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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가 최정우(혹은 람혼이라는 블로거)에게 기대하는 것은 무엇일까. 또 이 책에 바라는 것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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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보기가 힘들어진 시절이다. '요즘'이라고 쓰려했으나 그 기간이 아주 오래된 것 같기에 '시절'이라고 해야 맞을 것 같다. 그렇게 도시의 밤하늘에서 별이 사라진 것을 보면서 한동안 품었던 의심이 하나 있었다. 늘 불야성을 이루고 있는 도시의 불빛들로 인해 이렇게 별이 보이지 않게 된 것이 혹시 이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음모가 아닐까 하는. 자본주의에서 발현된 제국주의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언제나 멈추지 않는 식욕과 모든 것을 자신의 수중에 넣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탐욕을 가진 자본주의가 오로지 자기만이 완결된 체제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밤하늘의 별들을 모조리 '보이지 않게' 만들어버린 것은 아닌지 하고 말이다. 즉, 내가 여기서 생각하는 밤하늘의 별들은 단순히 낭만적 정서를 환기시키는 매개물로서가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넘어선 그렇게 또 다른 세상이 존재할 수도 있구나 하는 가능성의 상징인 것이다. 체제의 그 '너머'를 사유할 수 있게 해 주는 존재. 이 체제의 외곽에서, 그렇게 바깥에서 다시금 그 체제를 돌이켜볼 수 있게 해 주는 존재로서의 '별들'이다. 고개만 올려 보면 늘 거기 있는 별들은 가장 손쉽게 내가 있는 이 자리를 하나의 '객체'로 사유할 수 있는 여지를 전해줄 수 있었다. 그건 '민족주의'를 만들면서까지 체제내의 노동력과 그로부터의 이윤을 끝없이 빨아들여야했을 자본주의로서는 그 '손쉬움' 때문에 가장 커다란 위협이었을 것이다. 끝없이 흡혈하기 위해서는 그 체제의 사람들이 오로지 이 체제가 '종국적인 것'임을 깨달을 필요가 있으니까 말이다. 마치 리처드 애덤스의 소설 '워터십 타운의 열 한마리의 토끼'에 나오는 워터십 타운에 살고 있는 토끼들처럼 그 바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이 늘 토끼들을 식재료로 쓸 수 있듯이 말이다. 때문에 아마도, 어쩌면 틀림없이, 자본주의는 도시의 빛으로 장벽을 쳐서 별들의 존재를 가려버렸을 것이다. 사람들이 다른 가능성을 꿈꾸지 못하도록. 그렇게 자신의 삶이 다른 모습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도록. 오로지 이 체제의 규율만이, 그 체제가 요구하는 인간이 되는 것이 가능한 삶의 방식의 전부라는 것을 납득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이제 자연적으로 이 '바깥'을 사유할 수 있는 여지는 거의 사라졌다. 도시는 끊임없이 빛으로, 콘크리트로 그러한 사유를 줄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의 존재들을 퇴출시키고 있다. 해서 우리는 이제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학자들 처럼 활자를 통해 '그 너머' 혹은 '여기의 바깥'을 사유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물론 다른 가능한 방법들이 여러가지 있겠지만 '별들'이 가지고 있었던 가장 손쉬운 방법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그런데, 왜 우리는 '바깥'을 사유해야 하는가? 그것은 오로지 '내부'에서만 가지고는 자신의 존재가 어디에 자리하고 있는지 제대로 파악하기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왜냐면 내가 속한 이 내부란 것도 어떤 특정한 역사적 시점에 태어난 인위적인 구성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모든 인위적인 구성물이라는 것은 특정한 의도에 따라서 작위적으로 구성된 것들이다. 따라서 그것들엔 그 의도에 봉사토록 하는 이데올로기가 은밀하지만 필연적으로 끼어든다. 따라서 우리가 아무리 그 내부에서 나 자신을 보려해도 이미 작동되고 있는 이데올로기를 통해서 밖에는 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즉, 우리는 항상 누가 내게 씌워준 누군가의 시력에 맞춘 안경을 가지고 사물을 그리고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내가 알고 있는 것, 혹은 가지고 있는 욕망 등등은 순전히 나의 것이 아닐 수 있다. 