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을 읽으면서 강하게 자리매김되고 있는 것은 일상에서 벌어질 법한 현실성과 생동감보다는 앞선 세대의 생각과 감정을 담고 있으며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면보다는 나약한 인간의 본질을 앞세워 세상 일에 대해 체념화하고 생각케 하는 결코 희극이 아닌 비애조라는 생각이 든다.소소한 일상의 풍경을 41개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그들이 엮어가는 얘기는 촌스럽고 우스꽝스러우며 시대착오적인 냄새마저 물씬 풍긴다.
세상 물정 모르는 사업가 이용원과 앞뒤 계산없이 사는 작가 강현수의 이야기가 이 글의 핵심을 관통하고 있다.이용원은 할아버지가 호랑이를 잡아 눌렀다는 기개와 의협심만으로 직장을 여러번 바꿔가지만 제대로 된 인생을 살아가지 못한다.그가 마지막으로 생각하는 것은 불특정 다수의 고객을 관리해야 하는데 자기 마음에 드는 직원을 찾으려 하지만 허무맹랑한 고객수와 숫자 놀음만 머리 속에 계산할 뿐 그가 하는 사업은 영 신통치 않다.원고료를 미리 받고 원고청탁 마감일에 아슬아슬하게 살아가는 글쟁이 강현수의 삶 역시 그리 화려하지는 않다.하필이면 그가 쓰는 글 제목이 <호랑이를 본 장군>이고 이용원의 가족사가 암암리에 밝혀진다.또한 강현수는 미리 받은 원고료를 다 써버리고 수중엔 한 푼도 남지 않았는데 설상가상으로 '대한민국 대표 명사 인명록 대사저'에 강현수의 이름을 올려야 하기에 출간비용으로 약간의 비용을 입금하라는 편지까지 들이닥치며 강현수는 좌불안석하며 간신히 원고작성을 마친다.
강현수가 쓴 <호랑이를 본 장군> 스토리는 한 나그네가 사랑에 눈이 멀어 주어진 삶을 포기하고 길을 나섰지만 산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보니 인간의 본능인 배고픔과 목마름,잠이 쏟아지는 것에 스스로 사랑 찾는 것을 체념하는데 나그네 앞에는 호랑이 한 마리가 입을 떡 벌리고 자신을 향해 포효를 퍼붇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는 '걸음아 나 살려라'는 살아야겠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데구르르 굴러 평범한 인간의 모습으로 되돌아 왔다는 얘기다.
이용원의 잇다른 사업 실패 속에 데구르르 구르는 모습이 <호랑이 본 장군>에 나오는 나그네가 이용원이 아닐까 한다.인간은 세속을 초월하려 하지만 언젠가 다시 세속으로 돌아오고야 마는 평범하고도 나약한 존재일지도 모른데 아이러니하게도 강현수의 작품 속에 이용원의 자화상이 담겨져 있고 그 자화상은 평범한 세인들이 아닐까 한다.
짧은 글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냥 읽고 넘어가는 무심한 보다는 얘기 속에 담겨져 있는 속뜻이 인간이 갖고 있는 찰라주의적 영웅심과 극히 인간다운 모습으로 돌아오고야 마는 중간단계의 인간 모습을 은유화하지 않았나 싶다.작가의 말처럼 웃을 수도 울음 수도 없는 경계에 대다수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그저 평범하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삶 속에서 나 자신을 들여다 보는거 같았다.
|
|
얇다. 비싸다. 어렵다. 웃기다. 하지만 슬프다. 이제 성석제의 소설은 다 본 것 같다. 먼저, 이 소설은 중편이다. 성석제의 소설은 희죽거림이 그 매력의 원천이지만 장을 넘길 때마다 늦가을의 스산함 같은게 느껴진다.
