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맨 처음 제목만 봤을 때는 이 책이 화술에 관한 지침서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은가. [나도 말 잘하는 남자가 되고 싶었다]라니. 마치 말 잘하고 싶은 남자라면 꼭 봐야 할 것 같잖아. 참, 말 잘하고 싶은 여자도 포함. 하지만 이 책은 저자의 온갖 입담과 글발이 녹아든 꽁트에 가까웠다.
펼쳐든 책은 첫 에피소드부터 나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음식을 숨기는 아버지라니. 그리고 그 아버지가 여기저기 숨겨뒀다 오랜 시간이 지나 형체도 모를 정도로 변질된 그 음식을 아무렇지 않게 먹는다니. 이건 허구적인 내용이겠지? 사실이 아닐 거야. 그렇다면 이 책은 소설이었단 말야?
“한 학생이 말했다. ‘제가 요점을 말해도 될까요? 제가 뭘 소리 내서 말하면 바로 제가 말하는 것이지만, 제가 똑같은 내용을 종이에 적으면 그건 다른 사람이라는 말씀이죠? 선생님 말씀은 바로 그것 아닌가요?’ 내가 말했다. ‘맞아요. 우리는 그걸 <소설>이라고 부르죠.’ 그 학생은 공책을 펴서 뭘 적고 그 장을 나한테 내밀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제 평생 들은 소리 중에서 가장 좆같이 멍청한 이야기네요.’ 똑똑한 학생들이었다.”
세다리스 선생의 말대로라면 자기 이야기를 직접 말하면 경험담이 되지만, 글로 적으면 소설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이 책 또한 소설이 되는 셈이다. 카터 대통령 재임 시절에 구입한 콩 그리고 블루치즈보다 더 시큼한 우유를 ‘더없이 신선하다’며 즐겁게 먹는 아버지를 견뎌내고, 친구 집 화장실에 들어왔는데 이미 변기에 부리토만 한 똥이 똬리를 틀고 있고 밖에서 다른 친구가 급하다며 문을 두드리고 있는 상황을 모면하고, 아이큐 132라고 자랑하는 동료가 짜증나 검사를 받았는데 미국 달러로 치킨 세 마리 살 정도의 지능지수가 나오고, 이삿짐센터에서 일하던 시절에는 짐을 상자에 싸놓지도 않고 평소대로 떠벌려 놓은 채 다 부려 먹고는 마지막에 팁 한 푼 주지 않는 멍청한 잡년을 욕한다. 소설이라면 발상이 기발한 것이고, 에세이라면 저자가 무지 흥미롭게(?) 사는 것이다.
사실 이 책이 소설이든 에세이든 애당초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웃기면 그만이지. 한동안 부리토 먹을 때마다 똥 이야기가 생각나서 몸서리를 칠 것 같다. 아니, 그러기 전에 당분간 그 메뉴를 주문하지 말아야겠다. 웃긴 이야기 하나 들은 대가가 부리토를 못 먹게 되는 거라니. 대체로 하나를 얻으면 다른 하나를 잃는 법이다. |
|
'웃프다'라는 신조어가 있다. 웃기면서도 슬픈, 슬프면서도 웃긴 상황을 가리키는 이 말은 미국의 작가 데이비드 세리다스의 산문집 <나도 말 잘하는 남자가 되고 싶었다>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명색이 강사인데 수업시간에 연예인 가십을 나누라는 과제를 내지 않나, 파리에 살면서 <뉴욕타임스> 십자말 풀이를 하기 위해 새벽부터 아버지를 깨우지 않나, 기껏 파리까지 가서 <포켓 의학 프랑스어> 테이프를 들으며 틀니, 대변 검사, 항문같은 말만 배우지 않나, 그의 일상에는 시트콤같은 일들이 왕왕 벌어진다. 유년시절에도 그랬다. 원인은 주로 괴짜인 저자보다 더 괴짜인 주변 사람들이었다. 자식들을 재즈 뮤지션으로 키우려고 억지로 악기를 배우게 한 아버지, 욕설 없이는 한 마디도 제대로 못하는 남동생, 아버지를 열받게 하려고 일부러 뚱뚱해보이는 옷을 입고 나타난 여동생을 가족으로 뒀으니 말 다했다. 골치를 썩인 건 식구들만이 아니다. 자신도 사투리를 쓰면서 혀 짧은 발음을 고치라고 강요했던 언어 치료사, 아버지 손에 끌려 온 저자에게 자기 여자친구가 엄청 예쁘다며 허세를 떨던 기타 선생까지... 읽는 내내 배꼽이 빠져라 웃어댔다. 그런데 어느 순간 웃음이 슬픔으로 바뀌었다. 하루 벌어 하루 살던 젊은 날 거대 도시 뉴욕과 파리에서 아웃사이더로 지내는 씁쓸함, 육남매 속에서 욕이라도 해서 돋보여야 했던 동생들, 재즈를 좋아하지만 주변에 취미를 공유할 친구가 없어 자식이라도 붙잡고 떠들고 싶었던 아버지... 나오는 이들의 마음이 차례로 이해가 되면서 내 마음도 아팠다. 아버지에게 이 책을 바친다는 것을 보면 저자도 그저 세상을 조롱하려던 것은 아닌 듯하다. 그도 역시 웃펐던 것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