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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솔직히 고백하자면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김상덕'하면 몇년 전에 무한도전에서 뜬금없이 찾아나섰던 알래스카의 김상덕이란 이름부터 떠올랐다. 몇달 전까지만 해도 반민특위 위원장 김상덕의 존재를 알지 못했고, 김상덕에서 교체된 이인이 처음부터 위원장이었던 걸로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나만 김상덕님의 존재를 잘 모르고 있었던 것일까. 그 역할에 비해 김상덕의 존재가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 아닐까.
왜 그런가했더니, 아무래도 납북된데다 이승만 정권이 반민특위의 흔적을 열심히 지워버리려 한 것에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닐까 짐작되는데 80년대 이후 친일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새삼 반민특위의 좌절이 얼마나 뼈아픈일이었는지를 되새겼고, 독립투사에 대한 예우가 정말 말도 안되게 열악했다는 사실 또한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됐다. 그런 안타까움의 중심에 이 반민특위 위원장 김상덕이 있었다.
김상덕의 일생을 돌아보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일단 그에 대한 존경심과 감사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런 가운데 그가 친일파를 청산하기 위해 감당했던 역할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도 그렇지만 독립운동 하느라 그와 그의 가족이 겪어야 했던 고초나, 그와 어린 자녀들에게 제대로 예우해주지 않았던 정부, 독립유공자에 대한 예우에 대해서는 죄송한 마음에 그저 유구무언일 뿐이었다. 독립을 위해 싸운 분들에 대한 예우와 존경은 한 국가로서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인데.
하지만 그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그는 결코 굴하지 않았다. 충징에서 아내와 막내 딸을 잃는 비극을 겪으면서도 그는 아픔을 딛고 활동에 매진했던 것이다. 하지만 본인은 물론이고 가족들의 고생이 말도 못했다. 오죽하면 남은 1남 1녀를 고아원으로 보낼 결심을 했을까. 그는 활동하느라 어린 자녀를 돌볼 수도 없었고, 지독한 가난 때문에 아이들을 제대로 먹일 수가 없게 되자, 독한 마음을 먹고 고아원에 맡긴 것이다. 부인도 고생만 하다가 약한첩 못쓰고 세상을 떠난 것인데, 김상덕가에게 닥친 불행은 이것이 끝이 아니라 전쟁 뒤까지 쭉 이어졌다.
그는 성격이 유해서 대화를 잘 이끌어내는 편이었지만 해방 뒤 친일파를 처벌하는 문제에서만큼은 단호했다. 그 누구보다 친일파와 반민족행위자 처벌에 앞장섰기에 반민특위원장에 선출될 수 있었다. 그리고 암살 위협과 특위 해체를 시도했던 이승만정권에 꿋꿋하게 맞서며 화신백화점 박흥식을 시작으로 친일파들을 차례차례 체포했던 것이다. 독립투사다운 기개와 강단으로 권력에 맞선 것이었다. 반민특위에서 친일파들이 체포할 때에는 통쾌하기 이를데 없었다.
하지만 그는 반민특위가 경찰에 습격을 당하자, 정부에 항의하며 위원장 자리를 사임하고 만다. 그의 사임 뒤 특위는 유명무실해졌고, 친일파 처벌에 실패하고 만 것이었다. 특위가 무산되는 것을 본 김상덕의 심정은 어땠을까. 하늘이 무너지는 듯 했을 것이다. 그뒤 김상덕에겐 고난이 길이 펼쳐졌다. 이승만정권에 집요하게 견제를 받았고, 2대 국회의원 선거에 낙선했고, 전쟁 와중에 납북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아마도 그는 남한에 남아있는 아직 어린 자식 둘 걱정에 북한에서 결코 행복할 수 없었을 것으니, 그는 1956년 65세의 일기로 평양에서 눈을 감았다.
