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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9월 1일 오전 9시 국제도시 뉴욕에서는 엄청난 비극이 시작되었다. 자유경제주의 시스템의 심장부인 미국 그리고 그 중심중에 중심인 뉴욕 세계무역센타빌딩이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에 의해 비행기 테러를 당하면서 세계는 충격에 휩쌓이고 만다. 이후 진행되었던 일은 주지하다시피 이성의 판단이 아닌 감정의 판단(종교적 판단)이 앞서가면서 세계는 근본주의자들에게 더할나위없는 천국으로 변질되어 버린다. 기독교 다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신도를 확보하고 있는 이슬람교는 9.11사태가 발발하기전까지만 하더라도 국내엔 그다지 알려지지 않는 종교였다. 물론 우리 선조들의 고전을 들여다 보면 회회인, 대식국이라는 표현으로 가끔씩 등장하고는 있지만 우리와는 사뭇 다른 세상의 종교정도 인식되어 왔고 그렇기 때문에 관심에서 한발 비켜나 있는 상태였다. 지금도 이슬람에 대해선 기독교를 비롯한 외래종교보다 실상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 역시 사실이다. 그동안 이슬람에 대한 많은 관심이 있었으나 아직까지도 미지의 세계임은 틀림없다.
코란과 히잡으로 대표되는 이슬람에 대해 일반인들은 일부다처제, 라마단, 시아파, 수니파, 팔레스타인자치구등의 단편적인 지식외에 좀더 깊은 지식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그러다보니 이슬람교와 이를 믿는 무슬림에 대한 곡해와 왜곡된 시각이 여전하고 제대로된 이들의 종교를 이해하지 못하면서 일정거리의 선을 긋어버리는 오류를 낳게 되었다. <이슬람 여성의 숨겨진 욕망>은 이런 환경에서 이슬람교의 전반적인 이해와 역사적 기원 그리고 양대 종파(시아파,수니파)의 다른 견해 그리고 현재 이슬람국가들의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로 다가온다. 특히 이슬람교라는 믿음의 틈바구니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슬람 여성들의 믿음과 삶을 통해서 이슬람 사회에서 여성들의 위치와 그녀들의 종교적 믿음을 재조명하고 있는 보기 드문 저작이다. 특이한점은 저자가 유대교인이라는 점과 과연 배타적인(우리가 인식하는 선에선 가장 극적인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 두 집단이라는 특수성) 이방인의 눈에 비친 상대진영의 종교와 사회를 바라보는 견해와 판단이 과연 공정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도 들지만 같은 여성의 입장으로 바라보는 저자의 시각에 공정성을 훼손할 여지는 없어 보인다는 점이 돋보인다.
인류가 구성하고 있는 그 어떠한 조직체 그리고 신의 구원을 믿음으로 형성되어 있는 종교등 그 어떠한 곳에서도 여성이 진정한 인격체로서의 합당한 대우를 받은 적은 없었다. 굳이 현대에 들어서 장족의 발전을 이루었지만 지금도 곳곳에 설치된 생물학적, 사회적 다양한 이유와 편견으로 여성은 남성과 동동한 지위를 누리고 있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비단 이 책은 이슬람 사회의 여성들의 비상식적이고 비합리적인 대우를 고발하는 의도가 짙지만 사실 이들을 대놓고 비판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고 있는 남성 개인이나 조직 나아가 국가단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그나마 기존 코란을 인식하는 잘못된 관행에서 진일보하여 에스마(아크드에 결혼계약조건으로 여성에게 유리한 조항을 넣는 양식)등이 자리 잡으면서 그동안 혼전이나 혼외정사로 명예살인이나 성기절제등의 반인간적인 대우에서 조금씩 여성에 유리하도록 변화되고 있다는 점이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이다. 하지만 이러한 시각은 어쩌면 남성위주의 시각이 될 우려가 있다. 원래 누려야할 권리를 누리지 못하게 억압하고 이제와서 조금씩 풀어주는 행위로 상대방을 배려한다고 한다면 이 또한 다른 폭력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이슬람교리에 대한 설명서나 그 기원서 내지는 다소 무거운 학문적인 접근이 아니라 저자가 오랜세월동안 이슬람국가들을 활보하면서 손수 경험했던 사안들과 수많은 사람들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전개되는 일종의 르포르타주방식의 서술로 현실감과 생동감 주고 있는 점이 오히려 독자들에게 이슬람에 대한 접근을 용이하게 한다. 특히 여성들의 삶을 바탕으로 억압된 종교사회에서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들이 애잔하게 느껴지도 하지만 저자가 인터뷰한 여성들은 현재의 이슬람이 강요한 일방적인 희생양으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이슬람 사회 역시 그 속도는 느리지만 분명 변해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전반적으로 이 책을 접하게 되는 독자들은 새롭고 충격적인 모습들에 직면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충격은 문화종교적 차이에서 오는 전제가 되겠지만 왠지 씁슬한 감정을 억누르기는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무함마드가 창조하고 그의 어록이 수록된 코란과 샤리아를 삶의 전부로 알고 살아가는 이들을 보는 시각은 그래서 가슴이 짠하게 다가온다. 후대의 해석에 따라 인격체로서의 여성들의 삶이 어떻게 영향을 받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기도 한다. 이슬람에 조금더 다가갈 수 있고 그들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적절한 기회를 제공해 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나마 위안을 찾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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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석현·김영은|마음풍경 예술철학 연구
이슬람의 여성, 그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라는 질문은 의문과 호기심의 영역에 아직 안전하게 있다. 정체성이 없지 않으나 어디로 가야할지 정해두지 않은 이유는 이슬람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가? 라는 자극을 찾지 못해서라고 둘러대고 싶다. 비판적 책읽기가 시작된 이래로 쉽게 어떤 이야기에 동요되지 않는다. 감정이 메마른 것일지도 모른지만, 감정을 쉽게 요동치게 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아서다. 우리에게 있는 유교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데, 이슬람 여성의 이해는 사실 물 건너의 불구경과 다르지 않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인문학은 인류의 공통 관심사인 본질과 현상, 그리고 방편에 대한 논의가 있어야 한다.
