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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End of Education
‘End’의 사전적 의미를 크게 둘로 보면, 하나는 ‘Death’ 다른 하나는 ‘an Aim, Intention or Purpose’이다. 즉 이 책은 ‘교육의 종말’이라는 의미를 ‘교육의 목적’이라는 의미와 역설적으로 대비시킨 글이다. 즉, 보다 의미 있는 학교교육의 목적을 숙고하지 않고, 합의하지 못한 채 수단에만 집착하다 보면 우리의 학교는 결국 ‘종말’을 고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한 주간 이 책을 느리게 읽으면서 생각해보니 정말 그렇다. 교육의 목적, 즉 초점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논의하지 않고, ‘영어몰입교육’이니 ‘예체능에 비중을 둔 교육’이니 ‘자사고’니 ‘국제중학교’니 ‘교원평가’니 ‘교장공모제’니 하면서 교육의 행정적, 기술적 수단에만 지나치게 천착하고 있는 것 같다. 바로 그 점이 지리멸렬하게 지속되고 있는 ‘교육위기설’의 근본 원인은 아닐까? 사실 남들보다 혹은 다른 나라 국민들 보다 더 뛰어난 ‘기능인의 양성’이 아니라 어떤 ‘인간을 양성’할 것인가가 우리가 추구하는 교육의 목적이고 한다면 가장 먼저, 교육이 추구하는 인간상을 확립해야 할 필요가 있다. 켜켜이 먼지 쌓인 교육헌장에 고이 모셔져 있어서 아무도 모르는 그런 거 말고……
아무튼 목적을 확실히 하면, 오늘날 좌충우돌 갈팡질팡하며 삐걱대는 우리의 교육에 대한 논의에 대한 해답은 상당부분 간추릴 수 있을 것도 같다. 물론, 저자의 지적처럼 이미 우리의 학교 교육이 경제, 상업논리 등에 잠식돼 있어 갈 길은 멀기만 하지만….. 필자는 한 명의 독자로서 그리고 9개월 된 딸아이의 미래를 염려하는 아버지로서, 교육의 문제를 수단보다는 목적의 관점에서 재고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에 깊이 공감하고 감명을 받았다. ‘역시 닐 포스트먼이야!’
<죽도록 즐기기>에서 미디어에 중독된 우리 인간과 사회를 신랄하고 통쾌하게 게다가 경쾌하게까지 비평했던 그 포스트먼을 이 책에서도 만날 수 있었다. -250여 쪽으로 그리 분량이 많지 않으면서, 교육의 목적에 초점을 맞추어 논지를 깔끔하게 풀어냈다. -밑줄치고 암송하고 싶은 구절과 숙고해 볼 필요가 있는 많은 교육적 화두를 제공한다. (‘메모’난에 정리함) -미적분 문제를 앞에 두고 온갖 물리적, 수학적 지식을 총망라해 이리 저리 궁리하면서 몇 시간을 고민하고 있는데, 친구가 가볍게 보고는 “그거 시험범위 아닌데?!” 할 때의 기분이랄까? 포스트먼은 목적지를 망각한 채 항해술에만 집착하며 내가 맞느니 네가 틀리느니 하며 다투는 사공들에게 ‘목적지를 공유하는 게 먼저이지 어떻게 가야 할 지가 우선이냐, 아무리 좋은 배와 훌륭한 항해술을 가진들 목적지를 모른다면 그것들이 다 무슨 소용이냐 ’하고 묻는다. 역시 ‘딩~!’ 종을 울린다. |
| 수업 중에 귀에 익은 유명한 언론학자이자 존경 받는 사회적 인물인 ‘닐 포스트먼’. 방학이 되자마자 서점에 달려가 그의 책을 골랐다. 원래는 TV의 폐해에 관한 책인 ‘죽도록 즐기기’를 고르려고 했다만, 왠지 ‘종말’이라는 단어에 끌려 ‘교육의 종말’을 구입하게 되었다. 전혀 관심 없다기 보다는 생소하고 부지한 분야인 교육. 원래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었고, 앞으로 그 구체적인 형태에 대해 서술한 이 책은 단순한 이론적 설명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보다 실현 가능한 방향을 모색한다. 이 책은 교육의 화두에 대해 세 가지 질문을 던진다. 먼저 지금까지 배워온 틀에 대해 부정하자는 내용이 아니라 그 틀에 대한 ‘’질문’을 하자는 것이다. 예컨대, 컴퓨터 메모리 칩의 구성원리에 대해 배운다면 단지 그 구성요소뿐만 아니라 그 역사와 만든 인물, 좋은 점과 나쁜 점, 대체 기술이나 앞으로의 영향력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것이 필요한지 혹은 유용한지 심층적 교육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두 번째, 학교 안에서만 이론적인 공부를 하기 보다 직접 삶에 나가 지역과 연계하여 실천하는 것이다. 