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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의 등장은 늘 물과 함께이다. 鯤이라는 한자에 물고기가 있으니 딱 어울리는 이름이다. 신화에 나오는 큰 물고기가 어원이다. 곤이는 인어다. 동화 속 인어공주처럼 목소리와 다리가 뒤바뀐 인어가 아니라 목소리를 버리지 않는 대신 아가미가 귀 밑에 숨어 있는 인어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곤의 존재를 공식적으로는 알 수 없다. 왜 곤에게 아가미가 있는지 이런 설명은 없다. 필요자체가 없는지도. 아버지의 동반자살에 곤이 끌려간 것이고 거기서 기적적으로 살아남는 과정에서 아가미가 생겼을 뿐. 아가미가 있는 이상 곤의 운명은 물과 묶일 수밖에 없다. 퇴화된 것인지, 진화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현재 인간의 몸 구조상 존재하지 않는 기관을 곤이 가지고 있기에 곤은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며 정상적인 생활(다수 인간의 기준에서)을 할 수 없다. 그는 숙명을 받아들인다. 그 역시 뭍보다는 물속이 더 자유롭다. 그가 아가미로 숨 쉬고 뱉으며 민물의 냄새가 온몸에서 묻어날 때 그의 유영은 뭍에서 못다한 숨을 마음껏 뱉을 수 있는 행위이다. 곤의 운명을 받아들이게 영향을 준 사람은 그를 구해준 이내촌의 할아버지와 그의 손자 강하이다. 곤의 아가미를 최초로 발견한 강하는 곤의 존재에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드러나지 않은 인간애로 묶여 있다. 끊임없이 곤을 괴롭히지만 강하가 곤을 향해 유일하게 표현할 수 있는 ‘싫어’라는 단어 속에는 반드시 증오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달리 표현할 말이 마땅치 않아 싫은 마음, 혼돈에 가까운 막연함이었다. “그 막막함이야말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방식 가운데 가장 범위가 넓은 거라고 봐요.(166p)" 라고 하는 해류(곤이 구해준 여자)의 말 속에 이미 강하는 곤을 가족으로 받아들였다는 의미다. 물론 곤 역시 이미 강하가 자신의 존재를 아가미를 가진 ‘인간’으로 인정했다는 기억을 똑똑히 하고 있다.“그래도 살아줬으면 좋겠으니까”(164p)를 뱉으며 곤을 등 떠밀었던 강하의 마지막 말은 곤의 존재 자체에 대한 존중을 선포한 것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곤은 세상의 눈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변종이다. 할아버지와 강하 식의 걱정이 곤의 존재를 투명인간처럼 만들긴 했지만 곤에겐 그것이 최선의 방어벽이기도 했다. 그 방어벽이 무너진 것은 강하의 엄마 이녕 때문이다. 그러나 곤이 세상을 향해 조금 더 먼 시선을 가지게 해준 사람도 이녕이다. 약물중독자 이녕의 모습에서 곤 자신보다 못한 인간이 여기에도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안다. 그래서 더욱 동질감을 느끼고 보호해주고 싶어 한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잘난 사람이 없다. 곤의 아가미처럼 상처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곤은 그래도 물속에서나마 자유로운 영혼이 될 수 있다. 오히려 곤에게는 아가미가 해방구다. 그러나 곤의 주변 인물들은 그 해방구가 없다. 다들 물에서 살아남지 못하는 아가미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곤처럼 자유롭게 포효할 수 있는 틈이 없다. 다수의 잣대로 곤은 이방인이지만 그건 겉모습일 뿐이다. 제각각 이방인의 속내를 품고 살아간다. 단지 공통분모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그것을 위장하거나 감추고 있다. 구병모의 탄탄한 장치는 여기저기에 숨어 있다. 