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규원 시인의 여덟번째 시집인 <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다>는 놀라운 시집이다. 50편의 시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이 모두 사물들이라는 점(물론 시적 자아인 ‘나’가 등장하는 시가 5편 있고 아이, 사내, 여자, 소년 등 인간이 등장하는 시가 몇 편 있긴 하지만 이들 시에서 인간은 하나의 사물 또는 사물의 존재를 돋보이게 하는 이차적 대상으로서 묘사되고 있을 뿐이다.)에 우리는 우선 놀란다. 그러나 우리를 더욱 놀라게 하는 것은 시인이 이러한 사물들의 즉물적 묘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점일 것이다. 시집 뒷표지에 실린 시인의 글처럼 이 시집에 실린 시들에는 구원이나 해탈, 진리나 사상이 담겨져 있지 않다. 따라서 그가 묘사하고 있는 사물들의 세계에서 뭔가 의미있는 것을 찾아내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집에는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그 무엇’이 있다. 이 시집이 놀라운 시집인 진짜 이유는 거기에 있다.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이 묘사하고 있는 사물들은 하늘, 돌멩이, 길, 산, 나무, 새, 풀, 꽃, 별, 강, 나비, 잠자리, 집 등 우리가 일상적으로 만나는 친숙한 것들이다. 이 시집에서 가장 긴 시들인 ‘시작 혹은 끝’ 그리고 ‘처음 혹은 되풀이’에서 볼 수 있듯이 시인은 산책을 하면서 만나는 이러한 사물들을 하나하나 관찰한다. 그의 관찰은 세세하며 하나의 대상에서 다음 대상으로 옮아간다. 그러나 그가 주목하는 것은 사물의 세부적인 모습이나 형태가 아니라 사물의 움직임을 통하여 다른 사물과 맺게 되는 관계 또는 다른 사물들과 맺는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사물의 움직임이다. 새들이 먹이를 삼킬 때마다 ‘덤불 밖의 하늘이 꼬리 쪽으로 자주 기울’고, 사내가 길에서 몸을 바로 세우면 ‘길이 앞뒤로 나누어지며 툭 끊어’지며, 날아가는 나비의 그림자는 ‘나비의 몸에 붙지 않고 땅에 있는 頭頭와 물물에 붙는다’. 길 한켠에 쌓여 있는 모래는 ‘바위를 들어올려 자기 몸 위에 놓아두고 있’고, 어둠 속에서 ‘산은 하늘을 더 위로 밀’고 있고, 호텔은 ‘길에 매달려’ 있으며 오래된 돌들은 ‘코스모스의 뿌리를 지그시 누르’고 있다. 즉, 이 시집에 실린 오규원의 시에서 사물들은 형용사가 아니라 동사로 자신을 드러낸다. 오규원이 사물들의 세계를 드러내기 위하여 형용사가 아닌 동사를 선택한 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먼저 사물들을 수식하던 형용사를 버림으로써 시인이 얻은 것은 사물들의 외피에 더께처럼 달라붙어 있던 낡은 관념으로부터의 해방이다. 그의 시에 등장하는 ‘하늘’이나 ‘길’은 더 이상 ‘이상(理想)’이나 ‘인생(人生)’과 같은 관념으로 치환되지 않는다. 저기 창밖에 보이는 하늘이며, 산책을 하는 그의 발이 내딛는 길이다. 순수한 실체로서의 하늘이며 길일뿐이다. 그렇다면 사물들을 묘사하기 위해 동사를 선택함으로써 시인이 얻은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움직임을 통한 사물들간의 관계의 전면적인 개방이다. 그의 시에서 ‘하늘’이나 ‘길’은 더 이상 혼자 있지 않다. 하늘은 산에 의해서 더 위로 밀리고 있고, 길은 사내에 의해서 앞 뒤로 나누어지며 툭 끊어진다. 이러한 사물들간의 관계는 사물들이 움직임을 계속하는 한 무한히 확산될 수 있다. 동사적 존재 방식으로 드러난 이러한 사물들의 세계는 분명 우리가 일상적으로 지각하는 사물들의 세계와는 다른 모습이다. 우리는 인간이 만들어 입힌 낡은 관념의 옷을 벗어 던진 사물들의 알몸을 목도하는 동시에 우리가 알지 못했던 사물들간의 새로운 관계를 엿보게 된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충격한다. 한국 현대시사에 있어서 그 누구도 도달한 적이 없는 이러한 순수한 사물들의 세계에 오규원 시인은 어떻게 도달할 수 있었을까? 나는 그 비밀의 열쇠를 20년 전에 그가 쓴 ‘金海平野’(제3시집 <王子가 아닌 한 아이에게>에 수록되어 있음)라는 시의 한 구절에서 발견한다. 그것은 바로 ‘멀리 보이는 것은 항상 불투명한 채로 방치하는 우리 정신의 다른 이름인 遠近法 - 그 合理主義의 길목마다 크고 작은 집을 짓고 사는 우리들.’이라는 구절이다. 서양 미술사에 있어서 원근법은 ‘인간’에 주목한 시기인 15세기 르네상스 시절에 처음 등장했는데, 원근법에서는 내 눈으로부터 가까이 있는 사물은 크고 명확하게, 멀리 있는 사물은 작고 희미하게 묘사된다. 즉, 원근법에는 내 눈과의 거리에 따라 사물의 중요성이 결정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이 세계의 중심은 바로 이 세계를 바라보는 나라는 인간중심의 사고가 깔려 있다. 인간의 이성(理性)에 새로이 눈뜬 르네상스 시절에 원근법이 등장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그림의 본질이 형태에 있다고 생각한 세잔느는 완벽한 형태를 그리기 위하여 시점을 바꿔가며 그림을 그렸는데, 이것은 수 백 년 동안 내려온 서양화의 원근법 전통을 파괴하는 혁명이었다. 세잔느가 현대미술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오규원이 이 시집 <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다>에서 묘사하고 있는 사물들의 세계는 바로 미술사에서 세잔느가 이룩한 혁명과 동일한 것이다. 그도 세잔느처럼 그의 시에서 원근법을 폐기한 것이다. 앞서 인용한 시 구절에서 볼 수 있듯이, 오규원은 인간 중심주의의 소산인 원근법이 이 세계 속의 사물들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 못하고 ‘멀리 보이는 것은 항상 불투명한 채로 방치하는’ 불완전한 방법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 후 20여년의 꾸준한 시작업을 통하여 그는 마침내 원근법의 지배에서 벗어난 순수한 사물들의 세계에 도달한다. 이 시집에 실린 ‘하늘과 돌멩이’라는 시에서 보면, ‘새는 푸른 하늘에 눌려 납짝하게 날고 있’으며(시선은 새의 위쪽, 즉 하늘에서 땅으로 향한다) 마른 길에 ‘하늘이 내려와 누런 돌멩이 위에 얹힌다’(시선은 돌멩이의 아래쪽, 즉 땅에서 하늘로 향한다). 이렇게 하나의 시에 존재하는 다양한 시선의 방향은 원근법에 의해서 고정되어진 사물들간의 관계에 극적인 변화를 준다. 항상 불투명한 채로 방치되어 있던 멀리 있던 사물들의 모습이 확실히 드러나면서 그것들은 가까이 있는 것들과 만나 새로운 관계를 형성한다. 사물들간의 이 새로운 관계는 우리의 마음을 움직인다. 형용사가 아닌 동사로써 사물들의 존재를 드러내기, 그리고 원근법의 폐기를 통해 사물들간의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기. 오규원 시인이 새로 개척한 이 두 가지 방법론이야말로 <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다>가 놀라운 시집인 진짜 이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