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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 사이의 만남은 세 가지 경우로 귀결된다. 첫째는 나무 옆에 서서 멀리 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친구(木+立+見=親)이고 둘째는 서로 다른 땅의 사람이 되는 타인(亻+地=他)이며 셋째는 상대의 말을 전혀 듣지 않고 울부짖기만 하는 새처럼 서로 원수(隹+隹+言=讐)가 되는 경우이다. 문명을 가지고 있는 유럽인들과 자연과 동화되어 사람인지 땅인지 알 수 없는 야만인(?)들과의 만남은 위의 세 가지 경우 중 어디에 해당될까? 여기에 대한 답을 하기란 의외로 쉽지 않다. 문명을 쉽게 받아들인 쪽에서는 친구가 되었을 테지만 문명을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거부하는 경우는 타인이 되거나 원수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문명을 받아들이는 것이 과연 선(善)인지 확언할 수 있을까 하는 근본적인 질문이 있을 수 있다. 발전과 진보, 정착과 개발, 안락함과 자본주의, 기독교와 텔레비전 등 이 모든 것들이 올바름과 정의의 영역에 있다는 것을 어떻게 확정할 수 있을까? 원시적인 삶과 도처에 널려 있는 기아, 그리고 생존을 위한 식인 같은 것들을 과연 현대 문명인들의 관점에서 용인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그 원시 부족들과 이누이트들의 삶의 방식을 문명화시켜 그들의 자살률을 높여 가면서 자본주의와 기독교를 이식해야 할 것인가? 이런 도덕적인 질문들에 답을 하는 것은 쉽지 않다. 특히 기독교도이자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특히 더할 것이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근본주의 기독교를 가지고 있는 나라 중 하나이며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만연한 사회이다. 그렇기에 이런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찾을 수 있기는커녕 이런 질문들이 용인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옥스퍼드 출신의 제이 그리피스는 어렸을 때부터 야생의 삶을 동경해 왔고 그녀가 도시의 문명 속에서 걸린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 저 멀리 남아메리카로 비행기를 타고 날아갔을 때 이제 그녀는 온갖 위선과 욕망으로 휩싸인 문명과는 양립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그녀가 옥스퍼드에서 배웠을 문학과 심리학은 그녀의 우울증의 근본을 치유할 수 없었지만 아마존에서 아야와스카(주술사의 약으로 아마존에서 가장 강력한, 특히 우울증을 치료할 때 쓰는 약)를 마시고서 생과 사의 경계를 오가며 결국 그녀는 자신의 우울증을 날려버린다. 하지만 그녀가 마신 아야와스카 때문에 그녀의 우울증이 치료되었기보다는 아마존의 자연이 그리고 정글의 야생이 그녀의 모든 마음의 병을 치유했을 것이다. 그녀는 아마존에서 투쟁하고 있는 원주민들과 만난다. 수많은 선교사들과 벌목업자들이 그들의 삶을 파괴한다. 그들의 삶을 파괴하는 방식은 문명의 이기(利器) 퍼뜨리기(利器와 利己가 발음이 똑같은 것이 오히려 역설적이다), 합리성으로 무장한 과학기술이 그네들의 정신을 치료해주는 주술사 몰아내기, 주술사의 빈자리를 기독교 선교사가 차지하기 등이 있는데 이 모든 방법의 근본원인은 단 한 가지다. 바로 그들의 땅을 빼앗는 것인데 지금 전 세계의 모든 원시성과 야생성을 가지고 있는 부족들이 그들의 삶의 터전을 잃어 가고 있는 단 한 가지의 이유이다. 문화의 접촉은 모든 인류가 발전하는데 자양분이 되지만 그것이 약탈의 형태로 변하면 단지 한 쪽만이 살아남는다. 지금까지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대부분이 사라진 이유는 문화접촉이 약탈의 형태를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명을 가진 유럽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땅 끝까지 전파하기 위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전염병이나 그보다 더 무서운 오만과 독선을 퍼뜨린다. 