곤의 이름부터 등장인물들의 이름 역시 모두 물과 관계된다. 너 댓 살 된 곤을 호수에서 구해준 강하(江河), 그의 엄마 이녕(泥濘) 그리고 곤이 구해준 사람이자 곤을 찾기 위해 강하에게 흘러간 해류(海流). 구병모는 왜 그토록 물에 집착했을까. 구병모는 아주 살짝 답을 가르쳐준다. “모든 물질의 응집력은 수분을 전제로 하잖아요.(164p)". 이 한 문장이 구병모에게 물이 선사한 모티브에 대한 대답이 아닌가 한다. 물이 주는 근원의 힘. 그 물을 넘나드는 아가미 가진 인어를 등장시킴으로서 우리에게 경계 밖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을 훔쳐보게 해준다. 그 시선이 나의 시선이 될 때 우리의 공감력은 확대되고 원자화된 우리가 하나의 물질로 탄생하게 되게끔 동력을 선사한다. 전작만큼의 신선함은 덜했지만 그녀의 풍부한 상상력만큼은 인정한다. 현실을 넘나드는 그녀의 재주가 이렇게 문학작품으로 나올 수 있는 것은 그것을 접하는 우리 같은 범인에게는 쏠쏠한 행운과 재미와 감사함도 선사한다. 무엇보다 작품 설명이 담겨 있어 소설 『아가미』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곤이 호수에서, 강으로...... 결국은 바다로 흘러갔다. 그는 아마 지금도 강하와 할아버지를 찾아 바닷 속을 헤집고 유영할 것이다. ![]() 만화로도 제작되었다고 하니, 기회가 있다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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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쁜 숨을 몰아쉬며 공활한 하늘을 쳐다보았을 때 한 마리 새가 창공을 비행하며 저 멀리 사라진다. 훨훨 날아올라 자유롭게 비행하는 새 한 마리는 지상에 발을 딛고 일상적 삶을 잇는 스스로에게 미지의 세계로 이끄는 동인(動因)으로 작용한다. 자유를 통해 안식을 얻으려는 이들에게 장자의 사상적 깊이를 가늠할 수 있는 상상의 새 대붕(大鵬)은 하루에 구만리를 날아오르는 자유로움으로 귀결된다. 새가 되어 구만리장천을 나는 대붕이 되기 위해 처절히 노력하였던 곤(鯤)이라는 물고기가 있었다는 사실을 잊고 지낼 때가 있다. 곤이 대붕으로 변신하려는 노력은 바람을 잘 타는 것에 기인한다. 물비린내를 풍기며 등에 반짝이는 비늘을 달고 일반인들의 눈에 띄지 않는 길을 걸어왔던 아이가 곤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또 다른 구성원으로 한 집에 머물며 겪는 일련의 과정은 가히 충격적이다.
택시비가 모자라 다리 앞에서 차를 세운 뒤 걸어서 다리를 건너기로 마음먹은 해류는 부주의로 떨어뜨린 휴대폰이 철책에 걸리자 그것을 주우려다 그만 강물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녀는 죽음을 떠올렸지만 유영하는 물고기를 닮은 사람이 나타나 목숨을 구해 주고는 물거품 속으로 사라져버리고 만 뒤라 해류는 생명의 은인을 더 이상 찾을 수 없었다. 죽었다고 생각한 순간 다시 숨을 쉬게 된 해류는 삶의 의미를 다시 떠올리며 주어진 생활에 적응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자신을 건져준 사람을 둘러싼 물음들이 호기심으로 이어졌다. 조용한 몸가짐으로 어눌하게 말하는 그의 목과 귀 사이에 나 있는 구멍이 눈길을 끌었다.
강가에 깃들어 사는 이들은 마음이 답답할 때나 번민으로 일상이 버겁다고 여길 때면 흐르는 강물에 시름을 흘려보내고 속죄하는 내면의 의식을 치를 때가 있다. 누구에게도 터놓을 수 없는 이야기를 마음으로 말 하고 씻어 내리기를 반복하는 동안 정밀함 속에 정화를 얻기도 하지만 흐르는 물속에 몸을 던져 풍진 세상과 결별하는 이들도 있어 강은 소멸과 재생의 공간으로 복합적이다. 낡은 트럭 안에서 비를 피하고 바람을 막으며 지내던 가장이 이내천을 찾아 죽음을 결심하기까지 곤궁과 결핍은 삶의 족쇄로 자리하였다. 아들을 안고 물속으로 뛰어든 가장은 시신으로 떠올랐고 어린 아들은 오랫동안 이내천을 끼고 살았던 할아버지에게 구조되었다. 딸이 버리고 간 외손자 강하와 퇴락한 집에서 함께 살아온 할아버지와 소년은 한 식구로 묶였다.