그렇게 길지도 않은 인생을 우리는 어쩌면 오로지 남(라캉이 말하는 '대타자'와도 같은)의 욕망을 채우려 살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참된 모습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바로 거기에 '바깥'의 사유는 커다란 도움을 줄 수 있다. 진정한 모습은 '안'과 '바깥'을 모조리 바라볼 수 있을 때 온전히 파악될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근데, 이것은 다만 나를 제대로 바라보기에만 국한된 문제는 아닌 것 같다. 혹시 우리가 리처드 애덤스 소설에 나오는 '워터십 타운'에 살고 있는 토끼들이라면 이것은 그야말로 생존과도 직결된 문제가 아닌가. 해서, 어쩌면 절박한 심정으로 그 사유의 계기를 찾고 싶은 요즘, 불현듯 한 권의 책이 '역병'처럼 번지둣 내게로 왔다. 그것이 바로 이 책, '사유의 악보'이다. 이 책은 인문서로 나왔지만 스스로 인문서가 되기를 거부한다. 아니 저자 자신의 서문이라 할 만한 서곡을 읽어보면 널리 이해되는 것도 거부한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유일하게 이해할 '소수'를 위해 메뉴얼, 그렇게 그들을 위한 '악보'로 사용되기를 희망한다. 악보는 해석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것은 물질로 표현된 범위 안에서 모든 주관적인 해석들을 허용한다. 그건은 마치 정해진 한글의 자음과 모음의 갯수를 가지고 무수한 글자들을 만드는 것과도 같다. 여기 내가 몇 개의 악보들처럼 기보하는 이러한 '사유'의 조각들은 그것들을 서로 맞추고 조율하여 새롭게 연주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 펼쳐져있고 흩뿌려져 있다.(p.8) 그렇게 이 책은 널리 다양한 해석을 권장하고 새롭게 다양하게 창출된 의미들이 널리 창궐되기를 원한다. 그렇게 스스로 존재하면서도 종국엔 보이지 않게 되기를 원한다. 그런데 왜 이토록 스스로 그 자취를 감추려는 것일까? 이건 다음의 글에서 어느 정도 감지할 수 있다. 이 모든 글들은 어쩌면 오히려 소위 인문학적 사유나 철학적 깊이의 저 진부하고도 암묵적인 강요에 대한 강한 의문, 곧 우리에게 사유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 그러나 어떤 방식으로? 누군가가 우리에게 원하는 방식으로? - 자들의 저 역겨운 교훈과 무의식적 이데올로기 그 자체를 어떻게 사유하고 전복해야 하는가 하는 극단적으로 실천적인 질문으로 부터 탄생한 기형과 잡종의 것들이다.(p.7) 여기에서 보듯이 이 책 자체가 그러한 사유의 강요로 부터 이탈하기 위한 실천적 산물이었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근원이 이러했으니, 어떻게 독자에게 그러한 것을 강요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이 책은 스스로,관람되기를 원하는 일종의 유물전시장에 그치기를 원한다. 그저 관람객들이 와서 살펴보고 개인적 감상만을 가지고 갈 뿐인 그런 전시장. 그는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는다. 그저 볼 수 있도록 늘어놓을 뿐. 혹 개안이라도 하는 관람객이 있다면 진심으로 행복해 하면서... 나는 여기서 일부러 '유물전시장'이란 비유를 썼는데 그것은 다음의 말 때문이다. 우리의 시대에는 어떤 '새로운 사유의 프로그램'이 필요하며 그 새로운 프로그램은 '새로운 사유의 가동'으로부터 출발된다는, 일견 신선해보이지만 또한 지극히 오래된 어떤 믿음, 내가 나의 글쓰기로써 도전하고 도발하고 싶었던 믿음은 바로 이것이었다. (...) 오히려 이 글들은 어쩌면 그 '새로움'이라는 자신만만하고 희망찬 환상에 도전하기 위해, 혹은 저' 시대' 또는 '세대'라고 하는 어떤 구성된 집단적 주체와 인위적 시공간에 대해 오히려 어떤 도발적 도박과 내재적 내기를 걸기 위해 반대로 어떤 낡음으로 부터, 어떤 폐허로부터, 어떤 잔해와 잔재로부터 출발한다. 이 글들은 탈근대로의 여정을 위해 근대성의 유적과 지층을 파헤치고 이론 이후로의 이행을 위해 이론의 잔여와 여백으로 돌아간다. 이것이 바로 내가 이 글들을 '사유'의 조각들이 아니라 사유의 '조각들'로 명명하는 이유이다. 이 글들은 기형과 잡종의 조각난 육체들이다.(p.8) 그렇게 이 책은 일부러 과거의 잔재들을 훑는다. 왜냐하면 이 책이 의문시하는 것은 과거와 새로움을 나누는 그 '사고' 자체이기 때문이다. '3악장, 미학으로 (재)생산되지 않는 미학'에서 알튀세르가 했던 것, 혹은 자크 랑시에르의 '감각적인 분배' 나 바디우의 '비미학'에서 했던 것 처럼 우리에게 익숙하게 혹은 전형적으로 남아있는 모든 사유의 체계들을 의문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은 하나의 책이 일관된 논리로 이어져야 한다는 통념에도 반대한다. 