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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늑한 곡선의 미학 - 윤임수, 『절반의 길』
윤임수의 두 번째 시집인 『절반의 길』(천년의시작, 2017)에는 약한 자들을 향한 연민의 시선이 잘 드러나 있다. 이를테면 「절뚝절뚝 강아지」에서 시인은 산길에서 만난 강아지 한 마리를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이리 오라고 손짓을 해도 강아지는 슬며시 뒷걸음질 치기만 한다. 무엇이 그리 무서운 걸까? 시인은 “뒷다리 하나가 몸을 지탱하지 못해 대롱대롱 매달려” 가는 걸 발견한다. 인간에게 상처 입은 강아지이다. 얼마나 아팠을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강아지 다리는 저렇게 굳어버렸으리라.
“무거운 눈길이 허방으로 빠져들었다.”라고 시인은 쓰고 있다. “무거운 눈길”은 강아지의 눈길일 수도 있고, 시인의 눈길일 수도 있다. “오늘밤은 그 다리 살뜰히 끌어안고 다독다독 잠을 청해야겠다.”는 구절에 강아지=생명을 대하는 시인의 마음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시인은 이미 아픈 강아지로 변해 있다. 그는 스스로 아픈 강아지가 되어 강아지의 아픈 다리를 “살뜰히 끌어안고” 있다. 시인은 생명을 바깥에 있는 대상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존재로 생각한다. 강아지와 시인은 다르지 않다. 강아지가 아프면 시인도 아프다. 강아지의 아픔을 자기 아픔으로 받아들이는 마음에서 윤임수의 시 쓰기는 비롯되고 있는 셈이다. 예술로는 자연을 볼 수 없다는 시인 최종천은 “나의 시는 예술이기를 포기한다”라고 했는데, 예술이 무언지조차 잘 모르는 나는 하루하루 열심히 살자고 이를 악물었던 나는 내 시가 그런 내게 위로가 되고 내 옆의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힘이 되기를 바랐다 누군가는 백 년 뒤에도 살아남을 위대한 시를 쓰겠다는 굳은 다짐을 내뱉었지만 그때까지 살아 있을 자신이 없는 나는 그때까지 살아 있고 싶지도 않은 나는 그때의 시는 그때의 시인에게 맡기고 살아 있는 동안만이라도 나하고 같이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위안이 되는 시를 쓰고 싶었다 그런 생각으로 아름다운 사람들과 어울리다가 그런 생각으로 기꺼이 술잔을 넘기다가 밤늦게 비틀비틀 취해 집에 돌아와 전날의 기억을 송두리째 내려놓기도 하고 착한 아내에게 꽤나 혼나기도 했지만 지금도 그런 생각엔 전혀 변함이 없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기에 나의 시는 여전히 진정으로 모두가 따뜻한 세상을 향할 것이다 내 옆의 소중한 사람들과 늘 함께할 것이다. - 「나의 시」 전문 시인은 “내게 위로가 되고/ 내 옆의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힘이 되”는 시를 쓰고 싶어 한다. 시는 어차피 살아 있는 동안만 쓸 수 있다. “따뜻한 위안”이 되는 시는 따라서 살아 있는 시인이 살아 있는 사람들을 향해 던지는 사랑의 언어와 다르지 않다. 그런 생각으로 시인은 사람들과 어울려 기꺼이 술잔을 넘긴다. 전날의 기억을 송두리째 내려놓을 정도로 그는 제 몸을 돌보지 않고 사람들과 어울린다. 착한 아내에게 혼이 나면서도 시인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만은 포기할 수 없다. 시를 쓴다는 건 결국 사람들과 어울리는 삶을 표현하는 게 아닌가. “나의 시는 여전히/ 진정으로 모두가 따뜻한 세상을 향할 것이다”라는 시인의 선언에는 진심이 담겨 있다. “내 옆의 소중한 사람들과 늘 함께” 하는 삶 속에서 시인은 시를 쓴다.
「사람」이란 시에서 시인은 “내 시에도 사람이 가득했으면 좋겠다.”라고 소망한다. 실제 그의 시에는 사람이 많이 나온다. 술 좋아하고, 어울리기 좋아하는 시인 주변에는 항상 사람이 많다. 시인은 그들과 더불어 사람 사는 세상을 꿈꾼다. 사람 사는 세상을 무어 그리 거창하게 볼 필요는 없다. “며칠 만에 찾아가도/ 아따 참말로 오랜만이네/ 경쾌한 호들갑이 반겨주는 집”(「그 술집」)에서 뚝뚝 묻어 나오는 정을 시인은 사람 사는 세상의 근본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기쁘면 기쁜 대로, 서러우면 서러운 대로 그는 자기를 반겨주는 사람들을 찾는다. 그의 시에 가득한 사람들은 그래서 정이 넘쳐흐른다. 서로가 서로에게 내뿜는 정이, “생각만 해도/ 내 마음 뜨뜻하게 다시 스미고 번지는/ 그 곱디고운 것들”이 윤임수를 시 쓰는 사람으로 만든 궁극적인 이유라고 얘기할 수 있는 셈이다.