세상에 완벽하게 버려진 소년은 강하의 학대를 받을 때도 있지만 본능적인 방어기제로 노인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방법을 택해 일상을 이어갔다. 그는 남들과 다른 신체적 조건으로 사람들의 눈을 피해 살아야 할 숙명을 타고 났지만 그것을 불평하고 푸념하기보다는 물에 닿을 때마다 더 싱싱하고 신선해지는 현실을 받아들임으로써 이내호 근처에서 살 수 있었다. 생명체는 그것을 부르는 자에 의해 다른 이름을 가질 수 있고 그 이름으로 오랜 시간 살아 숨 쉴 수 있다면 가치 있는 일이라 여긴 소년은 곤으로 불려졌다. 강하는 잔병치레 없이 빠르게 성장하는 곤이 자립할 수 있는 밑천이 마련될 때까지 그를 보호하는데 암묵적으로 동의해오다 자신을 버고 간 엄마 이녕이 20년 만에 친정을 찾아들어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강하를 알지요?” 투숙객으로 강 구경을 시켜달라던 여인에게서 기억 저편에 새겨두고 지낸 이내천 소식을 전해 듣는다. 이녕의 죽음에 연루된 곤이 호수공원으로 재정비된 이내천을 떠나 온 지 흐르는 시간 속에 존재를 알리는 방안을 찾던 중 전화기를 빌려 사진을 찍고 그것을 강하에게 전송하였다. 강하의 배려로 마을을 떠나오게 되었지만 곤은 자신의 생존을 그에게 전하려 했다. 물속에서 구해 준 여성이 투숙객 해류였고, 그녀는 강하와 마음의 문을 열고 소통을 시작할 즈음 기습적인 폭우를 동반한 돌풍으로 실종된 강하 소식은 또 다른 죽음을 떠올리게 하였다. 여느 사람들과 다른 모습을 하고 물속에서 더 자유로운 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존재 자체를 존중했던 강하가 곤을 떠나보내며, “그래도 살아줬으면 좋겠으니까.” 라고 희망을 줬던 강하가 물속으로 사라졌다.
아가미에 물을 머금고 있다가 수면 위로 물을 토해내는 물고기가 뭍에서 사는 우리들에게 서로의 아픔을 어루만지며 유대하며 살아가라고 가느다란 음성으로 전한다. 물속에 빠진 자신을 구해 품어 준 강하와 노인이 이었기에 곤은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었다. 뭍에서의 생활이 힘겨울 때마다 물속으로 유영하며 죽음으로 향하는 이를 살려내 생존의 의미를 실어 준 곤이 바람을 잘 타서 하늘을 나는 붕으로 살지는 못하지만 뭍에서 존재 가치를 실현하며 살아내는 일이 강하의 못다 한 삶을 잇는 일이기도 하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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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든 일상 속에 심호흡하듯 내려놓고 싶었던 것들이 많았다. 긴 기다림 속에 어제 만난 구병모 작가의 <아가미>. 몽환적 일러스트에 홀려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는데, '우리는 동소체와도 같은 생물이에요'라고 닫는 작가의 말에 이르기까지 쉼없이 긴 호흡으로 따라갔다. 분량으로 따지자면 장편과 중편의 경계에 놓이지만, 짧은 이야기를 읽는 내내 주인공 '곤'의 물 속 유영이 환영처럼 따라다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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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을 만났을 때 나는 빨리 넘어가는 책장을 부여잡지 못하고 종종거린다. 뒷 장의 내용이 너무도 궁금해 잠못 이루고 천천히 읽고자 하였으나 어느 새 마지막 장이 왔을 때는 어쩔 줄을 모른다. 그래서 마지막 장을 덮자 마자 다시 읽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두 번을 읽었다. 우리는 한때 물고기였다. 처음에 읽을때는 나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새도 없이 곤과 강하에 푹 빠져 곤의 어찌할 수 없는 것에 눈물을 흘렸고 자신을 버리고 다른 멀리멀리로 가버릴 수도 있다는 질투에 빠진 강하가 안타까워서 나는 눈물을 흘렸다. 물속에서 부유하듯 그렇게 떠나갈 것만 같아 애타하며,,,,, 곤,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는지, 아버지와 함께 이내호에 풍덩 빠졌을 때 생명에 대한 본능적인 힘으로 인해 생겼는지 알수 없지만, 귀 뒤쪽과 목 사이에 칼로 그어놓은 듯한 아가미를 가지고 있다. 