그렇게 스스로 마땅히 기형과 잡종의 파편이 된다. 이 책은 조각난 육체들이다. 그렇게 어쩌면 의도적으로 아무런 접점을 만들지 않는다. 1악장 ,폭력의 이데올로기에서 종곡, 중독에의 권유까지, 그렇게 저자 자신의 말대로 이 책은 그 어떤 순서로 읽어도 무방하리 만큼 내용적으로 독립적이다. 게다가 스타일에 있어서도 여러가지 글쓰기가 변주되고 있다. 특히나 '7악장, 불가능한 대화를 위한 자동번역기' 같은 경우 '거리에 붙어 있던 한 벽보: 옮길 수 없는 것을 옮겨 적기'에서의 뛰어쓰기의 실종이나 '발전기를 돌릴수록 더 어두워지는 밤: 헤어스탈일에 관한 자기 성찰의 단상'의 마침표의 생략 같은 것이 특히 그렇다. 그렇게 이 책들은 '자고로, 책은, 글은 이래 저래야 한다는'등의 통념들을 한없이 미끄러지며 빠져나간다. 그래서 얼른 이 책들은 아이 앞에 무수히 쏟아져 있는 레고 블럭과도 같아 보인다. 아마도 아이는 그 무수한 조각들 앞에서 당황할 터이지만 언젠가는 - 왜냐면 아무리 무수한 조각이라 하더라도 그 조각을 이어붙이고 싶은 욕망을 참기가 힘드므로. '테트리스'게임이 정확히 인간의 무의식에 호소하듯이 우리 인간이란 아무래도 혼돈 보다는 질서를 좋아하므로 - 하나하나 조각을 이어붙이고 연결해서 자신이 만들고 싶은 무언가를 만들어 갈 것이다. 그렇게 결국은 나도 이 책 전체를 가로지르는 어떤 흐름 같은 것을 물론 만들게 되었다. 이것은 분명 오독일지 모르지만 저자는 어차피 오독의 가능성을 더 원하고 있는 것 같으므로 상관없지 않을까. 내가 짓고 있는 혹은 연주하고 있는 어떤 조형이나 선율의 바탕은 하나의 느낌인데 이 책만큼 집요하게 그 어디서든 '불가능성'을 추구하는 책이 있었던가 하는 것이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인간은 근원적으로 혼돈 보다는 질서를 원하는데, 이 책은 오히려 계속적으로 질서에다 균열을 만들고 가능성의 영역을 불가능성의 구멍으로 빠뜨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야말로 '불가능성의 블랙홀'. 1악장, '폭력의 이데올로기 비판을 위하여'와 2악장 '페티시즘과 불가능성의 윤리'에서는 윤리가 그야말로 불가능성의 영역에서만 가능하다고 말하고 3악장,'미학으로 (재)생산되지 않는 미학'에서는 알튀세의 연극 비평을 중심으로 미학 역시 그 진정성은 불가능성의 영역 위에서 가능하다고 말한다. 4악장, '문학적 분류법을 위한 야구 이야기'에서는 야구를 소재로 한 문학을 중심으로 책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는 불가능성에서 시작해 이사만루 상황에서 무타무주로 끝내는 방법의 불가능성을 지나 근대비평에의 불가능성에로까지 나아간다. 이 뒤로도 우리는 그 어디서든 끊임없이 불가능성의 영역들을 볼 수 있는데, 스스로 기형과 잡종의 조각들로 자처하는 이 책이 왜 이다지도 '불가능성'을 집요하게 추구하고 있는 것인지 그 까닭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 호기심이 나 스스로 블록 짓기를 감행하게 했는데 결국 내가 만들어낸 것은 이 불가능성이 내포하고 있는 저의가 혹시 우리가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들을, 그 자신이 언급했던 것 처럼, 혹시 모조리 전복시키기 위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이다. 예를 들어, 1악장에서 그가 바타유를 끌어와 폭력에 대해 말하는 것은 한 때 우리가 모든 사회 문제를 소통의 부재에서 찾았듯이 그렇게 소통하는 것을 중요하다고 여겼던 우리의 생각을 전복시키기 위해서였고 2악장에서 굳이 페티시즘을 이끌고 오는 것도 우리가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그러한 모든 가치들 역시도 사실은 우리가 그 가치들을 맹목적인 페티시즘에 빠져서 그런 것은 아니었을지 의심하게 만드는 것이다. 즉, 바타유의 말대로 우리가 생각하는 소통이란 타자를 우리의 입장에 맞도로 바꾸는 폭력적 훼손에 다름 아니며 2악장에서 윤리의 가능조건으로 말하고 있는 페티시즘적 부인도 사실은 우리가 이미 긍정하고 있는 가치들이 관념적인 것들임을 겨냥하고 직립보행이나 바타유의 '유물론'에서 이끌어나온 새로인 유물론적 윤리들을 정초하기 위한 희생물로써 쏘는 총알인 것이다.(즉, 여기서 페티시즘 부인이 기능하는 것은 지금 이 책이 서론처럼 제시한 유물론적 윤리학을 위한 것이다.) 이렇게 저자는 '불가능성'으로 우리가 지금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 혹은 긍정하고 있는 것을 의문시하고 다시금 바라보게 만든다. 즉, 이 불가능성이 진정으로 의미하고 있는 것은 불가능성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을 위한 하나의 가능성의 영역인 것이다. 