시인은 「작은 것」이라는 시에서 “작고 사소한 것을 더욱 존중하겠다”는 마음을 내보이고 있다. “환갑이 지난 우리 큰누님”은 작은 키가 더 작아졌고, “산 속 생활에서 오랜만에 내려온 해고자 친구의 어깨는 더 움츠러들”었다. 나이가 우리를 작게 만들고, 아픔이 우리를 움츠러들게 한다. 큰누님의 키는 왜 더 작아졌을까? 인생이 그만큼 아팠기 때문이 아닐까? 삶에 지친 해고자 친구를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에는 절뚝이는 강아지를 바라보는 연민이 담겨 있다. 시인이라고 삶이 아프지 않을 리 없다. 누구나 아픈 삶 한 꼭지는 지니고 있기 마련이다. 중요한 것은 그 삶을 들여다보는 마음이다. 윤임수 시에는 아픈 사람을 ‘아프게’ 바라보는 마음이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대청호 옆에서 가만 쑥을 뜯고 있던 어르신의 살짝 굽은 등을 본 이후 내게 봄은 곡선으로 다가왔고 그 등을 생각할 때마다 내 마음은 온통 아늑한 곡선으로 채워지고 있습니다. - 윤임수, 「곡선」 전문
대청호 옆에서 가만가만 움직이며 쑥을 뜯고 있는 어르신이 있다. 어르신 등이 살짝 굽어 있다. 때는 봄이고 쑥은 지천에 널려 있는데, 그 쑥을 뜯는 이의 등은 굽어 있다. 저 등이 다시 펴지는 날이 있을까? 작년에 뜯은 자리에 다시 나는 쑥처럼 저 등도 젊은 시절의 그날처럼 다시 꼿꼿이 펴질 수 있을까? 우리가 사는 시간은 직선으로 흐른다. 한 번 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 자연에 펼쳐지는 순환=시간도 똑같은 것이 반복되는 게 아니다. 다른 것이 끊임없이 반복됨으로써 자연 고유의 시간을 이룬다. 어르신이 지금 뜯고 있는 쑥은 인간의 눈에나 같게 보이지, 자연의 눈으로 보면 다채롭게 펼쳐진 생명 하나하나가 다르게 보인다.
시인은 어르신의 살짝 굽은 등에서 ‘곡선’을 본다. 그에게 봄은 곡선이다. 봄이 가면 여름이 오는데 시인은 왜 이 봄을 곡선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을까? 시간은 앞으로 흐른다. 그것은 어김없는 진실이다. 어르신의 등이 왜 굽었겠는가? 봄이 곡선이 되려면 어른신의 굽은 등에도 다시 봄이 와야 한다. 어르신의 봄이라? 해마다 같은 장소에서 쑥을 뜯는 게 어르신의 봄일까? 내년이면 또 다시 올 봄을 맞이하는 게 어르신의 봄일까? 어르신의 굽은 등에서 흘러 내려오는 곡선을 보며 시인은 어르신이 살아온 삶의 이력을 상상한다. 어르신의 봄은 그 이력들이 모이고 모여 펼쳐진 시간이다. 한 번의 봄이 아니라 수많은 봄이 이어져 어르신의 굽은 등을 만든다.
“내 마음은 온통/ 아늑한 곡선으로 채워지고 있습니다.”라는 구절에 나타나는 대로, 시인은 어르신의 곡선에서 제 삶을 이루는 또 다른 곡선을 발견한다. “아늑한 곡선”은 날카로운 직선과는 다르다. 날카로운 직선이 그 날카로움으로 사물과 대립한다면, 아늑한 곡선은 그 아늑함으로 사물을 보듬는다. 어른신의 굽은 등에 내려앉은 봄은 따라서 사물을 보듬어 안는 시심(詩心)으로 이어진다. 굽은 등이란 사물을 보듬어 안는 등이란 말이다. 누군가를 안으려면 우리는 등을 구부려야 한다. 뻣뻣한 자세로 상대를 안을 수는 없다. 어르신의 굽은 등에서 시인은 누군가를 안는 마음을 발견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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