커 가면서 등의 푹 파인 곳에 색색의 빛을 발하는 아름다운 비늘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을 구해준 강하의 외할아버지와 강하와 함께 자라온 아이다. 어떠한 일이 생겼을 때 그 가족에게서 떠나올 수 밖에 없으면서도 늘 강하를 잊지 못한다. 육지에 살고 있지만 물속에서 더 편한 곤은 이내촌의 호숫가가 있는 곳에서 자랐다가 더 큰 강가로 옮겨갈 뿐 자신이 숨쉬고 가장 편안한 물에서 떠나지 못한다. 강하, 큰 소리를 듣고 이내호 호숫가를 나간 외할아버지를 따라 간 곳에서 곤을 처음 구해 온다. 기관에 알리자는 할아버지의 말을 거스르며 곤을 거두고자 했으며 그에게 '곤'이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강하는 늘 불안했다. 자신과는 다른 존재인 인간이면서 물고기인 곤이 호수에 빠진 아이를 구할때부터 자신을 버리고 자신이 갈 수 없는 곳으로 떠나버릴 것만 같아 늘 불안해 했다. 사실 그들에게 붙은, 언제 바뀌어도 이상하지 않은 임의의 이름 같은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들은 모두 살아 있었고, 살아 있는 건 언제 어디서라도 그걸 부르는 자에 의해 다른 이름을 가질 수 있었으며, 곤에게 의미 있는 건 그것을 뭐라고 부르는지가 아니라 그것이 얼마나 오래도록 또는 눈부시게 살아 숨 쉬는지였다. ~~~~~ 62페이지 중에서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내 등에 아름다운 비늘이 있었으면 했다. 아가미가 있었으면 더 좋았겠지. 물속을 유영하면서 어디선가 있을, 누군가를 애타게 찾고 있을 곤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것 때문에 두리번 거릴지도 모르니까. 무심히 보았던 그 강의 물속에서 곤이 숨쉬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강가 어딘가에, 강물 속의 어딘가에, 수풀이 우거진 강가에 서 있다면 나는 늘 곤을 그리워할 것 같다. 해류가 그리워했듯, 강하가 곤을 그리워했듯. 곤을 그리워한 강하를 또 그리워할 것 같다. 이 둘은 내 그리움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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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족스러운 작품이었습니다. 작가에 관해 한껏 기대를 가지고 작품을 대하면 그만큼 만족스럽기 어려운 상황인 것을 감안해본다면 더욱 가산점을 드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작가 구병모 씨는 창비 청소년 문학상 당선자 출신입니다. 1회가 김려령 작가님의 <완득이>였고, 2회가 <위저드 베이커리> 구병모 작가 님의 작품이었습니다. 완득이를 사랑하시는 독자 분들께는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저는 완득이가 그리 완성도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베스트셀러란 실력이 아니라 운이 만든다는 걸 검증해 보여줬을 뿐, 작품 자체로는 아마추어스럽기 그지 없었다고 저는 생각하거든요. 솔직히 그 정도 글 쓰는 사람은 바닷가에 모래알처럼 널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베스트셀러이기는 하지만 1위라고는 인정되지 않는 작품이었지요. 그래서 그 작가가 차기작을 발표해도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습니다. 헌데 2회 당선작인 <위저드 베이커리>는 달랐습니다. 이 작품이야 말로 바닷가에 모래알이 아니라 프로 작가로서의 면이 보여지는 공력을 지니고 있었지요. 해서 그녀의 차기작이 기대가 되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터였습니다.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매년 수많은 신인 작가들이 등단하지만, 다 거기서 거기라는 느낌이 지배적이었는데 구병모 작가님의 필력은 조금 남다르다고 저는 생각했었습니다.
