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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허접한 꽃들의 축제'라는 말을 접하고서 흥미가 생겼다. 헌데 불교 금강경을 해설한 거라 하니 그렇지 않아도 불교경전에 관한 책을 찾고 있었던 차에 잘되었다 싶었다. 저자가 지은 금강경 별기인 [붓다의 치명적 농담]을 먼저 읽으면서 화엄경의 본래 이름이 잡화경(雜華經)이고, 그 뜻이 바로 '허접한
꽃들의 축제'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든 의문은 금강경을
해설하면서 왜 화엄경을 제목으로 삼았을까 라는 것 이었다.
첫
권 별기에 이어 두 번째 책인 [허접한 꽃들의 축제]는 소(蔬)의 방식대로 금강경의 문자를 쫓아가며 불교를 더듬고 있다. 이 책이 종교서적이 아니라 인문서적으로 분류되기를 바란다는 저자의 말처럼, 나
역시 인문학적으로 읽으려고 노력했다. 그럼에도 때때로 불교적으로 빠져드는 나를 발견하고서 이 기회에
출가해 볼까 하는 망상(?)을 품기도 했다.
대승반야의
핵심적 경전으로 금강경과 반야심경을 꼽는다고 한다. 반야심경이 압축적이고 논리적인데 반하여 금강경은
산문적이고 예언적이라고 한다. 또한 금강경은 대승의 중심이면서 선(禪)의 소의(所依)경전이기도
하기에, 저자는 금강경을 택하여 강의주제로 삼았다고 한다.
금강경의
정식명칭은 '금강반야바라밀경'이다. 그 뜻을 살펴보면 먼저, '금강'은
말 그대로 단단한 다이아몬드를 의미하며, 이는 번뇌가 흐트러뜨릴 수는 있지만 영영 부술 수는 없는 '불성'을 뜻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반야'는 본디 지혜로 번역되었으나, 실제 의미하는
것과 지혜라는 말 사이에는 갭이 존재하여 원어 그대로 사용하고 있으며, '바라밀'(波羅蜜)은 피안(彼岸)을 향한 수행을 뜻한다. 그래서 '반야바라밀'이라 함은 지혜를 통한 완성이라고 볼 수 있으며, '금강'이 '반야'의 특성을 나타낸다면, '반야'는 수단이고 '바라밀'은 그 반야를 써서 성취해야 할 목표라고 한다.
'붓다가
거처를 떠나 탁발을 했고 돌아와 식사를 했으며 그런 다음에 의발을 정리하고 자리를 펴고 앉았다. 이것이
금강경 1장의 내용이라고 한다. 저자는 이 정경에 이미 법이
다 설해졌다고 말한다. 불법은 다른 것이 아니라 일상의 삶과 기거를 분열이나 갈등 없이 자연스럽고 조화롭게
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를 깨닫지 못하기에 번거로운 문답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래서 2장부터는 붓다가 이를 깨우쳐주기 위하여 제자
수보리와 문답을 이어간다. 수보리가 묻는 것은 진리를 위해 발심한 사람들이 삶을 대하는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가이다. 붓다의 대답은 간단하다. 진정한 무아(無我)는 타자를 향해 나의 모든 것을 비우고 바치는 것이라야 하며, 삼륜청정(三輪淸淨)의 순수한 행동으로 무아가 완성된다고 설파한다. 저자는 이렇게 해설한다. 보시(布施)라, 그는 조건 없이 베푼다. 돌아올 반대급부를 의식하지 않기에 그의
활동은 정녕 순수하다고 일컫는다. 그는 자신이 누구에게 베푸는지를 모른다. 얼굴을 확인하는 것은 갚을 사람을 장부에 적어놓기 위한 것이니까. 그리고
자신이 무엇을 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을 살피는 것은 외상에 올릴 액수를 기입하는 일이니까. 누구에게 주는지, 그리고 무엇을 주는지 모른다면, 대체 누가 주고 있는지도 의식하지 않는다. 그 삼륜청정(三輪淸淨)의 순수한 행동으로, 무아(無我)가 완성된다. (179쪽)
15세기
임금 세조가 했다는 금강경 언해, 그리고 육조 혜능의 구결과 야부도천의 송(頌), 서구 불교학자 콘즈의 영역본까지를 현대적으로 해석하여 들려주는
저자의 금강경 해설을 쫓아가는데 문득 머리가 맑아진다. 어느 노선사가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라는 말을 왜 했는지를 알 것 같았다. 붓다가 말한 '여래는 없다. 여래는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다.'는 말도 알 것 같다. 드뎌
내가 붓다가 되었구나, 깨달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다시금
책을 보며 뜻을 생각해보니 아리송해진다. 조금 전 깨달은 것은 이미 어디론가 달아나고 없다. 머리에 쥐가 나기 시작한다.