먼저 이백의 시를 빌려와서, 인간세계가 아닌 천상을 어찌 보았는지를 보아야 한다. 물론 이것이 그들의 경제사회적인 현실과는 거리가 있으나, 그들의 세계관에서 드러난 어두움이 번뇌가 곧 지혜라고 받아들일 수 있는 문화적 토양이 되었는지 살필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비판적 책 읽기에 대한 습관이 생긴 것은 꽤 오래 전 일이지만, 여전히 고쳐지지 않는 터라 이 책에서 감동을 받지 못했다. 욕망에 대한 그들의 자세에 대한 여러 역사와 현재의 잡음을 서술하는 방식, 즉 감동보다는 생각의 알러지 반응을 살피는 일에 가까웠다.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보다도 깊이가 떨어졌다. 책에서 묘사된 종교 지도자는 혼자 하는 여행이 심심해서인지, 일부일처제가 아닌 일부다처제를 당연시 한다. 길을 잃은 여성을 그렇다고 도반道班으로 생각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동서양이 발전이 다른 것이라지만, 그 궤적은 거의 비슷하다. 책에서는 여성의 자유를 논하지만, 한편으로는 구속에서 자유를 느끼는 이들도 상당수 발견된다. 편견을 편견으로 보고 있다는 느낌이라 해둔다. 뉴욕 타임즈같은 매체들이 한 줄 평을 책 표지에 남겼으나, 그 말은 현혹에 가깝다. 대안이 빠져서인가, 불평의 강도를 낮추려는 데 문장 기술력이 동원된 듯 싶었다. 이는 오역이라 생각한다. 이슬람에 대한 자본의 오역이며, 그들 문화를 미국식에 맞추려는 프로크루테스Προκρούστης으로 보였다. 기자는 테세우스Θησεύς의 행동반경에서 가장 안전한 범위에서 관찰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들의 삶에 깊숙이 들어갔다가 나왔다는 이야기는 아닌 듯 하다. 무엇을 말하려 했던가?
여성으로 본 이슬람, 이런 시각이 집중인지 협소한지는 개인차가 나타난다. 필자의 경우는 집중력보다는 협소함으로 이해를 했다. 큼지막한 칼보다는 메스같은 날카로움으로 베어내는 듯, 책 읽기는 때로 거부감이 있다. 특히 여성의 생리를 질병으로 인식하고, 할례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는 십자군 전쟁에서 드러난 정조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또한 그러한 일을 어렸을 때 겪고 난 이들이 결혼 생활을 하면서 출산을 하게 되면서 겪는 기쁨보다는 엄청난 통증에 대한 소개는, 인간이 인간을 낳는 행위보다는 생명이 생명을 낳는 것으로 이해를 했다. 우리의 역사에서 이슬람은 종종 그림에 드러나지만, 서구에서 본 이슬람은 대립과 정복의 대상으로 비추어지곤 했다. 세계관과 세계화는 다른 시각인데, 이 두 개의 개념을 버무린 듯 읽혀졌다. 인문이란 비교와 검토가 기본일 터인데, 실사구시와는 사뭇 다른 노선을 보여주고 있다.
책 속에 코란의 몇 구절이 인용되었는데, 독특한 그들의 문화는 당장 우리 문화에 들여와서 써도 좋을 듯한 것이 있다. 의외로 성에 대한 관대한 부분은 동양적인 전통에 가까운 듯 하다. 메소포타미아의 전설이 유지되는 그 땅에서, 돌팔매로 부정을 저지른 이들을 죽이는 일은 함무라비 법전의 전통을 이어가는 듯 보여졌다.
