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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권의 마지막 장을 다 읽고 나서야 비로소 이 책의 역자가 두 명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편집자 후기에 따르면, 전반과 후반을 맡은 역자가 다르다고 하는데 책을 읽으면서 좀 기복이 심했던 게 그런 이유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공식적으로 1,316쪽이나 되는 세 권의 책을 읽고 나니 마치 못해서 질질 미루던 숙제를 마친 듯한 느낌이 들 정도다. 마치 세 권의 각각 다른 책을 읽는 것처럼 슬럼프와 흥분, 긴장의 연속이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여배우 마릴린 먼로의 인생은 파란만장, 그 자체였다. 노마 진이라는 이름으로 아버지 부재의 유년 시절을 보낸 그녀는 영화계에서 일하던 어머니 글래디스 슬하에서 제대로 된 사랑을 받지 못한 채 자랐다. 스타가 된 후, 불면증에 시달린 노마 진은 타인으로부터 사랑받고 싶어했다. 만인의 연인이었던 그녀에게 애정결핍이란 어쩌면 역설적인 말일 지도 모르겠다. 모든 이의 사랑을 한몸에 받으면서도 끝내 진정한 사랑에 도달하지 못했던 어느 여인의 슬픈 이야기다. 전직 운동선수와의 실패한 결혼 이후, 노마 진은 아이러니하게도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한다. 금발의 육체파 배우라는 할리우드가 조작해낸 이미지에 질린 노마 진은 뉴욕으로 도망친다. 뉴욕의 연극무대를 영화판이라고 생각한 노마 진은 아무 때고 ‘컷’을 외쳐 맥스 펄만 같은 연출가를 놀라게 한다. 물론 유대계 극작가 아서 밀러와의 만남은 어쩌면 필연적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아서 밀러는 오래전에 쓰기 전에 시작해서 완성하지 못한 자신의 희곡 주인공 “막다”를 이 불쌍한 여배우에게서 발견해낸다. 이 위대한 극작가는 자신이 사랑하게 된 “거지 소녀”에게서 천재적 배우의 가능성을 엿보았던 걸까? 알 수가 없다. 세 번째 결혼이자 마지막 결혼이 될 아서 밀러와의 결혼 그리고 <버스 정류장>으로 화려하게 컴백하지만 노마 진과 그녀가 연기하는 마릴린 먼로의 사이는 괴리는 점점 깊어져만 간다. 그렇게 고대하던 아이를 가지고 메인 주의 갈라파고스 코브에 안착하지만 끔찍한 사고로 거지 소녀는 대디와의 사랑도, 아이도 모두 잃어버리고 다시 복마전 같은 할리우드로 돌아온다. 아니 그녀가 갈 곳은 은막 위에 영사기가 펼쳐 보이는 허상의 세계뿐이었다. 조이스 캐럴 오츠는 다양한 시선에서 <블론드>를 기술한다. 때로는 노마 진의 시선에서, 때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저격수의 이름으로 또 때로는 어떤 상황에서도 노마 진의 아름다움을 창조해낸 분장사 화이티의 시선으로. 남성 권력이 지배하는 할리우드 영화판에서 풍만한 가슴과 백색 금발의 노마 진은 단지 그들에게 돈을 벌어주는 꼭두각시 인형이었을 뿐이다. 노마 진이 출연한 영화의 엄청난 상업적 성공에도 그녀는 내내 돈에 쪼들려야했다. 날이 갈수록 피폐해져 가는 노마 진의 정신은 어쩔 수 없이 넴뷰팔과 벤제드린 같은 약물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주치의들은 나중에 걷잡을 수 없이 심각한 약물중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빤히 알면서도, 피로와 수면부족에 지친 금발 인형에게 생기를 불어넣기 위해 처방전을 남발했다. 책을 읽으면서 그녀의 결말을 잘 알고 있는 독자로서, 현재 진행형으로 진행되는 그녀의 행복이 순간뿐이라는 사실을 차라리 외면하고 싶을 정도였다. <종생(終生)>(Afterlife)이라는 마지막 타이틀은 급작스러운 죽음으로 할리우드 불멸의 신화가 되어 버린 노마 진의 삶을 한마디로 요약해준다. 잠깐 주춤하던 노마 진의 라스트 스퍼트는 지금도 미스터리에 쌓여 있는 스캔들의 주인공 ‘미스터 프레지던트’가 등장하면서 뜨겁게 달궈진다. 홀연히 등장한 정체를 알 수 없는 저격수가 미스터 프레지던트의 목숨을 앗아가는 인물인가 싶었지만, 나의 오판이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놀라운 작가의 가설이 대미를 장식한다. <블론드>를 다 읽고 나서, 새삼스레 노마 진에 대한 관심이 급증했다. 사실 그녀의 영화를 제대로 본 적이 있나 싶을 정도다. 할리우드 톱스타로서 노마 진의 악명은 스튜디오에서 자자했다. 촬영장에 늦는 건 일상이었고, 마치 스탠리 큐브릭 감독을 연상시키는 마음에 꼭 들 때까지 반복된 촬영은 동료 출연자와 스태프를 녹초로 만들었다. 노마 진은 도대체 무얼 위해서 그렇게 열심이었던 걸까? 제작자나 연출자의 인형이 아닌 배우로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서였을까? 거지 소녀의 이런 노력은 처연하기까지 하다. 개인적으로 이 전기소설에서 다음의 점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작가의 상상일진 모르겠지만, 촬영장에서도 다윈의 <종의 기원>을 읽고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을 이야기하는 노마 진의 묘사는 ‘멍청한 금발미녀’(dumb blonde)의 이미지를 한 방에 날려버린다. 조이스 캐럴 오츠는 통쾌하게 거지 소녀를 위한 신원(伸寃)에 성공한다. 이렇게 작가는 49년 전 세상을 뜬 스타에게 영생을 주었다. 다 읽고 나서 기진맥진하지만, 한편으로는 또 뿌듯하다는 느낌이다. 조이스 캐럴 오츠와의 첫 만남은 기대 이상으로 만족스러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