그는 독립운동 할 때에도 좌익이 아닌 민족주의적 노선을 유지했는데, 자의가 아니라 연행돼 북한으로 가게됐음에로 그의 납북은 여러 문제를 야기했다. 김상덕 당사자는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해, 남아있는 어린 두자녀들은 유공자 혜택을 받지 못했다. 그리고 성인이 된 아들은 반민특위 위원장 아들이라는 점과 북에 있는 아버지로 인한 연좌제 때문에 취직이 되지 않았다니 기가 막힐 일이었다. 저렇게 풍찬노숙하며 독립을 위해 헌신했지만 남한에서는 반공을 내세우며 북한에 있는 그의 공로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반공이 목적이 아닐텐데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삶을 던진 이와 그 가족을 지켜주지 못한다면 국가는 존재할 이유도 없고, 그런 나라라면 오래 지속되지도 못할 것이다. 친일파 후손들은 호의호식하지만 독립운동 후손들은 3대가 고생한다는 말이 빈말이 아니었던 셈이다.
김상덕씨의 아들 김정륙은 독립운동가 아버지를 둔 덕에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야 했다. 안스러워서 눈물이 나올 정도였다. 연좌제때문에 취업도 안돼 노동을 해야했던 시절을 겪고, 90년 그의 나이 56세에야 아버지의 공로를 인정받고 독립유공자 유족이 될 수 있었으니..그간에 그가 겪었던 신산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것은 지난 2006년 평양에 있는 아버지 묘소에 참배할 수 있었다는 것인데, 전쟁 이후 무려 56년만에서야 성묘할 수 있었던 아들은 피를 토하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김상덕님에게 감사의 마음을 바치게 된다. 불굴의 의지로 독립운동을 해나간것에 대해, 또 해방 뒤 반민특위 위원장으로 친일파 청산을 위해 최일선에서 매진하신 것에도. 그는 민족을 위해 기꺼이 몸과 정신을 던졌던 인물이었다. 비록 좌절되기는 했지만 조국과 민족을 배신하며 일신상의 안위와 보상을 추구했던 친일파를 처벌하려고 활발하게 시도했다는 것은 살아있는 정의를 실현하려 한 것이니. 하지만 아내와 딸의 죽음. 말년의 납북행으로 자식과도 생이별한 것을 보면, 해방 뒤에는 조금은 편안하고 여유롭게 살아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해방공간에서도, 마지막까지 그에게는 행복이 허용되지 않았다니..그는 그 가혹한 임무와 운명을 짊어진 채 눈을 감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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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한국은 정상적인 사회가 아니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단지 정권과 정부에 비판적이라는 이유만으로 빨갱이 취급을 받고 나쁜 사람 혹은 집단으로 매도되는 경우는 유사이래 찾아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세월호 참사를 두고 각계에서 쏟아진 막말과 망발을 보며 사람들은 분개했지만 저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 같다. 단 한명도 구조해 내지 못했고 침몰과 구조, 그 이후의 상황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정부와 정권에 대해서 이렇게도 관대한 사회는 정말 정상적인 사회가 아니다. 6월초에 있을 지방선거를 앞두고 발표되는 여론조사를 보면 더 참담하다. 집권여당 출신 후보자들이 대부분의 지역구에서 여론조사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참사에 적절하게 대처하고 유가족과 피해자들에 대한 감동적인 대책이 마련되고 국민 전체가 안고 있는 슬픔과 회한을 적극적으로 위로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결과가 나왔다는 것이 나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 현재 한국사회가 가진 온갖 문제와 갈등, 정치적인 한계와 언론의 비상식적인 행태는 비단 어제 오늘 일은 아니다. 그래도 정치적·경제적·사회적 민주화와 진보, 발전은 시간이 갈수록 더해져야 하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이놈의 나라에서는 점점 후퇴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이 모든 것의 기원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의 실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본다. 광복 이후 미군정을 거치며 남한만의 국회가 만들어지고 반민특위가 설치되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반민특위는 헌법 기관이었음에도 6개월의 짧은 활동밖에 하지 못했다.