|
|
지금 내 앞에 마흔 한개의 퍼즐조각이 널려있다. 과연 어떤 그림이 나타날지는 잘 모르겠다. 요즘 복잡한 머리를 잠시 붙들어두고 몰입하는데 최고라는 퍼즐조각들이 1000피스이상이라는데 마흔 한개 쯤이야 한 두시간이면 뚝딱 맞춰지지 않겠는가. 문제는 분명 조각은 마흔 한 개인데 한 개의 퍼즐조각을 들어 올리면 한 뿌리에서 줄줄이 매달려 나오는 고구마처럼 숨겨진 것들이 연달아 끌려나오는 데 있었다. 돈을 먼저 받으면 돈 쓰느라 바빠 원고에 손을 댈 수가 없다면서도 미리 원고료를 받지 않으면 사람이 시시해지는 것 같고 책임감마저 없어지는 것 같아 미리 받아 써버린 계약금 원고 독촉에 어디로 도망이라도 가고 싶다는 소설가가 우선 이 소설을 완성시킨 화자로 등장한다. 얼핏 소설가 자신이 아닌가 싶게 술 좋아하고 사람좋아하고 바람처럼 떠돌기를 좋아하든 화자는 '대한민국 대표 명사 인명록 대사전 편찬위원회'는 곳에서 보낸 편지글을 보면서 쌍팔년도 적에 이미 자신의 아버지에게 써먹은 수법으로 수작을 걸어온 편지를 보면서 한동안 잠잠하던 이용원임을 알게된다. 맨손으로 호랑이를 잡은 장군 집안 후손의 막내아들 이용원은 장성하여 고향을 탈출하여 회사를 다니다가 개인 사업을 벌이지만 도무지 세상물정 모르는 중증환자인 그의 사업은 창업과 폐업을 번갈아 하며 그와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맺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퍼즐 조각처럼 엮어져 있다. 가난한 시골집안에 오로지 잘 한 일이라고는 아이들 아홉을 생산해낸 아버지와 그의 딸과 막내 아들, 그 막내아들이 키워낸 염소를 거래하는 업자와 만병통치약을 개발하여 팔아먹는 영업사원과 그의 친구들 그리고 그들이 찾아간 하우스맥주집 사장까지... 처음에 주의를 기울이고 맞춰나갔던 퍼즐조각들이 어느순간 이곳에도 맞는 것 같고 저곳인 듯도 싶게 헷갈리기 시작한다. 그 유명한 노화억제물질인 '콘드로이틴 전문가'와 몽골식 천막으로 전원에 집을 마련한 사나이가 같은 인물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분명 이 작품을 쓴 소설가든 화자로 등장한 강현수든 분명 호랑이와 관련된 어떤 이야기를 듣거나 경험하긴 한 모양이다. 워낙 방량벽이 있는 사람들이니 깊은 산속 어디엔가에서 뭔가 휙 스치는 검은 물체를 본적도 있을 것이다. 기가 허해 헛것을 보았든 이미 우리땅에서는 전멸한 것으로 알려진 호랑이였든...기어이 그들이 호랑이였다고 우긴들 확인할 방법이 없으니 '호랑이를 봤다'로 인정해주기로 했다. 하긴 그 호랑이라는 것이 어찌 깊은 산중에만 있을 것인가 도무지 야생의 것들은 살아내지 못할 도시에서도 우리는 무수한 '호랑이'를 만난다. 단지 워낙 영물이라 모습을 수시로 바꾸어 나타날 뿐.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라는 속담이 여전히 존해하는 것을 보면 분명 이 세상 어딘가에 호랑이는 있다. 대체로 실패담이 많은 주인공들이 등장하니 분명 비극쪽에 가까워야 할 이야기들이 이상하게 희극처럼 느껴진다. 가장 많은 실패를 경험한 이용원은 타고난 긍정으로 자신은 한번도 실패한 적이 없다고 믿으면서 여전히 어디에선가 새로운 사업을 구상중일 것이고 그의 주변사람들은 그가 어느 날 불쑥 어떤 물건을 들고 나타날지 궁금해 하면서 지내고 있을 것이다. 단지 똥물이 자신을 비켜가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옷만 바꿔입었다 뿐이지 여전히 예전에도 지금도 미래의 어느 날에도 존재할 이용원과 그의 무리들은 본 적이 있는 것고 같고 봤지만 기억은 안나는 호랑이와 그렇게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저러나 난 호랑이를 봤던가? |
