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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크리트 유토리아>는 자음과 모음 출판사의 하이브리드 총서 2 에 해당하는 책이다. ![]()
디자인 연구자. 현재 홍익대 BK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국의 디자인: 산업, 문화, 역사』, 『한국의 디자인 02: 시각문화의 내밀한 연대기』,『디자인플럭스 저널 01: 암중모색』 등을 기획 편집했으며, 『인터페이스 연대기: 인간, 디자인, 테크놀로지』를 썼다. (저자 소개글 중에서 ) 한국 인문학의 지형도를 그리는 책 중의 한 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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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살고 볼 일이다. 핵폐수가 불거지니 안 먹던 스시에도 손이 간다. 그 시작은 조미김이었고 이제 스시도 먹는 사람이 돼버렸다. 룬거니 공동정부가 쑥과 마늘 먹고 ‘사람이 된’ 신화를 호출하며 사람을 변하게 (테스트)한다. 여름에도 우리가 모이면 그늘지고 더위도 기눌러 밀린다고 우스갯소리를 하며 미칠스트레스를 날렸다. 이번 태풍이 국민들을 더는 힘들게 하지 않기를, 현 정부의 민낯이 낱낱이 드러나길 소망한다. 빈이 덕에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몸 편히 봤다. 마지막 영화관의 기억이 몸이 훅 날라 간 뒤라 영화 내용과 세부적 분석보다는 영화관 가는 거 자체가 시도였다. 저 멀리 등선까지 보이는 풍경을 한눈에 보며 우리에게 이런 벗어남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구동성으로 국가 시스템의 붕괴가 곳곳에서 터져 괴로워 뉴스를 못 보겠다고들 한다. 잼버리 관련 인터뷰 중 국격 추락에 대해 교포의 입장을 묻자 “원래 그 런 나 라 인줄 안다”는 말이 비통했다. 동명 서적이 있어 감상을 여기에 올리는 것이며 책과는 무관함을 밝힌다. 앞서 말했듯이 영화를 풀어진 마음으로 보았음에도 중간 중간 한숨이 토해졌다. 어쩌면 2023년 한국의 여름이 아니라면 보다말았을지도 모를 영화라는 누군가의 말이 맴맴 돈다. 재난영화에서 가족영화로 흐르는 방향도, 다소 헐거운 전개(연극적), 미니멀 설정, 첫 상황 설명 누락(포스트 아포칼립스라서)도 내겐 편했다. 회원들은 좀 답답하다했지만 내맘대로 보는 재미~ 공상의 날개를 다는 것으로 난 만족. 세상 서글픈 ‘즐거운 나의 집’이었고, 누군가의 말대로 “아무도 없는 쓸쓸한 너의 아파트” 가사가 예사롭지 않게 들렸다.
아주 잠시 한 동 남은 아파트를 강남 모 아파트와 겹쳐 보았으나 예민한 시사성을 피하기 위해서인지 전반적으로 임대아파트의 느낌이 나게 그렸다. 돌아갈 집이 없다면 살아갈 이유가 없는 모두의 비극이 근간에 깔려 나는 몹시 진지해졌다. 홈(고향이기도)을 마련하기 위한 집착과 광기는 본능에 가까워 궐기 리더가 섬뜩하다가도 우리 안의 괴물을 보게 한다. 나는 이병헌을 보며 아일랜드 독립운동을 다뤘던 극이 생각났다. 내부자만으로는 어떤 변화 기미나 돌파구가 생기지 않으니 눈 슬쩍 감고 정체불명의 스트레인저를 감싸며 영웅화하다 거품이 빠지고 초토화되는 스토리. 그 끝이 평온이나 재건이나 바람직한 향상이 아닌 잠시의 고임과 정체에서 벗어나는 원래 그 자리인 것이 겹친다. 고투파?! 이웃이 이웃을 의심하고 서로를 구별짓고 분리하고 처단하기 위해 몽둥이를 드는 식인종 놀음이 불편하고 보기 싫다는 의견도 있었다. 전쟁놀이의 축소판 같아서다. 전쟁을 일으키고 이익을 취하는 자들은 쏙 빠져 안전지대에서 기름진 뱃속과 비밀 곳간을 채우며 히죽거릴 머그가 퐙! 다행히 다른 회원들은 저런 상황이라면 나가 사태 파악에 힘쓸 거라 했고 같이 사는 쪽을 택할 거라 했다. 김태형의 ‘한국인의 마음속엔 우리가 있다’가 메아리쳤다. 리뷰언제쓸?!