그런데도 '불가능성'이란 이름이 붙은 것은 그것을 최대한 가능성의 범주에 넣지 않기 위해서이다. 즉, 어떤 새로운 출발점을 찾게 되더라도 그것을 영원히 고정된 한 점이 아닌 우연히 발견된 한 점으로 만들기 위해서다. 뭔가 하나를 쥔 것 같더라도 어느새 아래로 새어버리는 모래처럼 만들기 위해서다. 그렇게 '불가능성'이 궁극적으로 의도하고자 하는 바는 끊임없이 독자를 헤엄치게 만드는 것이다. 그는 계속 파도를 일으킨다. 사유의 헤엄치기를 그만둔다면 우리는 익사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이 책은 '해답자'이기 보다는 영원히 '질문자'로 남기를 원하기 때문에 뭔가 하나의 고정된 해답이란 사유의 죽음과도 같다. 불가능성을 늘 마주하고 살아간다는 건 무엇보다도 스스로를 겸손하게 만드는 일이다. 그것은 저 원시시대 번갯불만 번쩍여도 신에게 기도하던 원시인과도 같다. 하지만 여기서의 겸손이란 어떤 권위 같은 것이 아니다. 그저 '나는 진리를 알지 못하고 다만 언제든 어느 방향으로든 추구할 뿐...'이라는 정도의 겸손이다. 근데 이 불가능성을 마주하고 살아간다는 것에서 문득 나는 '번역자인 그'를 느끼게 된다. 불가능성과 더불어 번역은 이 책의 또 하나의 중요한 테마다. 여기서 번역은 굳이 다른 나라말을 옮기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른 나라 말을 자기네 말로 바꾸는 것이 번역인 것처럼 다른 이의 사유를 자기의 사유로 소화하는 것도 일종의 번역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이 책 역시도 그 모두가 아주 많은 책들에 대한 독서 기록인 셈이며 그 많은 책들을 저자가 서로 합종연횡시켜여 재창출한 사유의 전시장인 셈이다. 그렇게 번역가가 자신만의 언어로 번역한 글을 우리는 마주하고 있는 셈이다. 그 번역에 관하여 본격적으로 음미하는 9악장, '랑시에르의 번역을 둘러싸고'의 말미에서 저자는 이런 말을 한다. 번역본을 포함하여 하나의 책이 독자에게 진정으로 다가갈 수 있으려면 저자/역자와 독자가 모두 함게 그 책에 진심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다. (p.368)
아마도 이 겸손 때문에 그렇게 그 진심을 다하기 때문에 그의 문체는 상당히 길고 때로는 무수한 반문들이 부기되는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이 책의 문체는 특이하리만큼 길다. 길게 길게 이어지는 문체들은 '악보'라는 제목에다 '작곡가'라는 그의 직업 때문에 어쩐지 선율로 들릴 지경이다. 내게는 문장이라기 보다는 글의 흐름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그는 왜 이렇게 단정적이어도 좋을 문장에 굳이 길게 길게 그 사유의 흔적들을 보태는 것일까? 거기다 보통의 인문서들은 스스로 객관적이기 위해 저자를 굳이 감추려 드는데 그는 자주 스스로를 드러낸다. 우리는 이 책에서 자주 '일독을 권한다.'라는 말을 보게 된다. 서곡에서 이 책이 역병처럼 되기를 원한다고 했는데 그렇게 우리들을 감염시키기 위해서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왜 이렇게 드러내는가? 왜 소설가의 모든 이야기는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며, 왜 비평가의 모든 이야기는 자신의 이야기일 수 밖에 없는가? (...) 소설가와 비평가라는 정체성 개념에 대한 이런 종류의 보편화에는 숙명적인 어떤 것이 있다. 이러한 숙명에 있어서는 저 두 정체성이 각기 자신만의 것으로 품고 있는 진실성의 형식만이 문제가 된다. 소설가의 정체성이 갖는 진실성이란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이야기를 자신의 이름으로 이야기하는 형식이며 반면 비평가의 정체성이 갖는 진실성이란 자신의 이름이 아닌 것에 기대어 자기에 관해 이야기하는 '형식'인 것, 말하자면 이것이 근대문학적 정체성에 대한 나의 지극히 개인적인 정리이다. (p.483)
이 문장 안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감동적으로 느껴지는 부분은 바로 이것을 '피아노를 실현하려면'이라는 구절이다. (...) 그는 결국 언어적 진술이 아니라 피아노로 '실연'하고 '실현'해야만 하는 것이다.(p.195)