수많은 유럽의 탐험가들은 원주민의 평화로운 정신(원시 부족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힘을 가진 자연 앞에서는 분노를 억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 분노를 억제한 상태로 새로운 백인들을 대했지만 백인들은 생존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들로 원주민들을 무차별적으로 죽인다)을 악용하여 그들의 욕망을 채웠다. 이제 오스트레일리아, 아메리카, 아프리카에 거주하는 수많은 원주민들은 그들의 원래의 생존방식을 잃은 채로 백인들의 온갖 나쁜 쓰레기들로 자신의 야생성을 죽이고 있다. 이 모든 억압과 약탈의 현장을 저자는 직접 체험하는데 과연 이 조그만 몸부림이 거대한 석유채굴업자와 벌목업자들을 이길 수 있을 지는 전혀 알 수 없다. 식인종 추장이 유럽에 가서 수많은 유럽의 사람들에게 그 야만성에 대해 비난을 받고서 했던 말은 왜 먹지도 않을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냐는 반문이었다. 생존의 이유로 자신의 종족을 죽이는 것도 문제이겠지만 생존과는 전혀 상관없는 욕망과 아집으로 자신의 종족을 멸살하는 일은 더 문제일 것이다. 심지어 일부의 사람들은 그 야만인들을 자신의 종족으로 여기지도 않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 책을 읽고 저자의 삶의 방식에 전혀 동의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문명인이라 불리는 인간의 추악한 위선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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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다닐 때 여성학 강의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수업에서 제가 기대했던 것은 현재 여성인권과 또 개선 가능성과 혹은 여성운동에 대해서 그리고 그런 것들에 대한 타당성 같은 미래적인 것들을 기대하고 갔는데 교수님은 고려시대의 여성인권과 남성의 잘못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했습니다. 전혀 개선사항도 없었고 발전가능성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시험지에 다가 여자가 바뀌어야 남성도 바뀐다. 이런 취지의 글을 썼었습니다. 그렇게 쓰면 학점은 날아간다는 걸 알았지만...교수님 수업내용이 너무 엉망이었고 설득력도 가지지 못했고 게다가 자신이 원하는 쪽으로 계속 질문을 통해 유도해나가는 것이 너무 억지스러워서 그렇게 썼었죠. 물론 학점은 바닥이었고 저도 평가내용에 아주 뭐 이런 수업이 다있냐고 썼었습니다. 참 지금 대학교 교양수업을 돌아보면 은근히 수준미달이었던 과목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특히 사회학쪽의 교양은 정말 수박 겉핧기 수준입니다. 아프리카가 못사는 이유가 국민성과 인종갈등, 기후 탓이라니요. 지금 생각하면 정말 말도 안되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앞으로 우리나라의 미래는 여성들이 사회에서 얼마나 많이 활발히 활동해 주느냐에 달려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여성의 사회생활에 부정적입니다. 이기적이니 일을 안하려고 한다느니 이런 걸 이야기하고 싶진 않습니다. 제가 말해봐야 모두 남성의 시각에서 말한 거 밖에 되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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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친환경·유기농’ ‘저탄소·녹색산업’이라는 말에 익숙하리만치 자연 환경, 환경 문제가 하나의 상품으로 취급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웰빙(Well-being) 혹은 참살이, 슬로우 푸드(slow food)와 슬로우 시티(slow city), 올레길·둘레길과 같은 느리게 걷기 등 자연친화적인 삶을 지향하거나 추구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를 한편으로는 더 풍족하고 나은 삶을 위해 어떤 식으로든 개발은 불가피하지 않겠느냐는 현실 인정 속에서 발현되는, 각박한 도시생활에서 잠시나마 벗어나 마음의 안정과 여유로움을 만끽하고픈 욕구(!)