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메시아적 사건,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
그러던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잠시 눈이 멀었다가 깨달은 것이 “그리스도가 우리 모두를 위하여 죽고 부활했다”는 것을 모든 사도들의 공통된 복음일 뿐 아니라, 구약의 예언 성취라고 확신합니다(고전 15:3-5, 12) 다시 말해 예수의 메시아적 행위는 우리를 위하여 죽고 부활한 것이며, 이것이 메시아 됨의 내용이고 메시아적 사건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성취했다고 주장하는 구약 성경 본문 중 하나는 바로 유대교 메시아 사상의 가장 중요한 뿌리인 나단의 신탁입니다. 예수의 부활 사건이란 무엇입니까? 베드로, 요한, 야고보 등 예루살렘 사도들과 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다윗의 씨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켜 자기 우편 왕위에 등극하게 하여 자기 아들로 확증하셨으며 만유의 주로 군림하게 하셨다” 바울은 지금 이것을 복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보이신 표적은 진정한 구원에 대한 징표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광야에서 먹은 그 만나가 구원이 아니었다. 그것을 먹어도 너희들의 선조들은 다 죽었지 않느냐? 너희들은 지금 나에게 모세가 가져준 정치적 자유, 경제적 풍요, 사회적 정의 등을 이루어 주는 메시아가 되라고 하는데 그것이 진정한 구원이 아니다. 너희가 그것들을 가지고 있어도 결국은 다시 배고프게 되고 죽는다. 그것들이 조금은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궁극적인 구원은 되지 못한다. 내가 광야에서 오천 명을 먹인 사건은 문자 그대로 물리적인 시간과 공간에서 모세가 행한 제2의 출애굽을 이루겠다는 표적이 아니라, 하늘의 양식을 가져줄 것에 대한 표적이다.” 이것이 요한복음의 구조입니다. 육신적인 관점에서만 생각하는 유대인들은 예수의 행위의 영적인 의미, 진정한 의미는 보지 못합니다. 요한복음 6장에 의하면 예수가 광야에서 오천 명에 떡 또는 밥을 먹였는데 그것은 무엇을 표징 하는 것입니까? 밥은 생명을 주는 수단입니다. 그러므로 이 이적은 예수가 생명을 주는 자임을 표적 하는 것이지 유대인들이 생각하듯 이 세상 내에서의 풍성한 삶을 가져주는 자임을 표적 하는 것으로 해석하면 맞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내재적인 것들은 한계가 있어서, 결국에는 결핍과 죽음을 띨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말합니다. “너희들이 바라는 그런 것은 절대적인 의미에서의 구원이 아니다. 그런 것을 가져주는 자가 메시아가 아니다. 메시아는 절대적인 의미의 구원을 가져주는 분, 이 세상을 초월하는 하늘나라의 영생을 가져주는 분이다.” 그리고 자기가 바로 그것을 가져준다고 가르칩니다. “내가 바로 영생을 주는 떡이다. 내가 바로 하늘에서 온 그 떡이다.” 요한복음 6:53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김세윤 교수는 이렇게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의 메시아관을 비교하면서 구원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 차분히 설명을 이어갑니다. 그러면서 내재적인 것(세상의 욕망 덩어리들)을 구하는 ‘육신적’ 메시아 사상에 주의를 하라고 권면합니다. 육신적 메시아 사상으로 예를 든 것은 공산주의, 자본주의, 인본주의적 문명 낙관론 등입니다. 이렇게 되면 세상의 것들을 관리하면서 살아보려고 인간이 노력했던 ‘육신적 노력’이 무시되어 신학적인 구원에 기대 새로운 사회제도를 만드는 것이 가능할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나오지 않을 수 없는데 이에 대한 의문에 대하여 김 교수는 하나님의 구원은 총체적이라고 답을 합니다. 예수님의 구원은 존재론적인 이원론이 아니다. 육신적이고 물질적인 축복 등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고 영혼의 구원만 중요하여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서 우리의 삶에 대해서는 아무런 작용을 하지 않고 오로지 하늘나라에서의 우리 영혼만 구원하는 구원자라고 생각하거나, 시간적 이원론으로 번역해서 그리스도는 이 세대와는 관계없고 오는 세대의 구원만을 확보하는 분이라는 이해도 잘못되었다고 답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가져오는 구원은 우리의 실존 전체에 대한 구원이라서 육신에도, 영혼에도 소용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예수의 재림 때 완성될 것이지만 우리는 지금 그 첫 열매를 이미 누리고 있다고 합니다.