'바깥'을 사유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부재'를 사유하는 것이다. 하지만 부재는 그야말로 존재하지 않음으로 '불가능성'을 사유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모든 사유들은 내가 확실히 딛고 있다고 여기고 있었던 모든 것을 의심하게 하고 궁극에 가서는 허물어뜨릴 위험을 안고 있다. 하지만 나는 본래의 나가 아니고 내가 딛고 서 있던 것으로 구성되어진 인위적인 인격체라고 한다면 영화 매트릭스에서 네오가 그 가상현실을 빠져나오려고 자발적으로 빨간약을 먹었듯이 그 인위적으로 조합된 환경과 인격이라는 '나'에서 빠져나와 '근원의 나', '바깥의 나', 그렇게 '부재하는 나'로 돌아가고 싶은 열망이 생기지 않을까? 사실 부재란 것도 알고보면 그저 부재인 것 만은 아니다. 부재는 오히려 바깥에서 존재 자체를 지탱하는 토대이기도 하다. 이러한 부재의 성격은 오히려 음악에서 더 두드러진다. 사실 음악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음과 음 사이의 '부재하는 공간'이 있기 때문이니까 말이다. 악보에 음표와 음표 사이 비어있는 공간이 있듯이. 때문에 '바깥' '부재' '불가능성'을 사유한다는 것은 오히려 존재 그 자체를 제대로 사유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사유의 악보'는 바로 이런 사유를 그 바탕에 깔고 있는 책이다. 적극적으로 그 불가능성을 안고 가려는 책이다. 우리는 여기서 참 많은 불가능성의 현존들을 보게 된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결정적인 것이 아니며 앞서도 말했듯 이제 새로이 자신만의 사유를 이어가기 위한 단초에 불과하다. 진정한 사유의 연주는 오로지 독자 자신에게서 시작되는 것이다. 더하여 여기서는 이 불가능성을 사유하는 한 인간의 면모를 볼 수 있다. 어렵고 난해하지만 꾸준히 숙독을 하면 길고 불가하해하고 파편적인 맥락들 위로 이 모든 사유를 이어감에 있어서 진심을 다하고 있는 한 모습을 보게 된다. 그렇게 그 역시 이 책을 통해 하나의 연주를 하고 있음을 듣게 된다. 나는 기나긴 그의 문장들이 일종의 선율 같았다. 시드니 루멧의 영화 '허공에의 질주'를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온다. 음대 교수가 강의실에 들아와 베토벤의 소나타와 마돈나의 '라이크 어 버진'을 들려주며 왜 마돈나의 노래가 더 신나게 들리는지 아느냐고 묻는다. 정답은 리듬. 팝과는 달리 클래식에는 리듬이 없기 때문에 난해하고 지루한 것이라고. 그처럼 아마도 이렇게 긴 선율로만 이루어진 연주이기에 난해하게 들리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클래식도 처음만 어렵지 자주 듣고 또 공부도 하면 언젠가는 친숙해지기 마련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벌써 수백년의 역사를 지닌 클래식이 애저녁에 사라졌을 것이다. 그러니 어떨까?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바깥' '부재' '불가능성'을 사유해야 한다면 이 책을 곁에 두고 가끔씩 클래식 CD를 듣듯이 펼쳐보는 것도. 아니 읽기가 어렵다면 그냥 곁에 두는 것만으로도 괜찮을지 모른다. 이 책은 존재 자체가 '불가능성'을 웅변하고 있으니까... 개인적으론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금 인문학에 대한 열망이 불타올랐다. 특히 직립보행이나 '자코토의 고유명' 그리고 '파국의 해석학'은 너무도 신선했고 흥미로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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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책을 표지만 보고는 악보에 대한 이야기인가 하고 내가 잘 모르는 분야의 책들에 대한 호기심으로 읽고 싶어졌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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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악보] 이론의 교배와 창궐을 위한 불협화음의 비평들, 새로운 도전이라는 생각에 겁없이 집어들었다. ’새로운 사유의 프로그램’ - ’새로운 사유의 가동’ - 사유의 조각들이 아닌 사유의 조각들로 명명하는 이유. 등 읽고 있지만 알수 없는 낱말로 가득 채워져 있다. 이리 구구절절하게 변명하는 이유는 단순히 재미를 위해 집어들만한 책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난 철학적 절실함과 절박함을 가지고 있지도 않고, 절멸의 문제에 마주할 자신도 없다.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하자면 다양한 방면에서의 사고를 요구한다. 하나의 나무가 거목으로 자라기 위해 많은 양분을 필요로 하듯, 다양한 책읽기를 통해 지식을 쌓아야만 이 책에 대한 깊이있는 이해가 가능해진다는 말이다. 아는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지금의 나는 수박겉햛기를 하고 있을 나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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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책 제목만 보고 선택한 것은 나의 잘못이었다.