“반민특위의 좌절로 민족정기는 굴절되었으며, 친일반민족세력이 다시 득세하고 이승만 정권이 장기 독재체제로 가는 전기가 되었다.” (p.267)
반민특위는 일제 강점시기 나라의 광복과 민족의 해방의 편에 서지 않고 소극적이든 적극적이든 일제에 부역하고 협력하면서 반민족 행위를 한 자들을 찾아내 처벌하기 위해 만들어 졌다. 책에서 소개된 반민특위와 비슷한 국가기구는 여러 국가에서 설치되어 활동했다. 일본 제국주의의 압제를 받은 아시아의 여러 국가, 나치의 압제를 받은 유럽의 여러 국가들에서 이런 국가기구가 설치되어 많은 반민족행위자들을 찾아내 처벌 했다. 프랑스와 독일에서는 아직도 이런 자들을 찾아내기 위해 전 세계를 뒤지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한국의 반민특위는 실패했다. 제헌국회에서 반민특위에 대한 법안이 발의되고 통과되는 것에도 난관이 있었고 어렵게 만들어진 반민특위도 제대로 활동하지 못한 채 무너지고 말았다. 다른 것도 아닌 대통령과 당시 국회는 물론 정치·경제 각 분야에서 기득권을 형성하고 있던 반민족행위자들, 친일파들에 의해 무너졌다. 책에는 당시 반민특위에서 활동했던 인사의 인터뷰를 언급했는데, 친일 경찰로 구성된 당시 한국 경찰은 이승만과 기득권을 가진 친일세력을 등에 업고 백주대낮에 반민특위를 습격한다. 당시 반민특위 사무실에 있던 검찰총장의 권총을 빼앗는 것은 물론, 반민특위 위원들을 빨갱이로 둔갑해 깡그리 망가뜨렸다.
“반민법 제정에 불안과 공포를 느낀 친일세력은 풍부한 자금과 정보·조직을 이용해 반민법 제정을 반대하거나 이 법 제정에 앞장선 국회의원들을 공산당으로 몰아붙이는 등 방해공작을 시도하였다.” (p.231) “김상덕은 이승만의 담화에 대해 강력히 반박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p.255)
당시 친일세력들은 반민법이 제정되어 반민특위가 활동하고 그들에게 체포되면 처벌받을 것 이 당연한 결과였다. 그들에게는 생사여탈의 여부가 반민특위의 손에 달려 있었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반민족 행위를 한 자들은 처벌받아야 한다. 책에서도 여러 번 언급되지만 그래야 민족정기가 바로 서게 되고 역사를 바로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은 미군정과 이승만이 뒤에 있었다. 미군정에게도 이승만에게도 친일세력들은 가장 큰 도움이 되는 실제적 조력자였다. 무엇보다 이승만에게는 임시정부가 가진 정통성이 가장 두려운 정치적 라이벌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친일세력을 이용해 반민특위를 끊임없이 공격하고 와해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악질적인 일제부역자 노덕술이 반민특위에 의해 체포된 후 비상대책을 논의했을 정도로 제 정신이 아니었던 사람이다. 거듭되는 이승만의 방해와 협박에도 반민특위 위원장 김상덕은 굴하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이것이 이승만이 더 무모해지도록 한 계기가 되었던 것 같기도 하다. 아무리 헌법기관의 수장이지만 대통령의 협박에도 굴하지 않은 사람이 김상덕이었다. 이승만이 담화를 발표하면 곧바로 그 담화를 반박하는 담화를 발표하고 거듭되는 방해에도 한 명이라도 더 반민족행위자들을 체포하기 위해 노력한 김상덕은 제가 대상 1순위 이었다. 해방된 조국, 그러나 분단된 조국에서 수십 년 동안 조국의 광복과 해방을 위해 목숨을 바친 독립운동가들과 압제당한 조국은 뒤로 한 채 압제자의 편에 서서 호의호식하며 민족을 반역한 친일세력들의 생각은 완전히 달랐다. 해방 후 미군정을 거치며 이들의 처신도 완전히 달랐다. 일제 강점시기 독립운동가들을 열심히 탄압하던 친일세력들에게 해방되었지만 분단된 조국의 상황은 오히려 호기였다.