그 첫 열매는 이 세상에서 좀 더 많은 정치적 자유의 형태로도 나타나야 하고, 좀 더 풍요로도 나타나기도 하고, 빈곤에서 해방되는 것으로도 나타나고, 사회 정의와 평화로도 나타나고, 육신의 건강으로도 나타난다고 합니다. 지금은 아직 사탄이 굴복하지 않아 우리가 죄를 짓도록 하고 죽음으로 그 대가를 치르고 있지만 그래서 아직도 사탄의 죄악과 죽음의 통치에 노출되어 고난 받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온전한 삶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오직 믿음으로 그것을 부분적으로만 누리고 있을 따름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재림하셔서 사탄의 통치를 완전히 종식시키고 그의 의와 생명의 통치를 완성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육체로부터 분리된 우리의 영혼만의 구원이 아니라, 우리의 실존 전체의 구원이 됩니다. 김 교수의 답입니다. 걱정마라 하나님이 구원하셨다. 그에게 순종하고 서로 사랑하면 세상은 다스려진다고 확신을 하는 듯합니다. 아멘입니다.
우리 믿음을 지닌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어떤 메시아인지 잘 설명하여 주는 글이었습니다. 좋은 글은 사람을 춤추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힘이 납니다. |
|
예수는 어떤 메시아인가? (예수는 메시아인가?)
김세윤 교수의 책, ‘구원이란 무엇인가’의 끝부분에 부록으로 수록된 내용이 예수님을 이해하는 좋은 글이라 정리해서 두고두고 볼 생각으로 정리를 합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못하는 이유와 예수는 어떤 메시아인지를 논리 정연하게 설명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눈을 뗄 수 없이 끌려들어가는 글이었습니다. 구약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지, 예수님이 주신 구원은 어떤 내용인지를 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책을 직접 읽기를 권합니다.
육신적 관점의 유대교적 메시아 사상
글의 시작은 오늘날까지도 같은 구약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계시로 그리고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담고 있는 책으로 함께 믿는 그리스도인들과 유대인들이 왜 예수의 메시아 됨에 대해서는 완전히 이견을 보이는 것일까요?라는 물음으로 시작합니다. 그 답을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던 바울이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하게 된 이유에서 찾습니다.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던 유대 신학자 바울과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바울의 생각을 비교하는 방법으로 설명을 합니다. 바울이 다메섹에 그리스도인들을 붙잡으러 갈 때까지 유대 신학자로서 가지고 있던 메시아 사상은 유대교적 메시아 사상으로 육신적 관점에서의 메시아 사상이랍니다. 육신적 메시아 사상의 내용은 다양했지만 주된 메시아 사상은 다윗의 재현이었습니다. 다윗이 성지의 이방 민족들을 다 정복하고 다윗 왕조를 세웠듯이 자신들을 로마와 같은 이방 민족들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줄 새 다윗을 기다렸습니다. 다윗 시대와 같은 경제적 풍요, 사회적 정의, 평등, 평화 등을 가져올 메시아를 기다린 게지요. 즉 다윗 왕조를 재건할 왕으로서, 이방 민족들을 굴복시키는 군사적 영웅으로서,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풍요와 사회적 정의 같은 것들(샬롬)을 가져오는 메시아를 기다린 것입니다.