박보영의 지나치게 큰 샤 머리핀이 눈에 거슬리긴 했다. 허나 편안한 잠 속에서 세상을 떠난 남편의 사랑과 구원의 증표이자 수호천사로 보면 또 찡하기도 하다. 소박하고 작은 힘이지만 이웃을 케어하고 진실을 추구하는 그는 빛났다. 전쟁이라는 잔혹사에서 폐허와 죽음을 애도하며 갈무리해 다시 생명의 땅을 일군 어머니들의 사랑(땅의 여신 가이아)을 그려보게 한다. 그의 정신과 몸을 지키는 서로의 조력이 포인트가 아닐까 한다. 기운 공간과 둥근 먹거리를 나누는 손길과 발길이 실제 빛인 게다. 성당의 오큘라에서 인간이 평안을 얻고 그 빛을 따르는 이유는 그 안에 있는 모두에게 고루 평등한 희망을 주기 때문이다. 나쁜 소식으로 도배됨은 묻힌 좋은 소식들에 대한 반증이라는 스승의 말을 중심에 둬 보기로 한다. 김은경 혁신안 고맙습니다
영화 보느라 못 마신 김빠진 코크를 홀짝이다가 시원하게들 맥주를 들이켜 조금 얻어 마셨다. 조국 가족이야기가 맺음말이었는데.... 스터디위드한다던 쌤은 괘안은지.... 우리와는 급이 다른 사람들이니 걱정말자 했는데 미틴검찰이 모든 학력을 내려놓은 자녀들까지 친다. 반성문도 받았자나! 정도껏 해야지 선넘기가 저들의 종특인 듯하다. 시기질투와 정적 제거밖에 모르는 70년의 해묵은 검찰독재가 집단지성과 따로 놀며 검은 악취를 풍겨 밥맛없어(미토콘드리아 신경 쓰느라 불면서ㅋ) 죽겠다. 광복절 사면 명단은 또 어떻고. 국민이 권력을 준 적도 없는 설치류 관종 병자 국정 파트너는 개무시가 답일지도 모르겠다. 우린 너랑 놀아날 사람도, 그럴 때도 아냐! 아이들의 축제가 누군가의 장식이 되어 무너지다 국민이 때 아닌 시험을 치르느라 생고생이다. 권력욕에 사로잡힌 바퀴벌레들의 못된 습성이 본격화되고.. 멸문지화의 모래바람이 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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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아파트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콘크리트 유토피아》 아파트, 세대론, 시각 문화를 관통하는 다자의 시선
최초의 순간은 이러했다. 1999년 세기말의 분위기가 한창이던 때. PC잡지의 밀레니엄 특집을 펴놓고 인류에게 급작스럽게 닥칠 위험의 가상 시나리오를 흥미진진하게 읽어나가던 어린 나에게 아버지는 이사소식을 알렸다. 이미 여러 곳의 모델하우스와 내놓은 집들을 보러 다녔다는 것쯤은 눈치로 알았지만 확정된 소식에는 피로와 함께 어떤 확신이 실려 있었다. 그렇게 우리 집은 아파트로의 이사를 감행했다. 셋집의 전세금을 빼는 일이 집주인과의 실랑이로 이어지며 마음씨 좋은 1층 할머니는 우리에게 천인공로할 상스러운 년이 되었지만 우리의 설렘을 망칠 순 없었다. 21평 상계동 신축 아파트를 매입하는 그 순간 마치 버튼을 누르는 것과 같이 우리는 중산층이 되었다. 아파트를 그것도 월세나 전세가 아닌 우리 집을 가졌다는 것은 학교 가정조사지에서 경제수준을 체크할 때 거리낌 없이 ‘중간’에 동그라미를 칠 수 있다는 실질적인 체감으로 다가왔다. 중산층, 이 모호하고도 세련된 단어로 인해 이전과 다를 바 없는 생활임에도 생활은 핍진함을 벗고 쾌활함과 우아함의 탈을 썼다.
그렇다고 형편이나 생활이 극적으로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등유 보일러를 쓰다 도시가스 중앙난방으로 바뀌었다는 것, 화장실의 높은 문턱이 사라졌다는 것 외에는 생활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아파트 단지의 출입구를 지나 알록달록한 놀이터를 앞에 둔 거대한 건물 한 켠에 나의 집이 있다는 사실은 분명 차이가 있었다.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를 때의 미묘한 쾌감, 삼면 거울에 비치는 수많은 나의 얼굴을 마주하며 씨씨티비를 통해 누군가의 시선을 느끼는 이질감들은 분명 이전의 집, 이전의 생활과는 차이를 달리했다. 집들이 온 이전 동네 친구들이 ‘엘리베이터에 카메라 있어’라고 할 때 유독 너스레를 떨며 그들을 무안하지 않게 하려 했던 것은 분명 그들과 나를 분리하려는 의식적인 제스춰에 기인했다.