“친일파들은 반민특위 요인들을 빨갱이라고 몰아쳤다. 자신들이 발행하는 신문을 통해 연일 국가안보를 해치는 빨갱이들을 처단하라고 주장했다. 심지어 특위 요인들을 암살하고자 기도했다. 암살 대상 1호는 김상덕 위원장이었다.” (p.9) “이성근은 2회 공판을 끝으로 해를 넘겨 반민특위가 유야무야되면서 석방되었다... 김덕기는 재심청구를 냈다가 각하되고 사형이 확정됐지만 6.25직전에 감형으로 풀려났다.” (p.249)
빨갱이 프레임은 여기에서부터 출발한다. 해방된 조국에 들어온 미군들은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미 군정청이 서울에 진주했으니 임시정부는 개인 자격으로 들어올 것을 통보했다. 단지 한반도에서 가장 가까운 오키나와에 진주하고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미군정 사령관이 된 하지 중장은 일제 강점의 역사와 한반도 백성들의 민심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다. 조국의 땅은 아니었지만 중국에서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해방 후 조국으로 돌아와 정통성을 지닌 채 정부를 재구성하려 했던 독립운동가들의 노력과 피와 땀을 깡그리 무시한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당장 미군정을 도와 혼란스러운 상황을 마무리할 세력이 필요했다. 미군정은 독립운동가와 자생적으로 발생한 인민위원회 대신 이승만과 친일세력을 선택했다. 그래서 친일세력은 그대로 옷만 바꿔 입은 채 여전히 권력과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해방 된 조국에 빨갱이가 득시글하니 빨갱이를 때려잡아야 한다!” 라는 외침 하나면 충분했다. 왜냐하면 조국으로 돌아온 독립운동가, 자생적으로 만들어진 인민위원회에 비해 친일세력은 조직·재정·배후가 막강했기 때문이다. 해방 후 치열했던 이념대립의 경험을 이용해 빨갱이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냈다. 배후에 이승만이 있으니 거칠 것이 없었던 것이다. 공공연히 김상덕 위원장을 비롯한 반민특위 위원들에 대한 암살을 도모했다. 국회 내 존재하던 진보적 성향의 국회의원들은 ‘국회프락치사건’이라는 조작사건으로 쫓아내 버리고 반민특위는 친일경찰들에 의해 부숴버렸다. 당연히 반민특위에 의해 체포되어 조사받던 반민족행위자들은 모두 풀려났다. 반민족행위를 단죄하지 못한 것이다.