이 문제는 이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지구적 문제다. 여성과 남성의 구별법은 성기의 유무만으로는 설정할 수 없지 않을까. 종교가 사회와 문화에 미치는 영향은 적지 않다. 여성이 그 종교의 물결 속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지내는 게 좋은지 살펴보는 게 파도에 휩쓸리지 않는 일이라고 작가는 책의 말미에 뜻을 넣었다. 이 뜻은 책의 서두에 넣는 게 좋지 않았을까 싶다. 그들의 해결책을 위한 문제제기는 오래되었고, 앞으로도 풀리지 않을 숙제다. 답안지가 없는 수학문제를 풀기에 답이 무엇인지 몰라 검증을 할 수 없는 경우와는 미묘한 부분이 다르다. 종교와 성의 역할, 그리고 사회문제를 전반적으로 다루기 위해서는 미묘한 것에 대한 접근이 비교 우위를 숨겨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게 된 책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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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스타인벡의 통조림 공장 골목에서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는 것 같다. 통조림 공장에 대해 내가 내린 한줄 평은 대략 이러했다. 표지만 빼놓고는 모든 것이 완벽한 책. 그리고 이 책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표지와 제목을 빼놓고는 모든 것이 완벽한 책. <이슬람 여성의 숨겨진 욕망>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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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6년간을 중동에 나가 있으면서 그간 자신이 직접 겪었고 가까운 이슬람 여성들을 통해서 , 또는 그 사회에 들어가서 경험했던 일을 엮은 책이다.
이유인 즉슨 남자와 같이 동행을 하지 않았단 점으로 인해서 거부를 당한 것이다. 언뜻 보면 어린아이 취급하는 것 같기도 하는 이 어이없는 상황은 실제이고 현재 이슬람 나라에서 여성들의 지위에 대해서 생각케하는 제도의 한 일부분이다. 이란은 호메이니의 혁명 후 기존의 샤에 의해서 행해졌던 여러가지 시행된 일들이 일부 후퇴를 당하고 전통의상을 입으면서 생활하는 보수적인 사회로 돌아갔다. 호메이니의 결정이 그런 것이라면, 밖으로 나갈 수 있다면 그런 것이었고, 여성들이 남자들의 축구경기는 비록 아들과 같이 대동한다치더라도 관람 자체가 안되는 사회가 되어버렸다. 일부다처제의 관습도 실은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규정짓지는 않았다는 점, 즉 모든 부인들에게 공평하게 대할 수 있는 자라면 허용이 됬단 점, 간통에 의한 돌팔매질도 코란에는 그런 행위가 없다는점, 2대 칼리프에 의해서 행해진 것이 오늘 날까지 행하여졌단 점에서 그간 우리가 알고 있었던 작은 부분을 수정해 준다. 이슬람 특유의 조혼제도로 인한 여성들의 피해현실, 할례에 의해서 출산 때마다 무수한 고통을 겪는 여성들의 현 실태를 꼬집는 현장의 묘사는 이 모든 행위가 이슬람에서 권장한 사항이 아닌 오랜 전통적인 아프리카의 관습이 이슬람이란 종교가 혼합이 되면서 굳어졌단 점에서도 우리의 경각심을 일깨워준다. 중동에 위치한 이집트는 비교적 자유로운 여성의 활동이 있는 나라라고 하지만 작가의 비서였던 여성의 말과 행동에서조차도 이슬람의 법도를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을 보여준다. 부국인 사우디에선 아예 여성의 존재 자체는 집 안에서만 있어야하는 존재로 외출시 아들이나 남편, 집안의 남자들과 동행시에만 가능하며 이마저도 얼굴과 손만 제외한 모든 부분을 가린 천을 덮고서야 가능하다. 운전 자체가 용납이 안되면서도 대학의 학문과정중엔 운전학과가 있단 사실, 왜냐하면 운전자가 차가 고장났을 경우 이를 제대로 알고나 있는지 확인차 필요함이란 말엔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단 생각이 든다. 세계의 관광객들을 끌어 모으는 밸리댄서들의 보존방식은 제쳐두고서라도 그들이 돌연 활동을 중지하고 베일로 돌아간다는 발표는 이 이슬람이란 종교가 어떻게 한 여성이기 전에 사회적으로 한 인간을 구속할 수 있는지에 대한 사례를 보여준다. 팔레스타인의 한 아이의 입을 통해서 자신의 아버지와 자신을 낳은 엄마, 그리고 사랑에 빠져서 두 번째 부인을 들인 아버지로 부터 이혼의 권유를 받던 엄마가 끝내 친정으로의 복귀를 포기하고 자신의 양육을 빼앗길 위험에 돌부처처럼 평생 남편의 사랑을 포기하고 두 번째 부인과 살아가야만 하는 현실을 씁씁히 내뱉는 과정은 종교의 힘을 떠나서 인간이 인간이 정한 제도권 안에서 행해지고 있는 누굴 위한 정책인가 하는 일부분을 보는 것 같아 답답함을 준다. 여성의 선거 자체란 있을 수 없으며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한 터키에서 마저도 여성이 정계에 진출하려하자 비판의 소리를 높인점, 다른 나라에선 아예 여성은 대통령 선거에 나올 자격조차 주지않는다는 점, 돌팔매시에 금방 죽이지 않되 서서히 고통을 줘 가면서 죽이는 방법으로서 신체의 한 부분을 공략한다는 점에선 간혹 신문에서 조차도 나오는 기사지만 실제로 이런 일이 지금도 행해지고 있단 점에서 종교의 무시한 권력을 새삼 느끼게된다. 하지만 비단 이런 비관적인 것만은 아닌 것이 이란의 라프산자니의 딸이 이슬람 여성들만 출전해서 경기를 이룰 수 있게 도전해 본 이슬람여성 운동경기대회, 전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의 부인인 미국인 출신 누르왕비의 정계활동에 맞춘 여성에대한 정책, 미국에서 공부 하다가 만난 이슬람 남편을 둔 미국여성이 어떻게 자신이 이슬람으로 개종해서 시엄마와 남편, 그리고 아이들과 친정인 미국을 오가면서 절충된 삶을 살고 있는지도 보여줌으로써 우리의 일부 불편한 진실을 다소나마 안정을 유지시켜준다. 