는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제이 그리피스(Jay Griffiths)는 유목민의 야생적 자유의 매력은 결코 우리 곁을 떠나지 않았다며 그것은 우리의 폐 속의 자유로운 호흡, 지평선을 갈망하는 눈, 끝없이 뻗은 길을 밟고 싶은 근질근질한 발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머물러 있는 것이라고 했다. 언제부터였을까?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이라고 해야 할까, 무엇인가를 향해 전력질주를 해서 도착했는데 막상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느낌이랄까. 무언가를 놓치거나 잃어버렸다는 느낌, 목표나 방향을 잃어버렸다는 느낌. 아마 그런 것들인듯 싶다. 문득 인생의 나침반의 자침이 떨림을 멈춰버린 채 줄곧 한 방향만 가리킨다는 느낌이 들었다. 파르르한 그 떨림을 멈춰버린 나침반은 더 이상 소용이 없는 것인데 말이다. 나이 먹어가는 것이라 애써 합리화시켜보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 치미는 묘한 반발심은 그냥 무작정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는 생각으로 연결되었다. 그리고 여전히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다는 마음만 품은 채 일상을 보내고 있다. 주말이면 가끔 자전거를 타고 도시의 외곽까지 나갔다가 돌아오곤 한다. 그 경계를 넘어서는 것은 항상 새로운 용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지금껏 벌여놓은 일들을 때려치울 것을, 익숙해진 사람들과 일상에서 벗어날 것을 말이다. 나는 아직 야생 자연의 통과의례 의식을 거치지 않은 어린 아이일 뿐이다. 제이 그리피스는 떠났다. 그도 길고 어두운 우울, 정신의 황무지 속에서 길을 잃었다고 했다. 곧고 부드럽던 머리카락은 기름이 덕지덕지 낀 볼썽 사나운 모양이 되었고, 글을 쓸 수도 없었던 상황에서 일말의 망설임도, 주저함도 없이 길을 나섰다. 그는 우리의 세상이 학교를 통해 인간의 본성을 유년기부터 잘 훈련되고 길들이는, 젊은이들에게 세속적 만족을 지향하는 조심스러운 삶을 가르치는 훈련 과정에 지나지 않는 클로로포름의 세계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야생성이 이미 길들여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며, 인간의 영혼은 야생성이 가장 뚜렷하게 구현된 형태라고 결론짓고, 스스로를 태우는 한이 있더라도 불처럼 살고 싶었다고 한다. 그래서 오랜 세월 동안 동경해 왔던 야생의 의지를 찾아 나섰고, 그 의지가 야성적인 아름다움 속에, 자연력의 생기 속에 스스로를 어떻게 드러내는지 보고 싶었다고 했다. 아마존의 숲, 북극의 빙하, 바다 집시의 마을과 심해, 오스트레일리아의 사막, 웨스트파푸아의 산, 외몽골의 사원을 방랑하고 이 책을 집필하기까지 7년이 걸렸다고 한다. 그는 영혼의 황무지에서 길을 잃은 젊은이에게 유일한 약은 땅이라는 사실을 전 세계 원주민들로부터 배웠다고 한다. 다른 곳에서는 송라인(songline), 땅을 알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음악의 형태로 마음속에 땅을 간직하는 방법을 배웠다고 한다. 아마존의 주술사에게서 정신의 황무지, 그 어두운 우울함을 어떻게 헤쳐 나가는지 배웠고, 북극 지방의 이누이트에게서 복잡한 얼음의 세계에 대해서, 고래와 돌고래로부터는 인간이 얼마나 무지한지를 배웠다고 한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에게는 사물의 근원성에 대해서 그리고 땅이 얼마나 심오함으로 가득 차 있으며 어떻게 노래를 부르는지를, 인도네시아로부터 독립을 원하는 웨스트파푸아인에게는 인간의 영혼에 자유가 얼마나 절대적으로 필요한지, 외몽골의 불교 승려에게는 얼음 위에서 자전거를 타다가 떨어져도 웃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 그러면서 자연 속에서 살고 있는 원주민들의 생각과 문화를 무시한 채 그곳을 황야나 황무지라고 쓴 많은 19세기 유럽미국계 작가들과 원주민들을 질병에 감염시켜 몰살시킬 수도 있는데도 불구하고 접촉하려는 탐험가들에게 분개해 한다. 원주민들의 문화와 정신을 악마화하고 그들을 충실하고 순종적인 패배자로 길들이려는 기독교 근본주의 선교사들과 목재를 얻기 위해 숲을 훼손하고 자원을 캐기 위해 땅을 파헤치는 대기업과 관련 국가들의 행태에 분노를 표한다. 그리고 야생 자연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그곳에서 대대로 살고 있던 원주민들을 쫒아내는 열혈 자연보호주의자, 환경주의자들의 자기모순을 지적하고 있다. 