사실 이 영향은 수십 년이나 이어졌다. 나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라 생각한다. “정부 수립 후 친일파는 자신들의 반민족행위를 반공 이데올로기로 둔갑시키고 이승만, 박정희로 이어지는 독재정권에 충성을 다하여 독재정권의 영속을 추구했으며, 분단체제의 고착화에 앞장섰다.” 총선 전 드러나는 후보자들의 약력과 그들 선대의 약력을 보면 친일파의 후손들이 d이렇게나 많나 싶다. 후손이 국회의원에 출마할 정도라면 해방 후 지금까지 기득권으로 잘 먹고 잘 살았다는 말인데, 그런 사람들이 단지 국회의원 후보자뿐이겠나. 지금 한국사회 곳곳에 친일세력은 잔존하고 있다. 지난 민주정부 10년 동안 친일인명사전 편찬 등 반민특위가 끝내지 못한 일을 조금이라도 이어가기 위해 노력했지만 제대로 하지 못했다. 국가의 지원을 받지 못한 채 미완성되었다. 선대의 친일행적이 밝혀졌다면 사죄하거나 최소한 부끄러워하는 척이라도 해야 하는데, 그런 사람은 없다. 그게 뭐 대수냐! 라는 태도로 일관한다. 그런데 더욱 기가 막히는 것은 그런 사람들을 또 뽑아준다. 선대가 아무리 친일행적이 있다손 치더라도 뽑아주는 것이다. 단 한 번도 역사정기를 바로 잡지 못하고 반민족 행위자들을 단죄하지 못한 역사를 산 국민들의 당연한 태도라고 보기에는 너무 슬픈 일이다. 아무리 도덕적으로 문제가 많고 뽑아준다고 해도 그 사람과 같은 부자가 될 수 없음에도 그 사람을 뽑아주는 국민들이다. 지난 대선과 총선, 이번 지방선거를 앞두고 국민들을 탓하지 말라는 일부 진보개혁 인사들의 언론 인터뷰나 sns 발언을 접하면서 나는 더 답답했다. 나는 국민 탓이라고 본다. 내가 살고 있는 대구·경북에서는 무조건 1번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무슨 실수를 저지르고 무슨 막말과 망발을 일삼아도 무조건 1번이다. 역사에서 만약은 금기이지만, 만약 반민특위 활동이 제헌국회 내내 지속되고 정권이 바뀐 후에도 헌법기관으로 존속했다면 지금과 같았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만약 반민족행위자들의 악행이 만천하게 밝혀지고 그것으로 인해 처벌 받고 하는 선례가 명확했다면 국민들의 의식과 수준은 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김상덕은 낮에는 목수일로 학비를 벌고, 밤이면 공부하면서 20대 초반의 청년기를 경신학교에서 보냈다.” (p.23) “뒤편에 사는 김원봉 장군 댁도 우리 집과 마찬가지로 부인이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주변에서 걱정들이 많았다.” (p.90)
평생을 독립운동에 매진한 김상덕 선생은 가난한 시골 출신이었다. 낮에는 학비를 벌고 밤에 공부하면서 독립운동의 싹을 틔웠다. 일본 유학 시절에는 3.1운동의 단초가 된 2.8독립선언의 주역이기도 했다. 독립운동가 김상덕 선생은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다. 아내를 잃고 두 아이를 거둘 수 없어 고아원에 보내야 할 정도였다. 책에서 언급되는 선생의 아들 김정륙씨의 이야기 속에는 가난했던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이 많다. 독립운동을 하다 한 달에 한번 아이들을 찾아와 빨래를 해주는 아버지. 빨래 후 목을 축이려 술 한 잔을 사지만 맛 좋은 안주를 사지 못하고 가장 싼 마른두부를 샀던 가난했던 독립운동가 아버지의 모습. 중국에서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살 때, 유명한 약산 김원봉 선생의 집도 우환이 많았다. 이들은 독립운동을 할 때에도 해방된 조국에서도, 이후 현재에 이르는 역사의 와중에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알려지지도 않았다. 김원봉 선생과 김상덕 선생보다 월북했다는 이유가 아마 가장 클 것이다. 