닐 포스트먼의 이상적인 대목이 소개되는데, 그는 도시가 재난에 닥쳤을 때 그 복구작업을 학생들을 시키는 것을 이상향으로 생각한다. 그들이 윤리나 사회를 과목으로만 배우는 것을 넘어서 직접 실현해 보이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지진이 난 지점에 학생들을 세워놓고 교통정리나 청소를 시키는 것부터 시작하여, 모든 사회의 공공기관에 투입되어 인력난을 보충하고 동시에 교육을 받는다. 이것의 실현을 통해 학습기관의 필요성은 절대적이다기 보다 상대적임을 주창한다. 마지막으로, 학습의 주체는 학생이지 학습서를 만든 사람이 아니란 것이다. 학습서를 만든 사람도 결국 많아야 10명 안팎이 편찬했을 것이며, 이는 전체 몇 천만 학생들에게 진리로 받아들여진다는 점에서 결코 올바른 쌍방향적 교육이 아니다. 학습서를 통해 그 진위여부를 끊임없는 질문을 통해 각자 해답을 얻는데, 이는 문화적인 상대주의에서 시작함을 역설한다. 언어, 종교, 문화 등 모든 부분에서 서로의 입장을 존중해 줌으로서 시작된다. 서로의 답이 결코 틀린 것이 아니며, 다양한 의견의 수렴을 통해 전인적 인간의 육성이 가능함을 말한다. 물론 이 책이 미국학생들을 위해 쓰여졌다는 건 간과해선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닐 포스트먼은 미국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언어의 통합은 영어여야 하며, 백인의 우월성을 은연 중 인정한다. 또한 비슷한 목차와 내용의 반복을 통해 읽는 이로 하여금 똑같은 부분을 계속 보는듯한 인상을 받게 한다. ‘경제적 신’의 대목에서처럼 ‘신’의 사용은 어디선가 본 듯한 불길한 예감마저 들게 한다. 이 책은 우선 교육의 열정이 있는 이에게 어울리는 책이다. 필자의 경우, 내용보다 저자에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접근방법이며 분명 내용에 관심이 있어야 한다. 교육에 열정을 가진 학생이라면, 기존의 생각해온 개념을 토대로 책의 코어부분을 꼭 집어 숙지할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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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교육 붕괴, 학교 붕괴에 관한 우려섞인 목소리가 그 어느때보다 드높다.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 매년 6∼7만명의 학생들이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학교를 뛰쳐나오고 있으며 지난해 한국교육개발원이 중, 고등학교 교육현실에 대한 전국 가구 만족도 조사에서 80%가 학교교육에 불만을 품고 있으며 학부모의 44%는 자녀가 등교를 거부할 경우 학교대신 다른 교육방법을 찾겠다고 응답하였다. 어떤 이는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그러한 학교 붕괴는 다름아닌 교실 붕괴이며 그것은 교육의 방법을 현대적으로 맞게 개선시키고 수업의 사태를 흥미롭게 구성하여 수업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을 제고시키면 해결될 수 있다"라는 정도로 진단과 처방을 내리고 있다. 물론 일리있는 말이며 교육 방법에 있어서도 적절한 개선이 필요하다. 그러나 단지 방법 정도만을 바꾸기만하면 된다는 식은 매우 단순한(naive) 접근 방식임에 틀림없다. 사실 우리의 교육 현실은 보다 심원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그것은 바로 교육의 목적이 상실되어 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닐 포스트먼의 저서「교육의 종말」은 우리에게 교육 문제를 그 뿌리부터 진단할 수 있도록 돕는 좋은 통찰력을 전해주고 있다.