아파트가 우리에게 말한다
아파트는 전후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핵심이다. 주택사업을 둘러싼 정치 경제적 문제는 물론, 아파트는 등장부터 성장, 확산에 이르기까지 사회에 귀속된 이들의 뇌리에 자리하며 사고와 행동을 강요했다. 아파트는 우리에게 무엇을 사고하게 하는가. 아파트 이전의 삶과 이후 삶의 간극, 한강맨션과 압구정아파트로의 판도 변화, 수도권의 강남화, 포스트 강남까지 아파트는 단순한 주거형태로 단편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거대한 사회현상이자 의식체계로 독자적으로 움직인다. 즉 최초의 설계자의 의도를 벗어나 마치 하나의 인격체처럼 동시대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빈곤한 상상력이 이야기하는 삭막한 도시풍경과 인간성 상실의 우화가 아니다. 아파트를 비난하지만 그 욕망을 숨길 수는 없는 기저, 즉 산업화와 자본주의 체제가 급속도로 진행되며 문명의 틀로 여과되지 못한 소멸과 궁핌에 대한 두려움과 곤두서있는 생존의 욕구는 아파트를 곧 사라지지 못한 계급 잔재의 낙인으로 받아들였다. 그렇기에 삼성물산이 포스트 강남 아파트로 내세운 브랜드 레미안이 “레미안에서 살아요”라고 말할 때 이 말은 일종의 계급 구분에 대한 강력한 진언이 되는 것이다. 즉 레미안에 살 수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구분하고 그것을 은연중에 그러나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 아파트는 곧 부와 권력을 드러내는 일종의 지표이자 상징으로 기능한다. 그렇기에 아파트는 우리를 사고하게 한다. 그것은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가 아파트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아파트라는 정확히는 특정 지역의 특정 가격대의 아파트가 갖는 형이상학적 공간 지위 속에 귀속되는 것이다.
아파트는 무엇을 행동하게 하는가. 1950년 전 세대가 궁핍에 대한 공포를 토대로 악착같이 발버둥치며 국가가 유도한 새로운 계층, 중산층이라는 체제 옹호의 부동층을 자처하고 그 보상으로 주어진 부동산 시세차익을 획득했듯, 386세대가 이 앞세대에 대한 불만과 시기를 표면적 민주주의 성립 이후 증권투자와 강남 8학군 진입 및 분당과 일산에 머물며 자신의 아버지 세대에 대한 증오를 답습으로 역(易)오이디푸스로 생존전략을 변경했듯 이제 그 이후의 세대들은 자신의 아버지 세대의 귀속 재산을 근거로 행동한다. 아버지가 10,20억대의 자산가라면 그 아버지가 소유한 아파트에 근거하여 생활을 이어가며 교육을 통해 계층 계통성을 전유하고자 할 것이고 아버지가 ‘겨우’ 자신들의 몸을 기거할 아파트만을 소유했다면 이제 그 자식들은 자신들이 자기 명의의 아파트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서 생활의 핍진함을 당면해야한다. 이 아파트의 사회학, 콘크리트 유토피아 안에서 행동은 그 주체인 인간 개인이 통솔하지 않는다. 사고가 아파트에 귀속되었듯 당연히 행동 또한 아파트의 실천학을 따른다. 아파트의 실천학 그것은 어렵게 갈 것도 없다. 인류의 보편적인 생존 방식인 양육강식과 엘리트주의로 이어지는 일련의 비극적 산물이 보다 더 도회적으로 그리고 냉철하게 드러날 뿐이다.
아파트를 통해 바라보는 시각 문화와 세대론
박해천이 내는 네 개의 목소리 1960년대 마포아파트를 바라보는 항공 카메라의 시선, 강남의 대규모 아파트 단지, 1940년대생 강남 1세대, 아파트 안에 상주해왔던 꽃무늬의 비인간과 인간의 목소리들은 아파트가 한국사회 시각 문화를 어떻게 변모했는가에 대하여 답하는 동시에 그 사회의 구성원인 개인의 삶을 규정하는 아파트에 대한 문제의식을 드러내며 기존의 정형화된 논의를 도발적으로 돌파한다. 그 도발성은 새로운 시각이나 새로운 증거로 인한 놀라움이 아니다. ‘맞다’, ‘그렇다’라고 무릎을 치게 만드는 동감 즉 아파트에 살고 있으며 또 다른 아파트로의 도약을 꿈꾸는 동시대인들의 기억과 사고에 근거한 친밀성이다. 즉 이것은 특정 부류에 대한 혹은 물화된 실체인 아파트에 대한 비평이 아닌 동시대인들의 뇌리에 존재하는 아파트와 그것이 구현된 실체인 아파트들에 대한 비평이 된다. 즉 아파트는 이제 현대사회를 관통하는 하나의 기호가 아닌 현대사회를 구성하는 상징으로 존재한다는 명징한 깨달음에서 박해천의 논의는 빛을 발한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1999년 중산층으로 변신한 소년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소년은 어떻게 되었을까? 방 두 개의 전형적인 아파트 구조에서 소년기와 청년기를 보낸 나, 지금 글을 쓰는 나는 이곳이 내 부모의 무덤이자 나의 집이 될 것을 체념적으로 깨달은 지 오래이다. 세대론의 구조에 무력감을 느끼며 천착한 것도 내 부모가 특별히 무지했거나 근면하지 않았기에 얻어진 패배의식도 아니다. 분명 모든 것들은 어쩔 수 없었다. 1999년에서 2013년으로의 15년 가까이 되는 시간을 답보로 규정한다면 그 시간들은 ‘죄스럽게’ 느껴질 수 있을 것이나, 그것을 어떤 현상의 일부로 규정하고 직시한다면 그 시간들은 일종의 증거로 지금 ‘나’를 규정하는 어떤 사실과 의식체계로 존재할 것이다. 