제이 그리피스, 그가 친환경 치수정책이라는 ‘4대강 살리기 사업’, 350만 마리의 소·돼지 예방적 살처분과 630만 마리의 닭·오리를 매몰시킨 대한민국에 왔다면 어떤 생각을 했을까? ❝모든 인간의 정신은 자유롭고 야생적이며, 현실의 대상물로서 야생의 땅을 필요로 한다. 정신을 땅으로부터 떼어내고 시계와 울타리와 일상으로 정신을 가두며, 지루한 복사의 세계에서 종이로 궤변을 늘어놓는 사회는 치매와 불행을 만들어내는 어리석음을 되풀이 하고 있다. 인간의 정신은 야생의 자연 속에서 발달했고 여전히 야생의 자연을 필요로 한다.❞ ❝야생성 또는 야생의 자연에 이끌리는 내 감정은 무언가에 대한 반발인 동시에 그것을 향한 충동이기도 했다. 해방을 향한 충동이었으며, 그 순수하고 생생한 세계를 향한 충동이었다. 이러한 감정은 정치적이다. 자유의 관념과 자유가 구현되는 현실의 장소는 둘 다 자연이 자유로울 때만 존재할 수 있다. 우리가 진정 자유로우려면 자연은 도로 건설, 벌채, 채굴에 의해 막히거나 길들여지지 말아야 한다.❞ ❝전 세계적으로 원주민들이 세운 법의 목적은 본질적으로 자연 세계를 그대로 유지하는 데에 있다. 그러나 현대의 유럽과 미국의 법에서는 지구상의 생명을 멸종시키는 것이 합법이다. 대량 학살은 공식적으로 법에 의해 금지되지만, 다른 생물을 죽이거나 멸종시킬 수 있는 행동 또는 지구의 기후를 파괴하는 행위는 전혀 범죄로 취급되지 않는다.❞ ❝다른 방식의 앎, 다른 방식의 말하기가 존재함을 인정하는 것이 민주주의 시작이다. 숲은 씨 꼬투리, 강둑, 바람, 카이만 악어들의 거칠고 야생적인 민주주의의 모형이며, 꽃가루의 의견이 중요하고 딱정벌레에게 투표권이 있는 것처럼 모두에게 발언권이 있는 궁극적인 국회라고 했다. 왜냐하면 민주주의에서는 단순히 투표만이 아니라 대화와 토의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는 웨스트파푸아 자야푸라에서 와메나로 가는 화물기에서 우연히 만난 한국인 선교사를 통해 이미 짐작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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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약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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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가장 소중한 것의 가치는 그것을 잃어버렸을 때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된다. 땅, 물, 불, 바람, 그리고 얼음, 인간의 생존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원소지만 우린 이들의 가치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해 본적이 없다. 어느덧 땅과 물은 오염이 되었고 불과 바람은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조만간 인류는 물 부족을 호소하며 전례 없던 고통을 겪을 것이다. 인간의 편익을 위해 사용했던 과학적 이기가 인류를 구렁으로 빠뜨렸다. 자연을 버린 대가는 혹독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연의 힘에 나약함을 느낀 인류는 자연에 용서를 구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인류가 용서를 선택하지는 않았다. 그들에게 자연은 이용해야할 수단이고 정복해야할 대상일 뿐이다. 땅, 물, 불, 바람, 얼음은 야생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자연의 모든 것을 말하지 않는다. 우린 왜 야성적 선택을 버려야만 했을까? 그리고 그 결과 우리들이 얻은 것은 무엇일까?
제이 그리피스의 야생적 사고와 생활은 도시에 찌든 현대인들에게 진정한 삶의 의미를 일깨워준다. 행복하기 위해선 야생의 노래를 불러라. 날것 그대로의 공기를 들이마시고 가슴 깊은 곳의 감정을 포효하라. 야생은 있는 그대로 모습을 전해줄 뿐이다. 우린 오염되고 조작되었고 모방되었다. 어느 것 하나 진실 되지 않지만 마치 진실 된 세상이라 여기며 자신과 자연을 속이며 살아간다. 행복은 결코 우리 마음에 있지 않다. 원래 있었던 가치를 되찾는 순간 자신의 의미를 알게 될 것이다. 그리피스는 야생의 자연을 무의식의 세계라 말한다. 원시시대, 태초의 시대, 마치 모든 것이 새로 시작될 것 같은 무의식의 세계엔 우리의 원초적인 야생의 모습이 가득하다. 이를 찾는 것이 삶의 목적이요 생존의 의미다.
