘 어린 아이들은..' 이라는 말을 안 듣고 자란 세대가 있을까? 그러나 단 한가지, '젊은 날의 열정적인 사랑'은 예외다. 귀족주의에 빠져 탁상공론만 일삼는 아르카디의 큰아버지 파벨과 아르카디의 친구 바자로프는 가장 극심한 대립을 보이지만, 파벨의 젊은 시절 사랑 이야기는 이후 펼쳐진 바자로프의 사랑과 묘하게 겹치며 미소를 짓게 한다. 사랑이라는 것이 원체 '~주의'같은 이성으로는 통제되지 않는 것이다보니, 본인을 니힐리스트라 칭하며 모든 것을 부정하는 바자로프에게 사랑하는 여인에 대한 통제되지 않는 감정은 너무나 당황스러운 것이다. 7~80년대 대학생이었던, 우리 아버지 세대를 생각해 본다. 군사정권에 대한 반항과 혁명의 세대. 그러나 내가 자랄 때 싸우고 반항했던 그 아버지 세대는 '보수주의'에 다름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그들도 그 이전 세대에 격하게 반항했던 세대였다는 건 생각도 하지 못했었다. 소설 <아버지와 아들>은 만고불변의 진리인 그 세대차이와 세대를 뛰어 넘는 보편의 매커니즘을 흥미로운 이야기로 풀어낸다. 친숙하지 않은 나라, 러시아의 이야기임에도 페이지마다 웃음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까닭은 <아버지와 아들>이 바로 지금 나와 아버지의 모습,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모습이기 때문이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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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무더위가 지나가면 저녁이 오고 또다시 밤이 오기 마련이다. 그러면 괴롭고 지친 사람들은 조용한 은신처로 돌아가 달콤한 잠을 잔다...(3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