아니다 다를까, 확실히 수준이 다른 공력을 가진 작가 님이십니다. 작품에 아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언제나 그렇듯 그 미흡함을 덮을 만큼의 다른 장점이 있다면 얼마든지 커버가 되는 거니까요. 여기서 아쉬웠던 점은 작품의 구성이었고, 초초장점은 문장이었습니다. 문장이 뭐랄까, 작가 스스로 뭔가를 시험해보고 싶으셨던 모양입니다. <위저드 베이커리>와도 사뭇 다를 뿐만 아니라 한국 소설을 통틀어 봐도 아주 개성있는 문체였습니다. 대단한 장문이거든요. 한 문장을 이 정도 길이로 구사하려면 대단한 자신감이 있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하고요, 엄청나게 되풀이해서 읽었을 거라고 짐작됩니다.
저도 예전엔 간결한 단문을 좋아했습니다. 물론 지금도 싫어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문장을 보는 안목이 좀 생긴 다음부터는 장문의 매력에 빠지기 시작했는데요, 장문을 제대로 구사하면 하나의 멋진 음악같거든요. 문장이 선율처럼 흐르는 느낌이 든달까요? 그러니까 짧은 단문으로 문장의 리듬감을 잘 살리면 경쾌한 재즈를 듣는 느낌이 들고, 긴 장문으로 리듬감을 살리면 스케일이 큰 피아노 연주나, 멋진 드럼 솔로를 듣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지요. 입에 착착 감기게 말입니다. 그런데 짧은 단문으로 탁탁 끊어서 리듬감을 살리는 감각보다 긴 장문으로 리듬감을 살리는 게 훨씬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래서 그런 리듬감과 호흡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이 안되면 아예 단문으로 글을 쓰라고 고수들이 얘길 하는 게 아닐까요? 그러니까 긴 호흡으로 문장을 구사하면서도 한눈에 문장이 들어오고 그러면서도 입에 착착 감기는 리듬감을 구사할 수 있는 사람만이 긴 문장을 사용하라 그말이고, 그 말은 곧, 그것을 구사할 수만 있다면 아주 멋진 작품이 될 수 있다는 하나의 개런티이기도 한 것입니다. 반면 그 긴 문장의 호흡과 리듬과 디테일을 잘 살리지 못하면 난삽하기 그지 없는 글이 될 확률이 매우 높으므로 그만큼의 위험성을 짊어지고서까지 모험을 하고 싶지 않는 게 아마도 대부분 작가들의 생각이지 않을까도 싶습니다.
연주자라면 아마 누구라도 언젠가는 정말 길고 큰 스케일의 음악을 흠없이 연주해보고 싶은 마음이 없을 리 없을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과연, 아무나 할 수 있는 공력이 아니므로 시도하기 대단히 어려운 일이지요. 그만큼 성공하기 어려우니까요. 그러나 여기, 구병모 작가님은 과감하게 시도했고 제가 이제까지 읽어본 한국 소설 중에 가장 긴호흡의 문장을 사용하고 있으면서도 입에 착착 감기는, 그러니까 비록 등단한지는 얼마 안되는 신인이라고는 해도 이미 언더그라운드 생활이 절륜한 냥반이라는 것 정도는 쉽게 느낄 수 있는 실력자라는 사실을 여지 없이 확인시켜 줍니다. 소설가가 좋은 문장을 구사하기 위해서 시를 읽어야 하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가 문장의 운율을 익히기 위해서라고 어디선가 주워들은 적이 있고 또 맞는 말이라고도 생각하는데, 거기에 더불어 좋은 문장을 구사하는 소설가가 되려면 음악적인 리듬감 또한 좋아야 한다는 게 저의 생각입니다.