그러나 약산 김원봉 선생은 해방된 조국에서 친일경찰에 의해 고초와 수모를 겪은 후 원하지 않았지만 신변의 위협으로 월북했고, 김상덕 선생은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에 의해 두 아이가 보는 앞에서 납치당해 월북했다. 그런데 이들 독립운동가들은 북에서도 남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김원봉, 김상덕 선생 모두 북에서 숙청당했기 때문이다. 분단 초기 김일성은 그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기 위해 독립운동가들을 이용했다가 숙청했다. 남에서는 당연히 월북한 인사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노비문서와도 같은 연좌제가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진로를 죄 가로막았으니, 김정륙 역시 다 되었던 일자리도 나중에 ‘김상덕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취소당했다. 따라서 이 무렵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이력서나 신원증명서에 애써 선대의 독립운동 사실을 숨긴 사계가 적지 않았다.” (p.309)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는 사실이 ‘노비문서와도 같은 연좌제’가 되었다고 한다. 조국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수십 년을 힘쓰고 그로 인해 목숨을 잃은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면 국가에서는 최고의 대우를 해줘야 마땅하다. 그런데 한국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못한 것이 아니라 안 한 것이다. 왜냐하면 국가의 주요한 자리 곳곳에 친일세력과 그들의 후손이 자리 잡고 있으니 될 리 만무하다. 하다못해 작은 일자리조차 갖지 못한 채 막노동을 전전했다는 김상덕 선생의 아들 김정륙씨의 이야기를 읽다보니 울컥했다. 먹고 살기 위해 자랑스러워야 할 선대의 독립운동 사실을 숨겨야만 했던 그들의 인생이 얼마나 고단하고 아팠을까. 나는 짐작조차 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김정륙씨는 아버지가 납북된 후 60년이 지나서야 북에 있는 아버지 묘소에 찾아가게 된다. 2006년의 일이었다. 생전에 좋아하시던 술을 잔에 가득 부어 올려 드렸다고 한다.
“‘존재’는 낯익지만 ‘실체’는 낯선 독립지사”
이 책의 첫머리에는 김상덕 선생을 ‘존재’는 낯익지만 ‘실체’는 낯선 독립지사라고 표현했다. 공감이 가는 표현이다. 월북했기 때문에 독립운동가 중에서도 알려지지 않았고 가장 중요한 민족사적 사명이었던 반민특위의 위원장이었지만 반민특위의 실패로 더욱 낯설게 되었다. 또 만약이라는 가정을 해 보는데, 반민특위가 성공하고 친일세력을 단죄했다면 김상덕 선생의 국회의원 재선은 당연했을 것이고 그의 공적으로 인해 최소한 대통령 후보는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다면 그의 후손들도 지금보다는 더 나은 형편으로 살아올 수 있었을 것인데……. 이 책 「김상덕 평전」을 읽으며 ‘이런 책을 얼마나 읽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처럼 근현대사에 관심이 많은 이들이 아니라면 찾아 읽을까 싶었다. 학계에서도, 언론에서도 이런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연구나 보도, 취재는 미진한 현실이다. 여전히 친일세력의 후손들이 국가의 기득권으로 형성되어 있고 이것은 앞으로도 영원할 것 같다. 다시 한 번 반민특위가 설치될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지난 민주정권에서 친일인명사전 하나 편찬하는 것도 난리를 치며 방해해 성공을 거둔 저들인데 2차 반민특위는…… 아마 이 나라가 멸망하기 전까지 절대로 만들어 질 수 없을 것이다.