내겐 너무 먼 책이다. 인문쪽의 책은 손에 꼽을 만큼밖에 보지 않는 내게 '생각의 접붙이기' 에 대한 책이나 정말 방대하고도 그 깊이를 따라가지 못해 몇 번을 헛발을 디디듯 하면서도 읽어나가려 했지만 멈춤 멈춤 그리고 또 멈춤 아직 다 읽지 못했다. 다음에 정말 내게 진정한 시간이 허락하고 저자에게 약간 미안하지 않을때 다시 빼서 읽고 싶은 어찌보면 한없이 밉고 어찌보면 정말 매력덩어리인 책이다. 아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진주내지 보물이라고 해야 할 듯 하다.한번에 모두를 보기는 아까운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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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폭력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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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의 사유'라는 것을 생각해본다. 그것은 얼마만큼의 부피를 가져야 보편적이 될 것이며, 얼마만큼의 부피와 깊이를 지녀야 '지식인'으로서의 자격을 부여받을 수 있을 것인가. 조금 더 생각해보면 '인민의 사유'라는 것은 과연 존재하는 것인가. 위고의 말처럼, 인민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배고픔과 빵이라면, 그것은 사유의 영역이 아닌 본능의 영역이 아닌가. 사유를 통한 인간의 구분기준은 사유의 유무인가 아니면 사유의 부피와 깊이의 차이인가. 사유와 이론이 뒤섞이고 교배하여 만들어내는 수많은 생각과 이를 표현하는 수많은 말과 글들은 어쩌면 '사유할 줄 아는 인간'만이 가능한 능력이자, 사유하는 인간임을 증명하는 하나의 자연적 현상인지 모른다. 교배와 뒤섞임으로 태어나고 변화하여 창궐하는 수많은 생각속에서 건져진 새롭게 가치를 부여받은 사유는 다시 다른 가치있는 사유들과 교배하고 뒤섞임으로 가치있는 사유들을 만들어내고 이러한 사유의 진화는 인간의 육적 진화와 더불어 인간역사의 한 축을 이루어 왔을 것이다. 여기 가치를 부여받은 다양한 사유의 꺼리들이 누군가에 의해 던져졌다. 이것들을 살펴보니 기실은 새롭지 않다. 이제껏 수많은 사상가들이나 철학자들이 자신들의 언어와 사고로 이룩해놓은 생각꺼리들의 중간적 결과물들이거나, 일상에서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거나 잠깐씩은 스치듯 생각해보거나 느껴보았을 것들을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해보았거나, 이런저런 대상들을 가지고 장난치듯 이리저리 굴려보고 돌려보다 새로워보이는 부분을 들이밀듯 보여주는 것들이다. 그런 것들을 우리에게 한번 흘레붙여보고 뒤섞어보며 새로운 사유거리를 만들어보라 주문한다. 어떤 방식으로든 말이다. 그것이 오류가 되었든 오답이 되었든 간에, 그 안에서 새롭게 가치를 부여할만한 새로운 것이 건져질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을 던져준 이는 가지고 있는 듯 하다. 그러나 '던져준 그'는 너무도 고고하고 도도하다. 너무 높은 곳에서 독야청청하듯, 때론 너무 때묻지않은 정결한 모습으로 꺼리들을 던져준다. 너무 높은 곳에서 너무 고결한 것들을 던져주니 그것을 받아든 아래의 사람들은 이를 어찌할 줄을 모른다. 사유의 교배와 뒤섞임은 커녕, 던져준 것들 하나하나조차 이해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둘 중 하나이다. 받아든 사람들이 너무 무지하거나 던져진 것들이 너무 어렵거나.. 난 그 두가지 이유 중 무엇이 진짜 원인인지 모르겠다. 던져진 것들이 인간에 의해 사유되며 형성된 하나의 결과물이라면 인간으로서 이해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읽어본 나로서도 너무 어렵고 난해하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가 없었다. 동시에 생각하려 하지 않고, 어쩌면 생각의 기능이 퇴화되었는지도 모를 사람들 가득한 이 사회에서 과연 이것들이 이해될 일말의 소지라도 찾아볼 수는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도 부정할 수 없는 솔직한 느낌이다. 