그렇기에 《콘트리트 유토피아》가 보여주는 지평은 다분히 고무적이다. 이것은 어떤 미래를 도상적으로 그리거나 희망의 문법을 규정하지 않는다. 현 시대에 필요한 것은 앞을 내다보는 일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를 통해서 지금의 도상과 문법을 점검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아파트의 통시적 공시적 역사이자 하나의 창으로써 세계를 드러낸다. ‘규정과 드러냄’ 그 간극에서 짐작할 수 있듯 독자는 이 책을 통해 다자의 시선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 자신이 콘트리트 유토피아를 꿈꾸는 물화된 시선에 동조하든 대항하든 간에 직시의 제스춰는 아파트에 대한 위선이나 위악의 연기(演技)보다는 분명 발전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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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면서 얼마나 자주 구역질이 치밀어오르던지. 다 읽고나니 스스로가 얼마나 싫어지던지. 두눈을 꼭 감고 있어도 보일 것들은 이렇게 다 보이는 거구나. 나란 인간을 거꾸로 집어들고 탈탈 털면 나오는 게 다 이런 거로구나 얼굴은 화끈화끈 달아오르고 도망갈 곳은 없다. 요즘 일상이란 게 일상처럼 흘러가지 않아서 나날이 구토감에 어쩔 줄 모르겠다. 이러다가 사르트르 할아버지와 끈적거리는 포옹이라도 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박해천의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미친듯 읽었다. 잠깐 두통으로 인해 완독은 하지 못했으나 아나이스 닌 언니의 백만불짜리 미소가 머릿속에서 아직도 생생하기만 한데 하필 이렇게 센 녀석을 펼쳐들고말았다. 어느곳을 둘러보아도 아파트아파트아파트, 바라보기만해도 현기증 이는데 그저 마냥 바라보기만 하고싶지 않다. 나 역시 후진 아파트에 살고 있지만 저 초고층 아파트 하나 갖고 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 물신에 현혹되는 건 매번 아파트를 쳐다볼 때마다이니 아무래도 한국에서만 산다는 토종 메이드 인 코리아 아파트 귀신이 있긴 있나보다 싶다. 그래도 아파트에서는 살고 싶지 않다. 금세 돌 것만 같아서 싫다. 그래서 나는 한 번도 아파트에 살아본 적이 없다. 결혼 전까지는. 세상에서 제일 싫은 게 뭐냐고 물으면 그 어린 나이에도 아.파.트.가 그렇게 무서울 수 없었다. 엄마, 아빠, 동생 셋 모두 아파트로 이사가는 걸 찬성했으나 결국 언제나 내 완강한 반대로 주택에서 살았다. 지금도 어쩔 수 없이 아파트에서 살고는 있지만 저층에 살기 때문에 그럭저럭 견딜만. 경관이 좋아봤자 아파트에서 내려다보는 전경이 얼마나 좋을까 싶다. 왜 그렇게 한국 사람들은 아파트를 사랑하는 걸까. 아파트 없는 한국은 상상도 할 수 없다. 한국에서 제일 멋진 건축물이 뭐냐고 묻는다면 어느어느 아파트라고 대야 정답을 맞춘 것만 같을듯.
높디높은 아파트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내 안에 한가득 들어있는 온갖 불순물이 여과없이 내 눈에도 보인다. 한마디로 천박하다. 책 중간중간 아파트 사진을 마주할 적마다 끈적거리는 욕망으로 얼룩덜룩한 초록빛 눈동자를 지닌 괴물이 떠올랐다. 동시에 내가 사는 곳에 대한 자각, 나에 대한 자각을 하게 된다. 아파트와 나의 구별이 모호해진다. 아파트 귀신이 따로 있는 게 아닐지도 모르겠다. 내 나이 서른 다섯. 탄탄한 안정적인 기반을 갖고 있는 건 내가 아니지만 그런 남자와 살고 있으니 나는 박해천의 [콘크리트 유토피아]에 나오는 요상하면서도 전형적인 대한민국 아줌마의 모습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끔찍하고 혐오스럽기만 하다. 어디에서부터 선을 그어야 할지 미리 명확히 해야겠다. 구토감이 흐릿해지기 전에 모두 다 토해버리도록. 그리고 그 다음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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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에서 아파트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곳에서 삶을 시작하고 (아마도) 삶을 마감하게 될 우리들은 어떤 존재로서 받아들어야 할 것이며 이해되어야만 할 것인가
박해천의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그런 거창하거나 바쁘고 고된 세상살이 속에서의 뜬금없는 질문을 내놓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질문(들)에 대한 약간의 실마리들을, 어떤 원인들-효과들이 있는지를 추측하고 생각해볼 수 있게끔 해주고는 있다고 생각한다.