이와 같은 메시아 사상은 구약의 메시아 사상의 가장 중요한 뿌리인 나단의 신탁(삼하 7:12-14)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 나단의 신탁 내용은 하나님이 다윗에게 그의 생애 끝에 그의 씨 하나를 일으켜서 그의 왕위에 앉게 하고 그의 왕위를 영원케 할 것이며 그를 아들로 삼겠다고 하신 약속입니다. 그런데 다윗 왕조에 대한 실망과 더불어 이 나단의 신탁은 종말에 재현될 예언으로 재해석되었습니다. 여기서 유대교의 가장 중요한 메시아 사상이 나왔습니다.
이 사상은 또 제2의 모세 사상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신명기 18장 15절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다시 일으키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애굽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켰습니다. 신약 시대의 유대교는 종말의 구원을 첫 구원(출애굽)의 재현으로 보고, 종말의 구원자인 메시아를 모세와 같은 선지자 즉 제2의 모세로도 보았습니다. 제2의 출애굽의 구원을 이룰 자로 기대되었습니다. 메시아는 제2의 다윗이든 제2의 모세이든 정치적 자유, 경제적 풍요, 사회적 정의 등을 가져오는 자로 이해된 것입니다. 이런 샬롬을 가져오는 자가 메시아입니다. 이 유대교적 관점에서 예수를 봤을 때, 예수가 메시아로 보였겠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는 로마에게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지도 못했고, 예수가 이스라엘 민족을 제2의 출애굽 시키지도 못했으니까요. 또한 그는 다윗 왕조를 재건하기는커녕 도리어 스스로 무참히 처형되었을 뿐 아니라 그를 따르는 사람들로 하여금 고난만 받게 하고 쫓기며 죽임을 당하게 하지 않았습니까? 따라서 유대교의 메시아 사상에 비추어 보았을 때 예수는 메시아일 수 없습니다 그러니 유대 신학자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을 잡으러 다메섹에 가는 것은 지극한 상식이었습니다. |
|
김세윤 교수님의 글을 읽고 든 의문 두 가지.
김 교수의 주장을 보면서 의문이 드는 것을 기록하고 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첫째, 구원이 과연 ‘모든’ 악과 고난에서 해방시키는 힘일까라는 의문입니다. 유일하시고 절대적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이시니 ‘모든’ 악과 고난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는 것이 논리적으로 타당해 보이지만 과연 하나님이시라고 해서 그럴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계신 것을 제가 안 것은 성경을 읽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다 만드신 후 아담과 하와를 만든 것 또한 하나님이십니다. 천국의 상징이기도 한 에덴동산에서 두 사람이 부끄러움을 모르고 살 수 있게 했음에도 둘은 뱀의 유혹에 빠집니다. 하나님이 만든 에덴동산에는 뱀도 살았고, 유혹도 있었다는 말입니다. 애초 하나님의 설계가 완벽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의문이 드는 부분입니다. 설계대로 운용되어야 할 에덴동산에 왜 뱀이 있었으며, 이 뱀은 “창조주와 같아지지 못하게 하려고 먹지 못하게 한 것이니 먹으면 하나님과 같아질 수 있다”라는 동산의 비밀을 아는 듯, 물리칠 수 없는 유혹의 포인트를 왜 가질 수 있었으며, 아담과 하와는 이 유혹에 빠질 수밖에 없는 심약한 심성을 가졌을까요. 이것은 하나님의 절대성과 완전함에 대한 의혹을 가지게 할 수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을 이해하는 우리의 노력은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힘, 독립적인 결단을 할 수 있는 힘, 자의식의 힘을 주었다는 설명일 수도 있습니다. 완전하고 절대적인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 그리고 뱀조차 스스로 행동하도록 할 수 있는 힘을 주고 그 책임에서는 벗어날 수 없다는 규칙을 정했다고 말입니다. 그럴 수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하며 그 책임을 지는 능력이 원죄를 짓는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원죄를 지을 인간에게 하나님이 구원을 베푸사 ‘모든’ 악과 고난에서 해방시키시려면 김 교수가 설명하듯 하나님에게는 온전한 순종만 할 수 있는 인간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면 또 논리적으로 이상한 결론이 됩니다. 애초 만든 인간들이 원죄에 빠진 것은 창조주께서 의도한 것(적게 봐도 범죄 가능성이 있는데)인데 구원을 베푸사 우리가 ‘모든 악과 고난’에서 벗어나 살 수 있는 에덴동산에 간들 뱀은 여전히 있을 것이고, 자의식을 가진 원죄를 다시 지을 가능성이 없어진 것이 아닐 진데 하나님은 어떻게 ‘모든’ 악과 고난을 없앨 수 있을까요? 궁금한 점 하나입니다.