그러니까, 던져진 것들의 실체들을 이 책의 각 악장들의 내용들이라 생각한다면, 던져준 이와 던져진 꺼리들, 그리고 인민의 간극은 무얼 어찌할 수도 없을 매우 크고 멀기만 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 책의 서곡에서 말한 '사유해야 한다'가 아닌 '왜 사유해야 하는가'를 고민하기도 전에, 우리는 '사유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만 하는 것이다. '사유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앞에서 나는 어떤 꺼리들이 던져져야 우리는 과연 사유를 할 수 있는가를 고민해본다. 어렵고 난해한 이 책이 제시하는 꺼리보다도 좀 더 쉬운 것들이 던져지면, 지금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사유의 교배와 뒤섞음의 작업을 수행할 수 있을까? 지금의 한국사회가 보여주는 수많은 현상들을 바라보면 그런 꺼리들의 수준은 과연 어디까지 낮추어져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 사회에서 이 책의 내용은 한없이 어려워, 저자의 바램과 시도는 한마디로 실패했다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저자가 이 책에서 풀어내는 사유의 깊이와 부피는 정말 한없다. 그것은 전공적 지식과 독서가 만들어낸 특수한 여건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저자가 보여주는 사유의 방식, 방식의 다양성, 사유를 만들어내는 다양한 분야에의 관심과 지식은 정말 방대해서 사치스러움과는 다른 고급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고고한 자유를 보여준다. 자유는 사고에서도 나타나지만, 글의 표현과 문장과 단락의 형식에서도 그대로 보여진다. 마치 자기절제와 고고함을 유지하며 자신의 모습이 과연 어디까지 자유로울 수 있는지 시험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나에게도 어렵고 난해한 내용이었지만, 그런 고고한 자유에 대한 나름의 부러움이 책의 마지막장을 덮을때까지 읽기를 그만두지 못하게 한 듯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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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음과 모음 출판사에서 발행하고 있는 한국-국내의 (상대적으로) 젊은 연구자들이 각자의 영역에서 활발한 활동에 대한 결과물인 하이브리드 총서는 제목부터 시작해서 표지 디자인이나 내용 면에서 무척 색다르고 독특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데, 총서의 시작인 ‘사유의 악보 - 이론의 교배와 창궐을 위한 불협화음의 비평들’은 각각의 연구자들이 전혀 다른 분야이고 다른 방식의 연구들이기도 하지만 어떤 유사함을 발견할 수 있을지를, 종잡을 수 없는 관심과 논의를 보여주고 있기는 하지만 해박한 지식과 앎의 추구 속에서 치열함 또한 느끼도록 만들고 있다.
물론, ‘사유의 악보’가 하이브리드 총서의 개론서나 입문서로서 이해될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사유의 악보’를 접한다면 하이브리드 총서가 어떤 관심과 연구자들의 결과물들이 발표되는지를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제목부터 범상치 않은 ‘사유의 악보’는 저자가 기타리스트이며, 작곡가이기도 해서 무척 어울리는 제목인 것 같고, 제목처럼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악보 위에 저자의 다양한 사유들이 하나씩 써지면서 다채롭고 다양한 주제들로 내용은 채워져 있다.
‘사유의 악보’는 저자가 이미 여러 방식으로 발표했던 원고들이 모여진 모양새이기는 하지만 미발표 원고들을 추가로 덧붙이고 있기도 해서 단지 그동안 발표한 글들이 모여졌을 뿐인 느낌은 덜하고 내용에서도 하나의 주제 속에서 온갖 것들이 논의되고 있기 때문에 무척 다양한 시각과 내용을 접하는 기분이 들었다.
일반적인 인문학 글쓰기를 보여주고 있기는 하지만 때때로 조금은 실험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글쓰기를 시도하고 있기도 한데, 조금은 낯설게 느껴지기도 하고 그다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들도 아니기 때문에 읽어내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저자는 최선을 다해서 자신이 말하려고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고, 각주를 통해서 성실하게 자신이 말하려고 하는 의도를 전달하려고 해서 어려운 내용들이 많기는 했지만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열심히 읽고 싶어지게 만들고 있다.