저자의 논의는 박정희 시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아파트 건설이 단순히 주택문제 해소를 위한 방안으로서 어떤 효과와 개선 및 문제점을 만들었는지와 같은 (인문사회학적 / 공학적인) 분석이 아닌 아파트를 하나의 존재로서 이해하면서 어떻게 우리들을 변화시키고 주변을 변화시키게 되었는지를 검토하고 있다.
미셸 푸코와 조르조 아감벤 등이 거론되고 있기는 하지만 알다시피... 그런 이들의 논의를 무척 일부분만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얼마나 그들의 의견이 스며들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찌되었든 그런 의미에서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삶의 조건과 풍경, 정서와 내면화 등 물질적인 측면과 함께 정신-정서적인 측면에 대해서도 의미심장한 분석-해석-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이런 논의를 위한 저자의 논의 방식은 조금은 독특한데, 저자는 논의의 방식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눠놓고 있고 하나는 픽션 다른 하나는 팩트라는 장을 통해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있다.
팩트의 경우 일반적인 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실제 사실들과 그 사실들을 토대로 한 분석들과 해석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크게 특징지을 내용은 없다고 할 수 있지만 앞선 픽션의 내용들의 근거를 제시하는 혹은 명확한 자료로서 제시된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팩트는 일종의 부록과도 같은 의미를 갖게 될지도 모르지만 픽션에서 놓치고 있던 세세한 부분들을 좀 더 정교하게 분석하고 있기 때문에 단순히 부차적인 내용으로서만 생각해서도 안 될 것 같다.
팩트의 경우 최초의 아파트라고 말할 수 있는 마포 아파트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통해서 어떻게 우리들의 생활방식-생활양식이 변화되는지를 그리고 아파트가 어떤 의미를 갖게 되어가며 어떤 방식으로 중요성을 획득해 가는지를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고 있고, 아파트의 내부구조를 채워가는 과정에서의 변화와 구별짓기, 내부와 외부의 변화(상점, 여가, 교육 등)에 대해서 설명하려고 하고 있다.
또한, 아파트-내부를 채우면서 가장 중요하게 되어버리는 가구와 가전제품들, 거실, 안방에 대한 분석들과 여가생활까지 논의를 이어지도록 만들어 단순히 아파트의 등장과 아파트 공화국이라는 말이 나오게 될 정도로 한국의 모든 공간을 채우게 되는 건설-배치-장악의 과정만이 아니라 그렇게 되어버림으로써 어떻게 우리들의 삶이 재구성되고 재인식되어버리게 되는지, 그 개조-변화를 어디까지 생각해볼 수 있는지를 잘 설명해내고 있다.
마지막에 가서는 분당과 용인이라는 신도시를 대표하는 두 도시에 대한 짧은 논의를 통해서 노태우 정권에서 김대중 정권까지 이어지는 과정에서 어떻게 도시계획이 변화되었고 그 변화 속에서 아파트가 삶의 터전이면서 투기의 대상이고 재산증식과 교육, 소비생활과 노후안정을 위한 수단 등 한국사회에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가 부여되고 있는지를 자료와 분석을 토대로 이해시키려 하고 있다.
이런 팩트의 일반적인 논의와는 달리 픽션의 경우는 무척 이례적인 글쓰기를 보여주고 있고, 과시적이고 현란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흥미로운 글쓰기를 보여주고 있는데, 약간은 욕심이 지나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게 되지만... 그 욕심이 혹은 좀 더 다른 글쓰기가 성공적인지에 대해서 평가가 조심스럽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무척 흥미로운 글을 만들어내고 있다고는 볼 수 있을 것 같다.
픽션의 경우 여러 관점을 오가고 있는데, 구체적인 사물로서, 아파트의 입장에 서서 논의를 하게 될 때도 있고, 전지적인 시점에서 하나의 시선-관점으로서 바라보게 될 때도 있고, 저자 본인의 시선에서 논의가 진행될 때도 있는 등 조금은 헷갈리게 만들기도 하고 여러 시선들을 정신없이-우왕좌왕 오가고 있기 때문에 어수선하고 난잡하다는 인상을 받을 때도 있기는 하지만 때로는 자긍심 속에서, 때로는 자기변호 속에서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아마도) 김대중-노무현 정권 시절까지 아파트를 중심으로 어떤 시선과 입장, 관점, 정신적-육체적 변화들을 보이고 있고 아파트를 통해서 어떤 의도와 전략이 있었는지를, 아무런 생각 없이 생겨나고 거주하고 살아가면서 우리들이 어떤 변화들을 겪게 되었는지를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게다가 저자의 논의가 흔한 방식인 해외-서구의 철학적 사회학적 분석의 틀을 가져와 대입시키는 방식이 아닌 (물론, 그런 논의들을 잘 이해하고 있다는 밑바탕 속에서) 그런 논의들을 충분히 알고 있는 것 같고 자신의 논의-분석을 진행할 때 큰 의지를 하고 있어 보이기는 하지만 적극적으로 그런 틀을 가져오려고 하기 보다는 다양한 방식에 의지(소설을 통한 정서적 이해, 인터뷰나 회고록을 통한 사실 확인, 다른 국내 연구자들의 분석을 통한 접근 등)하여 논의를 진행시킴으로써 좀 더 한국사회에 들어맞는, 외부의 연구틀과 결론을 그대로 가져왔을 때의 문제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되도록 거리감을 갖고(혹은 잘 체화시켜서 / 선별하며) 접근하고 있기 때문에 좀 더 의미 있는 분석들과 결론들이 제시되고 있는 것 같다.