둘째, 살아 있는 사람은 원죄를 벗어날 수 없기에 ‘죽음의 증상들’을 앓고 있으며 이 말은 결국 죽음에 이르는 것은 ‘모든 악과 고난’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말이 됩니다. 다만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있을 뿐입니다. 스스로는 절대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으니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절대성과 완전성을 믿는 것이 전제된다면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은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 제자들에게 알려진 가르침입니다. 당시 제자들은 그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잡혀가자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님을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실 때에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돌아가신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해서야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믿기 시작합니다. 김 교수는 이러한 믿음은 단지 예수님의 부활 때문 만은 아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도 또한 구원의 사건이라고 설명합니다. 예수님이 가르친 내용들은 그가 살아있을 때 이뤄졌으며, 그가 죽는 것도 그의 가르침에서 한 치도 어긋나지 않았으니 당연한 설명입니다. 그러면서도 부활은 우주 밖의 초월자가 만든 창조적인 사건이 되어 절대적인 의미를 가진다고 설명합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다니 분명 의미를 가진 사건이 분명합니다. 그러면서 다른 종교들에서는 구원을 구할 수 없는 이야기가 이 부활 사건에 있다고 설명을 합니다.
인류 문명의 발상지인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우리는 고대 근동지역이라고 부릅니다. 이 지역에서 인류의 문명이 발생하였다고 하니, 이곳의 신화나 종교에는 과연 부활 스토리가 없을까 궁금하여 위키백과를 검색했습니다. ‘죽음과 재생의 신’이라는 제목의 글 속에 제임스 프레이저의 ‘황금빛 가지’라는 책도 소개하고 있고, ‘살아 있는 신적 존재가 한 번 죽어 지하 세계에 들어갔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설화는 세계에 보편적으로 분포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유대민족이 유일신을 믿으면서도 이방신을 섬긴 것은 당시 다신교 사회가 존재한다는 증거였고, 그들의 유일신이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이 존재하면서 알게 된 신의 존재는 인간의 사고의 틀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으며, 어떤 다른 믿음을 부정하거나 자신의 믿음을 강요하는 것은 당시 현실적 힘의 세기였지 그것이 도덕적으로 뛰어나거나, 논리가 우월하거나 한 것이 아니지 않겠냐는 의문입니다. 결국 신학의 설명은 자기 합리화이자 믿음의 이론적 틀을 공고히 하는 방법이자, 신학이라는 학문의 골격을 튼튼히 하는 방법으로서 존재의 의미는 있지만, 그것이 타 종교를 무시하거나 배제하는 논리로 사용되는 것은 본연의 영역을 벗어나 타인의 믿음을 도발하거나 타인의 신체를 공격하는 논리로 이용될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제한된 자원을 가진 인간이 만든 하나님을 설명하는 논리체계인 신학이 혹시 다른 사람들의 제한된 자원을 뺏으려는 것으로 오인될 수도 있지 않을까, 오용의 역사는 없었을까 의문이 든다는 말씀입니다. 나의 종교의 완전성이란 것을 증명하는 방법이 인간을 수단으로 사용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간혹 하나님이 직접 임재하셔서 모습을 보이시는 기적의 소식을 듣기는 하지만 그리 신빙성이 있어 보이지는 않다는 것에 동의하신다는 전제가 필요한 주장이지만, 그리고 저는 하나님을 믿지만) 그리 기대가 크지 않으실 것이고 신학의 이름으로 이 세상에서 벌어진 악과 고난의 역사가 엄연하게 사실인데 어찌 그리 확실하게 주장하실 수 있는지가 또 다른 의문입니다.