하지만 작가는 말한다. 일부 진보적인 이슬람 학자들이 주장하는 돌팔매라든가 할례의 관습은 이슬람에서 행하라고 한 적이 없는 일라고 하면서 정작 그들은 그것이 사실은 이슬람 태동 전부터 아프리카에서 행해왔던 관습이었음을 왜 주장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자신이 영국에 있을 때 남편으로부터 죽임을 당한 여성의 재판을 보면서 같은 영국인이라도 자신이 겪어 본 중동의 실정을 알지 못하는 한 재판의 결정 상황은 180도 다른 방향으로 진행 될 수 있단 점에는 문화의 이해와 종교가 세속에 얼만큼의 관여를 했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또 한 작가는 성기절제, 은둔생활, 베일 사용만이 여성을 위한 일이 아닌 이것을 행함으로써 여성의 욕망을 통제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숨어있다는 것을 말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성이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할 수 있는 극히 제한적인 경우를 두고서도 불평등하며 남편으로 부터 이혼하겠단 말을 세 번 들으면 이혼 성립이 된다는 것 자체가 남녀 불평등의 연장선에 있다고 말한다. 신문을 보니 중동에 이어서 중아아시아 이슬람권에서도 민주화의 바람이 일어날 조짐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정작 서방세계들과 러시아는 전전긍긍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데, 천연가스를 둘러싼 자원의 이해 분배에 있어서 자칫 자국의 해가 되지 않을까 한다는 점에서란다.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이슬람의 정작 고유한 좋은 교리와 그것에 맞춰서 살아간다면 이처럼 여성이 고통받는 상황이 오지 않을 수도 있었을 이 시대의 참 설명만으론 좀체 쉽게 결정을 내리기 쉽지 않단 생각이 들게한다. 내부의 비판없이는 잘못된 관행자체를 고칠 수 없는 폐쇄된 이슬람이란 사회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의삶은 행복해 질 수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투쟁의 무기는 결국 폭탄, 총, 대규모의 검거가 아닌 대화란 말이 입가에 맴도는 것은 어쩌면 우리의 조상들이 살아왔던 조선시대의 가풍에 젖어서 열녀문을 연상케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슬람에 있어서 명예살인이 용납되는 한 여성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남성의 지도하에 끌려다닐 수 밖에 없는 한계에 도달할 것이고 이런 고리가 근절되지 않는 한 오늘도 여전히 이슬람의 여성들은 자신의 딸에게까지, 아니 그 이후의 세대까지 결코 자유를 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조금만 눈을 돌려보면 생각의차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이슬람의경전인 꾸란- 이 꾸란의 내용을 어떤 식으로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여성과 남성의 공존시대가 존재 할 수 있을 터인 지금의 현실을 고려한다면 비록 조그만 시도라 할 지라도 안해본 것과는 또 다른 새로운 희망의 불씨를 집힌 여성들만을 위한 제도가 확층되었음 하는 바램을 갖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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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보면 흠짓하게 되는 표지의 이 책은, 이슬람 문화권에서 10년 이상 기자 생활을 한 이의 책이다. 역사, 정치, 문화 등을 아우르면서 '여성주의적'인 관점으로 접근을 하는데, 역시 읽다보면 생각이 많아진다. 왜 우리는 이슬람에 대해 그토록 무지한 걸까? 왜 종교는 사람을 이렇게 극단적으로 만드는 걸까?
나는 하미데에게 호메이니가 잘못된 종교적 결정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지 물어보았다. "물론 오점 없는 인간은 없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내가 그분의 파트와를 따랐는데 그게 잘못된 거라면, 그러니까 그 분이 죄 없는 어떤 사람을 죽이라고 하셔서 내가 죽였다면, 죽은 그 사람은 천국에 갈 거예요. 살인죄는 살인을 저지른 내가 아니라 그 파트와를 내려보낸 사람의 몫인 거고요."
이슬람을 다룬 서구 쪽의 책이 그러하지만, 이 책은 르포답게 더 생생하고 잔인한 장면들이 묘사되어 있기도 하다. 하지만 저자는 10년을 넘게 '생활'했던 사람답게,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더 안 쪽으로 들어가고 있다. '기자'라는 신분을 망각하지 않는 '냉정함' 또한 그 '생활'에서 생기는 것이리라.
식사 중의 대화는 기자에게 꿈같은 일이면서도 동시에 최악의 악몽이기도 했다. 거기엔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 제대로 알고 있고 이야기할 준비도 되어 있는 정보원이 있는 셈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이야기는 비공개를 전제로 한다. 자기 잇속만 챙기려는 사람들만 만나다가 이런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뭔가 진실에 가까워진 듯한 느낌이 든다. 바로 그런 점에서 이런 자리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것은 위험하다.