과장된 글쓰기 속에서 의미 있는 분석들과 흥미로운 관점들, 진지한 결론들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단순히 독특한 글쓰기로서만 이해될 수 있지는 않지만 아쉽게도 인접해 있기도 하고 여러모로 비슷한 점들이 많기도 한 일본의 경우에 대해서 크게 논의가 진행되고 있지 않으며, 공간 및 사회학적인 분석과 해석 그리고 결론이 대부분이라 아파트를 건설함으로써의 여러 경제적인 이해관계와 상관관계들에 대해서는 여전히 궁금증이 해소되진 못했다.
저자에게 무리한 요구겠지만... 역시나 궁금함을 갖고 있기 때문에 누구라도 설명을 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더 앞서게 된다.
흥미로운 논의이기도 하고, 흥미로운 분석들이 제시되고 있는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좀 더 논의를 이어지게 만들어 김대중-노무현 정권과 그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도 따로 할애를 해줬으면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그러기에는 여러 한계들이 있었는지 서둘러 글이 끝맺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막연하게 갖고 있던 아파트와 공간 그리고 사회라는 주제를 알기 쉽고 충분히 이해되고 설득될 수 있는 선에서 분석을 해놓고 있고 결론을 제시한다는 점이 인상적이었고, 이 논의들을 이대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좀 더 다른 방식으로 이어질 수 있기를 바라게 된다.
참고 :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픽션의 경우는 각 장별로 끝부분에 각주들을 모아놓고 있는 반면 팩트의 경우 개별적으로 밑부분에 설명을 해주고 있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일부러 그런 것인지 편집 과정에서 놓친 것인지 모르겠다. 아마도 가장 적절한 추측을 해보라면 픽션은 내용 전개가 독백의 성격이 크기 때문에 따로 배치한 것 같고, 팩트의 경우 전형적인 인문학적 글쓰기라 밑부분에 적혀져도 문제될 것 없기 때문에 그렇게 했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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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란 무엇인가? 간단히 말해서 그것은 명품이나 브랜드 커피와 다르지 않다. 우리는 왜 명품을 사고, 밥은 굶어도 5천원 가량의 커피를 마시는가? 능력안에서 소비한다고 정당화하려 하지만 소외된 주위를 둘러본 적은 있는가? 이 책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결국 우리는 돌아보기 싫은 우리의 추악한 모습을 직시해야 한다. 그러나 큰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다. 그 추악함이란 본디 본성과 크게 떨어져 있지 않아 다소나마 위안이 될지도 모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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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크리트 유토피아는 " 아파트는 한국의 시각 문화를 어떻게 변모시켰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여정을 담고 있다. 크게 1부와 2부로 구성되어 있고 1부는 픽션, 2부는 팩트로 되어 있다. 내가 특히 주목해서 본 부분은 1부 픽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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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책을 손에 들었을 때 제목과 표지 사진을 보면서 한국의 아파트에 관한 내용이란 것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내가 읽었던 부동산 투기나 아파트 과열 경쟁, 그로 인해 양산되는 하우스푸어와 관련된 내용, 즉 한국사회에 있어서의 아파트의 정치 · 경제적 문제에 대한 담론일 거란 선입관을 가지고 책을 펼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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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처음 서울을 방문해 아파트단지의 거대함에 충격을 받은 이후, 나는 어떻게 이런 대단지 아파트가 양산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박사 논문의 주제로 삼기로 마음먹었다.” 