자, 여기 장문에 이제 운율이 덧씌어져 리드미컬하게 긴 호흡으로, 긴 문장임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쏙쏙 이해가 되면서 잘 읽히는 과정 가운데 익살이 포함되면, 혹은 뻔뻔함이 삽입되면 그것이 바로 무성 영화 시대의 변사와 같은 느낌으로 독자에게 전달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천명관 작가 님의 <고래>가 그렇고 공지영 작가 님의 <진지한 남자>가 그렇습니다. 이 작품, 그런 장점이 아주 잘 살아있어서 그점 하나만으로도 별 다섯이 날아가기에 충분했고 문체의 유니크함만 보더라도 천편일률적인 한국 소설 문장의 획을 달리 그어주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거기에 더불어 이 작가 님 어휘 구사력이 매우 뛰어나고요, 묘사 또한 절륜합니다. 감각적이라고나 할까요? 강하의 엄마가 약물에 중독되어 그 느낌을 묘사하는 장면은 아주 압권이었지요. 대단한 설득력과 흡인력을 가진 묘사였습니다.
이야기를 끌어가는 힘도 아주 좋았습니다. 적당한 호기심을 자극하면서 재미있게 진행되는데, 이것은 말하자면 책을 읽다가 밥을 먹으러 가야한다거나 응가를 해야 한다거나 잠시 다른 일을 하게 되었을 때 확연하게 느낄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아아, 읽고 싶다라는 생각이 얼마나 간절하느냐에 따라 매력의 크기가 결정되는 것이지요. 그것을 두고 바로 흡인력이라고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작품도 그랬습니다. 일단 저는 문체에 뻑이 가 있었기 때문에 문장을 읽는 맛만으로도 이미 저의 기대치에는 거의 충분하달만큼 차올랐고, 그러기에 불만이 거의 없다고 봐야했지요.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아쉬운 점은 바로 구성이었습니다. 뭔가 좀 부족한 느낌이 없지 않았습니다. 가령, 곤이 아버지와 함께 호수로 들어간 다음, 강하와 그 할아버지의 손에 의해 건져진 시기 전후로 해서 대체 곤의 유전자 변형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에 관한 이야기가 전혀 없다든가 하는 부분에서의 개연성 같은 것을 예로 들 수 있겠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아쉬웠던 점은 강력한 곤의 캐릭터에 비해서 이야기의 스케일이 너무 작았다는 겁니다. 이 아이는 정말 뭔가 대단한 부피를 느끼게 하는 존재감이 있는데 이야기는 정말 자잘했거든요. 커다란 물고기를 몸이 꽉 차는 1인용 양은 냄비에 넣어 놓은 느낌이랄까, 조금 답답한 감이 없지 않았습니다. 캐릭터의 힘에 비해 이야기의 볼륨감이 너무 부족했어요.