이 책이 인상 깊은 것은 베일을 벗고 서구로 넘어와 목소리를 높이는 쪽보다는, 베일 안의 여성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이다. 미시적 관점에서, 이러한 접근은 매우 중요하다. '페르세폴리스'에서 볼 수 있듯이, 차도르를 쓰는 방식 하나에서도 저항과 순응이 갈린다.
모로코에서 파티마 메르시가 보여준 코란에 대한 해석은 이슬람이 평등과 인간존엄의 종교임을 일깨우는 어마어마한 사례였다. 다만 그동안 이슬람의 메시지는 권력자들의 주관적인 여성혐오 때문에 오랫동안 묻혀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녀의 저작들은 모로코의 사원에서보다는 서양의 대학에서 훨씬 더 많이 읽힌다. 하디스에 대한 그녀의 연구가 얼마나 정확하든지 간에 남성 중심의 이슬람 사회는 베일을 쓰지 않는, 쓰더라도 자신의 경건함을 과시하려고만 하는 무슬림 여성의 학식에 귀 기울일 의사가 전혀 없어 보인다. 아마 이런 이유로 나는 독실한 이슬람 여성들이 검은 차도르 속에 숨기고 있는 긍정적인 변화에 가장 큰 희망을 품게 된 것 같다. 아무리 편협한 근본주의자라 하더라도 호메이니의 딸 자라 모스타파비나 라프산자니의 딸 파에제 하셰미 같은, 이슬람의 신용장이나 마찬가지인 여성들을 비난하지는 못한다. 이들은 명백히 종교적 원칙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에 여성의 권리에 대한 주장도 펼칠 수 있다. 지금까지 이들은 여성이 더 큰 정치적 목소리를 내고 직업을 가질 기회를 평등하게 얻을 수 있도록 하며 스포츠에 참여할 권리를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하는, 제한된 경우에만 자신의 지위를 이용했다. 분명한 것은 이들이 절대 전통의 담을 허물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슬람의 논리 안에서 베일이나 일부다처제에 반대하는 주장을 펼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더라도 절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전통의 벽 안에서 이슬람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모욕과 착취를 감수하며 살아가는 여성들을 위해 훨씬 더 안전한 피난처를 만들 수 있다.
이 부분을 놓고 논란의 여지는 굉장히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 '논란'이야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우리'라는 말이 가능하다면 말이다.
그 회의(1993년 제노바 국제인권선언회의)에서는 인권의 보편성이라는 개념이 널리 인정되었고, 그래서 인권헌장도 수정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인권헌장은 아직도 성기를 절제당하고 어쩔 수 없이 고립된 생활을 하며 선거권을 박탈당한 여성들에게 별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우리의 싸움이기는 한 걸까? 나는 정신을 시험해보는 의미에서 항상 젠더를 바꿔놓고 생각해보려고 한다. 만일 9,000만 명쯤 되는 어린 남자아이들이 페니스를 절단당할 상황에 놓여 있다면 사람들을 그걸 막기 위한 행동을 했을까?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이 문제는 이슬람 문화권에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디에서나 그렇다. 잊을만하면 터지고 터지는 **녀 사건들을 보라. 과연 이것이 젠더의 문제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미국에는 600만 명의 무슬림 여성들이 있고 이들 중 절반은 미국에서 태어났다. 이슬람은 미국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종교다. 미국의 무슬림 중에는 아랍인보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두 배 정도 많다. 하지만 9.11 이후 몇 주 동안 무슬림 여성들은 눈에 띄는 것이 너무 두려운 나머지 스카프를 벗고 다니거나 집 안에 숨어 지냈다. 한 사회의 트라우마로 인한 공격을 받는 것은 이번에도 여성들이었다.
이슬람 문화권에서 자행되는 각종 인권유린에 분노하면서도, 차도르 속 여성들과 소통하고 동지애를 느끼는 이 책은 특별하다. 저자가 스스로 인정하듯이 처음 이 문화권을 접할 때 저자도 분노가 끓어올랐다고 한다. 하지만 이젠 '복잡한 감정'을 느낀다고 토로한다. 폭로보다는 소통에 지향을 두기 때문인걸까.
물론 되려 자문화(서구문화)에 대한 역사적 인식이 부족한 부분도 보이고, 다수의 이슬람 국가가 폐쇄적으로 돌아서게 된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미국 등의 서구 제국주의 때문임을 간과하는 부분도 있다. (에필로그에 나오듯, 저자도 그것을 충분히 인정하지만 책의 본문에 그런 시각이 반영된 부분은 찾기 힘들다.) 게다가 이 책(영문판)이 처음 나온 것이 1995년인데, 현재의 이슬람도 이러할 것이라는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도 있다. 또 다시, 이슬람 사회에는 '역사'가 없다는 착각을 강화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에 '역자의 말'이 없다는 건, 정말 큰 아쉬움이다. 그리고 '믿음에 갇힌 여자들'이라는 부제도 저자의 기본적인 태도와 약간 핀트가 맞지 않는다는 생각도 든다. (이 책의 원제는 'Nine parts of desire - The hidden world of Islamic women'이다.)