그녀의 선택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야생을 선택한다는 것은 진실에 다가가는 것이다. ‘야생은 팔수도 살수도 없고 빌리거나 복제할 수도 없다. 그 것은 다만 존재할 뿐이다.’ 인류는 그동안 모든 것을 분해하고 해체하려 힘써왔다. 하지만 야생은 그 어떤 것으로도 분해되지 않은 순수 그 자체다. 원시생명력이 넘치는 야생이 얼마나 아름답고 진정성이 있는지 누구도 알지 못한다. 자연의 노래를 음미하고 자연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보라.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또한 어떤 언어를 사용하는지를 알게 된다. 인류의 근원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에게 야생은 진정한 시작을 보여줄 것이다.
그녀는 빙하에 사로잡힌 겨울바다를 침묵의 공간이라 말한다. 파도가 일지 않는 곳, 얼음은 모든 것을 정지시켜버린다. 그리고 수천 년 동안의 비밀을 간직한다. 혹 우리의 모든 기억이 빙하에 갇혀있는 건 아닐까? 그리고 해빙이 되면 천둥과 같은 소리를 지르며 깨달음의 진동을 울린다. 바다는 생명의 탄생지다. 인류가 아직 완벽하게 보지 못한 곳이 심연의 세계다. 바다는 마치 거대한 틀 속에서 지구의 탄생과 신비를 관리한다. 우리의 기억이 빙하에 갇혀있다면 심연의 세계엔 삶과 죽음이 이어진다. 끝을 알 수 없는 바다, 넓이를 가늠할 수 없는 바다, 바다는 언제나 시작으로 넘친다.
인간의 마음은 콘크리트 벽속에 갇혔다. 꺼내고 싶어도 꺼낼 수가 없다. 그들은 스스로에게 안전지대를 만들었다. 하지만 본래 야성적인 존재였다. 모든 것은 자연과 더불어 호흡이 가능했으며 자연을 통해 삶의 모든 것을 습득했다. 우리의 영혼은 야생을 떠났다. 자연은 더 이상 인간을 배려하지 않는다. 아니 무조건적인 생명을 주었지만 인간의 반응은 철저히 조건적이었다. 제이 그리피스의 야생적 선택은 높이 솟은 나무의 뿌리만큼이나 순수하다. 땅을 밟고 숲을 뒤지며 아마존을 달리던 그리피스의 발걸음을 통해 꺼지지 않는 야생의 의미를 되새겨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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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물, 불, 바람과 얼음의 여행자>가 인문 서적인 줄은 알았지만 책 자체의 느낌만큼이나 무겁고 힘들다. ![]() 500 페이지, 600 페이지를 넘어도 가뿐하게 넘겨지던 소설책과는 엄청 다른 감(感)을 느끼게 해준다.
문장이 어렵거나 딱딱하지는 않다. 그래도 저자인 제이 그리피스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들은 쉽게 접할 수 없는 새로운 세계의 이야기들이고, 그 이야기들이 고대 그리스인들이 말하던 땅의 네가지 원소인 흙, 공기, 불, 물, 그리고 여기에 얼음이 추가되어서 설명되는 것이다. 설명? 이 책의 내용은 이야기라기보다는 그리피스의 논리적 사고가 들어있기에 설명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물론, 그녀의 탐험에 가까운 이야기들도 함께 들어 있다. 저자인 그리피스는 어려서부터 책을 접하는 생활을 했고, 특히 세계 여러나라들, 그중에서도 사람들이 많이 이야기하지 않는 곳들 (시베리아, 만달레이, 외몽고 )의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흥분할 정도였다. 그래서 18살에는 전국을 돌아다니고, 티베트를 가려다가 인도까지 간 경험이 있다. 24살에는 태국의 미얀만 국경지대의 카렌 고산족과 6개월 이상을 함께 생활하기도 했다. 안나푸르나, 킬리만자로, 라디크 등도 가보게된다. 그런 그녀가 자유와 물, 불, 얼음, 흙, 공기를 찾아서 길을 떠나게 되는 것이다.