그러나 워낙 절륜한 기술력을 가진 엔지니어를 보는 느낌이어서 내가 다음 번에 집을 지을 때도 반드시 당신한테 맡긴다 싶을 만큼 신뢰가 가는 몇 안 되는 한국 소설가 중에 하나가 되겠습니다. 환상 문학에 있어서 황정은과 구병모, 현재 저에게 있어서는 이 두 냥반이 거의 쌍두마차가 되는 군요. 이들의 작품은 망설이지 않고 손에 들 수 있다하는 신뢰라는 건 확실히 작가한테 복이 아니겠습니까? 능력자는 가진 능력만큼 실력을 절대적으로 인정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참, 좋은 작품 말미에 쓰인 작품 해설은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팥죽 위에 뱉어놓은 침 같았습니다. 쓰는 자신은 과연 무슨 얘기인지 알고 썼을지조차 의심스러운 난삽하기 그지 없는 문장을 해설이랍시고 거기 왜 집어넣은 건지 편집자의 의도를 도무지 알 수 없네요. 아니면 좀 문장이라도 잘 정리해서 글을 쓰는 평론가의 글을 싣던가. 어떤 작품이든 평론은 과연 필요한 것이고 그것이 칭찬이든 욕이든 작가에게 도움이 되는 약인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것도 설득력 있고 이해하기 쉽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수 있는 글에 한해서지 이게 무슨 안드로메다에서 호박씨 까는 듯한 글을 실어놓고 작품 해설이라니, 없느니만 못한 겁니다. 안 읽으면 그만이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분이 있다면 니가 책을 읽어봐라, 그게 되나. 꼭, 일보고 뒤 안 닦은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데 그게 그지 같은 글이면 뒤를 닦아도 깔끔한 기분이 안드니 굳이 해설을 실어야 한다면 작품에 피해가 안 가는 좋은 글을 좀 실어주시옵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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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아 안녕? 수영을 못하는 나는 네가 부러웠어. 발이 땅에 닿지 않으면 겁을 먹는 나는 네가 부러웠어. 스노클링 할 때 숨만 쉬며 다리만 움직여도 되는데, 다리가 땅에 닿지 않는다는 게 너무 무서워서 멀리 가질 못했거든. 수영을 배울 때 물에 빠지자 강사가 막대기를 넣어주었을 때 180Cm의 물에서 살겠다고 막대기를 부여잡아 강사에게 물벼락을 맞은 기억이 나서 네가 부러웠어. 해리 포터는 아가미풀이 있어야 아가미가 생기는데 넌 자연적으로 생겨서 물과 친해질 수 있다니 그것도 부러웠어.
넌 나와 다를 뿐인데. 세상은 네 모습을 호기심거리로 받아들일 거라 생각한 할아버지와 강하 때문에 그들과 살면서도 마을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한 건 너무 안타까워. 게다 회를 뜨는 모습을 보여주며 너를 협박한 강하의 모습에 너무 화가 났어. 너무나 어릴 적에 아버지가 다른 곳으로 간 것도.. 만약 아버지와 어머니가 사셨다면 넌 곤이라는 이름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불리며 귀여움 받고 학교도 다니며 다른 모습으로 살았을 텐데.. 그런 생각도 했지?
너의 반짝이는 모습을 아름답게 생각한 이녕과 그녀의 모습, 하백의 깊은 사랑을 받은 신부를 연상시킨 해류와의 만남과 그녀가 들려준 이야기. 두 여자의 만남으로 네 인생이 바뀐 것도 참 슬퍼.. 우리의 삶은 우리가 개척해나가거나 변화시켜야 하는데, 모르는 사람에 의해서 우리의 삶도 그렇게 바뀔 수도 있으니까. 이젠 강 사진을 찍지 않아? 이젠 어떻게, 어디에서 살 거야? 강하의 말대로 계속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지낼 거야? 너의 미래가 궁금해. 내가 어떻게 해 줄 수 없으면서도.. 너무 형식적인 말이지만.. 곤, 어디에서 살든 너의 행복을 빌어줄게. 만약 널 만나게 된다면, 기쁘게 웃어줄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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갇힌 물, 썩은 물, 빠져나갈 곳이 없는 '막장'같은 저수지, 내지는 소. ‘호수’라는 근사한 이름을 갖고 있긴 하지만 이내촌이 둘러싸고 있는 이내호 역시 그 본질적 속성은 변함 없다. 사람들은 빠져 죽고 냄새는 진동한다. 편혜영이 『아오이 가든』에서 밝힌 것처럼. . (자세한 것은 시체 썩은 내로 진동하는 세상(http://blog.yes24.com/document/2685990)를 참조할 것) 곤은 모세와 같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기적적으로 건져지지만 모든 건 거기까지. 