그렇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불교는 구경(究竟)이 아니라 방편(方便)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세상으로부터 자유롭기보다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 불교라는 것을. 내가 눈으로 보는 사물은 내 욕망의 투영이고, 결국 나는 내가 보고 싶어하는 것만을 본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기에 당연히 그런 육안으로는 여래를 볼 수 없는 것 임을, 무아(無我)까지는 아니래도 내가 가지고 있는 마음의 독소인 탐(貪), 진(瞋), 치(癡) 즉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을 깨닫고 비워낼 때 비로소 마음의 눈으로 여래를 볼 수 있음을 말이다. 여래는 우리가 상상도 않던 곳에, 전혀 기대치 않던 곳에 있다는 소식을 본격적으로 전하고 있는 경전이 화엄경이라고 한다.저자가 금강경 소(蔬)의 제목을 왜 '허접한 꽃들의 축제'라 했는지 알 것도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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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 경구가 보이지 않았던 별기를 끝내고 소를 읽기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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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타 다른 금강경책보다 이책에서 보여주는 오가해에 따른 해설은 기존의 금강경의 해설에서 벗어나 좀더 선의 입장과 현실적인 실천의 입장에서 많은것을 시사해 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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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금강경을 위해 두 권의 책을 냈다. 형식은 원효가 해설한 대승기신론을 따랐다. 1권은 별기이고 2권은 소이다. 1권은 불교 전반에 대한 이해고, 2권은 금강경에 대한 설명이다. 1권을 읽고 2권을 한참만에 읽는다. 사지는 않았다. 동생집에 갔더니 있길래 빌려 왔다. 그럼 형식은 어떨까. 먼저 금강경 본문을 실었다. 그리고 육조 혜능 대사의 주석을 주로 실었고, 간간히 야부의 주석을 실었다. 마지막에 자신의 견해를 실었다. 본문 - 육조 혜능의 설명 - 야부의 설명 - 자신의 설명, 형식이다. 읽으면서 내내 느끼는 것이지만, 저자는 육조 혜능의 설명이 파격이라고 하는 데, 내 보기에 저자의 해설도 충분히 현대적이고 파격이다. 하지만, 저자의 나름 해석을 읽으면서 와 깬다라는 느낌은 별로 들지 않았다. 어느 신문의 서평대로 발랄하기는 했다. 1권에서 저자가 금강경오가해를 추천하기에 비싼 돈 주고 구해서 읽었다. 거기에 많은 선사들의 주석이 달려 있는 데, 나는 그냥 큰 이유 없이 혜능의 해설이 마음에 들어 혜능의 해설만 읽었다. 오늘 2권을 보니, 마침 저자도 혜능의 해설을 주로 붙이고 있다. 내 눈이 특별하다고? 그 얘기 하려는 건 아니고, 내가 읽은 혜능의 해설과 저자가 옮겨 놓은 혜능의 해설이 어쩜 이리 다른가 ㅋ 나는 왜 책을 그렇게 건성으로 읽는가 ㅋ ! 이래서, 뭐 어느 시절에 한 소식 하겠는가.ㅠㅠ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불교는 전적으로 실천의 문제다. 그러기에, 저자의 말대로 육조 혜능의 금강경 해설은 읽는 내내 자꾸 책으로만 다가가려는 나에게 채찍으로 다가왔다. 방구석에서 한 소식하면 뭐 하겠는가. 또 하나의 맛 간 시골촌부 하나 더 생기는 것 밖에. 그런 점에서 점점 대승경전의 어려운 문구들이 부담스럽게 다가왔는데, 오늘 읽은 혜능의 해설이나 저자의 해설은 너무 고원하게만 느껴졌던 금강경이 조금 더 내 곁으로 다가 왔다는 반가움이 새로 생겨 좋았다. 말 그대로 그 두 분의 해설은 실천적 해설이다. 마지막으로 내가 좋아하는 문구 하나 옮겨 적는다. 응무소주이생기심. 어디에도 머무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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