《책의 목차 》 야생의 땅 숲
나는 야생의 의지를 찾아 나섰다. 그 의지가 야성적인 아름다움 속에, 자연력(...)의 생기 속에 스스로를 어떻게 드러내는지 보고 싶었다. 야생성은 생명에 대해 단호하다. 포획되어 갇힌 야생성은 죽어 버리기 때문에 그럴 수 밖에 없다. 그것은 순수한 자유나 순수한 열정, 순수한 갈망처럼 근원적이다. 야생성은 그 자신의 선언문이다. (p12)
이 여행은 7 년간의 세월이 걸리게 되고, 그것이 이 책이 완성되는데 걸린 7년의 세월인 것이다. "자연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어른이 되기 위한 필수적인 입문 과정이며, 영혼이 황무지에서 길을 잃는 젊은이에게 유일한 약은 땅이라는 사실을 나는 전 세계 원주민들로 부터 배웠다." (p15)
여행의 시작인 페루. 아마존의 여행자로 그녀는 언어가 의미하는 것들을 이야기한다. "아마존 사람들은 숲에 대해 관계를 맺고 이야기를 하고 의사를 교환할 줄 아는, 말하는 세계로 본다." (p54)
아마존은 서구인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미개지이고 식물들의 무차별적인 초록 덩어리이지만 원주민들은 각 식물들의 노래를 통해 이 야생의 숲을 지나갈 수 있음을 알고 있는 것이다. "남극을 찍은 사진으로 유명한 허버트 폰팅은 남극을 '얼음과 화산암으로 이루어진, 신에게 버림받은 황무지... 사람이 살 수 없는 지독하게 고독한 곳'이라고 했다.
이 책을 마무리할 무렵에 그리피스는 외몽골에 가려고 한다. 친구의 피로연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녀에게 온 세상과 다름 없었던 사람과의 헤어짐을 겪게 된다. "나는 그 끝없는 돌의 땅, 고비 사막의 모든 돌이었다. (...) 돌에는 끝이 있지만 황폐함에는 끝이 없다. 먼지와 자갈, 자갈과 먼지, 먼지와 재만이 존재하는 세계, 그것이 바로 나였다.
친구의 피로연때문에 찾은 외몽골. 그러나 실연과 슬픔에 빠져 결혼식에 간다는 것은. ![]()
![]() 우리들은 읽기 쉬운 책들을 언젠가부터 찾게 되다보니, 시각적인 면을 고려한 책들이 난무하고 있는데, 한 번쯤은 깊은 사고를 할 수 있는 인문 서적도 접해 보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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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환경과 생태주의, 서구유럽 문명 우월주의에 대한 고발, 종교와 인종, 계급 차별에 대한 노골적 반발, 지나치게 솔직하고 자의식이 강한, 은유적이고 감성이 넘치는 문장들, 게다가 수없이 나열되는 어근과 낱말, 인용되어지는 지식의 방대함 등, 가볍게 읽을 수만은 없다. 미래의 관광객을 위한 흔한 여행기가 아닌 독특한 시간과 공간인 야생wild이 살아있는, 문명의 끝에 존재하는 장소에 대한 거침없고 신랄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나는 영혼의 가장 민감한 부분으로 삶에 부딪고 싶었다. 머릿결을 스치는 바람, 손톱에 낀 딱딱한 진흙 부스러기, 맨살에 내리쬐는 태양, 입술을 찢는 얼음, 몸속으로 밀려들어왔다 빠져 나가는 조수를 느끼고 싶었다. 완전히 잠기는 것, 그것이 내가 원하는 전부였다.” 고대 그리스에서 세상을 구성하는 원소라고 생각했던 땅, 물, 불, 바람에 얼음을 덧붙여 여행의 밑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그러나 여행은 그리스 철학이 기원이라는 서구 문명과 가장 멀리 떨어진 야생wild의 공간으로 들어간다. 첫 장은 페루에서 가까운 아마존 지역이다. 깊은 우울증에 빠진 저자는 아마존에서 원주민 주술사를 찾아가 아야와스카를 마시고 환각에 빠진다. “주술사들은 아야와스카가 길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정해진'길이 아닌, 당신 자신의 길을 보여준다고 했다. 그것은 일종의 송라인이다. 