저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제가 믿는 이유는 제 이웃을 사랑하고 저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제 이웃에는 절에 다니시는 분들도 많으시고, 골 때리는 분이라서 자주 보지 않았으면 하지만 그래도 볼 수밖에 없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들이 저의 종교활동 때문에 같이 운동하지 못하면 “언제부터 교회를 다녔어요”라며 같이 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저는 그저 교회를 가니 같이 운동을 하지 못할 뿐입니다. 그리고 다음 주 토요일이면 다시 반갑게 같이 운동을 합니다. 논리성과 합리성을 이유로 공격성을 띄는 것은 우리가 살면서 정치를 토론하거나 경제를 토론할 때 흔히 범하는 잘못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
|
김세윤 교수님의 주장을 정리한 글
제가 알고 싶은 것은 구원이란 무엇인가를 객관적으로 알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종교학자(신학자보다는 넓은 의미의 종교학자를 말합니다)의 글을 선호하는 편인데 제게 도움을 주고자 집사님이 추천한 책이 김세윤 교수가 쓴 ‘구원이란 무엇인가’였습니다. 구원에 대한 신학적 설명이 논리적으로 추구되고 있지만 말을 꾸미는 형용사나 부사 그리고 결론을 강요하는 접속사 때문에 읽는 것에 집중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논리적인 설명에 자연스럽게 미끄러져 가고 싶은데 자꾸 돌부리에 걸리는 듯한 불편함이 느껴졌습니다. 김 교수의 설명을 정리하면서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을 잊지 않으려 기록합니다.
구원(redemption)은 포괄적인 개념으로 모든 악과 고난에서 해방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모든 악과 고난’은 죽음의 증상들로 대개의 인간이 겪는다고 합니다. 우리가 수명이 다하여 육신이 죽는 것은 우리의 현재가 죽음의 상태임을 재확인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고 김 교수는 설명합니다. 죽는 존재는 모두 ‘현재 죽음의 상태’이고, ‘죽음의 증상이 항시적으로 존재’한다는 말인데,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은 ‘모든 악과 고난’ 속에 있다는 증명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생이 죽어 있다고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왜 인간은 모든 악과 고난에 빠진 걸까요. 인간은 하나님이 만든 피조물로서 자기 의지에 의하여 그리고 자기 힘으로 스스로 존재하는 자가 아님에도 하나님께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살려고 하는 태도를 가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이런 옳지 않은 태도가 죄의 본질이라고 봅니다. 하나님께 의존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말과 같기에 죄의 본질은 ‘하나님에게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신학에서 말하는 ‘죄=불순종’이라는 도식이 나온 배경입니다. 앞서 죽음의 증상들이라고 규정한 모든 악과 고난들은 불순종한 인간의 죄의 열매요 대가(곧 삯은)입니다.
인간의 죄는 역사가 깁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처음 당신의 형상을 본떠 사람을 만들었는데 이들이 사악한 뱀의 유혹에 빠져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같이 될 수 있다는 뱀의 유혹에 빠져 스스로 주가 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사탄에게 순종하는 사탄의 종이 되고 맙니다. 김 교수는 ‘인본주의’는 아담과 하와를 스스로 ‘하나님같이’ 되도록 유혹했던 뱀의 ‘사상’이라고 하면서 인간을 하나님께서 원래 지으신 하나님의 형상의 고양된 지위에서 떨어지게 하는, 곧 인간 이하로 비하하는 사상이요 죽음으로 이끄는 사상임을 깨닫게 된다는 주장을 합니다. 그 꾐의 결과 하나님에게는 무한정 있는 자원을 무시하고 사람의 제한된 자원을 늘리려고 다른 사람의 자원을 빼앗는 길로 들어서서 이 세상이 전쟁과 폭력이 난무하는 지옥 같은 세상이 되었다는 논리를 펼칩니다.