이런 아쉬움들이 있지만, 이 아쉬움들이 하나의 논쟁점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교재로서도 탁월한 책이다. 이슬람 문화에 대한 것보다도, 오히려 '여성주의'에 대한 논쟁이 필요할 때 이 책은 최고의 텍스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문화권에 대한 나의 이해도가 현저히 낮아 책을 읽는 속도가 더디긴 했지만, 굉장히 좋은 책이었다. 이슬람 여성들의 생생한 모습을 접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 또, 근본과 원칙에 집착할 수록 수많은 편법을 만들어낼 뿐이라는 사실을 재확인할 수 있는 기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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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보는 프로그램 <이웃집 찰스>에는 코란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가는 무슬림 출연자들이 나와서 무슬림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가 있다. 할랄, 여성할례,히잡,차도르, 라마단 등 무슬림을 상징하는 용어들, 그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궁금했으며,
<이웃집 칠스> 출연자중 마흐무드와 13살 소녀 나히드 가족이 생각났다.이슬람 율법에 따라 살아가는 그들은 매일 정해진
시간에 기도를 올리며, 라마단을 꼭키ㅁ키면서 코란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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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을 맞아 직장에서 일하면서 연일 야근에 출장으로 이어져 그래도 그냥 잠들기 아쉬워 읽은 책을 미처 독후감도 남기지 못한 채 1달여가 지나갔다. 이제야 당직하면서 잠깐 짬을 내 이 책에 대한 느낌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을 때 남기고자 글을 쓴다. 신문에서 이 책 소개를 보는 순간, 솔직히 책 제목이 끌렸다. 다른 어떤 문화보다 꽁꽁 싸맨 여성들에게 욕망이 있다니, 뭐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잠깐 맛보기로 읽은 앞부분도 이슬람 문화권에서 혼자 호텔에 투숙할 수 없어 곤란을 겪는 장면을 보니 이슬람을 직접 겪은 사람이 쓴 믿음이 갔다. 보통의 사람들에게 이슬람의 이미지는 과격 아니면 신비일 것이다. 최근의 IS(이슬람국가)가 하는 짓을 보면 이슬람이 이름으로 사람을 예사로 죽이고-그것도 목을 쳐서- “알라후 이크바르”를 외치거나 9/11처럼 탈레반이 이끄는 테러리스트이거나 차도르로 가린 매력적인 눈동자 같은 이미지의 파편들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고, 사실 대부분은 관심도 지식도 없다. 올해 상반기에 향교에서 문화강좌를 진행하던 교수-가톨릭신자였다-가 이슬람을 가리켜 ‘이상한 걸 믿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수업 후에 조용히 ‘이슬람에 대해 좀 더 공부를 하셔야 할 것 같다’고 말한 나도 사실은 종교 자체에 대한 관심 때문에 세계종교사와 쿠란, 김태권의 십자군전쟁 등을 통한 자질구레한 지식 밖에 없었다. 그건 실제 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의 실생활을 알 기회가 없었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버스타고 여행하다 버스가 잠시 서는 동안에 버스에서 내려 길바닥에서 절을 하는 이슬람교도들을 몇 번 보았다. 그 때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는데도 기도하는 게 내게는 사람들의 시선에 아랑곳 않고 고유의 복장을 하고 있는 아미시들처럼 신념을 지키는 사람으로 보여 대단해 보였다. 제럴린 브룩스라는 호주 출신으로 미국에 사는 유대인여성이 이슬람 세계를 자신의 눈으로 들여다보고 경험하면서 그 모든 것들을 아우르는 이슬람이 무엇인가에 대해 쓴 책이다. 이 책을 읽다보면 실제 라마단 기간 동안 사람들이 무얼 먹으며 어떤 생활을 하는지, 이슬람에 대해 새롭게 알게된 것들이 여러 가지다. 아랍어는 여러 의미로 번역될 수 있다는 것. “표현은 분명해도 메시지가 뒤섞여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 “샤리아는 글자 그대로 풀면 ‘샘으로 가는 길’”이어서 “이슬람 법을 향한 바른 길을 의미한다”는 것. 그 무시무시한 호메이니가 집에서는 자상한 아버지이자 좋은 남편이었다는 것. 호메이니의 부인은 머리를 오렌지색으로 염색하고 있었다는 것. 이슬람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수니파는 “‘전통’에 해당하는 아랍어가 순나이기 때문”에 시작되었고 시아파는 “쉬아트 알리, 즉 ‘알리의 신봉자’”로 시작하여 “처음부터 주류에 대항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권력자들에게 문제를 제기하고 필요한 경우 대항하여 반란을 도모하는 것을 사명으로 여겼다”는 것. 무함마드가 며느리와 결혼했는데-양아들의 부인이긴 하지만- 무함마드가 자기 부인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을 알게된 아들이 짐짓 이혼을 해서 결혼하도록 배려했다니! 헤즈볼라가 정작 여성들에게 이슬람식 복장을 입도록 권하면서 다른 한편으론 “히잡 수요를 이용해 돈을 벌었다”는 것. 등등. 여성들의 경제생활, 아니 일체의 집밖생활을 막는 이슬람이 무함마드의 첫 번째 아내는 무역을 했고, 두 번째 아내는 가죽제품을 만들어 팔았고, 딸인 파티마는 일과 공부를 번갈아 했다.-여기서 “파티마는 자신이 일할 때 노예소녀에게는 공부할 시간을 주었다.”