단호하게 어떤 결론을 내리기 보다는 여러 가능성들을 모색하는 방식이라 뚜렷한 결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좋지 않게 볼 수 있기도 하겠지만 손쉬운 결론을 찾기 보다는 혼란스러움 속에서 고민의 이어감이 쉽게 논의를 따라가기가 어렵기는 했어도 더 공감이 되기도 했다.
워낙 다양한 내용들로 채워져 있고 그 각각의 내용들에서 거론되고 논의되는 학자들도 각기 다르기 때문에 많은 부분들을 지나친 느낌이 들어 아마도 간간히 다시금 펼치게 될 것 같기는 하지만 이해할 수 없었다는 짜증 속에서의 되새김은 아닐 것 같다.
즐겁게 다시 펼쳐서 저자의 논의를 음미하게 될 것 같다.
참고 : 논의 중에서 저자는 여러 방식으로 다양한 책들을 소개하고 추천하고 있는데, 그렇게 알려주는 책들 중 하나도 읽은 것이 없다는 것에 큰 좌절감을 느끼게 되기도 했고, 이것 저것 읽고 싶은 책들을 생각해보게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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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9 페이지나 되는 아주 두꺼운 책이다. 그것도 활자의 크기가 일반적인 책에 비하여 작은 책이다. 이것만 보아도 책읽기가 그다지 손쉽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외관적인 부피문제도 문제이지만 더 큰 문제는 내용이 어렵다는 것, 바꾸어 말하면 독자인 나의 글읽기 소양이 아주 부족하다는 뜻도 되지만 정말로 어렵고도 어렵다는 말밖에 할 수 없을 정도로 난해하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일반적인 소설의 경우 시간당 100 페이지 정도로 어지간한 책은 두세시간 정도면 독파할 수 있는 나의 수준으로 생각할 때 500 페이지면 다섯 시간, 하루에 한시간씩 치더라도 5일이면 끝내야 하는 것인데 이놈의 책은 도저히 그렇게 되지를 않았다. 20여일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하면서 수없이 포기하고픈 마음뿐이었다. 어쨌든 읽기는 다 읽었다. 문제는 책 내용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한 페이지를 읽어내려간 후 도저히 머릿속에 정리가 않되어 몇번을 다시 읽기도 해보았지만 그래도 마음에 와닿지 않았을 정도였기에 이런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게다가 최종적으로 결심을 굳힌 것은 기본 실력부족이라는 엄연한 현실을 인정하기 싫은 부정적인 마음을 나의 인내심과 의지력으로 그래도 다 해냈다는 긍정적인 마음만이라도 얻어볼려고 어렵기만, 한 도대체 뭔가 이해가 않되는 글자들의 뜻 읽기는 포기하고, 단순히 글자들만이라도 읽어내는 것으로 방향을 바꾸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서평은 써야 한다. 여기서 또 한번의 고민이 생겼다. 서평단에 당첨이 되어 15일 내, 이것도 기한이 지났을 가능성도 크지만 서평을 써주어야 하는 의무도 있다. 그리고 작년부터 책읽기 후 감상을 반드시 기록하여 책읽는 순간이외에는 사라져 버리는 단기기억의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하는 결심도 저버릴 수는 없기 때문에 내용도 없는 글쓰기지만 이렇게 마음 내키지 않는 글쓰기까지 하게 되었다. 책이란 가장 값싸지만 가장 능력있는 선생님을 모셔서 가장 효율적인 마음의 양식을 담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나에게는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한다는 것이 정말로 기분 나쁜 일이다. 왜? 이 책에 이처럼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어떻게 해야할지를 고민했는지 이유가 궁금하다. 안그래도 안경을 써야하는 신체적 변화에 민감한 마음인데 안경으로도 잘 안보이는 작은 글자체도 마음에 안들었지만 뭔가는 그럴듯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너무 많이 끌여들여서 자기의 주장처럼 포장하는 것도 마음에 거슬렸고, 철학자들의 글쓰기 방식인지 몰라도 어떻게 보면 말장난 같은 동음이의어를 사용하거나 "이것도 이면서 저것도 이다"라는 헷갈리는 표현들이 이해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던 것 같다. 결과야 어찌 되었던 나의 책읽기의 기초체력이 아주 멀었다는 것을 알게된 것이 아주 큰 수확이다. 더욱더 읽기를 열심히 하여 더 높은 수준이 되면 이놈의 사유의 악보에 다시 도전해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