먼저 저자는 학교교육의 진정한 목적이 아닌 것들로서 경제주의, 소비주의, 기술주의, 분리주의 등 네가지를 언급하고 있다. 특히 저자는 경제주의적인 효용주의에 대하여 신랄한 비판을 가하고 있는데, 사실 경제적인 상승 가치를 가져다준다는 신(god)은 현재 우리 사회의 제 영역들에서 최우선으로 숭배받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이에 관하여 우리의 학교 교육 역시도 예외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즉 우리의 학교교육 역시 경제주의 혹은 효용주의라는 우상에 의하여 '세속화'되버린 것이다. 이 '세속화'라는 말은 순수해야할 학교교육이 그 본질을 잃어버리고 오도되어 세속주의적인 가치관에 크게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결과물이 바로 우리의 입시 풍토와 학벌 문화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한 것들은 분명 오늘날의 경제적 효용주의와 관련되어 있다. 그리하여 학교 교육에 침투한 효용 논리는 비정한 제로섬 게임을 야기시켰으며 학생들의 인성을 회복시켜야 할 학교는 오히려 인성을 왜곡시키고 경쟁주의적인 비평화구도를 정착시키는 장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뿌리부터 심각한 우리의 교육현실을 통탄해 하면서 저자가 본서에 우리에게 제안하는 바를 깊이 있게 숙고해보아야만 한다. 그는 '우주선 지구호'라는 상징적인 용어를 사용하여 '세계 평화공존 수호자 양성'을 교육의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즉 우리는 지구호라는 한배를 탄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지구 전체를 아끼는 책임감으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생명들을 돌보고 아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고고학, 인류학 그리고 천문학 등에 최우선권이 주어지도록 과목 조정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과목들을 통해 지구를 위한 새로운 관점이 계발되고 폭넓은 세계관을 얻게 되며, 인류의 사명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들에 대한 답을 생각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으로서 서로에 대한 가치를 존중해주고 협동적인 상호의존을 알게 하는 그 자체가 교육의 목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므로 비평화가 만연하고 있는 우리의 상황에서 시급히 요청되는 것은 교육의 원래 목적이 회복되어 서로 돕고 배려하는 그 사랑이 사람들 마음안에 충만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즉 학교는 장애우 등 소외된 이웃들을 먼저 섬길 수 있는 마음을 고양시켜주고, 협동학습을 통해 함께 성장해나가는 삶의 의미와 행복을 누리게 하는 장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평화에 대한 교육은 반드시 실행되어야 하고 그것을 통해 학생들로 하여금 근접 지역과 전세계 이웃을 향해 순수하게 사랑하고 돌볼 수 있는 인성을 품을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인간은 누구나 실수하기 쉬운 존재이며, 우리가 신과 같다거나 완벽하다고 믿는 최악의 범죄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즉 이것은 마치 우리가 절대지식을 지닌 것처럼 여기는 그 맹목과 독선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다. 우리는 실패로부터 배워나가는 불완전한 존재들이며 우리의 지식 또한 불완전하다는 것을 겸손히 인정할 때 우리는 서로 소통이 가능하고 거기에서부터 다양성을 인정하는 아름다운 태도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다양성은 성장과 표준의 가능성에 관한 논의일뿐만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성과 종교와 인류의 모든 구성요소들의 차이에 의해 만들어진 발전에 관한 이야기"라고 정의하고 있다. 결국 페쇄적인 획일주의에서는 퇴보만이 있을 뿐이요 다양성을 인정하며 존중할 때 진정한 발전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저자는 언어, 종교, 관습, 예술에 있어서 다양성의 표현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고 하면서 이들은 다양성이 우리 삶에 얼마나 좋은 생명력과 궁극적인 동질감을 형성시킬 수 있는지를 증명해준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이러한 관점에서 언어, 종교, 관습, 예술과목을 학교의 중요한 교과목으로서 자리매김할 것을 강조한다. 이러한 다양성을 배움으로써 인간성은 아름답게 회복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닐 포스트먼의「교육의 종말」은 학교 붕괴라고 일컬어지는 현 상황에 대한 진단과 처방이 담겨진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가장 괄목할만한 대목은 교육의 개혁에 있어서 자칫 공학적 방법론에만 치우칠 수 있는 우리의 안목을 보다 깊게 해주어 교육의 진정한 목적에 대하여 사고하게끔 만들어 주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우리 나라 교육은 포스트먼의 표현처럼 실용주의의 함정에 빠져 그 진정한 목적을 헤아리지 않은채 원칙없는 무방향성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래서 입시제도는 말할 것도 없고 BK21 사업이니 하는 것들이 경제주의적이고 실용주의적인 관점에서 추진되어 인문학이 고사(枯死)되어 가는 실정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본서 제목처럼 정말 교육의 종말이 도래한 것이 아닌가하는 깊은 우려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의 표현처럼 end라는 말에는 '종말'이라는 뜻과 함께 '목적'이라는 역설적인 의미도 있기에 학교 교육의 아름다운 '목적'이 속히 우리의 교육 영역속에서 정립되어 좋은 결실들이 맺혀질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인상깊은구절] 과학은 물리학이나 생물학 또는 화학 등 하나의 과목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배움에 대한 겸손과 올바른 시각 그리고 균형의식을 부여하는 도덕적 강령이라고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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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읽기가 힘든 책이었는데, 잡지에 기고했던 글을 모았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 산만하다.
그런데 이 산만함의 원인이 저자 탓인지 번역자 탓인지가 애매모호한데,
'크리스챤사이언톨로지'를 '기독과학'으로 과감하게? 번역한 번역자와 걸러내지 못한 편집자 탓을 하면서
내용 별은 3개, 편집 별은 2개를 주었다.
솔직하게 말해, 대책이라고는 거의 눈에 띄지 않는, 비판 일색의 글이라서 별점 3개도 과분하다고 느껴지지만, 번역의 문제가 분명하기에 아무래도 내용 별 3개를 줄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명심하기를 권한다.
정말 각 장 마다 따로 논다. 읽기가 힘들 정도로 산만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