는 감동적인 문구를 발견했다.- 이슬람의 좋은 점들도 눈여겨 보려한 저자의 노력이 보인다. 새로운 것을 알게되면서 정작 이슬람의 이름으로 여성들을 억압하는 장치들이 도처에 남아있고, 또 이슬람이 정권을 잡은 지역에선 구습이 발흥하는 것들을 프리랜서 기자로서 목격하고 느낀 저자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비이슬람권의 시선에 동의하지도 않는다. 저자의 결론 “두 문화권 모두 여성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슬람에선 여성의 성욕에 대해 인정하면서 그것 때문에 여성을 더 가리려 하고, “가톨릭에서 사회적 무질서를 막아낼 책임을 여성에게 지우는 것은 여성이 성적으로 적극적이지 않다고 인식하기 때문”이라면서 결국 “중동에서는 어떤 문제가 악화될 조짐을 보일 때마다 여성들이 고통을 가장 많이 받았다”고 간파한다. 그렇다면 결국 각각 다른 종교, 다른 조건들을 내세웠을 뿐 각종 제약을 가하고 책임을 덮어씌우면서 여성들을 남성보다 힘든 상황에 놓이게 만들면서 남성들에게 위로와 위안을 건네는 게 종교의 역할이다. 여성들을 위하기 때문에 집안에 있도록 한다는 이슬람의 기치를 내건 보코하람이 공부하는 여학생들을 끌어다가 노예시장에 팔아먹고, 쿠르드 지역에선 강간담당자를 고용해서까지 여성들을 강간하며 그 기름 많이 나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정작 여성들은 차를 운전하지 못한다니 도대체 대의명분과 실제는 항상 일치할 수 없는 것인가. 그런데, 대체로 정말 객관적인 자세를 견지하려 한 저자의 노력을 인정하면서도 행간에서 읽히는 약간의 유대인으로서의 상대적 우월감은 내가 아마 동양인으로서 또 또다른 문화권에 속하는 사람이라 느낄 수 있다. 완전한 객관은 사실 존재할 수 없으니까.
한창 바쁜 때라 직장생활이 힘겨워질 무렵 이 책 속에 밖에 나가 일하고 싶어도 할 수 없고 차를 두고도 운전하지 못하며 한숨 짓는 이슬람 여성들이 그만 투덜거리고 일할 수 있는 권리를 누리라고 말하는 것 같아 조금 힘이 났다. 오자는 한 군데. 284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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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란 무엇인가... 다시 한번 의문을 품게 하는책...
종교란게 불확실한 세상에서 조금이나마 위안받고자 해서 만들어진 것일텐데 거꾸로 그 믿음에 갇혀 학대받고 희생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이슬람권에서의 여성학대에 대한 내용을 읽으면서 영화 도가니에서 범인인 교장 행정실장 교회 사람들이 법원앞에서 그들을 지지하며 피해자들한테 어린악마라고 소리치던 장면이 생각났다
이슬람교 뿐만 아니라 어떤 종교든 자신들의 종교에 대한 성찰 없는 폐쇄적이고 무조건적인 믿음은 안타깝고 또 위험한 일인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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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어디선가 (UN 산하기구였던가?) 지구상에 남녀평등이 이루어지기까지 약 1000년 정도 걸릴 것으로 추산한다는 것을 보고, 에이, 설마 그렇게 오래 걸리려고? 하는 생각을 언뜻 했었다. 하지만 시동생이 물에 빠진 형수를 구하기 위해 손을 잡아도 되는가 하는 논쟁(-.-)이 있어왔듯, 유교가 여성들을 감금하고 억누르고 '정조'를 잃었을 때 자살로 몰아가고 과부에게 자살을 권장하는 역할을 해왔다. 이슬람 꼰대들은 명예살해를 저지르는 반면, 우리의 유림 할부지들은 동성동본 결혼 허용이나 호주제 폐지가 이루어지면 단체로 자살하겠다고 위협한다는 점에서 유림 할부지들이 약간이라도 낫다고나 할까. 여성할례에 소름끼친다면, 문득 돌이켜보는 것이 좋겠다. 수백만의 여성들이 자신의 얼굴과 팔다리에 자발적으로 칼을 대는 남한 사회는 어떤가? 그 중 일부는 건강에 극히 해로우며 생명을 위협하기도 하는 성형수술이다. 미국에는 섹스 앤 더 시티에 나오는 킬힐을 신기 위해 발뼈를 잘라내는 성형수술도 성행하고 있다. 이것은 야만적이지 않은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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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여성의 숨겨진 욕망>은 호주계 미국인이자 유대교도이기도 한 언론인 제럴딘 브룩스가 1990년대에 중동의 이슬람 국가들에서 만난 이슬람 여성들을 통해 본 이슬람 문화에 대한 이해를 담고 있다. 이슬람권 국가, 문화는 우리나라에는 생소하고 별 관심도 못 받고 있는데, 나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간헐적으로 언론에 비춰진 무슬림의 모습은 극단적이거나 지나치게 종교적이라 낯설고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많았고, 알려진 것과는 달리 대부분의 무슬림은 선량하고 극단주의자의 비중은 그리 크지 않다는 정도밖에 알지 못하였다. 그러던 차에 이 책이 발간된 걸 알게 되었고, 억압받고 베일에 가려져 있는 여성들의 삶과 그들의 생각에 대해 알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저자가 직접 그들 속으로 들어가 이야기를 나누고 경험을 공유하면서 느낀 생각을 정리한 것이니, 필연적으로 저자 자신의 견해가 녹아 있을 수밖에 없겠지만 몇 년간 왕비부터 지식인, 체육인, 평범한 여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회적 위치, 상황에 처했던 이슬람 여성들과의 만남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어 그들의 삶을 보다 구체적으로 들여다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다.
