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기침체와 저성장의 시대... 경쟁에 치이는 젊은이들은 욕망의 간소화와 행복의 다양화로 그 해결을 모색한다. 누구의 지시일까? 누가 제시하는 그림일까? 보이지 않는 위원회는 정신승리라고 불리우는 자아분열적 인내가 부조리한 것이라고, 어서 코뮌을 조직하라고, 진정한 삶을 직시하라고 이야기한다. 인간이라면, "왜?"라는 질문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가장 근본적인 질문 "왜 살아 가는가?" 지금까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인문학은 "행복"을 답으로 제시한다. "행복"을 위해 돈, 명예, 건강, 사랑 등 개별 구체적 가치들을 쫓기마련... 저상장의 시대 그 행복의 범주를 보다 애매한 것으로 그리고 점차 소박한 것으로 격하시킨다. 그리고 그 다양성이 "스스로"를 존귀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최면을 건다. 누가? 바로 "체제"가... 보다 영리해진 "자본"이... 그리고 더욱 더 진화할 소수의 독점적 "권력"이 말이다. 관념 속 허상에 불과한 "행복"은 결국, 억지스러운 자기합리화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예전 같았으면, 행복을 쫓도록 쉽게 마취되었을 법 하지만, 점점 설득력을 잃어만 간다. 과연, 더 행복해 질 수 있기는 한건가? 라는 구체적인 불안이 젊은 세대들의 주변을 강력하게 감싸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일부는 자괴에 빠지고 파멸을 선택한다. 한국이 젊은이들이 자살을 택하는 양태가 바로 그것이다. 공감의 결여가 부존재의 편리함으로 귀결되는 슬픈 현실 말이다. 일본의 젊은이 들이 어차피 행복은 요원한 것이라며, 보다 더 나아질 것 없다며 현실에 안주하는 모습이 또 다른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체제가 지시하는 "행복"의 최면이 문제라는 것, 그 최면에서 깨어나라고 강물에 뛰어든 젊은이들에게 심폐소생술을 펼친다. "행복"은 보편성을 가진다는 허망한 말보다, 꼬뮌을 조직하라고, 반란을 실행하라고 매우 구체적인 실천전략을 제시한다. 교조적 이데올로기 싸움이나 개량화된 정치활동을 비판하면서 매우 급진적이고, 근본적인, 순수한 형태의 행동을 도모한다. 선택은 개별 주체의 몫이겠지만, 현실의 불편을 이렇게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냉철한 논조로 설파하며, 구체적으로 대안을 제시한 사례가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