|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염라대왕 장부에는 올라가지 말아야제' 읽을 때 윗배에서 결국 웃음이 꾸물대더니, '배라 처먹을 것들'에서 목구멍을 오르더니 씰룩거릴 수밖에 없다.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는 동안 밑줄 그을 문장을 몇 개 추리기가 어렵다. 문장 해체 가공업자가 있다고 할지라도 밑줄 긋기가 곤란하여 한 숨을 내쉴 것이다. 나는 신문 한 귀퉁이 미담 소식을 읽고 나서 형광펜을 찾은 일이 없다. 가판대 주간지의 페이지를 메우려고 인쇄된 개인적 수기 이야기를 스크랩해 본 일이 없다. 소년 시절 교문 앞에서 팔던 전설, 요괴 이야기책을 여태 소장해 본 일이 없다. 그러나 그것들은 아궁이 연기가 낮게 깔리는 저녁에 동네 사랑방에 다들 모여 앉았을 때, 저녁 후에 좁은 뒷방에 다들 모여 앉았을 때 나중 들어오는 사람이 "나 지금 뒷산 넘어오다 호랑이를 봤어!"라고 말을 할 때, "에이, 또 쓸데없는 농담하고 있네","허, 진짜라니까","그거참, 그럼 본 거 썰이나 풀어봐"라고 시답지 않은 농담으로 뻔히 알면서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는 것과 같다. 장독대 위의 장독 뚜껑을 열기 전에 설렘을 느껴본 적이 있다. 장독 속에는 아는 것과 모르는 것들이 엉켜서 무한하게 담겨 있을 것만 같다. 그 무한은 설화, 우화 같은 이야기들이지만 실재했던 우리들의 전설 같은 이야기들이다. 너무나 인간적인 삶은 문장 몇 개로 담아낼 수 없다. 작가가 무엇을 담아 놓았든 나는 첫 문장부터 마지막 문장까지 전체에 밑줄을 치겠다. |
|
호랑이에 대한 우리들의 기억을 되새겨보면, 무서움과 함께 우스꽝스러움의 상징으로 묘사되어 왔다. 산야를 호령하는 날쌘 금수의 우두머리이지만, 우리의 이야기 속의 호랑이는 한마디로 ‘허당’일 때가 많았다. <호랑이를 봤다>에서 ‘호랑이’가 어떻게 이야기될 것인지 궁금해졌다. 또한 표지조차 뭔가 괴팍하거니 기괴한, 딱히 뭐라 형용하기 힘든 인물들과 상황을 담고 있는 듯하여 더욱 기대하게 되었다. 솔직히, 얇은 두께의 부피감은 책에 대한 부담감도 덜어주어 가뿐하게 펼쳐들게 한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표지만큼이나 독특한 구성에 놀라고 메시지의 깊이에 또 한 번 놀랐다. 결코 하나의 줄거리고 전개되지 않았다. 마흔 한 개의 여러 에피소드의 나열이라고 할까? 바로 앞 에피소드의 상황 속에서 그 주변의 또 다른 화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바로 전후의 에피소드의 관계는 분명 하나로 연결되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하나의 이야기라고 단정하기엔 무척 혼란스러웠다. 머릿속은 수많은 잃어버린 퍼즐을 찾아 애써 하나의 이야기를 완성하고자 애쓰며 읽기 바빴다. 나름 머릿속에 그려졌던 흐름은 각기 다른 이야기의 파편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와 상황과 인물들의 설정으로 뒤엉켜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다. 기존의 어떤 믿음이란 것이 일순간 무너져버린 듯 당황스러웠다. 때론 각자의 관점이 전혀 다른 상황을 만들 듯, 이야기 속 인물들은 한 인물이면서도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한 노인이 말한다. 벌벌 떠는 나그네를 보며, ‘자네, 호랑이를 봤구만’이라고. 그리고 나는 상상해본다. 어느 깊은 산속에서 호랑이와 마주하는 상황을. 그저 오금이 저려온다. 그런데 우린 때론 그 호랑이와 대면하고 있다. 우쭐하고 으스대며 뭔가 남다른 ‘나’, 고귀한 존재로써의 우리를 꿈꾸지만, 그저 아득히 먼 곳에서 들리는 호랑이 울음소리에도 기가 꺾인다. 그리곤 뒤꽁무니를 빼고 줄행랑치기 일쑤다. 그러한 인간의 한계를 꼬집고 있지만 난 그렇고 그런 작고 작은 나의 마음을 들키고 말았다. 어리석고 우스꽝스러운 인물들을 넌지시 바라보듯 웃음 짓다가도 어느 순간 바로 내 모습이란 사실에 화들짝 놀라게 되는 것이 바로 ‘성석제’표 이야기였다. 책을 덮는 순간, 나는 ‘호랑이’인 듯 으스대는 모습과 늘상 현실에서는 ‘허당’의 면모를 수시로 보이며 실수하고 엎어지는 모습이 대비되었다. 그리고 한없이 불안과 두려움에 떨고 있는 나 자신을 본다. 현실의 나는 ‘허당’일 수밖에 없으니...... 그러나, 그저 자신의 한계에 쉽게 좌절하기 마련임에도 나는 또 다른 시선에서 그 날카로움의 이면을 보고자 한다. 한없이 약하기 마련이지만 그리고 또 세속으로 데굴데굴 굴러떨어져 벌벌 떨지만 그럼에도 현실 넘어의 또다른 이상과 희망을 바라보며 삶의 박차를 가하고 싶다. 그것이 또 우리의 숙명 아닐까?