“조국을 배신한 자는 그가 절대로 다시 해를 끼치기 불가능하도록 완전히 그리고 신속히 처리되어야 한다.” (p.220)
벨기에 정부가 공포한 <전시에 국가의 국가 안보에 반해 저지른 범죄로 인해 국적과 일정한 권리를 박탁하고 정지하는 사안에 관한 명령>의 한 대목이다. 신속히 처리한 국가와 정부의 오늘과 지금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오늘을 비교해 보니 참담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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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미군정의 정책과 이승만 정권의 독재를 위해 친일 청산이 제대로 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친일파가 판을 치는 세상이 되어 여지껏 세월이 흐르다 보니 친일이 아니라 숭일을 하고도 잘먹고 잘 사는 사람들이 많은 게 사실 이 대한민국의 현실입니다. 지난 역사의 잘잘못을 따지면 한도 끝도 없으니 덮고 가자느니, 대충 하자느니 하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렇게 그냥 덮고, 덮고 빨리빨리 가다보니까 결국 세월호 사건까지 생기게 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왜 세월호를 계속 이야기 하느냐, 왜 유독 세월호 가지고 그러느냐 이런 식으로 볼멘 소리를 하는 보수 언론들도 있습니다만, 이번 만큼은 안된다는, 그리고 이 일을 기점으로 이제 더는 안된다는 어떤 사회적 큰 전환의 계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너무 많이 덮고 오다 보니까 뒤틀린 게 너무 심해졌고 도저히 버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른 것이지요. 우리는 군국주의 국가가 아니지 않습니까. 최소한 저 개인으로는 그렇게 잔인한 가치관을 지닌 나라에는 살고 싶지 않습니다만. 사실 우리 나라 독립 운동사를 이야기하자면 주로 김구, 이승만, 서재필 정도의 거물들과 그리고 안중근, 이봉창이나 윤봉길 같은 의사들, 청산리 대첩의 김좌진 장군 정도를 떠올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른바 좌익쪽 인사들은 좌익이라는 이유로 중고등학교 역사에서 아예 그 인물 자체가 배제되어 버렸고 그러다 보니 알려진 인물은 김일성과 박헌영 정도 였던 것 같네요. 그러나 숱한 별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이 이 김상덕 반민특위위원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사람이 제대로 일을 해 낼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승만이 그토록 집요하게 방해하다 결국 반민특위를 습격하고 국회의원 프락치 사건까지 일으켜서 결국 해체시켜 버린 일을 보면 정말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을 정도입니다. 김상덕은 좌익이나 우익에 뚜렷하게 속하지 않는 사람으로 상황에 따라서 양쪽을 넘나들면서 독립 운동을 하셨던 분이고, 특히 이 두 세력이 함께 조선 독립을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는 기조를 강조하셨던 분입니다.어느 세력에도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소수파라서 자기 세력이 약했던 분이지만 좌, 우익 모두에게 인정받아 반민특위위원장까지 했지만 제대로 일을 처리할 수 없었고 그 충격과 후유증 역시 심했다고 합니다. 그는 육이오때 납북되었고 가서 얼마 되지 않아 1956년 숙청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명 인사라 북에서 선전용으로 납북했는데 아마 이분 기질상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으셨을 것 같습니다. 다행히 묘소는 있어서 아드님이 북에 가서 한번 뵙기도 했다고 하네요. 납북되었다는 이유로 그리고 반민특위 해체라는 부끄러운 역사적 이유로 이 분에 대한 이야기가 잊혀져 간 것도 안타깝고 독립 운동하는 아비를 두어 고생고생한 아드님의 이야기 역시 마음이 아픕니다. 납북된 자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연좌제에 걸려 고생하신 것도 말할 것 없구요. 이 책은 김상덕 이라는 분의 평전이기도 하지만, 당시 우리나라와 중국, 소련 그리고 구미 등지에서 활동했던 여러 독립운동가들의 모습도 함께 잘 묘사되어 있고, 해방 이후 어지러운 정황과 미군정의 실정, 이승만이 정권을 잡기 위해 했던 여러가지 비상식적인 조치들에 대한 이야기가 조리있게 설명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저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인물 중심으로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을 될 것 같습니다. 물론, 반민특위 해체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너무나 뼈아픈 사태였기 때문에 저자의 비통한 심정이 강하게 언급된 부분도 있습니다. 사실 악인 열전 같은 책을 읽다보면 정말 읽다가 책을 던쳐 버리고 싶을 만큼 비분강개하게 되는데, 그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 거 같긴 하네요. 해방 된지도 70년이 넘었는데, 이 분에 대한 기억이 너무 없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모두들 기억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했으면 합니다. 독일의 나치 청산처럼 어물쩡 넘어가는 것 없이 말입니다.
오늘 경교장을 다녀왔습니다. 김상덕 님의 이름도 언급되어 있더군요. 모두들 한번 다녀오시기 바랍니다. 생각보다 볼 거리도 있고, 무엇보다 무료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