프랑스인들에게 아파트는 부정적으로 보일 뿐이다. “그들에게 이 아파트단지들은 관리부실, 볼품없는 건축미, 저급한 생활환경을 연상테 한다. ‘대단지 아파트=도시문제 발생지역’이라는 단순도식은 서구도시의 상징체계 안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발레리 줄레조) 코 크고 파란 눈의 아가씨가 아파트에 대해 묻고 다닐 때 사람들은 당연한 것도 모르는 ‘순진한 외국인’이란 반응을 보였을 뿐이다. 사람은 많고 땅은 이리 좁은데 어디다 집을 짓자는 말인가? 위로 올릴 수 밖에. 살기 편하니 또 좀 좋은가? 아파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프랑스와 달리 긍정적이었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전부일까? “1970년, 정부 주도로 건설된 몇몇 소형 아파트단지는 20여군데였고 모두 강북에 위치했다. 당시 서울시에서 아파트는 전체 세대의 4%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금 서울에는 아파트가 없는 지역이 없고 주택 수에서 아파트가 차지하는 비중은 2005년 현재 52.&%로 상승했다.” (줄레조) 어떻게 이런 급팽창이 가능했는가? “1970년까지만 해도 한국인들에게 아파트는 그다지 각광받지 못햇다. 사람들은 이 사실을 자주 망각한다. 땅이 좁고 사람이 많다고 해서 고층의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불가피한 것도 아니다. 협소한 영토에 인구밀도가 높은 네델란드나 벨기에에서는 도시로의 집중화가 대규모 주택단지 건설을 가져오지 않았다. 이들 나라에서 건설된 대규모 주택의 수는 영토가 훨씬 넓은 프랑스보다도 적다.” (줄레조)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줄레조가 던진 질문에 대해 이책의 저자는 문화적 헤게모니라 답한다. 프랑스나 미국에서 대규모 주택단지는 서민을 위한 주거공간으로 계획되었다. 그러나 한국에 처음 들어선 아파트의 포지셔닝은 중상류층 이상을 위한 공간이엇다. 물론 한국이라고 프랑스와 같은 부정적 인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아파트가 “마치 단층 운동에 의한 지각의 융기처럼 솟아오르던 30여년전에도 부정과 부패의 악취를 풍기는 투기의 온상이라니, 사회 구성원의 공동체적 유대감을 해체하며 인간 소외를 가속화하는 끔찍한 벌집이라니, 비판의 화살들이 수북이 박혀 생매장의 말무덤을 만들지만” 아파트라는 “불도저는 막지 못한다.” 아파트는 “담론의 가상세계에선 언제나 패배하지만 물질의 현실세계에선 백전백승이다.” 비판의 무기를 휘두르는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고작 그것뿐이다. 무기의 비판은 그들이 아니라 아파트의 몫이다. 왜 이런 일이 몇십년동안 반복되는가? 저자의 물음이다. 그답은 욕망의 정점에 아파트가 있기 때문이다. 1962년 ‘단지 개념으로 건설된 한국 최초의 아파트 단지’였던 마포아파트는 ‘도시 중산층의 주거 모델’로 제안되었다. 아직 전근대적 생활방식이 지배적이었던 당시엔 아파트가 환영받지 못했다. 그러나 “서구식 가정행활을 꾸리려던 서울 토박이의 젊은 중산층들’이 이 아파트에 주목했고 “자유분방함을 선호하는 소설가, 화가, 영화감독, 연극인등 저명 예술가들의 이름이 마포아파트의 초기 입주자 목록에” 남는다. 그후 미국인들이 대거 입주하면서 이 아파트가 일반인들에게 주목을 받고 ‘일반 회사의 중견 간부급들도 이곳으로 옮겨오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파트의 “주거 모델로서의 타당성에 대한 의구심은 여전했지만 주말만 되면 아파트의 집치레와 세간살이를 구경하려고 방문한 주변 친지들로 현관 문턱이 닳을 지경이었다. 그들에겐 아들과 손자가 거주하는 이 아파트가 박람회에 전시된 미래의 견본주택이나 다름없었다. 현대적 일상생활의 실험실이자 구경거리로서의 마포아파트,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대한주택공사 총재 장동운이 본래 의도했던 바였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대한주택공사는 마포아파트의 실험을 통해 아파트 보급의 타당성을 확인했고 본격적인 도입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저자는 마포아파트에서 그리고 이후 쏟아진 아파트에서 당시 정부가 의도했던 것은 ‘조국 근대화’의 생활측면, ‘생활의 혁명’이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그저 잘 먹고 잘 입는 것처럼 별다른 매력을 지니지 못한 현대화도 너무 추상적이어서 체감이 힘든 막연한 현대화도 아니었다. 그것은 구체적인 질감을 지닌 또 다른 현대화였다.” 그리고 그 현대화의 질감은 ‘선진 외국에서나 볼 수 있는 대중사회의 면모’였다고 저자는 말한다. “서울시 전체 가구의 아파트 보급률은 1972년에는 4%, 1977년에는 7%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 수치를 무시할 수 있을만큼 아파트는 ‘현대적인 문화생활’의 상징으로 자리를 굳건히 다져갔다. ‘매일 저녁 우리를 찾아오는 기라성 같은 탤런트’, ‘부의 상징으로 꼽히는 사장’, ‘출세의 부러움을 사는 고급관리’, ‘서울 명문대의 교수’등 이른바 사회지도층 상당수가 아파트로의 이사를 서둘렀고 대중 산업사회의 인간소외에 비관적인 태도로 일관했던 문인들조차도 아파트의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햇다. 1977년 대학생 500명을 상대로한 설문조사에서 아파트에서 신혼 살림을 차리겠다고 응답한 대학생이 81%에 달했다. 