모세처럼 건져지자마자 공주의 양자로 들어가는 운까지는 곤에게는 없다. 곤은 외손주를 기르며 사는 노인의 손에 키워진다. 노인은 폐지를 줍고 외손주는 할아버지에게 험한 욕도 마다 않는다. 가족은 가장 기본적이고 1차적인 사회화 집단이다. 그러나 이 가정은 비와 바람을 피할 최소한의 주거지 역할만 할 뿐이다. 전혀 사회화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어떠한 애정이나 지지도 받을 수 없었다. 친모는 도망가고 친부는 자살하고 홀로 남은 곤에게 이들은 가족과 같은 존재이자 세상의 전부이다. 그의 세상은 어떠한 희망도 없이 암울하고 폭력이 난무한다. 귀와 목 사이에 물고기 같은 아가미를 가지고 있고 등에 반짝이는 비늘까지 있는 곤으로서는 언제든 자신도 횟감이 될 수 있다는 두려움 속에 스스로를 엄폐하게 된다. 세상과의 단절. 어떠한 소통도 있을 수 없다. 상처받았으나 스스로 상처받은 줄도 모르는, 그 상처를 남탓으로 돌리며 남을 해할 줄도 모르는. 불쌍하고 가련하지만, 그러나 아름답고 아름다운 웃자란 소년, 혹은 나이 어린 성인 남자가 바로 곤이고 이 작품은 그런 곤과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약간의 파격이 있긴 하지만(개인적으로는 반드시 있어야 할 소설적 장치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입장을 옹호하자면 아마도 작가는 이런 의도가 아니었나 싶다. 어떤 임계점, 혹은 도저히 참지 못하고 폭발할 수밖에 없는, 참을 수 없는 그런 상황. 그런 상황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라는 것. 믈론 홍수로 인해 죽게 된 할아버지와 손주처럼, 흘러넘치는 주체할 수 없는 폭발은 사람을 상하게도 하고 해도 입히고 심지어 죽게도 하지만, 곤의 경우처럼 그런 극단적이기까지 한 어떠한 계기가 없다면 갇힌 것은 흐르지 못한 채 계속 썩어갈 수밖에 없다는 이중적 진리. 갇히고 썩은 물은 고여 있기에 썩을 수밖에 없다. 썩도록 두지 않으려면 터뜨릴 수밖에 없다. 결국 곤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고여 있는 물에서 강으로, 강에서 바다로 흘러가게 되는데 그것은 결국 자신을 찾아가는 여행이다. 그 여행의 마지막 종착지가 바다라는 것은 점점 더 넓은 곳을 향해 간다는 어떤 ‘성장’의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겠으나 시원으로의 회귀 혹은 태고적 생명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라는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겠다. 흘러 넘칠 때 생명력을 가질 수 있다. [덧붙임] 전체적으로 아름다운 작품이다, 뭐랄까? 80년대식 정서랄까? 약삭빠르고 경쟁적인 도시인의 정서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오지리에 두고 온 서른 살'같은 그러한 정서.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이해할 수 없으나 공감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여운이 큰. 타인의 고통, 혹은 둔감했던 스스로의 고통에 대해 공감해볼 수 있는. 언제 나는 나의 아가미를 잃어버린 것일까? 어째서 아가미를 잃어버린 것조차 잊은 채 살고 있는 것일까? 바다를 꿈꾼 적이 언제였던가? 퇴화된 아가미를 기억하기. 어쩌면 모든 것은 거기서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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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미를 갖고 태어난 소년의 기구하고 처연한 삶의 기록
위저드 베이커리에서 판타지의 세계를 보여준 작가의 또다른 대표작. 개인적으로는 위저드 베이커리보다 이 책이 더 좋은 것 같다. 작가의 성향인지, 이야기마다 판타지적 요소를 조금씩 가미하지만, 이 책은 판타지 소설은 아니다. 소설은 곤과 그를 둘러싼 인물들의 이야기로 채워진다. 곤의 존재를 알고 있는 이들은 그를 동경하고 그리워하는 한편, 신비롭고 두려운 대상으로 여기기도 한다. 이는 곤이 상징하는 '세상의 흐름에서 자유로운, 순수의 세계'에 대해 각 인물이 갖는 이미지와 입장을 반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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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를 읽으면서 많은 의문을 가졌던 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