이 송라인은 땅의 지도가 아니라 인생의 지도다. 당신을 질식시키는 불가해한 수수께끼를 풀어줄 수 있으며 햇빛처럼 단순하면서도 결국 여행길에 오른 영혼의 동기와도 공명하는, 숲의 초록 심장 깊숙한 곳에 구불구불 나있는 길을 보여줄 수 있다. <songline - 땅의 경계표지와 길을 찾아가는 미묘한 기준을 제시하는, 구절이 연속되는 형태의 구전노래 - 옮긴이> ... 아야Aya는 케추아족의 언어로 영혼이나 조상 또는 죽은 사람을 의미하며, 와스카huasca는 덩굴이나 밧줄을 의미한다. 따라서 '죽은이의 덩굴'로 알려져 있기도 한데, 실제로 주술사들은 아야와스카를 마시면 조상과 만날 수 있고 영혼 세계와 소통할 수 있다고 말한다.“ 아야와스카와 아마존 탐험은 영적인 은유와 깊이로 영혼에 평온을 안겨주지만 현실은 파괴적이다. 아마존이 점점 황무지로 변하고 있고 원주민들이 그들의 생활 터전을 잃고 어려움에 처하고 있다. 선교사와 기업, 국가권력의 횡포는 영화 ‘미션’이 여전히 상영 중임을 보여준다. 이는 아마존만이 아니라 북극, 오스트레일리아의 사막, 웨스트파푸아라는 인도네시아의 침략과 지배에 시달리는 원주민 부족에 이르기까지 공통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일 뿐이다. 문명화라는 이름으로! "땅이 없는 원주민들은 슬픔에 잠기고 언어를 잃기 시작한다. 그들은 백인들로부터 빌려온 언어로 말하기 시작하면서 자기부족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린다. 땅이 없으면 ... 그들은 죽기 시작한다." 북극은 문명인에게 황무지로 보일 뿐이지만 이곳에서 살아가는 이누이트 부족에겐 눈과 얼음조차도 표정이 있다. 눈을 지칭하는 말이 100가지도 넘고 얼음을 표현하는 것도 30여 가지 이상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생존을 위한 지식이라고 한다. 눈과 얼음에도 다양한 모양과 특성, 질이 있어서 이들을 구분할 수 있는 지식이 생사를 가를 수 있다고 한다. “북극에 사는 부족들에게 이 땅은 생명과 의미로 충만하다. 물론 삶은 힘들 수 있다. 하지만 땅은 결코 황무지가 아니다. 그들과 유럽인의 관점이 다른 가장 큰 이유는 한 단어로 요약될 수 있다. 바로 지식이다. 이 땅은 무지한 사람들에게만 황무지일 뿐이다.” 가장 열악한 환경에서조차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다. 그것도 수 만 년 전부터 살아왔기에 야생wild에는 자연스럽게 사람도 포함된다. 하지만 문명은 야생에 포함된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 오늘날 진정한 야생의 공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저자가 찾아간 모든 지역에 선교사와 문명이 발을 들이고 있으며 이들 원주민들은 점차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떠났던 여행은 우리 문명인에게 너무도 멀어서 거의 도달할 수 없는 곳들이지만 그래서 그 환상적이고 아름답고 슬프고 잔혹한 풍경들이 손에 잡힐 듯 느껴지는 듯하다. 어쩌면 우리의 삶이 문명화 되었다고 하지만 아직 우리 안에는 야생에 대한 그리움이 남아있는 걸까. “'인간의 삶에서 가장 커다란 위험은 인간이 먹는 모든 것에 영혼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글루리크의 한 나이든 주술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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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물, 불, 바람과 얼음의 여행자 제이 그리피스 지음 전소영 옮김 알마 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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