|
|
책을 읽고 나면 읽는 건 어렵지 않았는데 느낌을 남기기 어려운 책이 있고, 읽는 건 어려웠는데 느낌을 남기기 쉬운 책이 있다. 이 소설은 철저하게 전자에 속한 책이다. 100페이지 정도 되는 소설을 읽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닌데도 읽으면서 병적인 생각이 드러나고 말았다. 다 읽고 난 다음에 느낌을 어떻게 남기지? 책이 좋아 책을 읽었으면서도 어느 순간 리뷰를 쓰기 위해 책을 읽는 것 같아 리뷰를 남기지 않고 책을 읽었던 시간이 3년 정도 있었다. 리뷰를 남기지 않아도 된다는 부담감이 없어 좋았으나 목록을 보고 있으면 그 책 내용이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부작용을 낳고 말았다. 그래서 책을 읽으면서도 그런 걱정을 떨쳐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예전에는 책을 읽고 난 느낌에 줄거리가 꼭 들어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줄거리를 간추려 낸다는 것이 무척 어려운 일임을 알고 있음에도 정작 줄거리로만 채워진 리뷰라는 느낌을 감추기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요즘은 마음 내키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느낌을 남기고 있지만 이 책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하다. 줄거리도 제대로 간추려 지지 않고 느낌을 드러낸다는 것은 더 어려운 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저자의 작품을 충분히 숙독하지 않은 상태에서 독특한 작품을 만나고 말았으니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여전히 저자의 다양한 문학세계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저자의 능글맞을 만큼 유머러스하고 진한 묘사는 익히 알고 있다. 에세이와 소설에서 드러나는 그 문체가 좋아 저자의 책을 여러 권 구비해 놓았음에도(읽은 책보다 못 읽은 책이 더 많지만) 이 작품은 그런 문체와 독특한 구상이 만나 탄생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이러니 꽃 피는 나무가 있는 곳에서는 글 따위를 쓰고 있을 수가 없다. 폭포 앞에서 오줌발 자랑하기요, 피라미드 앞에서 집안 제사 지내는 격이다. (7~8쪽)
첫 장을 열자마자 펼쳐지는 언어의 향연 앞에서 이 책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다 읽고 난 다음에 그럴듯한 느낌을 남기지 못하더라도 이런 문장들을 즐기기만 해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책 내용은 몽롱한 기억의 언저리로 사라져 버렸고 짤막짤막한 작은 이야기들이 모아지기는커녕 한데 섞여서 혼란스럽기만 하다. 그렇게 작은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엮은 저자가 신기할 뿐 나는 그저 지켜보면서 따가라는 방법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어떤 작가가 좋아 그의 작품을 읽으면서도 모든 작품을 다 사랑할 수 없고, 모두 다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좋아하는 작가에 대한 나름대로의 애정은 초기작부터 차근차근 읽으면서 작품의 변화를 탐색하며 즐기는 거라는 결론을 최근에 얻었다. 성석제 작가에 대한 애정이 샘솟기도 전에 뒤죽박죽 읽어 댄 작품으로(그렇게 많은 작품을 읽은 것도 아니지만^^) 조금은 혼란스러워졌지만 여전히 나는 저자의 다른 작품이 궁금하다. 그렇기에 그의 작품을 읽을 것이고 나를 어렵고 혼란스럽게 만드는 작품을 만나더라도 꿋꿋하게 다음 작품을 향해 나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