김 교수는 인간들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는 없다고 합니다. 인간에게는 자원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악과 고난이 발생하는데, 제한된 자원을 가진 인간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모순이라고 설명합니다. 우리가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힘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애초부터 구원받아야 할 이유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논리이지요. ‘복음’은 바로 이러한 제한된 자원 속에서 죽어 가는 인간들에게 하나님께서 우리 밖에서 우리를 위하여 오셔서 구원을 이루셨다는 ‘기쁜 소식’을 말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럼 왜 구원의 사건이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이냐는 설명이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가르치면서 스스로 주라고 그리스도라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단지 ‘그 사람의 아들’이라고 했고, 이 땅에 섬기기 위해 왔으며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물로 바치려고 왔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유대인들은 저주받은 사람으로 만들기 위하여 정치범으로 고발하여 십자가에 매달려 죽게 만들었습니다. ‘나무에 달려 죽은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는 신명기 21장 23절을 기억하고는 그렇게 저주받은 자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당연히 제자들은 실망하고 흩어집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부활을 하셨고 이 부활은 예수님이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니라 이 땅에 대속물로 구원을 위하여 왔다는 가르침에 부합하는 우주 밖의 초월자가 만든 창조적 사건이 되어 절대적인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고 김 교수는 설명합니다. 다른 많은 종교나 가르침은 이런 절대적인 의미의 창조적인 사건이 없었기에 오직 유일하게 예수님의 복음 만이 2000년을 넘어 전 세계에 널리 퍼지는 복음, 기쁜 소식이라는 설명입니다. 다른 종교들에는 구원이 있다고 인정되지 않는 이유라고 강조합니다. 여기까지가 책의 3장까지 내용의 요약입니다. 다음의 내용은 구속적 죽음에 대한 해석의 성경적 범주들, 구원의 주관적 적용, 구원의 종말론적 구조 등 신학적 내용입니다. 이것은 우리 신자들이 이해를 해야 하는 것으로 논의를 할 대상이지 비신자들과 이야기해야 할 것은 아닐 것입니다. |
|
나온지 오래된 책이지만 지금도 여전히 우리에게 꼭 필요하며 알아야할 신앙 서적이라 생각합니다. 신앙을 가진 모두 에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할 부분이 구원 입니다. 구원이란 두 글자에 담겨진 그 의미가 초심자들과 신앙인 들에게 제대로 전달이 되지 못하고 있는것이 현실 입니다. 구원에 담긴 참된 뜻을 알면 우리의 삶과 신앙 생활에 커다란 변화가 될 것을 확신하며 이 책이 그 시발점에 놓여 있다고 생각이 듬니다. |
|
그리스도 예수의 구원은 실존 전체에 대한 구원을 전제한다. 그리고 이 구원은 현재의 세상과 삶으로만 축약하면 안되며, 이 세상과 육신적 삶과 관계없는 것으로 생각해서도 안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빈곤으로부터의 해방으로도 나타나고, 사회 정의와 평화로도 나타나고, 육신의 건강으로도 나타난다. 곧 신적인 온전한 삶, 즉 영생을 베푸시는 것이다. 육체로부터의 분리된 영혼만의 구원이 아니라, 실존의 모든 영역들에 총체적으로 나타난다. 구원의 올바른 이해와 믿음은 종말의 완성 때의 영생을 보장하며, 실존의 모든 영역에서 누리게 하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