솔직히 이 책을 읽는 내내 여성의 입장에선 이슬람 문화의 긍정적인 부분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우리나라도 가부장적인 성리학적 지배질서로 인해 남녀간 불평등이 심하였고 아직까지 잔재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이슬람 문화에는 남녀 차별적인, 어이없는 규율이 너무 많아서 나열하기도 벅찰 정도이다. 종교가 생활의 중심이며 전부인데, 왜 여자아이는 9살부터 히잡을 쓰고 새벽기도를 하고 라마단 낮 시간에 단식을 해야 되는데, 남자아이는 성숙이 더디다는 이유로 15살까지 종교적 책임이 유예되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남녀간의 심각한 불평등한 관계는 둘째치고 생존이 위협받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진보적 무슬림들이 이러한 여성 폭력이나 루슈디 파트와에 대한 광기는 이슬람의 잡음으로 보고 이슬람 신앙과 별개로 봐야한다고 주장하는데, 설득력이 떨어진다. 반대되는 의견을 내놓는다고 공공연하게 살해 위협을 하고 실제로 살해하는 일이 자행되고 있는데, 일부 근본주의자들의 소행일 뿐이라고 외면해 버리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인가? 암묵적 동조라고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그리고 내 보기엔 시도 때도 없이 내려왔던, 신의 메세지라고 하는 코란도 인간이 기록한 것에 불과한데, 그토록 그것에 모든 행동과 생각을 맞추려고 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반여성적인 풍습은 무엇이든 맹렬하게 받아 들였고, 무함마드의 아내들에게만 적용되던 것을 전체 여성으로 확장해 집 안에 유폐시켜 버렸다. 남성들의 성욕 억제를 위해서 히잡이니 차도르니 하는 것들을 뒤집어 써야 했고, 그토록 중시하는 기도 시간에도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남성을 유혹할 수 있으므로 -_-)운전도 하지 못하고, 남편 또는 아들의 허락없이는 여행을 할 수도 없고 남성 보호자 없이는 외출도 하지 못한다. 그러한 것들이 여성을 보호하고(대체 무엇으로부터?) 이슬람 공동체를 유지 시켜준다고 믿는다. 일부다처제와 같은 것은 절대 포기하지 못하면서 보호랍시고 모든 자유를 빼앗는다. 그게 안전한 거라고. 해외에서 오랫동안 유학하면서 생활하여 사고가 깨어 있을 것으로 기대한 지식인층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들도 결국 남자니깐 자신들이 가진 기득권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러한 가운데 포기하지 않고 코란이나 하디스(예언자 무함마드의 말씀)에서 근거를 찾고 온건한 방식으로(그럼에도 불구하고 살해 위협을 받기도 하지만) 여성의 권리를 확장 시키기 위해 노력한 많은 여성들이 있었기에 조금씩 개선되어 가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어 보인다.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저자의 가정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매년 9천만명에 이르는 어린 소년들의 성기가 절단되고 있는 상황이었다면 오래 전에 이슬람 종교 지도자들(이들은 여성의 성기 절제의 악습이 이슬람의 유산이 아니라고 항변할 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고 방관하고 있다.)의 적극적인 반대의 움직임으로 인하여 악습이 폐지되고, 이슬람 문화권에서 여성이 남성에게 절대적으로 억압되고 복종되어 있는 상황이 흑인과 백인으로 바뀌었다면 미국에서 사우디 아라비아를 비롯한 이슬람 근본주의가 뿌리 깊은 곳에 대한 무역 제재가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근본주의자뿐 아니라 진보적인 무슬림들이 보여주는 행태도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명예살인이나 성기 절제와 같은 인권 유린이 자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그들이 말하는, 공동체의 부활과 이슬람 혁명을 성공적으로 정착시킨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최우선적으로 그것부터 바로 잡아야 되는 것 아닌가.
종교는 믿음의 영역이라서 이성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존재한다. 따라서 다소 불합리해 보이더라도 이해해 줘야 할 부분이 있지만, 인간의 기본적인 인권마저 무시하고 타종교에 대해 지나치게 독선적인 태도를 보여서는 결코 공감을 얻을 수 없음을 깨달았으면 좋겠다. 또한 밸리댄스를 금하는 등의 시시콜콜한 금기사항을 늘려간다고 해서 그 사회가 안전하고 살기 좋아진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다. 도덕적 경찰국가는 예술적이고 창의적인 사고의 자유로운 발현을 억제하고 개인과 사회의 발전에 악영향을 미칠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녀들이 히잡을 쓰는 것도, 쓰지 않는 것도 자유롭게 본인이 선택할 수 있는 날이 빨리 오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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