특히 여학생이 선호도는 91%에 달햇다.” 아파트가 부정할 수 없는 실세로 등극한 것은 강남개발부터였다. 강남개발의 설계자들이 염두에 둔 것은 “당시 새롭게 등장하던 인구통계적 집단이었다. 이후에 ‘신중산층’이라는 이름을 얻게 도리 그들은 1970년대 압축적인 경제성장의 인적 견인차이자 실질적 수혜자로 부상하던 ‘조국 근대화’의 자식들이엇다. 1940년애에 지방에서 태어나 이제 막 출세의 초입에 들어서려는 찰나에 있던 이들, 그들은 경제성장의 격랑으로 극대화된 사회적 이동성을 십분 활용해 정부 관료와 대기업 관리직, 고소득 전문직과 자영업자로 성공신화를 써내려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주로 출신대학의 인근지역이나 사대문 밖에 머물며 아직 서울의 구도심으로 진입할 만큼의 경제적 여력을 갖추지 못햇다. 그곳은 여전히 뜨내기들이 넘보기 힘든 토박이들의 거처였다.” 설계자들은 이들을 주목한다. “이들을 집장사 집들이 점령한 서울 변두리에 방치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공간 질서로 끌어들여 입신과 출세의 기회를 제공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먼저 이들을 위해선 역사, 관습, 제도들이 퇴적되어 봉건 질서의 악취를 풍기는 장소에서 벗어나야 했다. 설계자들은 한강 이남에 위치한 무색무취의 턴 빈 공간을 눈여겨보았다.” 강남은 주류로 성장해가는 베이비부머들과 함께 신도심으로 태어난다. 그리고 강남의 얼굴을 도배한 아파트의 요새는 그 주류들의 라이프스타일을 규정했다. 저자는 아파트가 정의한 것은 단순히 수세식 화장실과 중앙난방시설 같은 것만이 아니라 말한다. 아파트는 “감각의 생산양식을 구축해 거주자들이 특정한 시각성의 논리를 체화하도록 독려했고 일상성의 프로그램을 제공해 독특한 구별짓기의 인지적 알고리즘을 내면화하도록 만들었다. 아파트는 그들 내면의 윤곽을 주조하는 거푸집이엇다. 독특한 감각과 인지의 공간적 매트릭스로 인간 거주자들의 습속을 분절하면서 그 결과로 ‘신중산층’의 독특한 정체성을 생산해냈다. 비판자들의 생ㄱ각처럼 신중산층이 아파트를 쌓아올린 것이 아니다. 어느 시점에서부터인가 아파트가 그들을 빚어냇다. 그들의 욕망은 아파트의 피조물이엇다. 바로 이것이 아파트의 콘크리트 육신에 적재된 매혹의 실체다.” 거창하게 들린다. 그러나 저자의 말은 거창하지 않다. 저자는 욕망의 구체적인 대상들을 나열하면서 전혀 그말이 거창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아파트 평형으로 사람의 신분이 결정되는 것, 아파트 거실에 놓이는 가구들과 인테리어의 변천사를 살펴보며 농업사회의 ‘촌스런’ 취향이 어떻게 아파트라는 모더니티의 공간에 맞춰 재조형되는가, 예를 들어 자개장이 사라지고 원목이 뜨는 미시사, 꽃무늬나 에이프릴과 같은 장식이 어떻게 아파트라는 공간에 의해 사라지고 재등장하게 되는가, TV의 외장이 원목장에서 검정 플라스틱으로 왜 바뀌게 되는가, 아파트 대단지가 소매유통망을 제조직하면서 어떻게 소비사회를 만들어가는가 등을 자세히 분석한다. 이책의 주제는 그리 특별한 것은 없다. 앞에서 인용한 발레리 줄레조의 책만 하더라도 마찬가지 질문에서 시작해 비슷한 답을 내린다. 그러나 다른 책들과 달리 이책은 아파트가 우리의 욕망을 어떻게 규정하는가란 재미있는 주제를 건드리고 있고 그 주제를 구체적이면서 재미있게 다룬다는 점에서 다른 책들과는 분명한 차별성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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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의 역사, 들뢰즈의 철학, 아감벤의 정치를 한 자리에서 비교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기 때문에(아감벤은 최근에 들어서야 우리들곁에서 지적유행으로 다가온 이탈리아 철학자이기 때문에 책을 통한 간접적인 방식으로 그를 어떻게 수용하고 해석하는지에 대해서 너무나 궁금했기에) 이책을 집어들면서 앉으자리에서 밤세워 읽었습니다. 기형과 잡종이라는 서문에서 밝히다시피 근대에 대한 불안감과 미래에 대한절망이 혼재되있는 상태에서 현재의 우리들이 처한 환경에 대해서 깊이있는 처방전에 대한 글의 시작이었다면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그모든 현상을 기꺼이 껴안고 짊어져야 할 우리세대에 대한 반성과 성찰입니다. 철학으로서의 현실, 현실로서의 감각, 그리고 자본주의 질서하에 변증법적 유물론의 생성 그리고 부동산의 태도, 정치적 계급투쟁,보편적 복지,콘크리트로 대변하는 토건건설족들과 유토피아의 몰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